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노벨상 수상 작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Etranger)"의 무대로 잘 알려진 알제리는 소설에 나오는 대로 1년 내내 눈부신 햇살 아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풍광과 사하라 사막의 광대함이 공존하는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2번째로 큰 국가이다.면적은 238만㎢, 인구는 3082만 1000명(2001), 인구밀도는 12.9명/㎢(2001)이다. 알제리의 정식명칭은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Democratic and Popular Republic of Algeria)이고 아랍어로는 알자자이르(Al Jumhuryah al Jazairiyah ad Dimugratiyah ash shabiyah)라고 한다. 수도는 알제이고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동쪽은 튀니지와 리비아, 남쪽은 니제르?말리?모리타니, 서쪽은 모로코와 각각 국경을 접하고 북쪽은 지중해에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에 위치하고있어 아프리카 국가로 분류되면서도 유럽 대륙으로부터 비행 거리 약 1시간 남짓한 지중해 연안국이며 또한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아랍리그 회원국으로 3개의 문화권이 교차하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할 수있다. 알제리에서 아랍,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유럽) 문화권의 독특한 특징과 생활방식이 혼재 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들 문화권과의 오랜 교류 역사에서 연유한 특징일 것이다.2. 알제리의 자연환경알제리는 이른바 마그레브(튀니지?알제리?모로코의 총칭)의 일부로, 모로코?튀니지와 공통되는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안선과 나란히 뻗어 있는 아틀라스산맥의 북사면(北斜面)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이루기 때문에 강수량이 많고 농경에 적합한 토지를 이룬 곳이 많다. 그리하여 인구의 90% 이상이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아틀라스산맥의 남쪽은 사막을 이루며, 오아시스와 유전지역 이외는 약간의 유목민이 있을 뿐이다.3. 알제리 주민의 구성알제리 주민의 90% 남짓은 이슬람교도이며 그 밖에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가 있다. 한때 100만을 넘었던 유럽인은 오늘날 10만 이하로 제리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2년 독립하였다. 1963년 아흐메드 벤벨라(Ahmed Ben Bella)가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3년간 대통령을 지냈으며 알제리를 정상으로 되돌리는데 첫 걸음을 내딛었다. 1963년 승인된 최초의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를 도입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견제는 국회의 2/3가 찬성을 필요로 하는 탄핵이었다. 이런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한 벤벨라는 개인적인 권력과 위엄에만 탐닉했으며, 국제적인 지도력에 전념했고 국내에서는 독재적이었다. 1965년 6원 19일 당시 국방장관인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은 쿠테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시키고 그를 체포했으며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간부를 중심으로 '혁명평의회'를 설치, 그 의장이라는 형식으로 1967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6년 국가헌장과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채택되었으며, FLN을 유일한 정당으로 지명했다.부메디엔 정권하에서 알제리는 드디어 많은 부존자원을 잘 이용하기 시작했다. 부메디인은 최고 권력기관으로 26인의 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파벌주의자와 개인통치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부메디엔은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나 동등한 리더쉽 원칙을 유지시켰다. 그의 정권은 사회주의적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아랍연맹과 아프리카 통일기구 안에서도 혁신파?과격파로 평가되어 왔다.급속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부메디엔은 실현성 있는 정치제도를 도입했다. 1976년 채택된 헌법은 알제리를 FLN하의 사회주의국가로 정의했다. 부메디엔은 법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78년 사망했을때 샤들리 벤제디드(Chadli Benjedid)가 그를 승계했다.부메디엔 체제는 중앙집권적인데다 대통령 개인의 권력이 강력하였으나, 샤들리는 집단지도체제에 의한 정책결정을 기본방침으로 하였으며, 외교노선도 유연성 있게 취하였다. 1974년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구소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197 12월 3번째 5년 임기에 당선된 그는 1989년 2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1990년 거행된 시,도선거에서 회교원리주의자들과 지금은 금지된 회교 구국전선이 FLN을 큰 차로 패배시켰다. 1992년 1월 첫번째 선거후에 알제리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회교 원리주의자들이 의회를 통제할 것 같아 벤제디드 대통령은 사직했다. 1994년 1월 국방장관인 리아민 제루알(Liamine Zeroual)이 3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1992년 1월 선거가 취소된 후 알제리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왔다. 정부를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회교 강경파들은 군인과 공무원들, 비회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 즉 언론인, 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을 공격했다. 외국인들도 테러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리아민은 독립이후 첫 여러 정당이 참가한 대통령선거에서 1995년 11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살해될 것이라는 불법 회교 구국전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약 75%가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8년 9월 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1999년 4월 아브델 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 Aziz Bouteflika)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996년 개정된 헌법에 의하면 정부형태는 매 5년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는 헌법과 더불어 의회 민주주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대통령은 정당들이 임명하는 내각의 수반이고, 입법의 대권을 행사하는 의회는 행정부의 조치를 검열할 권리를 가진다. 