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일랜드와 애니메이션 길가메쉬 비교를통한 몸에 대한 물음.2003311456경영학부박 연 주*영화 아일랜드와 애니메이션 길가메쉬를 비교하게 된 이유우선 위의 두 가지는 모두 인간 복제 즉, 클론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 복제에 대해서 아일랜드와 길가메쉬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의 결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이 두 가지를 비교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따라서 인간 복제와 관련한 생체학적인 몸으로서의 인간과 원초적인 죽음의 두려움에 관한 본능으로서의 몸의 표상을 통해 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보고자 하였다.1. 아그넷과 오르가영화 아일랜드와 애니메이션 길가메쉬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과학만능시대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미래로 설정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부유층과 상류층의 체세포 일부로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이 기억조차 조종당하며 식생활, 운동, 영양 상태, 생체리듬을 수시로 진단받으며 언젠가 아일랜드라는 낙원으로 갈 것을 꿈꾸며 살아가는 아그넷이라는 집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그들에게는 아일랜드라는 낙원은 전혀 없으며, 그들은 자신의 생존기한이 자신의 장기나 몸의 일부를 필요로 하는 본체(스폰서)의 요구가 있기까지라는 것을 모른다.애니메이션 길가메시에서는 중동의 우르크 길가메쉬 무덤 유적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감지하고, 반신반인의 존재라던 길가메쉬 몸의 반을 차지하는 신의 유전자를 분석해내어 영생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헤븐즈 게이트’라는 연구시설을 설치한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천재적이며 유망한 과학자들을 모집하고, 연구의 위험성 등을 고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들의 배아줄기세포를 백업으로 보관하였다. 이 백업보관 장소의 명칭은 ‘오르가’ 이다.위의 두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발명체로서의 몸인 복제 인간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는 인간을 관철할 수 있다는 점이다.인간이 궁극적으로 생명공학을 발전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겨울에 한창 화제가 되었었던 배아줄기세포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대홍수 이후에 살았던 인물인 반신반인의 존재 우르크의 왕인 ‘길가메쉬’는 자신의 친구인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 자신이 완전한 불멸의 신이 아닌, 인간의 피가 섞여 필멸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생을 얻고자 머나먼 여행에 나선다. 이 밖에도 고대의 여러 신화에는 immortal life를 얻고자 했던 영웅의 이야기가 여럿 존재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불멸의 삶은 단지 신들에게만 관련된 것이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인 숙명을 안고 가야한다고 생각해왔지만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두려움)은 모두 공통적인 것 같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실제로 immortal life를 얻기 위해 다양한 생명공학 기술을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실제 ‘라엘리언 무브먼트’라는 종교집단은 그 산하에 ‘클로네이드’라는 생명공학연구시설을 설립했다. 그들은 지구인들은 모두 우리보다 몇 만년이나 더 발전된 외계인의 생명공학기술로 탄생되었으며, 우리도 그들과 같은 기술지식을 따라 영생을 얻고, 항상 젊고 생생한 몸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화려하고 꿈에 부풀은 말로 포장되어있지만, 역시 이들의 주장 일면에는 점점 노화되어 가고 기능이 퇴색되어가는 몸에 대한 거부 그리고 필연적인 엔트로피 법칙에 의거한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항상 젊어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필사적으로 육체에 더욱더 매달리려고 하는 욕망으로 발현된다. 이렇게 ‘몸’ 그 자체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플라톤도 그랬고, 유다복음에 표현된 예수가 그랬듯이, 번뇌와 고민을 주는 육체로서의 몸 그 자체는 자유로운 영혼을 속박하는 감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몸’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실상 인간의 속성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오히려 후자 또한 ‘죽음’에 대한 강한 사유의식 덕분에 생겨난 철학적 이론이고,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자아 만족적인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영화에서의 ‘아그넷’과 애니메이션의 ‘오르가’도 이러한 필연적인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2. 또 하나의 나의 ‘몸’을 발견하다.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은 두 남녀 간의 사랑의 산물로 인해 탄생되며, 몇 억분의 일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났다고 배워왔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눈, 코, 입 , 신체 등을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에 오로지 하나 뿐인 나’를 사랑하라고 배워왔다.그러나 만약 남녀간의 성적 행위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얼마든지 탄생될 수 있고, 나와 유전자적으로도, 외관상으로도 100% 동일한 인간과 마주친다면 그 때에도 우리는 ‘세상에 오로지 하나 뿐인 나’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까?