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1세기 발전전략탈냉전 국제정치경제 질서의 성격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국제정치경제 질서는 심각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이념감의 체제 경쟁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결말 지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종언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역사에서 전개되는 게임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한 국가가 전환기적 시점에서 서서 과거에는 성공의 동력이었지만 이제 쇠락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기존의 제도와 전략을 과감하게 개혁해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국운이 좌우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와 전략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세력이나 이익집단들간의 세력관계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즉 기존의 제도 아래 이득을 보아왔던 집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기존의 제도를 떠 받쳐주기 위해 그들이 형성한 세력관계를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제도를 개혁해내는 일은 평상시에는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때로는 개혁의 계기가 자발적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에 의해 마련되기도 한다.20세기의 한국경제20세기의 한국경제는 한일합방으로 시작한 좌절과 식민지시대, 6.25사변을 거침으로 경제파탄의 위기에 놓여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성장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성장과 최단시일 내의 산업화라는 경제사에 한획에 그을 만한 사건이였다. 이러한 고속성장이 가능하게 된 것으로는 외적인 요소로 미국의 막대한 원조로 인한 재정상황이 부실한 한국경제에 교육과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비교적 풍부하게 해 주었으며 국제자본시장의 발달이 미약했던 60,70년대에 해외자본유치를 수월하게 해준 측면을 바탕으로 우리 경제에게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대규모투자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과 미국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 역시 냉전구도 하에서 한국이 가질 수 있었던 미국,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도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내적인 요소로는 정치 경제적인 요소를 꼽을 수 있다. 박정희라는 선의구해온 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예를 종속이론가들에게는 한국이 이른바 종속의 굴레를 벗어나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그들의 이론이 예견했던 바와는 다른 다소 당혹스러운 사례였던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였다.20세기 한국경제의 한계IMF 사태에서 들어났듯이 우리 한국의 경제구조 문제를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구조는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체계로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재벌, 그리고 노동계 등 경제주체들의 입장들이 국가와 재벌들간에 이루어졌던 발전국가 연합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고비용은 고임금, 고이자율 그리고 고물류비용 등을 의미하며, 고비용 구조 때문에 과거 대우와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도 해외투자를 가속화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 자체는 재벌그룹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흔히들 한국경제는 앞으로는 미국, 일본등 선진국의 고기술의 장벽에 막히고 뒤로는 중국, 동남아의 저임금의 장벽에 막힌 샌드위치 경제라고 말해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활로는 무엇인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물론 바람직하고 점차적으로 달성해야할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임금의 하향 조정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아무리 낮추어도 중국이나 동남아 수준의 임금으로 낮추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임금을 낮추는데 주력한다는 이야기는 저임금 노동력에 주로 의존하는 가공조립형의 재래식 산업구조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우선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은 중국, 동남아 국가들에게 따라잡히게 될 저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산업부문에 계속 매달려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해야 될 일은 어차피 해야만 될 산업구조의 선진화라면 하루라도 빨리 하도록 정책환경으로 조성해주고 이를 유도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우리 국가의 역량으로는 이를 해결해나지 못한다. 즉 그만큼 국가의 자율성이 약화되어버렸던 것이다.정치인정치상황과 비슷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와 정치권이 강력한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고 그후에도 그러한 정도의 부패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서는 우리는 그들이 했던 정치경제 개혁을 추진해나가려는 과정에 서있는 것이다.