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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증진 프로그램
    목 차1. 목표 22. 방법 33. 운동에 활용한 심리 치료 기법 44. 운동 기간 55. 운동의 구체적 결과 및 평가 66. 운동 결과요약 107. 프로그램에 활용된 심리치료 기법의 분석 118. 전체 평가 119. 소감 121. 목표 : (1) 목표 설정 이유① 나의 건강을 위한 증진 항목을 생각하면서, 특정한 어느 영역이(흡연이나 비만 등)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전반에 걸쳐 체력이 약하고 잦은 병에 쉽게 잘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자신감이나 적극성이 결여로 인한 면역체계의 약화도 나의 건강에 있어 문제를 초래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② 취업준비생으로서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체력과 자신감의 성장이 나에게 있어 최우선 고려 대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2) 목표 원인에 관한 나름대로의 생각① 체력 : 약 4살 경에 그 당시로는 큰 병이었던 심장 판막증에 걸렸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수술이 행해지고 완치되었지만, 유소년시절을 거쳐 학창시절의 중반 때까지 심폐기능에 관한 운동을 비롯하여 격렬한 운동에 대해서는 내 신상명세서를 가지고 계시는 담임선생님들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내 의사를 묻고 면제를 시켜주셨다. 학창시절(중, 고등학교) 쯤에는 사실 이미 완치가 된 후였지만, 이미 운동은 익숙하지 못한 분야였고 회피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학창시절을 거쳐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을 당시에는 만성적인 운동 기피증과 동시에 허약체질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대학 입학 당시 키 179㎝에 몸무게 58kg 정도였다.② 자신감 : 가족 환경을 먼저 살펴보면 부모님의 통제가 심하였다. 아버님이 직업군인이셨고, 어머님은 외가 쪽의 막내딸로서 자녀육아에 대해 부담감을 많이 느끼셨지만, 올바른 행동방안을 설정하지 못하셨다. 강제적 양육이 이루어졌으며 스스로 행동에 대한 계획을 세워 본 적도 실천을 행하여 본 적도 그리고 행동에 관해 책임을 져 본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입시 때는 외고 입시에 떨어졌으며, 목표대학 진학 실패,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실연 등의 여러 실패를 겪었을 때,어도 환자는 인식을 못하다가 5년 내지 10년 후에나 서서히 심장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 나타나는 증세는 다음과 같다.a.쉽게 피로하다.b.운동이나 일을 하면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숨이 찬다.c.차차 병세가 진행되면 판막은 고장이 있어도 심장의 펌프 작용은 정상이던 것이, 펌프 작용에도 기능 장해가 일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가져 오게 된다.2. 방 법 : 운동 (헬스)(1) 실현 방법으로서 운동(헬스)을 선택한 이유① 식이요법과 식습관 개선 혹은 특정 운동 종목(태권도나 합기도, 킥복싱등)은 환경의 열악함(타지생활)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제외시켰다.②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환경의 제공(기숙사내 체력 단련실 구비)과 시간절약 측면에서 선택하기에 용이해 졌다.③ 체력과 자신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는 헬스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2) 운동 방법 및 내용① 효과적인 운동을 위해 운동관련 전문 서적을 참고 하였다(나를 사랑하게 해주는 봄날 위트니스 , 6주 만에 뱃살을 뺀다 복근운동 30분)② 책에서 권유해주는 것처럼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고려해 본 결과 가슴과 어깨 그리고 뱃살이 우선시 되었다.③ 유산소 운동과 윗몸일으키기, 덤벨, 역기 등을 주 운동 항목으로 설정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장의 운동의 구체적 상황과 결과에 적어 놓았다.④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동요일로 잡고 일요일은 회복기로 잡았다. 시간을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수업이 1교시인 날은 저녁에(10:30 - 11:30) 그리고 오후에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에(08:30 - 09:30)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⑤ 성취감에 의한 자존심의 회복도 주요한 운동으로 얻게 되는 부산물로 생각되어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결정을 하였다.⑥ 효과적인 성취를 위해 같은 방에 있는 룸메이트에게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시간이 일치한다면 같이 하자고 권유하였다.3. 운동에 활용한 심리 치료 기법→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 사용한 심리 치료 기법은 행동 치료의 일사람들을 떠 올렸으며(사진을 봐 두었음), 특히 거울에 비친 너무 마르기만 한 내 몸을 보면서 이 상황을 반드시 타개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치료 기법은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모델링으로도 자극이 안 될 정도로 운동하러 가기가 싫어질 때 사용하였다.