클로닝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이처럼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를 대면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클론으로 복제된 인간들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여러 가지 고뇌도 함께 말이다.‘아일랜드’에서는 자신이 진정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복제인간은 결국 아그넷이라는 집단에서 탈출해 그의 스폰서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복제인간과 마주치게 된 스폰서는 놀라서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려 버린다.‘길가메쉬’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과거 헤븐즈게이트에서 연구하던 어느 과학자들의 클론이라는 것을 알고 깊이 절망한다.(게다가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들이 돼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하여 더 큰 충격을 안겨준다.)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동기는 모두 다르지만, 영화에서는 그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호기심에 더 중점을 두는 반면에,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것에 대한 충격, 실의 , 그러나 그 상황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들의 심리 변화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두 매체는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 ‘만약 내가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면,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이 물음은 실제 현실적으로도 가까운 미래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말은 성립이 되기가 어려운 시점에서, 인간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육체인 이 ‘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일까?우리의 몸이 마치 과자나 물건을 찍어내는 공장에서 생산하듯, 다양한 복제품이 생산되면 어떨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인류의 존엄성과 신성성을 해치는 행위라며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지독한 인간의 오만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복제 양 ‘돌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동물의 복제에 대한 제재법률을 강력하게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동물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인간에 대해서만은 존엄성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를 한다. 마치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기타 동, 식물과는 다른 귀한 존재라는 폐쇄적이고 자만심에 가득 찬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지만 역시 복제 인간이 쉽게 탄생될 수 있는 시대라면, 그에 따른 혼란이 상상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문제도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라고 교육받아온 인간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이 더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심정일 것이다. 게다가 ‘아일랜드’의 경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몸이 손상 날 경우를 대비한 보험용으로서의 복제인간이 있다면, 그 복제인간을 단순한 상품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 대우해주어야 하는가에 따른 윤리적 가치관의 난관에도 부딪힐 것이다.(영화에서는 복제인간은 오로지 상품으로만 취급되고 있다. 이름도 모두 code number의 일련화 된 이름들일뿐)결국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몸’을 바라보아야 하는 문제는 개개인의 가치관에 일대의 혁신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3. 아일랜드와 길가메쉬의 결말두 매체는 클론이라는 동일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취하고 있다. 즉, ‘아일랜드’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 덕분에 아그넷에 거주하던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세상으로 모두 뛰쳐나오는 결말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길가메쉬’에서는 복제인간들인 주인공들이 제각각 자신들의 original에게 살해당하고 세상이 종말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취하고 있다.(‘아일랜드’에서는 오히려 스폰서가 자신의 보험용 인간에게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아일랜드’에서 감독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복제인간이 태어나고 그들이 상품으로 취급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는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노브고로드{경영학부2003311456박 연 주#상트페테르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계획되고 구획되어진 도시이다.1703년 표트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스웨덴으로부터 탈환하였고 그 뒤 러시아 절대왕정의 새로운 수도, 즉 유럽으로 열린 창(窓) 을 건설하기로 하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세운 것이 이 도시의 기원이다. 이어 1712년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이전해 오면서, 장대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유럽으로 열린 창 이라는 말 그대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상트페테르부르크를 흔히 러시아의 제2의 도시라고들 부른다. 이유는 옛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제일의 문화예술의 도시인 덕분이기도 하다.