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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작가] 교은 정이오
    교은 정이오1. 서론여말선초에 활동한 교은 정이오는 조선초의 한문학을 거론함에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고 한다. 역대 시인이나 비평가들은 교은을 선초의 대표적 시인의 한사람으로 인정하였으며 당풍의 시 창작에 주력하여 시의 서정성 획득에 성공하였다고 하는 한편 풍자를 통한 시의 효용성의 전달에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여기서 여말선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선초 이후 문인 정치라로서 활동을 전개한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정리하겠다.2. 생애교은 정이오의 자는 수가, 호는 교은, 우곡이며, 본관은 진주이고 시는 문정이다.고려 충목왕 3년(1347)에 진주 비봉산 아래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그후 예문검열, 삼사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당시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문란하여 나라의 기틀마저 흔들리는 혼란한 상황 아래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게 된다.그리하여 원정공 하즙, 공암 허형과 함께 도의계를 맺고 진주 남족 송곡에 복거하였는데 그곳에서 자적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전교에 숨어 들어 현실을 일시적으로 등진 상태에서 고려8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낙향하여 은거하였던 관계로 여말의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개국하는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온전히 보신할 수 있었던 교은은 고려 왕조의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정치철학으로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이상적 왕조 건설에 참여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었다.조선이 개국된 후 태조 3년에 선산에 출수하였는데 일처리에 있어서 청간하였으며 문치에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주목되는 것은 신유학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문물을 정비하는데 주력하였다는 점이다.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를 간추려 올리고 사서절요를 찬진하고 이후 교서감, 예문관직제학, 성균관대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한 사실에서, 그의 학문세계를 짐 연보1347(충목왕 3)~1434(세종 16)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찬성사 신중(臣重)의 아들이다.1374년(공민왕 23) : 문과에 급제1376년(우왕 2) :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 을 역임하였다.1394년(태조 3) :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다.1398년 9월 :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1398년 :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 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의랑(兵曹議郎), 예문관의 직제학, 사성을 역임하였다.1403년(태종 3) : 대사성으로 승진1405년 3월 :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1409년 :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1413년 :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 였다.1418년 :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4. 시대적 배경교은 정이오는 여말에 출생하여 학습과정을 거쳐 과거에 급제하고 초급관료의 길을 걷다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은거생활을 택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에 이르러 새로운 관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왕성한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문장으로 입신하여 새 왕조 건국에 기여한 전형적인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이었다.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은 권문 세족으로 일컬어지는 보수 세력이었다. 친원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문 세족은 도평의사사에 앉아 정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을 관리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신흥 사대부는 이미 중앙 정계에서 보수적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권문 세족과는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문 세족에 대해 미약한 신흥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권문 세족들이 원나라의 세력과 결탁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선왕의 개혁 정치의 실패에서 엿볼 수 있다.신흥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공민왕 때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 때 신흥 사대부의 세력이 자못 성장했고, 또한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사대부를 기반으로 개혁 정치를 실행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때 점차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가 공민왕의 개혁 정치로 인해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성 세력인 권문 세족과 대항하면서 정치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이들 신흥 사대부 세력과 결탁한 이성계에 의해 멸망되고 새 왕조로 교체되었다.교은은 고려를 소생시키는데 주력한 이색의 학맥을 이었는데, 이색의 제자들 가운데 고려왕조응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정몽주와 같은 온건파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강경파가 나왔다. 교은은 이색과 정몽주의 학맥을 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강경파로 참여했다.불교적 성향이 강한 권문 세족은 친원 정책을 주장하고, 기성질서의 유지에 급급하였다. 반면, 유교적 신흥 사대부는 친명정책을 주장하고, 개혁 정치를 요구하였다. 무인 이성계는시대의 새 흐름을 간파하고, 신흥 사대부 세력과 결탁하였다.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중 위화도에서 회군해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을 공포해 새 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1392년 역성 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을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5. 작품 세계1) 한(閒)의 정서교은의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주된 정서는 閒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한의 정서는 그 자의대로 ‘한가하다, 조용하다, 쉬다.앞의 시는 불성 또는 불법의 묘리로서 심오하고 현묘한 가르침이며 교은의 불교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일러주는 시라고 보인다. 비록 신진 사대부로서 주자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으나 신앙적으로 불교를 저버리지 못했을 것이다.