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歌 주제의 재고찰-향가의 주제는 민요, 동요, 토속 신앙에 대한 것,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 나라를 다스리는 노래, 부처님을 찬양하고 신앙심을 표현한 불교적인 노래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향가의 전체적인 면에서는 서정가요에 수렴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렇게 되면 향가의 서정성은 다시 찬송적 서정성(찬가)·기원적 서정성(기도)·주술적 서정성(주가)·교훈적 서정성(교훈시)으로 세분할 수 있게 된다.그러나 향가는 일원론적으로 해석하기엔 굉장히 다원적이다. 그리고 그 해독에 따라, 설화와 본 작품에 따라서 그 견해는 논자들 마다 다르므로 다양한 이견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화랑의 향가1. 慕竹旨郞歌得烏- 원문去隱春皆林米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目煙廻於尸七史伊衣逢烏支惡知作乎下是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현대역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殿閣을 밝히오신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눈의 돌음 없이 저를만나보기 어찌 이루리.郞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김완진)(1)산 사람에 대한 찬양-의 주제는 생성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생성시기를 죽지랑의 생전으로 볼 경우이다.(2)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 찬송한 추모가- 생성시기를 죽지랑의 사후로 볼 경우그러나 모죽지랑가의 생성시기 문제는 의 기록 이외에는 별다른 자료가 없는 만큼 명확히 규정짓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도 를 죽지의 생전에 지어진 것이라 보는 경우든 사후에 지어진 것이라 보는 경우든 추론적인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죽지랑에 대한 애정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더욱 정신적 가열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순수 서정시2. 讚耆婆郞歌忠談- 원문咽嗚爾處米露曉邪隱月羅理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沙是八陵隱汀理也中耆郞矣貌史是史藪邪逸烏川理叱積惡尸郞也持以支如賜烏隱心未際叱 兮逐內良齊阿耶 栢史叱枝次高支乎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현대역구름을 열어제치므로 나타난 달아흰구름을 따라 命叱使以惡只彌勒座主陪立羅良- 현대역오늘 이에 산화(散花)를 불러뿌리온 꽃아 너는곧은 마음의 명을 부리옵기에미륵 좌주 모셔라 (양주동)(1) 國泰民安-조동일 : 二日竝現의 이변을 사라지게 한 는 이른바 험악한 위기의 상태에서 지어진 노래라 할 수 있으며 향가는 인간사회의 위기와 불안을 불식시켜주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으로 미륵 신앙을 통한 國泰民安을 주제라 할 수 있다.-최철 : 해의 괴변을 사라지게 하여 태평한 세상으로 복귀신 것이 곧 도솔가이다.)(2) 백성의 회합과 원만(-불교용어인 도솔과 표기는 같으나 그것과는 무관한 향찰 표기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홍기문 : 에서 도솔은 곧 ‘두리’요 ‘두리’는 근세 남부 일대의 ‘두레’다. ‘두리’ 내지 ‘두레’는 둥굴다에서 온 것이요 이 말은 여러 사람의 화합한 상태 내지 원만을 나타나는 것이라 했다.) 의 유리왕 5년의 기록에 따라 도솔가를 짓게 된 동기가 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생각에서 였다고 하면 도솔가는 어의가 여러사람의 회합한 상태 내지는 원만의 뜻을 내포하는 것 같다. 그 주제 또한 백성의 회합과 원만의 뜻을 위해 도솔가가 창작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군중적인 음악이었음을 알수 있다.(3) 주술적 강제 명령의 호소의 의미는 반왕권파로 하여금 왕권파에게 굴복하라는 주술적 강제명령의 호소였던 것이다.)※에 대한 견해(1) 김동욱彌勒請佛의 불교가요(2) 김종우‘미륵좌주’라는 말을 낭.불융합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독특한 용어로 보고, 작품은 순불교적인 가요로 파악-(彌勒下生信仰(3) 김승찬주밀적 신앙심 밑에서 전통적 주가의 형식을 빌어 창작한 노래이며, 呪密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불리어진 다라니적 노래(4) 김열규와 성격을 같이하는 것으로 봄. 즉 를 전통적인 呪詞에 직접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파악(5) 윤영옥재래적인 請新의 가요에 불교적인 발상이 혼융된 것5. 