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우, 그것은 일반적으로 두 시기의 미술로 나누어진다. 조기 르네상스(14~15세기)와 성기 르네상스(15세기말~16세기 전반기)가 그것이며, 특히 1480년~1520년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고전적」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위대한 미술의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거니와, 그리고 그 주역이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비단 이 세 거장에 그치지 않고, 특히 15세기 후반기부터 수많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배출시키며 문자 그대로의 성기를 이룬다. 이들 예술가들은 각기가 일가를 이루기는 하되, 그들의 예술이 또 다른 거봉에 의해 압도 당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르네상스의 주요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경향을 보고자 한다.Ⅱ. 본문1.레오나르도 다빈치전성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거장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인데 그는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만능의 천재였다. 그는 그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항공학·동물학을 포함한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빛을 던진 과학자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예술을 과학적 이해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예술가는 가장 뛰어난 관찰자로서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에 따라 이해하고 습득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계를 탐구하는 완벽한 도구로서 『눈』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뜻이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대개 과학적 사고를 언어나 수학적 기호로 표현한다. 레오나르도 시대에는 훌륭한 그림이 수백수천의 말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의 소묘는 생명감이 충실해 있다.그의 비망록에 그려진 소묘를 통해 그의 생각을 파악 할 수 있게 된다. 피렌체 교외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출생한 레오나르도는 베록키오에게서 배웠다. 그는 메디치가의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지적 세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148는 피렌체로 왔는데 그곳에서 4년 동안 머물렀다. 피렌체에서 그린 [작품설명 1참조]는명상적인 분위기와 평온한 아름다움에서 를 연상한다. 쳔걍 "懇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던 수수께끼같은것은 찾아볼 수 없다.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라파엘로에게 미치게 되는 것은 조금 후의 일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렸을 때, 율리우스 2세는 젊은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바티칸 궁전의 몇몇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했다. 이들 벽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작품설명 2참조]인데, 이것은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작품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벽화의 주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이스의 철학자들 군상이다. 강렬한 표현력과 건장한 육체 그리고 군상의 극적인 구성은 분명히 미켈란젤로의 영향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단순히 미켈란젤로 인물상의 동작이나 자세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신의 양식 속에 동화시켜 미켈란젤로와는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육체와 정신, 행위와 감정 사이에는 조화 있는 균형이 자리잡고 있다. 이 대집회에 참석한 인물들 각자는 각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인물의 양식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크지만 벽화의 전체 구성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보다는 오히려 레오나르도의 에 가깝다. 이것은 라파엘로가 철학자들을 통해 『영혼이 의도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개개인들을 제각기 분리시키고 또는 군상을 커다란 덩어리로 형성시켜서 음악적인 화음으로 결부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좌우대칭적인 구도와 원근법을 사용한 건물의 상징성―초점은 아아치로 테를 두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머리 위의 후광에 있다―역시 레오나드로의 기법을 연상시켜 준다. 