두 번째 시의 경련에서도 불교에 대해 배척도 아니고 숭상도 아닌 듯한 교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시비나 국가정책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교은은 즐겨서 사찰을 찾고 또한 제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시냇물 끊어지고 층층한 얼음 쌓였는데,바람소리 요란하게 온 골짝 울리네.산모습 겨울 들어 더 여위고,중략단정히 앉으니 마음 절로 맑아지네.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분향하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는 ‘심자정’의 상태, 그것이 곧 교은의 시에 보이는 주된 정조이며 한의 정서의 실체이기도 하다.특히 자연을 매개한 한의 정서의 표출, 그러한 정서의 발산은 한일 속에 자적하는 생활의 여유 즉 정신적 여유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우주사이에서 사람의 일 가이 없는 것,남으로 오고 북으로 가니 어느 때나 한가할까,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강 위 인가에 죽구가 있네.라고 노래하면서, 그러한 생활의 여유, 한일 속의 자적을 소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귀거래의 염원도 시 속에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현실이나 귀거래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찾아 한적한 삶의 여유를 누릴 줄 알았다.2) 여정의 시교은은 시 가운데는 특히 여행하면서 읊은 시들이 많다. 현존하는 그의 시 64수 중에 54수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음이 이를 뒤받침해주는 것이다. 이들 시는 각 지방의 풍광과 인물을 읊기도 하고. 여정을 담아 전하기도 하면서 자연과 인생을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들이다.중류에 꽃배 띄우고 퉁소 부고 불 울리니,한 구역 신선경치 여기가 바로 금주라네.다시 옥선을 불러 옥피리 불며,밝은 달 함께 휘어 잡고 꽃다운 물가 굽어볼까나........우니 더욱 더 기쁘기만,말머리가 내일은 산음 땅을 지나리.사람들은 왕인이라 보겠지만,어찌 알리 재간없는 취한 한림인 줄을.오랜 여행 끝에 고향 가까이에 머물게 된 감회에 젖어 빠른 호흡으로 벅찬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3) 교훈시교은의 시 가운데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작품은 두 가지로 성격을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확한 현실파악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사회적 여러 문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작학적 윤리관에 바탕을 둔 충과 효를 비롯한 인륜의 덕목을 권장하는 것이다.백성의 생업이 편하지 못하니 삶이 또한 궁졸하고,벼슬아치들이 한가한 날 없으니 폐단이 놀랄 만하다.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벼슬아치들의 현실을 비판한 시다. 교은은 현실을 개선하여 백성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선 관리들이 올바른 목민정신을 가지고 봉직해야 함을 역설하게 된다.대개 군자는 사물을 관찰함에 도가 있지 않은 데가 없음을 아는 것이니, 정치를 하는 데는 보 고 본받을 만한 것이 이 못물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못물이 고인 것을 보면, 맑으면 서 요동하지 않고 평평하면서 넘치지 않으며 능히 더러움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교은 스스로는 이처럼 못물을 관찰하여 얻어낸 정치의 도리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삼았다.이러한 생각은못을 보면 능히 정치하는 것 알 수 있고,들에 가서 머리 식히며 다시금 계획한다네.라고 한 시에도 나타나 있다. 교은은 정확한 현실인식에 근거한 풍자의 수법으로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였으며 그러한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척결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방책으로 관리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올바른 목민정신의 구현을 제시하였다.여말선초의 신진 사대부로서 교은은, 주자학적 윤리의 실천을 이상으로 삼고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던 생각이 문장에 나타난다.무릇 도가 천하에 있음은 그 실상이 천명의 성에 근원하는 것인데, 군신, 부부, 부 자, 형제, 붕우의 사이에 행하되 하루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
    인문/어학| 2003.06.21| 10페이지| 1,000원| 조회(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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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작가론] 정극인(고전작가론) 평가C아쉬워요
    목차서론본론1.시대적 배경2.정극인의 생애3.작품세계와 문학사상(1)불우헌가(2)불우헌곡(3)상춘곡4.문학사적 의의결론서론한 시대를 아쉬움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천수를 누리고 이승을 떠난다는 것은 누가봐도 복받은 인생이다. 바로 정극인이 그런 사람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본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남들보다 입신양명이 늦었고, 곧은 성격으로 시류의 아픔도 겪었지만 후학에 대한 열정과 곧은 심성으로 도덕과 윤리가 곤두박질치던 당시의 시대적 환경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던 사람이었다. 학자로서, 그리고 관료로서, 또한 스승으로써 그는 나아가고 물러갈때를 알고 있었던 학자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런 정극인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고, 그 속에서 활동했던 정극인의 생애를 통해 그가 남긴 작품과 그에 담긴 사상, 그리고 오늘날 그가 끼친 문학사적 의의를 알아봄으로서 한 시대를 대쪽같이 보낸 사람의 삶을 통찰해 보고자 한다.본론1. 시대적 배경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후 태조는 1392년,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이후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 즉, 정도전, 권근등의 개국공신에 의한 유교적 이상정치를 표방한 정치적 실권 장악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는 마치 고려 귀족정치의 재현과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에 위로는 국왕과 밑으로는 다른 많은 사대부들이 불만을 지니게 되고, 그 결과 이방원(태종)의 정도전 숙청이 이루어지게 된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집중시키었고, 나아가서 육조직계제를 시행하게 된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1418~1450년)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우수한 학자들을 속하게 해서 중국의 고전과 고제를 연구케 하였다. 이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정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커졌고, 정치의 실권은 다시 이들 관료에 의하여 좌우되는 느낌이었다. 이에 세조(1455~1468)의 반발은 이로라 일컫고, 이때부터 그의 호도 다각·다헌에서 불우헌으로 통했다. 집 앞을 흐르는 내를 泌水라 이름하고, 집 둘레엔 소나무와 대를 심어 오직 심신을 순정하게 가꾸었다. 「상춘곡」은 이때의 생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한시문으로 「不憂軒吟」과 「不憂軒記」를 짓기도 하였다. 「불우헌음」에서도 이 무렵의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을 소요하며 시가를 읊고, 한 마을 자제들을 모아 글을 가르쳐 일깨우는 일에 오직 마음을 쏟았다.1451년 11월 30일 조정에서는 강호에 묻혀 있는 인재의 등용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정극인은 이때의 논의에서 추천을 받아 廣興倉 副承으로 종6품을 제수받았다. 첫 벼슬길이었는데, 다음해의 5월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위에 올랐다.1453년(단종 1년) 봄과 가을에 과거가 베풀어졌다. 이때 정극인의 나이는 53세, 주위의 친구들이 과거에 응할 것을 권하자, 가을의 과거에 응하여 丁科에 합격하였다. 