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서 론Ⅱ. 본 론◎『미국의 일방주의와 이라크전쟁』에 관한 고찰● 미국의 패권적 지위와 세계패권전략● 9.11테러 이후의 국가안보전략● 세계패권전략의 차원에서 일어난 전쟁● 석유장악을 위해 일어난 전쟁● 일방주의의 산물로서의 전쟁Ⅲ. 결 론Ⅳ. 참고문헌(참고 사이트)이라크전쟁과 미국의 세계패권전략Ⅰ. 서 론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지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은 이라크전쟁에 관해 수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라크 전쟁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제 이라크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리가 필요할 때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의 본질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이러한 세계질서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이라크 파병이 결정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전쟁과 전략적 패권주의에 동참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라크 전쟁문제는 단순히 이라크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전체 지구촌 사람들의 공동의 문제이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이후의 미국의 세계제패전략의 본질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전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은 본질적으로 수세적이며 방어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정치 외교적 영향력의 확대를 저지하고 기존 자신들의 정치 외교적 경제적 지배력과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제연합과 국제기구들을 내세우고 서유럽 일본 등 제국주의 나라들과의 국제적 연합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필연적으로 국제연합과 국제법, 그리고 국제적 협력의 틀에 강하게 구속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미국의 군사력 사용도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조를 국제적 협력주의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즉 국제적 연대와 협조유지가 매우 절실한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치고 있는 정도와 범위는 단연 독자적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전 세계의 모든 해양과 바다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륙 양면에 걸쳐 해안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점은 내륙으로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미국의 군사력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과 서단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해두고 있으며 페르시아만을 통제하고 있다. …워싱턴과의 더욱 공식적인 유대를 통해 (미국의 영향권에) 포섭되기를 열망하는 미국의 속국과 조공국이 유라시아 대륙에 곳곳에 산재해 있다.미국은 이제 역사상 어떤 제국도 소유한 적이 없는 엄청난 격차를 벌려가며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미국의 GDP는 10조 달러를 넘어 세계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2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1개 주의 경제 규모만 해도 세계 5대 경제규모로서 프랑스보다 크고 영국 다음이다.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다른 선진국 15-20 개국의 군사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으며 군사기술연구개발비는 영국과 독일의 개발비를 합친 것보다 많다.브레진스키가 말한 대로, 오늘날의 미국은 군사적으로 경쟁상대가 없으며 경제적 능력과 기술 혁신의 능력에서 압도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경쟁상대가 없는 문화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브레진스키는 "이 네 가지의 결합이 미국을 종합적인 의미에서 유일한 세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199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미국경제의 주도권이 타격을 입으면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도전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미국의 부시 정권은 오히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세계전체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압도적인 일극체제"(unrivaled unipolar system)를 더욱 공고하게 확립하는 것을 21세기 세계전략의 목표로 설정하였다.물론 이러한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은 냉전시대 이후에 비D계획의 추진은 미국이 절대적인 핵 패권을 장악하고 핵무기 선제공격을 독점적으로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미국의 MD계획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배경은 21세기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에 도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최대 장점인 군사력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특히 핵 전력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선제 핵 공격 능력을 독점하겠다는 것이다.셋째, MD계획의 배경에는 군수산업체를 위해 새로운 무기수요를 창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MD계획이 직접적으로는 공화당의 자금줄이자 지지기반인 군수산업체들이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넷째, 미국은 MD계획을 통해 전 세계의 정보통신망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MD를 위해서는 전 세계를 커버하는 조기경보위성과 지상레이더망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은 전 세계의 정보통신망이 미국의 통제와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 우리는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이 '압도적 일극체제'의 공고화 즉 세계전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미국의 지구제국(Global Empire)의 건설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9.11테러 이후의 국가안보전략미국의 대통령들이 출신 당에 상관없이 패권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부시는 취임 초부터 미국의 패권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클린턴 행정부에 비해 부시행정부는 훨씬 더 일방적이고 제국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9·11 테러 이후 부시행정부가 발표한 '4년 주기 국방검토보고서'(QDR: Quadrennial Defense Review Report), 2002년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와 '미국 국가안전보장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보고서 등을 통해 미국이 미국의 적들에 대해 핵무기를 선제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한 사실에서 입증된다.