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왜 비극적 민족전쟁인가?Ⅰ. 들어가는 말Ⅱ. 한국전쟁의 시작과 그 과정 및 결과Ⅲ. 전쟁 중 민간인들의 피해상황ⅰ. 북괴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사건ⅱ. 거창양민학살사건Ⅳ. 지금의 우리가 바라 본 한국전쟁-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Ⅴ. 맺음말Ⅰ. 들어가는 말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50여 년 전의 당시 전쟁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수한 인명피해와 상처를 남겨주는 인간 최후의 발악이건만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눈에 총을 겨누고 수십 발의 총, 포탄을 던지고 피를 흘려야만 했던 지난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우리역사에 있어 비극이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해방 이후 불과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한국전쟁은 우리의 자의적인 의도 하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전’ 이라는 당시 세계질서가 만들어 놓은 열강들의 힘겨루기 상황에 우리민족이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것이었고 그 결과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진영에 의해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즉, 국제전이 이 작은 한반도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이름아래 전개됨으로써 한 민족이 두 파로 갈리어져 피를 흘리게 됐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생 결과 38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도 이 작은 땅덩어리에 두 정부가 고스란히 서로의 국방에 충실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전쟁의 위험에서 살아가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당시 고통 받았던 많은 피해자들 즉, 우리 민간인들의 현실을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없겠다. 앞서 강조했다시피 한국전쟁은 우리의 자의대로 치러진 민족전쟁이 아니었기에 전쟁 당시 무수한 민간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남쪽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좌파라는 사상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북쪽에서는 우파라는 누명이 그들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의 당시 무책임한 인명살상명령으로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했던 전쟁이었던가. 이러한 논지아래 다음에서 한국전쟁이 왜 비극적 전쟁이었는가? 라는 물음과 장비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6월 26일에는 의정부일대가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따라서 6월 27일 정부는 대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또 7월 16일에는 대구로 옮겨갔으나 다시 정부는 8월 18일에 부산으로 옮겨갔다. 한편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국 대사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한국문제를 건의하였다. 그 결과 인민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하고 북한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16개국의 유엔군이 조직되어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의 경과UN군의 참전이 결정되는 동안 대전까지 들어 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 영천, 포항 등지로 압박을 가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UN군 참전이 결정되면서 유엔군 총 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의 지휘하에 한국국군은 대폭 증강하여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전선에서 인민군을 몰아내면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었고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9월 28일에 재탈환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인민군을 섬멸하였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였고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전쟁의 결과1951년 7월에 정전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은 북한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자 우리국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UN측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남북통일의 여망을 다시 남긴 채 1953년 7월 27일에 전쟁이 중지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참담했던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매듭을 지었다. 한국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고 40,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민간인은 그 해 7월21일 북괴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생산 유격대원들이 나서 이틀 만에 소위 인민 재판을 열고 우익인사 2명을 학살하더니 그 수를 더해 가다 5일 째 부터는 그나마 재판도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하였다.사례3> 대전시 중구 목동 구 대전교도소와 중구 용두동의 지사층1950년 7월 20일 정부는 대전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때부터 수복되는 9월 하순까지 적치하의 대전은 인간사냥터가 돼버렸다. 우선 북괴군이 찾아 나선 것은 우익인사와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국군과 경찰관으로 이들을 대전교도소에 수감하였는데 그 인원이 6,000여 명이었다. 교도소 후문 쪽의 농사용으로 사용하는 구덩이 속에다 무참한 살육을 자행했고 총탄을 아끼느라 그랬는지 총제로 마구 찍어 살해한 듯 두개골이 파열되고 퉁퉁 붓고 멍이 든 200여 구 의 시체가 근처에 산재해 있었다. 취사장 옆에 있는 직경 1m짜리와 2m짜리의 두 개의 큰 우물에는 퉁퉁 불은 시체가 깔려있었다.사례4> 북한지역에서의 학살북한지역에서 북괴에 의해 자행된 학살 극은 민족의 동질성이나 동포애가 일시에 증발해 버린 유혈극이었다. 1950년 9월 하순 북괴군이 총 퇴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소위 반동세력으로 간주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북으로 패주했다. 북괴가 황해도 해주와 함경남도 함흥 등의 공산당에 지령한 처단자 리스트에는 현재교화소(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반동분자, 기독교 목사와 장로, 천주교 신부와 수녀, 공산당 공작원이 아닌 조선민주당 간부, 노동당원이 아닌 각급 학교교사로서 시찰대상에 오른 자, 월남한 사람의 가족으로서 시찰대상자 등이었다. 이로 인해 해주에서는 1,000여 명, 함흥에서는 2,000여 명, 원산에서는 1,000여 명이 집단 학살되었다.ⅱ. 