특히 당시의 한성판관 成順祖의 권을 이기지 못하여 과거에 응하였다고 한다. 그 후 全州府敎授參賑事로 내려와 있었다.1455년 윤6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리자, 정극인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세조는 그 해 12월 27일 의정부에 명하여 정극인을 仁順府承 佐翼原從功卷 二等功臣에 올렸다. 이후 근 15년간을 정극인은 태인에서 생활하였다.1469년(예종 1년) 8월 정극인은 사간원 정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는 69세의 나이를 들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일차 사퇴에도 다시 부름을 받자, 정극인은 성은에 보답하고자 상경하였다. 정언의 벼슬에 있으면서는 백성들이 공물을 바치는데 있어서의 폐단을 들어 말하였고, 특히 불교를 배척하는 일에는 앞장을 섰다.바로 같은 해(1469년)의 11월 28일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2월 24일 정극인은 내년이면 나이 70이 된다 하여 致仕하고 다시 태인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성종은 예조판서 이승소에게 都門 밖에 나가서 환송하도 이로 인하여 성종으로부터 三品의 작위와 더불어 그 지방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혜택을 베풀도록 하는 은전을 받았다. 이에 감격하여 「불우헌가」와 함께 이 노래를 지어 성군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고 한다.이 작품은 「불우헌가」와 함께 정극인이 72세 때에 지은 노래다. 노래의 제목 아래 고 밝혀놓은바, 이 노래는 라 할 수 있다. 전 7장의 구성이나, 제 7장은 앞의 6장까지와는 달리 경기체가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럼, 작품의 전문을 살펴보도록 하자.山四回 水重抱 一畝儒宮向陽明 開南 名不憂軒左琴書 右博奕 隨意逍遙偉 樂以忘憂 景 何叱多平生立志 師友聖賢 (再唱)偉 遵道而行 景 何叱多 산을 네 번 돌아 물을 거듭 안고있는, 아늑한 곳 협소한 집에는,볕이 훤하게 드는 남쪽을 향하여 창문이 났는데, 집 이름은 불우헌이로다.왼쪽에는 거문고와 서책이오·오른쪽에는 바둑과 장기요, 뜻에 좇아 거니노니,아!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는 광경, 어떻습니까.평생에 뜻을 세운 바, 스승과 벗 그리고 성인과 현인들의,아! 도를 따라가는 광경, 어떻습니까. 晩生員 老及第 樂天知命再訓導 三敎授 誨人不倦家塾三間 鳩聚童蒙 詳說句讀偉 諄諄善誘 景 何叱多不亦樂乎 負 書生 (再唱)偉 自遠方來 景 何叱多 늦게 29세에 생원이 되고, 늙마인 53세에 급제하매, 천명을 즐거워할 줄 알았으니,두 번의 훈도와 세 번의 교수를 지내며, 남을 가르치기에 지치지 않았도다.삼간짜리 작은 글방에다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句讀點(구두점)을 찍어가며 상세히 설명하느니,아! 선생님께서 말로 타이르는 모습에서 다정스럽고도·친절하게 잘 인도해 주는 광경, 어떻습니까.매우 즐겁지 아니한가, 타향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서생들이여,아!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광경, 어떻습니까.再上疏 闢異端 依乎中庸進以禮 退以義 守身爲大備員霜臺 具臣薇垣 引年致仕偉 如釋重負 景 何叱多一介孤臣 濫承天寵 (再唱)偉 再參原從 景 何叱多 두 번의 상소에서 이단을 폐하게 하고, 중용에 의하게 하였느니,예로써 나아가고 의로써 물러남에 자기몸을 지킴으로써, .특별히 加資三品과, 때맞추어 은혜로운 양로가 이르게 되느니,아! 임금님의 은혜가 깊고도 무거운 광경, 어떻습니까.樂乎伊隱底 不憂軒伊亦樂乎伊隱底 不憂軒伊亦偉 作此好歌 消遣世慮 景 何叱多 즐겁구나! 불우헌이여! 즐겁구나! 불우헌이여!아! 이 좋은 노래(불우헌곡)을 지어 부르매,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광경, 어떻습니까.위의 제 1장은 경기체가의 형식임을 볼 수 있는데, 치사 후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거문고와 책과 바둑과 장기를 즐기며 소일하는 모습을 읊었다. 제2장에서는 작자가 늦게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보다도 후생을 모아 가르치는 즐거움을, 즉 향리의 소년들과 타향에서 공부하고자 찾아온 학동을 모아놓고 교육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제3장에서는 척불에 앞장을 선 작자가 힘겨운 벼슬길에서 완전히 물러나 임금의 사랑을 넘치게 입은 행복감을 읊고 있다. 제4장에서는 격양가를 부르며 살 수 있는 태평함에 성덕·성수를 노래했다. 제5장에서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어 생활하는 현재의 거칠 것 없는 심경, 즉 자기분수를 지켜 안빈낙도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제6장에서는 삼품산관과 혜양을 입게 하여 준 성은의 막중함을, 그리고 낙구인 제7장은 작자 자신의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로 지어 세상 근심을 떨쳐버리는 모습을 각각 노래하였다.위의 노래는 고려 고종때의 「한림별곡」의 형식을 본받고 있는데, 다만 제6장 끝에 독립된 낙구를 가진다는 점에서 「한림별곡」과 크게 구별된다. 이 같은 현상은 그 유래를 권근의 「상대별곡」에서 찾을 수 있다. 「불우헌곡」보다 약70년 앞선 「상대별곡」의 형식은 고려 때 「한림별곡」의 형식과 같으나, 끝에 낙구가 첨가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우헌곡」의 낙구는 「상대별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우헌곡」의 형식은 김구의 「화전별곡」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낙구가 첨가된 「불우헌곡」의 형식은 경기체가 형식의 변천과 그 계보를 파악하는 데도 날 힝우니, 淸風明月(청풍 명월) 外(외)예 엇던 벗이 잇싶올고. 簞瓢陋巷(단표 누항)에 흣튼 혜음 아니 힝다. 아모타, 百年行樂(백년 행락)이 이만한딪 엇지힝리. (기)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생활하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 사람의 운치 있는 생활을 내가 따를까, 못 따를까? 천지간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어찌하여 그들은 나처럼 산림에 묻혀 사는 자연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인가? 초가삼간을 맑은 시냇가 앞에 지어 놓고, 송죽이 울창한 속에 풍월주인이 되어 있도다.(풍류 생활의 기상)(승) 엊그제 겨울 지나 재 봄이 돌아오니, 복사꽃 살구꽃이 석양 속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들 꽃다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조물주가 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 조물주의 신기한 재주가 사물마다 야단스럽다. 숲 속에 우는 새는 봄 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하여 소리마다 아양을 떠는 모습이로다.(봄 경치)물아일체어니, 흥이야 다르겠는가? 사립문 주변을 걸어 보기도 하고, 정자에도 앉아 보며, 이리저리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려,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 한가로움 속의 참다운 즐거움을 아는 이 없이 나 혼자로구나.(봄의 흥겨움)(전)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산책은 오늘 하고, 냇가에서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아침에는 산에서 나물을 캐고, 저녁에는 고기를 낚세.(권유)이제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를 세면서 술을 먹으리라. 화창한 봄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들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하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술독이 비었으면 나에게 알려라. 아이에게 술집에 술이 있는지 물어 술을 사다가, 어른은 지팡이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나직이 흥얼거리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고운 모래 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에 잔을 씻어 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나. 무릉도원이 가까운 듯하다. 아마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음다.