아마 사람들은 볼쇼이국립발레단 혹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의 이름들을 한두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또한 러시아 제일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그들의 저서에서 항상 배경으로 사용하였던 그 도시이기도 하다.이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철저히 수도 기반을 세우고 저 아름답다는 베네치아와 런던등을 모델로 철저히 계획적으로 도시가 들어서게 되었다.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을 모델로 하였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새로운 로마를 지향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운하와 아름다운 건축물들 유명하다. 북방의 베네치아나 물의 도시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름다우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지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상트페테르부르크 문화의 특징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대제가 서구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만든 계획도시이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데올로기가 모스크바 제3로마 라는 종말론적인 종교적 제국 전이 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신정 국가 로서의 면모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표트르대제의 페테르부르크로의 천대와 개혁은 이성의 시대 를 만든 서구의 근대성을 바탕으다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결국 공식적으로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유럽처럼 러시아도 절대군주의 의한 봉건적인 절대주의가 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이 제각기 결속을 다지기 위해 서로 혼인동맹을 맺는 것처럼 러시아도 유럽 사이에서 혼인동맹을 맺기 시작하였다.이처럼 의도적으로 서구 유럽을 모델로 하여 국가발전의 기틀을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은 서구 유럽의 문화특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많다.일명 러시아의 바로크문화의 황금기 시대라고도 불뤼우는 표트르대제 시대부터 예카테리나2세에 이르는 통치시대에 바로크양식은 건축, 음악 ,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모든 예술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대의 러시아음악에 대해.러시아 음악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어떤 작곡가를 떠올릴까? 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좀 더 클래식음악을 많이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림스키코르샤코프, 무소로그스키, 프로코피예프, 발라키예프까지 떠오를 것이다. 러시아에서만 이렇게 걸출한 음악가가 여러 명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모두 몇 세기 거슬러 올라가 표트르대제의 서구화정책으로 인해 서구의 고전 음악이 러시아로 유입되면서 그 서구의 고전음악을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감성으로 발전시켜 그 특유의 고전음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하면 서구의 서유럽부터 떠오를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 그러나 여기에 더불어 가장 나중에 발달한 러시아의 음악이 이들 지역에서 탄생한 음악 못지않게 오늘날 많이 연주되고 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음악이 되었다. 현재에도 클래식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유명한 러시아 연주자가 전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다. 소련시절 정책적으로 음악영재를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한 경향도 있겠지만 이들은 러시아 음악의 전도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흔히들 러시아의 음악은 매우 장중하고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러시아의 특유의 그 광활한 대지를 향한 , 보로진, 림스키-코르샤코프 와 같은 인물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러시아 음악가들은 제각기 자국의 전통적인 문학이나 신화와 같은 러시아인들만의 정서를 그들 음악에 결합시킴으로써 오히려 결정적으로 서유럽에게 러시아 음악이 영향을 주게 되는 역할을 하게 만든다.*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러시아 태생인 그는 세계 일류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들은 매우 어렵고 기교적으로 까다롭기로 유명하며 특히 그의 걸출한 피아노협주곡으로 많은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피아노협주곡 제3번은 듣는 이에겐 감동을 주는 음악이지만 막상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은 그 곡의 난해함 덕분에 레파토리로 잘 쓰지 않으려 하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 그 곡을 선정하기도 한다.그 후 그는 모스크바, 드레스덴, 미국 등지를 여행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만년에는 주로 미국에 정주하면서 작곡과연주자로 크게 활약하였다.그의 작품은 3개의 교향곡, 교향시, 관현악곡, 그리고 피아노곡 분야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피아노에 있어서는 그 악기의 극한까지 특성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그의 표현양식은 고전적인 기교와 낭만적인 선율을 효과적으로 전개시켰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진지한 인격을 겸비한 예술가였다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그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에 있어서의 후기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 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러시아 최초의 국립 고등 음악교육기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1862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이 초대 원장을 맡으며 세워졌다. 