의회는 양원제이며, 상원은 144석(임기 6년), 하원은 380석(임기 5년)으로 이루어진다. 군사력은 12만 1700명으로 육군 10만 5000명, 공군 1만 명, 해군 7000명이다. 외교적으로는 반식민?반제국?비동맹 3대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5. 알제리의 유물?유적? 지에밀라 고고유적 ( Djemila : 문화, 1982 )ㅇ 지에밀라는 해발 900m의 도시로 포럼, 사원, 바실리카(로마시대의 법정, 교회 등으로 사용된 장방형의 회당), 개선문등의 로마시대 기념물이 umanus에 기초를 둔 사각형과 직각의 도시형태.ㅇ 도시를 관통하는 2개의 수직루트 등은 고대 로마제국 도시계획의 훌륭한 전범임.? 베니 하마드 요새 (Al Qal'a of Beni Hammad : 문화, 1980)ㅇ 하마디드 토후국의 초기 수도로서 1007년 건설되었다가 1152년에 파괴됨.ㅇ 오늘날 모슬렘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를 제공함.ㅇ 기도실이 딸린 모스크는 알제리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임.? 티파사 고고유적 ( Tipasa : 문화, 1982 )티파사 유적은 야생의 올리브에 싸여있으며 그리스도 교도의 묘 이외에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의 성당터가 있는데 지금도 성지로 받들어지고 있다. 로마 황제인 카리규라는 이 나라의 부를 시기하여 왕을 암살했고 그것으로 인해 로마와 베르베르인의 전쟁이 시작하게 되었다. 로마의 승리로 인해 로마가 지배하게 되었고 이때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 이후 5세기에 반달족의 침입으로 그리스도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티파사로 들어온 반달족은 그리스도교를 학대 하여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신도의 오른 손과 혀를 잘랐다고 전해 진다.ㅇ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카르타고 무역의 중심지로서 로마의 정복이후 모리타니아 왕국 정복을 위한 군사적 전략기지로 변모.ㅇ 모리타니아 왕릉을 비롯해 토착민 기념물과 비잔틴, 초기 그리스도교, 로마, 페니키아인들의 유적이 복합적으로 산재해 있음.? 므자브 계곡 ( M'azb Valley : 문화, 1982 )ㅇ 10세기경 만들어진 요새도시.ㅇ 간결, 기능성을 환경에 적용한 므자브의 건축은 공동체 생활과 가족구조 존중에 중점을 둔 것으로 오늘날 도시설계가들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사례.? 알제의 카스바 ( Kasbah of Algiers : 문화,1992 )ㅇ 지중해 지방의 가장 훌륭한 연안유적중 하나로서 B.C 4세기경 건설된 카르타고 무역항이 있는 섬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메디나 형태의 독특한 이슬람도시를 형성하고 있음.ㅇ 이곳에는 깊게 뿌리박힌 공동체의식말이다. 타실리 지역에는 비바람에 침식된 깊은 골짜기가 있고 수많은 동굴들이 있다. 여기에 그려진 동굴 벽화들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사냥과 관련된 그림이 많았고(수렵 시대), 이후에는 농사와 목축 그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1500년 이후부터 등장한 그림에는 말과 낙타가 많이 등장하고 야생 동물은 거의 없다.이곳의 벽화가 발견된 것은 1933년이지만 1956년부터 제대로 된 조사가 실시되어 코끼리, 코뿔소, 기린 등의 동물화가 계속 발견되어 이후부터는 그 일대가 랜드 크루저에 의한 관광사업으로써 발전하게 되었으나 이일로 인해 벽화에 흠이나 상처가 생겨 나게 되었다.- 타드라트 아카쿠스의 암각예술 유적( Rock-art Sites of Tadrart Acacus : 문화, 1985 )ㅇ알제리의 타실리 나제르 유적 경계지역에 위치한 세계유산으로 이곳의 암석 단층지괴에는 수천종의 다양한 동굴벽화가 있는데 대체로 B.C12,000-A.D100년에 걸쳐 그려진 것들임.ㅇ이들 벽화들은 동식물상의 변화와 다양한 인간생활 방식 등을 보여줌.- 타실리 나제르 ( Tassili N'Ajjer : 복합, 1982 )ㅇ 선사시대 동굴예술의 중요한 사례로서 15,000여개의 그림, 조각 등은 B.C 6000년경부터 기원 1세기까지의 사하라 지방의 인간생활의 진화과정, 동물이주, 기후변화 등을 나타내 주고 있음.ㅇ 침식된 사암(沙岩)이 바위숲을 형성해 뛰어난 지형적 장관을 보여줌.ㅇ 풀을 먹는 코끼리나 가축으로 기르는 소, 카누를 타고 사냥에 나가는 사람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 이 지역에 초목이 우거지고 물이 풍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음.? 세르셸 유적세르셸의 유적으로는 바다를 따라 가득 심어져 있는 나무 그늘 속에 대리석의 원주가 있다. 이 광장을 예전에는 로마의 광장이라 하였으나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어 지금은 순교자의 광장이라 부른다. 여기서의 전쟁이란 단 지 독립전쟁이 아니라 서기 40년에 있은 로마군과의 전쟁 때의 희생자를 뜻 하기도 한다. 이 셰르셸
영화 전반에 배경으로 깔리던 음악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시끄러운 듯 때론 혼란스러움을 주려는 듯한 악대에 영화에 나오면서 들리는 음악소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자주 나왔고 영화의 분위기를 흥겹게 혹은 어지럽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작은 텔레비전 화면에서서 나오는 어두운 분위기는 충분히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한 영화들은 대부분 그렇듯이 나에게 흥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 영화 역시 1995년 깐느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유명한 영화임을 증명하듯이 흥미있게 보기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의 밀려오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은 프랑스영화를 보고 나서의 그 기분과 비슷했다.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중 40년대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 공산당원이자 무기밀매로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블랙키와 마르코. 블랙키는 아내 몰래 야심찬 여배우 나탈리아를 사랑하고, 마르코는 그 부폐한 돈으로 창녀와 욕망을 해소해 나가는 방탕아였다. 그러나 그 둘은 독일의 침략에 신들린 사람처럼 저항하고 계속 무기밀매를 하며 여러 게릴라 가족들을 마르코의 할아버지 지하실에 숨겨 거대한 지하세계를 이루게 된다. 묘하게도 그들의 암거래 시장에서 밀매한 무기들이 조국을 위해 쓰여진다는 사실로 그들은 영웅이 되었으며 또한 뒤에서는 돈과 사랑의 축제를 쉬지 않고 배설해 나가는 모순된 삶을 거침없이 살아간다.동물 사육사인 마르코의 동생 이반은 전쟁에 몸서리치며 그지하로 들어가고 블렉키는 나탈리아를 흠모하는 독일장교 프란츠와 갖은 혈투 끝에 그를 제거하고 마르코의 도움으로 간신히 지하로 피신한다. 이때 마르코는 나탈리아에 대한 불같은 욕망과 그리고 돈과 명예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서 곧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것은 지하실을 조국을 수호하는 영웅들이 무기공장으로 운영하고, 그는 지상에서 그녀와 부귀영화를 누리며 지도자 티토가 인정하는 민족영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은 흘러 전쟁은 끝났지만 그 지하는 마르코에 의해 기만당한 어리석은 영웅들의 무기생산과 전쟁준비로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어느새 20년이 흘러 결혼하게 된 블렉키의 아들 요반과 그의 동료들은 축제를 절정으로 '언더그라운드'의 환상을 마침내 깨뜨리고 만다. 