거창양민학살사건1> 거창군 신원(神院)거창군은 경상도의 서북쪽 끝자락인 산청군에 연해서 위치해 있으며 군, 경의 통치는 주민들의 낮은 호응과 행정력의 취약함으로 인해 여전히 불안한 상태로 있었던 반면, 인근 산간에 위치하던 좌익 세력은 자신의 대열을 정비하는 대치기간을 거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5일 다시 신원지방은 2개월 여의 좌익통치아래 눌리게 되었다. 전쟁이 더욱 치열하게 되어가던 1951년 2월 초순 산청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제 11사단 9연대는 각급 지휘관들이 모인 가운데서 공비토벌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하달된 견벽청야 작전에 의한 연대의 임무와 각 부대에 대한 구체적 작전명령을 훗날 3대 대장 한동석은 이렇게 회상했다.『제 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적을 공격하고 제 2대대는 순천에서 산청으로, 제 3대대는 미수복지구인 신원면에 준동하는 ‘4백 내지 5백 명’으로 추산되는 공비를 소탕하고 산청으로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이었다. 이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연대작전명령부록에 첫 째,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 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 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는 명령이었다.』12월 5일 지서습격을 전후로 하여 신원면이 인민군 치하에 있었다고는 하나 산속에 거점을 잡고 밤에 내려와 식량을 요구하던 산사람들이 마을에 거주하며 살리가 만무하였고 지서습격 전후로 많은 청년들이 타 지방으로 피난을 가 있는 상태였지만 이러한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군 대대는 계속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토벌대는 11일 마을사람 모두를 이곳은 위험지역이니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다는 명목으로 신원국민학교에 모이게 하였다. 그런 후 군인이나 경찰, 방위대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탄량골로 몰아넣고 군인들이 총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당시 탄량골 학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임분임씨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군인들은 조명탄을 쏘아가며 시체를 확인했어요. 나는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더니 그냥 지나칩디다. 얼마 후 사람 소리가 나면서 시체 더미 위에 나무를 져다 날랐어요. 내 몸뚱이 위에도 나무를 올려 쟁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언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 미친 영향과 우리민족이 겪었던 고통을 이렇게 스크린을 통해 간접체험 함으로써 전쟁의 비극이 또 한번 이 곳 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부지런히 준비하여 나아가야 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는 우리국민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Ⅴ. 맺음말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전개과정과 그에 따른 당시 민간인들이 겪었던 비참한 죽음 그리고 오늘날 영화에서 시사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았다.양민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선량한 국민, 어질고 착한 백성, 양인(良人)의 뜻을 지니고 있다. 앞서 이야기 한 북괴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이나 국군에 의해 벌어진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선량한 민간인을 무분별하게 살해한 거나 다름없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무수한 인명피해를 낳았다. 추산에 의하면 북한은 인구의 28.4%인 272만여 명을 사망과 난민으로 잃었고, 남한은 133만여 명을 주로 사망자로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는 남한이 전체 사상자의 50%, 북한은 80%에 달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전쟁의 비인간적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5백 만 명의 전재민과 1천 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아 한반도 내에서의 대 인구이동을 발생시켰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한 민족이라는 핏줄을 잊은 채 적군과 아군이라는 이름 아래 총격을 해야 했고 어린아이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명령만 있다면 무참히 총칼로 죽여야 했다. 가족간의 해체를 가져오고 대한민국을 일시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오늘날 이산가족상봉이라는 특별방송이 방영되는 그 슬픔의 현장을 목격할 수 밖에 없는 원인제공을 한 전쟁이었다.남한과 북한이 휴전상태로 정전이 된지 벌써 50여 년이 되었다. 그 간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쌀과 소를 보내며 수 많은 손길을 뻗치고 양자간의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정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독일의 베들린 장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우리의 38선이 없 9
- 목 차 -Ⅰ. 들어가는말우리는 역사가들이 저술해놓은 역사서를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알고 이해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들 나름대로의 역사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내재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를 이해하기 앞서 그 기본바탕이 되는 역사관에 대한 내용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다음에서는 몇 가지 역사관에 대한 기본내용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역사이해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해 보고자 한다.Ⅱ. 역사관의 유형 순환론적 역사관순환론적 역사이해에 있어 세 가지 정보의 변형을 지적할 수 있는데 특정왕조와 문명을 순환 단위로 보는 것, 인도의 우주론적 순환론, 고대 중동인들의 상고주의적 관점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역사관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다는것, 그분이 역사를 일직선으로 인도한다는 것, 역사를 자신이 계획한 목적지로 이끈다는 것을 인정한다. 진보사상과 역사관진보사상은 오늘날도 강력히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 그 구조를 몇가지 들어보면 첫째, 진보사상은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미래에 대한 신념을 제공하며 불변하는 도덕적 가치를 수용하고 둘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점 셋째,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진보가 아닌지에 대하여 평가하는 기준으로 행복, 합리성 등이 있다. 역사주의 역사관역사주의의 중심사상은 모든 문화가 역사에 의하여 형성되기에 어느것도 과거와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철학파의 학설들을 바라볼 때 진리를 이론화해서 파악하는 것 뿐만아니라 그 철학자들이 살고있는 사회에서 비롯된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역사관유물사관은 역사이론으로 출발하여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이론으로까지 발전한 하나의 사상체계인데, 그것은 사관인 동시에 하나의 이론이요, 경제이론이다. 