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mimesis) 발제문-목 차-1) 플라톤의 철학(1) 플라톤의 이데아론(2) 플라톤의 미메시스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1)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2)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점)4) 미메시스 예술론5) 결론발표자 : 김 덕중(03)신 효섭(03)이 혜령(04)최 동혁(03)1) 플라톤의 철학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명확한 형이상학적 가설을 제시한 현인으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초기에는 플라톤 자신의 이야기이기 보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일 전 날, 감옥에서의 대화를 다룬 에 이르러서 플라톤의 생각이 드러나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플라톤 사유의 기본적 뼈대인 이데아론을 출발하고 있다.(1) 플라톤의 이데아론플라톤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감각적인 것(sensible)' 과 ‘가지적인 것(intelligible)' 으로 나누고 있는 데, 감각적인 것은 인간의 감각, 즉 오감으로 포착 파악되는 대상을 가리키고, 가지적인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을 가리킨다.플라톤의 이데아(Idea)는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탈 물질적인 것이다. 용기의 이데아, 아름다움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를 이야기하였던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선의 이데아가 있다고 한다.이데아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예로써, 수학적 도형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반지름이 1미터인 원을 그린다고 가정하였을 때, 현실상에서는 아무리 자를 가지고 그린다 할지라도, 반지름이 1미터인 원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칠판에 분필로 그려진 정원도, 노트에 잉크로 그려진 정원도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그 테두리가 오돌토돌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현실에서 완벽한 원의 존재를 위해서는 선의 두께가 없어야 한다는 불가피하고 아이러니한 조건이 ‘원의 이데아’의 비물질성을 증명해준다.플라톤은 에서 미메시스(mimesis) dea의 그림자 idea의 모방이라고 설명하였다.“모방자(예술가)에게는 참된 지식이나 올바른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지 무지한 대중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을 모방한다. 따라서 모방은 혹은 예술은 유희이지 진지한 것은 못 된다. 그러므로 진지하지 못한 혹은 진실 되지 못한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혼을 해치는 모방술이라고 하는 것은 제거되어야 된다. 그래서 플라톤이 10권, 국가편에 시인 추방론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대해서,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모방(미메시스) 한다는 것이 앎의 출발점이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라 설명하였다.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 저서에 있어서 넓은 의미의 문학이라 할 만큼 경험적 지식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 동물학, 발생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자라 할 수 있고, 철저히 경험에 입각한 구체적 체계를 세워가면서도, 학문이란 엄밀하게 연역적이어야 하고 보편타당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플라톤이 산발적 단편만을 남겨두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분류하고 세분화 시켜서, 담론체계를 최초로 분류, 정비, 조직화 하였다. 물리학, 경제학, 정치학, 시학, 윤리학 등의 학문분류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1)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존재에 대해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 이 아닌 바로 ‘철수’나 ‘영수’ 같은 각각의 개체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플라톤에게서의 이데아의 절대적 위상하고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들만이 어떤 절대성을 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들 또한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질료를 특정 형상을 띨 수 있는 ‘가능태’ 로 여긴다면, 질료가스, 피리, 등)에서 모방은 리듬과 말과 선율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독자적으로, 또는 서로 결합하여 사용할 수 있다.? 모방의 일반적인 의미* 닮은 꼴 만들기란 뜻의 모방이 있다. 대상의 시각적 형상을 되도록 그대로 옮기는 일, 즉 대상을 묘사하는 그림이나 형상을 빚는 조각 따위이다.* 몸짓 흉내라는 뜻의 모방이 있다. 이는 대상의 움직이는 꼴의 모방이다.* 추상적인 의미의 모방인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의 이상적 국가라는 관념의 모방일수 있다.이 세 가지의 모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미메시스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예술적 미메시스는 시적 음악적 무용적 모방들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악을 미메시스라 했을 때 그것은 소리 흉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성격과 감정의 움직임을 모방한 것이며, 춤 역시 사람의 동작 뿐 아니라 성격감정을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기술이 주는 즐거움으로서의 미메시스시의 기술적 측면을 다룸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미메시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의미가 깊다. 시와 시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의 관계를 미메시스, 즉 모방의 차원에서 보았다는 말이다.미메시스의 기술은 확실히 자연을 사람의 실천적 지능의 발휘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시뿐 아니라 악기 연주, 노래, 춤, 그림, 조각을 모두 미메시스의 범주에 넣어 생각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미를 구현해서가 아니라 다 같이 미메시스 기술의 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따라서 실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지식에 근거한다고 본 것이다.다른 모든 부면의 기술자들처럼 시인은 나름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질료의 목적을 알아보고 적절한 형식을 통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일을 한다. 즉 그는 나름대로 자연을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모방의 기술은 모두 즐거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철학적 인지의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서의 미메시스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로서는 무섭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사물 시적 모방을 미메시스라 하였으나 특히 극적인 미메시스를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미메시스로 생각했다. 