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민속-꿈은☆이루어 진다. 계모임게 대해서-계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낯설지 않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청소년들도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끼리 이명 먹자계라든지 아니면 옷이나 필요한길 사기위해 계모임을 가진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인 있기 때문이다. 계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조직적인 모임으로 별다른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쉽게 만들 수가 있다. 또 목적을 이루거사 필요성이 없어지면 쉽게 깨어지기도 한다.그러면 언제부터 ‘계’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계’라는 것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 ‘계’라는 명칭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경덕왕 시절...... 만일을 기약하며 계를 만들었다” 라는 대목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계의 정확한 발생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향도(香徒)를 계의 근원으로 추측하고 있다. 향도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신앙조직체로 그 명칭은 불교의식에서 향(香)을 많이 사용하는데서 비롯되었다. 특히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에 계를 만들어 향을 피우는 풍속이 있는데 이를 향도라 부른다......”는 대목에은 계와 향도와의 관련설을 암시해주고 있다. 어쨌든 계의 바탕에는 불교적 문화가 깃들어 있고, 이런 종교적 이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계라는 것이 원래 사람들의 종교를 통한 기원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의 최초의 계는 고려시대 의종때 문란과 무관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 문무계. 그리고 벼슬에서 물러난 70세 이상의 원조 대신들로 이루어진 기로회, 그리고 동갑계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조의 기록에서는 계라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는데 서양에 다니는 학생들이 조직한 서당계, 책을 살돈을 마련하기 위한 서책계,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한 보계와 수리계, 삼림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한 송계 같은 것이 있다. 현대시대에 와서 추구하는 계의 목적과 거의 똑같은 용도로서 계가 자리잡은 것이다. 계의 상호부조적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는 큰일을 치를 때이다. 특히 혼인이나, 상, 회갑같이 큰일에는 많은 일손과 경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혼상갑계를 만들어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이를테면 혼인과 회갑잔치에선는 남자들이 돼지를 잡거나 음식을 굄질(그릇을 높이 쌓아올리는 일)하고 여자들은 갖가지 음식준비를 해준다. 뿐만 아니라 상을 당했을 때는 부고를 돌리는 일에서 음식준비, 상여메기, 묘터파기, 문상개 대접 등 서슴없는 몸부조를 해주는 것이다. 즉, 과거의 계는 단순한 금적적인 관계가 아니라 정(情)을 바탕으로 하여 이웃과의 친목도모를 이루었다.그러나 현대사회에 와서 혼례와 상례를 치르는 방식이 크게 변하면서 혼상갑계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특히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르는 탓에 혼인잔치를 위한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게 되었다. 음식대접도 가까운 식당에서 하고 식당에서 제공되지 않는 음식이나 떡은 시장에서 구입하여 마련하다. 또한 최근에는 아예 음식대접을 꺼리고 하객들에게 돈을 놓은 봉투를 나누어 조는 경우도 많다. 상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상을 당하면 전화나 전보를 통해 알리기 때문에 예전처럼 부로를 돌리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포크레인을 불러서 관을 묻을 구덩이도 미리 파 둔다. 그리고 상여 대신에 영구차라는 것을 이용하거나 아예 자가용으로 시신을 모시고 상주들은 트럭으로 이동할 때도 있다. 따라서 마을 공동상여와 상여를 멜 상두꾼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장의사가 모든 장례과정을 떠맡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니 혼상갑계는 몸부조가 아닌 오로지 금전부조만을 행한다. 단순히 상호부조계가 큰일을 치르는데 있어서 필요한 직접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보 받는 과정에서 친목과 결속을 다지고 정을 나누는 모임이라고 볼 때 현대사회의 금전만을 목적으로 하는 현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현대에 와서 ‘계’란 것은 소비지향적인 목적추구형 적인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각 시기별 유행에 맞추어 유행을 따라가려는 계가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년도별로 유행하던 계에 대해서 알아보면 60년대에는 가발이 유행하면서 가발계가 생겨났고, 70년대에는 성형수술의 기술개발에 힙입어 쌍꺼풀계가 성행하였다. 