대포의 오발사건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못한 마르코는 자신이 친구와 언더그라운드의 동료들을 배신하고 기만했다는 사실에 번민하며 나탈리아와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블렉키가 축제의 절정기에 알게되지만 이미 '언더그라운드'는 파괴되고 만다.마침내 블렉키와 아들 요반은 세계를 잇는 거대한 지하터널을 통해 지상으로 나가 이미 달라진현실을 모른채 온갖 해프닝을 겪게된다. 이반은 정신병원에 갖혀 유고내전을 독일과의 계속된 싸움으로 오인한 채 세월을 보내지만 결국 형이 자신과 그의 동료들의 일생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형 마르코를 찾아 죽이고 만다. 현실감각을 잃은 블렉키는 소동 끝에 아들을 잃게되지만 여전히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이반의 총에 죽은 마르코를 안고 오열하는 나탈리아를 부역자로 오인한 블렉키는 부하에게 사살을 명령하게 됨으로 '언더그라운드'의 비극은 종결된다.이 영화에는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마르코와 블랙키와 나탈리아. 영화를 보면서 작년 프랑스영화의 이해 수업시간에 보았던 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를 그린 것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일까..에서는 세 사람의 관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두 남자가 나탈리를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로 진행된다.영화를 보고 나서 나의 머릿속을 메웠던 것은 영화 전반에 흐르던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던 악대(록밴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의 음악이었다. 악대가 주인공들을 쫒아가는 것인지 주인공들이 악대를 쫒아가는 것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배경에다 시끄럽고 빠른 템포의 음악이 깔려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음악이 극중 상황을 더 극대화 시켜 긴장감과 불안감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영화가 시작되면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엔딩부분에서도 결혼식 장면에서도 흘러나온다. 전쟁과 관련된 배경 음악치고는 너무 흥겨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전쟁 속의 혼란스러움을 나타내려 한 것일지도 모르고 전쟁의 처참함을 아이러니 하게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영화가 조금은 어지럽고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들이 많았고 화면이 많이 흔들렸다. 또한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죽음과 웃음과 축제,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해 주는 듯 하기도 했다. 전쟁과 살인과 그런 것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회의 부분과 황금만능주의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향락을 누리며 아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부분이 함께 공존하는 현실의 상황을 말이다.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그들이 축제를 즐기고 흥겨워 하고 있을 때 육지와 그들이 있던 땅이 갈라진다. 그들은 육지로부터 이탈된 것이다. 그것을 보고는 감독의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생각과 함께 참 특이한 생각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이 영화의 감독인 에밀 쿠스투리카Emir Kusturica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상호 모순된 `마술적'이란 말과 `사실주의'가 보여주듯이, 마술적 사실주의란 마술과 현실의 논리적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 마술적 사실주의가 어떠한 것이라는 깜(?)이 조금은 오는 것 같았다. 어떤이는 이 영화가 20세기에 전개된 광란의 전쟁들을, 그래서 무너져 내리는 도시와 민족의 '恨'을 아이들의 순수와 웃음으로, 때로는 칼을 든 잔다르크의 신앙적 광기로써 그 황폐함과 혼란을 말하고 있으며, 또 그 속에서 사랑에 미쳐 날뛰는 망아지 같은 존재들의 욕망을 작열하는 불꽃처럼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 서론이제까지 제2공화국의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던 장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리더쉽이 없어서 군부들이 쿠테타를 일으키게 만든 무능력한 정치가이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5.16 세력에 의한 장면 정권의 무능력함이 과장이 된 것인지 그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우유부단하고 지도력없는 정치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 장면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그에 관한 상당히 다른 평가들을 접했고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면서 만약 장면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먼저 장면 정권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장면의 성장환경을 알아보도록 하겠다.2. 본론1) 천주교 가문 출생의 엘리트 교육자장면(1899-1966)은 1899년 8월 28일 부친 장기빈(1878-1959)과 모친 사이에서 3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출생지는 외가인 서울 종로이다. 출생 직후 15일만에 종현본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인천세관에서 일하던 장기빈은 1896년 천주교에 귀의했고, 1897년에는 천주교도 황루시아(1878-1954)와 결혼하였다. 장면은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 부친이 외국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서 3남 4녀의 자식들을 모두 일본과 구미에 유학을 시켰다. 일제라는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에 드물게도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면총리는 어렸을 때부터 대단히 성실했고 자제심이 강했으며 두뇌가 명석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영어 실력은 탁월했다고 한다.장면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는데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면(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장면은 부친의 근무지인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8살인 1906년에 인천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박문학교를 졸업한 뒤인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인천공립 심상 소학과과 고등과를 마친다. 1914년에는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농림학교 재학시절 열심히 했던 것은 영어 공부였다. 