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요즘 ‘경제 불황이다’ ‘취업난이다’ 등 암울한 말들이 내 귀에 항상 들려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 피부에 와 닿지는 않다. 그저 언론매체를 통해서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물론 주위사람들도 직접 경험을 통해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언론매체를 통해 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과연 대중매체, 특히 신문이 떠드는 경제 위기가 과연 순수한 의도에서 보도된 것인지 아니면 일부 정치가와 언론인들의 조작인지 짚어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고자 한다.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경제를 우려하던 일부 신문들, 이제는 아예 경제몰락을 예언 하고 있다. 투명한 경영시스템, 공정한 룰을 만들겠다는 개혁을 성장의 적으로 몰아세운 기업이 편한 쪽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쉰 목소리를 낸다. 호황에는 잘 돼 가는 경제의 발목을 개혁이 붙든다고 불 멘 소리를 하고 불황이 닥치면 경제가 다 죽어 가는데 개혁이 무슨 소용이냐고 비명을 지르니 도대체 개혁은 언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위기가 있다면 그 원인을 제대로 찾고 적절한 계기를 찾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외면한 채 소수 가진 자의 목소리만 대변하는 일부 신문들의 뒤틀린 논리를 찾아 볼 수 있다.필자는 우리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월 일천만원 이상 카드 사용자 수가 오히려 늘어났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른바 자본가들이나 그들을 대변한다 라고 하는 신문들이 왜 위기라고 더 목소리를 높여서 그러한 보도를 하는 것일까? 언론매체의 역할은 위기를 감지하고 그것의 객관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파악을 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단하고 있는 위기의 원인들은 너무나 자본과 재계의 입장에 치우쳤다고 생각된다.필자는 이 같은 현상에 문제 제기를 하고 여기에 매스미디어 이론을 적용하여 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우이와 같은 상황을 분석하는데 있어 필요한 매스미디어의 몇 가지 이론들을 고찰 해 보자.게이트키핑은 뉴스미디어 조직 내에서 기자나 편집자와 같은 뉴스결정권자에 의해 뉴스가 취사 선택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떤 메시지라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모든 메시지가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메시지 선택되고 어떤 메시지는 거부되는 과정이 따를 것이다. 이처럼 메시지의 취사,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을 게이트키핑이라 하고 게이트키핑을 하는 사람을 게이트키퍼라고 한다. 어떤 메시지 또는 뉴스의 선택과 거부는 수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한 게이트키퍼가 일하는 조직의 가치, 규범, 전통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게이트키퍼는 과반수가 중산층 의식을 소유하며 갈등보다는 합의의 정치를 지향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그들의 뉴스 관을 결정짓고 또 뉴스선택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게다가 텔레비전 종사자들의 경우 사회적 배경이 동질적인데다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조직적 성격으로 인해 합의정치의 근본규칙이 쉽사리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논제설정 기능(Agenda Setting)은 매스미디어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현행 이슈에 대한 공중의 생각과 토론을 설정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예를 들면 어떤 위원회든지 중요순위에 따라 논의에 부칠 주제의 목록, 즉 의제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의제로 상정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정상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매스미디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가 특정이슈를 선정하고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면 공중의 주의는 그 이슈에 집중되고 여타의 이슈는 무시된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의 의제설정기능이란 미디어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중요하다고 보도하는 주제(미디어 의제)가 공중에게도 중요한 주제(공중의제)로 되는 것을 말한다. 주제의 선택이란 측면에서 게이트키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제설정은 뉴스전달의 맥락을 정의하고 준거용어와 토론의 한계를 설정하게 된다. 일반적으의제설정은 이슈선정 단계와 선정된 이슈를 제공하는 단께 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미디어가 ‘어떤’ 이슈를 수용자에게 제공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와 관련되며, 두 번째 단계는 그 이슈에 관한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할 것인가 하는 제공방식의 문제와 관련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범위의 관점, 상징, 질문 등을 선택해서 특정한 뉴스아이템이나 시사 프로그램을 구성하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순위를 어떻게 매기는가 또는 그들의 정당성, 우선순위를 어떻게 입증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 의제가 수용자들에게 내면화 되는 방식에서 그러한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사회현실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미디어가 행하는 역할과 이데올로기적 전달의 매개로서 미디어가 행하는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쟁점들과도 관련있는 것이다.침묵의 나선이론은 매스 커뮤니케이션효과에 관한 소위 강효과이론의 하나로, 이 학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는 지배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시키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곧 이론의 요지이다. 여론의 개념은 ‘따라야 할 압력’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외적환경을 관찰하고 여론은 재제와 벌칙의 성격을 지닌 사회적 통제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원자화된 고립된 존재이며, 외부의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민감하다.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간의 이성도 홀로 남겨졌을 때 극도의 소심함과 신중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인간은 확신과 자신감을 추구하며, 그러한 확신과 자신감은 자신과 동조하는 사람의 숫자에 비례한다.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보다 더 중요하다. 그녀에 의하면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공통된 삶의 조건이다. 만약에 자신의 의견이 지배적나 상승세에 있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열세 내지는 하향세에 있다면 고립의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숨긴 채 침묵에 빠져들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의 의견은 실제의 숫자보다도 더욱 약해진다. 이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함으로써 소용돌이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침묵의 나선 속에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스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에 의한 환경의 평가라는 측면에서 여론은 두 가지 원천을 갖고 있다. 하나는 매스미디어의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환경에 대한 개인의 직접관찰이다. 