彗星歌 融天舊理東尸汀叱乾達婆矣游烏隱城叱 兮良望良古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藪耶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月置入切는 노래)(4)오불관언, 처용의 태도에 촛점-신재홍 : 더러운 일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고, 세상일에 오불관언하는 처용의 태도가 不語로 표현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처럼 고려 에 나타난 처용의 고압적,냉소적,위협적 태도가 신라 의 체념적 모습에서 변모 첨가된 것이 아니다. 논자의 해석은 신라에서부터 존재한 처용의 고압적, 냉소적, 위혁적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5)화랑의 호국적 이데올로기-김학성, ,이영태, 김동욱 : 용은 화랑의 신앙물이다. 용은 호국과 항상 조응하고 있다. 이러한 용이 운무를 일으키는 것은 호국의 장애를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망해사는 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망해사는 바다(호국용)을 바란다는 호국과 관련된 사찰 화랑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교차).(6)불교 교화적- 황패강 : 捨心)을 成就하려 했기 때문에 처용의 무가가 敎化的인 것)→불교적인 주제(9) 지방호족 세력의 상징- 박노준 : 절대적인 선인이면서 발흥하는 지방호족 세력의 상징이기도 한 처용을 초월자적인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기기만적, 자기 포기의 부정행위(부정을 수용을 통한 긍정)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逐邪의 노래,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받아들이는 ?邪進慶의 巫歌→역신이 순순히 물러나는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채를 자백하고 퇴각하는 것은 재앙을 막고 경사를 불러들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있는 성격, 악신을 보내는 뒷풀이로 해석7.安民歌忠談師※안민가는 佛敎的),유교적(양주동, 김종우, 금기창),무, 불 습합적(김동욱, 김승찬), 풍류도적(유효석) 입장으로써 사상적 측면에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된 작품이다.君隱父也臣隱愛賜尸母史也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民是愛尸知古如窟理叱大?生以支所音物生此??惡支治良羅此地?捨遺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支知古如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현대역:김완진임금(군)은 아버지요신하(신)는 사랑하실 어머니요백성(민)은 어린(어리석은)아이로고하실진댄 민이 사랑을 알리라.대중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이를 먹여 다스를 반복하는 표현은 현실의 인생은 허망하고 가치 없다는 사실을 힘써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공덕을 쌓자는 것이다. 불사를 창건하고 불탑을 만드는 일은 모두가 공덕을 쌓는 일이다.→세상 살아가는 일 자체를 공덕 쌓는 것으로 표현) (불교적) 불교적 민중교화적 입장 -신재홍:는 민요였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인 언술을 담은 교화시로 파악, 서러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해야할바, 인간삶의 목적을 공적을 닦음으로 표현→다만 인간 삶에 대한 보편적인 깨달음을 단순 소박한 말과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해 낸 작품의 성격으로부터 노동요로의 전이가 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4)민요, 더불어 노동요의 입장- 양주동, 김동욱ㄱ.개인의 창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른 노래-지헌영,서재극,최철 : 풍요는 특정한 노래명이 아니라 민요를 지칭, 이것을 심화하여 김문태는 풍요가 양지와 관련됐으면서 문제해결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노래라고 주장ㄴ.불사관련 작업 노동요-이용태 : 양지의 행적이 불사에 필요한 기와, 벽동, 불상과 관련되어 있기에 풍요는 민요중에서도 노동요. 민중과 친연한 재능있는 승려가 불사관련 작업을 할 때,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반인이 기존에 있던 방아노래 창곡을 이용하여 가사를 변개해 부른 노래가 풍요라 할 수 있다.)※풍요라고 명명하는 견해는 민요적 성격을 감안해서 이며, 불교의 포교의 교리가 담겨있다. 서정적 향가9.薯童謠薯童薯童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현대역 :김선기쌴콰 콩주님안남 기스기 얼일아 도고쇼똥 빵알밤애 몰 안겨 가다.선화 공주님은남 그스기 얼어두고서동 방으로방에 몰래 안겨간다.※서동요의 주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으며, 다만 설화와의 결합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1)민요로서의 서동요 : 공개적 구애의 노래 (사랑을 얻지 못한 남자가 사랑을 획득한 상태를 기정사실화 하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마음을 두고 있는 여인에게 자기의 마음을 알리는 동시에 여인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알리는 것)(2)향찰 표기와 함께 설화와 상공하지 않을 것을 원망한 노래다.)