그러나에 보이는 거실에 비하면 라파엘로의 건축 양식―드높은 원개(圓蓋), 원통형 궁륭, 거대한 조상 등―은 레오나드로의 그것보다 더욱 큰 중요성을 띠고 있다. 브라만테의 영향을 받은 이 벽화의 건축 blue,mountain blue--보라:mauve,lavender--하양:white lead(연백),zinc white(산화아연으로 만든 흰색),titanium white무엇보다도 선명한 색을 필요로 했던 인상주의자들에게 이 획기적인 발명은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그들은 자연에 나가서 빛의 교향곡을 화폭에 마음껏 담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4.인상주의의 의의a.등가화 된 화면인상주의 회화는 액센트가 없이 고른 연속적인 화면의 미학을 이룩했다.기존의 모든 그림들은 화면의 대상에 경중을 두었다.붓터치나 명암,원근법 등을 이용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구분했었다.그러나 인상주의는 기존의 화풍과는 달리 칠해진 화면에 가한 무게와 긴장을 동등하게 분배한 것이다.이들은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브러쉬 스트로크를 사용했고,일정한 패턴(모네의 물감바르기,피사로의 뿌리기 등)을 유지함으로써 인상의 객관적 명료성이 흐트러지지 않게 한 것이다.이것은 '그림의 민주주의화'라고 까지 평해진다.현대의 훌륭한 회화,디자인,심지어 포스터나 비누 상자 등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음악적으로 스윙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 화면 등가의 원리라는 미학에 입각하고 있다.b.주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인상주의는 주제의 의미를 없애 버렸다.기존의 그림은 분명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고,감상을 위해서 그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했다.그러나 인상주의는 그런 내용 자체를 없애버리고 등가화 된 화면에 풍경을 그림으로써 내용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이도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c.합리성의 전통 파기인상주의 그림에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거의 무시되어 있다.있다해도 눈에 보이는대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정확한 것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또한 이들은 기존의 그림이 drawing 이었던데 대해서 recording 으로 만들어 놓았고,선 위주의 그림들을 색체 위주로 바꾸어 놓았다.이들은 이렇게 합리성의 전통을 파기함으로써 그림에 있어서의 illusion을 없앴다.결국 이것은 우리 시대의 회화의 정신의 모태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다.서양 미술(17,18세기미술) menu로--------------------------------------------------------------------------------Ⅴ. 17, 18세기 미술 - 왕실 중심의 동적인 미술.1. 바로크(baroque) 미술 - 17C 미술 양식.- 동적이고, 화려한, 괴상하고 과장된 미술. 남성적. '이지러진 진주’(에스)란 뜻.(1) 화가1) 엘 그레코(El Greco 1541 ~ 1614, 에스) - 종교화가.2) 벨라스케스(Velasquez, Diego Rodriguez 1617 ~ 82)- 에스, 궁정화가로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 화가.3) 루벤스(Rubens, Pieter Paul 1577 ~ 1640, 벨기에) - 풍만, 관능적인 필치.4)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 ~ 69) - 네덜, 광선의 화가.5) 그 외에 호베마(네덜), 반 다이크(네덜), 푸생(프), 할스(네덜), 카라바조(이탈), 베르메르(네덜) 등.(2) 조각 - 베르니니(Bernini, Gian Lorenzo 1598 ~ 1680, 이탈)(3) 건축 - 베르사유 궁전(1661 ~ 90, 망사르) - 화려함.성테레사의법열 사냥을까는찰스1세 수잔나푸르망 웃기는기사 숲속의못(대리석,베르니니, (207*166cm, (유채,1625경, (유채,1624, (유채,1소 기술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의 재현으로 낭만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후자는 사회참여적이고 소극적인 계몽주의-개혁하지는 않아도 회화를 통한 적나라한 현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가 배어있는 진상(reality)과 진실(truth)을 갈구한 사실주의하고 할 수 있어서 회화를 수단으로 한 사상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겠다.낭만주의에 대한 사실주의는 현실을 간과한 어떠한 표현도 부정한다. 사실주의 입장에서 낭만주의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는 보이는 대로의 과장없는 색감으로 결과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고 주제표현을 강화해 가장 큰 대조를 보인다.