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6장 왜 서양은 (일시적으로) 승리했는가?1. 장기 사이클의 롤러코스터는 존재했는가?2. 동양의 쇠락은 서양의 발흥에 선행했는가?- 인도의 쇠락- 그외 아시아 지역의 쇠퇴3.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아시아라는 거인의 어깨에 오르다- 기술적 변화의 수요와 공급- 자본의 공급과 원천4. 글로벌 경제적, 인구학적 설명- 인구학적, 경제적 모델-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 증거: 1500~1750년- 1750년의 반전- 인도, 중국, 유럽, 그리고 세계의 전환- 과거의 결론과 미래의 함의6장에서는 '왜 서양은 (일시적으로) 승리했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두가지의 답 즉, 아시아가 약해졌다는 것과 유럽이 강해졌다는 이유를 드는데, 이것은 하나마나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무엇이 아시아를 약하게 만들고 무엇이 유럽을 강하게 만들었는지, 또 이 과정들이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책의 저자는 앞의 여러장을 통해 세계경제의 구조와 역학에 전체적으로 접근하면서, 잠정적인 답이라도 모으기 위하여 글로벌한 발판을 쌓아 놓았다. 2장에서는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간 생산과 무역의 기본틀과 상호 결합을 개관했고, 3장에서는 화폐가 어떻게 세계를 순환하면서 세계에 필요한 혈액을 공급해 주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4장에서는 세계인구와 경제 규모라는 양적 측면과 기술혁신이라는 질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5장에서는 세계사의 거시적 분석을 통해서 세계 도처에 동시적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과정의 순환적인 연결성을 파악 하였다.이제 6장에서는 아시아가 1400~1800년에 세계경제에서 점했던 우위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그 대신 서양에는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인지,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게 된다. 즉 그동안 파악한 내용과 쌓아올린 발판을 토대로 "동양이 쇠락하고 서양이 발흥하는" 과정과 원인을 자세히 검토한다.이 장은 '㉠아시아에서 팽창기에 해당 절대적, 상대적 입지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18세기 후반에 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된 B국면적인 정치적 경제적 쇠퇴가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주변에 머물러 있던 유럽을 급부상시킨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2. 동양의 쇠락은 서양의 발흥에 선행했는가?이 절의 제목은 재닛 아부 루고드의 역작 [유럽 패권 이전:1250~1350년의 세계체제]에서 차용했는데 우리는 동양이 쇠락하는데 수세기가 걸렸고, 서양은 아주 뒤늦게 가서야 발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오스만 제국, 사파비제국, 무굴제국, 청 제국 같은 아시아의 경제가 쇠퇴했는지 우리가 자신있게 말 할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18세기의 아시아 상황에 관한 논의는 양의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우리는 동양의 쇠락과 서양의 발흥이 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를 캐물어야 한다.알리는 유럽의 경제적 영향력이 아시아 경제를 붕괴시키고 약화시켰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16세기, 특히 17세기, 심지어는 18세기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 사료와 모순된다. 반대로 이 시기의 아시아 경제는 강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알리는 아시아의 수입이 유럽으로 새어 나가자 경제적으로 궁해진 아시아의 지배계급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 농민을 착취했고 그것은 당연히 거대한 제국들의 종말로 귀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착취, 특히 농민에 대한 착취는 수입의 감소를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기회가 확대되면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배계급이 농민을 다그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보는것이 정설이다. 그것은 식민지의 플랜테이션과 식량수출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것은 경제와 사회를 빈익빈 부익부로 양극화 시킨다. 밑에서 우리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인도와 중국에서 실제로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는 광범위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이런 식으로 경제의 팽창은 소득과 신분의 양극화 현상과 맞물리면서 경제 팽창을 낳는 과정 는 약탈에 눈이 먼 유럽에 상업적, 군사적으로 이용당했고, 결국 정치적으로 굴복하게 되었다. 인도는 유럽의 패권 앞에서 가장 먼저 '몰락'하기 시작한 아시아의 정치경제적인 강대국이었다.- 그외 아시아 지역의 쇠퇴다른 아시아지역, 특히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성장은 17세기 후반에 절정에 이러 18세기 전반 부터 서서히 약세를 보이다가 18세기 마지막 30년동안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18세기 말 유럽인의 상업지배가 확대되고 새로운 산업 중심지가 등장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은 약화되었고 18세기와 19세기의 전환기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고비로 정치력은 유럽에 밀리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대외무역은 전반적으로 침체되고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들었다. 또한 18세기 말부터 수출시장은 물론 국내시장에서도 외국 상품과 치열한 경쟁체제에 돌입했는데 특히 프랑스를 통해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상품이 오스만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1760년 이후 오스만 경제의 쇠퇴는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이동이 증가했고, 부유한 지주가 소유한 토지 중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땅이 절대적으로도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세금부담이 컸던 가난한 농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결국 많은 농민이 농촌을 등져야 했으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원자재의 생산과 수출은 완만하게 증가했지만 전체 수출품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급격히 늘어났다. 