이렇게 장면운동에 참가했던 신학생은 징계를 받아 학교를 떠나는 상황이었다. 이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민족을 알도록 해준 교사는 바로 장면이었다고 한다.2) 4.19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승만과 자유당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찰에 의존하여 장기집권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반공'을 내세워 국민을 통치 지배하였다. 경제적 어려움과 혼란은 가중되었다. 정치적 혼돈과 부정 부패가 국민을 실망시키고 많은 좌절감을 안겨줬다. 민심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이승만은 민심을 추스르고 사회개혁을 단행할만한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정권유지에 급급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분출하는 국민의 욕구를 탄압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정책도 마다하지 않았다.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정선거도 서슴치 않았다. 그 결과 3·15 부정선거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선거 움직임은 3월 15일 투표 이전부터 이미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그 시발이었다. 또한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는 시민과 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있었다.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에 대응한 시민, 학생들의 반발은 점차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서울지역에서의 시위가 급격히 고조되면서 부정선거 규탄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날의 시위를 계기로 4월 19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시위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당시 시민 학생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도 전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4월 19일에 있었던 시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허울 좋은 변명을 하며 4월 21일 국무위원 전원 사표를 제출하고 국면전환을 시도고 이승만 박사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장면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 했다 그 이유에는 향후 장면을 카톨릭 대표로 정계에 진출시키려는 생각에서였음이 분명하다.12월 장면이 대표의원으로 선임될 당시 노기남 주교가 장면의 정계 진출을 권유한 명분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종교인이라고 해서 방관할 수 없다는 것과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우리를 올바르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장면 같은 유능한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노기남 주교의 권유를 처음에는 완강히 뿌리쳤으나, 노기남 주교의 부탁을 받은 김규식의 설득으로 결국 입법의원직에 올랐다고 한다. 이처럼 장면의 정계 입문에는 노기남 주교의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평생을 교육자로 살고자 했다는 그가 정치가로 변신한 데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결단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1945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장면은 대한민국 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도록 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9월 장면은 대한민국 수석대표로서 차석 대표 장기영, 고문 조병옥 등과 함께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정부를 승인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과 바티칸 교황청 당국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대유엔 외교에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장면이 천주교측의 도움으로 좋은 성과를 기대하여 그에게 임무를 부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1955년 통합 야당으로 출범한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은 신익희였고, 장면은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 민주당 세력은 크게 두 세력으로 구성되었는데, 8.15해방 직후부터 결성된 한국민주당 출신들을 구파라고 하고, 흥사단이나 자유당에서 이탈한 세력을 신파라고 하였다. 신익희나 조병옥은 구파에 속했고, 장면은 신파에 속했다. 장면은 1955년 민주당에 참가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장면이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이었을 당시 부통령은 3가지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참의원 의장으로만 대통령 유고시 그 권한을 장면 부통령이 계승한다는 헌법의 규정은 이승만의 그늘 밑에서 후계구도를 구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요인이었던 것이다.1959년 제4대 정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통령 후보 선거전에서 조병옥과 장면은 484대 481표로 조병옥이 3표차로 승리했다. 이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 수락을 주저하자 장면은 후보 수락을 요청하면서 협력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사망하게 된다.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는 부통령 선거나 다름이 없었다. 자유당 후보 이기붕과 민주당 후보 장면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여론과는 정반대로 이기붕 부통령 당선으로 발표되었다.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4.19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거쳐 새로 국회가 구성되었다. 이 국회에서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무총리에는 윤보선이 1차 지명한 김도연을 부결시키고, 2차로 지명한 장면은 당선시켰다. 