독일의 경우 2차대전 후의 독일의 경제체제를 살펴보면 미국 못지 않게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믿음은 미국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론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전후 독일의 자본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로 불리는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각 국가들의 독특한 사회적 환경, 문화, 관습, 제도 등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시장 메카니즘이라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도 보편 타당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경제주의적이고 기술적인 관점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른바 독일의 국가는 사회적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권력의 분산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러한 권력분산 원칙은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의 경제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부문에 있어서의 집중, 즉 독점문제에 대한 철저한 경계였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봐라.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독점이 형성되어 버린뒤 그 독점세력인 재벌기업들의 세력을 막으려다 오히려 국가가 재벌의 포로가 되지 않았는가? 이러한 독점의 문제는 국유화나 중앙으로부터의 경제적 통제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결국 국가는 경제의 과정은 자유로 맡기되 경제의 질서에 대해서는 개입해야 된다는 주장이다.그 외에도 일본, 대만은 중소기업을 장려하는 경제구조를 따라 지금의 경제대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문제 해결방안 모색(내부 요소)정치적 안정우리는 87년도의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형식적인 의미의 정치적 민주화가 역설적으로 국가의 자율성, 관료의 중립성을 약화시키는 모델은 고급기술과 지식중심의 사회에서 불가능하다.또한 박정희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을 보면 미국이 아직 우월한 경제력의 바탕에서 신흥공업국들의 중상주의적 무역관행을 용인해줄 여력이 없으며 더 이상 그러한 차별적 무역관행을 용허할 능력도 그리고 의지도 없다. 더구나 WTO와 같은 다자기구를 통해 경제체제의 개방화가 기정 사실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박정희 모델은 경제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미국의 경제적 지원등 세계화 현상이 심화되기 전에 가능한 일이다.오히려 박정희 경제모델의 유산을 척결하지 못해 IMF 사태를 맞아 허덕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했던 발전국가 모델이 새로운 외부적 상황에 대응하여 발전적으로 대체되지 못한 채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그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민주화의 형식요건만 갖추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내요을 완성함으로써 국가의 사회세력으로부터의 자율성, 국가경제 운용의 합리성, 관료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이런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꽤하고 나서 내부가 튼튼해져 내구력이 생겨나서 외부와의 대외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새로운 국가 역할의 정립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진자본주의 체제하의 국가는 경제부문에 대해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국가가 경제부문에 대해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국가가 경제행위의 직접적인 주체로서, 즉 기업, 개인 등과 같이 경기에서 직접 뛰는 선수로서의 역할이 있다. 둘째는 국가가 경제체제 전반의 경영자 몇 감시자로서의 역할이 있다. 즉 경기의 심판으로서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진국들의 경우, 국가는 이 두가지 역할을 균형 있게 추구해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리정부는 1970년대 중화학 공업발전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규모의 경제라는 가치아래 재벌그룹 대기업들에게 편향된 정책을 실시해왔다. 즉 대기업들에게 금융, 세제 등 여러 가지 특혜를 제공하여 힘을 실어줌으로써 그 결과 고속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짧은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사실 한 번도 제대로 된 자본주의의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해 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 경제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어떻게 국가가 공정한 심판자, 체제유지자로서의 기능을 확립하고 행위자로서의 기능을 재정립할 것 인지의 문제이다.그 외에도 고급 노동인력의 훈련을 위한 노동부, 산업자원부, 교육부, 과학기술처 등 관련 정부부처간의 유기적 통합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며, 최소한 노동부를 확대 개편하고 그 역할을 강화시켜야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업훈련, 시럽자의 재훈련 등에 있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신산업 업종위주의 기술훈련이 가능한 조직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경제구조 문제해결방안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IMF사태는 국가와 재벌간의 연합에 근거한 발전전략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가 어느 모델을 지향하느냐의 문제는 한 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기업의 자금조달 면에서는 현재 상황으로 주식시장보다 금융권의 기업에 대한 감시기능을 강조한 독일식 모델을 많이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며 노동시장 구조의 유연성의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독일보다는 영미식으로 가는 것이 낫고, 다른 한편으로 노사정간의 합의의 생산적 복지를 강조하고 있음으로 유럽식 조합주의 모델, 중소기업의 육성에 적합한 대만정부가 채택한 방식이 상당히 참고할 점들이 있다.