면직물을 비롯한 여러 공산품의 수출이 감소한 탓이었다. 특히 1760년 이후 면직물 수출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제국의 중앙조직이 허약해지면서 국가의 장악력도 약화되었으며 지방 단위의 분권화가 진전되었다.청조가 지배하던 중국에서는 쇠퇴가 조금 늦게 찾아왔다. 18세기에 중국은 경제도 성장했고 인구도 늘어났다. 명청교체기라는 시기적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1683년 타이완 재합병을 계기로 무역에 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금광과 은광을 자금줄로 하여 그것을 샀다고 할 수있다. 유럽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하여금 은을 캐내도록하였고, 또 노예무역을 통해 많은 화폐를 만들어 냈으며, 아메리카 대륙을 무대로 수익성이 높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브라질, 카리브해, 북아메리카 남부 일원에 건설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를 부려 농산물을 생산했으며, 유럽에서 만든 제품을 남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팔았다. 유럽 제품은 아시아 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가 아닌 곳에서는 팔아 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듯 유럽인의 실질소득과 부를 늘려준 일등공신은 아메리카였다. 켄 포메란츠에 따르면, 유럽인에 의한 원주민의 강제노동과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노예노동은 아메리카 대륙의 자원과 결합하여 유럽의 투자능력과 소비능력을 배가시켰을 뿐 아니라 유럽의 희소자원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비유하자면, 유럽인은 아메리카에서 잡은 한 밑천으로 아시아 경제의 카지노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 카지노에서 유럽이 이길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을 무한정 끌어다 쓸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시아가 갖지 못했던 유럽의 유일한 경쟁력은 아메리카라는 돈나무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런 든든한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오랫동안 아시아 경제, 실제로는 세계경제라는 카지노 테이블에서 푼돈이나 조금씩 거는 꼽사리 도박꾼에 불과했다. 이렇게 별볼일 없던 유럽이 아시아 도박판에서 승승장구 하고 결국에는 대박을 터트릴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는 물론 아시아의 어깨에 올라타 힘을 비축하는 동안 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는 18세기를 고비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적 변화의 수요와 공급산업혁명기에 이루어진 기술발전을 오직 유럽인의 공적으로만 돌려서는 곤란하다. 오랫동안 동양에 근거지를 두었던 기술혁신의 지리적 중심이 서양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거시적 차원에서 문제를 이해해야 옳다. 유럽의 어떤 '남다른' 특성과 요인이 산업혁명을 낳았는가세기 영국에서 자본 부족현상이 나타나지 안았던 것은 노예무역, 특히 17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인도에서의 조직적 수탈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온 결과'라고 하였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식민지 착취를 통한 '원시적'자본 축척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식민지는 공돈을 주었을 뿐 아니라 노예노동과 값싼 설탕, 담배, 목재, 목화 등을 아낌없이 제공했고 유럽은 이것을 펑펑소비했다. 더욱이 유럽이 아시아의 비단, 면직물, 향신료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의 은이 있었고 또 아시아 '지방무역'에 편승하여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영국으로 유입된 자본은 특히 증기기관과 면직 생산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혁명을 위한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윤활유 역할을 했다. 하트웰이 강조한대로 일반적으로 국제무역을 통해서, 특히 식민지 착취를 통해서 투자 가능한 자본의 공급이 원활해졌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비용절감적, 노동절약적, 동력생산적 설비제작을 위한 실제적 투자와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보다 근원적인 미시경제적, 거시경제적 유인책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 글로벌 경제적, 인구학적 설명아시아가 쇠락하고 유럽이 발흥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시 한번 인구학적, 경제적 관점에서 되짚어 보면, 아시아가 이룩한 경제적 생산과 인구의 팽창이, 1800년 이후 도리어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역설적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인구/토지자원 비율은 처음부터 이미 높은 수준에 있었고 그것은 자원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다. 유럽에서 그런 현상이 덜 벌어졌다면(식민지라는 탈출구에 의해) 세계경제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동양과 서양 사이의 인구/자원의 격차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점점 벌어졌을 것이다.- 인구학적, 경제적 모델인구성장과 경제성장의 관계, 그 중에서도 인구성장과 기술발전의 관계는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주제이며, 인구성장, 경제성장, 기술발전의 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또 지역적 차이까지 감안하면서 추정하는 것은 더더욱 무모한 작업이 아닐수 없했다.
