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란..... 제목조차 낯설고, 또한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라기도 했다. 가지고 다니며 읽기에도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책이었고 아무튼 입이 딱 벌어졌었다. 또한 알 수 없는 이름들과 지역이름들.. 정말이지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하지만 역사책이라 하면 딱딱하기 그지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나에게 조금씩 이 작품의 매력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다하지 않고 매일매일 가방 속에 넣어 다니며 지하철이고 통학 버스 안에서건 조심스레 꺼내어 읽어 나갔다.향료전쟁 ..... 보통 중세 유럽에서 나라간 전쟁이라고 하면 종교 관련 전쟁이거나 왕위 다툼 문제나 그런 것으로만 상상했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특이하게도 국력을 소진시킬 정도의 대규모 전쟁을 바로 향료를 장악하고자 하는 욕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래서 인지 조금은 나의 마음을 이끌리게 했던 것 같다.서양인의 주식인 육류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린내 를 비롯해 맡기 거북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없애주는 역할을 하는 재료가 바로 향료다. 향료는 냄새를 제거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음식에 여러 가지 풍미를 더하는 데 애용되어 서양 음식문화 발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렇듯 중요한 향료를 유럽인은 16세기까지 쉽게 구하지 못했다. 향료 무역은 베니스 상인이 독점하며 높은 값을 받아먹었다. 향료는 일반인이 얻기가 상당히 어려웠고 따라서 풍족하게 쓸 수도 없었던 일종의 사치품 이었다.유럽인은 더 많은 향료를 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였다. 마침내 스페인-포르투갈-영국-네덜란드 등이 주도한 신항로 개척기에 들어와 비로소 동양의 향료가 유럽으로 전파된다. 이 과정에서 열강이 피비린내 나는 각축을 벌이는데 이러한 각축전을 향료전쟁 이라 한다.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항료이다.향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던 육두구가 더욱 귀중한 열매로 자리잡은 계기는 런던의 한 의사의 발언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흑사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육두구가 흑사병 예방에 특효라는 의사의 말이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육두구 한 주머니가 금화 한 주머니와 맞먹는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원산지는 인도네시아 몰루카제도 런 섬. 포르투갈이 먼저 발견한 이 섬에서 포르투갈인은 그 곳 원주민과 처절한 전쟁 끝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곳 원주민은 인간 사냥꾼 이라고 불렸다.포르투갈인은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었다.하지만 영국인은 달랐다. 영국 상인들은 향료섬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도 런섬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포르투갈 상인들과 달리 영국 선원들은 원주민 족장들과 만나자마자 우정을 쌓았다. 그 결과 육두구를 쉽게, 또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이러한 상황에 고무된 나머지 유럽인이 가만있을 리 없다.육두구 - 마리스티카 프라그란스 - 를 향해 유럽인들은 탐험을 개시했다.반다제도는 네덜란드와 영국인들에게는 이상향, 천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유럽 부의 원천 향료 - 육두구가 자라고 있었다. 아니 섬 자체가 육두구였다.그 곳을 향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탐사대를 파견했다. 파견의 비용과위험은 도박에 가까웠지만, 가끔 그리고 종종, 최종적으로 정례적인 상선대의 귀환은 일거-1-에 도박을 대박으로 바꾸어 놓았다.그러나 그들을 단순히 무역을 원하지 않았다. 많은 선단과 강한 해군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향료는 곧 돈이었고 돈은 곧 국력이었다. 양국은 이 반다제도의 육두구를 독점하기를 원했다.그리고, 탐험과 약탈, 학살, 전쟁으로 이어지는 물질문명의 시대가 개막되었다.결과적으로 강인한 영국 지휘관의 저항 - 이런게 싫다는 거다 - 이 네덜란드의 공격에 무너지고, 네덜란드와 영국간의 상호조약에도 불구하고 힘의 균형추는 네덜란드에게 기울었다.그러나 반다의 네덜란드 사령관은 만족하지 못했다. 완전한 시장지배의 욕망은 현지의 일본용병과 영국인들을 모반혐의로 묶어 처형하게 만든다. (이런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네덜란드에 넘어간 사무라이들인지 아니면 남방계 원주민 용병인지에 대한 부가설명은 책에 나타나 있지 않아 아쉬웠다.)다행히도 영국인들 중 두 명은 정치적으로 보호되었고 암보니아 학살은 네덜란드와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적절한 타협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충돌은 계속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네덜란드는 신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영국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그곳은 바로 현재 뉴욕 맨해튼이라고 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협상에서 현재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데에 합의한다. 사실 당시의 가치로 본다면, 신대륙의 정착지와 향료제도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현재 반다제도는 찾아 들어가기도 힘든 잊혀진 곳이 되었고, 다른 한 곳은 세계 유일 제국의 경제의 심장이 되었다. 그 때 네덜란드 지배자들의 미래를 보는 혜안이 부족했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네덜란드인의 육두구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 아닌가?