미국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 따르면 세 가지 원칙이 강조 중동 질서 재편의 명분과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이라크에 관한 공식적인 스토리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대량살상무기, 테러리즘, 사담 후세인 혹은 UN 결의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 전쟁은 만약 발발한다면 미국이 원숙한 세계제국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하며 또한 지구경찰로서의 유일한 책임과 권한을 손에 넣으려는 의도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10년 또는 더 많은 기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계획의 절정이 될 것이다. 그 계획은 '적들이 항상 주장해왔듯이 미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전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로마는 봉쇄정책을 쓰지 않았다. 단지 정복했을 뿐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말하자면, 이라크전쟁은 세계지배전략의 차원에서 미국이 중동지역 또는 전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 역시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 자원뿐만 아니라 중동과 그 밖에 중앙아시아 대륙까지 통제하려는 지정학적 전략에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라크를 장악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까지 통제할 수 있고 서구세계를 위협하는 알 카에다의 본거지인 중동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지리적으로 아랍세계의 중심에 있는 이라크 침공을 통해 중동뿐만 아니라 그 밖의 중앙아시아 대륙까지 통제하고 나아가서는 세계패권을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전술한 대로, 전 세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미국은 지난 50년 간 유지되어왔던 세계전략의 기본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즉 미국의 국방전략의 기본 개념이 2001년 9·11 사태 이후 나온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와 2002년의 '핵 태세 보고서', 2002년 9월에 발표된 '부시독트린)'(국가안보전략) 등을 통해 '봉쇄와 억제'에서 '억제와 격퇴'로 바뀌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약 20%에 이르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석유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또 다른 대규모 중동 산유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이 있기 전, 세계는 미국, 영국 대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이라고 하는 양대 진영으로 분열되었었다. 이러한 대결 양상도 실상은 이라크의 석유를 둘러싼 이해 다툼이 작용한 것이었다.1927년 키르쿠크 지방에서 처음 원유가 발견된 이래, 1970년대까지 약 50년 간 이라크 석유산업은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가 이라크 석유회사를 장악했었다. 그러나 1972년 이라크 석유 국유화를 계기로 기득권을 상실했다. 1991년 걸프전 이후로는 미국, 영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이라크 정부가 의도적으로 러시아, 프랑스 등의 회사들에만 특혜를 부여하여 약 2 조 억 달러 규모의 유전 개발권을 이들 국가에만 배당했다.이에 따라 머지않아 석유자원이 고갈될 처지에 있는 미국으로서는 세계 제2위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의 석유 이권에서 영영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미국 석유 수요의 절반이상을 채워 줄 유일한 나라인 이라크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이제 이라크 전쟁을 승리함으로써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석유공급의 길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 일부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석유를 영향력 행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봉쇄하게 되었으며, 미국 대형정유회사들의 중동 진출을 확대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중동에서의 에너지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잠재 적국으로 상정하고 있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거두게 되었다.즉 중국은 석유 수입량의 70%를 중동 지역에 의존할 정도로 수입선이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에너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중국경제의 숨통을 쥐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석유 공급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통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방주의의 산물로서의 전쟁셋째, 미국의 이라크 침공.
춘천지역의 축제와 활성화 방안목 차-들어가며-춘천의 축제-춘천 축제의 가능성-축제의 활성화 방안-나오며-들어가며춘천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문화 도시로 회자 된다. 그것은 아마도 춘천지역의 다양한 문화 축제가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또한 수려한 자연 경관과 먹거리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그만큼 춘천은 관광과 문화 산업의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춘천 지역 축제에 대한 레포트를 작성 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 하는 춘천 지역의 문화 축제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춘천이란 도시가 문화 축제의 도시로 기억 될 만큼의 축제가 있는가? 혹은 전 세계에 자랑 할 만 한 축제가 개최되고 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 기대에 상당부분 부응하지 못하며 몇 개의 국제적 축제가 열리고 있기는 하지만 축제에 참여하는 인원이나 기반 시설 그리고 행정적 문제에 관해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몇 가지 축제에 참여해보고 내린 결론으로는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춘천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축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의미 있는 일일 것 이다. 