    인문/어학| 2003.06.21| 11페이지| 1,000원| 조회(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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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연구방법론] 음악의 세속화(지역연구)
    3. 세속음악르네상스의 포리포니에 의한 세속음악은 15세기에 시작되었으며, 그후 점차로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중단됨이 없이 17세기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불어난 작품들은 형식과 스타일에 있어서 다채로운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이탈리아 음악(Italian Music) 15세기 후기에 있어서, 성악 칸초나(vocal canzona)로 총칭되어 일반에게 널리 애창되었던 성악 형식에는 북 이탈리아의 *프로톨라, 남 이탈리아의 *빌라넬라, 카니발 송, 스트람보티 등이 있었다. 그다지 세련되어 있지 않은 이 형식은 보통 4성부로 된 무곡풍의 리듬을 갖는 명료한 박자로 되어 있었고, 화성적 진행이 지배적이었다.이것은 16세기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선구적인 형식이었다.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16세기를 통해 17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발전했으며 세련되고 다듬어져서 대위법적으로는 기교적인 것으로 되어 더욱 표현이 풍부한 음악형식이 되었다.*프로톨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성행한 단순한 세속 다성 성악곡으로 나중에 마드리갈의 전신이 되었다. 가사는 풍자적이거나 사랑에 관한 것들로 철저하게 세속적 성격을 띈다. 음악적으로 프로톨라는 모든 성부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주선율이 제일 윗성부에 놓이며, 아래 성부는 악기로 반주하는 단순한 화성을 갖는 3성부 또는 4성부곡이다. 프로톨라는 세속 노래이지만 대중적이거나 민속적인 노래가 아니라 귀족들이 즐기던 것으로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성행했다. 그후 나폴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 전파되어 이탈리아 세속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빌라넬라: 15세기후반 이탈리아 남부에서 성행된 리듬과 화성이 두드러진 춤곡 형식의 음악*마드리갈: 마드리갈은 15세기말 프로톨라를 대신하여 16세기 이탈리아 세속노래 중 가장 중요한 장르로 등장했다. 마드리갈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처음으로 유럽음악이 중심지가 되었다. 음악은 시가 의도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은 그시대의 작곡가들은 시가 nello)라는 후렴이 있는 유절형식의 노래인 반면, 16세기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절형식이므로 선율이나 가사의 반복이 없다. 마드리갈은 귀족들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기 위하여 위촉받아 작곡되기도 했고, 어떤것들은 특정한 결혼, 잔치, 축제등 궁정에서 열리는 모든 종류의 사교모임을 위하여 작곡되었다. 연주형태를 비교해 보면 프로톨라는 기악반주가 있는 독주자를 위한 음악인 반면 마드리갈은 3~12명이 부르는 성악 실내악곡으로 보통 한 가수가 한 성부씩 무반주로 부르거나 악기들이 성부를 중복 또는 대신 하였다. 마드리갈은 작곡된 시기에 따라 1524~1545년 까지 작곡된 것을 초기, 1545~1580년 사이의 것을 중기, 그리고 1580~1620년 까지 작곡된 것을 후기 마드리갈로 분류되고 있다.*리토르넬로: 이태리어의 ritorno(돌아온다)의 축소형에서 나온 말로 영어로 표현한다면 "little return"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반복되어 나타나는 짧은 경과구를 말한다.이탈리아의 14세기 음악14세기에 쓰인 논문에 의하면 당시 음악 교육에서 폴리포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즉흥성을 존중하는 이탈리아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었다.14세기 이탈리아 다성악곡에 압도적으로 세속작품이 많고 전례용 종교음악은 별로 없다. 실제 이탈리아 폴리포니 발전은 볼로냐를 중심으로 시작하였는데 이 도시에서는 정량 기보법을 써서 이탈리아 시에 작곡하는 일이 퍼져 있었다.중요 형식① 마드리갈 : 보통 2성부로 이루어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폴리포닉한 가곡 형식. 이 형식에서는 2박자의 각 연이, 다음에 3박자의 리토르넬로를 붙여 끝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② 카치아 : 2성부나 그 이상의 성부 사이에서 행해지는 계속적이 모방에 바탕을 둔 카논의 원리를 처음으로 개발한 가곡 형식이었다. 보통 카논적인 리토르넬로 부분이 붙여져서 끝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③ 발라타 : 춤을 위한 노래로 나온 것이고 마드리갈이나 카치아보다는 조금 나중에 이탈리아인에게는 맞지 않다. 14세기는 이탈리아 음악에 있어 영광에 가득찬 시대였지만 세기말에는 음악가들의 취향이 프랑스식으로 기울어져 결국 이탈리아식 기보법은 쇠퇴해 버렸다.1. 베네치아 악파(Venetian School)성마르코 대성당 중심으로 번영 되었습니다. 발라르트는 2중 합창과 생기있는 마드리갈과 같은 작품을 통해 베네치아 악파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기악과 극적인 음악에 의해 근대적 색채. 반음계적 화성원리를 개척, 반음계법의 환상적이며 장식적인 성격을 띤 아라베스크(arabesque)적인 사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2의 명암의 대조에서 나타낸 효과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코러스or기악의 앙상블에서 볼 수 있으며 셈.여림의 대응. 높 .낮은 성부의 클럽이 번갈아 하는 solo와 한 가락을 연주하는 투티(tutti)의 대비가 효과적입니다. 곡의 형식은 성악곡의 마드리갈. 