이처럼 한국의 자본주의가 영미식이냐, 독일식으로 가느냐 등을 한 마디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고 논의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 그것보다는 구체적이고 각론적으로 접근하여 우리 경제의 틀을 시급한 부문부터 당장 고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각 부문, 부문의 개혁을 일관되게 꿰뚫는 원칙이 중요하고 그 원칙은 바로 집중의 정치경제 구조를 분산의 정치경제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전환다.
목 차개요고전주의 건축에게 건축미케네 건축그리스 건축비잔틴 건축로마 건축로마네스코 건축고딕 건축르네상스 건축바로코 건축로코크 건축신고전주의 건축19세기말 건축아르누부 건축20세기 건축야수주의모던 건축포스트모더니즘하이테크20세기말 건축자연과 조화건물의 재활용해체 주의컴퓨터복합적인 도시와 조화유럽의 건축가참고 문헌개요유럽의 건축사에서 건축의 본질·실체·의미·기술·구조·형태·공간·미·재료·장식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유럽의 건축사는 다양한 건축사론, 양식론, 시대구분론, 시·공간론, 지역성, 국제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에게 , 미케네 , 그리스 ,로마,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 등으로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럽의 현대 건축물과 건축가의 조사에 앞서 다룰 내용은 유럽의 고대 건축사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건축양식의 변천사, 시대적 건축 유형을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가지 건축양식의 변천사에 해당하는 건축물과 그 건축물의 설계자, 나라별 현대건축을 중점으로 다룰 것이다.고전주의 건축에게 건축에게 시대의 미노아와 미네케가 붕괴된 후 그리스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B. C.1100년경부터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된 B. C.30년까지, 서양문화의 근원인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서 로마건축과 함께 고전주의 건축의 원형적인 양식이다.미케네 건축미케네 건축은 에게 건축의 융성·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나, 아치 대용품으로 사용한 3각형태의 상인방에 사자 조각을 한 미케네의 사자문과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가 있고, 특히 티린스 궁전의 생활 중심지인 메가론은 그리스 고대 신전 건축의 모태이다.그리스 건축스스로 헬레네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은 발칸 반도, 에게 해 주변의 지중해와 소아시아 서부를 중심으로 온화한 기후와 목재·석재 등 풍부한 양질의 건축재료, 무역·군사·문학·철학·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이용해 서양 건축의 고전을 이루는어 살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으며,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어 시민들은 더 이상 쾌적한 공간에서 살 수 없었다. 또한 공해와 새로운 유형의 사고와 질병이 만연했다. 그 반면에 초창기에 산업혁명은 많은 혜택을 사람들에게 안겨 주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건축분야의 활발한 활동이 야기되었다. 기계를 이용한 설계가 나타났다. 산업혁명은 건축이 기계화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면서 장인의 위치를 위협했다.건축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중요한 건물 중 하니안 크리스털 팰리스{) 1851년에 설립된 최초의 만국박람회용 건축으로서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건물. J.팩스턴 (1801∼1865)이 설계, 돌이나 벽돌 등 전통적인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리와 철을 중심으로 한 투명하고, 경쾌한 건물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는 산업혁명 시대의 판테온이었다. 유리와 철을 사용한 이 위대한 신전이 193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처음에는 런던의 중심부인 하이드 파크에 세워졌다가 나중에 런던 남쪽 근교인 시든엄으로 옮겨져 85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크리스털 팰리스에 비하면 판테온은 30배나 오랜 수명을 누리면서 돌과 대리석이 강하지는 않더라도 건축 자재로의 내구성이 뛰어남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다.19세기말 건축19세기 후반에 들면서 생각, 자재, 사람 등 모든 것이 급속도로 널리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많은 건축가들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고전주의가 쇠퇴하고 고딕 복고 양식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면서 수많은 건축가들이 나름대로의 몫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돔, 뾰족한 아치, 도리스 양식의 기둥, 이집트의 탑문, 인도의 스투파,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등 모든 건축물을 뒤섞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축물이 난무했으며 특별히 한 가지 양식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브뤼셀의 법원청사가 있다. 브뤼셀의 법원청사(1866-83년)는 퓨전이라는 건축 양식을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란스런 결합을명예롭지 못한 순간에 발생한 양식이었다.