1. 음식문화를 통해 몽골에 다가가기‘몽골’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저 드넓은 초원과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 단지 이것뿐이다. 초원과 칭기스칸을 뺀 몽골은 아직도 나에겐 미지의 세계이고 갈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 벼뤄왔던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첫 2주 동안의 수업시간에서 몽골의 전체적인 개관을 공부했다. 왜‘몽골’이라 불리는지, 기후는 어떠한지, 면적은 얼마나 되고 또 수도는 어디인지..등등 그리고 세 번째 수업으로 몽골의 음식에 관한 시청각자료를 보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몽골을 알아가는데 음식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어찌 ‘음식’통해 한 나라를 이해할 수 있으랴! 하지만 몽골의 음식문화는, 단지 배를 채우고 목숨을 연명하는 목적에서의 단순한 의미가 아닌 그야말로 몽골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번 시청각 자료인 몽골의 음식문화를 통해 한층 가까이 몽골에 다가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그럼 지금부터 몽골의 음식문화를 통해 느낀, 몽골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2. 자연에 순응. 그리고 지혜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요즘은 마치 자연이 인간의 소유물인 마냥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고 훼손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자연의 파괴이자 인간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몽골의 음식문화 속에는 그곳의 자연환경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몽골인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척박한 대륙에서 유목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은 그에 걸 맞는 음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풍부하지 않아 가축에게서 얻은 우유를 주로 마시고, 그것은 부족해 질 수 있는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또 잦은 이동생활에 용이한 ‘게루’라는 간편한 집을 짓고 살며, 우리나라의 칼국수와 같은 ‘고릴테홀’이라는 밀가루 음식과 ‘보르츠’라는 고기육포 또한 이동생활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몽골인들은 자연에게서 받은 것을 이용하여 자연에게서 받지 못한 것을 창출해내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3. 음식문화와 神우리도 식사하기 전, 기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하는데 몽골에서는 그 것을 넘어 한 음식을 만들고 먹는 모든 과정이 매번 마치 우리가 제사를 지내듯 신성하고 경건하게 진행된다. ‘털커이테로치’라 해서 동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삶은 다음 먹을 때도 동물의 원래 모습처럼 셋팅을 하고 먹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 역시 동물의 영혼? 등을 존중하려는 의미였던 것 같다. 처음엔 매우 낯설게 보였다. 그냥 밥 먹는 것뿐인데 뭐 그리 일일이 매번 기도를 드리고 정성스레 여기는지. 하지만 그들의 상황이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우리야 슈퍼에만 가면 필요한 음식들을 아무 불편 없이 구입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지만, 몽골인 들은 오로지 자연에게서 얻은 것으로 연명을 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매끼를 먹을 때 마다 감사해 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이러한 점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4. 음식을 먹는데도 차별이 있다?요즘은 나아지고 있는 추세라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뿌리 깊은 남녀차별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역시 몽골에서도 남녀차별은 존재하고 있었다. 치사하게 먹는데 에서 말이다. 주식이 육식인 만큼 고기를 많이 먹는데, 남자와 여자가 먹는 부위가 따로 있다는 거다. 여자는 ‘달’이라 하여 남자들이 먹는 부위보다 맛없는 부위를 먹는다고 한다. 휴 비단 내가 여자이고, 또 고기를 무지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광활한 초원-유목생활을 해오면서 남자의 역할이 커지고 곧 지위가 높아진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치사하다! 여자와 남자의 구별 말고도 각각 사람마다 먹는 부위가 다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것 역시 무슨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가장먼저 화덕에 바치고, 다음은 가축을 지키는 개에게 주고, 다음은 손님에게,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먹는 모습. 남자들이 직접 고기를 잡고 음식을 하는 모습을 볼 때에는 단순히 남자가 맛있는 걸 먹고 여자가 맛없는 것을 먹는 ‘차별’이란 개념보다는 그들만이 지켜내 온 예의 방식 혹은 고유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5.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으니몽골의 초원과 목축 생활에서는 당연히 고기가 주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고기만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없어서 못 먹는 나로썬 잠깐 부러운 마음이 일기도 하지만 계속-평생을 고기만 먹고 살라하면 또 그것은 자신이 없다. 그럼 몽골인 들은 고기. 그리고 고작해야 가축들에게서 나오는 우유. 이 두 가지 음식으로만 살수 있을까? 몽골은 과거 아주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환경이었으니 이 두 가지 음식으로만 살아왔다는 것인가? 어떻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가축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톨 버리지 않고 다양한 조리법으로 음식을 해 먹는다. 특히 몽골에서도 귀한 손님이 오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요리한다던 ‘버덕’이란 것은 만드는 그 정성만큼이나 맛있어 보였고, 어떻게 그런 조리법을 개발했는지 놀라울 정도로 신기했다. 더 놀라운 건 가축의 우유를 활용한 음식들이다. 몽골인 들이 식량으로써 가축을 생각하는 데에 고기보다 우유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가장 먼저 우유는 ‘수테차이’라는 우유차로 물 대용으로 먹고, ‘아이락’이라는 발효음료로도 사용된다. 이것을 가공하여 술을 만들 수도 있고, 남은 물은 세수를 하고 그 찌꺼기로 치즈와 간식꺼리를 만들 수도 있다. 그 밖에 ‘살토스,우름,타락,요플레,바슬락’등등 무지하게 다양한 우유 식품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들의 유가공 기술이 서양에도 전해졌다고 하니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우유 하나로 그리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가축과 우유만으로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고, 조만간 몽골의 음식을 꼭 구해서 먹어 보고 싶다.