먼저 축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 해 보면 축제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크게 예술적 요소가 포함된 제의를 일컫는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축제의 개념 정의는 먼저 좁은 의미로서 지역과의 역사적 상관성 속에서 생성, 전승된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축제화 한 것이거나, 전통적 의미의 축제 뿐 아니라 문화제, 예술제 등을 포함한 각 지역의 문화행사 전반이 포함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부산의 국제영화제와 이천의 도자기 축제와 같은 크고 작은 지역 축제가 412개에 이르고 있으며 주로 5월과 10월 봄, 가을에 집중되어 열리는 경향을 띄고 있다. 그러나 축제에 대한 인식 부족과 재정확보의 어려움, 획일적인 프로그램과 전문 인력의 부족 등은 경쟁력 없는 지역 축제를 동네잔치의 수준에 제와 인형극제, 국제 연극제가 있으며 춘천 애니타운 축제 역시 매년 열리고 있다. 각각의 축제는 매년 5월을 시작으로 7,8월에 도시 곳곳을 축제의 장으로 물들인다. 이에 더불어 춘천의 전통 먹거리인 닭갈비와 막국수 축제 역시 매년 열리고 있다. 이중 1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임축제와 인형극제는 비교적 안정적인 축제의 틀을 만들어 나가고 있으며 특히 마임축제는 2001년부터 3년간 연속 문화관광부 지정 우수축제로 지정되어 그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안정성을 보이는 축제 내부에는 여전한 어려움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예산의 높은 행정 의존도, 전문 인력의 부족, 홍보 마케팅 부족으로 인한 관관 상품화 개발의 어려움 등이 남아 있다. 춘천의 문화예술축제의 자원 봉사 운영 시스템이 타 지역의 축제에 비해 활성화 되어 있다는 점 역시 지역민의 참여를 통한 축제의 활성화보다는 전문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운영 시스템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안일 것이다.(2002년 기준)춘천의 축제축제의 성격개최 시기개최 장소예 산춘천 마임 축제공연 예술5.7~12(5일)인형극장, 고슴도치섬, 명동 등약 2억 4천춘천 인형극제공연 예술8.8~15(8일)인형극장, 화목원약 2억 8천춘천 국제 연극제공연 예술7.24~29(6일)문화예술회관, 봄내극장, 어린이회관등약 1억 5천춘천애니타운축제문화 산업8.13~18(6일)문화예술회관, 춘천 컨벤션홀 등약 6억 7천(춘천시 축제 개선 방안 연구 자료집, 강원 발전 연구원, 2002.12)춘천의축제프로그램주관객층주참여동기축제참여인원잠재관객마임축제국내외 전문 마임공연, 아마추어 공연, 도깨비 난장외20대미혼여성(학생)축제의 독특성약 6만 1천여명30대가족중심인형극제국내외 인형극,아마추어 공연 외30대 아이가있는기혼여성자녀 교육에 도움약 10만 8천여명20대국제연극제세계 아마추어공연20대미혼여성주제에 대한 관심, 동료들과의 모임.약 1만 7천 여명30대초반가족중심애니타운축제국내외 에니메이션 전시 및 상영, 마켓 제공축제지역주민의 여가 생활외래 관광객 유치 등국내 에니메이션 침체, 경쟁력 있는 다수의 애니메이션 축제의 위혐, 산업적 특성 약화, 전문 인력 부족축제의 산업적 특성 강화, 관련 기반 시설 조성을 위한 투자 필요제 14회 춘천 마임 축제 평가 분석, (사) 춘천 마임 축제, 2002)-춘천 축제의 가능성앞서 춘천지역 축제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춘천에 살면서 몇 번 축제에 참여해 보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참고문헌과 자료를 기준으로 춘천 축제의 가능성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미리 살펴본 각 축제의 내용과 다양성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다양한 가능성이 춘천지역 축제에 존재한다. 춘천 문화예술축제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살펴보기 위하여 축제의 규모, 접근성, 대외적 이미지, 수려한 자연환경, 지역문화 인프라, 문화인력, 다양한 공연예술장르를 포함한 문화예술축제 등으로 세분화 하여 살펴보겠다.① 규모: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예술축제로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축제와 프랑스의 아비뇽 축제가 대표적이다. 아비뇽은 인구 20만의 자방도시이며, 에딘버러는 인구 40만의 중소도시로 규모 있는 축제를 꾸려가고 있다. 현 춘천의 인구는 25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앞으로 50만의 인구 발전 계획을 가지고 있다. 도시 전체를 축제의 장으로 삼았을 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춘천은 인구 50만과 함께 공연예술축제를 유치하기에 적당한 도시이다.② 접근성: 관람객들이 공연예술을 감상하거나 지역축제에 참가하는데 있어 접근성은 참가여부의 중요한 판단근거가 된다. 서울과 춘천을 잇는 복선전철(2009년 완공)과 경춘 고속도로(2008년 완공)는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켜주는 물질적인 통로의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화예술을 체험하는 정서적인 교통통로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밖에도 이미 수도권과의 교통망은 경춘 국도와 중앙 고속도로 등으로 몇시간내에 왕복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휴일에 바람쐬러 나갈만한 장소로 그다지 멀지 않게 느낀다. 그리고 춘천을 내려오는 동안 강변 도로를 따라 펼쳐한 자연환경: 두말할 나위 없는 춘천의 자연 환경은 관람객의 유치는 물론 관광 수입의 증대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춘천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겨울연가를 비롯해 다수의 영화들이 개봉해서 흥행을 하고 관객들이 촬영지인 춘천을 관광하는 등 천연의 관광명소 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는 일본 열도에서 대단한 흥행을 하고 있는 겨울연가의 촬영지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관광객 들이 춘천을 많이 찾고 있으며 이에 따른 관광수입도 상당하다. 더불어 관광객 들이 춘천에서 개최되고 있는 각종 지역 축제에도 참여 하면서 더 많은 경제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춘천의 문화예술축제와 환경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⑤ 지역 문화 인프라: 현재 춘천의 1,000석 이상의 공연장으로는 춘천 문화 예술회관(1,108) 강원대 백령 문화관(1,815)이 있고 600석 이상으로는 한림대 일송 아트홀(800), 춘천 평생 교육 정보관(600)이 있다. 300석 이상 500석 이하의 공연장으로는 춘천 인형극장(497)과 시민회관(471), 청소년 수련원(300)이 있고 그 외에도 봄내극장(250) 국악예술회관, 굴레소극장, 마임의집 등이 있다. 더불어 대규모 예외무대로 어린이회관 야외무대와(2,000) 공지천 야외무대(2,000) 인형극장의 야외무대가 있다. 야외무대를 제외한다면 총 6,418석으로 춘천인구 25만명으로 나누면 36면당 1석이 되며 이는 상대적으로 보았을 때 전국 최고의 수준이된다. 