-이기백 : 에 나타난 제 2단락의 원문 오류를 검토하면서 반왕당파의 힘에 밀려 면직된 신충의 원망이 로 나타났다.)-신재홍 : 오아이 신충을 망각했다는 배경 기사의 기록과 노래가 정확히 일치하며,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신하가 지닌 마음의 응어리가 작품 속에 농축된 것이다.)(2)자신의 처한 세계에 대한 체념적 한탄-황패강 : 신충의 본가는 왕의 처사를 원망하기보다는 ‘누리 모두 잃은’ 소외도니 자신의 곧고과 그럼에도 ‘(임의) 모습을 바라는’ 정을 나타냈다.)-정렬모 : 중장의 밝은 달 밑에 흐르는 맑은 물에 있는 백모래와 같이 겉은 해말쑥해 보이나 세상은 몹시 누추한 곳이라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자연물을 제시해 은유를 이끌면서 효성왕과 관련하여 작자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여 원망스런 현재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극대화 할 뿐이며 왕에 대한 직접적인 원망을 드러내지는 않았고 작자의 처해진 상황에 대한 체념적 한탄이다. 불교의 향가12. 願往生歌廣德月下伊底亦西方念丁去賜里遣無量壽佛前乃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支白遣賜立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慕人有如白遣賜立阿邪 此身遺也置遣四十八大願成遣賜去-현대역 홍기문달아! 이제서쪽을 지나 갈것가?무량수불 아에말씀을 가져다 전해 다오다집이 깊으신 부처님 우러러두 손 모아 꽂으며 사뢰기를원왕생 원왕생념원하는 사람 있다 전해 다오아야이 몸을 끼쳐 두고사십팔 큰 소원 이루실가-정렬모 ; 상대자에게 충고하는 내용이며 종장의 사연으로 보아서는 엄장에 대한 충고 같기도 하다.)-황패강 :미타정토왕생을 원구하며 수행에 전념한 광덕이 종교적 관념을 나타낸 노래다.)-조동일 :미타를 지칭하는 無量壽佛의 존전에 빌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이다.)-신재홍 :현세에서 일념으로 서방정토만을 염원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달이 보았을 터이니, 그저 보고 들은 그대로만 아미타불에게 사뢰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극락왕생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다.13. 禱千手觀音歌 희명膝?古召?二尸掌音手乎支內.)
-유영석의 음악에 대한 평목차Ⅰ. 머릿말Ⅱ. 1. 푸른 하늘을 닮은 음악2. 뮤지컬과 대중음악의 만남3. 뮤지컬에서 재즈로Ⅲ. 맺는말Ⅰ. 머릿말유영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95년이었다. 아마 ‘룰라’의 댄스곡을 듣고 싶어서 길을 지나다가 리어카에서 구입한 신곡 모음 테이프에서였을 것이다. ‘램프의 요정을 따라서 오즈의 성을 찾아나서는’으로 시작되는 가사와 음악적 분위기는 마치 나를 동화 속으로 이끄는 듯한 느낌이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돌려서 또 듣고 또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케이크 포장용 비닐 끈을 들고 나풀거리며 거실을 뛰고 또 뛰었다. ‘날지 못하는 피터팬 앤디 두 팔을 하늘 높이, 마음엔 행복한 순간만이 가득......’ 그가 쓴 노랫말대로 그의 음악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가 쓴 가사를 정확하게 듣고 싶고, 그의 음악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앨범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활동했다고 하는 ‘푸른하늘’의 6장의 앨범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4장의 ‘화이트’ 앨범과 ‘뱅크’의 정시로와 함께 만든 ‘화이트뱅크’, 그리고 그의 best 앨범과 솔로앨범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앨범을 모으면서 ‘WHITE'라는 곡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또 다른 많은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Ⅱ.1. 푸른 하늘을 닮은 음악겨울 바다 위에 탁 트인 푸른 하늘. 상상만 해도 깨끗하고 순수하다. ‘겨울 바다’는 그가 ‘푸른하늘’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처음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곡이다. ‘겨 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쉬는 곳에......’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찾게 만드는 감미로운 선율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푸른 하늘’이라는 그룹을 서서히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2집에서 ‘눈물나는 날에는’, 3집에서 ‘우리 모두 여기에’, ‘이 밤이 지나도록’ 등의 히트곡을 내며 ‘푸른하늘’의 앨범은 점차 스테디셀러 명단에 오르게 된다. 4집에서 ‘꿈에서 본 거리’가 계속 인기를 끌면서 그들은 명실상부한 ‘인기 발라드 그룹’으로 불리게 된다. 