1. 왜 [우붕잡억] 인가2.‘문화’도 없고 ‘혁명’도 없었던 ‘문화대혁명’ 3.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4. 노동을 통한 사상개조?5. 우붕에 갇히다6.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7. 이 글을 마치며1. 왜 [우붕잡억] 인가사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계선림이란 인물을 잘 아는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우붕잡억’이란 낯선 단어가 궁금했고, 다음엔 가장 첫 장에 쓰여져 있는 작가의 말이 결국 이 책을 선택하게 한 것 이다. ‘피로 바꾸고 눈물로 쓴 책. 인간의 나쁨과 착함, 못남과 아름다움, 절망과 희망을 비추어 주고자 쓰여진 책.’도대체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책 한권을 내면서 이리도 거창하고 결연한 말을 하는 걸까. 세상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걸까.좋은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읽고 나서 ‘아, 재밌었다’하며 깔끔하게 덮을 수 있는 책도 있고, 책 장을 분명 덮었는데도 계속해서 머릿속 한 언저리에 달라붙어 생각하게 만드는 책도 있다. 이 책은 분명 후자 쪽이다. 지대한 호기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초반에는 지지부진한 노인네의 잔소리 같기도 했고, 요점만 간단히 하지 않고 질질 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갈수록 그 노인네 같은 소리가 마음에 걸리게 되고 읽는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난 후,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아 아직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문화대혁명’을 겪은 지식인의 회고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역사의 거울로서 과거의 잘못을 밑바탁 까지 온전히 드러내고, 그 잘못을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지식인’이란 무엇인지.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그럼 지금부터 [우붕잡억]이란 책을 읽으며, 그리고 읽고 난 후 들었던 생각들을 써 내려가 보고자 한다.2. ‘문화’도 없고 ‘혁명’도 없었던 ‘문화대혁명’문화대혁명은 문화도 없고 혁명도 없었던, 오직 처절한 인’으로서 인간성을 상실하였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신적, 육제적, 문화적, 역사적인 퇴보일 뿐이다.깊은 상처가 났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를 온전히 드러내고 소독약을 바른 후 깨끗이 치료를 해야 할 것이다. 순간의 쓰라림이 두려워 내버려 둔다면 상처는 곪고 곪아 버릴테니까. 중국에게도 문혁은 하나의 큰 상처와나 다름없다. 30여년이나 지난 오늘이지만 피해자도 가해자도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 상처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프고 부끄러운 상처라고 덮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러내어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만이 중국은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철저한 반성없이 이루어진 용서는 다시 그 광기의 시대가 도래하는 거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저자는 자신의 피눈물어린 경험을 세상에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책의 서술에 있어서 내세웠던 원칙이 있다. ‘첫째 말에 가시 돋치지 말 것. 둘째 분풀이를 하지 말 것. 셋째 오직 실사구시적으로 객관적 서술을 할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순간에 짐승만도 못한 非人이 되어 갖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 그 울분과 분노를 떨치고 용서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비인간적인 수많은 행위들을 나열 할 때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분노와 아픔을 표현했다.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문화대혁명과 같은 아픔이 있지 않았던가? 우리의 7-80년대에 극우주의자들은 그들에 반하는 목소리를‘빨갱이’라는 만능방망이로 잠재웠다. 또한 반공이란 이름아래 수많은 국회의원이 내쫓기고, 청년들이 붙들려가며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아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극좌, 극우의 불쌍함...여전히 세계각지에 존재하는 이념 대립. 그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할 대안은 없는 것일까. 역시 나에겐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이다.3.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사지에 내몰린 자의 유일한 권력을‘자살’이라고 하던가. 사는게, 숨귀신 뱀귀신으로 전락해 버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네의 이웃이었던 이들이 집을 몽땅 부숴버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제자였던 이들이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나를 심문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나를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죽창을 든다.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들을 겪는다면 누가 감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계선림은 죽음의 그림자가 발 끝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느끼고는 자살비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자적 기질이 빛을 발휘한다고 해야 하나. 나 역시 이 덕택에 역사 속 자살의 사례라든지 자살의 이론적 기초를 공부하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역사 속 자살의 사례는 고대에 물에 빠져 죽은 굴원) 부터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초나라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 목을 잘랐다는 항우, 발없는 생각은 수만리를 달려 독일 파시스트 장군들의 청산가리를 이용한 죽음 그리고 일본의 특허거리인 할복자살과 불화산에 뛰어들기까지에 이른다. 여기에 계선림은 자살의 이론적 기초까지 세우려 들었다. 목매달기와 우물에 뛰어들기는 제일 오래된 방식이자 생명력이 가장 강하고, 원시시대부터 봉건사회까지 사용이 가능했던 사회주의 자살방식. 