비극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로 조직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 자체를 미메시스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메시스와 줄거리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함으로써 플라톤의 논의의 지평을 완전히 떠났던 것이다.시인은 운문을 만들거나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내용을 지어내고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플롯을 만들어내는 즉 미메시스의 기술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사람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벌이는 '행동'으로 봄으로써 뮈토스를 '미메시스에 의한 인간 행동의 재현'으로 정의한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 들려주기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뮈토스가 되면 행동의 통일성 균형 일관성 개연성 보편성 특히 비극의 경우에는 깨달음과 뒤바뀜의 요소를 가지며 그 결과로 전체는 추론적 논리적 설명이 가능한 지적 이해의 대상이 된다.* 윤리학의 범주로서 이해하는 미메시스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다. 이처럼 인물의 성격은 막연한 내면적 질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의 행동, 즉 윤리적 행동에 직결된 것이다. 즉, 등장인물의 성격의 제시 역시 윤리적 행동의 미메시스에 속한 것이다.? 미메시스의 과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바에 따라 모방의 과정을 요약하면 보편적 형식으로부터 세부적 마무리 작업에까지 이르는 진행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현실이나 역사나 상상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시인은 이들 행동을 인식하고 중요하지 않은 주변 상황으로부터 이것들을 분리시켜 가지 고 행위자가 있는 플롯을 통해 표현한다.* 행위자는 성격에 의해 한정되는데 성격은 특수한 또는 우연한 상황이나 삽화를 통해 나타 나야 한다.* 삽화에서의 성격의 표현은 사고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사고는 언어에 의해 객관화된다.* 언어는 조사를 통한 모방의 양식과 매체에 의해 완전한 조화가 주어진다.3) 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이 구체적인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한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거부하면서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즉, 책상의 본질과 책상이라는 구체적 물질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참다운 실제는 이데아 세계이고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적 일원론의 입장에서 이데아를 개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개체주의, 내재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록 개별 사물들만 실재한다고 주장하여 일원론을 전개했다고 할지라도 개별 사물이 재료와 원리로 구분된다고 본 점에 있어서 그는 여전히 플라톤적이므로 그의 세계관을 이원론적 일원론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각 사물의 이데아의 세계는 불변하는 존재이다. 즉 변화하는 사물들은 불변하는 사물들의 이데아에 대한 빈약한 모방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는 구분되지만 그것은 사유에서만 구별될 뿐 실제로는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형상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속에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형상이란 사물의 본질 또는 본성을 말한다. 질료는 개체화의 원리이다. 형상과 질료를 동시에 가진 사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substance)'라고 한다. 또한 그는 질료를 가능태라 하고 형상을 현실태로 해석함으로써 운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이데아론과 연관시켜 이상국가를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는 아테네에 적용해 보고자 했던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것을 전제하지 않고 현실 속에 존재하는 국가 형태의 장단점을 철저히 분석하여 좀 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국가 형태를 추구했다. 즉, 그는 이데아 속에 있는 세계를 철학의 중심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데아적 체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이데아는 이 세계 속에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4) 미메시스 예술론(1) 중세* 모방에 대한 고대의 이론전형적인 그리스의 전제들에 근거하여 인간정신은 수동적/존다.
[국어국문학과 졸업논문]신화를 만든 자, 최남선- 목 차 -1. 서론2. 근대적 지식인 최남선3. 일본제국의 신화4. 불함문화론 , 한반도 신화의 시작5. 삼국유사 , 신화를 위한 정전6. 신화의 속성7. 대동아공영권으로 빨려들어가는 신화6. 맺음말0. 서론최남선의 일생은 근대계몽기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이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초창기로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중요한 사건 ? 시기에 걸쳐있다. 그의 저술들이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시기와 맞물려 있었던 데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에서부터 유력한 친일인사로의 방향전환이라는 최남선의 정치적 행동은 최남선 학술적 작업 평가를 틀 안에 가둬놓고 만다. 그것은 인물 최남선에 대한 선평가 후 저술안에서 인물의 행동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었고, 이른 바 친일인사 최남선에게 언제부터 친일의 자기원인이 발생하는지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아니면, 친일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에게 발견할 수 있는 방어기제 등을 찾아내는 방식 또한 존재했지만, 이 두 방식 모두 인물에 대한 강력한 가치평가로 인하여 이론적 탐구가 예정되고 일방향적으로 흐른 면이 있다.본고는 그러한 연구방식의 문제점을 인지하면서, 최남선이 자신의 방대한 저술작업에서 무엇에 착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탐구해볼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근원을 탐구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1. 근대적 지식인 최남선최남선이 1908년 신문관에서 우리나라 초기의 근대적인 잡지인 소년 을 창간하는 데 있어서는 두 차례 일본유학에서 잡지발행과 출판문화에 대해 느꼈던 문화적 체험에서부터 바탕한다.일본에 이르러 보니, 문화의 발달과 서적의 풍부함이 상상 밖이요, 전일(前日)의 국문(國文) 예수교 서류(書類)와 한문번역 서류(書類)만을 보던 때에 비하면 대통으로 보던 하늘을,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반된 민족의식의 고조를 학문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시각에서는 후쿠자와)에 의해 ‘고루하고 편협함’, ‘의심많음’, ‘구태의연’, ‘잔혹하고 염치없음’, ‘비굴’, ‘거만’, ‘잔인’ 등으로 표상된 조선에 단군과 같은 유구한 실재의 역사가 있을 수 없었던 것, 혹은 있어서는 안되었던 것. 