이에 장면은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4) 5.16쿠테타와 제2공화국의 종말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고 국민들이 힘들어 하는 가운데 부패한 제1공화국의 몰락은 2공화국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1960년 8월∼61년 5월)의 정치적 상황은 여당이 된 민주당 내에서 신구파 계보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그 출발부터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각책임제하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할 장면 국무총리는 인준과정에서 소수 무소속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구파의 도전과 신파의 요구 사이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민주당내의 계파갈등은 구파가 양당제를 육성한다는 명분하에 분당을 선언하고 신당조직을 추진하여 1961년 2월 20일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당시 사회적인 상황도 자유당 정권의 붕괴 이후 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혼란장면 정권을 설명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이전의 시대는 모두 부정적으로 각인시켜 놓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장면 또한 우유부단하고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었다.다음으로는, 장면 정권은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그 어느 때 보다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시기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 즉 전자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총칼로 권력을 빼앗은 군부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장된 것이고 제2공화국에 대한 폄하는 근거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 5·16세력이 제2공화국이 마련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을 원용한점, 비록 신·구파간 갈등양상이 있었다고는 해도 실상보다는 부풀려진 점등을 든다. 무엇보다도 장면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내세우며 쿠테타를 일으킨 5·16세력이 실은 제2공화국 이전부터 쿠데타음모를 계획하는 등 집권야욕에 불타고 있었다는 점이다.이제까지 제2공화국은 쿠테타 세력에 의해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너무 많은 왜곡이 되어왔다. 그러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의 측면 등 많은 부분이 숨겨지고 은폐되어 온 것이다. 장면이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민주당 정권에서는 당시 시대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을 수립했고, 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 이것이 6월 정도만 더 지속되었다면 구체적 결실이 갖게 되고 민주당 정권 그리고 장면의 지도력이 확립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을 우려했던 군부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5월 16일 거사일로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성패의 열쇠는 현실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달려 있었는데, 이 지원 여부는 경제개발계획을 평가한 뒤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5월 16일의 시점은 바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을 완성하여 미국이 긍정적 검토를 거쳐 구체적인..
1. 들어가며한국인에게 있어서 일본이라는 존재는 친근감으로 먼저 다가오기보다는 무엇인가 껄끄러운, 찜찜함이 있는 나라로 느껴진다. 나 역시 한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성장한 한국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같은 아시아권 나라로 이웃해 있으면서 그저 우호적인 나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일본을 보는 모습은 마치 두 개의 가면을 쓰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나는 일본을 두려움과 혐오 혹은 경멸 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일본을 따라하고 베끼려는 모습이다.이런 이중적인 우리의 모습은 일본 대중문화를 보는 시각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은 이미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인 음악부문은 우리에겐 아직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점을 이용하여 부정적인 측면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우리의 음악시장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다양한 일본의 음악시장을 알아보고 그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2. 일본 음악 시장의 성장일본의 대중음악은 j-pop이라는 장르로 불린다. 즉 재패니즈 팝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코리안 팝(k-pop)이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한다면 일본의 음악은 이미 세계시장으로 진출해서 이미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일본의 음악 시장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2위의 음반시장이다. 연간 매출이 5천억엔(약5조원)으로 이는 세계1위 음반시장인 미국의 절반 규모며 3위 독일의 2배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5~10%의 시장규모를 갖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j-pop은 일본 내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하다. 일본영화와 비교해 보면 매출액이 3배에 달하고 대중들의 생활에 밀착된 정도도 월등하다. 일본영화면 일본의 젊은 세대는 j-pop 외에는 세계의 어떤 노래도 레코드를 사서는 듣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j-pop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는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닐까?일본의 음반시장 발전계기의 시초는 오디오 업체들이 하드웨어시장을 넓히기 위해 음반산업에 뛰어든 것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메이저 음반사는 소니, 도시바, 파이오니어 등 가전제품 업체들이 많다. 60년대부터 TV, 라디오의 가요프로 CF를 모두 사들이는 방식으로 가요산업에 개입하다가 아예 음반사를 세운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음반시장이 5천엔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기반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또한 일본음악의 발전에는 라이브 하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3. 라이브 하우스의 힘일본에는 라이브 하우스라는 것이 있는데 도쿄지역에만 1천여 개가 되고 일본 전역에는 수천 개가 존재한다. 