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사상에 대해서...1.주체사상의 개요...→북한에서 주체사상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 한것은 1963년 10월 김일성이 "사상적으로 주체를 철저히 세워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모든사람이 조선혁명을 위하여 복무하고 주체적 실상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주체적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창시에 대하여 기술한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서술한 내용은 다섯 가지의 이론적 체계로 구성되어있다.첫째 주체사상은 누가 창시하였는가둘째 주체사상은 어떠한 배경과 필연성에 의해 창시되었는가셋째 주체사상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창시되었는가넷째 주체사상은 언제 창시되었는가다섯째 김일성 수령은 주체사상에서 무엇을 창시했는가82년 김정일 명의로 발표된 는 주체사상의 구성체계를 명백히 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으며 구성체계는 3가지 부분 :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원리, 지도적 원칙으로 되어 있다.철학적 원리 :김정일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와 그에 기초한 사람 중심의 세계관, 사람의 사회적 속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요컨대 주체사상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사람의 사회적 속성임을 밝히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며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세계와 자기 운명을 개조, 개척하는 존재임을 밝히 사람 중심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주체사상이 객관적, 물질적 환경보다는 인간(사상, 의식)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구별된다. 주체사상은 계급투쟁 의식을 물질적 생산력(노동력과 생산수단)과 생산수단(생산수단의 소유관계)과의 모순이라는 개관적, 물질적 조건의 필연적 소산으로 본 마르크스 사상과 다르다. 그러나 인간(사상, 의식)을 중시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독창적 사상이 아니라 의식을 중시한 레닌의 사상과 스탈린 시대의 사상(스탈린 1인의 사상, 의식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는 사상)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원리는 사람 중심의 원리주장이다. 그러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통하여 그 종국적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는 주장은 합리적 근거 없는 독단적 주장에 불과하다.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에게 '자주적 입장' 즉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권리행사를 요구하고 있으나 그와 같은 요구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주장과도 모순되는 요구로서 수령과 당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인민 대중에게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요구이며, 주체사상이 인민대중에게 요구하는 또 다른 '자주적 입장' 즉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책임 완수 요구 역시 실현 불가능한 요구라는 것은 북한의 오늘의 경제 파탄 상황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셋째,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의 철학사전은 김정일이 사회역사적 운동이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것을 과학이론적으로 해명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대중에게 창조적 입장을 당위론적으로 요구하는 모순된 주장을 펴고 있으나 개인의 창의력을 제도적으로 말살하는 1당, 1인 독재 정치체제, 사히주의 계획명령경제체제를 구축해 놓은 후 창조적 입장을 요구한다고 해서 인민대중이 그와 같은 요구대로 창조적 입장을 견지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북한의 오늘의 상황이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넷째,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다" 이는 김일성의 독창적 사상이 아니라 레닌과 스탈린의 사상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고 또한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북한의 구호와 모순되는 내용이다.지도적 원칙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김정일은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4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첫째 '사상에서의 주체'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 이후 당내의 국내파를 숙청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정치이념을 수용하여 권력을 유지하였으나 스탈린의 사망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에 대한 비판으로 김일성은 어서 김일성이 1956년 6월과 7월 소련과 동구국가를 방문했을 때 이들 국가들로부터 이렇다 할 만한 원조약속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최된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반대파벌들과의 발전전략 논쟁에서 자신이 줄곧 주장해 온 중공업중심의 발전전략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경제에서의 자립을 내세우게 되었다. 즉 해방 후 1956년까지 북한의 총예산 수입의 40%를 중·소를 비롯한 공산권의 원조에 의존했던 김일성이 1956년 12월 11일 '경제에서의 자립'을 주장한 것은 공산권의 원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넷째 '국방에서의 자위'의 원칙에 관하여 김정일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국방에서의 자위를 실현하는 것은 자주 독립국가 건설의 기본원칙이다. 국방에서 자위는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의 군사적 담보이다. 국방에서의 자위의 원칙을 관철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 나라를 보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위적 무장력을 가져야 하며 전인민적, 전국가적 방위체계를 세워야 한다. 