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한국의 많은 비평가들은 그동안 이청준이라는 한 대형 작가의 소설 쓰기의 방식과 그 주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많은 시선을 집중시키게 하였는지 그 원인을 따져볼 때,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다양한 표정의 세계와 탐구적인 정신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하겠다.이청준의 작품 속에는 6.25사변이라는 충격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활 쏘는 사람이나 매잡이나 항아리 굽는 사람과 같은 장인의 이야기도 있고, 오늘날의 단순한 월급쟁이의 이야기도 있으며, 소설을 쓰거나 잡지사 기자를 하는 지식인의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소재의 다양성은 그의 소설을 다채롭게 하였으며 또한 필연적으로 주제의 다양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주제의 다양성은 곧 각각의 소설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다양하고, 따라서 그 추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그래서 삶이나 문학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이러한 다양성은 이청준이라는 작가 자신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나 자신의 삶을 보는 관점의 다양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작가 자신이 세계나 삶에 대해서 기성의 관념에 빠져버린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자신만의 관념을 추구하고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현재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는 이청준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 몇 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생애이청준은 1939년 8월 9일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마을은 여수 행 푸른 뱃길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는 수려한 풍광의산이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그의 가족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자신을 포함한 5남 3녀의 형제가 있다. 그가 여섯 살 때 어느 봄날 새벽 세 살짜리 막내가 홍역으로 죽고, 반년 뒤 맏형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맏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부친이 타계하는데 이와 같은 가족의 잇따른 죽음이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뒤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해 입학 전부터 한글을 깨치기 시작한」을 시작으로 하여 1965년에 「병신과 머저리」, 「굴레」(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등을 60년대에 발표한다. 이들의 초기작에서 현실과 관념, 허무와 의지 등의 대응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였다. 경험적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그의 진지한 작가의식이 때로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거나 지적 우월감으로 느껴지기도 하였다.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들어보면 아시겠지만」(1972), 「떠도는 말들」(1973), 「이어도」(1974), 「낮은 목소리로」(1974),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서편제」(1976), 「불을 머금은 항아리」(1977), 「잔인한 도시」(1978), 「살아있는 늪」(1979) 등의 무게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이청준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보다 궁극적인 삶의 본질적 양상에 대한 소설적 규명에 나서게 된다.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8) 등에서 그는 인간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의미에 집착을 보인다. 인간존재와 거기에 대응하는 예술 형식의 완결성에 대한 추구라는 새로운 테마는 예술에 대한 그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이청준의 작품은 이밖에도 「별을 보여 드립니다」(1971), 「가면의 꿈」(1975), 「당신들의 천국」(1976), 「예언자」(1977), 「남도 사람」(1978), 「춤추는 사제」(1979), 「흐르지 않는 강」(1979), 「낮은데로 임하소서」(1981), 「따뜻한 강」(1986), 「아리아리 강강」(1988), 「자유의 문」(1989) 등 여러 편의 소설집과 수필집 「작가의 작은 손」을 비롯해, 희곡 「제3의 신」(1982) 등이 있다.Ⅲ. 작품세계이청준은 1965년 작품 퇴원이 사상계 제7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한 후 현재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청준은 데뷔시절부터 이미 많은 논자들의분류할 수 있으며 작품론은 내용과 형식면으로 나눌 수 있다.작품에 관한 내용 연구를 살펴보면, 대부분 주제의 다양성으로 인한 인물과 소재의 다양성에 입각하여 그 세부적 내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 주를 이룬다. 대체적으로 시대적 억압 및 모순된 현실과 대립하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의지는 보통 자신과의 싸움을 통한 자기 구제의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이청준 소설 속에는 현실과 다른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지적, 이청준 소설의 특징은 ‘비일상성’에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환경 속의 작중인물들은 대부분 과거와 단절되어 있거나 특이한 병적 징후룰 지니고 있거나 혹은 그 신분에 있어 불투명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들이 처한 억압적 상황 속에서의 등장인물과 현실의 부조화는 필연적이거니와 이에 따라 그 극복 의지로서의 정체성 찾기는 소설의 흐름을 신존 문제와 심리주의 차원으로 유도해 가고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청준 소설의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과거의 정신적 외상이라는 원체험 속에서 현실과 대립하고 있으며 이 극복과정 중에 요구되는 것이 반성적 성찰임을 지적한다. 이청준 소설의 결말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그 주된 논의는 복수, 화해, 대립, 회피, 패배 등이다. 이외에도 고향체험 소설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고향의 의미를 자아탐색이라는 관념성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의 틀과 소설의 결말 부분과 연결 지어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작품에 관한 형식 연구로는 양식 면에서 액자양식을 언급하고 있고 기술방식 면에서는 추리소설적 기술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액자양식은 논자에 따라 격자양식, 중첩구조, 중층구조, 이원적 구조 등으로 불려진다. 이러한 양식이 요구된 데에는 이청준이 끝없는 자기 부정과 치열한 자기 모색 과정으로서의 글쓰기에 충실한 것에서 찾고 있다. 즉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통해 화자의 객관화를 유도해냄으로써 이청준 소설의 본 원류인 반성적 성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식을 지니고이다.박준의 본명은 박준일로서 1~2년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소설가이다. 