※참고 (운동 항목에 대한 설명) : 책을 통해 얻게 된 운동 방법이며 실제적으로 이 방법에 맞추어 운동을 시작하기로 계획하였다.유산소 운동1. 러닝머신에서 조깅을 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순서가 있다. 무턱대고 올라가자마자 뛰기 시작하면 발목이나 무릎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많은 부담을 줍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기 시작하여 천천히 속도를 올리고 마지막에는 속도를 서서히 낮추면서 끝마쳐야 한다.2. 유산소운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운동화를 신고해야 한다. 러닝머신에서 맨발로 뛰는 것은 발바닥의 "족저근"에 염증이나 부상을 유발하며 발목이나 무릎에 많은 충격을 준다.3. 유산소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수건과 물통을 준비하면 좋다. 유산소운동을 길게 하기 때문에 땀을 닦기 위한 수건이 필요하며 중간 중간 수분섭취를 위해서 조금씩 자주 물을 마셔야 한다.4. 지방연소를 위해서는 최소 20분 이상을 해야 한다. 신체는 20분정도부터 동작에 적응되어 대다수의 에너지를 몸에 저장되어 있는 지방을 끌어다 사용한다. 그 이전에는 지방 사용율이 별로 많지 않다.덤 벨1. 호흡: 근수축시 호기 - 각 운동에 있어 운동 부위근육이 수축할 때 숨을 내어 쉰다. 즉, 힘이 들 때 내쉬고 이완될 때 들이 쉰다2. 서는 자세 : 발은 어깨넓이로 벌려서며 무릎, 허리와 어깨 목선이 자연스러운 인체의 선을 유지.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며 가슴은 자연스럽게 펴 준다. 선 자세에서 무릎은 펴되 관절을 굳힌 상태(락킹)까지 펴지는 않는다.3. 벤치에 앉는 자세 : 등판이 없는 벤치에 앉을 시에는 무릎을 어깨넓이로 벌리시고 발은 바닥에 붙인다. 허리는 곧추세우시고 가슴은 자연스럽게 편다. 시선은 마찬가지로 정면을 바라본다. 상체를 낮추는 경우에도 고개를 치켜들거고정시킨다. 오직 배의 힘으로 다리를 올린다고 생각 하여야 한다.역 기1. 보통 힘쓸 때 내쉬고 뺄 때 마신다고 생각한다. 즉, 내려가면서 들이마시고, 올리면서 내뿜는다.2. 보통 내려갈 때는 천천히 내리고 올라올 때는 빠르게 올리는 게 근육에 좀더 저항을 주어 효과가 있다.4. 운동 기간 : 2004년 9월 1일부터 2004년 11월 30일까지(1) 기간 설정 이유ⓛ 무엇보다 보고서 제출기간을 맞추기 위해서 정한 측면이 크고, 또한 운동을 위한 여건이 기숙사내의 체력 단련실이 있기 때문이므로 기숙사 입소기간 내에서의 이루어져 하기 때문에 2학기 중의 이 날짜들로 정하게 되었다.② 기숙사 퇴소가 12월 15일이지만 기말 시험과 또한 달을 기준으로 끊는 것이 깔끔할 거 같아 11월 마지막 날을 종료 날짜로 잡았다.(2) 기간 내 활동 사항운동의 실현 여부를 기입하고 그 원인에 대한 비고를 적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5. 운동의 구체적 결과 및 평가○ - 운동시간 ,횟수 완수△ - 운동시간, 횟수 어느 정도 완수× - 운동하지 못함(1) 9월달항목날짜러닝머신(20분)덤벨 올리기(12×3세트)윗몸일으키기(12×3세트)역기(12×3세트)비고9. 1○○○○수요일, 프로그램 시작 날, 특이사항 없음9. 2○○○○목요일9. 3○○△○금요일, 근육통에 시달림, 윗몸일으키기 횟수 줄임9. 4○○○○토요일, 근육통에 시달림9. 5××××일요일, 쉼9. 6△△○○월요일, 시간이 없어 러닝 머신시간과 덤벨 횟수 줄임9. 7○○○○화요일9. 8○○○○수요일9. 9××××목요일, 동아리 정기 모임때 술자리 가짐, 외박함9. 10×××△금요일, 속이 안 좋아 역기만 조금 함9. 11△○○○토요일, 러닝머신 시간 줄임9. 12××××일요일, 쉼9. 13○○○○월요일9. 14○○○○화요일9. 15○×○○수요일, 덤벨기구 없어짐9. 16○××○목요일, 술자리 있을 거 같아서 아침에 러닝과 역기만 함9. 17××××금요일, 속이 안 좋아 쉼9. 18○○○○토요일9. 19××××일요일, 쉼9. 2××××토요일, 시험 끝남10. 24××××일요일10. 25××××월요일, 감기 걸림10. 26××××화요일, 몸이 안 좋음10. 27××××수요일, 몸이 안 좋음10. 28××××목요일10. 29××××금요일10. 30××××토요일10. 31××××일요일(3) 11월달항목날짜러닝머신(20분)덤벨올리기(12×3세트)윗몸일으키기(12×3세트)역기(12×3세트)비고11. 1××××월요일11. 2○○○○화요일, 운동 재개11. 3△○○○수요일, 사람 많아 러닝머신 시간 줄임, 근육통11. 4△△△○목요일, 동아리 모임 있어 아침에 짧게 함11. 5×△○○금요일, 늦잠 자 러닝머신 시간 줄임11. 6○○○○토요일11. 7××××일요일 쉼11. 8○○○○월요일11. 9××××화요일, 교양수업 발표준비 때문에 운동 시간 뺌11. 10△△△○수요일11. 11○○○○목요일11. 12△△○○금요일11. 13○○○○토요일11. 14××××일요일11. 15××××월요일, 교양 발표수업 준비11. 16×××△화요일, 늦잠 자는 바람에 역기만 조금 함11. 17○○○○수요일11. 18△○○○목요일11. 19×○××금요일, 전날에 과음했음11. 20○○○○토요일11. 21××××일요일11. 22○○○○월요일11. 23○○○○화요일,11. 24××○○수요일, 시간 없어서 역기와 윗몸일으키기만 완료함11. 25○××○목요일, 전공 발표수업 준비11. 26○○○○금요일11. 27○○○○토요일11. 28××××일요일, 쉼11. 29△△△○월요일, 늦잠을 잠11. 30○○○○화요일, 프로그램 종료 날짜6. 운동 결과요약→ 프로그램 초반에는 의욕을 갖고 행하였던 것만큼 어느 정도 비교적 충실히 지켜졌다. 프로그램 중반쯤의 중간고사와 감기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운동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이것은 후반 초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문제인 것은 중반과 후반 초기에는 명확한 운동 거부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후반부터는 다시 운동 달성률이 높아지고 있으며, 중반과는 다르게 문제 상황이 발생하여도 운동이각한다.