그리고 과학이 발달된 국가들이 사용했던 청산가리와 수면제를 이용하는 자살은 가장 안전하고 고통스럽지 않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자살방식.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우월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자본주의자 수정주의자로 몰린 계선림은 더 이상 꺼릴것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마음으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자살에 실패했다. 물론 나중에도 기회는 있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계선림은‘죽음의 위기’를 겪은 후 강한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죽음의 위기’란 바로 그가 받았던 첫 번째 비판투쟁을 말한다. 자살을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들어닥친 홍위병에게 도살장의 짐승처럼 끌려가, 군중들 앞에서 죄인의 푯말을 목에 걸고 따귀를 맞으며 발로 짓밟히고 돌을 맞았알았던 홍위병이 계선림을 살린 것이다. 홍위병이 30분만 늦게 계선림의 집에 도착했더라도, 그는 집 뒤의 원명원) 갈대밭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문화대혁명시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많은 이들과 한 셋트로 ‘스스로 인민과의 관계를 끊은’이들로 분류가 됐을 것이고, 당했던 문혁의 핍박에 대해선 무덤 속에서나 그 억울함을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붕잡억]이란 책도 펴내지 못했을 것이고, 나 역시 문화대혁명을 이론적으로만 아는데에 그쳤을 것이다.‘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지만, 계선림은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비판투쟁과 노동을 통한 사상개조, 우붕생활. 욕이란 욕을 다 겪게 된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재앙의 10년’을 이겨낸 것이다. 계선림은 생각만해도 몸서리 쳐지는 당시의 기억들을 덮거나 잊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것을 꺼내어 중국사회의 거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을 비추어 주고 깊게깊게 반성할수 있도록. 다시는 이러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계선림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을 택한 것은 단순히 중국의 수많은 인구 중 한명의 목숨을 더 유지시킨 것 뿐만아니라 중국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줄 징검다리를 얻은것이라 생각한다.4. 노동을 통한 사상개조?1967년 겨울부터 1968년 봄까지는 문화대혁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본주의 혹은 수정주의자로 지목된 지식인들은 비판투쟁과 심문 그리고 사상개조를 위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북경대 노동자 계급의 논리는 이러했다.“봉건사회 이래로 구린내 나는 지식인들은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했다. 이미 노동자계급의 넓은 도량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들이 노동자계급 조직의 지도자가 되다니,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무도한 죄이다”하지만 당시 학교의 통치는 상부에서 파견된 이들로서, 오랜 검증을 거친 노혁명가가 하였다. 결국 지식인들은 학교를‘통치했다’는 올가미 안에 갖힌 것이다. 곧장 대해 계선림은“노동의 깃발을 걸고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몸을 바꿀 뿐 영혼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 학대는 사람을 타락시킬 뿐 고양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5. 우붕에 갇히다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계선림은 계속된 비판투쟁, 심문 그리고 사상개조노동까지 이제는 나름의 여유를 갖고, 그 속에서 작은 에피소드(전쟁터를 치우던 중 창문에 걸려있는 해진 신발의 발견한다던지) 혹은 행복(풍광이 아름답고 비판투쟁이 없는 곳에서 노동을 한다던지하는)을 발견해 낼 경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것도 계선림에게는 오래토록 주어지지는 않았다.책이 중반부에 와서야, 내가 가장 궁금해 했던‘우붕’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우붕’이란 문화대혁명때 지식인을 수용하고 학대했던 외양간 혹은 소 우리 정도로 말 할 수 있다. 결국 지식인은들은 인간으로써의 모든 권리를 잃었고 쓸어버리면 안 될 존재인‘소귀신 뱀귀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자는 우붕에서의 참혹했던 생활을‘우붕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다소 낭만적인 표현을 썼지만 나는 그 내용을 읽어가면서, 과연 사람의 광기는 어디서 발현되고 그 끝은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되었던 그 광적인 행위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같은 한 인간으로서 회의가 들 정도였다.우붕의 혁명소장들은 마치‘인간학대’를 천지의 소명처럼 느꼈던지, 갖가지 다채롭고 획기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지식인들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계선림은‘이론으로 역사를 꿴다’는 원칙에 따라 십여가지가 넘는 사례들과 함께 ‘학대론’을 제기했다.가장 먼저 그들은 죄인 혹은 개자식이라는 이름을 선사받으며 우붕의 생활이 시작됐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렇다. 새벽6시 기상, 체력을 남김없이 소모시키기 위한 구보,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아침 식사, 그 후에는 흡사 농촌생산대 대장이 소나 말을 분배하는 것 처럼 죄인들은 각각 분배 되어 노동을 시작한다. 일과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곧장었다.