이튿날 밤 다시 하숙집을 찾아온 박준을 정신병원에 데려다 주고 난 나는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러다가 박준이 쓴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그리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중편소설 등을 읽게 된다. 그 소설 중에 박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짓불'의 실체가 나타난다.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가 고향인 박준은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가을, 밤중에 밀어닥쳐 전짓불을 들이대고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묻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 대해서 그토록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자초지종을 깨달은 나는 김박사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환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믿는 김박사는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김박사는 박준의 병실불을 끄고 전짓불을 들이대는 수단을 택하고 만다. 그날 밤 박준은 병실을 도망쳐 나가버린다. 나는 박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 회의하면서 길을 걷다가 김박사나 내가 박준의 병세 악화에 박차를 가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2) 감상?소문의 벽?에서 ‘박준’은 촉망 받아온 작가이었는데 갑자기 미치광이 행세를 하다 결국에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다. 그리고 잡지사에 투고한 그의 글은 게재되지 않거나 연재되다가 중단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기이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의 소설은 게재되지 않거나 연재되다가도 중단되고 마는 것일까? 그 해답은 그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 행위를 가장 성실한 작가의 자기 진술이라 말하는 ‘박준’의 문학관은 그의 소설과 기이한 행동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작품(소설 속의 소설) 세편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의식과 더불어 이청준의 작가 의식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박준’의 소설은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전짓불 사건」등 모두 세 편이다. 「괴상한 버릇」의 주인공은것을 말해주고 있다.이청준은 이 소설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나는 나의 문학이 그러한 자기 구제의 몸짓에서 시작되었고, 또 계속해서 그것에 많은 노력이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에서 빚어진 어떤 오해나 비난이 따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의 문학 속에 서둘러 흡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 작가가 스스로 붓을 꺾지 않을 만큼은 자기가 작가임을 덜 부끄러워하고, 그러면서 한 시대의 작가로서 자기의 시대를 조금이라고 더 정직하게 살아 낼 수 있기를 원한다면 그는 동시에 그의 문학 안에서 스스로 구원받고자 했던 자기보다 보편적인 자기로 돌아가 그것과 만나지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소박하고 기초적인 문학 윤리에 속한다.』소설 속 ‘박준’의 모습은 이청준의 소설관을 반영한 인물로 글쓰기는 곧 ‘자기 구원의 몸짓’이라는 것이다 이청준은 소설을 통한 소설론으로서 자기반성을 함으로써 그 갈등의 극복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여, 진실 된 삶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자세란, 현실의 간섭 또는 이해관계가 수반되더라도 소설가는, 정직한 자기 진술을 행함으로써 양심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힘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설가의 진실 된 삶의 모습은 자아가 갈등을 극복하려는 한 양식이 된다. 이러한 모습은 「병신과 머저리」에서 보다 구체적이다2. 「병신과 머저리」1). 줄거리아마추어 미술학도인 혜인과 헤어진 후 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윤곽선만을 따놓고 고심한다. 그리고 6·25때 패잔병으로 낙오되었다가 동료를 죽이고 탈출했다는 형의 과거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림을 진전시킬 수 없게 되고 고민만 한다. 형은 외과 의사로 20년간을 지내던 중 열 살짜리 소녀가 수술 중에 죽자 병원 문을 닫는다. 형은 병원 문을 닫은 다음 날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나는 그림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나는 형이 쓰고 있.
周易의 자연관과 인간관『목 차』Ⅰ. 서론 - 자연관과 인간관의 관계1. 동양의 자연관2. 서양의 자연관과 인간관의 변화3.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는 이유4. 易의 種類Ⅱ. 본론 - 周易에서 나타난 自然觀1. 自然의 意義2. 周易의 自然觀 形成의 思想的 背景3. 卦에서의 自然觀4. 易의 自然觀5. 易의 神, 鬼神Ⅲ. 周易에서 나타난 人間觀 Ⅰ: 군자·대인1. 易學에 나타난 人間論2. 역을 배우는 군자와 進德, 修業3. 역학에서 이상적 인간인 대인Ⅳ. 周易에서 나타난 人間觀 Ⅱ: 時·位1. 역학과 知時 識勢2. 時宜가 강조되는 상황3. 正位와 守位Ⅴ. 周易에서 나타난 자연과 인간의 관계Ⅵ. 결론 - 오늘날 주역의 의미Ⅰ. 서론 - 자연관과 인간관의 관계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 인간관과 자연관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모색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였다. 아니 사실상 이것이 각 시대의 철학 그 자체일 것이다. 먼저 동서양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 할 것이다.1.동양의 자연관東洋의 自然觀은 서양과는 달리 큰 變化가 없이 거대한 줄기가 꿰뚫고 있으며 그 외의 가지들이 變化해가면 存續되어 왔다. 그 거대한 줄기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이다. 바로 천지인의 합일이 동양의 자연관의 거대한 줄기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인간을 자연 속에 존재하며 天?地와 더 불어 三才가 되는 高貴한 존재로 본 것이며, 서양과는 달리 자연을 이용하거나 자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인간을 자연에 종속시키거나 자연을 인간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 天地 中의 人間, 天地와 더불어 三才가 되는 인간, 자연과 조화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2. 서양의 자연관과 인간관의 변화서양은 동양과는 거대한 줄기가 꿰뚫고 있기 보다는 다양한 사상들이 바뀌어 가며 지배해왔다. 먼저 고대 그리스인은 자연은 살아있고, 신성은 충만(비종교적 의미)하다고 보았다. 중세 서양은 기독교의 시대였다. 그랬기에 자연과도 신에 기대어 보았다. 중근접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 팔괘에 의해서 이루어진 64괘가 만물에 해당하는 것이다.1)天地定位괘로서는 태泰(?地?天)와 否(?天?地)을 들 수 있다. 모양으로 볼 때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다. 용법으로 본다면 地天의 泰는 天地交가 되어 吉하고, 天地의 否는 不交하여 凶하다. 천지가 만나서 통하는 泰에서 萬物이 興한다 하였으니 天地定位의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中庸에서도 中和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비로소 定位하고 그 안의 만물이 遂育한다고 하였다.)2)雷風相薄相薄은 不相悖또는 相與, 相感으로도 되어 있다. 폭풍은 번개를 동반하고 번개는 폭풍을 수반해야 위엄이 크다. 雷聲霹靂이 없는 폭풍이나 마른 번개는 불길하게 여길 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처럼 兩者는 서로 잘 어울리며 어긋나지 않는다.)