쿠르베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비평에 맞서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즉 리얼리즘은 이러저런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기법이나 방식으로부터 세계관으로 표명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예술을 인종· 시대·환경의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 역사가 H.텐과 소설가 졸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쿠르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얼리즘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돌깨는 사람들》과 그 이듬해에 그려진 《오르낭의 매장》일 것이다. 특히《오르낭의 매장》에서 그는 매장의 세속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이 풍경을 사회공동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든, 또 내세와 어떤 관계를 가지든 상관없다. 매장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만이 이 그림의 요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회화적 리얼리즘이다. 쿠르베와 더불어 리얼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도미에와 밀레이며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자 현실의 규명(糾明)이며 세계관았다.
1. 이집트 시대의 개관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집트 문화는, 건조온열한 기후가 특 징임. 강유역 일대에 산재한 오아시스와 정기적인 6월 홍수의 결과로 생 긴 하류의 비옥한 델타지대 등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하는 사회구조를 출 현시켰고, 이를 중심으로 한 부족국가들이 일찍부터 발달하게 한 배경을 제공하였음. 이 부족국가들은 크게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뉘어 존재하 다가 BC3000 년경 최초의 통일국가로 통합되어 제 1왕조가 출현하였음. 이 후 형성된 이집트 왕국은 3왕국으로 구분되었고, 이집트 왕조사는 3왕 국 26왕조가 계속되었음. 사회제도는 비교적 업격한 계급사회를 형성하였음. 신격화된 왕인 파라오를 정점으로 그 밑에는 신관, 귀족, 관리, 군인, 직인, 농민, 노예 순 으로 계급을 형성하였음. 산업구조는 농업이 주였으며, 홍해, 지중해를 건너 시리아, 레바논과 교역하였음. 이집트는 특산물인 파피루스와 마를 수출하고, 아프리카나 서 아시아로부터는 금, 은, 동, 목재, 향료, 동물의 가죽, 타조 깃털 등을 수입 했음. 종교는 농업과 관계가 깊은 천체와 자연현상을 숭배하는 다신교였으 며 그 중에서도 태양신인 Re(Ra)가 가장 강력한 주신이었고, 또한 영혼불 멸과 사후세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피라밋을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침. 이집트의 왕조사인 3왕국 26왕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됨.(1) 고왕국 (Old Kingdom) 1-10 왕조, BC 3400-BC 2160Menes왕이 창건한 고왕국은 Memphis를 수도로 10왕조에 걸쳐 약 1000년간 계 속되었음. 피라밋 왕조라 불리우는 3,4 왕조 시기를 전성기로 급속한 발전을 보였고, 6왕조부터는 지방귀족의 대두로 정치적 봉건시대가 펼쳐졌음.(2) 중왕국 (Middle Kingdom) 11-17 왕조, BC 2160-BC 1580수도가 Thebes로 이전되면서 정치적 상업적 활동 범위가 확장되고, 영토도 확장 되었음. 토목 건축과 문화 예술의 발전을 보여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고전시대를 이루었음. 그들인 나체의 남자·전사(戰士)·말·괴수(怪獸) 등의 조각은 기하학 양식의 항아리 그림과 같이 신체의 마디가 강조되고, 추상화와 안정감이 강하며 생명력이 넘치지만 조소성이 충분하지 못하였다.BC 8세기 중반 이후 오리엔트 지방과 교류하면서부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영향을 받아, BC 7세기부터 그리스 조각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즉, 이때에 이르러 그리스 조각에는 등신대(等身大)의 상(像)이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모습·표현·기교는 오리엔트 조각에서 배운 것이다. 상의 출현은 거의 신전 건축의 탄생과 시대를 같이한다. 신전의 박공(뱃집 양편에 八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메토프(metope)·프리즈(frieze)의 부조(浮彫)가 구도와 여러 자세 등을 요구하여 조각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델로스섬에서 출토된 《니칸드라의 헌납상》(아테네 고고학 미술관 소장), 《오세르의 부인상》(루브르미술관 소장)은 아르카이크 시대 최고(最古)의 조상(彫像)이다. 그 후 BC 600년경에 각지에서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등신대나 거대한 쿠로스상[靑年像]과 코레상[少女像]들이 만들어졌다. 쿠로스상: 나체로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양손은 허리에 대고 바르게 서 있다. 그 모습이나 표현에는 이집트 조각의 영향이 강하다. 