문명주의의 역사관문명주의 역사관은 문명자체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생성, 성장, 쇠퇴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연구들은 최근 발칸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갈등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Ⅲ. 맺음말올바른 역사이해를 하기 위한 노력Ⅰ. 들어가는 말우리는 역사가들의 눈을 통해 쓰여진 역사 저술서를 바탕으로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의 사실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전해내려오는 사료를 근거로 역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추측해보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역사를 서술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서술에 있어 모든 역사가들이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지않는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를 연구 함에 있어 필요한 사료들은 매우 다양하고 수많은 이론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분야 또는 어떤 이론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제 각각 이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이해하기 앞서 다양한 역사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 할 필요가 있다. 역사관은 당시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각 시대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따라서 역사관의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가장 먼저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다음에서는 몇 가지 역사관에 대한 대략적인 기본내용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될 인식태도에 대해 서술해 보고자 한다.Ⅱ. 역사관의 유형들 순환론적 역사관‘순환’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거나 했던 일을 일컫는 것으로 즉, 인간의 생애는 성장해서 성숙하고 결국 노쇠하여 죽는 유형을 나타낸다는 것과 농업사회에서의 역사는 자연의 일부로 본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 순환론적 해석은 과거 농업이 주산업이던 시기에 중국, 인도, 중동, 그리스-로마 세계에 널리 확산되어있었다.순환론적 역사이해에 있어 세 가지 정보의 변형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 특정왕조나 문명을 순환단위로 보는 것이다. 대중적인 윤리교육을 위한 실용서인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과 관리들에 의한 국가의 공문서가 그 대표적인 역사서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불변하는 도덕질서가 있다는 것과 인간의 행동유형은 반복된다는 것이다.)둘째, 인도의 우주론적 순환론을 들 수 있다. 한 주기는 대략 네유가(Yuga)즉, 네 시대로 되어있는데 각 시대의 앞에는 여명기, 이후에는 황혼기가 있는데 각 유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수명과 도덕성, 행복이 감소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사상의 결과 사람들은 계속되는 반복유형에 체념해야만 했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를 낳았다.셋째, 고대중동인들의 상고주의적인 관점이 있다. 역사가 황금시대로부터 점차 쇠퇴한다는 관점으로 이 때 체념보다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선의 세력에 합세함으로써 심판에 대비할 것이 강조되어 영웅적 행동이 고무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작가들도 황금시대를 회상하면서 상고주의적인 입장에 기울었다.순환론은 고대에 상당히 편만했던 사상체계였고 이후 각기 다른 역사 목표를 바탕으로한 사상체계를 통해 변형되는데 르네상스시대 에는 때때로 낙관론이 순환론과 결합되기도 하고,19-20세기의 니체, 슈펭글러, 토인비 등에 의해 특이한 형태의 순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기독교 역사관다양한 순환이론들은 한결같이 순환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거의 강조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역사의 종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다는것, 그분이 역사를 일직선으로 인도한다는 것, 역사를 자신이 계획한 목적지로 이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서도 표현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역사는 선과 악이 싸우다가 때때로 악이 싸움에서 이기기도 하는 전장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미래에 대한 경솔한 낙관론을 경계한다. 기독교적 역사관은 창조와 진행, 종말이라는 삼각 관계 속에서 시작과 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해야 하고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회복하기위해 오셨다고 본다. 즉, 그의 구속은 기독교적 역사관의 중심을 이루며 피조 세계와 인간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구원의 사역이었다. 기독교적인 사관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 나라 회복의 역사이다. 진보사상과 역사관진보사상은 오늘날도 강력히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다. 그 구조를 몇가지 들어보면 첫째, 진보사상은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미래에 대한 신념을 제공하며 불변하는 도덕적 가치를 수용한다. 둘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점이다. 역사의 정점에는 유토피아가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소망과 아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셋째,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진보가 아닌지에 대하여 평가하는 기준으로 행복, 합리성 등이 있다. 이 결과 진보사상은 역사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문화에 따른 가치의 상대적개념을 배척하게 되었다.진보사상과 관련이 있는 학자들은 볼테르, 흄, 몽테스키외, 존 로크, 콩도르세, 생시몽, 콩트 등을 들 수 있고 이러한 진보사상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비판을 받았다. 이는 물질적 진보는 인정하더라도 도덕적 진보는 논란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진보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현재를 후대에 대한 준비과정으로만 생각하는것에 심각한 도덕적 반대가 있었다. 역사주의 역사관일제시대를 통해 들어온 근대적인 교육제도들이 도입되면서 한국에서도 근대역사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현재 한국 역사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관이 역사주의 역사관 이다.역사주의는 서양 사상사에 거의 진보사상만큼이나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특히 그렇다. 