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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학과] 낙안 읍성
    Ⅰ. 낙안읍성 소개.{1. 현황사적 제302호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일원의 마을과 이를 둘러 싼 성곽을 말하며, 보호구역의 총면적은 성내 41,018평과 성밖 50m까지의 26,472평을 포함하여 67,490평에 달한다.1983년 6월 14일 사적지로 지정된 이후 1984년∼2001년까지 성곽 보수(補修) 1410m, 문루(門樓-동문(樂豊樓), 서문(樂秋門), 남문(雙淸樓) 복원(復元) 3동(棟), 동헌(東軒) 내아(內衙) 복원 5동, 평석교 석구(平石橋 石拘) 복원 1개소, 객사(客舍) 복원 1동, 해자(垓子) 복원 1식(式), 장터 난전(亂廛) 조성 8동, 공개전시가실(公開展示家室) 3호(戶), 민가 보수 94호, 민가철거보상 98호, 임경업 군수 비각(林慶業 郡守 碑閣) 보수 1동. 향토미술관 설치 1식, 전통민가 신축 4동, 전통음식 판매점 2동 등 보수 복원사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이로써 객사(客舍), 동헌(東軒), 내아(內衙)등 관아(官衙) 6동과 낙민루(樂民樓), 낙풍루(樂豊樓), 쌍청루(雙淸樓), 임경업 군수 비각(林慶業 郡守 碑閣)등 누각(樓閣) 4동, 초가(草家) 192호, 와가(瓦家) 3호, 스레트 31호, 함석 5호등 민가(民家) 231동의 규모이고 관리사무소, 미술관, 자료관, 민속실이 각 1동씩 있으며, 난전 및 음식점, 기념품점, 토산품점등 10개동, 기타 매표소, 공중화장실, 전시가실등 23동의 건물이 있다.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 지정가옥으로는 동내리의 박의준가옥(지정번호제92호), 최창우가옥(97호), 최선준가옥(98호), 서내리의 김대자가옥(95호), 주두열가옥(96호), 김소아가옥(99호), 남내리의 양규철가옥(93호), 이한호가옥(94호), 곽형두가옥(100호)등 9가옥이 있으며, 객사 낙안지관(客舍 樂安之館)은 전라남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임경업 군수 비각(林慶業 郡守 碑閣)은 문화재 자료(文化財 資料)로 관리되고 있다.2001악(陽岳), 낙안(樂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뒤 고려 헌종 9년(1018년)에는 나주부(羅州府)에 소속되었고, 고려 명종 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지군(知郡)으로 승격되었다.조선시대에는 세조 12년(1466년) 지군(知郡)에서 군수(郡守)로 고쳤으며 중종 10년(1515년) 군내에서 불미한 사건이 발생하여 현령(縣令)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 8년(1575년)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세기말까지 낙안 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순종 1년 (융희 2년) 1908년 10월 15일 칙령 제72호로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 낙안면이 되었고,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승주군 낙안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됨으로써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이 되었다.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써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돌담이 쓰이고 정면의 나머지 부분은 블록이나 벽돌로 개축된 것으로 보이며 마당에서 우측으로 성벽 아래로는 화단을 두었다.이 집의 건축연대는 19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며 구들로만 이루어진 한 일자 4칸 전후좌우 툇집이다. 앞퇴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뒤퇴는 큰방 뒤에만 한쪽으로 들마루를 놓은 것이 특이하다. 아래퇴는 툇보 없이 처마 밑을 이용하여 살강을 내 붙였으며 머리퇴는 토담을 둘러서 헛청간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약간의 개,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구조는 2고주 5량이며 향은 남서향을 취하고 있다. 실 배치는 좌측에서부터 부엌, 방(안방),방, 방과 연이어 퇴칸으로, 방과 전면으로 세면장이 있다. 툇마루를 제외한 나머지 부재는 새것으로 바꾸었다. 우측 1퇴는 예전 담을 둘러 헛간으로 썼던 것을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앞퇴는 널마루를 깔았으며 부엌전면은 널판문과 널판을 대었다. 배면은 안방뒤로 퇴칸에 툇마루를 두었고 중간에 굴뚝이 서 있다. 대문 앞으로 담을 두르고 안쪽으로 장독대를 두었겠으나 뒤로 옮기고 지금은 수돗가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로 쌓았으며 초석으로는 막돌초석이 사용되었고, 기둥은 방주이며 납도리를 썼다. 부엌은 앞 뒤 퇴칸을 모두 틔어서 크게 쓰며 배면으로 나오는 출입구가 있다. 좌 2칸 방을 제외하고 두방은 배면으로 높게 띠살창을 두었다. 방 3개는 두짝 여닫이 띠살문이다. 처마는 짧고 부연은 대나무를 사용하였고 천장은 합판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지붕은 초가를 올렸다. 널마루 건너편으로 장독대가 있으며 뒤로는 단을 높여 닭을 키우는 곳을 두었으며 그곳 좌측으로는 뒷대문이 있다.{(2)도지정 문화제1임경업 군수 비각{조선조 인조6년(1628) 4월 1일 세운 비각으로 군수 임경업 선정비(郡守林慶業善政碑)라고 새겨 있다.