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의 역사주의 방법은 어떤 작품이든지 그것을 낳게한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모든 작품은 반복될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른바 역사적 일회성을 지닌다. 따라서 작품을 이해할 때 작가와 작품의 역사적 배경, 사회적 환경,작가의 전기등 문학을 낳는여러가지 요인이나 체계와 관련시켜 문학을 이해하려는 방법이다. 근대적 역사주의 비평의 선구자는 19세가 쌩트뵈브와 이뽈릿 테느였다. 두사람의 방법은 서로 상당히 달랐으나, 당시 흥성하던 과학적 사고 방법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인과관계와 사실의 일회성 내지 확정서을 믿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였다. 쌩트 뵈브는 소위‘문학의 박물학’을 확립하고자 하여, 작가의 개인의 역사, 즉 전기를 이용하여 문학적 현상을 관찰, 해석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테느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문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인종, 환경,시대의 세가지를 들고, 이들 요인을 구성하는 제반 사실들에 입각하여 문학 현상에 접근한 방법을 체계화하였다. 오늘날의 역사주의적 방법은 훨씬세련되고 세분되어 문학작품에 관련되는 정보 자료들을 전부 참조하면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발전되었다. 그러한 참고자료에는 원전, 언어, 전기,명성과 영향, 문화,관습등이 잇는데 이중 중요한 항목은 작가의 생애와 외적 환경들, 특히 작가의 창작과정에 영향을 끼친 사실들에 비추어서 작품을 정밀하게 탐구하고 작가의 전생애의 문맥속에서 작품을 검토하는 이른바 전기적 연구방법이다. 역사주의적 비평가는 작가의 ‘의도’에 작품을 일치시켜서 보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조명하게될 모든 전기적 정보를 샅샅이 뒤진다. 작가의 정신적, 물질적 조건, 교육정도, 교유관계, 가족상황, 부채, 연애사건, 정치활동,그의주거지등 -요컨대 작가가 느꼇고 들었고 보았고 알았던 모든 것, 그리고 그의 사람됨의 모든것- 작품 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될 삶의 모든 정보를 수집, 정리한다. 작가의 생애연구를 통해서 비평가는 헬런가드너의 이른바‘작가의 성향’을 파악하고자한다. 다시말하면 작가의 언어상요과 주제의 선택이 발생하게 되는 그의 독특한 반응양식 및 사고의 패턴,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이념, 형식, 상징 및 이미지 등을 파악하고자 한다. 전기를 거쳐서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비평가에게는 단 한편의 작품도 역시 작가생애의 총체속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매우 풍요롭고 의미심장한 것이된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 작가의 생애는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작품개개의 총화보다 더 커진다. 작가와 작품의 이상적인 관계에대해 셰익스피어는 [피닉스와 터틀]에서 “서로가 별개이지만 구분되지는 않는다.” 라는 말을하였다. 이러한 전기적방법에의한 문학연구의 예로 이광수의 전기적 사실들의 조사, 분석을 통하여 그의 유,소년기의 원형적 체험을 고아로서의 체험, 엘리트로서의 체험, 약소민족으로서의 체험, 문학체험등으로 나누고 이에 입각하여‘무정’‘훍’등 그의 계몽주의 소설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들수있다.이와는 반대로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단지 전기와 역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며 예술과 삶에 본질적 차이를 두고 허구적 상상력에 관심을 갖으며 문학작품을 하나의 독립체로 여기는 문학연구 방법을 주장한다. 실제로 전기적 접근이 지닌 가장큰 위험성은 작가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이 작품에 대한 미적 평가를 대신하도록 부추킨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기적 접근을 반대하는 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논점은 작품이 자아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다듬어진 표현이라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다듬기 과정에서 뒤틀림 현상이 생겨나기 때문에 작품에서 전기적인 증거를 추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전적인 작품에서도 사실과 대조해보면 많은 왜곡과 실수가 발견되게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리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 하더라도 작품 그 자체에 있지않은 것이면 모든 지식을 무시하는 좀더 중대하다고 할 만한 과오를 범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둘이아닌 원효식 수행과 의상식 수행)제 출 일 : 2006년 05월 12일과 목 명 : 고전 문학사선 생 님 : 최 웅 선생님학 과 : 식물자원학학 번 : 20012340성 명 : 황 보 연목 차1. 서론2. 본론1) 원효 - 인물상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 불교철학 (일심, 화쟁, 무애)- 수행 (범인들과의 어울림)2) 의상 인물상 (흔들림 없는 이성)- 불교철학 (화엄종)- 수행 (불법의 고고함과 거룩함)3) 왜 노힐부득이 먼저인가 - 인간적 사유와 흔들림 속의 진리4) 어째서 함께 성불 하였는가 - 둘이 아닌 원효식 수행과 의상식 수행3.결론1.서론삼국유사「탑상편」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 범종, 불상, 사찰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에 대한 것이며 대표적인 것으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가 있다. 설화의 내용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아기를 가진 여인으로 변신한 관세음보살의 도움을 받아 성불하는 내용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모두 풍골이 범상치 않고 세속을 벗어날 기상이 있어서 서로의 좋은 벗이 되었다. 그들은 중이 되어 수행정진을 하다가 산달이 찬 여인으로 변신한 관세음보살의 방문을 받게 된다. 관세음보살이 하룻밤 묵고 가길 청하자 달달박박은 절이란 여인이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 하며 자신의 수행에 누가 될까 관세음보살을 거부하게 된다. 그에 반해 노힐부득은 어여삐 여겨 여인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와중에 산달이 찬 여인으로 변한 관세음보살의 아기를 받아주고 목욕을 시켜주며 금빛으로 변한 목욕물에 몸을 담가 성불하게 된다. 