역사주의의 중심사상은 모든 문화가 역사에 의하여 형성되기에 어느것도 과거와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철학파의 학설들을 바라볼 때 진리를 이론화해서 파악하는 것 뿐만아니라 그 철학자들이 살고있는 사회에서 비롯된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주의는 특수한 가치관들이 뿌리 내릴수 있는 근거로 민족을 강조하였고 민족의 차이로 인해 성향이 차이나는 이유는 주로 언어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이탈리아와 독일 통일의 배후에 있는 이념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에 일직선적인 발전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초기진보사상에 자주등장하는 인간의 완성이라는 역사의 목적은 역사주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역사주의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면 프랑스에서는 역사주의 이론이 생시몽시대 이래의 사회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국에서는 사람들의 행위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역사주의의 믿음이 19세기 말의 경제이론을 변형시켰다. 이태리에서는 헤겔주의와 함께 피코의 사상이 20세기 이태리의 가장위대한 지적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체의 미학과 역사철학의 배경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국가의 공동체적 인격성에 대한 역사주의의 강조가 히틀러의 국수주의적 생명철학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독일에서는 뿌리깊은 직관적 이해사상이 철학적 사조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실존주의 철학도 역사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것도 사실이다.
- 목 차 -Ⅰ. 유교 사상의 파괴와 마르크스1. 중국혁명과 유교사상의 파괴1) 유교파괴운동의 사회역사적 원인2) 신중국(新中國)이념과 유교의 파괴-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노신(魯迅)의 유교비판-『고사변』(古史辨)학파의 유교비판Ⅱ.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마르크스에로의 전환1. 노신정신과 노예성 비판2. 이대조의신유가적 도가적 세계관3. 곽말약(郭沫若)의「마르크스의 공자방문기」Ⅲ.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와 모택동의 혁명론1. 모택동의 중국혁명론 : 스탈린 노선의 거부와‘신민주주의’론2. 모택동의 중국화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관적 평가Ⅳ. 결론 및 나의 의견Ⅰ.유교사상의 파괴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1. 유교파괴운동의 사회역사적 원인⑴ 19세기초 이래의 불가피한 사회구조적 문제- 대관료-지주들의 강력한 지배에 의해 약화된 중앙권력은 빈궁화된 민중의 거대한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킴.⑵ 1840년의 아편전쟁이래로 서구열강으로부터 굴욕적인 수난을 받음.- 19세기말의 중국은 아프리카의 선례에 따라 외세에 의한 분할점령당함.⑶ 1864년 이후 강력한 군벌관료들에 의해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남.- 근대화된 국가의 군사적 우월성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지만 유교적 사회의근본적인 개혁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⑷ 1895년 4월의 일본과의 시모노세키조약으로 1898년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남.- 유교적질서를 개혁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보수세력에 의해 실패.⑸ 1911년의 중화민국의 신해혁명- 그 형식적인 목표인 청조타도를 달성하는데에만 성공, 1912년4월 원세개에 의해 북경 에 중화민국정부가 생겨남.? 혁명사상가인 이대조(1889~1927)는 1916년 9월 낡은 유교사회의 죽음과 청년에 의한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공개적으로 선언.? 문화적 또는 정신적 혁명이 ‘극단적인 서구화’의 입장에 속한 지식인들에 의해 5.4운동 으로 나타남.2. 신중국의 이념과 유교의 파괴⑴ 진독수(陳獨秀)-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주도적인 개념에 기초하여 전통 윤리인 삼강륜과 전 통적이고 미신적인 생각들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유교가 ‘개인’이 사회적 단위가 되는 ‘현시대’의 삶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확신.- 법앞에서의 개인적 권리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옹호.- 인간의 “진정한 확증과 실천”은 ‘과학’에 의해 ‘논리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주장.- 과학과 합리적 이성을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봄.⑵ 호적(胡適, 1891~1962)- ‘개인주의’에 기초한 진독수의 유교윤리비판에 찬동.-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인형의 집』,『민중의 적』,『망령』(亡靈),『들오 리』,『사회의 기둥』등의 영향을 받음.- 전통 중국의 습관과 정통유교의 ‘비도덕적’습속에 반기를 듬.⑶ 오우(吳虞)의 유교비판- 정통유교에 대한 위대한 비판가 오우(吳虞1871~1949)- 일본에서의 법학공부, 근대유럽의 사회정치사상에대하여 잘 알고 있었음.- 유교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인 ‘효’를 매개로 해서 유지되는 가족제도와 국가제도를 문제삼음.- ‘효’, ‘충’, ‘제’ 와 같은 유교의 덕은 단지 군(君)과 부(父)와 장(長)과 상(上)을 위해서만 도입되었다고 주장.- 유교윤리에서의 계급차별의 확립에 따른 ‘예’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고찰⑷ 노신(魯迅)의 유교비판- 1918년 5월『신청년』 잡지에, 최초로 성공한 구어체소설『광인일기』(狂人日記)가 발 표.- 진화론의 영향을 받음, 중국의 ‘생존’ 내지 ‘존손’이 현실적인 문제로 보고 중국의 ‘국수 (國粹)의 포기를 주장.⑸ 『고사변』(古史辨)학파의 유교비판- 유명한 중국고문(古文)학자 전현동(錢玄同, 1887~1938)과 당시 1920년대의 젊은 역사 학자 고힐강(顧?剛,1893~1980)의 중국학에 관한 비판적인 연구업적.- 이들은 유교의 경전인 육경(六經) 및 역사와 신화가 아직 구분되지 않았던 중국의 고대 사에 대하여 비판적인 검증을 시도.- 문헌학적인 비판적 연구에 대해서 청조의 금문학파의 훌륭한 연구업적을 계승발전시킴.Ⅱ.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마르스주의에로의 전환1. 노신(魯迅)정신과 노예성 비판- 1898년 18세의 나이로 남경에 있는 노광학당(路鑛學堂)에 입학함으로써 서양학문을 접 함.- ‘진화론’에 근거, 중국전통사상의 ‘시대착오적인’ 또는 ‘복고적’인 역사관을 비판.- 극단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을 비판.- 마비된 정신 개조를 주장. (자주적이고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비된 중국인 의 정신을 깨우쳐야 한다.)- ‘아큐’를 통해 중국인의 노예근성을 비판.(아큐-유교적 양반사회에서 ‘극히 소중한’ 그 자신의 ‘성’(姓)마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조차 없게 된 날품팔이 노동자 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비참한 농촌생활과 더불어 뿌리깊게 맺어진 중국인들의 노예성을 비판.)- 자기가 확신하는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고, 또한 인도주의를 위하여 과감히 투쟁할 수 있는 ‘자립적 인간’을 높이 평가.2. 이대조의 신유가적 도가적 세계관- 그의 사상 근저에는 유교적인 인간론과 도가, 특히 장자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음.- 애국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염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함.