80년대에는 농촌지역에서 자동차 구입을 위한 자동차 계가, 90년대에는 삐삐계가 유행하더니 지금에 들어서는 핸드폰계가 성행하고 있다. 물건을 지칭하는 계의 명칭을 보면 당시의 유행 풍조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여성들의 패션 흐름을 말해주는 밍크코트계, 무스탕계, 토스카나계를 들 수 있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때그때의 유행에 발맞추어 외국의 유명 상표 제품의 이름을 딴 계들도 있다. 그리고 취미생활에 따라 만화계, 에니매이션계, 게임팩계 등 무수한 계들이 있다. 특이한 계들 가운데는 주로 젊은 여성들이 미(美)를 위하여 하는 것이 많다. 얼굴 성형을 위하여 성형수술계를 만들어 성형수술을 한다. 그리고 신세대 주부들 가운데서 미용계라는 것이 있는데 매달 일정한 돈을 거둬 전문미용사를 초빙하여 모발, 얼굴, 전신마사지 등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전 이승희라는 누드모델이 화제를 불러 일으켰을 때는 여성들 사이에 예쁜 유방을 만들기 위해 유방계라는 것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그러나 과거에는 친목, 즉 정이 우선시 된 바탕에서 목적을 추구하는 계를 만들었다면 지금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한 방편으로 계를 만든다. 그래서 그에 관한 폐해사례도 적지 않은데 특히 젊은 애들 가운데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서울의 모 중학교 학생은 곗돈을 제때 내지 않아 계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중 고등학생들에서 흡연계, 음주계 등 탈선을 부추기는 계모임도 성행한다. 또한 곗돈을 거두고 도망가서 계원들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지금의 계모임이 과거의 그것과 외형은 비슷하다고 하나 그 정신은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를 알려준다.삼국시대의 향도에서 오늘날의 사이버 계모임까지 내려오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한국인들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그때의 필요에 따라 계를 끊임없이 변용시켜 조직해 왔다. 즉 계는 시대의 병화에 부응하여 끊임없이 거듭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는 어떤 특성을 가졌길래 이토록 한국인들의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1.허균에 관하여허균은 선조2년 1569년 당대 명문가인 허엽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두살 때에 경사도 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상주 객관에 있을 즈음에 아버지가 죽었다. 그 뒤에 어머니와 서울로 와서 본격적으로 서얼출신 서곡 이달의 밑에서 시를 배웠다. 당시 사회는 서얼금고라 하여 서얼출신의 신분상승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뛰어난 문장실력을 가졌지만 벼슬길이 막혔음을 통탄하여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달은 허균의 둘째현 허봉과 친한 친구여서 이런 인연 때문에 손곡에게서 시를 배우게 되었다. 허균은 손곡에게서 당나라 시의 묘체를 몸소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문학관까지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영향 때문에 허균은 유가집 양반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서류들과 더 친분을 쌌고 그들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을 것이다. 아무튼 이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기간이 허균의 생애에 있어서 큰 영향을 받은 시기였음은 틀림없다. 그의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 때문에 그는 관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칠서의 옥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허균작품의 해석(1) 호민론의 해석허균은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발전의 저해요소를 비판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이 대표적인 작품 '홍길동전'과 '유재론'에서는 서얼금고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호민론'에서는 당시 위정자들의 부패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치의 근본은 민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대단히 개혁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이런 사상들의 주장으로 인한 결과라고 보아도 그리 과장은 아닐 것이다.