노힐부득이 여인의 방문으로 간밤에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한 달달박박이 노힐부득을 찾아가 진상을 알게 되고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가 그도 함께 성불하여 각각 미륵불, 미타불이 된다.노힐부득 달달박박의 설화에서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삼국유사 「탑상편」의 성격상 불교 문화사의 내용으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득불의 자세를 보여주려 함이다. 판이하게 다른 수행모습을 지닌 두 승려를 등장시켜 참된 데 하나가 혜공 스님과 벌어지는 내기다. 다음은「의해」편의 ‘혜숙과 혜공의 삶’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매양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물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 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동을 누었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오어사라 이름 지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원효의 이야기라기에는 외람되다고 하기도 한다.지금 사람들은 원효는 똥으로 나오고 말았지만 혜공은 물고기가 그대로 살아나와 헤엄쳐 나갔다고 말한다. 조연으로 나오는 해동 불교의 좌장 원효의 완벽한 한판패다.또 다음이야기는 같은 「의해」편의 ‘말을 못하던 사복’조에 나온다. 사복은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잉태하여 낳은 아이인데, 열두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동이라 불렀다.어느 날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는 고선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원효가 그를 보고 예를 갖춰 맞았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소. 함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어떤가요?”“좋다”그래서 함께 집에 이르렀다. 원효더러 보살수계를 해달라 했다 시신앞에서 축원하였다.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사복이 “글이 번거롭군요”하더니, 고쳐서 말했다.“죽고 남이 괴롭구나.”혜공은 원효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사복은 사생아에 불과한 소년, 예를 갖출 줄도 모르는 아이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원효와 더불어 나가는 선문답 속에 원효는 벌써 나가떨어진다.그러나 우리는 사복의 처지에 오히려 원효의 손길이 미치는 넓은 세계를 그려보게 된다. 사동이라 놀림 받는 불쌍한 소년의 처지를 함께한 이는 원효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 불가능 할 것이다. 원효는 대체로 낮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① 일심사상 :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 (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② 화쟁사상 :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통 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③ 무애사상 :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애14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생각하여 중생과 나를 구별하지 않고 계율을 깸으로서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이는 곧 계율을 넘어 보다 깊은 본질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2) 의상 - 인물상 (흔들림 없는 이성)원효라는 인물에 대해 전해지는 만큼 의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몇몇 일화를 통해 그의 곧은 성품과 높은 수준의 도를 살펴볼 수 있다.「승고전」에 따르면 원효, 의상 두 사람은 중국유학길을 떠나던 중 당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큰비를 만나 길가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곳은 무덤이요, 그들이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유명한 해골바가지 사건이다. 그 다음날 비는 계속 내리고 길에는 물이 가득 고여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헌 집을 한 채 물색해 잠을 처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난밤의 일 자꾸 떠오르고, 눈앞에 귀신의 환영이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 원효는 탄식하면서 의상에게 말한다.“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원효는 바랑을 메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승고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또한 의상이 당나라 종남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승으로부터 단박에 인정을 받고 있다. 먼저 찍이 듣기에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마흔 개 치아 중에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세상에 내려 보내 복을 받게 한다면 어떻습니까?”뒷날, 선율은 천사에게 그 듯을 하늘님께 전하도록 하였다. 하늘님은 7일 동안만 보내준다 하니, 의상이 경배를 드리고 궁궐로 들여보내 모셨다.다소 괴이쩍은 이야기지만 의상의 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삽화는 사실37세의 의상이 중국에 이르렀을 때 물론 그는 화엄의 진수를 배우고자 갔지만, 벌써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지상사의 그 엄격한 훈련이 의상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의상은 흔들림 없는 이성과, 철저한 자기 자신의 기준과 수행에 엄격한 모습, 높은 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의상 - 불교철학 (화엄종)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불교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꽃 중의 꽃으로 정평이 나있다. 