- 「인간의 자연질서와 정치」에서 장자가 말한 ‘인간의 자연성’을 강조, 교조적인 독재주 의 비판.- ‘새 역사’와 ‘신민’ 창조의 전제조건으로서 이대조는 민중의 절대적인 ‘자립정신’을 강조.- 1917년 러시아 혁명, 그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중국에서는 최초로 1918년에러시아 혁명을 “세계 신문명의 서광”으로 환영.(중국에서 최초로 확신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로 등장.)3. 곽말약의「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 5.4운동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 시 작.- 유교사상의 기반에 ‘현세의 삶’에 대한 실천적 관심, 사회의 정의, 대동(大同)사회의 이상이 깔려있음을 밝혀보고자 유교와 마르크스주의간의 공통점을 끌어내려고 함.? 「마르크스와 공자의 대화」는 물론 이 두 사상이 서로 다를지라도 바로 ‘현세’의 ‘삶’ 에서 ‘공공의 복지’를 추구하려고 했다는 점에 그것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함.Ⅲ.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와 모택동의 혁명론1. 모택동의 중국혁명론 : 스탈린 노선의 거부와 ‘신민주주의’론- 코민테른은 일부의 민족부르조아 계급이 외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나라의 경우, 공 산주의자들이 민족부르주아와 연합하여야 하며 초기단계에 주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 스탈린은 1924년 민족부르조아 정당인 국민당의 강화에 힘을 기울임.- 1927년,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겐 획기적 전환의 해 ? 모택동의 위기상황극복을 위한 역사 적 역할 수행.- 스탈린, 국민당 군대에 의한 반제국주의 ‘무장혁명’을 강조,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대안은 무시.? 1927년 4월 12일부터 장개석에게 의해 학살되기 시작.- 1926년~1927년에 걸친 중국혁명의 실패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립하여 헤게모니를 손에쥐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김.∴ 스탈린이 중국공산당에 강요하였던 것은 가장 큰 세력자인 장개석을 위시하여 모든형태 의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는 단일한 항일세력 내지 항일군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이에반해 모택동은 일부 제국주의를 포함하여 장개석까지도 주요 적으로 하는 ‘민족혁명 전선’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항일통일전선에서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 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의 등장.①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두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고 함.②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들이 지도하는 낡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여 지도되는 신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③ 신민주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 광범위한 인민이 참가하여 제국주의, 봉건주 의,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을 준비하는 것.④ 신민주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프롤레타리아는 공산당이 지도)에 의하여 영도되고, 제1단 계에서는 각 혁명적 계급들이 연합독재하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창조를 적으로 한다 고 피력.? 신민주주의 이론은 중국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점령한 초기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의 정 신으로 표현되어, 노동계급 ·농민계급 ·소(小)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 및 기타 애국적 민주분자 들을 망라하였다는 인민민주통일전선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54년 9월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헌법을 채택하였을 때에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를 포섭 대상에서 제외하여 투쟁대상으 로 전환시킨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제기함으로써, 신민주주 의 단계는 끝났음을 선포하였다. 결국 신 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의 힘이 부족하자 중립적인 인사들을 포섭하여 중국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다.2. 모택동의 중국화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중국화된’ 마르크스주의 속에의 특징.① 모순의 무한한 분열전개의 세계관② ‘주체적 능동성’의 강조- 유교가 모택동의 사상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음.-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은 유교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됨.? 유교는 실제로 일종의 ‘유교적인’ 수양을 쌓은 지식인들의 독재인 덕치를 대변하며 ‘조화’의 세 계관에 의해 모든 ‘계층적 갈등’을 완화하고 그것을 자연법칙으로 설명.이에반해 모택동은 “대립의 통일”의 법칙에 따라, 모든 상태를 ‘의식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그것 을 끊임없이 문제 삼았으며 혁명적 실천을 수미일관되게 관찰하고자 함.- 모택동에 의한 ‘주관적 능동성’ 의 강조는 실제에 있어서 결국 인간의 의식, 상부구조, 생 산관계 등등에 제일의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결과로 귀착되었던 것.?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오랜혁명기간동안 혁명을 성공시킨 모택동의 ‘주관적 능동성’ 에 대한 높은 평가가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시키는 과정속에서도 과연 ‘필연적’ 이었고 ‘효과적’ 인 영향을 발휘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모택동 사후의 등소평 (鄧小平)체제의 ‘현대화’제일주의 노선은 분명히 이 점에 대한 하나의 부정적인 역사적 평가 또 는 대답이라고 하겠다
< 인간의 욕망과 고급소비와의 관계>Ⅰ. 개요최근 들어 소비시장 내 에서 고가품을 선호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명품 족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소비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기업들은 그들을 자기 기업의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최고급의 상품을 내놓고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에 도입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인간본연의 욕망과 소비심리라는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고가품을 소비하는데 있어 인간이 느끼는 만족감이 어떠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명품에 연연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에서는 먼저 대중사회에서의 소비의 의미와 과시적 욕구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론을 바탕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고급소비가 나타난 배경과 현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겠다.