지금부터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작품의 내용해석과 또 작품에 나타난 허균의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먼저 호민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호민론은 당시 부패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허균의 정치이념을 보여준다. 첫째로 위정은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를 '호민'이라고 하였다.은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민중뿐이다'로 시작함으로써 이 이론이 민중에 바탕을 두었음을 밝힌다. 에서는 민중을 '호민' '원민' '항민' 세분류로 나누고 그들의 저마다 다른 정치성향 또는 현실성향을 분석했다. 먼저 항민은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나 지식이 없는 우둔한 민중이고 부패한 권력가들에게 수탈당하기 좋은 대상이다. 즉 정치에 대한 의식 수준이 가장 낮은 집단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란 점에서 항민과 같으나 원민은 자신들이 왜 수탈당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처지에 대하여 못마땅해 한다. 이러한 사고와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특별한 행동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이는 집단이다. 호민은 어떠한가? 호민은 영웅적 유형을 뜻한다. 시대의 사명을 깨닫고 남과 사회와 국가를 나와 관계 지을줄 알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이다. 자기의 권인과 함께 남의 권익을 위해서 조직력, 행동력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앞장서는 것이다. 이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지향하면서도 사회를 지향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주의자이고 사회 속에 있으면서 그 사회 질서를 밑바탕부터 파괴하려는 불순한 세력들에 저항하는 혁명가이다. 그러기에 호민은 잠적해 있다가 결정적인 때를 타서 그들의 혁명의지를 실현하고 원민을 선동한다. 이때에 원민은 호민의 좋은 협조자가 되며, 항민도 또한 그들을 따르는 세력이 된다. 허균은 호민으로써 진나라가 망할 때의 진승과 오광, 한나라가 어지러울 때의 황건적, 당나라 말기의 왕선지, 황소들 들었다. 이들은 사회에 혼란과 폭정이 있을 때에 민중을 위해서 이상 국가를 세운다고 들고 일어난 중국의 반란세력 또는 의적들이다. 이들의 목적은 착취세력을 없애고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지러운 때를 틈타 왕이 되려는 세력이기도 했다. 허균은 그 당시 조선의 현실을 진나라, 한나라, .'불행하게도 견훤과 궁예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적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사람이 나와서 백성을 충동질하면 근심과 원망에 가득찬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며 바로 눈앞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와 같은 글로서 위정자들에게 경고함으로써 좀 더 민중을 위한 정치를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호민이론은 허균의 개혁의지와 함께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위한 허균의 민권사상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호민론에 대한 의견중 하나를 들어보면 '호민은 현재의 지식인,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권력도 금력도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요,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검은 것은 검다하고 흰 것은 희다고 할 수 있는 존재요, 남에 의해서 그 의사를 매수당할 염려가 없는 사람이다.' 라고 의견을 밝혔다.어쨌든 이 에서 허균이 내놓은 것은 백성을 위해서 군주와 집권자가 있는 것이지 군주 개인이나 집권세력을 위해서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착취당하는 계급은 언제인가 반드시 모순된 정치제도 및 정치 현실을 개혁하려고 일어난다는 것, 얼핏 보기에 민중은 무기력하고 우매한 것 같지만 때를 만나면 저항세력이 된다는 것 따위로 간추릴 수 있다.에서도 그 성격의 한계가 있다. 호민을 왕건이나 이성계로 일컫지 않고 견훤이나 궁예에 견주었고, 한 고조나 당 태종으로 일컫지 않고 황건적이나 황소라고 본 점에서 호민을 개혁가이기는 하나 창업주로는 보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호민의 성격이 지닌 한계이다. 이것은 천명사상에서 나오는 정통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2) 소인론의 해석우리나라는 무오사화 후에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 간신배의 농간이 따랐었고 이에 붕당의 조짐이 보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심해지기 시작하여 선조 때에는 매우 치열해졌다. 허균은 이 붕당이 본격화된 시기 곧 선조 임금 때와 광해군 초에 살았다. 허균은 붕당에 대해 관해 비판적으로 보았다. 붕당은 현실 정치에 폐혜를 끼치고 붕당의 패거리 때문에 바른 정치가가 늘 바른 정치를 펼 수 없 한 사람이 물러가는 정도로 해결될 수 없다고 하였다. 군자와 소인을 직접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것은 곧 임금이다. 