또한 인민무력의 정치·사상적 우월성을 높이 발향시켜야 하며, 자체의 국방공업을 건설해야 하며 후방을 강화해야 한다.1961년 5월 16일 남한에서의 군사 정권 등장, 소련이 미국에 군사적으로 굴복한 쿠바사태(1962년), 중·소간의 이념 분쟁의 와중에 중·소간의 국경분쟁시 소련이 같은 공산국가인 중공이 아니라 인도를 지원한 사건 등이 계기가 되어 1962년 12월 10일 김일성이 국방에서의 자위를 내세운 것이다. 1963년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장비의 현대화라는 4대 군사 노선을 실천에 옮겼다.김정일은 국방에서의 자위가 경제적 자립의 담보라고 주장하며 국방공업 건설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북한이 추구하는 이른바 '국방에서의 자위'와 이를 관철하기 위한 국방공업 우선 정책은 북한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와 함께 경제적 자립의 담보는커녕 북한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했고, 한편으로는 대미 화해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김일성의 입장에서 볼 때 스탈린의 사후 일어난 소련의 변화는 절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인물이었고, 1945년 분단 이후 한국전쟁을 도발할 때까지 김일성이 북한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강력하게 후원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북한의 지도체제를 구축하면서 스탈린의 소련 통치방식을 모방하는 데 주력하였다. 게다가 철저하게 반미제국주의 정책을 주장해 온 김일성의 입장에서 흐루시초프의 대미화해정책은 마치 사회주의 자체를 저버리는 것과 같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나 이 정도의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의 정치노선에 맞선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당시 북한 내부의 정치적 상황자체가 김일성이 소련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주체노선을 내세워야할 만큼 절박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1955년 12월 주체를 언급할 때 노골적으로 소련의 정치노선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다만 "맑스-레닌주의와 선진 당들의 투쟁 경험을 ... 많이 배우고 섭취하되 ... 통째로 삼키는 것은 아니라 ... 조선 인민의 투쟁을 잘 조직하고 추진시키기 위한 관점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 뿐이다. 그래도 김일성이 우회적인 방법으로나마 소위 '주체'노선을 내세우게 된 것은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변혁이 북한 내부에 영향을 미쳐 자칫 김일성의 정치적 위치를 불안하게 만들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당시 흐루시초프는 소련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1인 독재를 지양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북한이 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산하의 여러 나라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중공업 우선 정책 대신 소비재 생산을 독려해야 할 것이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와 같은 흐루시초프의 입장이 북한내부의 반 김일성 세력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층 내부의 저항이 상당히 컸다는 점이었다.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한 저항은 소비재에 대한 주민들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희생시키는 노선이라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북한의 사회상을 요약해 보면 경제발전의 결과 각 분야별로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주민들은 기본적인 생필품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공업 중흥을 목표로 산업 현장에서 힘든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방문기간 동안 소련식 집단적 지도체제를 수립할 것을 모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최창익은 김일성이 중공업 발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생활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이에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반인민적"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이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하는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연대를 맺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 결과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어 갔고 경제협력의 범위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1955년 12월 당의 이념적 과업을 추진할 때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주장을 펴게 된 것이다. 김일성은 새로운 정치적 목표로 '주체'를 세우자고 주장하면서 박창옥·박영빈 등 지도적인 소련계 한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인민학교 벽에 푸쉬킨의 초상화를 걸어 둔 일이나 당 기관지의 편집인이 프라우다지의 머릿기사를 재편집해서 싣는 행위 등은 주체를 잃어버린 일로 규정되어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김일성은 '주체'라는 기치를 내세워 당시 북한에 있던 소련계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 갔다.2. 1965년 당시의 배경1955년 12월 이후 이른 바 주체노선은 김일성 정치논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58년 3월 23일 노동신문에 실린 "사상사업에서의 주체 확립을 위하여"라는 기사를 보면 김일성이 "반혁명 세력"을 분쇄할 때 공식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그들이 주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김일성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주체노선을 강력하게 추구했다고 해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