그 당시 교수진으로는 비에냐프스키, 루빈스타인, 아우어 등 당시 러시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유명 교수진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차이코프스키가 1회 졸업생으로 1865년 졸업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1870년부터 20년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눈부신 도약을 했는데 이를 이끈 것은 림스키-코르사코프였다.음악원에서 키운 제자들이 신 러시아 학파(작곡)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들 중 특히 리아도프와 글라주노프에 의해 음악원의 교육 프로그램이 정착되었으며 바로 이것에 의해 러시아 음악 신세대를 교육시키는 초석이 되었다.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20세기 들어서도 위대한 작곡가를 많이 배출했는데 스트라빈스키, 미야스코프스키, 프로코피에프, 스타인베르그, 쇼스타코비치, 스비리도프가 그들이다. 특히 러시아 지휘계의 인맥은 모두 이 음악원 출신이었다. 말코, 클리모프에 이어 므라빈스키, 일리아 무신, 예르빗 얀손스와 그의 아들 마리스 얀손스, 그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리 게르기예프, kbs 교향악단의 드미트리 키타옌코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업적을 일구었다. 짐발리스트를 필두로 하는 바이올린 계보와 소프로니츠키를 배출한 피아노, 그리고 마린스키 극장을 점령하고 있는 성악진도 발군의 실력을 견주어왔다.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많은 바이올린, 성악, 피아노의 대가들이 바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이니 이 음악원이야말로 러시아 음악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노브고로드끼예프 공국이 쇠퇴하고 있을 때 즈음하여 멀리 북서쪽에서는 노브고로드라는 도시가 세워졌다. 이 도시는 볼끄호프 강의 양쪽 제방위에 세워졌으며 , 이곳에서부터 모피와 며 10~11세기에는 키예프러시아의 수도 키예프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하였다. 11세기에는 볼호프 강가에 크렘린이 세워졌으며 강 건너에는 상업지구를 만들어 교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다.{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가 표트르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생겨난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노브고로드 시대는 비잔틴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시대였기 때문에 비잔틴정교를 수용하고 그에 따라 교회와 관련된 문화예술이 발전되었다. 노브고로드 화파 라고 불리는 이콘들과 교회건축이 바로 그 예이다.#노브고로드의 이콘 화파노브고로드는 러시아 서북쪽 일멘호수 근처의 볼초프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타타르인의 침입을 받지 않아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보다 유리한 작업 환경과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11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러시아 성상회화의 황금시기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들도 많다.1223년 몽고인의 침입에 의해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은 비잔틴과 발칸 반도 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으나 노브고로드는 13~15세기 몽고족의 침입을 모면한 까닭에 비잔틴에서 러시아로 전래되는 이콘 예술의 연속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그리고 엄격했던 인물 묘사는 보다 가볍고 밝은 표정과 자비스런 모습으로 바뀌었고, 색채도 무채색계열보다 좀더 밝은 색을 사용했으며 , 얼굴의 표정들도 보다 자연적이며 생동감있고 민족적 유형의 얼굴들로 전환되었다. 또 복잡하고 추상적인 상징주의를 피하고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하고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즉 이 지방에서 특히 존경을 받던 농경, 목축, 상업교역을 보호하는 성인을 많이 그렸다. 예를 들면 화재를 막고자 옛날 갈멜 산에서 불을 불러 내린 엘리아 예언자를 진홍의 배경에 반신상으로 그리기도 했고, 금요일이 교역시장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성녀 파라스케비(성 금요일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소피아 성당경영학부2003311456박 연 주# 동방의 로마 - 콘스탄티노플본래 고대 그리스시대의 식민도시였던 비잔티움에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이 도시를 정비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함으로써 천년역사의 화려한 제국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현재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한 곳은 터키의 이스탄불지역이다.터키라는 지리적 위치는 유럽의 대륙이지만 바다건너 아시아와 맞닿아 있다.즉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예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와 문화의 가교는 물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교차하던 곳이었다. 에게 해로 이어지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탄불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비록 역사상 수많은 민족들의 지배를 받으며 수난과 고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 위치상 이점은 인류에게 크나큰 역사적 문화유산을 발전시킨 공로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야만인들이 유럽을 암흑시대로 빠트리고 이슬람세력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짓밟을 때에도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도시의 성벽들 안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이 유지되었으며그 깊이를 더해갔다. 