민중이나 역사는 그 표현된 행위의 결과와 영향을 보고 느껴서야 판단하고 배척하지만 임금은 이들을 판단하고 배척할 권한과 아울러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현명한 군주는 소인 정치가를 멀리하고 군자 정치가를 가까이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곧 모든 정치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임금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신하가 농간을 부리거나 그 농간 때문에 나라가 해를 입고 백성이 불행하게 되는 정치 환경이나 풍토를 허용한 것은 임금의 책임이다. 또 그는 에서 소인과 음붕을 구별하는 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소인은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탐하여 권력을 잡고 휘두른다. 어디까지나 그 행위의 목적은 개인의 영달에만 있다. 그러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권세를 잡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만 전권을 쥐고 흔든다.. 이래서 모든 잘못의 책임이나 영향은 전권을 쥔 하나 사람에게만 지워지고 미친다. 따라서 나라 전체에 미치는 해독은 적고 나라 전체의 기강은 덜 흔들리며 전권자인 소인만을 몰아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또 지난날의 소인은 학식은 분별력이 있을 만하고 행실은 세상을 속일 만하고 재능은 변고에 대처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이 권세를 잡고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마음속을 헤아리지 못하여 이들은 제멋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였다. 이들은 얼핏 군자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나라에 미치는 화가 참혹하였다. 이에 견주어 음붕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점은 소인과 같지만 파당을 짓고 떼거리로 남을 배척하는 것이다. 음붕은 자기 파당이 아니면 무턱대고 배척하고 자기 파당이면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옳다고 편든다. 그래서 여론이나 국론은 네 조가, 다섯 조각으로 갈라진다. 여기에다가 파당은 권력을 저마다 나누어서 가지고 그 나뉜 무리들이 또 새로운 파당을 짓는다. 이래서 파당은 모든 정치세력의 밑바닥까지 얼기설기 얽히게 되고 이해를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해독보다도 더 크다고 했다.허균의 사상허균의 당시 시대가 유학 일변도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유교, 도교, 불교 심지어 서양학문인 천주교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며 이러한 여러 학문의 사상은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 잘 드러난다. 허균의 에는 도학정치와, 이상정치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도학정치는 유교의 근본이념 곧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이다 이 왕도정치의 이상적인 표본은 요, 순의 정치이며, 유교의 이상은 옛 것으로도 끊임없는 회귀이다. 요, 순의 정치는 법이 아닌 교화로, 강압이 아닌 자발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 요, 순의 이상을 끊임없이 추구하다 보면 새로운 창조적인 발전이 가로막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임금에게 인과 덕만을 강조하게 되고 임금의 전제정치를 막는 법을 만드는 따위의 제도의 보장에는 소홀해진다. 그리하여 한번 어진 임금이 나타나면 모든 정치가 잘 되어 가지만 한번 폭군이 나타나면 아무런 제재도 할 수가 없이 타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복고사상의 결함이었다. 허균은 불교와 특별히 붙어 다녔는데 이것은 그의 형이 방랑하면서 불교에 바진 데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때로는 학문에 대한 탐구욕에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부질없는 속세에 대한 반발로 불교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유교에서 '자기를 위한 공부'보다 '나를 위한 공부'를 중시한 것처럼 불교에서도 자기를 이롭게 하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 곧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보다는 대승불교를 밝히 터득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불교에 관한 작품중에 '산구게(山狗偈)'란 작품이 있다. 게송은 불교의 경과 논 가운데에서 귀글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그 교리를 기록한 것이다. 허균 사신이 이 게송을 지었는데, 여기에서의 산개는 이권에 날뛰는 세상의 뭇 무리를 상징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도가에 대한 관심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학구적인 태도로서 도교를 보는 눈이요, 둘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