또한 축제 기간에는 춘천의 자연적 입지와 공간의 특수성을 살려 공연장외의 장소를 공연장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명동이나 각 대학 캠퍼스, 고슴도치섬 등) 지역의 전통 문화 공간(향교 외)과 대학가 주변의 까페를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은 아이템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춘천 지역의 다양한 시민 단체와 연계한 축제의 활성화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⑥ 문화인력: 각 축제들은 99년 시작된 축제 기획자 워크샵을 통해 배출된 인력을 흡수하여 인력을 충당하고 있으며, 춘천 축제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축제의 활성화 방안앞서 춘천의 문화예술 축제가 지니고 있는 잠재적 발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와 같은 가능성 들은 춘천이 세계적 축제의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고 앞으로 체계적 행정계획을 통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그렇다면 이를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① 시기통합: 춘천의 문화 산업 활성화를 위한 방법으로 축제들의 시기 통합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마임 축제, 인형극제, 국제연극제, 에니타운 페스티발의 메인 공연예술축제를 시기적으로 통합하여 메인 통합 축제를 주변으로 먹거리 행사, 중, 소규모의 문화 행사 등의 가능성을 연관 시켜 효과를 가중 시키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축제의 통합은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지역예술문화축제를 통해 지역 주민에게 소속감을 강화 시켜주며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데도 기여하고 사회적 효과와 지역민들에게 문화 예술을 향유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지역의 문화예술 고객으로 전환 시키는 문화적 효과도 기대 할 수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세계 축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기대효과도 가지고 있다.② 개최 시기와 기간의 변경: 최근 여가시간이 확대되고 주 5일제의 시행 확대로 말미암아 차별적이고 개성적이며 고급스럽고 가족 중심으로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축제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과 부대행사를 통한 체험교육의 장, 인간과 자연이 어울어지는 문화예술축제는 까다로운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다가 올 수 있다. 지역의 축제를 위해서는 외지 관람객들이 많아야 하는데 학생들의 방학과 직장인들의 휴가가 공존하는 8월경이 축제의 알맞은 시기라 생각된다. 현재의 5일에서 최장 10일의 축제는 입소문과 매체 홍보를 통한 잠재 관객의 유인하는데 부족한 시간이다. 따라서 15일 이상 30일 이하의 장기축제가 보다 적합할 것이다.③ 프로그램 개발: 축제의 활성화를 위해서.
고려시대의 문화와 유적고려는 불교가 성하여 불교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어있었는데 반해 불교는 정신세계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현실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려의 문화ㆍ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이와 같이 불교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ㆍ귀족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세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열심히 숭상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현세 구복적 이고 호국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의 이러한 숭불정책은 이미 태조대 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태조는 훈요십조 중 1조에서 “고려는 부처님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불교를 진흥시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지었다. 또한 불법이 국가를 비보한다는 관념으로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와 더불어 각종 불교행사의 실시도 있었다. 고려에서는 정월보름달에 연등회가, 11월 15일에 팔관회가 가장 커다란 불교행사였다. 그것은 가무와 음주로 함께 즐기며, 제불과 천지신명에 제사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려는 귀족사회의 발달로 호화로운 예술문화가 발달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사치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왔다. 귀족 취향의 예술품은 독특한 무늬를 넣어 만든 상감청자와 서화, 음악 등이 있다. 또한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등도 호화롭고 정교하였다.그러나 이에 반해 건축과 조각에서는 이전시기보다 퇴보한 감이 있다. 고려 후기의 예술은 전기에 비해 다소 쇠퇴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풍의 변화와 원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조형미술의 형태와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고려는 이미 전기부터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들이 불타버려 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4층부터는 직사각형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遞減)되었다. 각 층마다 옥신(屋身)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多包)집 형식의 두공(枓) 형태를 모각(模刻)하였으며, 상면에는 팔작집 형태의 지붕 모양과 기왓골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부의 조각은 기단과 탑신에도 새겨져 있는데, 기단에는 부처·보살·인물·화초·용 등이, 옥신에는 13불회(佛會) 외에도 부처·보살·천부(天部) 등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그 수법이 장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우미(優美)한 풍취가 넘친다. 이러한 형태의 석탑은 조선 전기에도 나타나지만 유례없는 희귀한 일품(逸品)이다. 초층 옥신의 이맛돌에 새겨진 조탑명(造塔銘) “至正八年戊子三月日”이란 기록에서 그 건립연대가 1348년(충목왕 4)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상황으로 보아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보물 제218호. 화강석제. 높이가 l8.12 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일 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돌덩이에 불과하여 인체라는 느낌은 전혀 없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인 것 같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으로 몇 개의 U형 옷주름을 돌렸을 뿐 매우 단조롭다.이 불상은 968년(고려 광종 19)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봉정사극락전???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태장리(台庄里)에있는 고려 말기의 건축물. 국보 제15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 1972년 해체·수리할 때 중앙칸 에 걸쳐진 천의가 두껍고, 옷주름은 크게 소략한 형식으로 접혀 있다.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 있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손꼽는 오래 된 건물이다. 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대 중수년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건립년대가 분명하여 우리 나라 고건축의 기준이 되며 그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국보 제 49호로 지정되었다.