화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먼저 비로자나불은 만물의 중앙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는 것이다 화엄의 이사설 은 화엄사상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이것은 배달정신의 핵심을 설명하는 경전으로 감물단군께서 전달하신 영세위법(永世爲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하나를 잡으면 셋이 끌려오고 셋을 모아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집일함삼 회삼귀일(執一含三 會三歸一)로 설명할 수 있다. 이사설은 화엄의 우주관인 사법계(四法界=네개의 흐름계)를 말하는 것으로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로 나누어진다. 먼저 사법계관을 근거로 이법계관에 들어가고, 다음으로 이사무애법계관에 들어가고 최후로 최초의 사법계를 무애하는 사사무애법계관을 성취하는 것이다.화엄사상의 꽃이라 할 화엄일승법계도는 “하나 가운데에 모든 것이 있고, 여럿의 가운데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며, 여럿이 곧 하나 이다“ 는 곧바로 집일함삼 회삼귀일을 떠올리게 한다. 다였다.
신라 향가 와별곡 의 비교1. 서론 ……………………………………………………………………… p. 1(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 p. 1(2) 연구방법 ……………………………………………………………… p. 12. 본론 ………………………………………………………………………pp. 1 ~ 5(1)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중세로의 전환 …………………………………pp. 1 ~ 2(2) 처용설화 ……………………………………………………………… p. 2(3) 신라향가 ……………………………………………………pp. 2 ~ 3(4) 별곡 …………………………………………………………pp. 3 ~ 5(5) 신라향가 와 별곡 의 비교 …………………………P. 53. 결론 ………………………………………………………………………PP. 5 ~ 6※ 참고문헌 ……………………………………………………………………P. 6과 목 : 고전문학사선 생 님 : 최 웅 선생님학 과 : 식물자원학과학 번 : 20012340성 명 : 황 보 연1. 서론(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처용’이란 이름이 들어간 노래에는 신라 향가 , 별곡 , 그리고 의 셋이 있다. 물론 뒤의 두 노래는 신라 향가 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에 대해서는 몇 편의 연구만 있고,) 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은 있으나 단독 연구는 없는 실정이다.별곡의 하나로서 는 조선시대에 발간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작품이며, 후대인 조선조 시대에 와서 처용춤으로 바뀌어져 노래는 없어지고 춤만이 남아 있는 등 변화가 많고 전승기간이 오랜 작품이다. 는 신라 향가 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시대에 따른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신라 향가 의 해석을 위한 목적으로만 를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으며 가 지닌 의미를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2) 연구방법본고에서는 향가가 향유되어지던 시대에서 별곡이 향유되어지던 시대로의 전환, 즉 를 살펴봄으로써 별곡 발생의 배경을 살피고 신라 향가 와 별곡 를 살펴본 후 비교하여 보겠다.2.본론(1) 한국의 중세로의 전환신라 향가 와 별곡 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우선 향가와 별곡이 향유되던 시대와 그 변천, 향가에서 별곡의 형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 등을 알 필요가 있다.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중세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고려는 왕건 가문등 개성상인과 신라의 잔여귀족세력, 지방호족들 3대 세력에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권이 집중된 귀족사회로서 농민들은 농노의 형태로까지 전락하게 되었으며, 당나라 유학생들의 급증과 당나라 문화의 유입, 불교 등으로 인해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획일화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고려후기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약 1세기동안 정치적인 제도나 습속 등에 걸쳐 소중화의 길을 걷도록 강요를 당하였다. 무신정변이후 신흥사대부가 등장하여 성리학의 민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농민을 양민으로 격상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민중의식이 싹터 민중계층의 조직적인 저항 등이 일어났다.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문학에서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신라의 말기적 현상으로 향가 향유층인 민중은 향수자의 역할을 고수하게 되고 동령승은 면벽수도의 생활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화랑의 역사적 가치를 상실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한문 경도에 의해 향찰표기가 쇠퇴하게 되자 향가는 쇠퇴하게 되고 점진적으로 별곡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2) 처용설화《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49대 헌강왕은 어느날 신하들을 거느리고 개운포에 놀러갔다. 왕이 물가에 머물다 수레를 돌리려할 무렵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고 말았다. 이상스럽게 여긴 왕이 좌우의 신하에게 물으니, 일관이 대답하기를 동해의 용이 부린 변괴이기에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라고 명령하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졌다. 동해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추왕을 따라 서울로 가니 처용이라고 했다. 왕은 미인을 아내로 삼게 해 처용의 마음을 잡으려고 하였고 또한 급간의 직위를 주었다. 처용 아내를 흠모한 역신이 사람 모습을 하고 몰래 동침하다가 밖에서 돌아온 처용에게 발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용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스스로 물러나니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사죄하면서 처용의 얼굴 모습만 보아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로 인해 나라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붙여 사귀를 물리쳤다고 한다. 