그 위치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은 다양한 문화를 녹여내는 용광로이자 100만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이곳을 방문하는 6세기 사람들의 입을 빌리면 언제라도 전 세계 72개국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다양한 문화의 교역로로서의 콘스탄티노플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콘스탄티노플의 위치는 동유럽의 끝 쪽에 자리 잡고 있고바다를 건너면 아시아대륙이 있다. 이처럼 그 위치상의 이점덕분에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지켜내면서도 다른 문화권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교차점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를 전개하면서도 이집트, 시리아, 이란 ,카프카스 지역의 다양한 토착문화를 흡수하였다.이러한 문화가 전파가 되는 통로는 주로 바다를 통한 중계무역을 통해 이루어졌다.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바다건너 동방문화권과 교역하여 산 물건을 다시 서유럽에 비싸게 파는 등 중계무역이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다.이와 같은 교역을 통해 자연스럽게 동방의 문화가 콘스탄티노플로 유입이 되었고 그리하여 다양한 문화를 녹여 내리는 용광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이리하여 비잔티움제국의 여러 문화유산들은 이러한 특징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예를 들면 건축에서는 동양의 사라센건축 양식을 차용하였으며 서양의 열주식구조의 동양의 돔 구조를 사용한 것 등을 들 수 있다.#콘스탄티노플 그 최후의 날천년의 화려한 제국을 자랑하던 비잔티움제국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문화의 교역로 역할을 담당했던 위치상 매우 전략적이면서도 중요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위치가 오히려 이로 인해 이민족의 침입에 자주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무역항의 중심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밀리기 시작했다.역사상 어느 국가의 멸망을 보노라면 항상 외부적인 문제보다는 내부적인 문제가 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비잔티움제국도 예외는 없었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안정적인 제국의 번영을 누러왔기 때문에 국가적 제도의 와해와 기강이 해이해졌다.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 귀족들이 비대해지면서 저마다 영토를 차지한다고 달려들면 납세와 병역의무를 지는 자영농계층이 몰락하기 마련이다. 귀족들이 토지를 더 많이 소유 하게 되면 할수록 그 토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세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국가적 재정난에 시달리는 것은 필연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잔티움제국도 예외는 아니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셀주크터키족, 페체네그족과 같은 국경 너머의 새로운 이민족이 끊임없이 침입해왔다.비잔티움제국의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황제는 이러한 이민족들의 위협에 맞서 서구 유럽에 원조 요청을 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서유럽의 ‘십자군운동’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십자군 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그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고 십자군 운동에 동참했던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무역항과 진기한 동방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한때 함락하기까지 했다. 비록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되찾기는 했지만 이미 쇠락의 길을 걷는 비잔티움제국은 다시 재기를 하려해도 번번이 실패만 하게 된다.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철옹성과도 같았던 메소타키온 성벽의 문을 실수로 열어주는 바람에 신흥 강대세력인 오스만투르크족을 이끄는 약관21세의 나이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무너져 내려버리고 만다.# 콘스탄티노플 최대의 유산 하기아소피아 성당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 이 하기아소피아성당은 가장 완벽한 비잔틴 건축물로 평가된다.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규모는 높이가 56 m, 동서의 폭 31 m, 남북의 폭 33 m 이다. 현재의 건물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축되어 538년에 봉헌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 건축을 완공하고 나서 “ 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감격에 겨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하기아 소피아성당은 안 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nave) 중앙에 4개의 대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대형 아치와 펜덴티브 구법(構法)에 의한 대원개를 덮고 있다. 동서의 긴 방향으로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대소의 반원개(半圓蓋)로 받치고, 남북 방향의 횡압은 대지벽(大支壁)(563 증설)으로 받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가 숨쉬는 곳 하기아소피아 성당역사학자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이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박물관'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로마 문화, 기독교·이슬람 문화까지 한곳에서 예전 모습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이 그 위치로 인해 다양한 문화의 교류가 있었던 덕분에 이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하기아소피아 성당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하기아 소피아는 궁륭(둥근 천장), 돔(dome), 집중식 평면구조를 핵심 요소로 하여 세워졌다. 