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다른 건물이 정면이 더 넓은 것과는 수효면에서 다르다.그러나 건물을 보면 알수 있듯이 정면은 한칸에 문짝이 셋이나 달리도록 칸살이 넓고 옆면은 칸살이 매우 좁다.그래도 대웅전은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다.이처럼 정면 칸살이 넓은 것은 들이 넓어 개방적인 충청남도 지역 건축의 한 특성이다.이 건물이 고식을 보여 주는 특징 하나는 기둥이 뚜렷한 배흘림을 하고 있는점이다.대웅전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고주(高柱)를 보면 그 특징이 더 두렷하게 드러난다.또 한가지는 공포 구성이 주심포라는 점이다.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어 지붕의 무게를 받는 주심포 양식은 화려하지 않은 건물에 썼으며 고려시대, 조선초기 건물에 주로 남아 있다. 공포가 단순하지만 이 건믈은 11량이나 되어 지붕이 큰편이며 그러므로 맞배지붕으로 엄정하게 처리했다. 맞배지붕과 11량의 아름다움은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창방 위쪽 기둥머리에는 파련 모양의 받침을 달아서 항아리 모양의 충량을 받았으며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을 얹어 고주가 받고 있는가로 부재를 받게 했다. 그 위에 지붕의 무게를 받는 우미량이 있다. 이런 모든 장치는 지붕의 무게가 기둥에 골고루 분산하여 전달되도록 고안된 것이면서도 드러나는 면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도록 정교하게 치장되었다.그러면서 가로선과 세로선, 대각선이 빚어내는 세모와 네모의 비례가 황금비례를 이루어 품이어서 주목된다. 이 승탑의 건립 연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탑비(塔碑)의 비문에 의하여 홍법국사(弘法國師)의 입적이 고려 현종 8년인 1017년이므로 상한 연대를 이때로 볼 수 있다.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과 상륜(相輪)이 장식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팔각 지대석 위에 복판 연화문(複瓣蓮花文)이 장식된 복련석(伏蓮石)을 얹었고, 팔각 중대(中臺)의 각면에는고려시대 특유의 안상(眼象)이 새겨졌다.안상은 네모에 가깝게 변화되었고 빈틈없이 공간을 채우는 과정 속에 운룡문(雲龍文)도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상대석(上臺石)은 얇고 원형에 가까운데 밑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연판(蓮瓣)에는 다시 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탑신은 이 부도탑에서 가장 특색 있는 부분으로 원구형(圓球形)을 이루고 있다. 표면 중앙에서 두 줄의 양각선(陽刻線)을 옆으로 돌린 후 다시 상하를 십자로 연결하였다.그 교차점에는 꽃 무늬를 두어 변화를 주었다. 옥개석에는 별다른 조각 장식은 없으나 팔각 귀퉁이에 귀꽃이 있어 주목된다. 옥개석 하면은 삿갓 모양으로 깊숙히 파져 탑신 위에 놓인 원통형 석재(石材) 위에 얹혔고 그 주위로 활달한 비천(飛天)이 조각되었다. 상륜부는 옥개석 정상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형성되었을 것인데 현재는 전혀 부재를 남기지 않고 있다.지광국사현묘탑???????고려(高麗)시대에 건립된 탑으로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 (江原 原州市 富論面 法泉寺址)에서 출토 되었으며, 국보 제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승탑(僧塔)은 지광국사(智光國師)의 입적시 건립된 것으로 본래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지(法泉寺址)에 있던 것이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옮겨 세워져 있다.이 승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는 승탑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나 네모진 평면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양식을 보이고 있다. 건립 연대는 원위치에 보존되어 있는 탑비(塔碑)의 비문에 의하여 지광국사의 입적이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이므로 상한 연대를 이 때로 상을 정교하게 모각하였다.청자상감용문표형주전자위·아래가 둥그런 조롱박 모양이다.유약은 회청색계의 비색이며 광택이 은은하다.몸통에는 좌우에 보주문대로 둘려진 원내에 용문이, 그 밖에는 국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굽 위쪽까지는 다시 연판문대와 연주문대가 곁들여 둘려있다.상감청자?자기의 장식 기법. 자기가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陰刻)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적토니(赤土泥:붉은 흙)를 메꾸고 예번(豫燔)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바르고 본번(本燔)하는 자기(瓷器) 장식기법이다.고려청자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다른 나라의 도자기 제품에는 유례가 없는 기법으로, 의종대(毅宗代:1147∼70)에 창안되어 고려청자에 응용되었다.상감청자의 문양으로는 운학(雲鶴)˙양류(楊柳)˙보상화(寶相華)˙국화(菊花)˙당초(唐草)˙ 석류(石榴) 등 여러 가지가쓰였으며, 특히 운학무늬와 국화무늬가 가장 많이 쓰였고, 국화무늬는 조선시대에도 애용되었다.상감청자의 특징은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는 데 있으며, 상감문양을 전면적으로 쓴 경우에도 배경으로서의 공간은 여유있게 남기고 있다. 또한 문양이 단일문양의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죽(竹)˙유(柳)˙화(花) 등이 중심이 되는 문양을 전경(前景)에 크게 내세우고, 수(水)˙조(鳥)˙암(岩)˙인물 등을 배치하여 하나의 화폭과 같은 화면의 효과를 내고 있으며, 운학무늬의 경우에도 문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또한 모란꽃이나 보상화의 경우에도 넓은 화판(花瓣)을 백토상감(白土象嵌)하고 배경을 흑토상감해서 흑백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대표적인 상감청자로는 이화여대에 소장된 죽문병(竹文甁),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모란문매병(牧丹文梅甁),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천학문매병(千鶴文梅甁) 등이 있다.팔만대장경??대장경(大藏經)이란 경(經)·율(律)·논(論) 등 삼장(三藏)의 불교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것을 목판에 주조하는 것은, 승려들이 경전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렸다.