역신이 아내를 범하는 장면을 목격한 처용이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처용가는 향가 중에서도 가장 문학적 향기가 높고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설화와 함께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처용의 실체에 대해서는 지방호족의 아들, 의술 기능을 가진 주술사, 아리비아 상인 등 다양한 추정을 하고 있다. 처용설화 자체가 헌강왕대에 널리 행해졌던 일련의 굿의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인에게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용신사상을 중심으로 일반민중들에게 위무력을 가졌던 무당의 일가가 동해용의 일가로 표현된 것으로 풀이한다. 또한 당시 활발했던 아라비아와의 무역을 근거로 처용을 아라비아 상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면 울산은 경주의 외항이자 길목이며 처용은 주로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던 지방호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헌강왕의 울산 행차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이 시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지방호족을 선무하기 위한 행차이며, 처용은 대호족 포섭 견제책의 일환으로 볼모로 삼기 위해 서울로 데려왔던 것이다. 또한 역신의 간통행위는 도시귀족의 타락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처의 간통행위를 보고도 처용이 아무런 미련없이 가무하며 물러난 것은 골품제 귀족의 전통적 폐쇄성에 대한 야유요 부정이라고 하겠다.(3) 신라 향가 다음은 신라 향가 의 원문 해석이다.서울 밝은 달밤에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이지만둘은 누구의 것인고?본을 어찌하리.신라 향가 는 신라 현강왕(875-885)때에 지어진 8구체(4.4조의 민요조)향가로 향찰로 표기되었으며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인 표현, 즉 직서적인 방법으로 체념적인 농사(弄詞), 풍자 등을 나타내고 있다. 1-4행 역신은 침범,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험으로 아내를 빼앗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내용이다.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쫒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이 주제로서 축사의 성격을 가진다.(4) 별곡 다음은 별곡 의 원문 해석이다.(전강) 신라 성대(新羅聖代) 밝은 성대의천하태평은 나후(羅後)의 덕처용(處容) 아비여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부엽) 모든 재앙(災殃)이일시에 소멸하도다.(중엽)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처용 아비의 모습이여(부엽) 머리에 가득 꽂은 꽃이 무거워기울어진 머리(소엽) 아아, 수명(壽命)이 장수(長壽)할넓으신 이마(후강) 산(山) 모양 비슷한긴 눈썹애인을 바라보는 듯한너그러운 눈(부엽) 바람이 잔뜩 불어우글어진 귀(중엽) 복사꽃같이붉은 얼굴(부엽) 진기한 향내 맡으시어우묵해진 코(소엽) 아아, 천금(千金) 먹으시어넓어진 입(대엽) 백옥(白玉) 유리같이하얀 이빨복이 많다 칭찬 받아밀어 나온 턱칠보 무거워서숙어진 어깨좋은 경사 너무 많아늘어진 소맷자락(부엽) 슬기를 모두어유덕(有德)한 가슴(중엽) 복과 지혜가 다 풍족하여불룩한 배붉은 띠 무거워굽은 허리(부엽) 태평성대를 같이 즐겨길어진 다리(소엽) 아아, 계면조(界面調)에 맞추어 도는넓은 발(전강)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누가 만들어 세웠는가.바늘도 실도 없이바늘도 실도 없이(부엽) 처용 아비를누가 만들어 세웠는가.(중엽) 많이도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부엽) 십이 제국이모두 만들어 세워(소엽) 아아, 처용 아비를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후강) 버찌아 오얏아 녹리야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부엽) 아니 곧 맨다면궂은 말 떨어지리라.(중엽) 신라 서울 밝은 달 아래 내 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로구나.(소엽) 아아, 둘은 내 것인데둘은 뉘 것이뇨.(대엽) 이럴 적에처용 아비만 본다면열병신(熱病神)이야횟감이로다천금(千金)을 주랴처용 아비야칠보(七寶)를 주랴 처용 아비야(부엽) 천금 칠보도 말고열병신 잡아 날 주소서(중엽) 산이나 들이나천 리 밖으로(부엽) 처용 아비를비켜 갈지어다.(소엽) 아아, 열병대신(熱病大神)의발원(發願)이로다.. 에 실려있는 별곡 로서 비연시(非聯詩). 희곡적 구성하고 있으며 무가(巫歌)의 성격을 띠고 있다. 향가 의 일부가 들어 있다. 내용은 4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사(序詞)로서의 첫째 단락과 처용의 위압적인 모습을 그린 둘째 단락, 처용의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셋째 단락,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위용을 말함으로써 역신을 물리치고 접근을 방지하고자 하는 넷째 단락이 그것이다.(5) 신라 향가 와 별곡 의 비교별곡 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형식상 신라 향가 보다 길이가 길어졌으며 그 내용에 있어 신라 향가 는 처용설화의 한부분만을 가져와 노래하고 있으나 는 신라 향가 를 포함함과 동시에 처용설화의 거의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에서는 처용의 용모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처용을 신격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축사가 더욱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향가가 역신보다 능력이 아래인 처용이 덕성으로 역신을 감복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에서는 역신과 대적할만한 용모를 지닌 처용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렇듯 는 신라 향가 와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무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는 인칭상에 처용이 일인칭으로 등장하지 않고 배우들이 처용을 연기한다는 점을 명시함으로써 연희로서 향유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에서 신라 향가와 차이가 있다. 는 궁중의 나례(儺禮-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와 결부되어 '처용희(處容戱)', '처용무(處容舞)'로 발전되었다. 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다.