Ⅱ. 대중소비사회와 욕망창출Ⅲ. 고급소비의 배경ⅰ. 고급소비의 요인ⅱ. 고급소비의 사회적 기능고급소비의 요인, 기능에 있어 다음과 같은 학문적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의 좀바르트와 미제스는 고급소비의 요인을 인간의 사치와 사랑, 혁신에 대한 욕구로 보고 이는 자본주의 시장과 자본형성에 기여, 사치재를 대중화시키는 경제적 효과로 보고 있다. 경제 사회학의 베블렌은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욕구로 보고 자신이 속한 귀족계층의 확인, 명성과 체면 유지수단의 기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회학 부르디외와 보드리야르는 고급소비는 하위계층과 구별 지으려는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상류층의 우월성 확인, 하위계층과의 사회적 차이확인의 기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학의 매크래켄은 지위구분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상류계층의 지위확인과 타 계층과의 지위차별화 수단의 기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Ⅳ. 고급소비에 따른 희소성과 과시성의 효과Ⅴ. 고급소비 추세 현황최근 가전업계를 비롯해 자동차, 의류업계에서 가장 뚜렷한 고급형 제품들이 증가하고 소비의 고급화 추세에 맞추어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고급화 추세가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분야는 주택산업이다.Ⅵ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점차 국민소득이 증가됨에 따라 대중 소비 시대에서 선진국 형 고급 소비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최근 이러한 소비형태의 변화로 여성들 사이에서는 유명 모 브랜드의 가방이나 의류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이 일반화 되어있으며 유명백화점내에는 시가보다 배가 넘는 화장품 판매 매장이나 고가 수입의류점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풍조는 실질적인 구매력이 있는 성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 까지 전이되어 유명브랜드 선호현상이 증가하고 있다.경제가 성장함으로써 우리는 생존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삶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누릴 수 있을까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삶의 개선을 추구 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양식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행위가 바로 인간의 소비행위이다. 앞서 논한 고급소비 풍조는 이러한 세태를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급소비풍조가 급증하는 또 다른 이유를 인간 본연의 욕망과 연관시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관계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타인과 나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를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이러한 인식과정을 우리는 주로 소비활동을 통해 드러낸다. 즉, 타인에게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기 위해 남과는 다른 소비활동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길 원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가품 소비행위인 것이다. 소위 과시 욕구를 표출해 내고자 고가의 제품을 소유함으로써 남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앞서 말한 내용을 정리하면 과거와는 달리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우리는 소비에 있어 질적인 추구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이러한 소비행태의 내면에는 인간의 과시욕구가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개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에서는 관의 변화이다.이러한 대중소비사회에서 개인은 소비인간으로 된다. 즉, 소비나 레저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표 그 자체이며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 된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는가? 그 경쟁위에서 생활이 설계된다.소비인간의 행동특성들 중 제일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쾌락주의 인데 이러한 소비를 통하여 즐겁게 살아보자는 의식은 여러 가지 상품을 끝없이 사려고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소비행위는 우리의 구체적인 감각, 신체적 욕구, 미적인 취미 등이 담겨지고 있는 구체적인 행위인데 오늘날에 소비는 인위적으로 자극된 환상의 만족이며, 구체적인 진정한 자기로부터 소외된 환상의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Ⅲ. 고급소비의 배경ⅰ. 고급소비의 요인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J.Baudrillard, 1970[1998])는 개인이 생존하고 있고 살고 있다고 느낄 때는 초과분과 여분을 소비할 때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처럼 단순한 이유 때문에 모든 사회들은 지금까지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언제나 낭비하고 탕진하고 소모하고 소비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비는 ‘소모’ 즉,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데 이때 소비는 특수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논리로 볼 때 낭비는 소비의 역기능으로써 비합리적인 찌꺼기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기능을 지니는 생산적인 낭비가 된다.한편 좀바르트(W.Sombart)는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1913[1997])에서 인간의 사치와 사랑을 자본주의 기원과 발전의 중요한 원천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유럽귀족의 사치와 성적탐욕이 자본주의의 모태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근대세계는 사치를 위한 낭비정신으로부터 발생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생산주의관을 가진 진보경제학자들 조차도 사치가 자본주의적 경제형태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들이 무엇보다도 사치를 인정한 것은 그것의 시장형성력 때문이었다.사치에 대한 좀바르트의 사고는 베블렌(T.Veblen)의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연구와이 계급분화와 계급구조를 유지하는 기본원리라고 보았다. 부르디외는 인간의 소비행위를 “사치취향”으로 구분한다. 