당시로선 그 예가 흔치 않은 독특한 건축양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에게 해 연안에 나타났던 건축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에게 해 연안에서의 건축양식이 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아 비잔티움제국은 그리스로마의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평면구조는 그리스의 바실리카(직사각형 교회당) 양식을 좀 더 간결하게, 실제적 용도에 보다 적합한 구조로 개선한 것으로 가로·세로의 길이가 같은 그리스 십자형을 취했다.돌로 만곡된 천장을 표현한 궁륭 형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안지방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다시 돔으로 발전됐다. 마치 멀리서보면 천상을 향해 타오르는 촛불과도 같아 보이는 이 돔은 물론 하늘을 상징하는 것 이였다.#끼예프 공국에 건축양식을 전파하다.끼예프 공국의 블라지미르 대공이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 안나와 결혼하게 되면서 비잔틴의 황제 교황 주의적 통치 이념을 수용하고 988년에 비잔틴 정교를 수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끼예프루시는 비잔틴 정교를 수용하면서 문화적 교차로의 역할을 맡게 된다.10세기에 들어서면서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양식은 그때 막 창건된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으로 전파돼 그곳에도 소피아 사원이 세워졌다.러시아의 기독교화에 따라 비잔틴의 영역은 지중해 일대에서 우크라이나 초원으로 뻗어나가 모스크바까지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발칸반도에도 미쳐 그리스 정교회,불가리아정교회, 세르비아정교회 등이 생겨났다.# 하기아소피아 사원에서 모스크로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무너지면서 하기아소피아 성당도 일약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사흘 동안 정복자에 의해 파괴와 약탈, 방화, 능욕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의 도시’란 의미로 ‘이스탄불’로 바꾸었고, 소피아 사원을 모스크로 개조함과 동시에 도시 곳곳에 모스크를 지었다. 이콘의 벽이라고 불리우는 이코노스타시스는 석회질로 칠해져버리는 등 철저히 이슬람식으로 개조를 하였다.
#시대적 경제학 변천의 흐름#-목차-1. 근대 경제학 이전의 변천(1) 고대 원시시대에서의 경제생활(2) 중세시대의 경제생활(3) 중상주의(4) 중농주의2. 근대 및 현대경제학의 변천-주류경제학-(1) 고전학파(2) 신고전학파(3) 케인즈학파(4) 통화주의학파(5) 한계효용학파-비주류 경제학-(6) 역사학파(7) 제도학파(8) 마르크스주의 경제학3.나의 견해1.근대경제학 이전의 변천(1) 고대 원시시대에서의 경제생활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천연 과일이나 나무뿌리 등을 채집하는 한편, 야생 동물을 사냥해서 먹고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사냥을 하고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도구가 있어 야 했다. 그들은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또 돌로 도구를 만 들어 썼다. 구석기시대라는 명칭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돌을 깨뜨려서 만든 타제석기를 썼다. 그러다 점차 다듬어 쓰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다듬는데 있어서도 먼저 한 쪽면만 다듬어 쓰다가 이어 양쪽을 모두 다듬어 쓰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 요리도구로는 긁개, 밀 개 등,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일단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자, 도구를 만드는 기술 역시 발전하게 되었다. 가는 석기를 뼈나 나무에 꽂아 낫이나 작살처럼 사용하는 복합도구를 만 들어 쓰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나아갔으며, 일종의 과도 기로서 중석기시대를 상정해볼 수도 있겠다. 신석기 시대는 무엇보다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 즉 마제석기와 토기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갈아서 만들기 위해서는 숫돌이 필요했으며, 숫돌을 발명하기까지는 실로 많은 세월이 필요 했다. 그리고 토기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구운 것으로, 요리를 하거나 물건을 저장하는데 쓰였다. 실로 다양한 토기가 사용되었다. 전기에는 원시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를 사용했으며, 중기에는 빗 살무늬를 사용했으며, 그리고 후기에는 빗살무늬 토기의 바닥이 납작하고, 물결무늬나 번개 무늬세습되었다. 봉건제도에서 세습의 원칙이 도입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필요했던 주군은 종신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봉사해주기를 바랬다. 사실상의 세습은 처음에는 여론에 의해 다음에는 관습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규범으로 차츰 받아들여졌고 여기에 이의를 다는 주군은 종신의 불만을 살 위험이 있었다. 후에 봉은 세습이 됨과 동시에 그 양도도 가능해지는 추세였다. 그리고 주군과 종신과의 인적 유대가 강한 이 사회에서는 국가의 공권, 즉 왕의 권한이 분산되었다. 국가의 정치권력이 지방의 제후들에 의해 행사되며 비록 왕이 있다 하지만, 그 권한은 중앙에 한정된 것이었다.경제적인 면은 봉건사회는 본질적으로 농경 사회였으며 농업으로 모든 형태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농촌은 일정한 크기의 장원으로 구분되어 있고 장원의 안에서 사람들은 농경지를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다. 사회적인 면은 특권적인 지배층과 비특권적인 농민으로 나눌 수 있고 이들의 수는 피라미드식으로 피지배층이 많고 지배층이 소수였으며 인구의 대부분을 피지배층이 차지하였다.