황순원의 생애와그의 문학1.서론 ………………………………………………………………………………………pp. 1 ~ 31)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 ……………………………………………………………p. 12)기존연구사 분석 ……………………………………………………………………pp. 1 ~ 33)연구방법 ……………………………………………………………………………p. 32.본론 ………………………………………………………………………………………pp. 3 ~ 111)황순원의 생애 ………………………………………………………………………pp. 3 ~ 8유년기 시절, 그리고 단단한 시적 서정성의 세계 (1915~1936) …………pp. 3 ~ 5단편작가로 입신, 문학적 성숙을 예비한 서장 (1937~1949) ……………pp. 5 ~ 7전란의 상흔과 모순에 맞선 인간애 및 인간중심주의 (1950~1964) ……p. 7실존적 삶의 고통과 존재론적 인식의 확장 (1956~1976) ………………p. 8세계에대한 다면적 인식 (1977~2000) ………………………………………p. 82)애정관 ………………………………………………………………………………pp. 8 ~103)문학관 ……………………………………………………………………………pp. 10 ~114)국가관 ? 사회관 ……………………………………………………………………P. 113.결론 ………………………………………………………………………………………P. 11 ~ 12*참고문헌 …………………………………………………………………………………P. 12과 목 명 : 한국현대문학사상선 생 님 : 김 용 구 선생님학 과 : 식물자원학과학 번 : 20012340성 명 : 황 보 연1. 서론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필자가 황순원을 선정한 이유는 중학교시절 [소나기]라는 작품을 읽고 깊이 감명 받은 적이 있으므로 그 작가에 대해 알고 싶고 작가를 반영한 시각으로 작품을 다시 한번 해석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순원은 문학자체만을 고수하면서,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작가적 태도를 지의등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그에 대한 논의는 처음 단평으로 사직하고 있다. 단편집 『늪』(1940), 『목넘이 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최초의 장편소설『별과 같이 살다』(1950)를 간행한 이후인 1950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작품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5)등을 발표하면서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비교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어령, 백철, 원형갑, 천이두, 구창환, 김치수는 황순원 문학에 나타난 자의식의 문제와 서정성에 역점을 두고 논의를 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1970년대 들어서면서 장편 『움직이는 성』을 간행하면서 그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이시기의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이보영, 천이두의 작품론)과 김병익, 김현, 염무웅의 사회문화비평을 들 수 있다.)1980년부터는 『황순원전집』(문학과지성사,1980~1985)과 『말과 삶과 자유』(문학과지성사, 1985)의 간행을 기점으로 논의가 양산된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이태동, 유종호, 권영민, 김치수, 오생근, 한승옥, 신동욱, 이동하, 조남현을 들수 있다.)1990년대 이후 학위청구논문이 양산되면서 그가운데는 이월영, 양선규, 박양호, 장현숙, 박혜경, 김윤정, 황효일, 허명숙, 오연희, 이경호, 문영희의 박사학위청구논문 11편)이 포함되어있다.황순원에 대한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다양한 시각과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을 묶으면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첫째, 작가에 대한 연구로는 원응서(1973), 김동선(1984), 최정희(1985), 오유권(1985), 서정범(1985)등을 들 수 있다.둘째, 성격 연구로는 김현 ? 김윤식(1973), 이정숙(1975), 백승철(1982), 김종희(1985)등을 들 수 있다.셋째, 구성에 대한 연구로는 김치수(1984), 구인환(1979), 김교선(1966) 등을 들 수 있다.넷째, 문체와 서술 시점에 대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당시 부친은 평양 숭덕 학교 고등과 교사로 제직하고 있었다. 교육자 집안이고 생활도 유복했다. 일제 시대와 해방 전후 그리고 6?25전쟁, 민족 분단기에 부모와 형제가 거의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유복한 가정환경 덕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고 그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5세 되던 해인 1919년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평양시내 배포책임자의 한분으로 투옥되어 이로부터 1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 받고 감옥살이를 시작했다. 집안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어린 그의 내면에 고독증이 형성된다. 황순원은 이 무렵의 형편과 심상에 대해 (1951)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어머님께서 곧잘 손자들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다섯 살적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고 어머님이 걱정을 하실라치면, 내가 당나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이라면 아버님께서 3?1운동 관계로 옥살이를 하실 때다. 나는 어머님과 단둘이 시골 고향에서 살았다. 지금도 생각난다. 어머님 께서 혼자 김매시는 조밭머리 따가운 햇볕 아래서 메뚜기와 뻐꾸기 소리만을 벗하여 기나긴 여름날을 보내던일 …… 그리고 시력이 좋지 않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다섯 살 짜리 내가 앞장을 서서 그 말스냥이가 떠나지 않는다는 함박골을 지나 외가로 오가던 일이 …… 아마 나의 고독증은 이 시절에 길리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고독증에 대한 확인의 한 형태가 일본 가 있을 때 라는 극연극단체 창립의 한사람이 되게 한 것은 아닐까.)