1. 하늘아래 푸른 대지, 몽골지난 시청각 시간엔 음식을 통해 몽골을 알아보았다면, 이번 시청각은 그동안 수업시간에서 배웠던 징기스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생애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시 텍스트전달의 한계를 영상물이 대신해 주어 징기스칸을 이해하고, 머릿속에 각인 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하늘아래 드넓은 몽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은 나에겐 또 다른 큰 기쁨이다.누구나 몽골하면 드넓은 초원과 바람을 휘날리며 달리는 말과 장수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영상물 역시, 야르막 평원과 함께 몽골의 나담축제로 시작된다. 이제 엄마 젖 좀 뗏을까 하는 어린 아이들이 자기보다 몇 배나 큰 말 위에 올라타 경주를 벌인다. 사뭇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수 키로를 뛰어야 하는 말이 결승점 앞에서 무너져 힘들어하는 모습과, 우승의 영광을 얻은 말이 마유주세례를 받는 모습은 참 대조적이다. 이런 축제를 직접 즐겨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의 각 나라마다 민족의 대 축제는 대게 독립기념일인 경우가 많은데, 몽골의 나담축제 역시, 1921년 7월11일 국민혁명을 통해 온 세상에 독립을 선포한 날 열리게 된다고 한다. 나담축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에서 많은 사진들을 찾아 보았다. 아 한국에서 4시간도 비행기로 안 걸리는 곳에 이리도 아름다운 나라가 있다니. 올해 여름방학때 아무래도 몽골. 가야겠다. 가고 싶다 진정.아무튼 또 한번 몽골에 대한 동경을 키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그럼 지금부터 수업시간을 통해 듣고, 시청각을 통해 본 내용들을 레포트를 정리하면서 이해하고자 한다.2. 다시 태어난, 징기스칸지나가는 몽골인을 잡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99%는 징기스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징기스칸은 몽골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임과 동시에 추앙되고 있는 신과 같다. 몽골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나는, 징기스칸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이렇게 몽골의 아버지로 추앙되었는지 알았다. 하지만 징기스칸이 현제 역사도 궁금해 지기 시작한다.거대한 몽골의 빛도 바랜 것인지, 결국 1915년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의 캬흐타 조약으로 중화민국의 자치구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1917년 러시아의 혁명으로 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강대국의 균형이 깨지자 1919년 중화민국은 몽골왕공들을 협박하여 몽골의 자치지위마저 반납하게 한다.우리나라가 한창 일제의 압박 속에서 독립의 깃을 세웠던 당시, 몽골 역시 강대국들의 지배속에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한창이었다. 몽골인들은 러시아 혁명군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에 맞서 열심히 투쟁하고 결국 1921년 수도를 점령하게 되는데, 몽골은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을 지금도 독립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1924년 11월에는 사회주의 색체가 짖어지면서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이렇게 레닌의 사회주의 체제로 접어든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이란 인물이 단지 전쟁만 일삼았던 '정복자‘로만 인식되었고, 몽골 사람들 역시 징기스칸을 민족의 영웅이라 생각하지만 실상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게 되었다. 이렇듯 몽골은 수십 수백년의 전쟁과 이어진 이민족에 의한 지배, 그리고 사회주의까지의 기간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뿌리가 무엇인지 잊어가고,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어갔었던 것 같다.하지만 몽골은 1988년 구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몽골인민혁명당은 몽골판 페레스토로이카인 신칠렐(Shinechilel)정책을 채택하였으며, 1990년 7월 인민혁명당 일당 독재를 포기하고 최초의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틀을 벗고 자유주의로 나서면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민족과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징기스칸 역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이다. 영상물에서 보니 지폐는 물론이고 맥주와 보드카 공항이름 까지 징기스칸화 되어있었다. 그들은 이제 징기스칸을 정점으로 뭉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징기스칸이 궁금해졌다. 징기스칸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3어로 쓰여진 원본은 소실됐고 한문 필사본이 남겨져 있어서 우리가 몽골을 공부하는데 교과서와도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사서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이런 기록물이 없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몇백년 몇천년 전의 몽골을 알 수 있으랴.이 문헌은 흔히 [원조비사](元朝秘史)라 일컬어 지기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몽골 왕조의 비밀스런 역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3차례 가량 몽골비사가 완역되어 출판되어서 찾아 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나도 언뜻 도서관에서 본 듯 하다.[몽골비사]는 "몽골의 역사, 생활문화, 철학, 신화, 사회ㆍ군사제도, 언어 등등을 담아낸 당시 유라시아 세계 제국의 문화적 정점에 올라있는 저작"이라고 평가된다. 그 체제가 독특해 각 절마다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는 음사(音寫)라고 해서 위구르식 몽골어로 된 원전을 북방 한자어 음가로 빌려 적은 일종의 본문이 있고, 둘째, 방역(傍譯)이라 해서 음사한 문장을 형태소 수준까지 분해해서 각 단어의 뜻과 문법기능을 밝히는 대목이 있다. 또 총역(總譯)이 있어 단락 맨 끝에는 별도로 몽골문의 의미를 구어체 한어로 옮긴 부분도 있다. 이처럼 복잡한 「몽골비사」 역주작업을 사람이 "목수로 치면 연장 만드는데만 20년이 걸린 셈"이라는 말로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였다.「몽골비사」에는 칭기즈칸이 이복동생을 죽인 일, 아버지 예수게이가 어머니를 약탈해온 사건 등등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는데 꼭 다 읽어 봐야겠다.4. 징기스칸의 생애징기즈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순탄하게만 살았다면 민족의 영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가 9세 때 몽골 독살되었다.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드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강간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토그릴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권련에의 부상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이었다.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겼고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그릴과 케레이트족은 모두 전멸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징기즈 칸('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족의 통일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식민통치)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었다.
