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권과 한반도들어가면서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혈맹인가, 아니면 민족의 분단을 획책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유발시킨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단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은 일본의 패망과 아시아권에 대한 해방과 함께 한국에게도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한민족과는 상관없이 외세에 의한 남-북간의 분단을 초래하였다. 당시의 조선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도 아니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숭고한 독립투쟁과 민족적 봉기를 내세워 일제에 항거한 민족이건만 우리의 뜻과는 상반된 열강의 이익에 상충된 결과로 인한 분단의 양상은 민족의 자결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분단의 아픔까지 겪어야 하는 한민족에게 또 다른 민족의 상잔 6.25는 이념적 갈등과 내분을 증폭시키면서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는 물론 국제적 이념과 냉전으로 패권국가의 팽팽한 세력 간 대립의 장이 되었다.한반도를 둘러싼 이른 바 4강 세력,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 남한의 일본과 미국, 각기 다른 혈맹을 강조 강조하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동맹을 형성하면서 한반도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왔다. 미-소의 탈냉전은 경제적 실익과 국제적 환경에 의한 새로운 국제 질서로 자리매김 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감은 감소되었지만 미국에 의한 남한 내의 상황은 여전히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배적인 설정으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감과 동북아의 평화체제가 위협 받고 있다.미국이 남한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결코 한국 사회에 발전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소위 혈맹관계로 불리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이해와는 거리가 먼 미제국주의와 한국의 독재정권사이의 유착관계일 뿐이다.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직접적인 지배를 포기했지만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직-간접적인 정치적 개입을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개입의 방식이 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졌을 뿐이다.지자 조선은 미국이 나서서 이러한 문제를 중재하거나 조선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했다. 조선이 다른 열강과 체결한 조약과 달리 조미통상조약 제1조는 만약 조약 체결국 중 한나라가 제3의 국가로부터 공정치 못한 대우나 모욕당하는 일이 있게 되면 상대국에 알려 반드시 도와서 선처함으로써 상호우의관계를 나타낸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은 이러한 조약의 내용에 근거하여 미국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은 이러한 조선의 기대를 저버리고 청일전쟁 당시부터 조선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고 중립내지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미국의 이러한 중립적인 태도에서 조선의 정치적 혼란은 일본의 의해서만 수습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는 것이 미국에게도 유리하게 판단하여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조선의 기대를 저버리는 미국의 정책은 태프트-카스라 밀약(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전쟁성 장관 태프트, 일본외상 카스라 회담))에서 절정에 달했다. 여기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는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비밀협약을 맺었다.일본은 조선에서 걸릴 것이 없었다. 1905년 일본은 조선과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관은 11월 폐쇄되었고 이틀 뒤엔 미국에 있던 조선의 공사관도 폐쇄되었다. 이로써 1882년 시작된 조선과 미국의 공식적 외교관계는 23년 만에 끝내고 말았다.한일합방으로 인하여 단절된 한미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과정에서 일본제국의 해체문제가 제기됨으로써 되살아나게 된다.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은 한국인에게 해방을 안겨 주었으나 외세의 의한 해방은, 해방과 더불어 들이닥친 국토분단과 외군진주 하에 한국인은 주어진 해방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간의 이념적 갈등과 내부 분열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 남북으로 각기 다른 외세의 점령은 동족상잔의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한국은 고 있는 현실이다. 중남미가 이 경우에 해당하며, 정부 조직이 친미적 성향을 띠지 않을 경우, 세계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반군에 대한 군사적 원조로 쿠데타를 부추기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미주 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주둔시켜놓은 군대를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과, 반미세력 발생에 대한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더욱 견고히 하는 초석이 되고 있다.미국의 패권주의는 국제법을 무시하고, UN의 결의 등을 무시한 채 세계에서 독보적의 위상을 갖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주둔군들은 그 위상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어느 나라든지 미국과 1:1로 싸워서 승산이 있는 나라가 없다. 그 정도로 미국은 군사적으로 강성해졌다. 또한 세계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 또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교육 및 전파라는 미명하에 많은 약소국들을 자신들의 수족인 것처럼 부리고 있다.이런 패권주의에 반발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자국 정부와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난 자신들의 정부를 갖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용인 할 수 없는 미국은 이들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이 당한 테러에 대해서만 부각을 시키면서,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들을 진압하며, 이들의 모국마저도 무참히 짓밟고 있다.