雷風相薄의 괘는 恒(??)卦와 益(??) 이다. 두 괘는 모두 매우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항괘는 천지의 도는 恒久不已 라 했고 항구불이의 까닭으로 終則有始를 들고 있다. “해와 달은 天의 法則을 얻어 능히 오래 빛나고, 四季節은 變化하기에 오래 갈 수 있으며 聖人은 그 지키는 道를 오래 견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능히 感化시킨다.” 하였다. 天地가 恒久한 까닭은 天과 地가 相與하여 서로 感應하기 때문이다.3)水火不相射不相射은 相逮로도 표현되며 이는 相濟의 뜻을 지닌다.) 흔히 水火는 相克이라 한다. 그러나 동시에 相對的존재이기도 하다. 괘로는 旣濟(??)와 未濟(??)가 있다. 旣濟는 完成, 未濟는 未完成을 의미하고 旣濟는 모든 爻가 正位이나 未濟는 6爻 모두 否當位이다. 水火의 관계를 잘 드러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4)山澤通氣山의 雨露는 물이 되어 산 아래 연못을 채우고, 연못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다시 雨露 상태로 산에 내려 온갖 초목을 키운다. 卦로는 咸(??)괘와 損(??)괘의 경우이다. 咸은 感應의 괘이다. 천지가 감응하여 만물이 化生하고 지도자가 庶民을 감화시켜 천하가 평화를 누리는 괘이다. 咸이 감응을 뜻한다면 損은 위치의 顚倒로 인하여 서 나오는 군자 개념도 역전과 거의 일치한다. 에서 강조되는 군자는 대부분 진덕 수업에 힘쓰는 인격체이며, 덕을 바탕으로 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權’을 행하는 자이다. 군자가 덕을 닦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인격체라면 역이 본래 복서지서이기 때문에 군자도 복서와 어떤 연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복서란 신명의 상태에 들어가서 신 또는 천지의 ‘命’을 들으려는 행위이다. 천명에 따라 행위하며 길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하다.군자의 성덕론은 복서의 종교적 신성성의 극치와 연결된다. 성덕론이 복서의 공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른바 역을 배우는 군자의 또 다른 과제인 거업이 문제된다. 복서를 통한 受命, 聽命은 본질적으로 행위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논어와 중용의 不器?時中의 군자관은 주역의 趣時의 군자론, ‘无方无體’의 神?易 군자론으로 연결된다. ‘역’은 본질적으로 變易이다. “때에 따라 바뀌어 도를 따라간다.”2) 역을 배우는 군자의 2대 과제인 進德과 居業① 修己를 뜻하는 進德(진덕-덕으로 나아간다.)어떤 경우에도 군자는 崇德 또는 成德에 한시도 소홀할 수 없다. 만일 지위가 주어진다면 그는 마땅히 도를 행하여야 한다. 지위가 주어지지 않아도 학문의 연구와 전수에 더욱 전력해야 한다.그러면 《역》에서 말하는 ‘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덕은 우선 생명 창달과 관계가 있다. 우주 안의 만물이 모두 함께 자라되 서로 해지지 않음, 이것이 바로 천지가 지닌 덕이다. 천지에 의하여 만물이 날로 새로워지며 그 생성이 그치지 않으므로 천지의 덕을 성대한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물의 변화가 그치지 않고 날로 새로워지듯 인간도 나날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그리고 덕은 풍성함과 돈후함을 보여준다. 수고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세우고도 내세우지 않는 ‘勞謙’은 성덕자의 모습인데, 그런 군자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한다. 성덕을 지닌 자는 대자연의 근원적인 힘과 원리 및 변화의 법칙을 안다. 덕행을 쌓은 자는 묵묵하되 만사에 두루 형통하고, 말하지 않아도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 사계절과 더불어 그 질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한다. 선천에서는 하늘이 그를 어기지 않으며, 후천에서는 그가 天時를 받든다. 하늘도 어기지 않는 (존귀한) 존재이니 사람이 어기랴 귀신이 어기랴.이말은 요컨대 대인이란 이미 덕을 이룬는 과정을 거쳐 도의 화신이 되었으며, 도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존재란 뜻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3재가 되는 존재인 것이다.否卦에서도 대인의 처신을 볼 수 있다. 상호간에 교통이 없는 否塞의 상황에서 대인은 굳이 몸을 굽히고 도를 감추어 윗사람에게 순수히 따르지 않고 오직 주어진 상황인 否를 지켜 갈 뿐이다. 이미 위아래가 不交한 상황이므로 굳이 나아가 도를 행하려 해도 유익이 없다. 천지의 비색, 즉 시국의 경색을 타개해 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대인이다.곤경에 처해있을 때의 대인의 모습은 困卦에서 찾을 수 있다. 매우 곤궁한 상황에 처한 까닭에 아무리 떨치고 일어나려 해도 불가능하다. 좋은 말을 하거나 바른 정책을 제시하여도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루기에 이른다. 그러나 몸이 비록 곤궁에 처했더라도 그의 마음을 기쁘다. 樂天安命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剛中하여 도를 잃지 않으므로 비록 생명을 잃더라도 그 뜻을 이룬다.건괘 5장에서 “대인은 …귀신과 협력하여 길흉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내용은 대인은 革卦 九五에서 “대인은 虎變이니 점치지 않아도 믿음이 생긴다.”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대인은 中正의 덕과 존귀한 지위를 지닌 자이며, 자기 자신은 물론 백성들도 새롭게 하는 데에 극치에 이른 존재이다. 대도에 따르고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개혁을 일으킬 때 대인이 개혁의 주체가 되면 만인은 占決에 의하지 않고서도 신뢰를 갖고 그 개혁에 따른다는 뜻이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건괘 5장에서 말하는 대인은 우주론적 차원의 인간, 즉 천어 함께 천하의 일을 도모한다면 천하는 참으로 성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정자는 풀이한다.지금까지 지도력, 지도자가 요청되는 경우와 지도자의 인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들 중에 인격적 지도력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그것은 筮術易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다 점서로써 각자의 의심을 결단하고, 천신의 뜻을 헤아려 행동한 까닭에 지도자가 덜 필요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의리를 탐구하고 덕을 이루어 至命하고자 하는 새로운 《역》에서는 만인이 스스로 대인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일부의 성인과 대인에 의하여 예악으로 표현되는 일체의 행위 규범, 질서와 제도가 구축되면 범인은 단지 이에 따르면 되었다. 즉 제정된 표준에 따른 삶을 선이라 하고 정의라 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역》은 만인이 다 성덕을 쌓고 대업을 이무려 우주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기미를 아는 대인, 즉 신명의 경지에 이르고 천지와 더불어 3재가 되는 인간을 그 이상으로 삼는다.Ⅳ. 周易에서 나타난 人間觀Ⅱ: 時·位1. 역학과 知時 識勢1)역을 아는 자와 時·位의 변동역을 안다는 것은 역의 64괘와 384효 및 그 괘효사와 彖·象은 64개, 384개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 취할 바른 도리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을 배우는 군자는 64괘, 384효로 나타나는 구체적 상황(時·位) 가운데 어느 하나에 처한다. 그런데 그 만나는 時와 처하는 位가 다르므로 거기에 무궁한 변화가 있게 된다. 즉 역은 비록 64괘와 384효로 한정되어 있으나 그것은 무궁한 상황을 나타낸다. 또한 그 상황에 처하는 인간의 행위도 비록 一動 一靜이 있을 따름이지만, 그 時와 位가 같지 않으므로 역시 무궁한 이치가 거기에 있게 된다.은 길흉을 판단하게 하여 대업을 이루게 한다. 역을 배우는 군자 또는 대인이 번역하는 時·位에서 주체의 창조적 역량을 조화시켜야만 대업이 가능하다. 사업은 구체적 상황,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 사업의 성취는 때가 주어져야 하고,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는 위치가 했다.