어린 시절의 고독증은 그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문학의 무궁무진한 세계속에서 그는 현실에서 갖지 못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끽하게 된다. 어린시절의 고독증에 대해 1951년에 쓰여진 이글은 까지만 연계하여 그 상관성을 상정하고 있지만, 마침내는 그것이 추후 위가 이나 에서 목도하게 되는 존재론적 고독감에까지 그 파장을 미치게 한다고도 볼 수도 있을 법하다.일곱 살 때인 1921년 평양으로 이사하여 9세에 숭덕소학교에 입학한해준 바 있는데 이 말을 듣고 ‘반백이 다 되신 머리를 바라보며 아버지도 늙으실수록 아름다워지는 유의 남자임’을 알았노라고 밝히고 있다.오산중학교에서 한 학기를 지내고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숭실중학 전입학은 그해 9월이었다. 같은 해 11월, 저 남쪽에서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고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에 맺힌 식민지 지식인의 울혈이 점점 깊어가던 때였다.숭실중학 재학중이던 1930년, 이팔청춘 열여섯의 나이에 드디어 황순원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듬해 7월에 처녀시 을 9월에 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시 창작과 발표를 거듭했으며 1932년 5월 가 『東光』문예 특호집에 발표됨과 함께 주요한으로부터 김해강, 모윤숙, 이응수와 더불어 신예시인으로 소개 받았다.계속해서 시를 써나가는 도중에 황순원은 1934년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여기에 재학하는 동안 이해랑, 김동원등과 함께 전기한 바 있는 극예술 연구단체 를 창립한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교포가 경영하는 삼문사에서 인쇄하고 서울 한성도서를 총판으로 한 이 시집은 양주동의 서문과 시인의 짧은 머리말, 그리고 스물일곱 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이듬해 여름인 8월에 방학을 맞아 귀성했다가 조선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동경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하여 평양 경찰서에 29일간 구류를 당하기도 했다.한편 1935년 1월, 황순원은 재학중에 당시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의 학생이던 양정길 여사를 일생의 반려자로 맞아들인다.그 다음해인 1936년, 황순원은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단편작가로 입신, 문학적 성숙을 예비한 서장 (1937~1949)황순원은 1937년에는 단편소설 를 집필하여 『창작』제 3집에 발표하고, 1938년에는 소설 와 시 , 등을 『작품』제1집에 발표하였다.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인 1940년 8월에는 소설을 쓴지 3년 만에 첫 단편집 『황순원단편집』을 한성도서에서 출간 때문인가? 그에 대하여 작가는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금에도 그는 일제 관헌의 의심의 눈총을 받아가면서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우리말로 된 소설을 썼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우리를 지키고 나라와 민족의 혼을 지키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곧 예삿 사람으로는 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송 영감은 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덮어놓고 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이 발산하는 듯 어둑한 속에서도 이상스레 빛나는 송 영감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열어젖힌 곁창으로 늦가을 맑은 햇빛 속에서 송 영감은 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찾던 것이 예있다는 듯이. 거기에는 이번에 터져나간 송 영감 자신의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송 영감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터져나간 자기의 독 대신이라도 하려는 것처럼)원응서가 지적했듯이 황순원은 내적 절규로 이 작품을 썼는지 모른다.) 그의 절규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늘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송 영감의 장인 정신도 상징적인 장치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의 인생관과 삶의 자셀ㄹ 읽어낼 수 있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흐트러짐 없이 본래의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에 식민지 질곡 속에서 친일의 길이 아닌 정도를 걸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그 무엇보다도 내가 엄격했던 것은 내 작품에 대해서이다. 나 자신의 편안함이나 금전을 위해서 내 마음속에 있는 독자에게 실망을 준 작품은 쓴 적이 없다. 앞으로 혹시 다시 소설을 쓰게 되더라도 그런 타협은 하지 않을 것이다)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정의여학교 국어교사로 취직하고, 해방의 기쁨에 젖어 을 비롯한 몇 편의 시와 을 비롯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그런데 북에서의 해방은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었다. 지주계층의 청년 황순원은 신변의 위협을 시시각각 느끼게 되었다. 대전지검에 검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들의 생사가 걱정이 되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저자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 미술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미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한다. 저자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미술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미술, 그러한 미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시각 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 하고 있으며 새로운 방법으로 미술사를 소개하고 있다.저자의 기본 생각은 바로. 