이런 신화적 전제, 오리엔탈리즘의 전제가 타자의 신화에 대한 탈신화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신화를 구성케 했던 것이다.시라토리의 이런 연구의 태도는 자국 신화에 대해서도 차이없이 관철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전혀 이질적이었다. 그는 기기신화(記紀神話))에 대한 특정적 관점은 “기기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든가 대화민족(大和民族)이라든가 출운민족(出雲民族)이라든가 웅습민족(熊襲民族)이라든가 존재했다고 하는 설도, 고천원(高天原)이 외국이라는 설도 기기의 기술을 역사적 사실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기기신화를 가지고 일본 인종의 본원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그 정곡을 오해한 것이다.)이렇게 오해를 지적하면서 시라토리는 기기신화, 즉 “신전(神典)”을 “우리나라 상대(上代)에 존재했던 신념, 제도, 정치, 풍속, 관습 등의 사실을 아름답게 시적으로 묘사해낸 일대 모노가타리(物語)”)라고 규정한다. 말하자면 그는 단군을 바라보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기기신화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일종의 서사시, 즉 신화로 보려고 했던 것이다. 신화를 역사로 봄으로써 단군신화를 부정했다면 신화를, 혹은 서사시를 신화로 봄으로써 기기신화를 긍정하려 했던 것이며, 이런 이율배반적인 시각을 통해 기기신화는 소생한다.시라토리 이전의 기기신화에 대한 태도는 그가 비판했던 대로 그것을 역사로 보려고는 것이었고 이런 시각은 일본민족 구성론 가운데 ‘혼합민족론’, 그리고 혼합족과 같은 맥락에서 나와 소위 ‘일한합방’(日韓倂合)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연관되어 있다. 혼합민족론은 인류학의 이론적 지원 하에 설립된 나라 남쪽에 태산이 하나 있는데 위서에 태백이라고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부분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의 朗?事의 주석에 “태백천지(太皓天地)”라 적고 있다. 백(皓)은 백(白)인데, 태백(太皓)은 태백(太白)이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통전(通典) 에 모든 부루국(皆?婁?)을 불함산 북쪽에 놓으면 장백산이 된다는 논리가 된다. 아르키만도리드?바라쥬스(アルキマンドリ?ド?パラジュス) 씨가 그의 만주기행(?洲紀行)에서 “장백산 처음으로 불함이라고 칭한다(白山始め不咸と?せられる). 불함은한국의 명칭에는 나타나지 않고, 몽고의 겐카이(ケンタイ)산의 옛 이름으로 불감(ブルカン)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명칭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라브로(グラプロ?) 씨의 아시아 포리그롯다(アジア?ポリグロッタ) 의 178페이지에 Chalcha Mongol어, Buryat어, Olot어에 신(혹은 천天)을 burchan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겐타이산(ケンタイ山)의 불감은 신산(神山)혹은 천산(天山)의 의미일 것이다. 만주의 불함도 동의어로 볼 수 있다. - 白鳥庫吉, ?朝鮮古代地名考?, 앞의 책, 67~68쪽.태백산과 불함산이 동명(同名)이라는 근거를 확보함과 동시에 그 산이 가지는 영성(靈性)에 대해서는 다시 시라토리의 ‘영산(?山)’론에 의거한다. 즉 지금의 장백산(長白山), 즉 고대의 불함산이 되는데, 이 산악이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신산영악(神山?岳)으로 그 지방 사람의 경위(敬畏)를 받는 장소라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영산 분포 범위에 중요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일본이라고 보았다. 특히 일본의 천손강림지역으로 알려진 다카치호(高千?)를 제시한다.) 이 다카치호에 대한 기사 소개를 기기(記紀)에 나타난 음운변화에서 가져온다. 조선어의 p음이 일본어로 전음(轉音)할 경우 하행(ハ行)의 음(音)으로 변화한 것이 이미 하나의 법칙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일본어의 히(日=ヒ)도, 류큐어(琉球語)와 마찬가지로 고음(古音)은 pi로서 p?rk과 동류어임의 사료적 가치를 증명한 삼국유사해제 (1927)를 작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삼국유사 의 가치는 재확인된다.일본인 연구자들은 삼국유사 를 부정하는 동시에, 삼국유사 이외의 텍스트들이 시대적으로 훨씬 뒤에 간행되었다는 이유로 삼국유사 의 개작 혹은 변형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부정과 배제’의 구조 하에서는 삼국유사 를 부정하기만 하면 그 외의 모든 신화는 자연히 부정당하게 된다. 최남선의 연구도 일본인들의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배제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세종실록 「지리지」와 응제시주 에 수록된 단군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단군신화의 텍스트들이 배제되었다.그렇다면 삼국유사 와 비슷한 시기의 텍스트인 제왕운기 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먼저 삼국유사 와 제왕운기 에 수록된 단군신화 텍스트를 비교해보자.삼국유사)1)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세상을 탐내어 구했다.2)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 세 개를 주고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3)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였다.4) 곰과 호랑이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신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5) 신웅이 쑥과 마늘을 주고 백일동안 빛을 보지 말라고 했다.6) 곰은 금기를 지켜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7) 웅녀가 단수 아래서 매일 아기 갖기를 빌어,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했다.8)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1908세에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제왕운기)1) 상제 환인의 서자에 웅이 있었는데 삼위태백에 내려가 홍익인간 하라고 했다.2) 이에 옹은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가 곧 단웅 천왕이다.3)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간으로 변하게 하였다.4) 손녀가 단수신과 결혼하여군 터주대감이 정신계의 지주일 것―인류 경륜이 시간적 전 가치와 조선 사명의 특수적 전 내용을 넉넉히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용기(容器)로서 「檀君」이 모든 방면에 있는 종합적 최상 표현으로 만인에게 표거(標擧)되고 감입(感入)되고 염봉(念奉)될 것은 다시 긴 말이 되겠으니까 그만두자.”)“요사이 이른바 신경향을 표방하고 진보사상을 파악한다는 이의 중에 일종의 조선부정이라고 할 작은 열병이 있다.”) 그 열병으로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영영 ‘과도(過渡)’)이다. “조선적 조선의 절대파악”이야말로 구원(久遠) 조선의 빛을 지금 바로 여기에 방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가 원래 불이(不二)”)인 것이요, “久遠의 이쪽 끝인 현실 개화(改化)를 밝히 똑바로 지시하고 도화(導化)하는 사상이 그 때의 중추사상”)이기 때문이다.혁명 단계설로 조선의 민족해방을 부르짓던 카프 인사들의 논리를 최남선은 강하게 비판한다. 최남선의 논리는 어찌보면 매우 단순하다. 