미국 패권 시대의 단면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적 사례로 미국이 군사적 패권을 확립하면서 미국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행태가 나타나면서 국제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반미 성향이 고조되고 있다, 일방주의적 외교란 국제협약을 중시하는 다자주의적 외교와는 달리 미국이 일방적으로 의제을 설정하고 국제사회와의 조율 없이 독단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외교행태이다. 이러한 일반적 외교는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가져야 하는 도덕적 리더쉽을 포기한 채 미국의 단기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자국 이기주의의 성격괄적핵실험금지조약을 거부한 것은 자국의 핵우위가 다른 나라의 국제협약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미국의 비준 거부로 인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은 사문화되었다.3.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반대;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쟁법 및 인도주의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소로서, 재판소 설치를 위한 로마규정에 의해 2002년 76개국이 비준해 7월1일부터 발효되었다(60개국 비준시 발효). 미국은 해외파병 미군이 정치적인 동기나 제소에 근거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기소되거나 재판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국제형사재판소설립에 반대해 왔다.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되자 미국인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된 경우 미국 대통령에게 자국민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군사적 조치를 포함)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또 로마규정을 비준한 국가들에게 미국인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불처벌협정의 체결을 강요하고 있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군사적 지원을 철회하겠다는 협박을 가하고 있다.4. 일방적인 이라크 공격 결정; 미국은 이라크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하며 이라크가 무장해제를 거부할 경우 군사적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유엔의 동의를 거쳐 군사적 공격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유엔의 동의가 없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 불참;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2001년 더반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에 미국은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회의에서 나오는 시오니즘(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노예무역에 대한 배상 문제가 의제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문제는 모두 미국에게는 껄끄러운 문제이다. 미국은 외교무대에서 인권을 명분으로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면서도 자국의 이익과 결부되면 입장을 바꾸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이 밖에도 소형무기 규제를 53)이란의모사디그 정권전복(1953)과테말라 군사개입(1954)중동 위기 선동(1958)케모이 섬, 마쓰 섬 주변에서 무력 시위(1958)U-2 첩보기 소련 영공 정찰(1960)콩고에서 유엔 군사작전 선동(1960)피그 만 침공(1961)베를린 위기 선동(1961)통킹만 무력도발(1964)베트남 전쟁(1964~1972)도미니카 공화국 내정개입(1965)엔크루마 정권 전복(1966)라오스 캄보니아 무력 개입(1970)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포르투칼에서 파괴 활동(1974~1975)케냐 무왕기 카리우기 암살(1975)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권 전복(1975)콩고인민공화국 정권 전복(1977)이란에 대한 군사행동(1979~1981)카스트로 암살 기도(1960~1981)카다피 암살 계획(1981)파나마의 토리호스 암살(1981)인디라 간디에 대한 음모(1981)잠비아 대통령 암살 계획(1981)폴란드 내정 간섭(1980~1984)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1980~1984)엘살바도로 내전 군사 개입(1981~1983)니카라과에서 군사 도발(1981~1983)시드라만에서 리비아에 대한 군사 도발(1982)그레네이더 침공(1983)페르시아만 전쟁(1990~1991)소말리아 무력 개입(1992~1995)수단-아프카니스탄 미사일 공격. 이라크 공격(1998)유고연방 침공(1999)아프가니스탄 침공 탈레반 정권 붕괴(2001))미국의 대한 시각미국을 보는 시각은 크게 기득권 세력 또는 분단고착세력과 소외세력 또는 분단극복세력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 한편으로 미국을 우방으로 보는 인식과 다른 한편의 제국주의 침략적 차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난 역사적 의미로 미국을 혈맹 관계로 인식하여 여전히 대미인식은 우리가 어려울 때 물질적 군사적으로 도와주는 우방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가지는 이해관계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이익의 확보이지만 시기에 따라 핵심적 이익의 내용이 서로 중층적으로 연결되면서 변화하였다. 전후부터 1990년대 초기까지
오바마와 한국사회들어가면서흑인으로서 대통령의 당선, 그것도 세계의 지붕이라는 미국에서의 대통령 당선은 인종 차별과 흑-백 갈등을 넘어 세계사의 일대 전환점을 도래했다고 볼 것이다. 이념이나 사상을 넘어 실용의적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만들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미국사회,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한 국가에서 소외되고 차별되었던 흑인이 백인을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된 것은 그들이 선택한 노선의 이념이 무었을 보여주는 것인가, 그들이 선택한 이념은 갈등을 넘어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새로운 가치의 민주의식이었다.