라이브 하우스는 백퍼센트 라이브 음악 공연을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홍대 앞 클럽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곳에서 수만 명의 가수와 그룹들이 끊임없이 연습을 하고 음악을 연주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은 음료권 한 장으로 이 곳을 찾는다. 일본에는 프로가 될 준비를 하고, 공부하고, 경험할 수 있는 무대가 수천 개나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홍대 앞의 몇몇 클럽을 포함해 전국에 수십 개밖에 없는 우리와 비교하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이 곳에서 수만 명의 무명 가수와 그룹들이 언젠가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프로의 꿈을 꾼다. 그래서 탄생한 전설적인 그룹인 X-JAPAN을 비롯해, 오늘날 일본의 정상 밴드는 거의 이런 식으로 스타가 되었다. 라이브 하우스를 거친다고 해서 모두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음악성으로도 인정을 받게된다. 이것이 일본의 음악시장이 탄탄한 기초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우리나라 댄스 가수들의 립싱크가 문제가 되고 음악성에 문제가 제기되는 배경에는 일본의 라이브 하우스와 같은 처음부터 음악성의 밑거름언더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의 공연 무대가 되는 몇 안 되는 클럽들도 어려운 자금난으로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의 코리안 팝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은 라이브 하우스가 지금보다는 훨씬 많이 생겨서 진정으로 음악을 하고싶어하는 아마추어 음악인들의 실력양성의 장이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3. 음악 시장의 다양성 - 모방이 아닌 개성으로 승부!우리나라의 대중 음악이 획일적인 댄스 위주로 돌아가는 체계라면 일본은 댄스와 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추세는 1980년대의 록 밴드 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전반까지는 해외 록 음악을 추종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 후에는 비주얼 그룹 계열, 즉 중성적인 화장과 기발한 의상 등 시각적인 면을 강조한 밴드가 탄생하여 일본 특유의 움직임을 보였다. 비슷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아마추어 밴드들이 그들의 음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화려한 치장이었다. 라이브 하우스에서 잘 다져진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짙은 화장과 형형색색의 머리, 화려한 의상 등의 비주얼한 면을 강조하는 비주얼 록은 일본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개념의 장르로서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음악을 대표하는 장르 중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것이 j-rock이라는 장으로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비주얼 록의 개념을 확립시키고 일본 록의 가장 대표적인 그룹이 X-JAPAN이다.언더그라운드에서 출발한 그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많은 음악적 영향을 준 그룹이다. X-JAPAN 이후로 많은 비주얼 록 그룹들이 생겨났고 97년에 그룹의 멤버인 히데가 의문사를 했을 때 추모 장례 행렬이 5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X-JAPAN의 신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은 일본 인디 록의 기반이 대단히 튼튼함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비주얼 밴드들이 한창 주목을 받고 있을 때에는 베스트 10 중에 7~8곡이 비주얼 밴드들의 곡이었을 정도였다.그런데 이렇게 일본서도 몇몇 그룹이 비주얼 록을 하고 있지만 일본에서와 같이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 중에도 잘생긴 외모로 인기몰이를 하는 그룹이 있기는 하지만 비주얼 록 자체로 인기를 얻고 있지는 않다. 한국에서 비주얼 록이 일본에서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에는 일본보다 더 보수적인 한국사회 구조도 한 몫을 한다. 비주얼 록은 오디오적인 면뿐만 아니라 비디오 적인 면까지 신경을 쓴다. 남자가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몇 년 전, 일본의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을 할 정도라면 남자가 화장을 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남자가 진하게 화장을 하거나 너무 화려한 의상을 입으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풍토이다. 또한 방송심의에 걸려서 출현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길 수 있다. 김종서가 처음에 긴 머리를 하고 방송에 나왔을 땐 바로 방송출연이 금지되었었고 가수들의 염색한 머리조차 두건으로 막으려 했었다. 이러한 풍토에서 비주얼을 중요시하는 가수들이 생겨나기는 어려울 것이다.그리고 또한 록이라는 음악 장르를 고수하는 가수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록이라는 고집을 버리고 대중의 흐름인 댄스로 전향(?)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진정으로 자신의 것을 고수하기보다는 인기만을 위해 주류에 편승하는 분위기도 비주얼 록과 함께 다양한 장르가 한국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일본의 음악시장이 우리와 가장 큰 차이점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음악관련 종사자들, 음반업자, 방송, 팬 모두가 유행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색깔을 더 우선하는데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획일적이고 유행에만 치우치다 보니 지금처럼 온통 댄스가 판을 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개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밑거름이 돼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토양이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YG패밀리를 만든 양현석이 있다면 일본악이 있는가 하면 라우드니스는 일본의 정통 하드 록에서 확고한 위치를 쌓고 있으며, 카시오페아는 재즈계를 대표하는 밴드로 행세하고 있다. 또한 L'arc~en~ciel, Glay 등이 앞장선 영국의 뉴웨이브와 재팬 팝이 조화를 이룬 비주얼 록을 만들었다. 여기서 카시오페아를 보면 그들의 연주의 바탕에는 재즈적인 요소가 깔려있지만 ‘J-Fusion'이라는 용어에 걸맞은 자국의 정서가 내포된 카시오페아만의 사운드를 일구어 내었고 그로 인해 재즈의 본류인 미국에서도 환영받는 대형밴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개성을 살리고, 장인정신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것을 고수한 결과 오늘날의 일본 음악시장이 다양화되었고 그로 인해 음악시장이 엄청나게 거대해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4. 