현재를 포한한 역사를 항시 단계적으로, 즉 과도기로 인지하지 말고, 단 한번에 미래상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마치 최남선 자신이 옥창에서 불함문화론 을 구상하면서 빛을 본 것처럼, 구원의 미래상이란 빛을 단 한번에 느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단군을 둘러싸고 있는 한반도의 신화이다. 조선의 아이덴티티를 무너트리고 있는 일본 제국의 신화에 맞설 수 있는 한반도의 신화만이 조선을 구제할 것이라고 그는 여겼을 것이다.신화의 속성은 고증을 요구받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기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한다. 신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밝힐 수도 없고, 또한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것이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정체성의 기원'으로 기능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발혀지지 않는 '신화' 이면서 동시에 국사 교과서의 첫머리를 장식할 수 있는 것이다.6. 대동아공영권으로 빨려들어가는 신화만주건국대학은 이시하라 간지에 의해 만주국 신설대학 설립 필요성의 제안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다가키 세이시.
[현대소설의 이해 기말 레포트]머저리티의 생명정치- 김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과 무라카미 류의 반도에서 나가라 를 중심으로독어독문학과 2003313376 김덕중- 목 차 -1. 들어가며2. 북한2.1 북한의 풍경에 접근하기2.2 총체적 감시기관, 북한3. 생명권력에서 생명정치로3.1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3.2 수용소, 상례상태를 규정하는 예외상태3.3 호모 사케르4. 국가4.1 머저리티의 국가4.2 두 작품의 결말5. 결론1. 들어가며국가의 사생활 과 반도에서 나가라 에서 그려지는 북한의 풍경은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감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찝찝함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북한이란 나라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의 심려에서 비롯된 남한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그리 다르지 않다.반공 문구로 주로 등장하는 것처럼 자유가 없는 나라, 가히 중세적 형태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있는 나라, 북한이 있다. 그런데 국가의 사생활 이든, 반도에서 나가라 이든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있는 부분은 북한이란 나라가 얼마나 말도 안돼고, 남한과 일본이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바가 아니다. 북한이라는 국가로부터 출발하여, 남한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국가의 리얼리티’에 근접해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끌어안고 싶지 않은, 북한이란 국가의 그 찝찝한 감정은 다테노의 부메랑처럼 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것이 주는 고통은 내가 누군가에게 행한 고통과 내가 받은 고통들이 서로 엮여있다. 그렇기에 더 처참하면서 찝찝한 고통이다.2. 북한2.1 북한의 풍경에 접근하기그녀는 새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거를 회상하였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축제였다. 지역구마다 유일한 후보자가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벌인다. 선거에는 절대 불참할 수가 없다. 선거장에서 투표용지를 받으면 그냥 김 주석 부자의 사진 앞에서 인사를 한 뒤 투표용지를 그냥 놔두고 나오는 것으로 찬성의 뜻을 표한다. 반대를 하고 싶으면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목숨을 걸고 그 짓을대략 4년 혹은 5년에 단 한번 주권자로서 기능할 뿐인 한계적인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고, 어느 누구를 뽑던 간에 시민들의 직접적인 요구안이 정치적으로 실현되기까지의 과정은 언제나 정치 지배집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 지배집단과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거나, 몇몇 매스컴에 의한 여론조사 뿐이다. 그리하여 여기선 그 국가의 자유와 평등이 어디보다 어디가 더 낫다라는 단편적인 논의에서 빗겨가는, 국민에게 작용하는 국가권력의 미시적이면서 또한 거시적인 힘을 바라보고자 한다.2.2 총체적 감시기관, 북한원형감옥pan-opticon은 죄수들을 이상적으로 감시하는 형태로 벤담에 의해 구상되었다. 이 원형건물 중앙에는 높은 탑이 있고, 그 주변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독방들이 있는데, 탑에선 독방을 지속적이고, 전면적으로 감시할 수 있다. 이 장치에서 권력은 자동적으로 기능한다. 감금된 자는 투명한 가시성에 사로잡혀 항상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상정한다. 푸코는 이런 전면감시 장치가 “생산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교육 기회를 넓히고, 공중도덕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증가와 다양함” 을 얻을 수 있기에 현대산업사회의 학교, 병원, 군대 등의 공간에서 집중되어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로 갈수록 행위하는 주체의 의지와 관련없이,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와 행사하는 권력이 다양하게 분업되는 양상을 추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푸코가 산업사회에서 지적하였던 부분이 대단히 전근대적인 국가라고도 말할 수 있는 북한에 유효한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감옥, 병원, 학교라는 체계에서 유효하게 작동했던 부분이 북한에선 국가 전체가 하나의 원형감옥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일성 주석님 서거를 김정일 주석님 서거로 잘못 읽은 방송원은 그 이후 영영 모습을 감추었다. 또 김 주석 사망 방송 당시 눈물을 흘리지 않아 좌천된 방송원도 있다. (p.30 국가의 사생활 )어느 직업을 소유하든, 어디서 어떤 행위를 하든 항시 감시당하고 일상 공간을 전체로 논의를 확대하면서 이런 미시권력들의 작용이 일반화됨을 밝혔다. 규율 사회의 기초는 주체들을 규격화하고, 유용하고 순종하는 신체를 생산하는 작용이다.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의 시간은 고전주의 시기에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직접적으로 그들의 죽음을 꾀하지” 않으면서, 그는 합법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권한을 갖는다. 이를테면, 이런 방향으로 그는 그들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권리를 행사한다.지배자는 죽일 권리를 작용케 하건나 그것을 보유함으로서만 삶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며, 그가 요구할 수 있는 죽음에 읳해서만 삶에 대한 권력을 분명히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이라는 형식으로 표명되는 권리는 죽게 살게 권리이다.)국가의 사생활 과 반도에서 나가라 에서 나타난 북한의 풍경들에서 절대적 군주는 김주석이고, 귀족층은 노동당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개별 주민마다 김주석과 노동당에 품는 숭배심이 크건 적건간에, 전근대)의 시간안에 머물러 있는 북한의 주민들은 근대적 주체로 탈바꿈히지 못하게 된다.