檀國大學校 歷史學科 孔慧善Ⅰ. 들어가는 말우리는 흔히 ‘제자백가’라고 하면, 유가나 도가, 법가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사회나 윤리시간에 강조되며 배워왔고,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묵가는 그 이름부터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많이 접해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중국의 여러 사료에는,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과 그 무리들이 천하에 꽉 차 있고, 그들 모두가 仁義의 도술로써 천하에서 가르치고 이끌고 있다”) 하였고, “공자의 제자는 70명이었지만 묵자는 불 속에 뛰어드는 제자가 180명이나 되었다”)라는 등의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당시 묵가는 유가에 못지않은 위세를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자취와 흔적은 희미하기만 하다. 나는 여기서 묵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였고, 결국 이번 ‘제자백가’에 관한 논문의 주제로 선택하게 된 것 이다.묵자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에 주목했다. 바로 묵자의‘반전평화론’이다.묵자가 살았던 春秋말엽에서 戰國초엽에 걸친 시대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攻伐이 극성하여 이른바 약육강식의 혼란을 이루었던 때였다. 어느 시대, 어느 성인 치고 전쟁을 찬양한 자는 없었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전쟁은 필요악의 존재가 되어 버렸고, 당시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파괴성은 묵인 한 채 어떻게 하면 전쟁에 승리 할까 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이렇듯 전쟁이 정당화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묵자는 어떤 형태, 어떤 명분의 전쟁도 반대한다. 또한 묵자는 이‘반전평화론’을 그저 입으로 주장 하는 데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직접 실행에 옮겼다. 그는 획기적인 과학기술로 직접 방어무기를 발명하여 침략을 당하는 나라의 방어전에 참여했고, 각기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여 많은 전쟁을 미연에 막았다.)지금 이순간도 세계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고, 또 그것을 인정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때에 나는 약 2500년 전, ’은 목수의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을 의미하기도 한다. 먹줄은 목수들이 직선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인데, 이는 법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엄격한 규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이렇듯 묵자는 이름만을 통해서도 그가 국가의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노동을 중요시 여기고 하층계급을 변호했으며, 엄격한 규율과 법도로써 사상을 실천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묵자와 묵가집단기원전 4세기 孟子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墨家)의 세력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맹자가“양주(楊朱)?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묵가사상은 전국시대 말기까지 儒家사상과 대결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진한(秦漢)시대이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등장하고 이에 따라 유가사상이 정통적 국가이념으로 확립되면서 거의 자취가 소멸되었다.)묵자는 묵가집단의 초대 거자(鉅子)이며, 生殺權이라는 군권을 가졌다. 묵가들은 묵자 당시부터 협객집단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들은 칼날 위를 걷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용사들이었다고 한다).儒家가 周公을 모델로 하였다면 墨家의 모델은 夏 나라의 禹임금이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고,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그냥 지나간 것으로 유명한 임금이다. 이는 묵가가 유가의 주봉건제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적 질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묵가들은 주로 방위 임무를 전문적으로 하였으며 매우 엄격한 규율이 존재했다고 한다. BC381년 묵가의 3대 거자인 맹승이 초나라 양성군 으로부터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이 양성군이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국외로 탈출하자 초나라는 양성군의 소국을 접수해 버렸다고 한다. 맹승은 양성군 으로부터 명령을 받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자결했다. 그러것처럼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불구화 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살아가려면 노예노동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마치 육식 맹수들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셋째, 그는 전쟁을 재화의‘초과소비’로 규정한다.전쟁은 재화를 그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목적과는 달리 파괴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호화로운 궁궐, 사치스런 의복, 재물을 묻고 사람까지 묻는 호사스런 장례도 초과소비이지만 전쟁은 더욱 파괴적인 초과소비이다. 