이규보의 삶과 문학목차Ⅰ 시대상황1. 대외적 시대상황2. 대내적 시대상황Ⅱ 이규보의 생애Ⅲ 문학사상1. 사회 진출을 위한 문학2. 독창적인 문학3. 민족적 주체성4. 실천적 효용성의 문학Ⅳ 문학작품1. 동국이상국집2. 동명왕편3. 국선생전4. 청강사자현부전5. 백운소설Ⅴ 문학적 위상Ⅵ 한계점Ⅰ 시대상황1. 대외적 시대상황고려는 대외적으로 북방민족과 숙명적 항쟁관계에 서게 되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契丹의 재침과 이에 대한 계속적인 항쟁에서, 고려는 서희, 강감찬 등의 외교 및 승전으로 계단의 정복야욕을 일단 꺾었으나, 계단이 대요로 커지고 송나라를 제압하기에 이르자 고려는 결국 요를 섬겼으며, 그 뒤 여진족이 강대해져서 요를 멸하고 송을 양자강 이남으로 쫓으며 금으로 커지자 이제까지 부모지방으로 섬겨오던 고려에 대해서도 신례를 요구하기에 이르자 당시 이자겸 등의 사대론에 따라 금의 요구대로 들어 주고 말았다. 여기에는, 대외적으로는 비굴했던 귀족이 대내적으로는 기탄없는 권력을 행사하였고, 나아가 왕위를 노리기까지 한 이자겸 일파의 획책이 있었고, 그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자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궁, 도성은 황폐해지고 불안한 공기가 떠돌며 음양지리의 미신이 대두되면서 묘청일파는 서경천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천도 주장에는 자주정신과 금에 대한 항쟁의식이 작용하였지만, 김부식 등의 개경 세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은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귀족층은 더욱 안일하게 유락에 빠져들면서 비굴한 외교를 구태의연하게 지속하였다.{) 김진영 「이규보 문학 연구」 집문당. 1984. PP. 13-142. 대내적 시대상황국내적으로는 문무의 차별대우가 점차 심화되고, 끝내는 무신이 문신의 시종격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자 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즉, 장군 정중부등은 의종 24년(1170)에, 왕이 보현원에 유행했을 때를 틈 들어주고 적게 받았으면 시일을 지연시켜 더 바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환시들이 주권을 도둑질하여 위복을 누렸다.Ⅱ 이규보의 생애이규보는 고려 중기 무신 집권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고려 중기 무신들이 집권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사회가 격동하던 시절을 보고 느끼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부 호부낭중 이윤수와 모 김양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9세 때 이미 글을 지어 기동이라 일컬어 졌다. 이규보는 여주 사람으로 그의 조상은 알 수 없다. 그의 부친은 개성에서 관리 노릇을 했다고 하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단지 고향인 여주에는 이씨 일족이 살고 있었으며 호장, 교위 등의 향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호장, 교위 등은 지방 토착 세력을 대표하는 층으로 이윤수도 이러한 토착 세력을 배경으로 개성에서 관리 노릇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규보는 이른바 신흥사대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이규보는 일찍부터 신동이라 불릴 정도의 문재를 날리며 뭇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도 하고, 18세부터 3년간은 35세나 연상인 오세재와 망년교를 맺고 그에 이끌리어 죽림고회의 모임에 참석하여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서 문재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6세부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이나 실패하고 네 번째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가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당대의 집권자였던 최충헌을 알게 된 후인 32세에 비로소 전주목사겸 장서기로 관직에 오르게 된다.이규보는 수학기(탄생~23세)에 유가적 출세주의와 노장적 은둔사상이 함께 형성되어,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가운데 한 면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구환기(23~40세)에는 사환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여러 차례 실패한 후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서사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환상적 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였으나 2·30대 청년의 심화되지 않은 정신능력과 현세에서 입신양면하고 싶은 강렬한 야심 때문에 물아일체의 경지에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한 사람들로서 술을 마시고 부나 시를 지으면서 소일한 사람들이다. 이규보는 칠현들의 이러한 행동과 방약무인한 태도로 인하여 세상의 배척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규보는 관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규보는 관직에 오른 이후 문하대랑평장사(정2품)에까지 영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진출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따라서 이규보는 문학은 사회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 문학의 독창성이규보의 문학 사상은 개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신의 난 이후에 관계에 진출한 신흥 사대부의 한 사람으로 기존의 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그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시에 있어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이 설의 이고 말을 만드는 것 , 측 철사는 그 다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규보가 시의 본질에 관한 깊은 통찰에서 얻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설의가 철사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규보가 문학을 정신적인 위안의 도구로서 삼은 데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 또한 신흥 사대부인 그의 진취적인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보는 의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시에 있어서의 의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있어서는 의는 시속에 담긴 비밀을 드러내어 잡는 것이므로 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또 그는 의를 기로 으뜸으로 삼으니 기의 우열에 따라 시의 우열이 좌우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기는 하늘에 근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조물주가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기 전에 정해져 있다는 뜻으로 불가학득이라고 주장하여 주기론을 바탕으로 한 신의론을 표방하고 있다. 즉 의는 후천적인 자질이 아니라 타고난 천품에 따르는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고 난 재능이 있어야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규보가 등장하기 전에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고운 사실의 발견으로 상당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그의 뇌리에 내재된 주체 의식이 겉으로 발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4. 