모뎃트 기악 반주로 된 교회용 성악곡인 교회 콘체르토(church concerto)등이 있으며 기악 분야로는 음높이의 정확성을 말하는 인토네이션(intonation) ,건반악기의 즉흥 연주를 위한 토카타(toccata) 리체르카레(ricercare) 프랑스 샹송에서 파생된 칸쪼나(canzone), 소나타(sonata), 판타지(fantasia)등이 있습니다.오페라오페라(opera)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문학적인 요소인 대본과 미술적 요소인 배경과 장치 그리고 무용적인 요소인 발레와 춤 연극적 요소인 연기와 음악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발달의 지역적인 특성을 살펴보면이탈리아 : 인문주의가 나타나자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음악에 있어서 독창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페라 탄생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초로 극에 음악을 이용한 것은 그리스 시대 입니다. 육성으로 부르는 합창과 독백이라는 모놀로그 (Monologue) ,대화등의 2중창과 합창을 포함한 영식으로 된 그리스 극도 오페라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의대 그리스 극을 연구하여 그것을 이상으로 하는 새로운 음악을 생산하려 했습니다. 대위법을 무시하고 서창풍인 멜로디에 단순한 가락을 붙인 단성음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징은 음악보다 가사를 중요시 했으며 그러기에 폴리포니 양식 보다는 다선가락 (Monedy)양식이 더 적합하였습니다. 서창적인 독창에 화성적인 기악반주가 붙었습니다. 시인 리눗치에 대본에 페리 가 작곡한 오페라 “다프네” 가 1597년에 상연 되었는데 이것이 오페라 역사의 출발입니다. 두번째로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탓치니가 작곡한 신화극 “에우리디체”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오페라로서 최초의 확립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국왕 헨리 4세와 메디치 가문의 딸 마리와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에 공개적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이것은 악보로 인쇄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최초의 완전한 오페라 입니다. 한편 피렌체의 일어난 운동은 여러 도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이탈리아 오페라 초기의 개척자로써 극적인 효과 음악으로 표현 했으며 현악기의 트레몰로(tremolo) 효과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등장 인물의 성격을 악기로 나타냈습니다. 1607년 ‘오르페오’ 1608 아리아드네(lamento d’Arianna)상연 오케스트라 사용(극적인 표현의 절대적 필요)* 1637 오페라 하우스 개관. 유럽 오페라계의 중심지(베네치아)였습니다. 오페라하우스는 시민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운영 되었으며 그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될 만큼 오락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페라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와 고전적인 신화중심으로부터? 역사적인 제재로 옮겨 졌습니다. 이 몬테베르디는 사실상의 오페라의 창시자이며 오페라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자입니다.* 카발리(Francesco Cavalli:1602~1676) 민요풍으로 정돈된 아리아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낭독적인 서창인 레치티티브와는 완전히 구분이 됩니다. 41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지야쏘네’(giasone)가670~1736)등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형식의 특징을 보면 독창에 치중 하였으며 합주. 기악에는 비교적 소홀히 하였습니다. 영창(Aria)과 레시타티브를 갈라 떨어지게 했으며 아리아를 위해 뚜렷한 양식과 분명한 형태를 도입했습니다.오라토리오1600년경 카발리에리(Emillio del Gavalieri:1570년경~1602)에 의해 발표. 영혼과 육체의 극(La rappresentazione di Animae di cropo) 이라는 극 형식의 오라토리오 였습니다. 원래 오라토리오는 종교적 ,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극적인 대본에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오페라에 비해 보다 도덕적이고 교훈적입니다. 오라토리오라는 글자는 교회안의 예배실을 말하며 16C말경 로마의 성지 라보성당의 성 필리포네리(Fillipo Neri:1515~15950)가 자기 예배실에서 음악 중심의 신성극을 시작함으로 유래 됩니다. 분장과 몸동작도 했는데 카릿시미(Giacomo Carissimi 1605~1674)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재와 같은 합창 형식이 됨오라토리오의 형태와 명칭이 오늘날과 같이 고정되기는 18C중엽이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쉬쯔가 있습니다.칸타타17C초엽 단음악의 형식으로 이며 이를 칸타타(cantata)라 말합니다. 본래 성악곡을 지칭하는 말로서 기악반주를 가진 대규모의 성악곡 이었으며 아리아. 레시타티브. 중창. 합창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가사내용에 따라 실내칸타타(cantata da camera) 교회칸타타로 구분되며 실내 칸타타는 17C초 극적인 형식에 성악 예술로서 마드리갈의 양식을 취한 것입니다. 나폴리 악파 A. 스카를랏티가 대표적인 작곡가로 800곡에 달하는 칸타타를 냈는데 혁신적 수법으로 반주가 있는 서창과 세 도막 형식의 아리아등을 칸타타에 사용하였으며 교회의 전례용 사용, 처음에는 성서에서 가사를 따왔으나 후에는 바로크적이면서 감미로운 종교적인 시를 즐겨함으로 성서적 가사를 잃어버립니다. 교회칸타타에 형태에 이르기 까지 설교음악으로써 수준을.