아무튼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나다니엘 코트호프가 이끄는 영국인은 런섬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두 나라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사실상 네덜란드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이 책에서도 역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영국의 나다니엘 코트호프인 것 같다..원제 [나다니엘의 육두구]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인물 중에서 특히 나다니엘 코트호프가 가장 많이 돋보이는 것 같다.그 이유는 무엇일까??그의 영웅적 모습 때문이었을까??잔인한 원주민 속에 고립돼 있으면서도 그는 뛰어난 인간성과 용기와 담대함으로 역경을 헤쳐나가며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나갔던 것이다.또한 상인들간의 분쟁 와중에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에 결코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찌되었든 불굴의 의지와 지혜로 4년을 버티다가 죽었다. 결국 나중에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의 소유권을 둘러싼 문제가 생겼을 때 영국과 네덜란드는 런섬과 뉴암스테르담을 바꾸었다. 런섬과 맨하탄에 살던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나다니엘 코트호프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내가 만약 나다니엘 코트호프였다면, 나 역시 그처럼 동료를 위할 줄 알며, 용기와 담대함-2-으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리고 나서 가만히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나 김하나 는 누구보다도 제일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하지 않는 것 같다.또한 런섬에 도착하여 원주민들과 부딪혔을 때도 영국인보다는 네덜란드인들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을 대화보다는 무력으로 다스려 그들을 짓밟으려 했을 것이다. (우리가 힘이 세다는 전제하에..)
정복왕조란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인 동양학자 비트 포겔이 아시아 역사에서 중국 왕조와 항쟁하여 종종 이를 정복하고 지배하기에 이른 북방 민족의 여러 왕조에 붙인 명칭이다. 아시아사에 특유한 역사적 사상을 해석하기 위한 이른바 정치학적 개념이다. 즉 중국 대륙이 한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에 의해서 지배되었던 시기에 존재했던 왕조로서 중국 고유의 영역까지 아울러 지배한 민족국가인 요와 금, 그리고 몽고족의 원을 역사가들은 정복왕조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중국인은 예로부터 스스로를 하라든가 혹은 중화라 칭하며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고, 주변 제민족에 대해서는 이적만융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그리고 이적은 중국에 복종하여 문명의 은혜를 받고, 또 교화되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인식해 왔다. 그런데 이제 중국인이'이적'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종래 야만적인 이민족이라고 멸시되어 왔던 자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듯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약600여년간을 중국 대륙에 군림했던 정복왕조들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통치방식과 경제, 문화는 어떠했는가? 본고에서 우리 6조는 이러한 사항들에 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요 [ 遼 ](916∼1125)♠정복왕조의 하나로,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6~9세기경, 수(隋) ·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다.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 ·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이때 제실(帝室)의 일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1. 사회경제요의 지배하에는 잡다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민족인 거란 및 그 근친관계인 해(奚) 등의 유목민과, 한인(韓人) 및 발해인(渤海人) 등의 농경민으로 대별된다. 유목민에 대해서는 부족제로써, 농경민에 대해서는 중국과 같이 주현제(州縣制)로써 통치하였다. 특히 요의 본거지인 동(東)몽골에서는 당초부터 이주시켰던 한인을 위하여 주현을 만들어 이에 편입시키고 성곽을 세워 거주시켰기 때문에 농경민과 유목민과의 거주지역이 혼합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을 그 생활양식에 따라서 둘로 나누었던 것이 요나라 사회의 특징이었다. 법률상으로 당(唐)의 법률을 계승하면서도 거란 고유의 법률을 보존한 것도, 관제(官制)에 있어서 북면 ·남면의 2중체제를 간직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농경민의 민정(民政)을 관장하기 위하여 남면관(南面官:최고관청은 南樞密院)을 두었으며, 유목민의 군(軍) ·민(民) 양정(兩政)은 이것을 북면관(北面官:최고관청은 北樞密院)에게 관할하도록 하였다. 남(南)추밀원에는 군정(軍政)을 맡기지 않고, 북(北)추밀원이 이를 통할하도록 하였고, 그 장관에는 원칙적으로 거란인을 임명하였다. 이 2중체제로 말미암아 유목민이 농경민에 의하여 한화(漢化)되는 정도는 극소수였으나, 양자의 융합은 잘 진척되지 않아, 그 대립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의 경제에는 유목 생산적 경제와 농경 생산적 경제가 병존하였으나, 점차로 농경적 생산에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상업 무역은 전연(淵)의 맹약(盟約) 이후 현저히 발달하여, 국경의 몇 개소에 각장(場:다른 민족과의 교역을 위하여 국경에 설치된 관청)이 개설되어 교역이 활발하였고 국내에서도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다.2. 