사람들은 개인적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서 사실을 알기 위해 또는 의견의 기후를 알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매스 미디어에 의존한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일반 대중의 지배적인 공공 정보원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여 대중의 눈과 귀로 작용하며 또한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독점적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유사한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오늘날의 매스미디어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언론들 특히 신문들이 제기하는 ‘경제위기론’요즘 와서 갑자기 나타나는 일은 분명히 아니다. 이른바 재계와 이들 신문은 이미 20년 가까이 같은 수법으로 우리 경제에 체질 바꾸기, 즉 개혁을 좌절시켜온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다.1998년 노태우 정부의 조순 부총리는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재산세과표 현실화 등 당시로는 혁명 적인 경제개혁을 제시 했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는 노사분규와 물가불안, 국제 경쟁력 약화를 부각하는 이른바 ‘총체적 위기론’으로 조순 부총리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개혁의 물꼬를 틀어막았다. 결국 뒤이은 경기부양책의 여파로 노태우 정권 말기의 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했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할 무렵 동아와 중앙은 경제위기론을 집중 부각하고 경제 활성화를 주장하면서 김영삼을지했던 두 신문의 비위를 맞추느라 김영삼 정부는 이른바 신경제 100일 추진계획이라는 단기적 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는 이른바 IMF체제라는 미증유의 역풍을 맞게 된다. 김대중 정부도 초기에는 개혁의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출범 초기부터 제기된 이른바 ‘일만 달러의 덫’ 이론, 즉 분배위주의 과도한 정부규제로 기업가 정신과 성장 동력이 실종됐다는 언론의 비판에 밀려 단기적 경기부양책이라는 마약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는 지금 엄청난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자의 양산, 그리고 만성적 소비위축이라는 고질병으로 남았다.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는 게이트키핑과 언론의 논제설정 기능이 크게 한 몫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중앙일보 5월10일 “차라리 문 닫고 빌딩이나 사두고 싶어”-이중, 삼중의 기업규제, 생산성을 웃도는 임금상승, 세계 최고 수준의 반기업 정서 등으로 기업인들이 의욕을 잃고 있다.중앙일보 5월10일 “한국경제 이대로 가다간 회복 불능”-한국 경제는 지금 기로에 처했다. 안팎의 경제상황이 모두 심상치 않다. 소비와 투자가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기업하기 힘들어 못견디겠다는 목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그나마 수출 덕분에 경기지표는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소비·투자의 부진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지경이다.이런 가운데 '차이나 쇼크'에 이어 유가 및 국제 금리의 상승으로 또 한번 한국 경제가 출렁거릴 상황이다. 14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국제 원유가는 한국 경제에 물가 상승, 기업 채산성 및 국제수지 악화 등의 부담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르면 6월께 금리를 인상할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여파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한국에 투자했던 해외 자금 중 상당 규모가 높은 금리를 따라 미국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 금리를 올리기는 쉽지 않다. 차이나 쇼크 역시 지속적으로 한국 경제를 짓누르는 악재로 작용할 다.
유신체제의 성립1. 유신체제의 성립**세계질서의 긴장 완화, 일본과 유럽의 경제 성장, 닉슨 독트린, 냉전체제의 와해와 동아시아 냉전체제 수정의 요구(미,중 수교), 냉전 체제로 유지되고 있던 박정희 체제의 긴장, 확고한 권력 기반의 필요성 증대, 유신의 등장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첨예한 긴장 속에 있던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과 유럽의 경제 성장은 미국을 위협하고, 소련은 중국와의 이견이 첨예화 되면서 역시 그 세력이 약화된다. 미국은 자국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주의권의 갈등을 이용한 새로운 세계전략을 구상한다.그 구상의 산물이 닉슨 독트린이다. 핑퐁 외교로 대표되는 미, 중 수교와 배트남전의 종전 등은 냉전체제가 녹아내리는 것을 상징했다. 국내에서는 주한 미군 2만명이 철수하고 남북화해가 미국에 의해 권유된 끝에 72년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이 등장(?)한다. 이는 전국을 통일의 기대에 설레게 만들었었다고 어른들께서 회고하시곤 한다. (물론 커리에도 써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은 박정희 정권의 정권 유지 수단을 강하게 침식해 들어가 그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71년 선거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두어 다음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던 박정희는 강경책을 선택하게 된다.2. 70년대의 경제 성장* 중화학공업화 전략과 문제점70년대 초, 산업구조 조정은 세계적인 흐름이었고 이에 따라 개발도상국이 조립가공형 산업이나 중화학공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공산군에 패한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는 국내 군수산업을 육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외에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여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72년 8?3조치,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국민투자기금법, 74년 5?29특별조치 등)를 업은 소수의 재벌기업에 의해 성장할 수 있었다. ( ->그러나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국내 산업 간의 분업적 관련 없이 수출위주의, 대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3. 반 유신체제 투쟁운동 전개와 박정희의 몰락70년대 민중의 투쟁은 치열하였지만 군부정권의 물리적 기구와 지배이데올로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조직 역량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경제 성장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어주었다. 또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은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된 노동자 농민의 투쟁이 권력과 대결하면서 점차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항쟁, 투쟁들이 벌어지던 중-_-;; 1979년 10월 부산에서 유신정권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투쟁은 마산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이 항쟁은 학생과 노동층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였고 지배층안의 분열을 촉진시켜 유신체제가 몰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From now on, I will compare the second novel with the last one. The reason why I choose them is that there are great differences between the two stories. First of all, I root for the second novel (actually, I'd better say that it is not a novel but a sentence because the story is just only three line long). Because I think that at least some level of labor is essential in our lives to maintain the standard of living.From now on, I will compar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hese two novels briefly. First, let's look into the backgrounds of the novels. The background of the second novel is a consumer society. The novel shows it obviously in those tree lines. On the contrary, the background of the last novel is the agricultural society.