미술이라는 것은 근대의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미술은 제도의 틀 안에서만 미술일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미술사를 고대에서 현재까지의 연대기적 방법으로 기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저자 자신의 생각대로 미술의 본질을 기술하고 미술의 역사를 재평가하면서 미술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우선 저자는 지금까지 예술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고대 미술품, 중세 미술품들 즉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오히려 마르셀 뒤샹의 샘이나 앤디워홀의 네 명의 모나리자가 미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저자는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며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 즉 그자체로서보다는 제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창조가 미술이 될 수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작가의 순수한 창작동기의 결여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일상생활의 맥락이었으며, 종교에 의한 요구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의 미술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미술이 되지 못한다. 그것들이 미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문화에 차용되어, 순수한 창작의도를 가진 작가에 의해 다시 그려지거나. 대중매체에 의해 보여지거나 사진으로 찍혀서 미술관에 한자리를 차지하거나. 구매되는 등의 제도를 걸치게 될 때라는 것이 저자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미술의 본질은 원근법발견과 순수미술이라는 용어의 확립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즉 원근법의 발견은 세계와 미술 그리고 인간이 하나가된 세계 , 미술과 인간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술가는 세계를 자신의 고정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입장으로서 세계가 그다지 투입되지 않은 인간의 투명하고 자율적인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미술을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근법은 시각을 유기적인 삶에서 분리시켜 세계를 세계 바깥에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며 이는 세계에 대한 주인의식과 소유충동에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분리된 주체를 확립시킨 가운데 세계로 옮아간 시선은 사실과 정보를 수집하여 그것을 통합된 장 안으로 편입 시키고. 이과정은 곧 세계로부터 생각하는 나가 분리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미술의 주체가 작가 자신이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순수미술이라는 용어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미술이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파생된 그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절대화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원근법의 발견과 순수미술이라는 용어의 확립은 미술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으며 고대의 미술이 미술이 아닌이유, 중세의 미술이 미술이 아닌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미술을 이해하거나. 미술사를 논할 때 고대미술, 중세미술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저자는 미술사를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 자체의 발전의 모습을 시간적 순서로 나열한 연대기적 방법으로서가 아닌 미술의 개념을 포함하며, 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온 미술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미술이 발전한다는 생각보다는 변화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미술사의 변화의 모습을 미술창작의 특권와해, 미술교육을 시키던 기관인 아카데미의 붕괴, 미술작품들을 보존하던 박물관이 현대의 미술관에 이르기까지의 변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그리고 대중문화등을 소개하고있다.미술이 미술가의 독창적인 창작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하고 있다. 바로 여성들은 그러한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들에 의해 드디어 그러한 독창성을 갖는 것은 천부적인 것 보다는 오히려 특권의 혜택으로 계발되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특권은 제도와 교육의 불평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성들은 그러한 창작의 세계에 접근자체가 힘들었으며. 접근하였어도 여성은 누드를 못 그리는 등의 제약이 많았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미술 분야의 창작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미술창작이라는 특권의 와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또 다른 변화로 아카데미 교육의 붕괴를 들고 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미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창작되어지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많은 미술가들이 미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관인 아카데미 교육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아카데미가 서서히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저자는 박물관에서부터 현대의 미술관의 개념역시 변화하였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은 회화, 조각을 분리해서 진열한 것으로서 초기의 박물관은 개인의 콜렉션에 지나지 않았으나. 현대 미술관의 출현은 자율적인 영역으로서의 예술개념의 성립과 동시에 이루어 졌으며. 