덕의 딜레마최근 일본의 모습은 새로운 제국주의의 부활을 생각나게 한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의 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일본의 모습을 본 우리 나라의 여러 국민들은 반 일본의 감정이 고조되고 그에 따라 인테넷 사이트와 여론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한번 이 문제에 관하여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과연 우리가 이런 일본에 대하여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감정적인 대응에는 힘이 없다. 철저한 이론적 무장과 체계적인 대응 없이는 그냥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주목을 받게 된 책이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가 저술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시발점은 1944년 한창 미국과 일본이 전쟁으로 맞붙게 되었을 때 미국의 국방성에서는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에 관한 연구를 하여 보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아한 점이 생길 것이다. 왜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그 나라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걸까? 라는 것이다. 미국은 전에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포함하여 그 나라의 국민들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 죽을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포로가 되어서도 서슴없이 할복자살을 하는 그들을 보며 일본에 관한 전술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전쟁에 필요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책으로 출판하여 일본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분석을 한 책으로 평가 받게 되어진다. 그러나 사실상 이책은 그리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정확하다고 볼수 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일본에 가본적도 없고 전시상황에 의해 갈 수도 없게된 일본에 관하여 영화와 서적 그리고, 다른 자료들과 전쟁포로들을 통해서 일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기 때문이며 그연구 방법론에 있어서도 아메리카 인디언 연구를 위한 방법론을 채택했기 때문이다.일본에서의 덕일본인들의 인생관은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인정(人情)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다. 그들은 위와 같은 것들을 그대로 하나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나누어 사람들을 그 세계 하나 하나의 영역에 포함시켜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의 해야 할 의무들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앞에 나온 3장에서 일본인들을 그 사람의 계급과 위치를 중요시 하는것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잠깐 여기서 3장의 내용과 전쟁의 시발의 원인을 되짚어본다면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은 국화 즉 정신문화에 있어서도 그리고 칼 즉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월등했기에 당연히 전쟁의 발발을 자연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는 그런 군국주의적 관념에 의해 당연히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은 그런 위치를 확고히 해야하기에 발발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일본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꼭 이루려 하는 그런 습성이 있다. 그리고 이런 습성의 바탕이 된 것이 이제부터 깊게 들어가게 될 일본인들의 덕이다. 이런 덕을 설명하기 위해 유명한 얘기를 예로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다. 이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기리(義理)와 기무(義務)에 대하여 나오고 채무를 갚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데 일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온(恩)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정의는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나 은혜, 반드시 갚아야할 의무를 말한다.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는 온(恩)은 예를 들면 천황이나 양친 또는 스승에게서 입는 은혜를 포함해서 여러 주위사람들로부터 받는 은혜를 말한다. 그리고 이 온(恩)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기리(義理)와 기무(義務)로 나눌 수 있다. 기리(義理)는 자신이 받은 은혜만 갚아되 되며 시간적으로 제한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름을 불명예롭게 하였다면 그에 대해 보복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사람들도 그에 관해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무(義務)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고 또한 시간적으로 한계가 없는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나 천황에 대한 의무를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은 최대의 온(恩)을 천황에게 향한 의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덕을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부분에서 우리는 양날을 가진 칼날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천황은 일본국민들에게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할때는 언제고... 미국에게 항복을 하자마자 천황은 미국에게 바로 꼬리를 내리고 그에 따라 일본 국민들도 적극적으로 미국 문물을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양면성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미국인인 필자 루스 베네딕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전쟁에 임하지만 막상 포로가 되어버리면 미국을 위해서 유류창고의 위치며 폭약 저장고등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거짓인 줄 알고 믿지 않았으나 그것이 사실임이 밝혀지고 일본인들을 더 의아해했다. 그것이 일본인이다. 일단 온(恩)을 다해 충성하지만 그 관계와 그런 환경에 처해있지 않다면 바로 배신을 하지만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긴다. 자 그럼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를 예로들어서 덕에 대해 설명하면 아사노라는 영주가 있었는데 바쿠후로부터 전국의 모든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관장하는 두 명의 다이묘 중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 접대역은 모두 시골 다이묘였다. 따라서, 궁정의 매우 신분이 높은 다이묘인 기라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지도 받아야 했다. 아사노 영주의 가신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오이시가 있었더라면 주군에게 빈틈없이 조언을 했을 것이나 공교롭게도 그는 고향에 가 있었다. 그리고 아사노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융통성이 없어서 지도자에게 바칠 충분한 선물 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기라의 지도를 받고 있던 또 한 사람의 다이묘의 부하들은 세상살이에 능숙한 사람들로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지도자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냈다. 그래서 기라 영주는 아사노 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잘 가르쳐주지 않고, 더군다나 고의로 전혀 맞지 않는 복장을 입고 의식에 나오도록 지시하였다. 