한국 속의 일본 음악아직 일본의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상태이고 시중에서 일본어로 된 음반은 살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누구나 한번씩은 일본의 대중가요를 들어보았다. 거리를 지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멜로디는 일본의 유명한 그룹의 노래이고 텔레비전에서도 가끔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들리기도 한다. 또한 우리나라 가수들의 일본 음악 표절문제도 심각하다. 지금은 표절문제가 많이 사그러든 상태이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표절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댄스나 발라드 가수들은 한두 곡 정도의 표적곡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일본가요의 선율이 미국의 것보다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더 익숙하기에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먹힐 수 있었던 이유와 함께 일본 음악의 국내시장 미개방이 적절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표절시비가 거론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음악을 듣고 관심이 있는 일본음악 팬들의 힘이 있었다. 음성적으로 일본 음악을 듣고 즐기던 매니아들은 표절 가요를 감시하고 인터넷통신이 일반화되면서 그 힘은 더욱 증폭되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은 그저 비슷하다는 느낌으로 표절다.
또 하나의 아픔의 흔적 , 라이따이한【 차 례 】{●들어가며...●라이따이한이란?-단어적 의미-라이따이한이란?●라이따이한의 현재●라이따이한의 정체성●현재진행형...그리고 新라이따이한●라이따이한과 우리-문제투성이 라이따이한 사업-라이따이한들의 희망.. 휴멘●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들어가며...일본이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가했던 무자비한 살육과 정신대 문제 등 비인간적인 행태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고 참을 수 없어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정작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대량학살과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것과 같은 비인간적인, 비인륜적인 짓들을 베트남인들에게 했던 것은 미국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말로 얼버무리곤 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9억 달러 이상의 엄청난 경제적 획득이 있었고 그로 인해 경제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반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피를 흘렸고 우리에겐 그들의 유가족과 전쟁 중의 부상, 전쟁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피가 흐르는 라이따이한이 있다.라이따이한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공식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음을 알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이래 한번도 남의 나라 주권을 침범한 적이 없다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그 '숭고한' 원칙을 깨뜨린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어쩌면 그 흔적에 대해 무관심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우리는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라이따이한들에 대해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노력했다.●라이따이한이란?-단어적 의미라이따이한 은 라이(Lai)와 따이한(Dai Han : 大韓)의 합성어이다.라이는 혼혈아 혹은 다른 두 종류간의 교배 등으로 나타난 중간 모양의 객체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거기에는 경멸조의 어감이 있다. 따이한은 사실은 다이한(Dai Han)의 잘못된 발음 표기이다. 1992년 베트남과 우리나라가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베트남에서는 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제 2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연 평균 10% 이상의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런 장미빛 수치들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전쟁을 통해 베트남인 3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2백만 명이 불구가 되었다. 계속되는 고엽제 살포로 산림과 농토는 죽은 땅으로 변했고 경제는 마비되었다. 우리 군도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2만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고엽제 후유증 환자도 2만 명에 이른다. 이것이 베트남전의 실체이다. 그리고 라이따이한이 있다.우리가 알고 있는 라이따이한은 30년 전 베트남 전쟁 때 사이공(현 호치민시)과 다낭, 퀴뇬, 나트낭 등 군 주둔 주역에서 우리 군인이나 기술자, 그리고 군인들과 베트남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베트남 한인 2세를 의미한다.또 어떤 기술자는 어느 꽁가이(아가씨)와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고 임심까지 시켰다. 점점 불러가는 그 아가씨의 배에 눈길이 미칠 적마다 그 걱정이 태산같이 쌓였던가 보다. 월만에 그대로 붙잡혀 주저앉게 되지 않나... 갖가지 궁리 끝에 그는 여인 몰래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월남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코리안 기생족이라는 기사를 써 제 5회 월남 언론상을 받은 이연교 기자의 저서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건설, 구호 등 제반사업에 투입된 한국인 기술자들도 있었다.파병된 많은 젊은이들은 화약 냄새로 덮인 베트남에서 싸우고, 돈을 벌었고, 즐겼다. 생명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는 전쟁터의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 어린 아이인 자신의 2세들을 뒤로하고는 속절없이 떠나왔다. 그리고 그 후로 거의 20년 간 베트남과의 교류는 없었으며 냉전시대라는 특수한 당시 배경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도 거의 없었다. 이런 현실이 그곳에 남겨둔 자신의 핏줄을 외면하고픈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친아버지도, 아버 그러나 휴멘 학교의 설립자인 김영관 목사는 이 수치는 베트남 남부에 국한된 것이고 학교에 등록된 것이라 실제로는 중부지역과 미등록자를 감안 한다면 족히 3,000 여명으로 추산되어 진다고 전한다.전쟁 참가국 중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들은 국가 간의 협상을 통해 2세들을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2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무관심 속에 버려 두었다. 