사치취향이란 사물에 대한 절대적 필요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자유가 보장해주는 용이함을 의미하며, 필요취향은 글자 그대로 필요의 산물로 바로 그 필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한편 보드리야르(1970[1998])역시 소비를 사회적 차이를 강조하는 하나의 계급제도로 파악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소비의 기회를 갖지 못하지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일한 재화와 동일한 생산품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회적 차이, 지위 혹은 서열에서 발생하는 차별이 완화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인류학자 매크래켄(G.McCraken,1998[1996])에 따르면 이제는 더 이상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른 부의 차이를 물질문화를 통해 식별하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최신유행이 맹위를 떨칠 때에는 필요한 취향과 재원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최신의 혁신물을 소유해서 그것을 지위목적에 이용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지위가 낮은 소비자들 측에서 모방행동의 폭발이 있었다. 계급제도가 잘 확립되어 있는 유럽은 언제나 의복의 유행이 궁정에서 시작해 하위자의 모방과 상위자의 차이라는 이중의 엔진에 의해 귀족, 신사계급, 중간계급, 하층계급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의 지위표지를 차용하기 시작하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새로운 지위표지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회학자 짐멜(G.Simmel,1904)은 이를 "트리클다운효과(trickle-down effect)"라 불렀다.따라서 이제는 사실상 모든 지위표지가 부유한 사회집단에 의해서 모방 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상위집단은 모든 제품범주에서 새로운 혁신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위가 높은 집단이 새로운 혁신으로 옮겨가면 이것도 또한 바로 하위집단이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동이 다시 필요하였다.결국 유행체계의 도래가 모방의 가능성을 열었고, 모방과 함께 고색이라는 상징의 상실이 일어났스타일과 소비생활로 충족되어 질 수 있다. 희소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자일수록 새로운 브랜드가 출시되면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에 빠르게 그 상품을 구입하여 소수의 구매자 집단으로서의 만족감을 느끼고자 한다. 반면 그 상품이나 브랜드가 대중성을 띄게 되고 따라서 희소성이 희박해지면 구매욕구가 줄어들게 된다.사치품의 경우 희소성은 구매를 유도하는 중요한 상품 특성중의 하나이다.한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일반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증대됨으로써 이전의 고가 사치품들이 대중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중성에 의한 명품으로서의 가치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사치품 마케터들은 프레스티지 가격을 적용시킴으로서 소수의 소비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을 꾀하기도 한다. 상품의 가격이 높으면 일반 소비자들은 구매하기가 어려워지고 따라서 그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한다는 것이 지위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지는 것이다.드물거나 희귀한 물건일수록 명성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한적으로 생산되고 공급되는 상품일수록 소비자들이 느끼는 가치와 선호도는 높아질 것이다. 상품이 독특하거나 고가일수록 그러한 희소성의 효과는 증대된다(Verhallen and Robben,1994). 즉 고가 사치품의 배타성이 구매능력이 있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희소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하는 것이며 높은 가격과 희소성이라는 고가 브랜드와 상품의 특성이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유발하는 것이다.ⅱ. 과시성의 효과사치품소비에 있어 과시적 동기는 베블렌의 이론에서 설명되어졌듯이 상류층의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부와 계층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가품을 구매하는 것에 기인한다. 이것을 곧 베블렌효과라 하고 상품이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물건일수록 과시적 소비니즈가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외관적으로 보이는 의류나 자동차 등에 대한 소비를 할 때에 자기 과시적 성향이 강한 소비자는 고가의 사치품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브랜드나 제품이다.
辛亥革命의 展開머리말Ⅰ. 혁명운동의 흥기1. 손문의 혁명운동과 흥중회2. 유일학생혁명운동의 성장Ⅱ. 해외에서의 혁명운동의 발전1. 중국동맹회의 성립과 혁명이론의 정립2. 무장봉기노선의 추진과 동맹회의 분열Ⅲ. 국내에서의 혁명정세의 발전1. 청조의 신정, 예비입헌과 입헌운동의 전개2. 국민적 대중운동의 성장과 농민투쟁의 격화Ⅳ. 신해혁명의 발전1. 무창 봉기와 남북의화2. 남경임시정부와 원세개정권의 성립맺음말신해혁명은 1911년 10월10일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서의 신군(新軍)의 봉기에서 시작되어 1912년 4월 원세개정권(袁世凱政權)의 성립에 이르는 시기의 변혁 과정으로 넓은 의미로 만청왕조(滿淸王朝)의 이민족지배와 2천여 년에 걸친 전통적 황제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성립시켰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로 이루어진 중화민국은 근대 중국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해혁명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측면이 강조되어 실패한 혁명, 혹은 불철저한 혁명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다. 실패한 혁명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연구는 중국은 물론 일본이나 구미의 중국근대사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인데 이는 신해혁명자체가 20세기 중국사회의 변동이라는 거대한 ‘혁명’의 기원내지는 출발점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해혁명사에 대해 상당히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이에 전문개설서나 그 연구동향을 정리한 글도 매우 많은 수에 달하며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논점 역시 아주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논점만을 간단히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먼저 지적될 수 있는 점은 신해혁명의 성격자체의 규정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신해혁명을 손문(孫文), 동맹회(同盟會)등의 부르조아 혁명파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파악하는 것이 거의 일치된 관점이다. 하지만 사실상 연구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에 대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논쟁이 치열한 문제는 바로 ‘정통론(正統論;正統史觀)’과 ‘신정통론(新正統論;新正統史觀)’이라 불리 우는 손문-흥중회-동맹회 중심의 신해혁명론일 것이다. 이상 두 가지의 문제에 대해 간략한 개관을 했지만 신해혁명의 연구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논쟁점들이 산재해있다. 혁명파와 이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입헌파의 역할, 그 계급적 기반내지는 구성, ‘혁명의 주력군’으로 일컬어지는 농민대중이나 기타회당(會黨), 신군(新軍)등의 역할 등 여러 정치세력의 평가에서 반만(反滿)슬로건과 반제국주의의 문제, 여러 혁명조직이나 인물의 성격, 사상 및 동맹회와의 관계, 청조의 신정과 예비입헌에 대한 평가, 무창 봉기이후 각 지역별 혁명의 전개양상, 남경임시정부와 원세개정권의 성립, 신해혁명의 구체적인 성과, 신해혁명기의 사상적 조류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하의 본론에서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Ⅰ. 