언어종교문화거란족의 언어는 퉁구스어(語) 등이 섞인 몽골어계(語系)의 언어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하여 920년에 태조가 거란문자의 대자(大字)를 만들였던 허난성[河南省]의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고, 이로써 금은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그러나 이 무렵부터 금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송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런 경향은 제4대 해릉왕(海陵王:재위 1149∼1161)때에 더욱 두드러져, 마침내 1153년에는 금의 창업근거지였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燕京)으로 천도, 그와 함께 여진인을 화베이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다시 남송을 쳐서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려는 뜻을 고집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남벌(南伐)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만주에 남아 있던 여진인과 발해인들의 세력에 눌려 61년 제위에서 밀려나고, 제5대 세종(世宗:재위 1161∼1189)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 후 해릉왕은 한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세종은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이후 29년에 걸쳐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소요순(小堯舜)이라 한다. 또 세종은 그때에 표면화된 여진인의 나약함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으며, 점차 잊혀져가는 여진어 ·여진문자 사용을 장려하는 등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책을 취하였다.제6대 장종(章宗:재위 1189∼1208)은 무계획적이고 산만한 재정정책을 취한데다, 황허강[黃河] 범람 후의 치수(治水) 공사와 북방 몽골계 유목민에 대한 경략 등에 지나치게 국비(國費)를 소비하였고, 더욱이 실지회복에 나선 남송의 도전을 받아 한층 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제7대 위소왕(衛紹王:재위 1208∼1213) 때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인 만주를 잃었으며, 남송과 서하(西夏)로부터도 침입을 받았다.제8대 선종(宣宗:재위 1213∼1223)은 1214년 몽골군의 강습(强襲)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연경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함께 옮겨온 여진인과 토착 한인 사이에 식량문제를 둘러싸고 처참한 싸움이 벌어졌다. 제9대 애종(哀宗:재위 1223∼1234)은 카이펑에서 안주할진인의 화베이지방 이주 후에는 점차 한화(漢化)되어 세종의 적극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여진어 ·여진문자는 점차 잊혀져갔다. 여진 고유의 종교는 샤머니즘이었으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발해 ·요나라 등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화베이지방 영유 후로는 남송의 불교를 계승하였다.한편 이와 같은 무렵에 금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화베이의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도사(道士) 왕중양(王重陽)이 도교에 혁신적인 기풍을 불어넣어 전진교(全眞敎)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는 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여진인의 상류층도 송나라 문화, 특히 문학에 심취하였으므로 북송문화의 주류는 그대로 금나라에 인계되었다. 특히 장종(章宗)은 훌륭한 문화정책을 펴 금왕조에서 가장 융성한 문운시대(文運時代)를 출현하게 하였다.♠원 [ 元 ](1271∼1368)♠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대재건원)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 두어, 중요한 정무는 모두 재상·부재상들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추밀원은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기관으로, 이것 역시 황태자가 겸하는 장관인 추밀원사(樞密院事) 아래에 지원(知院)·원사(院使)·동지(同知)·부사(副使) 등의 여러 관직을 두었는데, 이 밖에 특히 중대한 군사기밀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중서성에서 평장정사 한 사람이 파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는 관료기구의 숙정과 쇄신을 이루기 위한 감찰기관으로, 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夫), 차관인 중승(中丞) 아래에 많은 감찰어사를 두어 끊임없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순찰해서 부정을 적발하고 또한 민간의 풍기 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 이상의 3대 관청 외에 재무를 맡아보던 제국용사사(制國用使司), 뒤에 승격해서 상서성(尙書省)으로 개칭한 특수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비상시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하려 임시적으로 두었던 것으로 목적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었다.성·원·대의 3관청은 원래 상도(上都)·대도(大都)를 포함한 직례지(直隷地)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이를 대행할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약칭 行省)·행추밀원(行樞密院:行院)·행어사대(行御史臺:行臺)를 두었는데, 뒤에 점차 정리되어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政)은 일원화의 필요성에서 비상시가 아니면 행원(行院)을 두지 않고 모두 중앙의 추밀원이 관할하였다.지방의 행성 및 행대는 비록 중앙의 성(省)·대(臺)에 비해서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 직속되는 관청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 대관청의 아래에 소속되는 지방행정 관청으로 선위사(宣慰司)가, 지방재무청으로는 전운사(轉運司), 지방감찰청으로는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가 있었다.