적어도 미국계 혼혈에게는 미국이든 배트남이든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미국의 경제적 상황이나 여러 조건까지 따져본다면 적국의 후손으로 홀어머니의 손에 자랐을 우리의 라이따이한보다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국과는 사뭇 다른 우리의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겨우 굶주리지 않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생활고를 감안해 본다면 미국과 같은 처우가 정부적인 입장에서건 아버지의 개인적 입장에서건 여력이 상당히 부족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여러 입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관심은 그들이 삶의 터전인 베트남에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만들었으며 그 앞에 우리의 변명은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최소한 수교이후에 우리의 행보만이라도 온전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지금쯤 한국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두 번째 기회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호치민의 한국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한국계 혼혈 2세란 이유만으로 특별히 차별 받거나 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적군의 자식 으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숨어살아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었고, 또 학교 성적이 뛰어나지 않는 한 9년의 의무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대부분이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과 씨름하다보니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력이 부족해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난의 악순환 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75년 베트남 종전 무렵 또는 과 베트남 현지 여성의 만남 그리고 그 사이의 新 라이따이한 문제는 새로운잇가 되었다.들 사이에서 태어난 한인 2세를 베트남 전의 라이따이한과 구별해 일반적으로 新 라이따이한이라 칭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새로운 이슈가 되었다.베트남은 특히 외국인의 투자수속 허가절차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서류하나 작성하는데 몇 개월이 걸리는 예도 있을 정도다. 설사 투자절차를 밟는다 해도 현지인보다 몇 십 배에 해당하는 세금을 지불해야하며, 이런 문제들로 결국 현지 대리인 명의로 등록을 하게 된다. 이미 문제 발단의 기초 토대가 양산되는 것이다. 많은 현지 대리인 중 99%가 여자이고, 또 그 중 대다수가 현지처를 겸하는 것이다.베트남에는 한국인의 현지처가 되기를 희망하는 베트남 여자들도 많다고 한다. 여자로서 생활고가 쉽게 해결되는 탓이기도 하며 여자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계가 해결되는 탓이다. 오죽하면 한국 남자를 만나면 여자가 팔자가 바뀐다는 말까지 있을까? 그러나 이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이라 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여러 곳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먼저 남자의 대부분은 한국에 본처와 가족들을 둔 상태이다. 게다가 주로 50대 이후의 연력으로 한국의 가정에서 자녀와 부인을 부양하는 집안의 가장이다. 가장이 외국에 제 2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당연히 큰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 문제는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가족 구성원들 모두를 힘겹게 만들고 상처를 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주로 한국가정에서 알았을 경우 또는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 계속 머무르기를 원할 때에 해당한다. 그 외에는 반대로 사업이 파산되고 베트남을 떠나는 경우이다. 이때엔 거의 대부분이 현지 가족을 버리고 베트남을 떠난다. 이로 인해 현지처에게 큰 상처와 생활의 어려움을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현대판 라이따이한의 재탄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베트남에서 현지처를 두는 일은 한국 가정, 베트남 가정 어느 한쪽이든 어쩌면 양 가정 모두에 무서운 결과를 일으킨다. 예었다. 그것이 베한 정해기술학교의 경우인데, 라이따이한의 정확한 현실이나 필요들을 외면한 채 세워진 이 학교는 11억을 투자했지만 실질적으로 수혜 받은 라이따이한이 없다. 이런 사정은 에 까지 떠들썩하게 자랑했던 투덕에 세워진 한·베트남 직업훈련원 역시 마찬가지였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베트남 전쟁으로 생겨난 라이따이한들은 대부분 성인이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때지 기술학교를 다닐 때가 아닌 것이다. 또 교과과정을 따라올 기초가 전혀 없었다. 직업훈련원에는 라이따이한이 2명이 있다. 그런데 서류 상으로만 존재한다. 지금은 호치민대로 재편성이 된 상태이다.왜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일까? 라이따이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거액의 지원비를 받고 수천 명의 후원회원들의 쌈짓돈을 모았다. 그런데 교육받은 라이따이한은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한인 2세의 숫자파악을 철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자료도 없이 1만 5천~3만 명 수준이라고 짐작만으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잘못된 사업에는 교육사업 만이 아니다. 라이따이한들이 자립해서 안정을 되찾고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많은 민간단체들이 마련해 온 사업이 바로 그들의 합동결혼식이다. 그러나 이 결혼식 중 일부는 엉터리로 행해지고 있다.이미 결혼을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의 후원으로 열린 결혼식에서 결혼하면 가전제품을 준다기에 한번 더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얼마 후에 다른 단체에서 또 합동결혼식을 열고 결혼을 하면 정착금을 준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따이한들과 함께 생활해 온 교민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결혼한 6~7쌍이 한번 더 예식을 치렀다고 한다. 라이따이한과 관련된 사업을 둘러싸고 교민들이 협력하고, 그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나서 투자를 하던지 사업을 벌여야 일이 제대로 될텐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라이따이한들의 희망.. 휴멘라이따이한과 관련된 사업들이 말썽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중 라이따이한의 아버지 라 불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