코레상은 항상 옷을 입고, 한 손은 가슴에 대거나 치마의 주름을 잡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조각의 대표적인 상으로는 스니온 출토의 《쿠로스상》, 디필론 출토의 《쿠로스상의 두부(頭部)》, 델포이미술관의 《클레오비스와 비톤의 형제상》 등이 거의 완전한 모양으로 남아 있다. 딱딱하지만 격렬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초기의 상(像)에 비하여 중기 이후는 거의 등신대이거나 조금 더 커지며, 근육 표현은 한층 더 자연스러운 형태에 가까워진다. 이 시기의 조상(彫像)은 부드러운 머리, 아몬드(almond)형의 눈, ‘아르카이크 스마일’이라는 입 모습 표현이 특징이다. 아크로폴리스의 《모스코폴로스(송아지를 멘 청년)》상(像)이나, 아나비소스 출토 《쿠로스상》 원근법(透視遠近法)이 거의 달성되었다.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의 벽화는 이 헬레니즘 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4. 건축그리스 건축의 예술적 달성은 대리석으로 만든 신전 ·극장 ·스토아(stoa), 그리고 다른 공공건물이나 기념비적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으뜸 가는 현존 건축양식은 서양건축의 기본적 양식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리스의 신전은 최초에는 목재, 다음에는 석회석과 같은 무른 석재들로 지어졌으나, 마지막에는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신전은 신의 주거(住居)이며, 신상을 모시는 건물로서, 그 안에 모여 제례의식(祭禮儀式)을 행하는 장소는 아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적 건물이 내부 공간에 중점을 두는 것과는 달리, 외형적 모습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했다. 수평의 보[樑]와 수직의 기둥에 의한 단순하고 명석한 신전은 각 부분이 유기적 통일을 유지하고 아름다운 비례를 가지고 있어서 일종의 조소적(彫塑的) 성격을 보이고 있다. 신전의 원형(原形)은 미케네의 단순한 메갈론(megalon) 형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그 평면은 전실(前室) ·주실(主室) ·보고(寶庫)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간단한 구조는 인 안티스형(型)이라고 하며, 델포이의 성지(聖地)에 세워진 아테네인(人)의 보고, 시프노스인(人)의 보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면 또는 앞뒤에 열주를 가지는 형식을 프로스틸로스(prostylos), 신전 둘레에 1줄의 기둥을 둘러 세운 형식을 페리프테로스(peripteros), 2줄의 열주(列柱)를 세운 것을 디프테로스(dipteros)라고 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은 페리프테로스, 디듀마의 아폴론신전이나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은 디프테로스 형식의 대표적 신전이다.그리스의 신전형식은 그 기둥의 양식(樣式)의 차이로 도리스식(Doric 式), 이오니아식(Ionic 式), 코린트식(Corinthian 式)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서 도리스식이 비교적 일찍이 도리스인(人)이 살고 있던 그리스 본토와 남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도리스식의 특징은의 공동주택(아파트먼트와 같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및 개선문,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 수도교(水道橋) 등이 있다.2. 회화로마시대의 회화는 79년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잠긴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발굴을 통해 로마회화의 진면모가 드러남으로써 신고전주의 형성을 자극했다. 그리고 모든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처럼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 이집트, 에트루리아로부터 빌려온 요소를 절충한 특징을 보여주며 종교적 영웅적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화, 정물화 등 순수회화 장르가 이미 로마시대에 나타나고 있음도 주목된다.폼페이와 주변 도시들의 화가들과 실내장식가들은 위대한 헬레니즘 미술가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스 회화들이 대부분 유실된 반면 로마회화는 폼페이 등의 매몰로 오히려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폼페이 회화는 크게 네 가지 양식으로 나눠진다. 첫째, 제1양식은 기원전 2세기에 지중해 연안세계에 두루 보급되었던 양식으로 회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대리석판처럼 보이도록 형태를 갖춘 채색된 석고로 단순하게 벽면을 덮은 것에 불과했다. 제2양식은 로마의 독창적인 창조의 결과였다. 제2양식의 벽면들은 방의 경계가 뒤로 물러난 듯이 보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듯이 보이도록 그렸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은 공간이 그럴 듯하게 연장된 느낌을 주도록 언제나 합리적이고 자연스럽지만 재미있게 다양화되었다.