실천적 효용성의 문학이규보는 무신의 난 이후에 등장한 신흥사대부이다. 신흥사대부는 기존의 지배층과는 달리 현실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적 활동을 긍정하고 실무에 밝았기 때문에 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물에서 존재하는 도를 실현하는 활동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당시의 사대부는 백성을 교화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이 배운 바를 세계에 펼쳐 나라를 빛내겠다는 이른 바 이문화국의 정신을 머리 속에 두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문학이 유희적인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표현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문학을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구귀족이 관념적 세계 인식을 통해 가지고 있던 낡은 사고의 구질서에 대응하여 새로운 시대와 역사를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한 그였기에 문학을 통해서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현실 비판 내지는 현실 인식이라는 문학의 효용성을 드러내어 문학이 단순한 유희적 또는 관념적이라는 구귀족들의 문학관과는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 비판 또는 현실 인식의 문제는 이규보 자신의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바로 시문을 인습적·관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현실 비판 내지는 올바른 현실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 문학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문학사상에 대해서는 박흥수: 이규보 문학사상, 「경성대문화전통론집」, 1998. 과이신복: 이규보의 문학사상, 「단국대 논문집」, 1981. 참조.Ⅳ. 문학작품1. 동국이상국집53권 13책. 아들 함(涵)이 1241년 전집 41권을, 그 이듬해에 후집 12권을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1251년에 의종의 명령으로 손자 익배국의 위업과 건국영웅의 신기한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신앙에 가까운 사명감과, 더욱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간단히 처리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심정에서였다고 적고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당시 민중들에게 구전되어 오던 이 신화를 취재하여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을 드높이고,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나타내려는 뜻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장덕순 「이규보 연구」새문사. 1986. PP. 2-163. 국선생전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 은『동국이상국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 이규보는 이 작품을 통해 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덕과 패가망신의 인간관계를 군신 사이의 관계로 옮겨놓고 그 성패를 비유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주인공 국성을 신하의 입장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유생의 삶이란 근본적으로 신하로서 군왕을 보필하여 치국의 이상을 바르게 실현하는 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다.신하는 군왕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되면 자칫 방자하여 신하의 도리를 잃게 되어 국가나 민생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고, 마침내 자신의 몰락까지 자초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굳게 지켜나감으로써 어진 신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때를 보아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국선생은 비록 미천한 몸이지만 성실히 행동해서 관직에 등용되었고, 또 총애가 지나쳐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뒤에 후회할 줄 알았으며, 국난을 당해서는 백의 종군하였다.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사회적 교훈을 강조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곧 안으로 무신의 난과 밖으로 몽고군의 침입에 희생된 고려 의종. 고종 연간의 난국에 처하여 분수를 망각한 인간성의 결함과 비정을 풍자한 계세징인의 목적으로 씌어진 작품이다.4.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거북이를 의인화한 작품으로 역시『동국이상국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 주인공 현부(玄夫 : 거북)의 선조는 신인이며 굉장한 힘이 있어서 바다 가운데 -60
12월 1일철학과 문학의 공존 실존주의국어국문학과 9947015 김유진Ⅰ. 실존주의(實存主義)일반적으로 실존철학이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의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 발발 몇 해 전까지 하이데거(M. Heidegger : 1889-1976)와 야스퍼스(K. Jaspers : 1883-1969)를 중심으로 주로 독일 철학계에 소용돌이 친 사상이다. 1933년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하이데거가 일시적이나마 나치에 동조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고 반면 야스퍼스는 1937년에 그 부인이 유태계라 하여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고 이듬해 38년부터는 저작 및 출판의 권리도 박탈당하는 등 하여 이 유행은 한 고비를 넘겨 뜸해진다. 이것이 종전에 사르트르(J. P. Sartre : 1905-1980)가 라는 강연을 한 때부터 갑자기 유럽 전역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르트르 자신은 이 강연을 하기 전까지는 이미 ?存在와 無?(1943)등으로 발표된 자기의 사상을 실존주의가 아니라 실존의 철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강연을 계기로 실존철학은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붐을 이루었다.이렇듯 실존주의(實存主義) 또는 실존철학은 사람에 따라서 그 뜻을 달리한다. 여기서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넓게 인간의 존재 성격을 실존이라 규정하고 이 실존을 자기 사상의 중심에 놓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말하고자 한다. 사르트르는 위 실존주의 강연에서 실존주의 사상을 크게 유신론적과 무신론적의 두 갈래로 나누어 각각 전자로는 야스퍼스와 마르셀을, 후자로는 하이데거와 자기 자신을 들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줄기에 19세기의 선구자로서 각각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니체는 실존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생철학자이지만 그러나 베르그송이나 딜타이와 같은 다른 생철학자들과는 달리 당대의 니힐리즘을 체험하고 그 극복을 위해서 고민하였으므로 실존주의적 요인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실존주의 사상가로 열거하은 책상이다”라고 할 때의 책상은 그것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예로 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러면 그 개체를 책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 플라톤은 그것을 책상의 이데아라고 했다. “그것은 책상이다”라고 답할 때의 책상이란 이데아로서의 책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데아가 바로 본질인 것이다. 