    예체능| 2004.12.31| 12페이지| 3,0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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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 일본음식 조사
    일본음식조사!!!!Ⅰ.서론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3요소는 의식주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각 나라의 의식주를 살펴보면 그 나라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은 우리나라와 가깝게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의식주에 있어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나라라는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차이점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식문화는 단순히 굶주린 배를 채우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계급, 종교, 지역적 사정 등 여러 가지에 따라 달라지며 음식의 재료가 되는 식품의 획득방법과 종류, 식품의 조리?가공법, 식기류, 상차림, 및 음식을 먹는 방법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다 보면 일본의 역사, 관습, 전통 등을 보다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외식문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일본음식이다. 하지만 막상 물어보면 음식은 아는 데 음식문화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발표를 통해서 일본의 음식문화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음식문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Ⅱ.일본음식의 배경과 역사1.일본음식의 배경1)자연적 배경일본열도는 북위 20°~45° 부근에 이르는 3,500㎞의 남북으로 긴 네게의 섬(훗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약 38만㎢로 남북한 면적의 약 1.7배 정도이고 국토의 약 70%가 산간지역이서서 평야가 적은 편이다.기후는 전체적으로 온대몬순지역이며 해양성 기후를 보이나 국내 위치에 따라 동서남북간의 기후차이가 매우 크다. 즉 중앙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은 한국 동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동해식 기후를 나타내고 동쪽은 태평양의 영향을 크게 받는 태평양식 기후를 보이며 남부지방은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여름에는 고온다습하며 동북지역 이북은 겨울에 혹 아울러 공가사회와 무가사외의 쌍방에 예법이 생겨나 축의의 의식이 더욱 더 엄격해져 식의 선이 정해지고 식사의 예법에 따른 본선요리의 향응 형식이 생긴 것도 이때쯤이다. 1500년경 천리휴(오차나 오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차도가에 따라 다도와 차회석이 완성되었다.이 당시에는 외국과의 교류무역이 성행하여 남만요리(쇠고기나 닭고기, 생선들에 파를 넣어 조린 음식) 등도 건너와서 일본인의 식생활도 점차 육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1639년 에도도쿠가와(강호덕천)에 쇄국령이 떨어져 다시 생선과 야채를 위주로 하는 식생활로 되돌아갔다. 이때는 완전한 무가정치의 시대였지만 중산층의 활약이 눈부셔 상인들의 부가 위력을 발휘하여 사치스런 요리와 호화스러운 그릇을 쓰는 주연요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급 요리점과 차실(다과회실)이 생겨나 요리문화의 발전이 지속되었다. 엄격한 예의작법의 얽매임 속에서도 더욱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선요리와 회석요리는 어지럽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요리다실에서 소외되어 그것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요리다실에서 소외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주연을 중심으로 한 회석요리가 생겨났다. 중산층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은 순수한 미각과 식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에 이르러 음식이 유희화되고, 그 위에 연석이 사교의 장으로서 이용하게 되었다.1800년경에는 본선요리, 정진요리, 회석요리, 중국요리, 남만요리 등이 상호 융합하여 소화, 흡수되는 시대로서 일본의 독특한 요리문화가 완성되었다. 많은 국가가 그러하듯 요리의 발전 과정은 그 나라의 종료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 요리의 발전 과정은 신과 불교의 공물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 요리는 요리 전국시대에 많은 유파가 생겨 서로 경쟁해 가며 기술이 발전함에 따리 일본 요리의 이론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일본 요리의 큰 흐름을 총괄해보면 귀족, 무가 지배의 봉건사회에서 향응의 접대연회는 상층계급이 하층계급에 좋지 않았다.그러다가 세계 제2차대전은 전국민에게 식량난을 가져온다. 그때를 체험한 세대들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할 정도로 식량의 절대량을 확보할 수 없는 대위기였다. 이 시기를 계기로 흰쌀밥 중독일 정도로 전국 어디를 가나 어느 때나 100%가 흰쌀밥이다. 이는 배고팠던 시기에 잡곡밥에 싫증이 나고 동경하던 것이 흰쌀밥 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경제발전과 신세대들의 서구화 식생활의 선호로 급격한 변화를 가져와 빵식이 많아져서 쌀이 남아돌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의 불고기와 김치도 대단한 붐이다. 고추는 맵고 마늘은 냄새가 심하다고 경원하던 것인데 요즘은 한국인보다 더 잘 먹게 되어 그 변화에 오히려 놀랄 정도이다.Ⅲ.일본음식의 특징1.일본음식의 일반적인 특징일본음식은 눈과 입으로 먹는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각적인 면을 중시한다. 음식의 종류나 계절에 따라 도자기, 칠기, 죽 제품, 유리 제품 등을 조화시킴으로써 음식의 공간적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다. 또한 그릇과 음식의 균형에 유의하여 큰 그릇에 너무 조금 담거나 작은 그릇에 소복이 담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그릇끼리의 색채와 모양을 고려하여 빨강과 파랑, 흰색과 검은색 등을 배색한다. 일본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대신 콩 소비 중심의 독특한 식생활 문화가 정착하였다. 일본의 음식문화는 생선과 채소를 주로 쓰면서 발전해 왔는데, 일본 음식문화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식과 부식이 나누어져 있고, 주식으로 쌀밥을 먹는다.▶ 콩(대두)제품인 두부ㆍ유부ㆍ미소ㆍ간장ㆍ나토 등을 많이 활용한다.▶ 계절적인 요리를 매우 중요시한다.▶ 재료의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맛을 살려서 조리한다.▶ 조미료를 진하게 쓰지 않는다.▶ 식기는 기본적으로 1인분씩 따로 쓰고 소식을 한다.▶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만 쓴다.▶ 메뉴를 짤 때 조리법을 먼저 정하고, 재료나 세부적인 내용을 결정한다.▶ 상차림은 조리법이 서로 다른 음식으로 구성된다.▶ 맑은 국, 날것, 구이 및 조림으로 이루어진 일다. 비스듬히 포를 뜨는 히키츠쿠리(引き作り,引き造り), 다랑어 같이 살이 두꺼운 생선을 써는 카도츠쿠리(角作り), 흰살 생선에 소금을 뿌리고 다시마에 싸서 써는 곤부지메츠쿠리(昆布じめ造り), 준비된 생선을 적당한 크기고 잘라 끓는 물에 넣어 겉만 살짝 데쳐 건진 다음 얼음물에 넣어 식혀 물기를 잘 닦은 다음 사용하는 유비키츠쿠리(湯引き造り), 생선을 썰어 얼음물에 씻어 지방을 뺀 아리이(先い)등이 있다. 일본의 사시미에 대해 한국에서는 '회'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 보자면 사시미와 회는 엄연히 다른 문화를 가진다. 