논리적인 양식에 싫증을 느낀 마술가와 그들의 주문자들은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벽의 평평하고 한정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세부를 즐기며, 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모든 외양을 공공연하게 거부하는 제3양식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 62년경 폼페이에 지진이 일어나 많은 장식들을 다시 장식해야 할 일이 발생하자 그들은 제3양방사형 평면과 파상형 평면이 그것으로 방상형 평면의 최초의 예들은 뚜르뉘와 노트르담에 있는데 둘다 11세기의 것이다. 그 원형은 뚜르의 셍 마르뗑 교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파상형 평면의 예는 끌뤼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의 기능상의 이유로는 성자들에 대한 예배가 늘어났고 또 모든 성직자들이 일일 미사를 올리는 관례가 늘었기 때문에 더 많은 제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쪽 부분에 예배실들을 두게 되었다. 그 예배실들을 하나의 응집된 통합체로 초리하였는데 앱스 주위에 앰뷸러토리를 두고 방사형 예배실을 덧붙이는 방법을 쓰거나, 트랜셉쓰 너머로 아일을 연장시켜, 주 앱스와 거의 평행한 작은 앱스에서 끝을 맺고 아울로 각 트랜셉트의 벽을 따라서 한 개, 두 개 또는 세 개의 앱스를 두기도 했다.11세기 초 노르망디 지방에서 발생한 새로운 효과적인 방식에 의한 성당의 제작이 영국에서 있었다. 건축에서의 노르망디 양식은 서구의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장 일관성있게 변화시킨 것으로서 11세기의 프랑스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영국에서는 그 영향이 더욱 지대하였다.새 원칙은 바닥에서 천정까지 이르는 커다란 샤프트 들로서 베이와 베이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천장이 모두 평면인 것은 네이브 폭만큼을 볼팅하는 기술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성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공간 분절이 다시 이루어졌다. 11세기 말경 모든 것이 새로운 분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더 복잡하고, 더 다양하고, 더 생동적인 형태를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형태에 대해 크게 강요하지 않고 훨씬 개성있는 표현을 허용했을 것이다. 더럼 대성당의 시기부터 초기 로마네스크에서 성기 로마네스크의 시대로 옰겨갔다고 할 수 있는데 1093년 착공하여 동쪽 부분은 1104년에 네이브는 1130년에 완성되었다. 네이브는 실재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데, 이는 이 때까지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영국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평천장 대신에 리브볼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Ⅰ. 序論1. 지적재산의 국제동향지적재산권은 산업·과학적 발명과 문학·예술적 창작 등과 같이 인간의 정신적 창작활동의 결과로 발생되는 지적생산물에 대하여 배타적인 독점권을 부여하는 권리이다. 지적재산권 중 특히 특허·실용신안, 의장 및 상표권과 같은 산업적 가치가 있는 권리는 산업재산권으로 분류되어, 국가기술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오늘날 산업기술의 복잡성 증가와 급속한 발전에 따라 지적재산권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영업비밀, 컴퓨터프로그램, 반도체설계, 캐릭터 그리고 프렌차이징 등도 신지적재산권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재산권은 1993년에 체결된 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으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그 보호가 강화되고 있다.이와 같이 지적재산권은 그 인정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또 지적재산권협정의 타결로 인하여 국경없이 그 보호가 강화되고 있으므로 이는 국가산업발전 및 국가경쟁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산업자본으로 기능을 하게되었다. 이미 기술선진국은 자국의 지적재산권의 보호의 영역을 넓혀 후발주자인 개발도상국과의 기술격차 확보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기술 선진국은 기술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 그 결과 국제경쟁력 있는 특허제품을 통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막대한 이윤을 기술개발에 재투자하여 점점 더 가속적으로 후발주자와 기술 격차를 벌이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1994년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 발효중인 특허 중 약 84%를 미국, 일본, EU가 점유하고 있다.2. 우리나라의 현황우리나라는 지난 한해, 약 1624억 7100만 달러의 상품을 외국에 수출하였고, 이중 DRAM 과 휴대폰, 그리고 자동차 등으로 구성된 5대 수출 주력상품을 통하여 총 수출액의 약 1/3 에 해당하는 586억 3400만 달러를 벌여들였다. 