지층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와 비바람에 시달린 듯한 외장이 눈에 띈다. 템즈 강의 둑에 세워진 이 건물에는 3개의 극장을 비롯해 많은 수의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모던 건축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건축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으며 소련, 파스시트 정권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 등의 새로 건국된 독재 국가들은 건축을 3차원의 선전 도구인 문화의 망치로 사용했다. 사회주의 정권들도 건축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모던 건축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신고전주의와 요세프스탈린 치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 사회가 극좌와 극우로 양분됨에 따라 건축도 똑같은 길을 밟았다. 대부분의 세계가 유럽제국들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양분된 건축 양식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이 건축의 개척자 역할을 떠맡고 나섰다. 그리고 새로운 미스양식이 기업 자본주의를 모태로 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건축을 주도했다. 물론 이외에도 다채로운 양식들이 등장했지만 주도적인 건축 문화에서 단역에 그쳤을 뿐이었다많은 건축 관계자들이, 모던 건축이 완성되어 마침내 건축이 양식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1950년대에 모던 건축은 건물을 어떻게 짓느냐는 문제에 대한 기능적이고 도덕적인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지구가 언제나 자전하고 있는 것처럼, 건축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그림 유리 피라미드(파리의 루부르 박물관)I.M. 페이(Pei)가 설계한 피라미드는 1983년부터 1989년에 걸쳐 세워졌다. 유리피라미드는 루브르 박물관의 안뜰 아래까지 확장된 전시관의 입구 역할을 한다. 이 구조물은 과거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의 융합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 준다.포스터모더니즘1960년 중반 무렵,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년){)독일에서 태생의 미국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F.L.라이트와축을 중심으로 12개의 층이 올라갔다. 로저스가 돈으로 치장한 이 하이테크 전물은 철재와 유리를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준 좋은 예이다.20세기말 건축자연으로의 회귀20세기 말 건축은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새로운 자재와 컴퓨터, 지배적인 양식과 철학에서의 탈출 등이 과거 어느 때보다 건축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고려, 화석 연료의 사용과 남용 등과 같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책임, 그리고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의 설계에 대한 간섭이 있었다. 21세기를 맞은 지금 건축가는 상상력을 활짝 펼쳐 나아가야 한다.21세기에 들어서면서 건축물들이 자연으로의 회귀로 돌아가려고 한다.{그림 로벤가제 앤드 케걸가제 아파트이 아파트(빈,1985년)의 설계에서 화가이자 건축가이던 프리델스라이히 훈더르트바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1928-2000년) 직선과 회색 콘크리트의 시대에서 포리덴스라이히 훈 더르트바서는 이러한 현대의 기능성이 인간을 경시하는 것이라면서 신뢰하지 않았다. 그 가 지은 집들은 직각이란 도무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으며, 형형색색의 면들과 기울 어진 면들과 녹색의 옥상이 있다.는 다양한 색을 불규칙하게 사용하고, 양파 모양의 큐폴라{) 아치에서 발전된 반구형 건물구조체로서 원형 ·육각 ·팔각 등의 다각형 평면 위에 만들어진 둥근 곡면의 천장이나 지붕을 말한다. 특히 작은 것이나 소탑 끝에 있을 때는 큐폴라(cupola)라고 한다.를 아파트 건축에 사용하여 전통적인 관습을 깨뜨렸다.건물의 재활용역사적인 건물을 해체하는 열풍이 1950년대와1960년대에 전 세계의 도시를 휩쓸었고,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자 이런 열풍에 반발해서 건축 유산을 지키려는 보존 운동이 일어났다.{그림 오르세 미술관(파리 ,1984-86년)1900년 만국박람회 전에 세워진 원래의 기차역은 근처의 루브르 박물관의 기능을 보완할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었다. 기차역을 허물고 호텔을 세우려는 계획이 입안된 적이 있었어 가기 위해서 모방까지 한다.1975년에 처음 개장한 조가비 모양의 이 콘서트 홀은 20년 후 리옹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보수되었다. 조명 시설과 편의 시설이 추가되면서 주변 환경과 더욱 조화된 건물로 변했다.근대 건축으로 들어오면서 기계의 시대가 대두되었다. 기계의 시대에 들면서 건축가들은 창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건축술, 새로운 건축 자재, 새로운 목표가 그들에게 물밀 듯이 밀려왔다.유럽 건축가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i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에서 출생을 하여 1926. 6. 10 바르셀로나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그는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이며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정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생애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 80)와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 말에 지은 궤 저택과 궤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