일본의 사시미는 간장으로만 맛의 변화를 주어 생선 자체의 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면, 우리의 생선회는 양념으로 맛을 내는 편이다. 생선회에 초고추장, 마늘, 풋고추, 야채 등을 곁들이는 것은 우리 한국인의 식성에 맞게 변형된 요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흰 생선이 일반적으로 쓰이나, 일본에서는 마구로(참치)와 같은 붉은 생선도 사시미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3)덴푸라(天ぷら)우리나라에서는 '덴푸라'하면 흔히 오뎅이라고 부르는 튀긴 어묵을 말하지만 일본의 덴푸라는 우리와는 달리, 각종 야채나 어패류에 밀가루를 물과 계란으로 갠 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요리를 총칭한다. 이런 차이를 접어두고,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도 그렇거니와 우리도 일본이 덴푸라의 본고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덴푸라는 원래 대육식금지일을 의미하는 '우스템페로스(Os Temperos)'라는 말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 육식금지 기간에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 먹던 음식으로, 일본의 나가사키에 있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전파했다고 한다. 우리는 튀김을 간장에 찍어 먹는 게 거의 전부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우리처럼 튀김요리를 별도로 먹기도 하지만, 우동이나 밥에 얹어서 먹거나 카레등과 같이 다른 요리와 같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긴다.4)돈부리 (どんぶり)돈부리는 흰 밥 위에 각종 수조육류, 어패류, 야채류를 요리해서의상인 기모노를 많이 입는다) 차려입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예를 갖춘 식사를 한다. 이때 첫 행사는 약초로 만든 토소라는 소주를 마시는 것이다. 정처에 이것을 마시면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건강에 좋다고 한다.5)조니(떡국)조니는 여러 가지 채소와 생선을 국물에 넣고 끓인다. 지방마다 넣는 재료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국물에 모두 된장을 넣고, 그 속에 반드시 둥글게 생긴 가가미 모찌가 들어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떡국과 함께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듯이 일본 사람들 또한 조니를 먹어야 비로소 한살 나이를 먹는다며 설날 기분을 낸다.Ⅴ.일본인의 식사예절일본은 식사예절이 어느 나라보다도 엄격하고 복잡하다.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어야 한다. 식사 전반에 걸쳐 자세를 바르게 취하도록 하고 음식 먹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평상시에도 다음과 같은 예절을 지켜야 한다. 뚜껑이 있는 경우에는 밥그릇, 국그릇, 조림 그릇 뚜껑의 순으로 벗기는데 모든 상의 왼쪽에 있는 것은 왼손으로 뚜껑을 쥐고 오른손을 대어 물기가 떨어지지 않게 위로 향하여 상 왼쪽에 바닥에 놓는다. 또 오른쪽의 것은 오른손으로 뚜껑을 쥐고 왼손을 대고 상 오른쪽 바닥에 놓는다. 같은 쪽의 뚜껑이 있을 경우에는 큰 것을 밑에 놓고 그 위에 다른 것은 겹쳐 놓는다. 이렇게 뚜껑이 있는 것은 전부 벗기고 상위의 음식을 눈으로 감상한다.1.젓가락젠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상차림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젓가락만으로 먹는다. 젓가락으로 먹기 불편한 닭고기, 게, 죽, 오므라이스, 카레 볶음밥 등은 손이나 숟가락으로 먹어도 된다. 흔히 젓가락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손에 쥐는 쪽이 아래쪽보다 굵어서 사용하기 쉽다. 가정에서는 대개 검정색은 아버지용이고 빨간색은 엄마용 이란씩으로 개인젓가락을 정해두고 사용하고 있다. 손님을 대접할 때는 1회용 나무젓가락을 내놓는 것이 보통이다. 1회용이므로 청결할 뿐만 아니라 설거지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있다.
    자연과학| 2004.12.31| 12페이지| 1,500원| 조회(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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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사] 서양 문물의 수용과 변화
    서양 문물의 수용과 변화 / 차 례{Ⅰ. 서구문물 도입의 배경 ------------------11. 근세 서양 문물의 수용----------------12. 개항과 주요사건에 따른 서양문물의 수용-23. 서양문물의 도입 조선의 노력과 근대 시설-4Ⅱ. 도입된 주요 서구 문물들---------------51. 철 도 ---------------------------52. 전 차 ------------------------73. 전 기 및 전 등-------------------94. 전 화 ---------------------------115. 기 타 (성냥, 유리) ----------------18Ⅲ. 서구문물 도입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결론-21Ⅳ. 참고문헌 ---------------------------23. 서구문물의 도입의 배경(1) 근세 서구 문물의 수용1) 조선후기 과학기술의 발달배경=> 16세기 초엽에 서양인들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진출하게 되자 조선왕조에도 서양의 존재가 알려지고, 국가에서 부국강병을 위하여 전통적 과학기술+서양의 과학기술 장려함.2) 서학의 전래=> 선조말에서 광해군 초에 명나라를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서 서양문물과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관계 서적과 천주교 교리서 등이 들어왔는데, 이를 서학이라고 함. 서학은 처음에는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서양학문의 일부로써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음.3) 서양문물의 전래=>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이 중국의 북경에 머물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전래16세기 초 : 곤여만국전도, 천주실의 등이 들어와서 일부 식자층의 의식확대에 영향을 주었음.1630년도 :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만국전도, 직방외기, 홍이포제본, 서 양국풍속도등 서적과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가져와서 서양문물 을 접하게 되었음병자호란 이후 :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는 천구의와 천문서등 각종 서적 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 등과 만나 서양문화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돌아옴4쟁시 군사적 목적)- 전 차 : 한성 전기 회사 설립, 서대문에서 청량리 까지 가설의료 시설=> 지석영 -종두법 연구, 보급, 광혜원. 광제원과 대한의원. 세브란스 병원건 축=> 독립문, 덕수궁 석조전(르네상스식), 명동 성당(중세 고딕식)영 향=> 문호개방 이후로 각 분야에 걸쳐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어 민중들의 사회, 경제 적 생활 개선에 이바지 하였음. 그러나 이런한 문명시설은 대부분이 외세의 이 권 또는 침략 목적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입된 주요 서구 문물들1. 