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에 비해 개인의식은 미약한 반면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지독히도 강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기보다는 남에게 의지하고 결과가 안 좋으면 회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략) 국가 같은 거대 조직이 조장하는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표현 방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주로 자기보다 높은 자의 명령을 따르고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에서 행복과 존재감을 부여받는 경향이 농후하다. 삶에서 자아가 소외되는 것이다. (p.98 국가의 사생활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과 마주하였을 때, 언어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와는 다른 양상의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근대적 주체의 핵심이 ‘개별 욕망의 발견’ 이라 할 때, 남한 근대인은 철저히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독립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나, 북한 연 생명nuda via 자체를 정치화하는 시도에 주목한다.아감벤은 예외eccezione가 근본적인 정치구조이자 규칙이 되고 있다고 본다. 강제수용소는 이런 가시적이고 확정적인 공간 확정의 결과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본래 구조에 상응하는 공간이 감옥이 아니라 수용소라고 본다. 감옥에 관한 법은 정상적인 법질서의 바깥에 있지 않고 형법의 특정 영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강제수용소의 근거가 되는 법은 군법, 계엄령이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는 절대적인 예외 공간으로서 감금 공간과 위상학적으로 다르다. 그런 예외 공간에서 공간 질서와 법질서는 어긋난다.반도에서 나가라 에서 등장하는 수용소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무책임한 일본정부와 시민으로 권리를 보장받으려 하는 일본인이 수용소한 공간들이다. 가와사키시 녹지공원과 이시하라 그룹이 거주하던 곳이다.술 취한 노숙자가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든 담이라고 시에서만 설명했지만, 정말 그렇다면 6미터짜리 철제펜스가 아니라 가드레일 같은 것으로도 충분했을 터이다. 공원은 여러 철도회사가 공동개발한 대규모 주택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몰려 사는 노숙자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압력이 부근 주민들에게서 나왔으리라. (pp.8-9 반도에서 나가라 上)이시하라와 노부에 밑에 모인 것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년들뿐으로, 2001년에 이시하라가 규슈에서 시민 시가문학상 최우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후쿠오카시는 이시하라와 노부에가 하고 있는 일이 귀중한 복지 자원봉사라는 견해를 보이게 되었다. 어쨌거나 소년들은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애물단지들을 편리하게 처리하는 곳으로 이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p.110 반도에서 나가라 上)이 공간들은 수용소를 제외한 기존의 법 질서가 구동되는 공간의 안전함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노숙자들은 녹지공원으로 쫓겨가고, 사람들은 그 녹지공간 둘레에 6미터짜리 철제펜스를 세운다. ‘일반 시민’들은 수용소란 예외공간을 자신들의 질을 뻗어 손들을 내밀게 해서 살갗이 찢어지도록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다. (pp.481-482 반도에서 나가라 上)아감벤은 서구 정치가 처음부터 생명정치였고, 서구 생명 정치의 패러다임은 국가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보았다.퍼뜩 정신이 든 구로다는 창 너머가 아니라 물방울이 붙은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비고, 나는 세라키를 막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거냐는 소리가 몸 안 쪽에서 갑자기 들려왔을 때, 반사적으로 발이 움찔하고 움직이는 듯 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디디자마자 눈앞이 하얀 셔터 같은 것으로 막힌 느낌이 들더니 수용소 광경이 뇌리 가득히 퍼지면서 그 배설물 냄새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어붙은 양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p.305 반도에서 나가라 下)수용소를 견학하게 된 구로다는 처형식을 중단시키지도, 만류하고자 돌진하는 세라키에게 다가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구로다 수용소라는 폐쇄공간이 수용소를 견학한 사람에게만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소의 존재는, 고려원정군의 통치의 본질을 보여줌과 동시에, 고려원정군의 후쿠오카시 점령을 위한 획기적인 장치가 된다. 후쿠오카 시민들은 자신이 예외 상태의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고려원정군의 통치를 승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승인은 아감벤이 지적한대로 모든 상례상태를 수용소화(化) 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물론 작품에선 고려원정군의 패배로 그런 미래는 보여지지 않지만 말이다.3.3 호모 사케르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사실 최초의 호민관법은 “만약 누군가 평민 의결을 통해 신성한 자로 공표된 사람을 죽여도 이는 살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아감벤은 이런 특성이 주권적 권력에도 귀속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자연 생명과 권력, 희생당하는 인간과 주권자는 ‘포함된 배제’의 두 형상이자 ‘주권적 예외l'eccezione sovrana의 두 극이라고 본다.
[현대비평론]작품 ?물?에서부터 작품 바깥으로-김남천의 ?물?과 ‘?물?과 ?서화? 논쟁’을 중심으로독어독문학과 2003313376 김덕중- 목 차 -1. ?물?과 ?서화? 논쟁 뒤편의 ?물?2. ?물?과 ?무명?, ?태형?3. ?물?이 갖는 현실성의 리얼리티4. 책 바깥으로 텍스트로5. 맺음말1. ?물?과 ?서화? 논쟁 뒤편의 ?물?카프 해산기에 김남천과 임화를 축으로 일어났던 ‘?물?과 ?서화? 논쟁’ 은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되곤 한다. 작가나 비평가로서 별반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았던 김남천이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과 1930년대 평단에서 비평가 임화와 김남천의 기본노선을 결정하게 된 논쟁이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논쟁은 알려지다시피 ?물?과 ?서화?의 작품에서 벗어나, 작가와 실천문제에 관련하여 퍼져나갔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김남천은 논쟁의 참여자임과 동시에 작품 ?물?의 작자였기 때문에, ?물?의 작품 해석에 대해선 적극적 대응을 하기 힘든 위치였다. 그래서 김남천은 작품 ?물?이 함량미달이라는 데에는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임화가 과도하게 해석하였던 부분들을 정정하는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문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문제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이런 일련의 논의 과정에서 작품 ?물?은 논쟁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작품이지만, 작자 스스로의 방어적 비평이 가해진 후 재논의에 부쳐지지 못한 면이 있다.여기서는 작품 ?물?