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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묘청은 정말 진정한 개혁가 였을까?
    『묘청의 서경천도에 대한 두 가지 입장』묘청(妙淸)은 서경천도와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 정벌을 주장한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현재의 통념이다. 그런데 에는 묘청은 오직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정변을 일으킨 부도덕한 인물, 한마디로 권력욕에 눈이 먼 요승(妖僧)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중 어떤 것이 역사적 실체에 가까운 묘청의 모습일까?1. 지금까지의 통념1) 역사적인 배경이자겸의 인주 이씨(仁州李氏)는 문종 이후로 숙종을 제외한 순종, 선종, 예종, 인종등 무려 다섯 왕의 왕후를 배출한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다.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李資義)가 계림공(숙종)의 정변 때 희생된 적이 있기는 했지만 큰 타격은 입지 않았다. 이자겸의 딸이 숙종의 아들인 제 16대 예종의 왕후가 되면서 그의 집안은 다시 한번 위세를 떨칠 기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예종은 한안인(韓安仁)등 신진세력을 등용해 이척인 이자겸을 견제했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자겸은 자신의 외손이자 예종의 아들인 인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마침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한 기회를 맞는다, 예종이 죽으매 예종의 여러 아우들이 왕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다. 평장사(平章事)이자겸이 왕을 받들어 중관전(重光殿)에서 왕위에 오르게 했다. 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이자겸은 숙부들의 왕권도전을 물리치고 인종을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곧이어 한안인 등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예여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만들어 버렸다.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조정의 전권을 가진 지군국사(知軍國事) 가 되고 싶었던 이자겸은, 인종에게 자신의 집에서 임명장을 줄 것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임명 날짜까지 지정해 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비록 어렸지만 인종도 그런 이자겸의 전횡을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때마침 1126년 이자겸의 전횡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이제 열 일곱 살이 된 인종에게 이자겸 일다. 척준경을 포섭한 인종측근들은 척준경과 함께 이자겸 일파 제거에 성공했다. 이자겸은 유배당하고 그의 두 딸도 왕후의 지위에서 쫓겨난다. 이제 잠시나마 척준경이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2)묘청의 등장이자겸이 제거되고 나서 잠시 척준경은 이자겸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했다. 비록 그는 이자겸의 파트너였다는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전력을 문제삼기 어려웠다.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 라고 해서 처벌할 수 없다면 쿠데타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척준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했고, 척준경의 탄핵에 중심적인 인물이 정지상(鄭知常)이었다. 왕이 척준경의 전횡을 우려하고 있음을 간파한 정지상이 일을 벌인 것이다. 척준경은 자신의 기반이 없는 서경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인종과 서경세력 더욱 유착되어 갔다.그때까지 정지상은 시인과 문장가로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위상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고향인 서경에서는 삼성(三聖)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삼성이란 세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나머지 두 명의 성자는 일관(日官, 점술관원)을 맡고 있는 백수한(白壽翰,~1135)과 승려인 묘청(妙淸,~1135)이다. 비록 별명은 동등한 성자라도 삼총사의 지휘자는 묘청이다. 묘청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고려는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해 집대성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사회였다. 풍수지리설의 핵심은 땅의 활력 여부가 국가나 개인의 흥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 이다. 이에 따르면 땅의 기운이 약한가 왕성한가, 혹은 순한가 거스르는가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즉 땅에는 만물을 기르는 힘이 있어 그 힘이 왕성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한데, 땅의 기운이 왕성할 때는 그 곳에 자리잡은 국가나 개인이 흉하고, 그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서른 여섯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김부식 등 개경 문벌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해 9월 인종은 대신들에게 묘청, 백수한 등과 함께 임원역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새 궁궐을 짓도록 지시했고 공사가 시작된 지 3개월만에 새 궁궐(대화궁)이 완성되었다. 인종은 곧바로 서경에 행차하여 새 궁궐에 들어가 한동안 서경에 머물렀다. 