    사회과학| 2003.06.21| 6페이지| 1,0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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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강 정철(작가론) 평가A좋아요
    민족어의 연금술사, 송강 정철< 6조 >Ⅰ. 서론{[한국고전작가론 / 2003년 5월 12일]송강 정철(1536-1593)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림이 점차 정치의 중앙으로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이 때문에 기존의 세력들은 이들(사림)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이 두 세력의 대립이 거세었던 시기였다. 송강 정철은 이 둘 중 집권세력을 형성하려 했던 사림이었다. 그의 생을 수많은 사화 등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앙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수많은 굴곡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본격적인 문학론을 전개하였다거나 도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사림의 문예 미학적 지침을 모색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작가로서의 정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작품들을 직접 검토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본론에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큰 사건을 짚어보고 그의 문학, 문학사상 등을 검토해 본 후 송강 정철의 작품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약술해 보고자 한다.Ⅱ. 본론1. 시대적 배경송강이 생존했던 16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 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지어지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기된 시기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른바 사림이라는 사회 세력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여,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훈구, 척신 세력을 밀어내고 집권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송강이 바로 사림출신이다.사림 세력의 형성 및 집권 이후의 동향과 관련해 우리 역사는 엄청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 다른 사대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와 당쟁이야말로, 그 격변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나간 태풍의 눈이었다.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는 신흥하는 사림세력에 대해 기존의 훈구. 척신 세력이 대대적으로 정치적 반격을 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후기까지 지속된 당6월에 복을 벗고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등 역임. 동서분당(東西分黨) 시작.1577년(42세) 11월에 셋째누님(계림군 부인)의 상을 만나 고양 새원에 머물다가 인성왕후 상을 당해 권내에 들어와 곡함.1581년(46세) 2월에 체임되어 서울로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 등 역임. 당쟁이 격화되어 시비 에 휘말리자 6월에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창병에 내려옴. 12월에 특명으로 전 라도 관찰사 제수 받음.1582년(47세) 9월에 체임되어 서울로 올라가 도승지. 예조참판 등 역임.1583년(48세)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역임. 동인들의 논척을 입었으나 선조의 절대적 신임 속에 승진 거듭.1584년(49세) 정월에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이 죽음. 동인들의 집요한 탄핵 속에서도 선조의 신임 속에 대사헌으로 총마를 하사 받기도 하고, 의정부 우찬성에 승진함.1585년(50세) 8월에 양사(兩司)의 논척 입어 고양에 물러나 있다가 창명으로 퇴귀함.만 4년간 창평에 소외되어 있으면서 가사 「사미인곡」,「속미인곡」을 짓고, 수많은 연군시와 연군시조를 짓고 자연시가도 남김.1589년(54세) 7월에 호남의 선배이자 서인의 원로였던 박순 죽음. 8월에 장자 상을 당하여 조양 새원에 머물다 10월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듣고 대권에 달려가 선조를 뵈옴. 1월에 우의정을 제수받고 위관이 되어 기축옥사를 다스림.1590년(55세)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7월에 평난공신으로 인성부원군이 됨.1591년(56세) 2월에 세자책봉 주청했다가 선조의 뜻을 거슬려 윤3월에 파직. 이어서 타핵을 입고 마침내 강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됨.1592년(57세)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석방되어 6월 평양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선조를 뵘. 9월에 양호(兩湖)체찰사(體察使)가 되어 남으로 내려가 강화도, 충청도에 머물며 겨울을 남.1593년(58세) 권율 등과의 불화로 정월에 체찰사에서 해임되고 2월에 돌아와 복명함. 5월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11월에 돌아옴. 논척(論斥) 구성은 님과 이별하게 된 사연→ 이별 후 느끼는 서정적 자아의 심정→ 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을 각각 내용으로 하고 있다.「관동별곡」에서도 연군지정은 나타난다.소양강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고신거국에 백발도 하도할샤.동주밤 계오 새와 북관정의 올나하니 삼각산 제일봉이 하마면 뵈리로다.태백산 그림재랄 동해로 다마가니 찰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임금을 떠나 관찰사로 봉직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그리워하는 정을 잊지 못하는 송강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시조나 한시에서도 이러한 연군지정이 뚜렷이 드러난다.봉래산 님겨신대 오경(五更)틴 나믄소래셩넘어 구름디나 슐풍의 들리나다강남의 나려옷가면 그립거든 엇더리창평에 머물면서도 오점(五點)이 되면 궁궐 북소리의 환청을 듣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배꽃 피는 시절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고눈에 드는 것은 전쟁의 모습뿐 문을 닫는다.저멀리 변방 하늘 임금님은 어떠하신지늙은 신하의 눈물 날로 옷을 적신다. 이화의 순결을 짓밟고 비가 내리는 것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란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당시의 시대상을 상징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 몽진(蒙塵)가 계시는 임금님에 대한 연군의 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3. 2. 풍류의 시가1) 취흥의 시가송강은 유달리 술을 좋아하였고 이 취흥 때문에 신선의 세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었고, 시가의 세계도 넓어졌다. 북두성을 기울여 창해수를 부어내는 선천적인 호기는 유교가 모든 제도를 지배하던 당시에도 그의 시가세계를 신선의 세계로까지 이끌었다.므사일 일우리라 십년지이 너랄조차내한일 업시셔 외다마다 하나니이제야 절교편(絶交篇)지어 전송호대 엇더리일이나 일우려 하면 처엄의 사괴실가보면 반기실새 나도조차 나니더니진실로 외다옷 하시면 마라신달 엇디리내말 고디드러 너업사면 못살려니머혼일 구잔일 널로하야 다 닛거든이제야 남괴려 하고 넷벗 말고 엇디리이 노래들은 술을 지은 노래로써 남달리 술을 좋아하는 송강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술합일은 보이지 않는다.3. 3. 계산(溪山)의 풍류와 자연시가(自然詩歌)16세기 사림파들이 산과 시내를 아우르는 지점에 서재나 정자를 짓고 산수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도의를 닦고 심신을 기르며 학문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시의 소재로 채택된 것이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자연 속에 숨어사는 흥취를 읊는 풍조는 흔히 강호가도(江湖歌道) , 혹은 계산풍류(溪山風流) 로 규정될 정도로 조선시대 사림문학의 중심적 조류로 뚜렷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정철은 이러한 계산풍류의 발전에도 큰 획을 그은 작가다.정철은 16세 경 창평에 정착한 이래 호남 사림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는 김윤제, 임억령 등에게서 그러한 풍류를 익혔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이 「성산별곡」의 제작인데 이것은 16세기 중반 성산 일대에서 이루어진 계산풍류의 집대성이란 의미를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정철 자신의 국문시가 창작의 문을 여는 중요한 계기도 되었던 것이다.