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논쟁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물?의 비평적 접근을 시도하고, 이 접근과 해석의 과정이 어떻게 다시 김남천의 입장과 연관맺을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작품 ?물?에 대한 접근은 ?물?과 같은 감옥 체험 소설로 엮일 수 있는 이광수의 ?무명?과 김동인의 ?태형?과 함께 시도될 것이다.2. ?물?과 ?무명?, ?태형?나는 지금 길이와 넓이를 한 치도 틀리지 않게 두평 칠합을 전신에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도 손으로 세거나 연필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전 몸뚱이를 가지고 그있다. 주인공 ‘나’는 작품 안에서 똥을 쌓지도, 더러운 신체를 지니고 있지도 않고, 더 좋은 밥을 먹겠다는 욕심도 그다지 없다. 주인공 ‘나’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감옥이란 공간이 ‘나’에게 내리는 ‘처벌’ 보다 그런 추악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는 것 자체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 ?무명?이 내리고 있는 결말은 다음과 같다.내가 출옥한 뒤에 석 달이나 지나서 가출옥으로 나온 키 작은 간병부를 만나 들은 바에 의하면,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일을 하고 있고 정은 소화불량이 더욱 심하여진 데다가 신장염도 생기고 늑막염도 생겨서 중병환자로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볼 가망이 없다고 한다. (p.164 ?무명?))조금이나마 이롭게 살려고 아등바둥하는 ?무명?의 ‘나’ 이외의 수인들은 모두 파멸하고 있다. ‘강’만이 목수일을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런 ‘강’의 생존이 더 시사적인 것은 ‘강’은 신문지국 기자 출신으로 주인공 ‘나’처럼 학식이 있는 지식인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런 지식인 계층 ‘나’ 와 ‘강’ 만이 감옥에서 공소를 하지 않고, 죗값을 달게 받겠다고 한 인물이란 것이다. 작품 ?무명?에서 추악한 군중들의 상위층위에 있는 존재로 지식인 계층이 나오지만, 그들은 추악한 군중을 초월하고, 감옥이란 처벌공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감옥이란 처벌공간을 승인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오히려 처벌공간과 처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인물은 ?무명?의 ‘추악한 인간들’인 민, 윤, 정 같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감옥이 진정 효과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훈육을 한 인간은 민, 윤, 정이 아니라 주인공 ‘나’와 ‘강’ 이 된다. 그리고 화자가 된 ‘나’ 의 시선에 의하여 추악한 인간들은 적극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니, 조금 더 나아간다면 ‘나’는 추악한 인간들에게서 벗어나 ‘깔끔한’ 지배체제에게 포섭당하길 욕망할 것이다.?태형?에선 ?무명?과 같은 이중체계가 아닌 ?무명?의 추악한 인간 군중만이 평면적으로 등장 하이칼라가 섞여 이었다. 그는 똥통과 이불 쌔에 허리를 펴고 누워서 강담전집(講錟全集) 을 읽으면서 이따금 버드나무를 그린 부채로 무릎을 딱딱 치고 있었다.간도 친구는 속수국어독분 을 엎어 놓고 불알과 새채기에 다무시(백선)약을 바르고 있었다.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독서회사건의 서울 친구가 치분통 뒤에서 약봉지를 뒤적뒤적하더니... (p.295 ?물?)이런 ?물?의 인물들은 군중이되, 각기 다른 주체들이 모여있는 군중. 상황에 완벽히 지배당하지 않은 인간들이다.?무명?에서 추악한 인물들과 훈육당한 지식인 사이에서, 포섭당하길 원하는 지식인으로 추를 기울이고, ?태형?에서 추악한 이름없는 군중을 그리면서 상황에 지배당한 암담한 인간들을 형상화 했다면, ?물?이 그리고 있는 구도는 어쩌면 다소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고통받는 신체들이 등장하되, 그 신체들에 대한 판단문제를 ?물?은 인물형상화를 통해 예단하지 않았다.3. ?물?이 갖는 현실성의 리얼리티?물?에서 또한 특질적인 것은 ‘물담당’ 이란 존재와 ‘삼백만 원’이라는 인물이다. ‘물담당’ 의 형상화에 대해선 임화와 김남천에 의해서도 논쟁이 된 바 있다.- 임화그리고 이 구체적인 구체성인 계급성- 당파적 견지의 결여는 ‘물담당’의 행동에 있어서는 전혀 죄악적으로 전화되고 있다. 대체 왜 선출된 그는 물먹는 것을 제한시킬까? 그들의 생활을 그들이 당하고 있는 감옥제도에 적응시키기 위함일까? 불연(不然)이면 그 무엇은 어떠한 통제를 요구하는 행동을 전제한 까닭인가? 불행히 우리는 후자에 속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물담당’은 전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이 밖에 보게 된다.- (p. 61 임화 ?6월중의 창작?)- 김남천임화는 말한다. “대체 왜 선출된 그는 물먹는 것을 제한시킬까?” 임화는 전혀 상식 이하의 질문을 발하고 있다. 어떤 집단에서 어떤 조직에서 선출된 책임있는 역원(役員)이 자기의 맡은 바 일에 출실하고자 하여 행동하는 것이 임화에게는 의문으로써 보여지는 것이다. (중략) 작품 속에= ‘구체적 인간’은 이 작품에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주의자도 학생도, 담합(談合)사건에 들어온 일본인도 다 ‘물을 갈망하는 인간’이란 개념하에 추상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구체성이 구체성의 보다 더 구체적인 구체성인 인간의 계급적 차이는 조금도 ‘살아’있지 않다.- (p. 61 임화 ?6월중의 창작?)임화는 ?물?에서 인물의 구현 이야기를 하면서, ‘구체성의 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인간의 계급적 차이’ 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제 계급을 인식 못하는 ‘물담당’이 문제적으로 비춰지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도식을 그대로 적용시켜 볼 때, 가장 어색하게 비춰질 수 있는 인물은 ‘삼백만 원’이라는 간수이다. 인도적인 면모가 있고, 수인들과 대화할 줄 아는 ‘삼백만 원’ 이란 간수의 존재는 ?태형?, ?무명?과 비교해 볼 때 더 돌출되어 나타난다.작품 ?태형?에서 간수는 수인들 때리고, 죽이는 존재로 나타나고, ?무명?에서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물?에서와 같이, 감히 패통을 쳐 불러내어 수인들의 애로사항을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삼백만 원’을 임화도 그냥 넘어갔던 것은, 인도적인 ‘삼백만 원’에 주목하기보다, ‘삼백만 원’과 수인과의 관계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패통을 치고 교섭을 개시하였다. 교섭은 일부분만 성공하였다. 부채는 사용하여라. 물은 수돗물밖에 없다. 그리고 취사장에 가야 길어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좀 힘들다는 것이다.이렇게 교섭이 끝났을 때에 딴 곳에서도 패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 저곳, 수삼처에서 그 소리가 들려 왔다. (p.301 ?물?)이와 같이 간수와의 교섭 개시는, 복종당하는 수인으로서 멈춰있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제 요구를 외치는 노사협의와 그 풍경이 닮아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교섭의 결과물이 작품 결말처럼 냉수로 인한 설사로 나타난 다는 것은,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 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정언명제와도 맞닿아있다.그런데 인간적인 간수 ‘삼백만남천의 과거의 단시일간의 조직적 훈련 때문에 그의 세계관이 불(不) 확고하다는 사실과 또한 출옥 후에도 노력대중과 하등의 관련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등등의 실천상의 이체를 문제하지 않고는 불완전한 성과에 도달할 것이다.