이런 초과소비를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지배문화는 결국 지배체제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넷째, 그는 전쟁을 식인종과 다름없는 잘못된 문화로 본다.전쟁은 엄청난 재화를 파괴하는데도 그것을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여러 성인의 말로 찬양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이고 그것이 관습으로 굳어 재화의 낭비가 아름다움으로 둔갑한 것이다. 결국 전쟁은 집단 살인행위 임에도 선이며 정의가 되었고, 명예로운 행위로 둔갑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인류의 죄악이며 초과소비문화를 근절하고 절용문화로의 문화혁명 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묵자의 반전평화운동1) 전쟁반대 주장묵자는 우선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주전(主戰)론의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나선다."지금 여기 한 사람이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복숭아를 훔쳤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고 위정자는 그를 잡아 벌할 것이다. 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였기 때문이다.남의 개, 돼지, 닭을 훔친 사람은 그 불의함이 복숭아를 훔친 사람보다 더 심하다. 왜? 남을 해친 정도가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더욱 많이 해치면 그 불인(不仁)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남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이나 소를 훔친 자는 그 불의함이 개, 돼지나 닭을 훔친 자보다 더욱 심하다. 남을 해친 정도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불인있다.“전쟁은 수년, 빨라야 수개월이 걸린다. 임금은 나라 일을 돌볼 수 없고 관리는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겨울과 여름에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고 꼭 농사철인 봄과 가을에 벌인다. 농부들은 씨뿌리고 거둘 겨를이 없게 된다. 이것은 곧 국가는 백성을 잃고 백성은 할일을 잃는 것이다. 화살, 깃발, 장막, 수레, 창칼이 부서지고, 소와 말이 죽으며, 진격시와 퇴각시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죽은 귀신들은 가족까지 잃게 되고 죽어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어 원귀가 되어 온 산천을 떠돈다. 전쟁에 드는 비용을 치국에 사용한다면 그 공(功)은 몇 배가 될 것이다.”)묵자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전쟁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의를 깨뜨리고자 노력했고, 그 어떤 것 보다 인간의 한 목숨,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전쟁의 참혹상을 낱낱히 밝히고, 그 피해와 부작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논리정연하게 풀어 놓았다.이와 같이 묵가의 ‘침략반대’(非攻)론은 전쟁의 구렁텅이 속에서 고난받는 민중의 시각에서 형성된 반전?평화론의 사상이다. 사회생산의 확대와 보호를 위한 ‘만민박애’(兼愛)와 ‘상호 이익의 증진’의 실현을 위하여 묵가집단이 보여준 이타정신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성적 도덕주의의 이상과 실천이 통일된 위대한 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2) 전쟁반대의 실천과 활동묵자와 묵가는 단지 이론적으로만 전쟁반대의 구호를 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먼저 상대적으로 보다 우수한 방어무기를 개발하고, 수성(守城) 기술을 향상시켰다.《墨子》를 보면 제52 편으로부터 제71 편에 이르는 11편 모두가 제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이 11편의 글을 보면 묵자는 방어술을 연구했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어기계도 발명하여 그 사용방법을 설명하였다. 묵자는 실제로 자신이 방어를 위주로 하는 병법을 연구하여 병략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는고, 실제로 전쟁을 막기 위해 이러한 방어법을 활용하였다.다. 모든 나라들이 외국을 침공하는 것이 큰 손해가 되는 일임을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공벌전쟁은 없어지게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4) 반전운동의 결말앞서 언급했듯이 유가와 함께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묵가는 한 무제 때, 유학이 국교가 되면서 내쳐진 뒤로 그 전수가 끊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진시황 때부터 묵자의 학문은 핍박을 받기 시작하여 쇠미하여 지다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유학의 존숭과 함께 더욱 철저한 탄압을 받아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전제군주로서는 사회계급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주장하는 묵자의 학문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상 중의 하나였기에 이를 철저히 탄압 한 것이다.하지만 전국시대 유학과 비견 할 만한 묵학이 한나라 초엽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분분하다.호적(胡適)의 《中國哲學史大綱》에선, 유가의 반대와 정객들의 시기, 그리고 묵자 후진들의 ‘궤변’이 지나치게 미묘했기 때문이라 하였다.방수초는 《墨學源流》에서, 묵학 자신의 모순과 그 이상이 너무 높았고, 조직이 파괴됐으며 진나라를 옹호한 혐의 때문이라고 하였다.고보광은 《墨學槪論》에서, 자기학설의 약점과, 묵학 수령들의 엄격한 통제, 기타 학파의 공격, 진?한 제왕들의 박해, 제왕들이 유학과 황로지학을 제창 했음을 그 이유로 들었다.이소곤은 《墨子硏究》에서, 묵자가 죽은 뒤로 묵가에는 덕망과 학문을 겸비한 영도자가 없었으며 묵학은 이미 진실한 가르침을 잃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묵학은 통치자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당시의 제왕과 귀족들의 질시와 박해를 반드시 받았을 것이며, 묵학은 보통 사람들의 능력을 초월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실천하기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이를 종합해 보자면, 우선 묵학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묵학 자체의 원인으로는, 그들의 주장이 자기 모순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이 너무 높았고, 사람들의 능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