인간의 가장 고상한 모습을 과시하는 곳으로서 미술관은 미술을 다른 세계와 분리시키는 기능을 하도록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미술이 현대에 이르면서 다른 물품들과 구별이 어려워진 때에 미술관의 이러한 기능은 중요하며 이러한 미술관역시 제도의 영역으로서 미술을 더욱 미술답게 만들고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이다.이러한 미술의 부수적 환경들의 변화와 함께 미술자체의 변화도 진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발전과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이다. 저자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같은 위치선상에 놓고 생각하고 있으며 애초의 창작 동기나 작품내용. 작가의 의도보다는 작품의 질이라는 보편성을 토대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연속적 역사로 정리 하였다. 리얼리즘에 반하여 등장하게 된 모더니즘은 분석하고 해체 한다. 근대의 모더니티 문화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특권과 지위를 누려 온던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와 이분화 되는데 이에 대해서도 중요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고급문화도 대중문화에 흡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급미술도 그 특성을 잃고 대중문화로부터 구별하기 힘들어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문화를 양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순수 예술이 아니라 대중매체이며 대중매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예술이란 사회문화의 영역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미술이 때로는 대중문화와도 교차하거나 결합하는 강력한 하위문화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문화 변수에도 미술이 우리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술가의 독립성과 표현의 자유를 가능케 함으로써 그 시대와 거리를 둔 위치에서 정치적 의식과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말하고 있다.이렇듯 미술사를 미술의 본질을 가진 것들의 변화로 정리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생각의 큰 틀인 시각문화와 제도와의 관계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문화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에 기여하고 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우리자신과 세계를 보는 방식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주체가 되는 강력한 방식이기도하다.”이러한 저자의 생각의 기본 틀이 되는 미술에 대한 본질과. 미술사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의 오류가 생긴다. 첫째로 저자는 미술이란 것에 대해 창작하는 사람의 눈으로만 보는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미술이라는 것은 미술을 만드는 행위의 주체자와 그것을 감상하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주체자 사이의 상호 교감에 의해 형성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우리의 시각문화는 미술을 미술이라 알고서 보고 있기 때문에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미술로 보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빌렌도르프이 비너스를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그 작품을고 푸근한 마음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을 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미술의 요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미술의 본질을 설명 하는데에 있어서 미술가와 감상자의 상호간의 교감을 통해 얻어지는 미술을 배제하였으며. 그로인해 미술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점부터를 미술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저자는 고대미술이나 중세미술에 대해 미술가의 창작의도를 문제 삼고 있다. 그들의 미술창작의 의도가 미술가의 순수 하지 않은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그 시대상황에서 요구되어진 것들 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들이 형성되지만 또한 인간은 한 존재로서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근대나 현대는 종교적 창작의도를 탈피하여 작가가 순수창작의도를 가지고 미술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매매하여 미술가들이 활동하는것 이 일반화 되었지만 고대나 중세의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는 미술가들은 종교에 관련된 미술품이나. 국가적 사업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근대이후와 중세이전의 이러한 미술활동들의 차이는 다만 그 시대적 배경에 있으며 그 당시 미술가들의 미술을 만드는 동기나 미술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인정받는 형식의 차이일 뿐이지. 그것이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미술인가 아닌가를 나누는 기준은 될 수없다는 생각이다. 미술가의 순수창작의도에 대한 것은 단지 시대적 사회배경의 변화에 따른 미술사의‘변화’ 정도로 생각되어져야만 한다. 저자는 원근법의 발견과 순수미술의 용어 확립으로서 세계와 분리된 생각하는 나를 만들어내었으며 미술이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면서 미술의 본질이 탄생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근대 시대 이전의 것들은 미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또 한 그저‘변화’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다. 원근법은 고대미술 즉 고대부터 사람들이 표현하고 싶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싶은 의식들로 출발하여 좀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