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Dracula)』는 시대를 초월해 때마다 여러 매체의 형태와 수단으로 재현되어서 어렸을 적부터 자라오면서 우리의 뇌리 속에 우리나라의 머리 푼 귀신 정도에 견줄 만한 악의 화신 내지는 공포의 전형적인 형상으로써 존재해 왔다. 그래서 드라큘라를 떠올릴 때면 백치 같은 얼굴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이며 금방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어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존재의 희생양이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인상과 함께 마늘과 십자가와 빛을 가지고 싸워야겠다는 인상을 갖게 했다. 이미 이렇게 굳어져 버린 이미지 속에서 어렸을 적 순진한 생각들에 흥미가 가기도 하고 악마라고 하기에는 인간적인 면모에 동정심이 가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러한 드라큘라는 현대 사회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상력을 제공하는 공포 영화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라큘라의 기본적 토대 위에 여러 문화를 겹쳐 보기도 하고 부분적 성격을 확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원작을 뒤집어 다시 쓰기를 통해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이기도 하면서, 장르도 다양하게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즉, 각자의 나름대로의 렌즈를 마련하였다. 물론 시대를 초월해 여러 시각과 각도에서 논의되고 분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문학작품이란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드라큘라를 바라보는데 무엇이나 가능한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 어떤 렌즈를 가지고 바라 봐야 할지가 문제이다.♣그는 우리의 영원한 적인가?위의 질문에 대해 먼저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인간으로써는 혐오스러운 이미지,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악마화 시키는 악행, 권선징악의 결말로 판단컨대 심장에 말뚝을 박히고 패배하고 마는 결말은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데 당연한 귀결로 이어진다. 우리가 드라큘라를 부정적 이미지로써 마늘과 십자가, 빛을 손에 쥐고 용감하게 싸워야 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차별과 편견을 엿볼 수 있다.첫째, 악과 선, 합리와 비합리,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의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어서 그는 선에 맞서는 악의 대변인이기 때문이다. 신과 교회가 법이던 사회에서 한 상처받은 영혼이 어둠의 힘으로 신에게 복수하겠다 라는 선포는 아무리 그가 신과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하더라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칼을 꽂고 피를 마시며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죽지 않고 존재하는 것 모두가 이성으로 판단컨대 악이고 비합리며 비정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선의 상징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빛과 십자가는 이 악의 화신에 대한 무기로서 존재하고, 우리는 순수의 선을 위해 마치 『엑소시스트』의 신부처럼 반 헬싱 교수가 하는 대로 마땅히 심장에 말뚝을 박음으로써 처치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크루서블(Crucible)』에서 세일럼 교회와 법정이 악의 행위에 대하여 그것의 실제는 보지 못하고 이념의 잣대로 생명까지 가위질했던 것과 같은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틀로 짜여진 공식이라 할 수 있겠다.둘째, 450년 중세의 다리를 건너뛰어 빅토리아 시대에 입성한 드라큘라의 구시대적인 체제와 사고 방식에 대한 현세의 과학과 이성의 힘의 발휘로 인한 옛적 문화의 후퇴와 같은 것이다. 신 중심의 중세 시대에 고딕적인 요소로써 힘을 발휘하던 드라큘라에게 의사, 신학자, 역사학자, 철학자인 동시에 법학자인 반 헬싱의 모습은 모든 지식 체계와 합리적인 이성으로 시대적 소명으로 맞선다. 물론 드라큘라의 동물이나 바람으로 변하는 변술이나 초능력은 이를 초월하기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지배당하고 만다는 합리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초월적인 존재도 떠오르는 이성 앞에서는 목이 잘리고 관에 드러누워야 하는 드라큘라같이 된다는 신질서의 대체라는 틀 속에서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이렇게 두 가지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바라보았을 때, 이념적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미 『크루서블』에서 증명한 바 있듯이 그 허구성과 독선은 존재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와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보다 더 발달된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성에 부딪힌 엄청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처치해야할 적으로서의 드라큘라의 존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렌즈를 끼고 볼 수는 없을까?♣그는 외로운 전사였다영화 『드라큘라』의 초반부의 배경을 보면 드라큘라 백작의 살았던 시대와 사회, 환경,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어떤 영향력들이 흘러갔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이해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에 대하여 구심점으로 향하기보다는 원심력에 더 끌려 밖으로 나갔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법칙이 잘못되게 굴곡을 가지고 돌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똑바로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외로운 전사로써 시대의 흐름에 맞서 싸워나가고자 한 영역들은 앞에서 말한 우리의 굳어진 인식들에 대한 깨우침이고, 당시 영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인 요소와 성 억압적인 요소들에 대한 공격적으로 비판이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먼저 현명함과 용맹스러움으로 추앙 받는 성주였던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되었는가 그는 십자군 전쟁에서 신과 교회의 이름을 걸고 목숨을 다해 싸우면서, 포로들을 하나씩 긴 꼬챙이로 찌르고 땅바닥에 곧게 세워 두는 등 잔인하고 무도한 행위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구원받지 못한 상처받은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듯이 교회의 이름으로 유럽의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이고 피 값을 치렀던 그런 의미의 제국주의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드라큘라가 영국으로서는 가장 국력이 융성했으며, 대외적인 식민 제국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세계의 강국으로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견지하던 시대였던 빅토리아시대에 영국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국의 상황은 마치 빛을 받은 적 없는 무지와 야만의 세계에 빛을 밝혀주고 계몽시킨다는 포장된 선한 논리가 깔려 있지만 실상은 지배와 예속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우리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이나 진 리스의 『드넓은 사가소 바다(The Wide Sargasso Sea)』를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패권과 이해관계가 빡빡하게 얽힌 상자를 위대한 명분아래 포장했던 자신이 신의 신성한 이름으로 싸웠던 십자군 전쟁과 영국의 식민 제국주의가 너무 닮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증오와 비극이 화해와 건설로 바뀌지 못한 채 시간의 강을 건너 트란실베니아라는 타자로써의 입장으로 그에 대해서 저항하고 외롭게 싸우면서 고향의 흙을 가지고 영국으로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귀한 이름으로 드높아져 있는 영국인들의 피를 빨고 모순됨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방해받고 실패하면서 외롭게 다시 관속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동유럽이란 타자적인 입장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싸웠던 전사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