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이며 작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혹자의 이론보다도 그 당자의 실천이다. (pp. 68-69 김남천 ?임화적 창작평과 자기 비판?)김남천은 여기서 작품의 평가를 작자 자신의 실천문제와 연관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상황적 정당성을 말한다. 우선 계급투쟁의 문학적 실천 문제에 있어서 가혹한 검열이 그 실천의 실현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남천은 인물을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정의하듯, 작품에서도 그 자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일명 ‘비평과 작품과 작가의 실천의 결합’이라는 형태인데 그에 관련해선 김남천 자신이 정리하였듯 다양한 비난에 직면한다.혹자는 유물변증법의 속물화라고 비웃었고, 혹자는 비평이란 작품에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작가의 실천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또 혹자는 실천이라하니 너무도 지나친 실천의 남용이라, 만일 너의 말과 같이 비평가는 작가의 사생활, 이력까지를 아는 사람이야만 된다면은 비평가될 자격이 누가 있겠느냐 등의 성실치 못한 태도까지 취하였다.(p.317 김남천 ?창작과정에 대한 감상?)여기서 문학과 비평이라는 그 근원적인 물음이 제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김남천은 어디까지나 맑스주의자로서 혁명의 도구로 기능할 ‘문학’을 전제하였고, 비평에 있어서 작품 자체의 완결성 더하기 작자의 혁명의식과 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치지만 말이다. 문학보다 실천이냐, 실천보다 문학이냐를 벗어나서 한 작품을 책le livre안에 둘 것이냐, 텍스트le texte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확장시켜 보는 것이다.자크 데리다는 완결된 구조를 형성하는 책le livre은 플라톤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현대소설의 이해]수정의 비극-김사과의『미나』비평독어독문학과 20033313376 김덕중- 목 차 -1. 들어가며2. 수정이란 존재3. P시 속 수정4. 수정의 비극5. 맺음말·0. 들어가며아리스토텔레스의 에서 유래하여, 현 대중영화의 주요한 골격으로 쓰이고 있는 비극tragedy) 의 법칙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주인공은 한명이고 고립되는 경향을 가질 것.- 주인공은 하마르티아Hamartia)를 가지고 있을 것.- 주인공은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에 도전할 것.현대판 오이디푸스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는 위의 법칙을 그대로 준수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하마르티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 오대수 또한 자신의 딸을 사랑한 하마르티아를 지닌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적인 현재에서,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경고에도 볼구하고 오만한 태도로 진실을 요구한다. 오대수 또한 자신에게 이미 닥쳐있던 ‘운명’ 의 실체를, 기억의 복원을 요구한다. 진실과 기억의 복원은 예정된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신’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르게 하고, 오대수의 혀를 자르게 한다. 완벽한 비극tragedy이 완성된다.서사문학이 갖는 매체특질이 연극, 영화와는 상이하겠지만, 『미나』는 위 비극의 특질들을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충실한 비극이다. 여기선 주인공 수정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비극tragedy의 과정으로 보고, 많은 부분 위의 특징들을 찾아내는 과정 안에서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1. 수정이란 존재수정은 그들을 비웃으며 상한 불고기김밥을 입속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진정 비웃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수정이었다. 상한 불고기김밥은 먼저 수정의 얼굴에 약한 발진을 일으켰다. (중략) 열정의 삼일은 상한 불고기김밥을 클라이맥스로 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정에게 남은 것은 후유증과 그에 대한 학교당국의 냉담하고 형식적인 처리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뿐이었다. (p.71)위의 서술은 단순 수 준 것이다. 이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관계가 계속 성공적이었다면, 수정은 완전히 시스템을 신뢰하는 존재로, 사물화Vordinglichung 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래는 일방적인 권위질서의 배신-상한 불고기기밥-으로 붕괴되었고, 수정은 식중독으로 나동그라졌다.이런 계약파기에 대하여 기존 질서는 자기 시스템의 결함을 인정치 않는다. 또한 수정과 맺었던 일종의 밀약, 그 자체도 시스템은 인정치 않는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계약이라는 것은 순전히 수정이 벌인 것이고, 수정이 갖고 있던 기대였다고 시스템은 발뺌할 것이다. 시스템 자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헛된 기대를 품었던 수정이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다.수치심과 모멸감의 기억을 깊이 마주보면 결국 박지예처럼 자살에 이르게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은 단호하게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충분하게 사랑하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아존중감을 높이자. 수정은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계속하여 식중독의 추억에 몰두한다. (중략) 도시는 점점 더 수용소의 담장을 높이 쌓아가고 있으며 수정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없다. 그저 빨리 세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서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발밑에다 대고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72)수정이 그런 시스템을 대처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특이하기도 하지만, 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수정은 일명 ‘때리고 튄’ 시스템이란 테두리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수정은 경멸스러운 시스템 구조 안에서 가장 윗대가리가 되고자 한다. 상한 불고기김밥을 받지 않을 존재, 누군가에게 상한 불고기김밥을 주고 나서도 발뺌할 수 있는 존재를 추구하게 된다.샤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이다. 축구공, 자동차 인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닌, 아무 이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만든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면, 무대 위 수정은 자신을 시스템의 대가리가 될 존재로 규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수정은 의 네오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를 실현시킬 수 없다. 수정은 자신을 자기 정의하였다고 착각하지만, 수정의 선택은 수정이 서 있던 무대, P시라는 무대가 지니는 장력(張力)에 이끌린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정이 시스템의 윗대가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되어 수정을 비극으로 이끈다.2. P시 속 수정그런데 완성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장이다. 