혁명운동의 흥기1. 손문의 혁명운동과 흥중회- 1866년 광동성 향산현(香山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남.- 서구 지식인으로서 전통적인 반만정서(反滿情緖)에도 강렬한 영향을 받음.- 하와이 흥중회를 조직하면서 개혁론자에서 혁명론자로 변화.( 이를 근대중국 최초의 혁명단체로 보는데 있어 비판적인 평가를 제시하기도 한다.)- 광주봉기의 실패 후 서구의 새로운 사회사조에 접근.( 삼민주의(三民主義)사상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 개혁파와의 연계모색, 1900년의 의화단사건을 전후로 이홍장의 황제로의 추대에 의한양광 독립의 음모를 꾀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혜주봉기를 일으킴.( 외부적 자금두절로 실패, 이후 손문은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직과 자금모집을 위한 활동을 추진.)2. 유일학생혁명운동(留日學生革命運動)의 성장- 의화단에서의 충격적인 패배와 당재상(唐 才 常 )등의 장강(長 江 )유역에서의 자립군(自立軍)봉 기의 계획이 실패 반청(反淸)혁명사조가 급속히 확산.거법운동(拒法運動)과’거아운동(拒俄運動)? 거아운동의 실패로 혁명사조의 급격한 확산을 가져왔고 투쟁의 방향이 집중적으로반만을 향하게 됨.- 화흥회> 1903년 11월 황흥, 송교인(宋 敎仁), 유규일(劉揆一)등 유일(留一)학생이중심이 되어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에서 설립한 혁명조직.광복회> 1904년 겨울 상해에서 설립된 조직으로서 복고회(復古會)라고도 하였는데 회장채원배(蔡元培)외에 장병린(章炳麟), 도성장(陶成章), 추근(秋瑾), 서석린(徐錫麟)등이중심인물이었고 ‘광복한족(光復漢族), 환아산하(還我山河)를 구호로 하여 주로 강소,절강 지방에서 지식인과 회당을 연락하여 반만 혁명을 추진.Ⅱ. 海外에서의 革命運動의 發展1.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의 성립과 혁명이론의 정립- 1905년, 중국동맹회의 성립으로 신해혁명의 획기적인 중대한 전화점이 됨.(성립배경에 손문의 일본행이 결정적인 계기가 됨.)- 1905년 7월 일본에 도착한 손문은 당시 혁명운동의 중심인물인 황흥, 송교인, 진천화, 장계등과 만나 연합결성준비회(聯合結成準備會)를 열어 감숙성을 제외한 18성의 대표가 참석, 중국동맹회 라는 공식명칭이 통과되고 구제달로(驅除?虜), 회복중화(恢復中華립)건립 민국(建立民國), 평균 지권(平均地權)이라는 손문이 1903년 이래 사용해 오던 16자 강령이 채택.- 동맹회의 성립 후 11월에는 그 기관지로서《민보(民報)》가 창간되어 혁명전선도 본격적인 체계 를 갖추기 시작.- 1906년에는 손문, 황흥, 장병린 들이 공동으로《중국동맹회혁명방략(中國同盟會革命方 略)》을 제정하여 혁명강령(革命綱領)의 해설과 기본적인 전략, 방침을 결정.?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손문의 삼민주의도 보다 명확한 체계를 갖춘 형태로 제시되어혁명파의 지도이론으로서 등장.2. 무장봉기노선의 추진과 동맹회(同盟會)의 분열동맹회의 성립 후 혁명파는 조직의 확대와 선전활동이외에도 본격적인 반청무장봉기를 추진.1) 봉기추진과정?1906년 12월 호남과 강서(江西)의 교계(交界)지역인 유양, 예릉,에 동맹회남방지부를 조직한 것은 이러한 전환의 표시.?남방지부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것은 1910년 2월의 광주신군(廣州新軍)의 봉기, 1911년 4월의 광주황화강봉기(廣州黃花岡蜂起)? 800여명의 회원만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그야말로 동맹회의 전력을 쏟아 넣었던 것이 었는데 자금과 무기반입의 지연, 계획의 누설에 따라 불충분한 준비 하 에서의 발동과 청조 측의 대비 등에 의해 86인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게 됨.2) 동맹회의 분열원인- 동맹회는 회원간의 국수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음.- 동맹회의 운영자체가 조직보다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원인.(1907년 2월 국기(國旗)의 제정을 둘러싼 손문과 황흥사이의 갈등, 장병린, 장계, 송교인등의 손문 비난, 혜주봉기의 실패 후 무기구입을 둘러싸고 일어난 손문에 대한 비난, 독자적인 손 문의 태도에 대한 회원들의 반발.)? 동맹회 내부의 분열은 무창 봉기 이후 혁명의 진행과정 속에서도 혁명파의 단합과 통일적인 행동에 상당히 장애가 되었으며 그 결과 혁명파가 권력을 장악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 을 가로막은 중대한 한 요소가 되었다. 실제적인 혁명의 전개직전에 혁명파는 그것을 지도 할 만한 통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Ⅲ. 국내에서의 혁명정세의 발전1. 청조의 신정, 예비입헌과 입헌운동의 전개- 의화단의 참혹한 패배 후 청조는 조장국전(朝章國典), 이치민생(吏治民生), 학교과거(學校 科擧), 군제재정(軍制財政)의 인혁성병(因革省倂 )시행. 이것이 바로 신축(辛丑, 1901년)신정의 발단- 신사층은 정치구조의 전면적 변혁을 요구하는 입헌론을 활발하게 주장하기 시작.( 이들의 활동은 입헌국인 일본이 전제국인 러시아에게 승리한 러일 전쟁 이후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 게 되었다.)- 1906년 9월에는 ‘방행신정(倣行新政)의 상유를 내림으로써 입헌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 청조의 예비입헌 : 일본의 경우를 모방하여 헌법반포 및 의회의 개설이전에 황제원단체를 엄격히 탄압,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함.이에 입헌파의 입헌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감. 청조에 의존하여 기존질서를 유지하며 개혁 을 꾀하던 입헌파 중의 보다 급진적인 일부를 혁명으로 전환케 하는 계기가 됨.2. 국민적 대중운동의 성장과 농민투쟁의 격화- 대중운동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바로 1905년의 대미(對美)보이코트 운동.? 학생과 일반하층대중이 근대적 국민주의의 자극 하에 전국적인 규모의 반제적(反帝的)민 족 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이운동이 갖는 중대한 의의였다.- 이권회수운동 (광권회수(鑛權回收)운동과 노권회수(路權回收)운동)? 입헌파로 대표되는 개명 적인 지방 신사층의 주도적인 역할 하에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로 전 개됨.- 이러한 운동 속에서 청조와의 충돌은 불가피 ?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 전국적인 농민투쟁의 확산 ? 항연항세투쟁(抗捐抗稅鬪爭), (창미풍조(?米風潮))- 농민 투쟁의 의의 ? 참가계층의 보편화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 고립 분산적이고 단기적이며 공통의 목표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것.Ⅳ. 신해혁명의 전개1. 무창봉기와 남북의화- 1911년 10월 10일의 ‘무창수의(武昌首義)’- 신군협통(新軍協統) 여원홍(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를 건립.? 국호를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고 개칭, 대내적으로는 가연 잡세의 폐지, 군인, 관료봉 급의 평균화, 기타금융, 재정의 안정책 등을 발표.대외적으로는 열강의 기존의 이권, 권리를 모두 인정하고 외국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 하되 청조를 원조하는 경우에는 적시하겠다는 입장을 선포.- 무창봉기의 성공으로 전국적인 혁명바람을 일으킴.- 혁명파의 한계점이 드러나게 됨. (통일적인 지도능력이 결핍.)? 여원홍을 중심으로 하는 무창집단과 정덕전, 탕수잠 그리고 상해도독 진기미(陳其美) 가 중심이 된 상해집단 사이의 권력다툼.- 남북화의의 제의 (원세개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할 것이라는 내용을 결의)- 무한 지역에서의 남북간의 전면적인 전쟁이 중지,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