철도* 철도의 발명(1) 철도의 기원1) 원시철도의 기원- 고대문명부터 소, 말 등을 이용하여 마차를 끌게 하여 사람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것으로부터 도로가 필요하게 되었고, 특히 서양의 로마제국은 영토확장에 따라 많은 도로를 건설함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도로교통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BC 312년에 개통한 로마 카푸아( Rome Capua)간 연장 230km의 아피안 도로는 현재의 지방도에 버금가는 훌륭한 포장된 고속도로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마차문명이 발달되어 국가 간 교역의 통로로, 때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용도로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광산에서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광석을 운반하였는데, 중량화물을 실은 마차가 통과하면서 도로를 파손시킴으로 화물운송이 불편하게되어, 주행로에 유도통로인 널빤지를 깔게된 것이 원시철도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2) 차륜의 발달- 6세기경 독일 광산에서는 마차가 유도통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바퀴에 간단한 윤연 즉 후랜지(Wheel Flange)를 붙이게 되었으며, 17세기 영국의 탄광에서는 목재레일위로 말이 끄는 석탄 차를 개발하여 이용하였고, 목재차륜은 목재레일에 의해 후랜지 부분이 손상이 자주 발생되어 철제품의 차륜을 발명하게된 계기가 되었다.3) 레일의 발달- 철제차륜에 의해 이번에는 목재레일이 훼손되어 해결방안으로 철제레일 이 고안되었다.- 최초에는 목재레일 대신에 봉상형 가 전차가 오면 손을 들어서 탔고, 내릴 승객은 미리 운전사나 차장에게 말하여 편리한 곳에서 하차할 수 있게 했다. 전차의 내부에는 남녀의 좌석이 각각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관습으로 미루어볼 때 자연발생적으로 자리를 따로 하였을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가 있다.전차에 대한 인기가 높자 한성전기는 단체 관광용 전차도 운행하였으며, 그해 12월 21일에는 용산, 즉 지금의 원효로까지 선로(첫 선로는 서울역 뒷편의 서계동과 청파동으로 연결)를 연장하여 개통하고 화물전용전차를 운행했다.원효로는 당시 용산이라고 하였는데, 이 곳에는 경인철도가 개통하기 전에는 물론이고 구 뒤에도 전국 제1의 강항(江港)이 있어 한강 상류와 하류에서 각처의 농,임,해산물 등이 집산하는 서울의 출입구였다. 모여드는 이들 화물을 운송하는 수단으로 화물열차를 운행해 큰 재미를 본 것이다.전차의 궤도는 지난 60년대까지 있었던처럼 거리의 중앙이 아닌 보도쪽에 부설되었다. 그리고 시내의 4대문 좌우에는 성벽이 있기 때문에 전차는 남대문과 동대문의 누문 안을 동행하였다. 특히 남대문은 원래 사람과 말의 교통량이 폭주했던 곳인 데 그 좁은 문안에 전차가 달리고, 1905년부터는 경부철도가 개통되어 많은 철도승객까지 남대문을 통하여 입성하였으므로 큰 혼잡을 이루었다.그래서 1907년에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와 군부의 대신으로 성벽처리위원회를 구성, 남대문 바로 서납쪽에 있던 남지(南池)를 메우고 대문은 그대로 남겨둔 채 좌우의 성벽을 헐어 폭 8간(間)의 새 길을 내어 전차길을 마련했다. 전차가 서울시내에 운행되면서 사람과의 접촉사고다 잦아 그 때마다 시민들의 습격과 방화로 전차는 빈번이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전차가 개통되어 시민에게 공개된지 엿새만인 5월 26일 동대문에서 서대문 쪽으로 달리던 전차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선로를 건너던 5~6세의 어린이를 치어 죽게 하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고자 했다. 이를 본 군중은 격분하여 전차의 진행을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전기와 더불어 전차가 도입되면서 대중교통의 혁명이 시작되었고, 전등의 도입으로 더 이상 촛불이나 등잔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순수하게 처음 궁중에 외교사절에 의해 도입될 때는 조선의 발전을 한 단계 가속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후에, 일제에게 전시사업의 권한을 빼앗기므로써오히려 국가의 식민화를 가속하고 대륙침략을 위한 일본의 발판으로 이용된 점이 많이 아쉬웠다.4. 전화* 전화의 발명1861년 최초의 발명가 : 이탈리아 사람인 안토니오 메우치임.(필립라이스라는 설도있고..분분.) 1861년전후. 특허를 내러 갔는데, 특허를 내려면 250달러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메우치의 집은 가난해서 250달러를 못 내고, 임시특허만 냈는데 벨이 먼저 특허를 내어버림.결국, 법정에서 메우치가 유리하게 됐지만, 재판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에 갑자기 죽어버림.그래서, 결국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는 그레이엄 벨로 기록된 것. (추측)*. 전화의 도입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1882년 3월말경이었다. 천진 남국 전기창에서 양전기원리를 학습한 상운이 예상 밖으로 빨리 기술을 습득하여 불과 수개월 안에 교육을 마치고 귀국할 때 갖고 온 전기기기 가운데 덕진풍 2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전종2개, 전선 10장, 전융동사 3방은 물론, 전상 · 전표 · 부전 등의 용품도 전화가설 용품임은 거의 분명하다. 상운은 이들 전화기기를 배에 싣고 3월 22일 천진을 출발하여 영구를 거쳐 인천에 들어 온 듯하니 전화기의 도래 시기를 1882년 3월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전화기에 대한 관심 및 사용전화기가 들어 온 후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어 이를 밝힐 수는 없으나, 4월 초순에는 국왕 이하 중신의 관심 아래 나름대로의 조작 실연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내릴 수 있겠다. 더욱이 이홍장이 상운을 조기에 졸업시켜 귀국케 하면서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영선사 김윤식에게 부탁하였고, 김윤식도 이에 규례를 승낙한다면 전화사업의 개설을 허락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일본측은 전화요금의 제정과 분쟁 해결방도 등에 불리한 점이 있음을 알면서도 4월 29일자로 그 규례를 수락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우리 정부보다 앞서 그들의 전화사업을 개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취해졌던 것이다.그 규례는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전화사업 개시에 따른 여러 가지의 특권을 요구한 것이었는데, 5월 6일에 이르러 신동공사는 「제물포 외국조계 신동공사에서 대한제국 전화소를 준허하여 해조계내에 전화를 설치하는 조약서」라는 12조로 된 초안을 제시하였다. 통신원은 인천외국조계에 전화를 실시하려면 신동공사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으나, 그들의 요구초안에는 이미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전화규칙」등에 위배되는 사항이 많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고 의정대신에게 품의하였다. 동월 17일 의정부는 이에 대해 통신원과 외부에서 상의, 처리하라고 회답하였는데, 외부에서는 21일에 통신원에 대해 신동공사의 초안 중 우리「전화규칙」과 어느 항이 저촉되는가를 밝혀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공사가 한국통신원에서 상기 규례를 승낙하지 않는 이류는 즉시 전화를 가설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국에 보고한 바가 있었다. 인천시내의 교환전화는 그 후 약 1년이 지난 1903년 2월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전화사업 실시에 따른 한성전기회사와의 마찰전화사업이 시작된 다음해인 1903년 2월에 이르러 미국공사는 한국 정부가 한성부내에서 전화를 가설함은 1898년 1월 18일 성립된 한성전기회사와의 계약 제11조 '농상공부는 앞으로 35년간 한성부내의 전기 · 철도 · 전기등 및 전화기 부설권을 한성전기회사에 허여한다'고 한 것에 위배된다고 항의하였다. 외아문은 통신원과 농상공부에 대해 그 사실 여부를 조회하였는데, 통신원은 2월 19일에 '어떠한 사업 권리를 막론하고 외국공사에 인허하는 것과 본국 정부에서 자행하는 것과는 처음부터 판이하게 구별된다. 지금 통신원이 행하는 전화사업은 본국 정부의 있다.