즉, ‘푸른하늘’의 음악은 ‘세상과 사람들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을 가사로 하여 감미로운 선율과 목소리가 조화를 이룬 음악’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푸른하늘’의 음악은 5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유영석이라는 사람의 음악을 특징지을 수 있는 ‘뮤지컬 풍’의 음악을 선보인다. ‘자아도취’는 코믹한 내용의 가사에 경쾌한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곡으로 각종 가요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후에 화이트의 노래를 알게 됐을 때 ‘자아도취’를 부른 유영석이 그 멤버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 후 6집에서 ‘오렌지 나라의 앨리스’를 발표한 후 그룹 ‘푸른하늘’은 해체를 맞이한다. ‘푸른하늘’ 당시의 유영석의 음악은 ‘푸른하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맑고 순수함이라는 기본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미니밴드의 장점인 유연성을 바탕으로 해 비교적 실험적이고 다양한 장르를 추구했고 그 결과는 유영석이 뒤에 결성하게 될 ‘화이트’라는 그룹의 음악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푸른하늘’이 방송활동이 아닌 앨범발매와 공연 위주로 활동하는 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특히 유영석의 맑은 음색(유영석의 말에 의하면 변성기를 겪지 않았다고 한다.)과 밝고 아름다운 멜로디, 노랫말에 있었을 것이다.2. 뮤지컬과 대중음악의 만남‘푸른하늘’ 해체 후 특별한 공백기간 없이 1년 정도 지난 후에 그는 ‘화이트’라는 그룹으로 돌아온다. ‘푸른하늘’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나름의 스타일이 생겼고, 그 스타일을 벗어나는 실험적이거나 색다른 음악을 그는 ‘화이트’에서 해 나갔다. 그 역시 ‘푸른하늘’이라는 이름 안에서 실험적 음악을 하기가 힘들었으며, 음악적 스타일을 바꾸기 위한 의도적으로 그룹을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아도취’, ‘오렌지 나라의 엘리스’ 등의 뮤지컬 풍의 음악을 시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이트는 ‘We have an ideal Taste of Enjoyment’의 약자로 ‘이상적인 즐거움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티 없는 WHITE의 백지상태처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와 깨끗한 하얀색 위에서 여러 가지 색을 담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1집 앨범의 표지에 물감이 그려져 있는 것인 지도...... 그룹 ‘화이트’에서 그가 지향하는 음악적 색깔은 스케일이 크고 화려한 뮤지컬 음악이었다. ‘푸른하늘’ 시절에 간간히 흉내 내었던 뮤지컬적인 음악들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조금 더 성숙하고 세련된 소리를 들려주었다. 1집은 분명히 이런 화이트만의 음악적 색깔을 듬뿍 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설레게 한 ‘WHITE’를 비롯해 ‘눈부신 그녀’, ‘신혼일기’, ‘P.M.K.P' 등 실험적이고 뮤지컬 적인 음악들과 ’말할걸 그랬지‘ 같은 기존의 발라드 스타일의 곡들로 완성도 있는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1집이 그의 뮤지컬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다시 2집은 발라드가 주를 이루는 앨범이다 타이틀곡인 ‘그대도 나 같음을’과 히트곡 ‘7년간의 사랑’을 비롯해서 ‘지금은 새벽 3시 반’, ‘비 오는 날 보는 우울한 영화’, ‘그랬나요’,‘사랑 그대로의 사랑’까지 발라드가 앨범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푸른하늘’시절의 음악풍과 비슷하지만 그에 비해 스케일이 커지고, 세련되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가사들이 담고 있는 사실성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뮤지컬 적인 곡은 ‘한다고 했는데’ 정도에 머물고 있어 그러한 실험성은 조금 약화된 반면에 또 다른 음악적 시도들을 하고 있는 앨범이라고 하겠다. 3집은 유영석 스스로도 ‘음악적으로 힘든 시기고 의욕도 많이 떨어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화이트’시절 가장 인기를 끈 ‘네모의 꿈’이 들어 있는 음반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객원보컬을 도입한 앨범이기도 하다. ‘Dreams Come True’나 ‘네모의 꿈’ 등을 비롯한 유영석의 뮤지컬적인 음악은 계속되었고 그 느낌이 재기발랄하고 귀여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초기의 그의 의도했던 색깔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 뒤 1년이 넘어서 발표한 4집 앨범은 ‘기억 속에 사는 나’, ‘느낌’ 등 곡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좋은 편이나 ‘화이트’라는 그룹의 정체성을 잃을 만큼 앨범 전체의 분위기가 모호하고, 그 이미지가 오히려 ‘푸른하늘’과 더 잘 어울릴 정도였다. 