본질이란 따라서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도 아니며 또 언제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때는 이렇게 있고 어떤 때는 저렇게 있고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원불변한 실재이다. 실재란 참된 존재란 말이다. 이에 대해서 본질이란 “과연 있는가?” 또는 “어떻게 있는가?”에 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때의 존재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 또 이렇게도 있고 저렇게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 존재란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현실존재를 말한다. 플라톤의 우주창조설에 따르면 창조주는 마치 목공이 설계도에 따라서 집을 짓듯이 이데아를 본 따서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모든 개체는 이데아를 원형으로 하여 제작된 모상, 말하자면 실물에 대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그 원형으로서의 이데아가 먼저 있어야 하며 이것을 본 따서 만들어진 만물은 본래의 실재에서 파생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언제나 존재에 앞서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현실존재가 사물인 경우이지, 인간일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가령 이 책상, 저 시계가 없어지면 다른 책상이나 시계로 대신할 수가 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은 그렇게 대체가 가능하지 못하다. 즉 똑같이 현실존재라 할지라도 사물에 대해서는 “거기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일 뿐이지만 인간일 경우에는 단순한 존재나 생존인데 그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해 갈 수가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존재이다. 즉 인간의 현실존재에는 개별성과 주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본질이란 이 개별성과 주체성을 어떤 범주 속에 나누어 묶을 필요가 생긴다. 유럽 특히 프랑스의 문학사적 맥락에서 가령 근대 이후 문학 작품들은 관례적으로 고전 문학, 낭만주의 문학, 자연주의 문학, 상징주의 문학 등의 범주로 분류해서 서술되어왔다. 실존주의 문학도 위와 같은 문학사적 맥락에서 분류된, 한 흐름의 문학 작품의 범주를 지칭한다. 실존주의 문학은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2차대전 직후의 문학들을 각기 시대적으로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실존주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각기 자신의 범주에 속하는 문학 작품의 제목이나 그 저자들의 이름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그러한 문학적 범주에 속하는 문학 작품의 특성과 그것의 문학?예술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문학적 의의에 대한 탈역사적 물음이다.고전주의 ? 낭만주의 등을 비롯한 문학 분류의 여러 개념은 각기 그러한 범주 속에 분류되는 작품들의 생산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품들이 창작된 후에 그러한 작품들이 창작된 후에 그러한 작품들의 특성을 기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령 “실존주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다른 종류의 문학과 구별하여 ‘실존주의 문학’이라 부르게 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대표적 작가의 대표적 작품들의 특성을 찾고 설명함에 있을 것이다.Ⅳ. 실존주의의 대표자ⅰ)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온갖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카테고리에 속하는데 그것은 각기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라고 불리어진다. 즉자적 존재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가리키며, 대자적 존재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고등동물을 포함한 만물은 의식, 더 정확히 말해서 자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즉자적 존재의 특징은 의식이 없는 점에 있으며 이에 반해 인간, 다시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는 의식이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의식이 없는 존재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계획하고 욕망하는 가능성이 전 그가 살고 있는 자연 혹은 사회적 여건과의 관계를 알고 그것에 입각함으로써 사르트르는 몇 개의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첫째, 결정론자 혹은 운명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기의 인생을 선택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게는 이미 주어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인간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창조할 수 있다. 둘째, 이와 같은 창조적 인간, 즉 자유를 가진 인간이 있음으로 해서 선악 혹은 아름답고 미운 것, 혹은 좋고 나쁜 것과 같은 가치의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가치는 이미 한 인간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여 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셋째, 항상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자의에 의하여 모든 행위를 결정해야만 하는 인간은 자기가 행할 행동의 모든 결과, 자신의 인생 자체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게 마련이며, 따라서 그는 모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오직 자신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사르트르를 비롯해서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가치는 정직성에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고난 특성으로서의 자유를 행사하는 데 있다.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그의 철학적 견지들을 소설 ?구토(嘔吐)?를 통해 ?존재(存在)와 무(無)? 이전에 이미 문학화 하였다.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고가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 으로 발전되고 하나의 출구를 찾기 이전의 그의 사상들로, 특히 인간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부정의 기록이다.ⅱ) 카뮈의 사상과 문학카뮈의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부조리’다. 그의 문학 사상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부정을 극복하고 힘찬 긍정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위대함을 그리고 있다면, 그 이론적 배경은 부조리 사상이다. 부조리는 이미 고대 사상가들로부터 철학의 주요한 테마로 인식되어 왔고, 근대에는 카뮈가 직접 영향을 받은 니체나 키에르케고르가 그것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과거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부조리함을 어쩔 와 행동, 이율배반적인 운명,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에 반항함으로써 그들의 모순된 존재를 반전시키는 긍정을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Ⅴ. 