또한 이들 관청 아래에는 노(路)·부(府)·주(州)·현(懸)·사(司)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지방행정관청의 수령은 대개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점검하는 정치감찰관으로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현지 출신 관리에 이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삶을 편리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반면,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여러 가지 우연한 사고로부터 위협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방송매체나 주변사람들의 입 소문으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사고 소식들. 만약 그 사고가 사람의 생사에 관한 것일 경우에는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며, 특히 사고 당사자가 한 가족의 생계책임자인 가장의 경우라면 그 피해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주로 사람의 생사에 관한 사고로 인해 초래되는 경제적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성립된 제도를 생명보험이라 하며, 보험사고 발생의 객체가 주로 사람의 재산일 경우 손해보험이라고 한다.사고나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주요수단으로는 예방, 진압, 저축, 보험이 있다.그러나 예방과 진압은 아직까지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축과 보험을 통한 사전대비가 요구되는데, 저축의 경우는 우발적인 사고가 발생한 경우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없으므로, 보험 제도가 그 대안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또한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핵가족화와 자기책임주의, 재해와 성인병의 증가, 평균수명연장에 따른 노후불안 등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보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그 중에서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생명, 생명보험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생명보험은 즉, 사람의 사망 또는 생존을 보험사고로 하는 일체의 보험으로, 인보험의 대표적인 것이다. 보험자가 보험계약자 또는 제3자의 생사에 관하여 일정한 금액(보험금액)을 지급할 것을 약정하고, 보험계약자가 보험자에게 보험료를 지급할 것을 약정하는 보험이다(상법 730조). 생명보험은 손해보험과는 달리 손해의 유무·대소에 관계없이 사고가 발생하면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는 정액보험이고, 피보험이익의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생명보험계약의 특유한 효과로서 보험자는 계약해지 또는 보험금액의 지급책임이 면제된 때의 보험료 적립금의 반환의무(736조 본문)와 이익배당부보험에 있어서의 이익배당의무를 진다.또 보험계약자는 보험수익자의 지정·변경권을 가지는 동시에(733조 1항), 보험계약체결 후에 보험수익자를 지정·변경하였을 때에는 보험자에 대한 통지의무를 진다(734조 1항). 보험계약자는 자연인이건 법인이건 불문하며, 피보험자가 될 수 있는 자에 대한 제한은 없으나, 피보험자는 반드시 정하여 두어야 한다. 15세 미만자·심신상실자·심신박약자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은 무효다(732조).나는 생명보험을 중심에 두어 우선, 우리 나라의 인구를 조사해 보고 난 후, 인구의 사망 원인, 전체적인 보험의 가입현황 및 목적, 마지막으로 생명보험의 지역별과 연령별에 따른 통계를 살펴보았다.그럼, 먼저 국내인구의 통계현황을 살펴보자.★노령 인구 변화추이★{☞현재 뿐 아니라, 2030년대까지 추축 해 본 결과, 노령인구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 나라의 연령 및 성별인구는 이러하다.★연령 및 성별인구★{{이제, 국내 사망원인 통계현황을 전체, 남자, 여자로 구분하여 살펴보자.{★전체 사망원인 통계★ ★남자 사망원인 통계★ ★여자 사망원인통계★{{(단위:인구십만명당)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구의 사망원인 대부분이 암과 가장 관련이 많았다.그럼, 사람들의 보험 가입 현황과 함께 보험 가입 목적, 가입 보험 종목에 관해 살펴보자.★국내보험가입현황★{☞1997년도와 2000년도를 비교해 보았을 때, 1997년도보다는 2000년도에 들어 보험 가입자수는 증가하였다. 특히 5·60대 연령의 부분에서는 현저하게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보험가입목적★{☞19997년도에는 가족의 생활보장을 가장 중요시 여겼지만, 2000년도에 들어서는 의료비의 보장이 70.2%로 가장 높다.
Bobos:20세기에 미국사회를 그리고 전반적인 문명사회를 규정한 두 가지 큰 흐름은 부르주아 문화와 보헤미안 문화라는 것이다.부르주아 문화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와 태도를 중요시하는 반면, 보헤미안 문화는 진보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가치와 태도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계층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지? 하는 의문의 들었다.이제 하나씩 하나씩 그들 각각의 특성들과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이른 바 보보 (Bobo)라는 이름으로 성격 다른 이 계층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즉 보보의 말 뜻은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이다. 60년대가 히피의 시대였고, 80년대가 여피의 시대였다면 90년대와 21세기는 보보들의 시대인 것이다.하버드대 신입생의 경우 1952년의 평균 점수는 1960년 신입생 중에 하위 10%에 속한다고 한다. 