Critical Approach to 'ARABY'-형식주의 비평의 시선으로 바라본 ‘ARABY'이 작품을 한번 쭉 읽고 나서 ‘이 글이 무얼 말하고 있는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간단히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말하자면 ‘한 소년의 사랑과 실망’ 이정도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말을 하는 사랑이야기와 이 소설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 환경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I' 가 정작 ‘she’를 만나는 장면은 친구들과 놀다 집으로 들어가던 길, 남몰래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것, 그리고 응접실에서 만남뿐이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다른 장면들은 위에서 제시한 주제를 진정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한 마디로(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가적인 서술들은 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이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이 소설에 기능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우선 이 소설의 도입부부터 한 번 쭉 순차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소설은 ‘I’가 사는 동네의 외양을 묘사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집에 대한 설명, 자신의 집에 살았던 목사의 죽음에 대한 설명, 그의 유품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 소설은 우선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나, 주인공의 눈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개되어 진다는 말이다. 주인공의 눈을 통해서 본 마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모습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는 그가 느끼는 그 곳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우선 그는 마을이나 기타 배경을 ‘조용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한 듯, 낡다, 쓸모없다, 황량하다’ 등등 자신을 완전히 그 곳에서 떨어뜨려 놓고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매일 아침이 되면 혼자 그녀의 집을 남몰래 쳐다본다거나,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나, 아저씨와 대화를 거부(?) 당하거나, 머서부인의 이야기를 멍하게 듣고 있는 모습들. 나는 이러한 장면을 접하고 나서 확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아이 왕따인가?’ 한마디로 작가는 이러한 주위 환경의 묘사를 통해 아는 곳으로부터 격리 되어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강조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그럼 좀 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소년은 혼자 응접실로 갔었고, 그곳에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소녀에게서 바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지만, 환상을 품고 간 시장에서 그는 대부분 문을 닫은 점포를 보게 되었고, 들어간 가게에서 점원들의 농담을 듣게 된다. 적어도 소년의 입장에서 그 곳은 소녀가 말해주었고 소녀를 위한 선물을 살 수 있는 성스럽고 환상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멋진 그곳에서 그렇게 시시껄렁하고 가치 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점원들의 행동, 소년을 무시하는 듯 한 아무런 정이 없는 사무적인 말투는 시장에 대해 동경을 갖고 있던 소년을 완전히 두 번 죽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런 장면들은 소년이 느꼈던 소외감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소년의 좌절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의 설정을 통해 이 소설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위와 단절되어 있는 소년에게 한 소녀가 등장하였고 그녀를 통해 삶의 빛을 찾았다고 생각 하였지만 또다시 단조롭고도 차가운 주변사건들에 의해 소년이 크게 실망, 좌절한다.’지금까지 이야기 했던 부분들이 주인공을 특징짓는 외부적인 요소라면 지금부터 다룰 내용들은 주인공을 특징짓는 내부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주의 깊게 읽어본 두 번째 독서에서 나는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소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기독교 의식이다.시작부터 등장하는 기독형제학교, 목사 단순히 이러한 단어를 차치하고서라도 주인공이 장터에 가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을 ‘our Lord'의 뜻으로 하는 아주머니의 말 등등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인공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종교의 모습은 주인공이 스스로 생각하는 장면에서 역시 빠지지 않고 나타나게 된다. 성배를 들고 적의 무리를 뚫고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는 모습 등. 어쩌면 이러한 것을 보고 단순한 주변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끊임없는 ’‘기도’를 외치는 가게 점원의 모습을 보았고 성스러운 술잔을 들고 적을 뚫고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으며, 또한 자신도 모르게 기도 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곤 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적어도 주인공인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감정은 종교적인 의미로 성스럽게 다가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