싸구려 미네랄오일과 글리세린을 일대일로 섞어 담은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가 찍힌 무겁고 우아한 유리로 된 화장품케이스 같은 것이다. (p.82)그녀는 초등학교 일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삼학년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관되게 들뢰즈와 데리다를 강의하며 안도한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일본어로 번역할 생각도 있으나 한국어로 옮길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그 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81)동물이라면 물리적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서열은 다소 독특한 면이 있다. 이미 서열 체계가 쌓여 있고, 그 서열의 극점이 구현에 얼마나 근접하였는가가 관건이 된다. 개인이 아닌, P시라는 도시인들의 집단도 그런 서열구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주변부’ 정도에 위치할 P시는 ‘중심부’의 모든 문화적 ? 지적 체계를 모방한다. P시가 내재하고 있던 ‘주변부적’인 문화 관습들은 폐기하고,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로 자기를 포장하고, 중심부의 지적 체계에 포획되길 원한다.)그리고 P시 내부에선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질서체계를 똑같이 구동한다.그녀의 글은 언제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이 가진 문법적 완성도, 구성적 완벽성 따위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종종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져 휘청거리며 우스워졌으나 그정의가 아닌, 자유의 상실 즉 ‘인간의 사물화 Verdinglichung’ 이다. 극기훈련 과정에서 상한 불고기김밥을 먹기 전의 수정과 먹은 후의 수정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을 신뢰하건, 경멸하건 수정은 여전히 시스템 아래에서 대가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수정은 자기 정의를 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잃어버렸다. 수정은 P시의 규칙 외부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수정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정의 이런 욕망이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바라는 대가리가 허상이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편리한 소비자의 비극이다. 소비자는 레스토랑이 가격을 올리는 것에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돈에 어울리는 것을 갖거나 지갑에서 돈을 좀더 꺼내는 가능성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가장 없는 자의 것을 조금 더 빼앗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p.80)P시의 질서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도구들’은 대가리가 되지 않고, 거대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비자의 미래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암담한 미래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수정은 자신을 거대한 소비자로 위치 짓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정은 시스템의 대가리가 되고 싶어하고, 서열 하(下)의 도시민들을 짓밟고 싶어한다. 시스템에 겉도는 존재 혹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어한다. 철저히 P시라는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품고 있는 이런 수정의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인 욕망’ 이며, 거대 소비자를 넘어 위계질서의 최상위층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허용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오만이 수정의 하마르티아라 할 수 있다.3. 수정의 비극작품의 제목이 ‘미나’이지만 미나라는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긴 그리 쉽지가 않다. 작품에서 미나는 대부분 수정에 의해서 비춰지기 때문에, 일부분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도 같고, 왔다갔다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확실한 나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완벽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이었다. 수정은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한 자신을 느낀다. (p.35)P시는 누가 죽건 말건, 시험시간에는 충실히 응해야 한다는 ‘비인간화된 도구’를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은 그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기 위해, 박지예의 자살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무화시킨다. 충실히 답안을 제출하여, P시의 대가리 근접하였음을 느끼고 조금은 희열하였다. 그런데 미나는 수정과 달랐다. 수정 눈에 비춰진 미나는 완벽하게 자신의 인간화된 모습을 향해 다가갔고, P시의 요구사항들을 뭉개버렸다. 미나는 P시의 무대에서 빗겨나가면서, P시의 도구화된 인간이기를 거부하였다. 수정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수정은 미나를 비웃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마음을 착하게 써봐 수정아. 이제부터라도. 안 그러면 아무것도 안돼. 봐 벌써 문제가 생기잖아? 너는 착한 마음이 뭔지 모르지. 그래서 인정을 안하는 거야. 하지만 니가 인정 안한다고 있는게 없어지는 건 아냐. 세상은 착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p.287)세상은 선한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눈으로 보기엔 그렇겠지. 악마에게 악은 선이고 또 선은 악이잖아. 그래 너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참말로 악이니까. 완전한 악.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해. (p.288)미나는 그야말로 P시의 질서를 내면화한 수정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설득이 가능할 리 없다. 작품에서 또 한편 문제시 하였던 것은 소통불가의 상태였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내뱉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의 말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서로를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타인의 말은 차단하거나 민호처럼 미끄러트릴 뿐이다.미나의 설득을 수정은 오히려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악의적으로의 정도가 아니라 미나를 아예 완전한 악의 덩어리로 규정한다. 수정이 미나의 ‘도덕’을 이해못하고 받아칠 수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완전히 P시의 규칙들을 내면화한 ‘비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