실존주의 의의와 한계실존주의는 근세의 이성적 합리주의, 범논리주의에 대한 반기를 들며 나타났다. 인간은 결코 이성이나 논리에 의해서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존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집단의 한 단위, 기계의 한 부품으로 대중화, 평균화되어 결국 비인간화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무위에 내던져진 인간의 불안의 실태를 백일하에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세기적인 불안의 조성이 실존주의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실존주의가 불안을 거론하는 것은 불안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럼으로써 이 불안을 초극할 방도를 강구해 보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실존주의는 인간소외, 인간상실의 이 시대에 인간구제의 성스러운 사명을 띠고 등장하였던 것이다. 실존주의 내지 실존철학이 그렇게도 온 세계에 유행한 것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파헤쳐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러한 인간진단, 시대진단을 토대로 세기의 병을 고쳐줄 처방을 실존주의에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그러나 실존주의는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 기대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프스의 그리스 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 인간의 초시대적 본성이다. 그렇다면 불안의 초극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하는 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극복되어야 할 계기가 아니라 숨김없이 받아들여져야 할 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자들은 이 불안을 인간에게서부터 뿌리 채 뽑아 버린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초월은 언제나 이 한계상황을 시인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하고 난 후의 초월이다. 그것이 신을 초월한 것이든 세계를 초월한 것이든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세계, 현실
思庵 朴淳 (1523-1589)Ⅰ. 인물연구1) 생애자는 화숙, 호는 청하자, 시호는 문충이고 본관은 충주, 출생지는 나주로 중종 18년 한성부좌윤을 지낸 육봉 박우와 상악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암의 선대는 원래 호서에서 살아왔으나 그의 조부인 박지흥이 인근에 처가가 있는 광주의 봉황산 아래 방화동으로 옮겨 정착하였으며, 다시 부친 박우가 나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암은 한때 그의 증조부 박소의 묘소가 있는 회덕의 선암천 서쪽 언덕에 집을 짓고 이를 사암이라고 하였는데, 사암이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을유명현으로 알려져 있는 눌재 박상은 그의 중부이다.눌재와 육봉은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로 당대에 뛰어나 미산 이소로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박순은 이러한 가풍 속에서 청렴 강직한 성품을 배우며 어린시절을 보내고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게 된다.명종 8년 31세에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사적이 되면서 벼슬길로 나아간다. 다양한 요직을 거치는 동안 사암의 관리생활은 커다란 정치적 소용돌이나 파란을 겪지 않은 비교적 순탄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무비판적으로 시류에 따르는 안일한 삶이 아니라 유가사대부로서의 자세와 사명의식에 충실한 강직한 선비였다. 그의 대의명분에 투철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음은 그의 여러 삶의 궤적을 통해 알 수 있다.특히 명종 16년과 명종 20년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윤원형에게 맞서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명종 16년 사암이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 옥당에서 을사사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판이 좋지 않던 임백령의 호를 논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으로 있었던 윤원형과 동맹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눈치 살피기에 급급했다. 이때 사암이 앞장서 그의 호를 ‘공소’라 정하여 올리게 되었는데 물론 임백령을 폄하한 것이었다. 이 일로 사암은 일시 관직에서 파출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가게 되었다.그 후 명종 20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면서 윤원형 일파를 탄핵하여 파출시키고 있었는데, 그때 이 세사람이 사사로이 붕당을 지었다고 헐뜯었다. 이렇게 서인의 우두머리라는 동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 회의를 느낀다. 그 후 여러 번 사퇴를 청하였으나 사암을 굳게 신임하는 선조가 만류하였으나 선조 19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현 백운계로 들어가 다시는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사암의 만년퇴휴기는 30여년의 환로기에 비해 4여년으로 짧았지만 환로기 때와는 달리 세사에 매이지 않는 생활 속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기간에 남긴 작품을 통해 원숙한 경지에 오른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되며,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30년이 넘는 환로기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2) 성리학적 입장박순은 성리학에도 관심을 적지 않게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순은 성리학자로서 앞선 유가들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 수용 태세를 보인다. 곧 성리학을 개척한 송대 신유가들의 견해를 묵수하거나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꿔 말해 그는 선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때론 믿을 수 없어 의심하거나, 미처 충분히 발명해내지 못한 부분들이 후학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해석의 여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선전기 성리학의 氣一原論者로 알려진 花潭 徐敬德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특히 易學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사암은 화담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으며, 성리학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였고 나름의 일가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그의 理氣論은 후배인 栗谷 李珥와 토론을 벌인 3편의 답서 형식의 서간문에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우주론에서 화담의 견해를 수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암의 우주론은 주기론적이다. 그의 이기론의 성격을 규정짓는 명제는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太氣(또는 太虛)가 있고 太極(또는 理)은 그 안에 있다고 본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암의 이기론이 주희의 이기론이나 그것을 계승한 퇴계 이황의 이기론과는 크게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곧 주자나 퇴계는 이는 형이상은 기의 상태인데 이 때 이는 기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기와 함께 작용하여 세계를 형성하거나 운행시킨다고 하는 기 중심의 논의를 펼치고 있다.