위에서 열거한 주력상품들은 기술집약적인 상품들로 이는 우리나라의 산업 기술수준이 이미 세계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영한다할 수 있다.작년 한해에 우리나라의 전체 )하지만 이러한 고무적인 소식의 이면에는, 우리나라 지적재산권 산업의 또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2001년 우리나라의 특허 사용료 수지 적자는 아일랜드에 이어 세계 2위로, 우리나라 국제 특허 출원의 양은 세계 수위로 선진국에 뒤지지 않지만, 실제 산업 생산에 사용되는 기술은 외국의 것으로, 우리나라 특허출원의 기술수준이 아직 선진국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표.2 참고).{순위특허권 등 사용료 수지1위아일랜드 -84.22위한국 -21.33위독일 -20.9표 (단위:억달러-출처:한국은행)이러한 특허권의 사용료는 대게 우리나라의 주력 상품의 생산에 사용되는 외국의 원천 기술의 사용료에 기인한 것이다. 원천기술의 미확보로 인한 현재 우리나라가 입고 있는 국가 경제적 손해는 막심하다. 그 단적인 예로 현재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 상품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휴대폰의 경우, 그 매출액의 약 5%를 원천기술 제공 회사인 퀄컴(Qualcomm)에 기술사용료로 지불하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 전자제품의 매출 당 순이익이 30%를 넘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수출로 벌어들이는 순 수익의 약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고스란히 기술사용료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3. 문제의 제기이러한 고부가가치 기술 부재의 현실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기업과 연구소들이 산업재산권에 대한 관심 부족과 투자의 부재, 그리고 정부의 산업재산권 육성을 위한 정책 미흡함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국경 없는 지식경쟁사회에서 한 국가의 국력을 결정하는 것은 군사력보다는 경제력으로, 이러한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기술 경쟁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 각국과 기업들은 특허전선을 정렬하고 기술대전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21세기 기술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 국가로 살아남기 위서는 우리의 기업과 연구소 또한 이에 뒤지지 않고, 기술의 연구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이를 통한 연구 결과를 산업재산권의 형태로 정렬하여, 단순한사적 구제에는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침해금지청구, 신용회복조치, 부당이득조치 등이 있고 형사적 구제에는 지적재산권 침해사범에 대하여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다.그러나 민사적 구제는 분쟁해결에 장기간이 소요되고, 또 그에 따른 보상이 미미하여 권리자에게 실질적인 구제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 특히 특허 침해소송의 경우, 특허법원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권리구제절차가 이원화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또한 형사적 구제에 있어서는 상표사범을 제외하고 국가의 형벌권 발동이 미미하여 무분별한 침해가 만연되고 있다.3 특허법원 운영상의 문제점1998에 개원한 특허법원은 산업재산권 소송에 관한 전문법원으로서 지적재산권제도 정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특허법원의 운영결과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 산업재산권침해소송과 심결취소소송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에도 서로 관한을 달리함으로 인하여 분쟁의 신속하고 효과적 해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산업재산권침해소송의 경우 일반 고등법원이 관할하고 있어,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로 인한 문제점 또한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위에서 나열한 불합리한 정부 제도는 일차적으로 기업과 연구소의 기술 개발의 속도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기술 개발자의 의욕 또한 저하시켜 결국 기업과 연구소의 경쟁력이 상실된다. 또한 특허침해 소송의 경우 장기간의 소송기간과 고액의 배상금 등으로 인하여 기업과 연구소의 연구개발능력은 더더욱 악화되고있는 실정이다. 특히 증가되고 있는 선진국으로부터의 지적재산권 공세를 감안하면 이와 같은 현상은 가속화 될 것이다.필자는 본고를 통하여, 위에서 열거한 지적재산권 행정 문제점 중 2에 대한 대안으로 를 그리고 3과 4의 대안으로 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Ⅱ. 本論1. 특허 침해 소송의 관할의 특허법원 이양(1) 우리나라의 특허 침해 소송 절차21세기의 과학기술 경쟁은 한 마디로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1998년 3월 1일이다. 