백두산의 생성 역사목차서론 한반도의 화산활동화산활동이란?한반도의 화산지형연구의 목표본론 백두산 소개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역사 기록백두산의 암석학적 및 지질학적 특징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활동천지와 화산활동백두산의 형성백두산 생성과정결과 백두산의 폭발 가능성결론 백두산이 다시 폭발한다면?참고자료서론한반도의 화산활동한반도에서 약 9천만 년 전 백악기 말, 남부지역에 활발한 화산활동이 시작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신생대를 거쳐 불과 천년 전까지만 해도 불타는 화산들은 한반도 곳곳에서 불을 뿜어댔다. 한반도의 불의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자.화산활동이란?한반도의 화산활동을 살펴보기에 앞서 화산활동이란 무엇이지 짚고 넘어가자.화산은 지구의 맨틀이나 지각에 연결되어 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고, 지구의 내부 에너지를 지구 밖으로 내보내는 굴뚝과도 같은 것이다. 화산이 활동하면서 뿜어내는 화산재는 높이 10-13Km이상의 대륙권 밖의 높이까지 올라가 지구의 주위를 돌면서 떨어진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은 800개 정도가 있으며, 과거에는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현재에는 활동을 하지 않는 휴화산과, 아예 활동이 멈춰버린 사화산이 수천 개가 있다. 최근 바다 밑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화산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 수가 얼마나 되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여전히 많이 있다.화산활동 때 뿜어 나온 화산재는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도 하며, 자바와 같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때때로 분출한 화산재가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농업 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 화산 활동은 때때로 새로운 대륙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해산이나 화산도가 생성되면 풍요로운 어초가 된다. 이런 화산활동에 통해 한반도에 어떤 것이 생성되었는지 알아보자.한반도의 화산지형우리나라는 대체로 지반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화산은 없으며,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분출한 화산 지형이 주로 분포하며 대표적으로 백두산, 제주도 , 울릉도 등지에 나타난다.백두산 일대의 화산 지형두산의 소개백두산은 한·중 양국에 걸쳐 있는 장백산맥의 최고봉으로,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과 두만강 및 중국내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환태평양 화산대의 일부분으로 화산 폭발 때 생긴 흰색 부석으로 인해 산꼭대기가 사시사철 희게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산정에는 칼데라 호수인 천지가 있다. 천지는 수심이 3백 73m, 호수면의 둘레는 13.11km, 호수면의해발고도는 2천 1백89.1m 이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해발 2천 5백m 이상이다.백두산 천지의 모습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역사기록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최근까지도 계속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을 보면, 1597년(선조30년) 8월 26일 대포소리같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큰돌들이 뿌려져 나왔고 붉은 색의 흙물이 솟아 나왔으며, 1688년 4월에는 백두산에서 솟구친 재가 함겨북도의 경성(현재 청진시 경성)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또 1702년과 1892년에도 백두산에서 화산작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백두산 주변에 1712년, 1724년, 1898년, 1900년, 1903년에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지진 및 화산회의 분출이 있었다는 기록이 중국 문헌에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백두산은 앞으로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휴화산이다.백두산 일대의 암석화적 및 지질학적 특징백두산 화산은 현무암 용암대지와 순상화산체를 하부로 하여 그 상부에 칼데라를 가지는 성층화산추로 구성되는 복합화산체다. 화산암류 분포면적은 약 1만8천3백50km²에 달한다.백두산과 천지에 대한 지질조사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중국과 북한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백두산의 형성과정, 화산암류에 대한 암석학, 지질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국내 화산학 전공 지질학자들을 중심으로 '백두산-한라산 화산연구회'가 발족되었고 백두산과 한라산 화산활동 및 화산암류 연구가 한-중 양국의 수교와 함께 급속히 진행되게 되었다.백두산 지역의 화산분출 역사를 화산암 층의 화산층서적이며 간헐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를 백두산기 화산활동이라 부른다.백두산기 화산활동은 61만년-55만 년 전, 44만 년 전, 33만 년 전, 28-22만 년 전, 10만 년 전, 그리고 9만 년 전-8만 년 전의 6기에 걸쳐 알칼리조면암 용암 유출과 화산쇄설암 분출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들 화산분출물이 번갈아 쌓여 점차 큰 규모의 백두산 성층화산추를 형성했다.백두산 성층화산체가 형성된 후 지하 심부의 마그마 방은 평온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광물의 정출에 수반하여 휘발성 성분이 점차로 집중되고 마침내 수증기압이 커지면서 다량의 부석과 화산회를 분출한다. 이를 백운봉기 화산활동이라 부른다.백운봉기 화산활동은 이때 분출한 고온의 부석과 화산회의 퇴적층 사이에서 발견되는 탄화목의 탄소동위원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천4백10-1천50년 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운봉기에 많은 양(50㎦ 이상)의 보석 화산회 화산쇄설물이 분출되면서 천지 하구 안쪽 벽이 심하게 파괴되고 함락되어 칼데라가 형성됐다. 