한국 대중가요에 있어서 거의 유일하게 뮤지컬적인 음악을 만들고, 대중화시켰던 그이기 때문에 4집 앨범이 안겨준 실망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에 ‘뱅크’의 정시로와 ‘화이트뱅크’라는 프로잭트 앨범을 내놓기도 하고 개인 베스트 앨범을 내면서 ‘화이트’는 조용히 없어지고 만다. ‘화이트’는 유영석의 음악적 행로에서 결국 솔로로 가기 위한 교두보역할을 했던 그룹이다. ‘화이트’ 시절의 유영석의 음악은 ‘푸른하늘’ 시절의 그것에 비해 조금 더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푸른하늘’의 음악이 순수한 사춘기 소년의 이미지였다면, ‘화이트’의 음악은 그 소년이 성장하여 어엿한 청년이 된 후의 이미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에서 그는 ‘푸른하늘’에서 해보지 못했던 뮤지컬음악을 해보았고, 후기에는 그의 음악적 취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화이트의 활동도 흐지부지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후에 재즈에 기반을 둔 솔로 활동을 하게 된다.3. 뮤지컬에서 재즈로그의 음악적 모태는 피아노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 밑에서 어릴 적에는 클래식 뮤직만 듣고 자랐다고 한다.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중, 고등학교 시절은 작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겨울 바다’가 중학교 3년 때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면 그의 음악적 감수성을 알 수 있으리라. 그가 조금은 독특하게 뮤지컬적인 요소와 후에 재즈풍의 음악을 대중음악에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는 ‘화이트’ 이후에 낸 솔로 앨범에서 ‘화이트’ 2집 앨범의 ‘애인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라는 곡을 스윙 재즈)풍으로 바꾸어 부르고, 해릭 코닉 주니어)를 연상시키는 ‘Falling in love'를 만드는 등 자신의 음악적 관심을 재즈로 돌린다. 그로써 ‘뮤지컬음악’에 대한 아쉬움만큼이나 ‘재즈음악’에 대한 기대를 남기고 있다.
1. 서론2. 본론ㄱ. 오페라! 태어나다!ㄴ. 베르디를 딛고 뛰어오르다! (17세기)ㄷ. 정교하게 다져나가기ㄹ. 웅장한 그랜드 오페라ㅁ. 20세기 이후의 오페라3. 결론1. 서‘연극을 음악과 결합시킨다?’는 발상은 연극의 발달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극의 위에 음악을 배경으로 깔거나 간간이 음악과 섞이는, 그 이전에 유럽에 있었던 종교적인 음악극의 차원을 넘어서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와 같이 대사와 완전히 음악이 입혀지는 모습이 나오게 된 배경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opera’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태리어로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페라 초기에 ‘opera per musica’ 즉, ‘음악을 위한 작품’이라고 쓰이던 것이 ‘opera’로 단순화된 명칭이다. 이렇게 볼 때 초기 연극의 발생 이후 발달 과정에서 조금 더 새롭고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 연극에 있어서 음악의 필요성이 생겨났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무대 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기를 하면서 노래를 하고 거대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연주되고 현대에 와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생겨나기까지 오페라가 걸어온 길을 세기별로 나누어 되짚어본다.2.ㄱ. 오페라! 태어나다! (16세기)오페라의 탄생은 바로크 음악(16세기 말 ~ 18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공적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 정확한 기원은 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페라는 16세기 말엽에 플로렌스의 예술가들(Camerata, 그들은 스스로를 카메라타, 즉 "동지들"이라고 불렀다. 