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믈며서 하서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너겨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송근(松根)을 다시 쓸고 죽상(竹床)의 자리보와져근덧 올라안자 엇던고 다시보니 천변(天邊)의 떠난 구름 서석을 집을 사마나난닷 드난 양이 주인과 엇더한고. 창걔(滄溪)흰 믈결이 정자 알패 둘러시니천손운금을 뉘라셔 버혀 내여 낫난닷 펴티난닷 헌사토 헌사할샤.산중의 책력(冊曆)업서 四時랄 모라더니 눈아래 헤틴 景이 의의이 졀로 나니듯거니 보거니 일마다 선간(仙間)이라.어떤 지나는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마는어떠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시는고송근을 다시 쓸고/ 죽상에 자리 보아잠깐 올라앉아/ 어떤가 다시 보니천변에 떴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나는 듯 드는 양이/ 주인과 어떠한고창계 횐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천손운금을/ 뉘라서 베어 내어잇는 듯 펼치 시다. 백아의 고사를 쫓아 거문고 줄을 끊어야 했으나 출사표를 바친 때라 그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나타난 우정과 우국의 심정이 표출된 명시이다.송강 문학의 양축을 이루는 특징의 하나는 서정성이다. 즉, 탄식, 눈물, 체념, 안타까움, 외로움, 쓸쓸함, 원망 등으로써 인본적 휴머니즘을 유감 없이 드러내었다.4. 문학 사상동양문화 형성의 지주는 유·불·선과 민간신앙이다. 특히 문학작품은 정신문화의 소산인 까닭에 그 지도 이념인 여러 사상이 집적되어있다. 따라서 송강의 시문학에 나타난 사상적 배경 역시 이 범주를 공유하고 있다. 때문에 비단 송강 시문학만의 특질일 것도 없다. 차라리 그의 시문학상 한 특질이 있다면 진작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에 대한 것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모름지기 鬼力亂神을 부정하는 철저한 유가적 생활 자세의 일면인가 한다. 따라서 우리는 상기 삼교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그의 시가문학을 분석하고자 한다.4.1. 유교 사상유교는 충의와 인의 및 효제 등을 미덕으로 삼는 덕치교화 철학으로 조선의 전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이다. 유교적 윤리관의 핵심내용은 삼강오륜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충과 효는 동양인에게 있어서 중심 덕목이자 유학자들의 최고 목표로서 행동의 근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송강과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덕목을 소재로 하여 시를 많이 짓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이러한 사회적·사상적 흐름은 송강의 작품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유교사상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충과 효에 관하여 알아볼까 한다.(1) 충의충의적 사상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며, 이 충성은 곧 임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애정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비유를 좋아하는 우리 선조들의 의식사고에서 님을 향한 여인네의 일편단심은 곧잘 연군의 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송강의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성산에서 김성원의 생활 모습을 읊은 「성산별곡」을 제외한 송강의 가사 모두가 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江湖애 病이 깁다.
    인문/어학| 2003.05.28| 15페이지| 1,000원| 조회(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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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황진이 평가A+최고예요
    {「한국고전작가론」/ 기녀와 문학, 그리고 사랑 ― 황진이론Ⅰ. 머리말한국고전문학 연구가 남성작가 위주라는 것은 여성작가의 상대적 결핍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한국고전문학 특히, 시가문학사를 살펴볼 때, 수많은 시가양식의 형성, 시대적 변이상황에 따른 발전, 변형, 그리고 소멸의 와중에서 오직 그 명맥을 현재에까지 잇고 있는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양식에서 뛰어난 문학적 수준을 보여준 여류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진이다. 황진이의 시조는 양적으로는 6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각각의 작품들이 이룩한 문학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어느 사대부 시조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내밀하게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시가문학사에서 한 정점을 점한다. 여기에서는 황진이의 참모습과 그녀의 의식세계를 살펴보고, 그녀의 시조 문학에 나타난 예술성을 살펴보아, 여류 시조 작가로서의 위상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황진이의 생애황진이(黃眞伊)의 본명은 진(眞)이고, 진이(珍伊) 또는 진랑(眞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녀가 되어서는 자(字)를 명월(明月)이라 하였다. 황진이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확실한 것이 없으며, 조선 중기(중종조)의 개성 명기로만 알려져 있다. 그녀의 문집이나 연보 등은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야사나 개인 문집 등 일부 고문헌에 그녀에 관한 일화가 나타나므로 이들을 종합하여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1. 출생의 전설황진이의 출생에 관한 기록은 송도기이·어우야담·식소록·금계필담 등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대부분 과장되었거나 전설화되어 있다.황진이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머니 진현금(陳玄琴) 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가 18세 때 송도의 병부교 아래에서 삼베를 빨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 인물이 좋고 옷을 잘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자기를 눈여겨 바라보며 웃 기도 하고 손짓도 하여 현금 역시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다가 해질 무는데…… 송도의 기생 진랑이 노래를 잘 부 른다는 소리를 듣고 그 집을 방문하였다.공헌왕조는 역시 중종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책자는 가정초나 공헌왕조 때보다 50여년 늦은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졌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이 두 가지 설이 황진이의 생존년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그런데 이덕형의 송도기이 도 황진이의 생존년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내가 갑진년(선조 37)에 本府 御史가 되었는데, 겨우 전쟁이 지난 뒤여서 관청이 텅 비었으므로 남문에 있는 아전 陳福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진복의 아비 진리는 진 랑과 가까운 친족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80여세였지만 정신이 강건하여 매번 진랑 의 일을 말할 때마다 역력한 것이 어제와 같았다.- 이덕형의 이 기록은 황진이 생존년대의 신빙성 문제에 있어 의미를 갖고 있다. 중경지에도 이덕형이 유수 시절 진노인에게서 그같은 일을 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이상을 종합하면 황진이의 생존년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황진이는 연산군 말기(1502년경)에 태어나 가정초(중종 17∼18년)에 유명해졌으며, 40세쯤인 중종 35년경(1540년경)에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3. 교유 인물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미모와 재능도 뛰어났다. 기생으로서의 필수조건인 단정한 용모는 물론이고, 시(詩)·서(書)·창(唱)을 두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도 읽고, 국가 관리나 양반들을 대하는 처세술까지도 갖춘 것으로 사료된다.