그후 봉건제적 생산 양식이 확립되자 생산력은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비록 고전장원제 아래서 농노가 영주에게 인신적으로 예속되고 가혹하게 수탈 당하기는 했으나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농민은 노동 수단을 비롯한 생산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사실상 소유하고 자신의 재량에 따라 농업을 경영할 수 있었으므로 농업 생산력은 증가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봉건적 생산 양식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소농경영은 고대사회보다 높은 수준의 생산력이 중세 사회에서 발전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소농경영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봉건사회의 생산력은 11세기 이후의 생산력 발전의 원천인 새로운 경작 방식이나 농업 기술의 발명과 도입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농업 기술상에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면 황소 대신 말을 사용한 것과 근대적인 멍에의 사용이었다. 원래 말은 속력이 빨라 작업 능률이 황소보다 나았터 상품을 수입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 은을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고, 수입한 상품보다도 많은 수량의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금 은의 유입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중상주의의 학설이 화폐차액론에서 무역차액론으로 발전한 것이다.이 이론에 따르면 국민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강해진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국민에 의해 노동력과 시장 및 군인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특히 수입된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더욱 더 제한되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귀중한 외환을 유출시키기 때문이다. 욕구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음식과 약품을 규제하는 사치단속법이 통과되었다. 또한 절약· 저축 심지어는 인색함이 덕목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만 자본이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상주의는 이윤을 보장함으로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훗날 중상주의는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4) 중농주의18세기에 한나라의 부의 원천을 농업 생산에서 찾으려 했던 경제 사상. 중상주의 정책에 반대한 이론으로 가장 알려져 있다. 중상 학파가 국력과 국가의 안전은 농업보다 공업과 교역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고 본 반면, 중농학파는 오직 농업만이 생산비용을 초과하는 확실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봄으로써 토지와 농업을 모든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에서 가치 ,잉여가치가 창출된다고 밝힌 것은 유통영역에서 이윤의 원천을 찾았던 중상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볼 수있다. 이들에 의하면 농업 이외의 생산형태는 농업생산물을 소비재의 형태로 바꿀 뿐이다.중농학파의 창시자는 루이 15세 때 궁전 의사였던 프랑수아 케네였다. 그의 대표 저서는 전체 경제과정을 최초로 도식화하여 보여주는《경제표 Tableau economize》(1785) 이다.케네는 이 저서에서 농업생산물이 계급간에 어떻게 순환하는 가를 다루었다.즉 케네는 사회계급을 생산계급,지주계급,비생산계급,무산노동자로 나누었다. 생산계급은 토지의 경작에 의해 매년 국민의 부를 재생산하는 계급을 말한 전체생산물이 각각 노동자계급의 임금, 자본소유계급의 이윤. 지주계급의 지대로 분배된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국민경제의 성장 잠재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특정 사회계급이 총생산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면 반듯이 다른 어떤 계급을 희생시켜야만 한다고 믿었다. 리카도의 여러 가지 이론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결정을 이룬 밀의《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48)에서 다시 전개되었다.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은 19세기 중반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K.마르크스는 그 가운데 노동가치론을 채택해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논리적 함축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잉여가치론을 발전시켰다. 잉여가치론은 인간의 노동이 모든 가치를 창출한다고 보기 때문에 노동만이 유일한 이윤의 원천이라는 윤리적 가정에서 출발한다. 또 한편 고전학파의 경제사상은 자유무역주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론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으로서, 그 내용은 모든 나라가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부문에만 특화하고 그 밖의 다른 상품들은 모두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동의 지역분화를 이루어 모든 나라가 완전한 우위를 점할 경우. 각 나라가 자급하는 것에 비해 보다 전세계의 생산규모는 반듯이 확대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비교우위론은 19세기 국제무역이론의 초석이 되었다.(2) 신고전학파신고전학파는 1970년대의 높은 산업과 인플레이션이 공존하는『스태그인플레이션(stagflation)』현상을 기존의 케인즈학파이론으로 설명하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에서 출발하였다.