그러나 최근 대한변호사협회는 입장을 정하고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2) 특허 침해 소송 관할에 대한 외국의 예 - 일본과 미국1 일본의 경우▷ 1998년 1월에 개정 시행된 일본 민사소송법도 특허권, 실용신안권, 회로배치이용권 또는 프로그램의 저작물에 관한 저작자의 권리에 관한 소는 관할 지방재판소 이외에 동경지방재판소, 오사카 지방재판소에도 제기할 수 있도록 하여 1심 단계에서부터 관할을 집중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1심 재판의 관할 집중은 현시점의 우리나라의 특허침해소송 관련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이는 비록 특허침해 소송의 1심은 일반법원에서 수행하더라도 관할의 집중을 통한 재판부의 전문화를 실현할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현재 지적재산권 분쟁은 특허청과 재판소에 차례로 돌리는 형태여서, 실제 재판 결과에 대하여 누구도 책임을 지지않는 상태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2 미국의 경우▷ 미국의 경우 특별 1심 법원인 연방청구법원과 국제무역법원, 그리고 조세법원에 대한 항소법원인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이 1982년 10월 1일자로 생기면서 특허 소송건이 증대되었다. 극소수의 특허건에만 대법원에서의 재심리가 수락되기 때문에 연방순회 항소법원의 판결이 실제로 미국 특허법의 종국판결인 셈이다.→ 미국에서는 특허 소송건에 관한 심결이 일반 법원이 아닌 전문법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면적이 100배에 가까이 넓은 미국에서도 특허침해구제소송의 항소심을 지역관할 고등법원으로 하지 않고 CAFC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교통상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기술전문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신속ㆍ정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 이다.(3) 특허 침해 소송 관할 이양의 당위성특허침해소송에서는 특허권을 침해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기술 판단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따라서 특허사건에 대한 기술전문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기술심리관을 둔 특허법원에서 특허침해소송의 제2심을 전속 관할하도록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기술심리관 제도는 독일의 기술판사제와 일본의 기술조사관제도의 절충적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그동안 기술심리관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당사자들이 종전보다 판결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등 긍정정인 결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복잡 다양한 기술발전 속도에 비추어 기술심리관수의 확충이 필요하며, 그 소속도 파견기간동안 특허청이 아닌 법원으로 하는 것이 기술심리관들의 사명감과 책임감의 고양 면에서 바람직 할 것이다. 현재 소송절차에서 기술심리관은 지정된 사건에 대한 기술설명서를 작성하여 기술내용 및 쟁점을 법관에게 설명하고, 판결 준비절차에 참여하여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재판부와 사이에 기술내용에 관한 충분한 논의를 하고 준비절차 종료 후에는 의견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현재 기술심리관은 실제적인 합의에는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술심리관의 보고서 내지 의견서가 공표되지 않고 있다. 또한 그 역할에 맞는 지위와 신분의 보장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우리나라의 상황은 독일의 경우와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비교가 효과적인 이유는 첫째, 독일연방특허법원이 우리나라 특허법원의 실제 모델이라 볼 수 있으며, 둘째, 독일연방특허법원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기술판사라는 제도를 두고 있다는 점과, 셋째, 기술판사와 법률판사가 공존하는 독일연방특허법원의 역할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법원의 처리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매우 높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독일의 특허법원내의 합의부는 항상 기술판사의 수가 법률판사에 비해 과반수가 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재판부의 기술적 전문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술판사는 연구개발경력이 오래된 인사로서 특허법원장이 임명한다. 또 다른 예로, 미국의 경우는 이공계 대학을 마치고 law school에서 법률 공부를 한 후 특허관련 실무에 종사하기 때문에 기술적인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일본은 우리의 기술심리관 제도보다도 재판부의 기술적 전문성 확보의 면에서 뒤떨어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