또한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묵객들과 교유하고 자유분방한 애정행각도 벌였다. 당시의 많은 남성들이 황진이를 탐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녀의 전성기에 그녀의 주변에 있었거나 그녀와 교유했던 남자들을 살펴보자.(1) 옆집 총각황진이가 기녀로 나선 원인은 옆집 총각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황진이의 미모에 반한 옆집 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총각의 장례를 치르던 날, 장지로 향하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를 지어 그를 보낸 아픔을 노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이 시조는 동지ㅅ 딪 기나긴 밤을∼ 과 함께 그녀의 대표작인데, 진이가 사랑하는 임 소세양을 보냈다는 사실에서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으려는 그녀의 강한 자존심과 함께 감정을 이성으로 누르는 독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4) 화담 서경덕서경덕(徐敬德)은 호가 화담(花譚)이요, 자는 가구(可久)이다.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에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그는 사마시에 합격하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개성 동문 밖 화담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여 이기론을 체계화한 학자다. 그는 화담정사에서 독서로 소일하며 성리학에 몰두하였는데, 항상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황진이의 육체적 도전도 이겨냈다. 성옹식소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황진이는 평생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걸러 화담의 농막 을 찾아 술을 다 먹고 돌아갔다. 진이는 늘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을 하고도 나에게 무너졌지만 오직 화담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까지 나한테 이르지 않았으니 정말로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황진이가 전에 교유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풍류객이었으나 화담은 학문에 정진한 석학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녔기 때문에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는 황진이에게 쉽게 넘어갔던 지족선사와는 달랐으며, 오히려 그녀를 감화시킨 의연한 선비였다.이에 황진이는 서경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였으며, 서경덕과 자신 그리고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불렀다. 황진이에게 있어 화담이란 존재는 신선한 충격이 되었으며, 그녀의 생애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이밖에도 황진이는 개성 유수 송공, 종실인 벽계수, 이생 등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황진이는 이들을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기생이라는 신분과 풍류를 즐기려는 마음, 또는 강한 자존심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이들과 교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4. 남다른 유언황진이의 미모는 일찍이 옆집 총각을 죽게 만들었다. 눌리고 복종했고 차별을 받아야 하는 슬픈 운명을 지니며 길러졌다. 이러한 사회질서와 조선시대를 풍비 했던 유교사상 속에 인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구하며 생명을 살았던 기생들에게서 진실된 문학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질서와 규범, 도리와 법도 속에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와 남성위주의 법칙 속에 인종만을 거듭하던 현실에서 그 정당하고도 필연적인 규방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생의 자유 분방함과 그 진실, 그 멋, 그 사랑에 살아왔던 기류문학에서 참다운 문학정신은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문장수련을 쌓을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던 이 땅의 옛 여류들의 문학유산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던 그 당대의 복합적인 횡포 때문인 것이었다. 시조나 한시를 오늘에 남긴 기녀는 70여명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황진이다.인간이면서도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여인으로서 살수밖에 없었던 선대의 여류문인들의 글은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오늘의 문학이 오늘을 사는 아픔의 한 전형이며, 오늘을 살며 내일을 기원하는 그리움의 전형이라면 한국여류문학은 그 아픔의 전형에 너무 잘 길들여져 왔다. 아린 고통의 한 순간 순간을 살, 한(恨)과 정(情)과 고독과 절망을 수용했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황진이의 작품세계는 당시의 시대적 현실을 잘 알려준다.Ⅳ. 황진이의 개성과 의식황진이의 언행에는 남다른 점이 많았는데, 자신을 송도삼절의 하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기생의 길에 들게 된 사연부터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적지않은 특이한 행동,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남긴 기이한 유언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그녀의 자아 의식은 남달랐고 평범한 대접을 용납할 수 없는 그녀의 자존심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진이의 정체는 외향적 천성 , 강한 자존심 , 대담한 성 개방 의식 등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1. 외향적 천성황진이는 구속을 싫어하였으며,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비성을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성을 통한 자아 실현을 도모하였다. 그녀는 고관이나 석유들과 교유하면서 성을 통하여 자신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였고, 남성의 허세를 꺾고자 몸으로 유혹하기도 하였으며, 매춘으로 기아를 해결하기도 하였다.그녀의 성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자의 성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개방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사종·소세양·벽계수 등과 거리낌 없는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지족선사와 서경덕을 몸으로 유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강산 유람 중에는 이생과 동행이었음에도 중들에게 몸을 팔아 먹을 것을 구하기도 하였던 사실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황진이의 이러한 행동들은 그녀의 의식 세계 깊숙한 내면에 어린 시절 이웃집 총각에게서 받은 충격이 죄의식으로 변하여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Ⅴ. 황진이의 작품과 사상황진이의 문학 작품으로 시조 6수와 한시 7수가 전해 온다. 시조는 청산은 내 힝이오∼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3수, 동지ㅅ딪 기나긴 밤을∼ 등 정과 한을 읊은 것이 3수, 합해서 6수이다.여기에서는 황진이의 시조 6수를 중심으로 그녀의 문학 세계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녀의 시조는 구비전승(口碑傳承)에 의하여 해동가요(海東歌謠), 청구영언(靑丘永言), 가곡원류(歌曲源流),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에 기록되어 있다.1. 자연 사랑과 정한황진이는 자연을 사랑하였으며, 속세의 번뇌를 훌훌 털고 나서 명산 유람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 자연 속에는 그녀의 정과 한이 묻어 있다. 그녀가 송도삼절 이라고 불렀던 박연폭포는 이미 자연을 넘어 그녀의 사랑 그 자체가 되고 있다.자연을 소재로한 그녀의 시조는 청산은 내 힝이오∼ 와 청산리 벽계수ㅣ야∼ , 그리고 산은 노산이로되∼ 등 세 수가 전해지고 있다.청산은 내 힝이오 녹수다 님의 정이녹수 흘너간들 청산이야 변힝손가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다고- 황진이-대동풍아 128푸른 산은 나의 뜻이요하다.
    인문/어학| 2003.05.28| 13페이지| 1,000원| 조회(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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