    인문/어학| 2004.12.11| 24페이지| 9,800원| 조회(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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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라쿠스] 그라쿠스
    Ⅰ. 서 론기원전 146년은 로마 공화국이 지중해 세계 제국을 건설한 해였다. 서지중해의 카르타고와 동지중해의 마케도니아가 멸망한 뒤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코린트 중심의 아카이아 연맹이 해체되어 옛 그리스 지역이 로마에 복속되어 지중해 전역에 걸쳐 로마의 주요 경쟁 국가 내지 세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후 로마는 사화 전체가 혼미한 상태인체 대제국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이후 난세를 해쳐나갈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라쿠스 형제는 그중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공화정이 가진 제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적극적 움직임인 개혁을 시도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겠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BC 163~BC133)기원전 133년의 호민관으로 농지법을 통한 개혁을 시도하였고, 아홉 살 아래인 동생 가이우스(BC 154~BC121)는 이로부터 10년 후인 기원전 123년과 122년의 호민관으로 곡물법을 통한 개혁을 실시, 포에니 전쟁이후에 나타난 로마 공화정의 제반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려는 개혁 정책을 수행하다 그들의 수많은 추종자들과 더불어 원로원 정적과 반대파에 의하여 희생된 유명한 청년정치가들이었다.Ⅱ. 본 론(1). 그라쿠스 형제와 시대 배경① 사회적 변화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00년을 경계로 하여 로마에는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원로원 계급의 폐쇄화 및 권력의 집중 현상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원로원은 외교권, 인사권, 제정권, 사법권, 군사권 등 엄청난 권력을 소유할 만큼 커졌다. 또한 징집 병력의 부족과 그에 따라 군대가 질적으로 저하되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자체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감안한 자격기준을 낮추었지만 기원전 133년경에는 거의 한 세기를 두고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수 증가와 경제상의 변화로 인한 소규모 자영농 계층의 몰락이 함께 작용하여 군단에 징집할 다수의 병력 자원이 위험 수위까지 감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징집병력부족 현상을 만회결과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코린트 등의 정복으로 유입된 대규모의 자본, 토지, 노예, 시장 등은 노예에 의한 라티푼디아의 경영이라는 농업의 주류를 대규모의 운영으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가격과 자본, 노동력 경쟁에서 뒤진 소규모 자작농들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 것이다. 또한 기원전 218년인 ‘클라우디우스 법’은 원로원 위원들이 상행위를 위해 선박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에 원로원 귀족들을 중심으로한 부유한 유력자들은 지속적인 수입을 얻기 위하여 부의 많은 부분을 토지에 추자하게 된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해외 군대 복무를 담당하고 있는 소농적 자영농들로써는 당시 로마 내에 비옥한 토지가 충분하지 않았던바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ⅱ) 곡물의 위기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급속한 해외 확장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변화들은 여러 집단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들과 불만을 일으켰다. 원로원은 또다시 기득권이 되어버렸으며 이러한 사회적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로마는 곡물 위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것은 ‘농지 위기’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도시 위기’였다. 기원전 138년 이후부터는 곡가는 기원전 140년에 비해 이미 5배로 뛰어오른 상태였다. 시실리의 노예전쟁으로 말미암아 티베리우스 시대에 곡물 사정은 더욱더 악화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곡물 피해는 가이우스 시대를 줄곧 괴롭혔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원로원 내의 개혁을 열망하는 소위 ‘클라디우스-폴리비우스 집단’의 정책 수립자로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가이우스는 ‘곡물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갈수록 격렬해진 정치적 격변과 결국 그로 인해 로마 공화정의 몰락이 초래되는 세기(世紀)의 문을 열었다.(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lex agraria)과 개혁정치① 티베리우스의 농지법기원전 133년 이후의 1세기 동안 로마 공화정은 위기와 내란의 격동 속에서 붕괴되어 갔고,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제안하고 강력히 실행하려 하였다. 티베리득이 인정되지 않았다. 국가는 언제든지 공유지를 선점자들에게서 몰수할 수가 있었고, 공유지 점유자들은 국가에서 정한 이용료를 조세로서 국가에 납부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라쿠스가 농지법을 제정하여 법정선 초과의 공유지를 몰수토록 한 조처는 전혀 국법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었다.그렇다면 티베리우스는 어떤 의도에서 농지법을 제정하여 농지 개혁을 하려 했을까. 그라쿠스는 중소 자영농민층을 재육성하여 전사의 수를 증가시켜 군사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피폐된 농촌 경제를 복구하려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새로 정착한 농민들로 하여금 곡물을 경작하게 하여 그것을 도시 로마에 공급하고 대도시의 긴박한 곡물 위기를 항구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데 있었다.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또한 동생 가이우스와 그의 장인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로 구성된 3인 위원회 설치를 민회에 요청했는데 이 위원회는 공유지와 사유지를 판정하고, 법이 허용한 보유한도를 초과한 모든 공유지를 회수하며 그것을 새로운 정착자들에게 배분하도록 명령권이 딸린 완전한 사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이 농지분배에 필요한 자급지원을 하지 않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평민회를 통해 마침 페르가문 왕국의 아탈루스 3세(AttalusⅢ)가 왕국을 로마에 유증함으로써 생긴 수익의 일부를 농지분배에 필요한 자금으로 전용하기로 결정 하였다. 이것 역시 대외정책과 재정에 대한 원로원의 통제권에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결국 그의 농지 개혁은 로마의 국론을 분열시켰고, 급기야 로마 원로원과 인민을 두 부분으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되었다. 양대 세력이 격돌한 결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 일부 추종자들은 살해되었고, 이로써 로마 사상 최초로 호민관의 신성 불가침성은 피로 물들게 되었다.② 티베리우스의 로마시 곡물수습 계획기원전 130년대 중반의 로마는 장기간의 식민사업의 중단, 토목 건축사업의 부재로 인한 경제 불황의 도래와 이로 인한 심각한 실업, 그리고 사회정지척 불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티베 지역의 로마 농지’ 중 법으로 규정한 점유 상한선을 넘는 공유지를 몰수하여 여기에 옛 농민층을 재정착시키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에 소농민층을 재육성하고 , 그들로 하여금 다시 밀을 생산 ,로마시의 인구를 부양하게 함으로써 로마시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곡물 위기의 불안 요소를 점차 항구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책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같은 그의 정치적 모험은 곧 보수 집단인 권력 부유층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것이었고, 개혁과 보수 양대 세력의 첨예한 대립과 충돌 끝에 그는 ‘신성불가침’ 인 호민관으로서는 공화정 사상 최초로 정치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라쿠스의 농지법 제정의 근본 목적은 ‘로마시 곡물 공급 가능 지역의 로마 농지’에 옛 농민층을 재정착 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로마시의 곡물위기를 점차 항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그의 원래의 정책 의도였다. 