더욱이 60년대의 신입생들은 훨씬 더 넓은 사회 경제적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어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출신지역에 따라 머리가 좋다할지라도 하버드대에 입한 한다는 것 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입학은 지원하고, 바야흐로 하버드대는 주로 북동부의 사회적 엘리트를 위한 학교에서 전국의 영리하고 총명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학교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어째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워스프 기득권 계층의 가치에 맞서 지식인들의 가치를 과감하게 끌어올린 학자들이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너트를 포함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워스프 엘리트가 자기 만족적인 일종의 신분계급이 되어 사회에 활력을 주는 새로운 인재를 도외시한다고 비판하였다.그럼 왜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 워스프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아마도 워스프 기득권층은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자신들을 지탱했던 계율에 대한 믿음을 읽었고, 또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력을 잃었는지 모른다.어찌되었건 워스프 엘리트가 고등 교육을 지배하고 있고, 대학 교육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시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60년대의 진보주의자들은 성공에 대한 일반적 기준, 남들과 같아지려는 욕망, 사회적으로 존경 받아야 한다는 일반적 관념, 성공한 삶의 기준은 소득·매너·직업이라는 인식등을 거부했다. 이들은 보헤미안적인 자유분방한 자기표현을 좋아했고, 이전 엘리트의 무미건조한 자기통제를 경멸했다.이들은 정말로 정직하게 사는 유일한 길은 성공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무의미한 경쟁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관계가 꽃 피는 작은 공동체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교육받은 계층의 성원들은 이러한 인간관계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난 부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게되어, 빌 게이츠 같은 대학 중퇴생이 세상을 좌우하는 그러한 경제 시대였다. 부지불식간에 돈은 그들의 사고 방식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교육받은 계층의 구성원들은 우선적으로 돈 자체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야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물질적인 것에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축적 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의 최상층에 살면서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이들 교육받은 엘리트는 그런 도전에 직면했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 두가지 모드를 가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고, 그들은 반대되는 것들을 조화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즉, 보보가 되었다.이 새로운 기득권층은 혈연과 학연을 따지지 않고,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는 크고 유동적인 인재 그룹으로 기존의 사회 조직들을 자신의 가치에 맞추어 재편성하고 있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조화로운 생활 방식이라는 보보의 특성이다.즉, 부자이면서도 욕심쟁이가 아니고, 윗사람들이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물론 보보계층의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님)교육받은 계층의 이야기는 사실 18세기의 처음 30년에서 시작된다. 그 이유는 인구 특성의 고나점에서는 교육계층의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비로소 폭증했지만, 이들 계층이 구현하는 가치들은 산업시대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문화적 갈등의 정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부르주아 취향의 첫 번째 개화는 1720년경 미국에서 상당수의 부유한 미국인들이 상류층다움 을 발견했고, 그것은 곧 자신들의 취향과 문화적 관심이 반영되길 원했다. 그래서 집을 짓고, 개조하며, 응접실이라는 곳을 만들어 꾸미기 시작했다.이러면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유럽스타일과 매너를 모방하였다.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은 그들의 건전한 야망을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미덕이라며 예찬하였고, 그것들을 영웅적 덕목이 아닌 질서·신중·단정함·중용·절제·겸손 등이었다. 이 계층의 사람들은 깨끗하고 고전적인 스타일을 추구했고, 그들의 매너 또한 퇴폐적이거나 사치스런 것이 아니라 존경스런 것이었다.요컨대, 대중보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가꾸자 했지만 사치스럽고 비도덕적인 유럽의 귀족들처럼 거만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들은 중산층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들은 신중한 중용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극단을 혐오하였다.1790년 프랭클린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 예술가, 지식인,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취향에 공개적으로 반항하였다. 알프레드 드 뮈세는 응접실 패거리의 성스러운 단체들에 비난을 퍼부었고, 스탕달은 프랭클린이 성실하긴 하지만 지겨운 사람이라고 깎아 내렸다.그럼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도대체 중산층에 대해 정확하게 무엇을 그토록 싫어했는가? 한 마디로 물질주의였다. 