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1626∼1628) 봉직하면서 군민을 위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이 세운 비각으로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모든 군민이 제향을 모셔 왔고 몇 년 전까지 동 1990년 복원이 되었다.{2내아지방 관아의 안채로서 내(內)동헌이라고도 하며 지방 수령이 기거하던 곳으로 정면은 가 자형으로 7간, 측면 2간, 54.69평 팔작 지붕과 안쪽에 고방이 있으며 부엌과 창고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단, 아래 마당이 있고 맞배형 대문에 동쪽에방이 하나 서쪽에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1990년 동헌과 함께 옛 자리에 복원되었다.{3낙민루낙안 낙민루는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閔重憲 1845∼1846)이 중건하였으며 (또는 조용현(趙溶鉉)이 중수하였다고 함)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1924년 일부분을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낙안 군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눈 루각 이었으나 여순 병란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어 낙민루 에서 임시 경찰 업무를 수행하던 중 6. 25가 나자 공산군들이 낙민루를 불태우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낙안의 보물 하나를 잃어 버렸으나 1986년 낙안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존 초석 위에 3간, 측면 2간, 17평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의 누각형으로 내부 본부에는 모로 단청하였고 현판은 전(前) 승주군수 남송(南松) 신계우(申李雨)씨가 썼으며 옛 자리에 다시 복원하였으나 옛 것만 같지 못하다고 그때를 아는 분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낙민루 앞뜰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을 사람들이 구정(九停)뜰 이라고 한다. 조선조 때 낙안이 나주부에 속한 군으로서 나주 부사가 각 군을 순회하시는데 아홉 번째 들려 쉬며 머물렀다 하여 구정(九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4낙풍루성곽 동쪽에 위치한 문루로서 낙풍루(樂豊樓)라 부른다. 1834년(순조4) 성균관 진사 김호언이 사비 1,400량을 들여 중건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 식민 통치하에 관리 소홀하여 퇴락하여 없어졌으며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1987년에 복원하였다.낙안은 농사 고장으로서 문루마다 일년의 사계절과 농사와 관8) 2002년 12월 복원하였으며 옥사 주변의 담장은 여느 담장보다 높게(2.5m) 쌓여 있으며 대개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흉악범이 없지 않았나 여겨지며 객사의 축과 거의 일치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지사(地師)가 이와 일치되도록 터를 잡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옥사 주변에 연지(늪)를 둠으로 하여 죄수들의 탈주를 막아 주는 장애적인 효과를 이용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밖에 내운 마을에도 옥터가 있었다고 전한다.8사창지성내 남내리 90-2번지 일대라고 전한다. 관에서 양곡을 보관해 두었던 곳으로 흉년이 들면 백성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또한 현, 벌교 선수에서 배에 실어 여도(呂島), 칠산(七山), 군산(群山), 안흥(安興), 강화(江華)를 거쳐 한양 광흥창(廣興倉)에 조세로 보내었다 한다.9향사당향사당은 동헌 동편에 위치하였다고 하며 지방 수령과 고을 선비(지방 좌수, 진사, 기타 유지)들이 함께 군(郡),정사(政事)를 나누고 활쏘기를 하며 지내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속전에 의하면 낙안 동쪽의 백호(白虎)가 너무 강하고 오공치(蜈蚣峙) 지네가 빈계제(贇鷄峙) 즉, 닭을 해치려 하므로 오공치의 허리를 끊고(길을 내고) 객사 뒤에 사정(射亭)을 지어 오공치를 향해 활을 쏘았다고 전한다.⑩빙허루1468년(세조14) 객사 동편에 4칸으로 지어졌으며 조선 후기에 퇴락 하였다고 한다. 문헌에 보면 규모라든가 건축미가 상당히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4. 축제 및 행사{(1)정월대보름 민속한마당 큰잔치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 및 세시풍속을 발굴, 재현놀이를 통한 지역주민의 축제적 기능과 협동단결을 목표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임경업 군수 추모제와 이 고장 전래의 각종 민속놀이 경연대회가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열린다. 대표적인 놀이로 낙안읍성 동편과 서편이 편을 나누어 농악놀이와 함께 대동놀이로 줄을 당기었는데, 이긴 쪽은 마을의 안녕은 물론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에 있음
    사회과학| 2003.07.22| 14페이지| 1,000원| 조회(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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