물론, 그의 농지분배는 도시 실업자를 농촌으로 되돌려 보내기 운동으로 로마시의 곡물 수요를 훨씬 줄일 것이고, 동시에 건전한 농민층을 재건함으로써 용감한 ‘전사’의 수적 증가를 통한 군사력 강화라는 목적도 노렸을 것이다.③ 티베리우스의 개혁정치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체제 내의 개혁이라는 온건 노선에서 출발했으나 농지법 제정 자체가 불가능해지자 동료 호민관 임기가 끝나도 농지분배 3인 위원회의 1인으로서 얼마든지 농지분배를 할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극적인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차 호민관의 신성 불가침성으로 자기 몸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호민관의 연임을 기도하다가 그의 정적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친구들과 원로원 내의 개혁지지 귀족들까지도 그가 폭도들의 세력을 배경으로 참주가 되려한다 하여 그를 버리거나 수수방관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것은 공화정 수립 이래 왕정이 나쁘다는 전통적인 정치의식에 혼합정체라는 장자 폭도들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는 참주에 의해 깨질 것이라는 폴리비우스의 정치사상이 합해져 작용했을 것이다.당시 혼합정체의티베리우스의 개혁은 더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2)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된 뒤, 159년이래 줄곧 감소 추세에 있던 병역 해당자가 이때를 고비로 하여 상승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가 살해된 기원전 133년 이후의 몇 년 동안은 로마가 평화와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원주민 반란과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도 완전히 진압되었다.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이후, 로마 정부는 노예의 처우 개선을 규정한 법률을 성립시켰다. 노예 반란이 가혹한 대우에 분노한 노예들이 주인을 죽인 것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주가 평온해져 필요한 군단 수도 줄어들었다. 로마에 평화가 돌아온 덕분에 로마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를 시정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기원전 124년 여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최하위로 당선되었다. 12월 10일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가이우스는 법안을 잇따라 제출했다. 우선 형 티베리우스의 유작인 ‘농지법'의 재승인이다. 농지개혁의 실행기관인 ‘3인 위원회'도 되살렸다. 그는 자작농 장려책만이 아니라 복지정책도 생각했다. ’곡물법'이 그것이다.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그것을 시가보다 싼 값으로 빈민들에게 공급하는 법안이다.또한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병역에 종사할 수 있는 재산 하한선이 1천 500 아세로 내려갔다. 그래서 실업자는 아니지만 빈부격차 확대에 희생되어 병역 의무를 짊어지게 된 시민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그 부담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병역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아무리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때라도 17세 미만의 남자, 즉 미성년자를 징집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군복무 중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 및 식량 등의 물자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했다.실업자 대책이 자작농 장려만으로는 불충하다고 생각한 가이.
    인문/어학| 2004.12.08| 5페이지| 1,000원| 조회(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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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어] 사회주의내의 러시아 연극 평가A+최고예요
    사회주의내의 러시아연극-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교과명:학과:학번학년:목차1. 서론 ........... 3p2.혁명연극 ..... 3p3.정치극으로서의 연극 ................ 5p4.스탈린 사후 ................ 6p5.결론 .............. 8p1.서론19세기에서 20세기초 러시아에 민중적 자각이 움트기 시작했던 시기, 이러한 시기 속에서 러시아가 그 동안 걸어왔던 역사의 가장 큰 흐름은 전제, 농노제에 대한 비판의식 속에서 싹튼 민중성이 투쟁 속에서 활짝 피어나고 또 이민중성의 표현으로 혁명운동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성장한 프롤레탈리아 계급에 의한 변화는 정치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서도 뚜렷이 보여주었다. 러시아는 서구 유럽과 같은 르네상스를 거치지 못했고, 러시아 자체의 특수한 성격에 비추어보아 그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남달랐을 것이라 짐작된다. 수많은 고난과 투쟁 속에서 그들이 쟁취한 사회주의는 문화는 대중성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그들 프롤레탈리아의 생활 속에서 깊숙이 침투되어 갔다.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연극도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기능을 통해서 연극은 정치적 기능을 떠맡는다. 그러므로 연극은 사회의 모든 문제를 비추어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성찰하는 토론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연극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기존질서를 지지하던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던 간에 일방적인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면 누구에게도 동감을 얻다. 이 연극의 활용은 도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닌 선동선전 극단들이 주로 문맹상태의 국민들에게 공산주의 이념들을 공급하면서 농촌지역을 순회하였다. 러시아의 마이어 홀드는 연극을 대중의 연극으로 정착시키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연극 예술 자체보다는 러시아 국민들 속에 보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썼고, 연극예술 자체는 오로지 늦은 단계에 서구로부터 채용되었을 뿐으로서 유독 재산을 소유한 계층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던 연극을 다시금 새로운 연극으로 승화시켰던 인물이다.박탄크르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러 스튜디오와 부속기관의 책임자였는데, 그 역시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시대에 새로운 예술적 이념들을 발전시켰다. 막심 고리끼는 그의 친구인 스타니슬랍스키와 박탄고프에게 즉흥 연극 극장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박탁고프는 이러한 제안을 실천해 볼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즉흥은 혁명과정과 이후에 특히 성과 있는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마이어홀드의 극단적인 대중운동으로 옮아갔다.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그 자신의 고유한 접근방식을 개발했고 그의 즉흥적인 제작들의 목적은 10월 연극과 조화를 이루면서 더 이상 무정부주의가 아닌 당대의 러시아의 생활 조건들과 강하게 대조를 이루는 자유, 색채 그리고 음악성이 가득찬 연극이었다. 