아사노 영주는 기라 영주가 가르쳐 준 복장을 하고 영예로운 날에 임하였다. 그러나 아사노는 자기가 모욕당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칼을 뽑아 미처 다른 사람이 말리기도 전에 기라의 이마를 베었다. 여기서 기라의 모욕에 복수하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으로서 그가 당연히 해야 할 행위 즉 이름에 대한 기리(義理)였던 것이다. 하지만 쇼군 앞에서 칼을 뽑았으므로 이것은 주(忠)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온 아사노 영주는 충실한 가신인 오이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오이시가 오자 예법에 따라 아사노 영주는 할복 자살을 함으로써 기리(義理)와 주(忠)의 의무를 다하며 생을 마쳤다. 이를 바라본 오이시는 자신의 영주였던 아사노 영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47명의 로닌을 소집하여 기라 영주를 죽임으로써 복수를 하고 그에 따라 기리(義理)를 다하고 기라 영주의 목을 가지고 이사노 영주의 무덤으로 가서 주(忠)를 수행하기 위해 47명의 로닌은 스스로의 손으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기리(義理)와 기무(義務)의 쌍방에 대한 최고의 채무를 지불한다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인 는 일본의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고 아직까지도 그 47명의 로닌은 그들의 기리(義理)와 기무(義務)에 쌍방에 대한 채무는 현대인들에게도 귀감을 사고 있다.
1.파시즘의 개념원래 파시즘은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끈 정치운동 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장 좁은 의미에서 파시즘은 무솔리니의 정치운동이나 정치체제를 뜻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시기적으로는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을 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고 있 으며, 공간적으로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서유럽, 그리고 동유럽, 아메리 카, 심지어는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사상적 정치적 운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 한 시간적 공간적 포괄성 때문에 파시즘은 대단히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매 우 부정확한 표현이 되었다. 파시즘이란 말은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의미는 단순히 "묶음(束)", 또 는 "단결, 결속"을 뜻한다. 이처럼 다른 '-이즘', 예를 들어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이 각각 핵심 되는 개념들, 즉 민족과 사회를 중심으로 그 명칭이 형성된 경우와는 달리 파시즘이라는 표현속에 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용어 자체에서 생기는 모호함과 용법 의 다양성에서 기인하는 포괄성에 덧붙여 사회에 미친 극도의 부정적 측면 때문에, 파시즘은 그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적이자 폭압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파시즘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정확한 의미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또 한 연구자들의 시각이나 연구방법, 그리고 대상에 따라 파시즘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 되고 있다. 먼저 파시즘을 특정 사회 경제적 발전 단계의 산물로서 이해하며 그 주도 세력을 계급적 시각 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파시즘을 근대화나 산업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의 산물이나 이 러한 과정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는 견해 그리고 파시즘을 대자본가 금융자본가, 또는 넓게는 부르주아의 '이행자'로 이해하여 가장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체제로 보는 경우 갖는 특이성, 혁명적 성격, 그리고 그 영향력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대 부분의 파시즘이 좌파와 우파 모두를 극복하려 하였음에도 실제 집권 과정이나 통치과정에서 우 파 세력과 타협한 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파시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체계성과 독자성의 부족 때문이다. 이와같이 파시즘은 다양하며 상호모순되는 요소를 결합하려 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체계 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타난 지역의 사회경제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편차를 드러내게 된다.3. 이탈리아의 파시즘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이탈리아에는 혁명적 정세가 도달하였다. 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이 탈리아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종전후 수십만의 실업노동자가 생겼으며, 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 상승, 전쟁 중 지배층이 내세웠던 공약등이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노동자 농민 복원병사 의 불만은 고조되고, 그들은 혁명적 투쟁 또는 사회당 지지로 기울고 있었다.종전 다음해인 1919년 민중의 투쟁은 격렬히 타올랐다.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도시의 주 요 중공업과 교통기관에서 대파업과 공장점거가 일어났고, 이것은 때로 노동자들이 공장운영권을 요구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사회적 긴장은 북부 이탈리아의 농촌지역 에서 나타났다. 거기서는 농촌노동자의 조직화가 큰 성과를 거두어 많은 토지들이 점거되거나 사 회주의동맹에서 관장하는 소비조합에 의해 경영되었다.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는 이탈리아 정부의 정치적 위기를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1919년 11월 16일의 국회의원 선거는 집권당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정당들에 파멸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또한 민족주의적 열정의 각성을 통해 대내 문제로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돌려고자 했던 정 부의 노력은 효력이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탈리아가 1차대전에 참여한 것은 전후의 영토와 전리품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이 탈리아는 몇 번에 걸친 대패를 겪었다. 60만 이상의 희생자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1947)는 무솔리니에게 조각을 위촉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독재적인 비상대권을 획득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약 20만 명의 파시스트민병대를 창설하였고, 정규군을 확장하여 그에게 충성을 서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선거법을 유리하게 개정하여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정부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반대파를 탄압 하고 1925년에는 일련의 '파시스트입법'을 통하여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그리고 26년 에는 파시스트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금지하여 명실공히 1당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1925년 파시스트노동연맹은 노동계약을 협의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획득하고, 26년에는 6개 산업부문(공업, 상업. 