이 때 묘청 일파는 인종에게 칭제건원을 건의하는, 한편 중국과 협공하여 금나라를 멸할 것을 청했다.3) 서경 반란이 당시 고려의 최대 현안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 문제였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고구려 때부터 한민족의 예속민 이었는데, 12세기 초 아골타가 부족을 규합하여 만주와 중국에 걸쳐 자못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묘청 일파에 의해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 주장이 제기되면서 서경천도 자체도 무산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은 곧바로 금나라와의 외교적/군사적 충돌을 야기하여 결국 정국의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기에 정국이 안정되어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개경의 문벌귀족으로선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금나라를 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 자신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분위기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기왕에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통일은 물론 금나라의 항복과 많은 나라들의 조공이 뒤따를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러나 막상 대화궁이 완공된 뒤에도 이런 일은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곳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고, 인종의 서경행차 길에 폭풍우가 일어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서경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서경천도가 무산되자 묘청은 인종 13년 (1135)정월에 서경의 분사(分司)시랑(侍郞) 조광(趙匡)등과 협의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어 나라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고 양부(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2. 나의 방향그렇다면 과연 묘청등 서경파는 단순히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만을 목적으로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것일까?인종 5년(1127) 묘청의 요청을 받은 국왕은 서경에 행차하여 15개 조항의 유신(維新)교서를 발표했었다. 풍수지리설에 관한 1항, 관리들과 관련된3.4.6.13항을 제외한 너머지 10개항은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이었다. 그 주요내용은 사치금지와 관기에 대한 규찰, 교육과 과거제도의 강화, 백성들의 세금부담 경감과 그들에 대한 침탈금지, 구휼기관 정비와 구휼기금 비축 등이다. 즉 인종은 묘청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권의 회복 혹은 정치기강의 확립과 함께 민생 구휼책을 통한 기층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개혁안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같은 개혁안이 발표된 후 묘청 등은 서경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농민의 유망을 불러온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그 주역인 문벌귀족의 온상, 개경에서 이 같은 국정 쇄신이 가능할 리 없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신진세력은 구세력인 문벌귀족의 근거지, 개경을 벗어나기 위해 고려인들이 건국 초부터 신봉해 왔던 지기쇠왕설을 유용한 이론적 수단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요컨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각종 개혁안을 추진함으로써 국정을 쇄신하려던 것이 그 실체였다.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묘청이 고려의 자주성을 찾기 위해 서경천도운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그 때의 개경 문벌귀족 세력에 대항하여 고향인 서경에서 세력을 모아 권력을 쟁탈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이 더 우선 일 것이다.묘청은 왕을 등에 업고 자신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서경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지상과 같은 지략가들이 동참하여 급물살을 띠며 천도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묘청은 당신 고려에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이나 이적 따위를 내새워 임금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지만 대동강에 기름을 넣은 떡을 넣어 임금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려는 유치한 모의가 폭로되어 김부식을 비롯한 문신들에게 비난의 꼬투리를 주었다. 여기에 인종의 소심함이 개경의 문벌귀족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격이 되었다. 문벌귀족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음이 당연하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에 맞서서 당시 떠오르는 신진 세력이었던 정지상은 묘청에 동조하여 개경세력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다.신채호는 이것이 유교 대 불교의 싸움이라는 평을 했는데 굳이 따져보자면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했던 사람들 중에 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묘청 한 사람 뿐이었다. 묘청이 주장에 특별히 불교와 관련 있는 이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리고, 묘청이 정말로 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지도 의문이다. 묘청의 금나라 정벌 계획은 너무나 엉성했다. 별무반 같은 군사 양성의 준비도 없고, 제나라와 협공한다는 표방도 실체가 없었다. 제나라는 금나라의 괴뢰국인데 이들과 구체적인 교섭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칭제건원의 자주성도 어느 정도만 인정할 수 있다. 묘청 일파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여 기성 세력을 꺾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 목표를 둔 권력 쟁탈이 그 실체이다. 서경천도 또한 전부터 있어 왔던 서경천도론의 재판이었지 결코 이 때 와서 처음으로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그리고, 이미 풍수 도참사상은 통일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 일대를 풍미한있겠다.
    인문/어학| 2003.06.13| 7페이지| 1,000원| 조회(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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