그의 공연들은 일반 관중들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찬양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유명한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한 영향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러시아가 가지고 있었던 상황국면에서 전국민이 지녔던 희망들은 연극적인 상상으로 표현했다는데 이유가 있었다. 모스크바 연극활동의 가장 엄청난 사례는 프롤레트굴트 극장이었는데 , 여기에서 존경할만한 고전들이 체조와 광대 놀이의 모습을 갗춘채 공연되었다. 그후에 10월의 연극의 정신, 대중의 역동과 열기를 스크린에 다시 옮겨 놓았고, 이것은 영화예술 자체의 위대한 개혁자가 되었다. 러시아의 연극이 비록 처음에는 서구에서 그냥 고급문화는 순수한 각성과 기쁨에 바탕을 둔 본래의 연극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예술적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930년대를 거쳐가면서 희곡과 공연에 대한 금지가 모든 극장에서 더욱 증대 되었다.이제까지의 제한되었던 검열이 이제는 더욱 심해져서, 만일 어떤 연극이 형식주의라고 불리우게 되면 그것은 곧 숙명적인 파문울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명한 극장들이 폐쇠당해야만 했다. 그 중에는 모스크바 예술극장, 스타니슬랍스키재단, 사회주의 극장, 모든 아방가르드 및 실험 스튜디오들, 그리고 10월 연극의 보루 마이어 홀드극장등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적인 정치는 수많은 소비에트 연극의 엘리트들마저 숙청했다.연극 활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제는 중앙과 지방 행정당국에 걸쳐진 검열 기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간부들이 기조를 마련하는 프로그램 위원회들, 자문회의와 관객 총회로부터 종종 연출가나 배우보다 무대나 청소부가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스태프미팅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당에 의해 통제된다. 극장 경영이나 수석 드라마투르그들은 자연히 예술적인 고려가 아니라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레파토리 제작과 공연의 양식자체들에까지 통제가 연장되면, 당간부들이 임석한 후에야 일반에게 공연이 공개되었다.레파토리와 정치적 노선을 결정된 연극들은 현대적인 적합성을 지닌 희곡들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택의 기준은 희곡의 질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설득성, 현재 목표의 성취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소비에트 극장들은 급속하게 만들어진 천박한 희곡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완전히 주제에 따라서 선택될 뿐개별적 취급과 양식을 위해서 선택되지는 않았다. 이 희곡들의 유일한 목적은 서방을 모독하고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러시아 전통을 찬양하고, 관객들에게 공산주의를 교육하고, 생산을 부추기며 소비에트의 생활을 멋진 생활들로 색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이 모든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켰다.또한 교조적인 연극에 이 처음부터 그 방향선을 제시했다.가능한 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어린이, 붉은 군대, 농촌주민과 산업 노동자들을 위해 각각의 극장이 설립되었다.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전통적인 극장 관객에 속하지 않는 사회 집단들에게 예술을 실어다 주는 생각은 원천적으로 선호할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목표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았다. 그들은 오로지 인위적인 세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은 단지 관객 참여와 반응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조직된 관극을 선호한다. 연극클럽이 조직되어 공연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 메시기를 토론할 뿐 아니라, 아마추어 극장에 참여하도록 격려를 받는다. 연극은 대중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기관에서 배우들과 연출가들에게 당조직과 개별극장안의 노동 조합 지도자를 통해서 직접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당노선에의 예술을 확보하기 위한 다른 효과적인 도구들은 공식적인 통제아래 놓인 전문협회들과 고용 기관들이었다. 공연된 모든 희곡은 정치 교육과 연결되는데, 그 까닭은 모든 공연의 사회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측면들이 이에 포함되는 배우들의 준비함으로써, 교육적인 측면이 보여지는 것이다.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지루하고 획일적인 연극으로서, 그것이 예술적인 능력은 정치적 교화를 충족시키기에도 적합하지가 않은 정도였다.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스탈린의 정책에서 다시 혁명연극을 부활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4.스탈린 사후연극 활동의 통제는 숙청 또는 추방되었던 혁명적 예술가들의 복권과 적어도 겉으로나마 스탈린의 죽음으로 그와 결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흐르시초프는 예술은 자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다른 후견 체제 아래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예술적인 메시지와 당정책적 교조간의 잠재적인 갈등은 진정한 예술의 자율성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흐르시초프는 스탈린주의의 예술독재의 끔찍한 결과들을 너무나 대의 사건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 연극은 연극사에서 역사적으로 완전했고, 다시 복귀 불가능한 시대였다. 소비에트 예술가들은 온전히 스탈린주의를 정산하고 교조의 횡포를 깨뜨리기 위해 1950년대에 걸쳐 영웅적 과거와의 연대를 선언하였다. 그 밖에도 그들은 1920년대의 엑스터시적 분위기와 정치적 열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혁명 연극의 원천들은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조차도 쓸모가 없었던 바, 이 세대에 가장 절박한 것은 사상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해방동안 소련과 그 밖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 안에서 생산된 모든 작품들은 정서적이기보다 비판적이었고, 대중의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관심들을 묘사했다고 평가된다.소비에트 연극에서 식별될 수 있는 낙후성에는, 한 두 개의 매력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시대 동안 이루어졌던 러시아 전통과의 단절이 당의 정치적 통제보다. 더 크게 작용하였다. 당간부, 예술가, 관객 할 것 없이 전체 세 대가 러시아 예술의 주요 원천과 주류로부터 멀리 분리되었다. 이렇듯 소비에트의 연극에서의 단절성은 스탈린 치하에서의 자라난 기술 관료들의 예술에 대한 무지와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소비에트 예술가들의 고립,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반복으로 길들여진 시민들의 인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옛 명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헛된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관심이 국가 변두리 지역에 쏠린다. 그것은 우선 그곳에서는 모스크바로부터 지시들이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졌고, 둘째로는 관객들이 인습에 덜 길들여져 있고, 마지막으로는 독립적이고 부분적으로 이국적인 전통에 힘입어 다른 실험극들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20년대의 잔해를 가지고 있고, 예로부터 전통을 이어 받은 몇몇의 제작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일부 젊은이들의 소비에트 연극의 재정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70년대 초를 기.
    인문/어학| 2004.12.08| 8페이지| 1,000원| 조회(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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