활동기간:1580-92)에 의해서 탄생했다. '카메라타(Camerata)'는 피렌체의 음악가, 문필가, 화가들의 그룹으로 구성원은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아버지인 빈센조 갈릴레이, 줄리오 카치니 등의 작곡가들을 비롯한 귀족계급의 인문학자들이었다. 그 이전 시대의 지나친 대위법 음악에 반발했던 그들은 극(가사)에 맞는 음악 즉, 희랍의 음악적이고 연극적인 예술을 부활시키고자했다. 음악은 가사의 힘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여 4개의 악기만으로 이뤄진 새로운 음악극 다. 이것은 독창을 주로 하고 악기 반주가 따르는 단성음악적(單聲音樂的)인 작품이었으나 악보는 남아 있지 않는다. 이러한 단선율의 음악을 ‘모노디’라고 하는데 이것은 통주저음 반주가 붙어 있어서 몇 개의 악기로 선율을 화성적으로 받쳐준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1600년에 앙리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 때 상연된 로서 대체로 앞의 를 만든 사람들(대본 카치너, 작곡 페리, 리누치니)이 제작을 담당하였다. 이 두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비슷한 작품들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예를 들어 자코포 페리 저작인 와 콜로디오 몽테베르디 저작인 등과 같은 작품들은 자신의 부인인 유리디스를 구출하고자 하데스라고 하는 자하 세계로 간 오르페오에 관한 그리스 신화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오페라는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베니스에 수개의 오페라 전용극장들이 건립되는 등 피렌체로부터 이탈리아 전역에 보급되어 오늘날 오페라의 기원이 된 것이다.ㄴ. 베르디를 딛고 뛰어오르다! (17세기)이탈리아에서 창안된 이래로 오페라는 유럽각지로 발전해 나가게 되고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프랑스 사람들은 아탈리아의 오페라를 자신의 기호에 맞게 수정한 프랑스식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프랑스 오페라는 대본의 명료성과 발레를 가미할 것을 강조했다. 프랑스 오페라 최초의 거장은 지휘봉에 발을 찔려 패혈증으로 사망했다는 일화가 있는 이탈리아 태생의 작곡가 장-밥티스트 륄리였다. 거의 모든 17세기 오페라의 주제는 역사나 신화에 기초를 둔 작품들이었다.다음에 오페라는 베네치아에 보급되어 번창하였다. 이 도시에는 1637년에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개관되고 17세기 말에는 그 수가 약 15개소에 달하였다. 또한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치아악파의 작곡가 몬테베르디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와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베르디는 오페라의 극적 성격을 높였다. 그의 특성은 1607년 작 '오르페오(Orfeo)'부터무엇보다도 그의 격앙양식(Stile concitato)은 오페라의 극적 성격을 고조시키기에 적합하다.이 시대의 악보는 지금과는 달리 생략된 방식으로, 화성만을 베이스음의 위 또는 아래에 써넣고 상세하게 다듬는 일은 연주자에게 맡겨졌다. 이러한 속기법은 인쇄술이 복잡하고 값비싼 당시의 상황에선 특히 큰 혜택이었고, 한 사람의 작곡가가 수백 곡의 칸타타와 오페라를 써낼 수 있었던 여건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관습은 오늘날의 재즈 음악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카스트라토'라 불린 인공적 남성 소프라노 또는 알토이다. 이들은 소년기 때 이들의 음성을 평생토록 보존하기 위해 거세를 했고, 그 결과 오랜 훈련을 통해 남성의 힘과 화려한 음역을 겸해 가지게 되었다. 계몽사상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여자 목소리로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알렉산더, 시저를 가졌다"고 이탈리아인들을 놀려댔지만 카스트라토들은 온 유럽에 이름을 날렸다. 이 풍습은 프랑스혁명 시대에 이르러 쇠퇴해졌고 점차 폐지되었다. 바로크 오페라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중창과 합창 등 음악분야의 위대한 형식들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제후들의 궁정을 위한 오페라였고 봉건 계급의 사회관을 구현한 사람들의 오락이었다. 사랑과 명예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품위 있는 음악에 맞춰 낭독하는 동안 시간은 고대나 중세기 상상의 영역에 멈춰 서 있었다.ㄷ. 정교하게 다져나가기 (18세기)오페라는 17세기 후기부터 유럽 각국으로 옮겨가 프랑스에서는 륄리, 라모 등이 오페라의 프랑스양식을 확립하였다. 영국에서는 퍼셀이 오페라를 작곡하고, 독일에서는 슈츠가 작곡을 시도했으나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배를 받았다. 18세기 들어서 오페라는 나폴리에서 성행했으며 스카를라티나 페르골레시 같은 뛰어난 작곡가가 나타났다. 