그리고 칼데라에 물이 고여 오늘날의 천지가 만들어졌다.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활동1413년, 1597년, 1668년, 1702년에 천지를 중심으로 화산회와 가스를 내뿜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으나 그 분출물은 잔존하지 않는다. 그 뒤로도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 1724년, 1898년, 1900년, 1903년에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지진 및 화산회의 분출이 있었다는 기록이 중국 문헌에 전해진다고 한다.백두산 최상부의 백운봉기 화산분출물은 황색, 흑색, 백색의 부석과 화산회가 주종이며, 천지 주변의 백운봉, 천문봉 정산과 천지 동남쪽 삼포 일원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천문봉에서 부식층 두께는 약73m 이며, 천지에서 멀어질수록 두께는 점차 작아져 삼포 일원에서는 30cm-1m에 이른다. 이때 분출된 화산회가 멀리 동해와 일분 혼슈 북부 및 훗카이도 일원까지 날아가서 쌓인 응회암이 산재한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B-Tm ash'(백두산 -토시에 멸망했다.서기 926년을 전후하여 천지 칼데라를 형성한 백운봉기 화산활동 절정기에 화산분출로 인한 고온의 화산회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의 발해 일대를 뒤덮고 화재 및 지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 및 재산사의 피해가 발해왕조 내부사정과 연계돼 멸망을 촉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진위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추리임은 분명하다.천지와 화산활동백두산 꼭대기에는 16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천지가 있다. 천지는 한라산의 백록담과 마찬가지로 화산 활동이 끝난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겨났다. 산꼭대기에 있는 화산 분화구로서는 백두산의 천지가 세계 최대이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384미터입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천지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의 길이는 14.4킬로미터에 이르며 긴 쪽의 지름은 4.6킬로미터나 됩니다. 천지에 있는 물의 양은 19억 5천5백만 톤이라고 합니다. 이 양은 1초에 1톤의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로 물을 퍼도 60여 년이(칼데라호 형성 )나 걸리는 엄청난 양이다.천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이며, 1월과 2월 동안에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천지에서는 공중에 물을 뿌리면 물이 그대로 얼어붙고 사람도 10분만 지나면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어질 정도라고 한다. 천지의 물은 보통 9월부터 얼어붙기 시작하는데 12월이 되면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인다. 상상할 수도 없이 추운 천지에서도 천지의 물이 모두 얼어붙는 데 넉 달이나 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그것은 바로 천지 속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천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온천은 백두봉 아랫부분에 있는데 최근에 발견되었다.천지 속에 있는 온천이 이제까지 비밀로 남겨진 까닭은 겨울철에 천지 탐험이 거의 없었고, 여름철에는 수면이 높아져 온천수의 구멍이 천지의 물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지에서 솟은 온천은 온도가 섭씨 73도의 아주 뜨거운 물인데다가 탄산수와 약수 성분이 들어 있어서 약효가 뛰어나다고 합니다.백두산의 화산 활동과 천지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학다.전기의 화산 분출 활동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3천만년 이전인 마이오세에 히말라야조산운동의 영향을 받아 장백준평원면에는 판열함락곡지가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마안산, 백두산,장홍봉, 북동향 함락곡지에는 작은 연못과 호수가 형성되고 역암, 사암, 분사질 점토암, 규조토 지층을 이루었는데 전체 두께는 300미터이다. 이때 화산 분출 활동이 동반되어 현무암이 형성되었다.1900만여 년 전에 북동향 단열 함락대는 상승되어 육지로 변하고 북서향 단열대가 생기면서 지각의 틈을 따라 화산분출이 있어 두께가 500미터 되는 현무암 층을 형성하였다. 그 가운데 전형적인 암층이 중국화룡시 서남쪽에 있는 벼개봉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 지층을 벼개봉 현무암이라고 한다. 또 1,5OO만 년 전에 북서향 단열대에서 현무암의 열극분출활동이 있어 이 지역에 북서향 산맥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곳은 이도백하진에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 동쪽에 있는 내두산인데 용암층의 두께는 300m 내지 400미ㅡ나 된다. 이것을 내두산 현무암이라고 부른다.약4백만년 전인 플라이오세에 북동향 만열대는 계속 융기되고 북동과 북서향 2개 단열이 새로 생기고 그 열극을따라 현무암이 분출하였다. 전형적인 곳이 평정촌이어서 평정촌 현무암이라고 불린다.플라이스토세에 들어와서 백두산 지구에서는 북동향 단열대인 백두산 단열 함락대가 계속 상승하고 동서향 단열대인 소영자-광평 단열대, 백두산-길주 단열대와 북서향 단열대, 북동향 단열대가 계속 활동하였다.이 세 단열대의 교차점인 백두산은 화산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260만 년 전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열극식 분출을 동반하면서 대량의 현무암이 분출되어 순상 현무암대지를 이루었는데 돌기된 부분이 백두산이고 대피 부분이 지금의 장백용암대지, 백수용암대지이다. 화산체의 형성 플라이스노세 중기에 이르러 백두산 화산은 다시 화산활동을 시작하였다.지금으로부터 55만년 혹은 58만 년 전에 백두산에서는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가스기둥을 이루면서 하늘 높이 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