한편, 사암에게는 이기의 개념을 인간의 윤리적 측면에 적용시켜 논의한 경우가 없다. 다시 말해 이기의 개념으로 우주의 시원과 생성변화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만을 보일 뿐 인간의 윤리적 규범에는 연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는 자율성과 필연성이 내재한다’고 보는 관점과 존재론적 접근에 국한된 이기론의 특성으로 보아, 사암은 물상을 물상 그 자체로 보려는 태도를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양식을 들여다봄에 있어서도 저마다 가지는 특색을 인정하는 세계관적 기초를 다진 것이 아닐까 한다.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의 이러한 사상적 기초가 作詩에 있어서는 경물이나 상황을 그리되 보고 느낀 대로 그리려는 성향으로 전화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가 경물이나 상황에 대한 순간적 흥취나 정감을 중시하면서 典故를 많이 쓰지 않는 唐詩風을 추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그의 도학적 입장은 그의 학시 방향의 선택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사암의 성리학적 언술이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성리학자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송학을 표준으로 삼고 양명학을 배척하였다는데서 그가 유가 성리학자로서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선 유가들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 수용태도를 지니고 스스로 깊이 사유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배우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스승의 학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더욱 발전한 성리학적 학문을 보여준다.Ⅱ. 문학활동1) 작품사암은 딸을 하나두었을 뿐 후손이 없고 임진왜란 등의 화를 입으면서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다. 사후 60여 년이 지난 뒤 효종 3년에 와서야 외증손에 의해 문집이 간행되었다. 현재 사암이 남긴 시문을 모두 모아 전해주는 책은「사암집」이다. 모두 7권으칠언배율 1제 1수, 오언연구 1제 1수가 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사암은 오언시보다는 칠언시를 율시보다는 절구형식을 더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전체 작품 452제 607수중 칠언절구가 악 60%의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문학적으로도 사암의 시중 칠언절구가 문학성이 가장 뛰어났다. 그의 칠언절구중 , , , , , 등은 허균이 찬술한 국조시책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특히 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조선시대에 여러 시화에서 자주 논급됨을 볼 수 있다.선가에서 취해 자다 얼결에 깨어 보니흰 구름 덮인 골에 달빛 기우는 때라긴 수풀 밖으로 홀로 훌쩍 나서니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는구나청산에 홀로 은자를 찾아와소매로 가을 안개 털고 돌 이끼에 앉는다막걸리에 함께 취해 달빛 아래 잠이 드니학의 날개짓에 솔 이슬 빈 잔을 적신다2) 당시적 경향그가 문학사의 위치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당시의 송시풍을 당시풍으로 바꾸는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학당을 강조하고 자신도 학당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의 시의 가장 큰 특징인 당시적 경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한국 한시는 16세기 후엽인 선조 때에 이르러 그 시풍이 크게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초 이래 지속되던 宋詩風이 唐詩風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는 16세기 초중엽부터 시작된 일부 시인들의 당시적 성취와 學唐詩의 강조가 이 때에 이르러 도드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學唐을 통해 唐詩的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는 이른바 三唐詩人, 곧 崔慶昌, 白光勳, 李達 등에 이르러 그러한 풍조가 더욱 드세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당시인의 선배로서 사암이 이들에게 학당을 권유하고 그 구체적인 지침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대의 시풍 전환에서 있어서 사암은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학당을 강조하면서 자신 또한 학당에 심혈을 기울여 그의 시작 또한 당대의 비평가들로부터 ‘청초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시작엔 자신이 본 향토적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편 사암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보고 경험한 것과 그 감정을 그릴 때도 본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 서술하려고 한다. 자신의 생활과 거기서 느낀 회포를 직서적으로 표현할 경우 자질구레한 일상들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시적 긴장이 느슨해질 염려가 있다. 그것은 시적 대상을 즉흥적으로 시화하는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암은 대체로 자신의 경험을 담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데 성공한 작품들을 상당 수 보여주고 있다.臥病昏昏詩摠廢 (와병혼혼시총폐) 병들어 혼미해져 시 전연 못 지었고不知春柳已遮門 (부지춘유이차문) 봄 버들이 벌써 문을 가린 것도 몰랐다案頭枯筆塵生久 (안두고필진생구) 책상머리 마른 붓엔 먼지 낀지 오랜데逢着山僧爲一援 (봉착산승위일원) 산승을 만나 그를 위해 한 번 잡아본다.위의 시에서 일상적 삶을 특별한 수사적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꾸민 데 없이 일상을 서술했다. 마치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말하듯이 서술하고 있다. 앞에 보인 시처럼 특별히 주제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는 짧은 시형을 택했기에 주제구를 설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1행 7자 4행시에 손님을 맞는 정을 충분히 그려냈다고 하겠다.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주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행간에 감추고 있는 주제를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이나 자연과 서로 교류와 교감이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스님이 찾아 주어 생명의 봄이 왔음을 알았고, 그런 봄의 흥취를 시로 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병마로 사그라지던 작자의 생명력을 다시 일으켜 준 셈이다. 때문에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이 시에는 이러한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이렇듯 일상적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해내되 언외에 주제를 함축하는 시가 당시풍이라고 한다면 이 시는 그런 예에 속하는 시라 할 수 있다. 박순의 시작엔 이처럼 사대부적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면서도 특별히 주제를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