통화주의학파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적기여를 많이 수용하는 입장이지만 신고전학파는 케인즈 학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신고전학파의 이론적 뿌리는 고전학파에 있으며 동시에 통화주의학파의 프리드만모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있으며, 또한 그들은 고전학파의 주장처럼 장기-단기에 관계없이 총수요 관리정책이 무력하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수요를 창출해야 된다는 것이 케인즈이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케인즈의 이론들을 보면 대개 주요 관심사들이 자원의 적정배분과 가격의 결정과정 및 가치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가치의 창조에 직접기여한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데 관심을 가졌다.케인즈는 계측이 가능한 변수들을 주관심사로 삼았기 때문에 국민소득계정과 계량경제학의 발전에 자극을 주었다. 수리계량경제학이 케인즈이후에 꽃을 피우게 되고 또한 그것은 케인즈 경제학의 상징과도 같이 되었다. 그리고 고전학파에 비해서 한단계더 현실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케인즈의 공로라 할 수 있다.(4) 통화학파통화량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사상의 한 학파. 여기서 통화량이란 한 나라의 경제에서 주화· 지폐· 은행예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화폐의 총량을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일반적으로 통화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프리드먼과 그의 지지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지배적이었던 케인즈 학파와는 매우 상이한 거시 경제의 이론 및 정책을 주장했다.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라고 표시되는 피셔의 교환방정식이다.(위식은 언제나 성립하는 항등식이다.) 여기서 은 통화량이고 는 화폐의 유통속도, 즉 1년동안 평균적인 화폐량이 재화나 용역에 지출되는 횟수를 가르킨다. 는 재화와 용역의 평균물가수준, 는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양을 가르킨다.·는 재화와 용역의 총 화폐량(명목GDP)이다. 통화주의자들은 방정식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과관계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즉 고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V하에서 통화량이 증가할 때 사람들은 가 상대적으로 고정적이면 가 증가하고,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양이 증가하지 않으면 가 상승한다고 예상한다. 통화량의 변화는 생산· 고용 및 물가수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의 결과는 장기에 걸쳐서 때로는 다양한 기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통화주의자들은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 GNP를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공개시장 조작.
#사회적 합의와 갈등의 딜레마에 근거해 이라크 파병 찬반논쟁에 관한 나의견해2003311456 박연주이라크의 반미세력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최근에 미국은 자국에 돌릴 수 없는 추가파병을 한국을 비롯한 14개국에 요청하고 있다.이를 둘러싸고 우리나라는 명분 없는 전쟁이다. 혹은 국익을 위해 불가피 한 일이다 라는찬반의견으로 나뉘어져서 열띤 토론과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이라크에 파병을 찬성한다는 의견에는 국가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혹은 북핵문제와 관련해 한반도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근거를 들어서 찬성을 하고 있다.이를 사회학의 기능주의 관점으로 살펴 본 다면 이들은 사회간의 질서와 조화를 중시 한다는 가치를 우선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즉, 이들은 각각의 국가가 서로 충돌을 피하지 않고 최대한 합의를 보아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일으킬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피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하는가에 의미를 두고 있다.실제로 이들은 미국과의 분쟁보다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미국은 우리나라에게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고 만약에 파병을 거부했을 경우에 돌아오는 불이익을 약소국인 우리나라로선 감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은 우리와 혈맹이기 때문에 무조건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능론이라는 관점 자체가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유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날지언정 이들은 기능주의에 근거해 미국과의 현상유지를 통한 조화를 중시하고 있다.이에 반해 파병을 반대하는 의견은 주로 갈등론적인 관점을 가치로 두고 있다.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이상적인 가치를 어겨가며 파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 파병을 한다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꼭 보장받는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갈등론 에서는 갈등이란 사회질서의 하나의 표현인데 갈등이론에선 사회적 질서상태가 갈등이 있는 상태이고 그 갈등은 권력을 중심으로 생겨난다고 보고 있다.즉 이들은 권력을 구성하는 지배계층과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으로 사회 계층 구조가 이루어 진다고 보고 있다.지배계층은 희소한 자원과 부와 위세 권력 등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데 피지배계층은 그것들을 얻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고 그 갈등이 사회질서의 한 표현인 것이다.이를 파병반대에 근거해보면 미국이라는 지배계층은 전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 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초강대국이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