농업, 해공운수업, 육로 및 내륙 하천수송업, 은행)에 걸쳐 각각 기업가와 노 동자의 조함을 인정하고, 여기에 지식인들의 조합을 보태어 13개 조합이 형성되었다. 1928년에는 이러한 협동조합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다시 1929년에는 조합의 대표들과 정부대표들이 협동조합협의회를 구성하여 조합 상호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생산을 지원하는 조정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1934년에는 새로이 창설된 22개 조합을 대표하는 824명으로 구성된 협 동조합중앙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의회의 하원을 대신하게 되었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내용은 파시스트독재와 국가지상주의, 그리고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였다. 즉, 파시스트에 의하면 국가 위에, 국가외에, 그리고 국가에 반하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 는바 그러한 국가는 바로 파시스트당에 의하여 대표되고, 오직 파시스트의 신문과 파시스트의 교 육이 있을 뿐이다. 파시스트당이 대표하는 이탈리아국가는 강력하고 위대해져야 하며, 팽창하지 않는 국가는 쇠퇴하고 멸망하며 전쟁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편 파시스트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비롯하여 경제발전에 전력을 경주하고, 1924년에는 피우메 를 접수하였으며, 알바니아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었다.4. 독일에서의 파시즘독일에 있어서 파시즘의 성켰다. 둘째로, 독일 민중은 연합국이 제안한 베르사이유조약에 대하여 결정적 투쟁을 전개시킬수 없었다. 이 조약의 결과 독일은 제국주의국의 반종속국적 지위에 놓이게 되어 이제 독 일 국민에게는 민족적 독립을 회복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이 조약을 수락한 독일의 반동 세력은 강화조약에 의한 배상지불의 부담을 모두 자국 국민에게 전가하였으며, 제국주의의 소비에트 러시 아에 대한 적의, 또는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독일제국의 부활을 꾀하였으며, 국민의 베 르사이유 조약에 반대하는 감정을 이용하여 배외주의 제국주의 침략주의를 선전하고, 장래의 제 국주의전쟁을 준비한다.1919년 9월부터 개시된 히틀러의 파시스트운동도 이런 대내외 정책을 추진하여는 도구에 불과 했다. 그는 1920년에 그가 속해있던 독일 노동당을 "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개칭하였는데, "나찌 (Nazi)"라는 용어는 '국가적(National)'의 두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글자 둘을 합한 것이다. 전후의 혼란속에서 나찌를 부추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23년 독일의 전쟁배상지불이 이행되지 않는 데 대한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프랑스군이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지방을 점령 한 사건이었다.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며, 나찌의 행동대인 '갈색 셔츠단'은 1923년 뮌헨에서 '비어홀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1924년에서 1929년 사이 대규모의 미국과 영국의 자본이 독일로 들어오자 독일의 경제는 발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독일의 지배계급은 그 힘을 강화한 듯이 보였다. 국내 정치상으로 는 사회민주당도 제외한 우익 연립내각이 수립되었고, 25년에는 구제국시대의 참모총장 힌덴부르 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미,영 자본의 원조로 독점자본은 그 독점을 강화하고, 생산시설을 신예화하고, 산업의 합리화를 추진하여생산을 증대시켰다. 독일의 경제가 이렇게 부활 하자 국가사회주의는 호소력을 다. 히틀러는 다른 정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집 권 즉시 선거를 준비했다. 33년 2월 1일 히틀러는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뒤이어 2월 4일에는 언론 과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신문과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했다.나찌권력 앞에서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로 무력화되었다. 기존의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독일노동 전선(Die Deutsche Arbeitsfront)'이 창설되어, 노동자와 기업가의 공동조지긴 이 단체에서 노동자 는 이제 '경영지도자'로 불리는 기업가들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순종적이기를 강요받았던 노동 자들은 '노동수첩'을 소지해야 했고, 그것을 통해 등록되고 통제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노동자들은 직업이나 공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종교에 있어서도 1933년 7월에 카톨릭고 히틀러 사이에 협약이 이루어졌으나 나찌스는 이를 무시하였다. 국가의 통제와 조종작용은 교육과 예술을 비롯하여 국민생활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었고, 히틀러의 취미가 국민에게 강용되었다. 1933년에 설치된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는 개인의 서신교환은 물론 전화도청과 사생활까지 조사할 권리를 가지고, 나찌스에 대한 반대자나 국가통제의이탈자를 가차없이 색출하였다.1933년부터 시작된 경제계획은 독일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고, 실업자도 크게 감소하였 다. 독일민족의 대다수는 생활의 향상과 안정, 그리고 영토팽창과 민족적 긍지의 회복에 만족하고 히틀러를 환호하였다.5. 파시즘의 특징1. 파시즘은 선진산업국가들의 현상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일정 수준으로 발전해 있지 않다면 파시스트운동의 특수관계는 불가능하다. 오직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강력한 부르주아지, 사회의 급진적인 재구성을 요구하며 잠재적 혁명이데올로기로 대규모의 조직화된 노동계급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모순 사이에 놓여 그것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딜레마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쁘띠 부르주아지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은 자본주의사회의 소산인 것이다. 파시즘은 극단적 이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