버럭 오바마 그는 누구인가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양부의 대한 이질감 등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청년기엔 마약에 손을 대는 등 정체성 고민으로 방황한 오바마, 백인 어머니와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인종적 정체성과 백인의 인종적 멸시와 흑인 학생이 같은 흑인으로 대접해주지 않는 현실사이에 깊은 상처는 새로운 인생의 도전의식을 고취시켰다. LA 소재 옥시덴탈대학 입학하여인종차별 등의 사회부조리 개선을 위해 본격적인 사회참여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를 뉴욕 콜롬비아 대학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정치학을 공부하며 인권운동과 뿔뿌리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서 교회 중심의 지역사회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슬럼가 환경 개선, 마약과 범죄퇴치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시카고에서 사회활동이 지역 수준에서의 변화 선도에 한계를 느낀 그는 전국 무대에서의 활동을 계획,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면서 미국사회의 변화를 위한 정치적인 꿈을 구체화 시키면서 1992대선에선 오바마가 흑인 투표 참여의 새바람을 일으키며 빌 클리턴 후보가 당선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96년 주 의회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시카고 남부 13구역에서 당선됨으로써 공식적인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오바마의 주 활동분야는 공공보건복지위원회와 사법위원회로 공공주택 보급 등 복지향상과 정치개혁에 집중, 2004년에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이라크 반대, 미국 정치의 변화를 주장하는 참신한 활동으로 대중에게 파고들면서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에 이어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오바마와 한국사회버럭 오바마의 당선은 한국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이 발휘될 것이다. 그는 변화와 개혁 그리고 화합을 내세워 당선됐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의 경제위기와 오바마의 정책 노선과 기존 질서를 타파하고자 하는 미 국민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세계적 금융위기가 오바마에게 최우선 과제로 경제 살리기에서 성과를 보여야 하는 오마바는 변화와 개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길 것이다. 미국의 경제위기와 오바마의 당선과 그에 정책이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한미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FTA 등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한 통상정책 등은 미국민 보호 차원에서 일단은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할 것이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실용주의는 새로운 다자주의적 리더쉽을 통한 미국의 세계 주도권을 유지할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전 세계적인 협력을 강조한다. 한국과 관련해서 북한 문제와 FTA 등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한미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일변도의 국제 외교와 경제적-정치적 의존에서 한미관계를 발전시켜 더 이상 종속된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한국 경제의 취약성은 대외의존도가 높다는 현실이다. 이는 과거의 독재체재가 경제적 논리로 정치적 위기감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불합리적인 경제체재를 만들면서 일부 재벌에 대한 특혜와 정치적 암묵은 중소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면서 경제의 취약 구조와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왔다.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세계질서가 재편성되고 각국의 변화는 실용적이고 전방위적으로 밀려올 것이다. 세계적 변화의 흐름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불평등으로부터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세계적 흐름의 변화에서 한국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한국사회의 갈등 요소지난 세기동안 한국 사회에는 갈등이 개발주도형 국가체제 아래에서 억압 및 잠재된 유형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유신 체제 아래서는 인권의 존중과 자유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억압당해 왔으며, 또 사회적 평등에 대한 기대도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국가의 강제력에 의한 억압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의 좌절감으로 연결, 축적되어 왔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적 문화 아래에서 한국 사회 안의 갈등은 내재화되어 표출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1987년 소위 6.29 선언에 의해 억압 구조의 분출구가 형성되고 갈등의 양상은 사회구성원의 전체적인 운동의 차원으로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후 1980년 후반부터 형식적 민주화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구성원의 사회적 요구는 봇물처럼 터지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문민정부와 국민정부에 이르러 실질적인 민주화과정에 대한 기대로 인해 사회 각 층에서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갈등의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지역갈등 또한 적대감으로서의 지역감정과 신념체계로서의 지역주의가 결합하여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역연고주의에 근거한 지역대결주의로 표출되어 왔다. 특히 지역갈등의 작동 축으로서의 지역주의는 한국사회의 실제 운영 양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으나,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생산적 정치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기능 때문에 해소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한국사회의 갈등과정은 압축적 성장, 문화지체, 관행성 부패구조에서 연유하며, 과정보다 목표가 우선되는 결과주의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화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갈등의 잠재화에서 현재화로 전환하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비리영역의 상존과 확장이 전개되고, 갈등의 이행기로 인해 누적된 갈등요소가 폭발하는 불투명한 장래가 전망된다. 이러한 발전의 전환기에서는 갈등의 억압 및 표출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성원간의 의사소통에 기초한 갈등의 관리 및 조정이 보다 중요한 차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