벨칸토 창법이 발달하여 그 후 점차 명가수의 기교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가던 오페라 음악을 18세기 후반에 성악 위주가 아닌, 극 중심의 것으로 시도한 사람은 글루크(C.W.Gluck세기 말에 오페라의 꽃을 피운 사람은 오페라의 거장 중 하나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1791)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태생이지만 그의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살았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징슈필에서도 모차르트는 , 등으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이탈리아오페라의 테두리 안에서 독일음악의 특색이 풍부한 명작 , , 등을 작곡했다.18세기 오페라는 나폴리 악파에 의해 주도된다. 이태리의 성악예술은 이 악파와 함께 황금기를 맞게 된다. )벨칸토(Belcanto)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도, 프리마 돈나(Prima donna),프리모 우오모(Primo uomo) 등의 말들이 나온 시기도 이 때였다.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오페라 부파(Opera buffa)와 같은 오페라 종류의 구분도 나폴리 악파와 관계가 있다. 나폴리 악파를 작품적으로 보면 질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해 보이지만, 대중적인 면에서는 어떤 악파도 따를 수 없다. 수많은 오페라들이 다량으로 작곡되었는데, 이는 ‘번호 오페라’라는 번호가 붙은 곡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는 빨리 작사. 작곡될 수 있도록 유형화 되었다. 거의 모든 아리아는 다 카포(Da capo) 양식으로 씌어졌다. 서곡은 ‘빠르고-느리고-빠르게’로 이어지는 도식성을 가졌는데, 이것이 나중에 심포니로 발전한다. 나폴리 오페라는 헨델, 모차르트 등 많은 작곡가들이 학습해야했던 당시에는 매우 일반적인 음악이었다.18세기 유럽에서 오페라는 보편적인 현상이 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이태리 오페라단을 초청하여 공연하거나, 이태리식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코미디 발레와 같은 독자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나, 이태리의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에 흡사한 '서정 비극'과 '오페라 코미크'의 분류가 나타난다. 오페라 코미크는 나폴리 작곡가 페르골레시의 이 1752년 파리에서 공연되면서 일어났던 부퐁논쟁의 여파로 발생한랜드 오페라 (19세기)19세기는 힘에 넘치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의 아리아와 정규 합창단 및 대형 오케스트라 등을 고루 갖춘 그랜드 오페라의 시대였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구노와 토마가 우아한 오페라를 남겼으며 비제는 청신한 극적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랜드 오페라 양식이 성하여 마이어베어가 활약하였으며 오페라 코미크도 출현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에도 뛰어난 오페라가 나타났는데 글린카, 차이코프스키, 무소르크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이 유명하다. 또 19세기 말의 이탈리아에는 베리스모(현실파)의 경향이 나타나서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푸치니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의 3대 거성이 현대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을 완성하였다. 독일에서는 R.슈트라우스가 바그너의 이상을 추구하였다.19세기 베버의 (1821)에 의하여 독일 낭만파의 오페라가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가 낭만주의 오페라를 계승했다. 그는 , , , , 등을 작곡하여 )라이트모티브 기법으로 모티브와 일정한 생각을 연결시킨다. 그는 종전의 ‘번호 오페라’에서 벗어나 오페라를 음악극(Musikdrama)으로 발전시켜, 오케스트라의 "무한선율"이 계속적으로 흐르게 하고, 모든 예술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종합예술작품의 의도를 드러낸다. 한편 북 이탈리아(Giuseppe Verdi, 1813~1901)의 베르디는 이태리의 성악적 전통의 오페라를 발전, 계승시킨다. 그에게서 오케스트라는 바그너에게서 보다 더 주변적인 역할을 하지만, 뛰어난 아리아의 도움으로 대중적일 수 있고, 성격이 강한 레치타티보를 통해 극을 생생하게 꾸민다. 대표작으로는 , , , 등이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은 푸치니에게서 그 적절한 계승자를 만난다. 19세기 말의 이탈리아에는 베리스모(현실파)의 경향이 나타나서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푸치니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독일에서는 R.슈트라우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