부르주아는 비 영웅적이며 지루하고, 비 상상적이고,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계층이라고 비난하였고, 지식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항하여 풍요로운 벌레가 되기보다 고상한 이단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보헤미안 이 탄생했다.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 시스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은 이국적인 문화들을 옹호했고, 부르주아의 고상한 척하는 태도를 경멸했다. 보헤미안이 예찬한 것은 창의성·반항·새로움·자기표현·반 물질주의 그리고 생생한 경험이었다.부르주아의 영역이 사업과 시장이었다면, 보헤미안의 경우에는 예술이었고 부르주아는 가시적인 개선을 추구했다면, 보헤미안의 위대한 목표는 자아의 확장이었다.보헤미안과 부르주아 사이의 문화전쟁은 산업시대에 격화되었다.미국에는 항상 부르주아적인 특성들이 있었다. 한편 보헤미안적인 특성들도 있었다.1920년대에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문화적 특성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띠었고, 이어서 1950 대에는 부르주아의 전성기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약화되는 시기인 듯 했다. 1960년대에는 보헤미안의 하위문화가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해 ‘라이프’나‘룩’같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면서 낭만적인 반 문화는 부르주아의 문화를 압도했다.그러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부르주아 에토스가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19세기에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 사이의 다툼이 일방적인 것이었다. 보헤미안들은 주도 면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부르주아들은 무관심한 것처럼 그냥 무시 한 체 제 갈 길을 갔다.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부르주아들도 보헤미안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정치적 힘을 갖게 된 이상 부르주아들도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 대게 중·하류층 출신이었던 신보수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부르주아에 대한 옹호와 보헤미안에 대한 비판을 했다.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갈등이 절정에 올라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양 측 사이에서 무언가 균형을 찾으려 했다. 일부 사색가들과 작가들은 조화를 갈구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시대에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었다. 정보시대가 되면서부터 비로소 아이디어 세상과 비즈니스 세상은 합쳐졌으며, 오랫동안 갈구하던 부르주아와 보헤미안 사이의 균형은 현실로 나타났다.보보 계급은 부르주아의 영역에 들어와 보헤미안의 특성을 주입했다. 동시에 그들은 보헤미안적인 태도에 물을 타서 부르주아적인 제도를 회피하지 않고, 비슷한 방식으로 부르주아적인 태도에 물을 탔다. 이제 문화전쟁은 적어도 부자들의 영역에서는 끝이 났고 수세기 동안의 해 묵은 갈등은 균형점을 찾았다.그 자리에 제3의 문화가 등장하였다. 재정관리의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남으로써 보보들로 하여금 그들이 경멸하는 저속한 여피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돈을 쓸 수 있게 해주어, 더럽고 물질적일 수도 있는 것들을 고상한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반문화적 자본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생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그리하여 사업가라는 말보다는 사업을 하는 창조자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보보가 사는 삶의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처럼 기업 부문에서도 세속적인 모든 것들이 신성한 것으로 변했다.또한 보보들은 지적인 삶을 살려 하였고, 지식인 사업가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1 정보에 강하고 2 자신만의 독특한 소비 감각이 있으며 3 자유롭게 사고하고 4 유행에 개의치 않으며 5 엉뚱하고 기발하며 6 일을 즐기고 7 여유가 있으며 8 적극적이고 9 돈이 많더라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일과 후엔 자신만의 취미에 몰두하고, 돈은 여유 있는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요가나 정신적인 세계, 아로마테라피 등에 관심이 많다. 직장을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고, 편안한 호텔을 잡고 즐기는 여행보다 혹독한 오지에서의 노숙을 하며, 도시의 차가움보다 자연의 따뜻함이 좋다고 여긴다. 자신들의 스타일과 생각들은 있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배타적으로 상대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지만 구속되지는 않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을 누리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 보보들의 사고 방식이다. 고급스러움과 개성을,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약간은 욕심이 많은 그들은 보보스라 불린다.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교수님의 소개로써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그 만큼 빨리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처음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읽으면서 잘 이해가 가질 않아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읽었던 부분도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지던지...
우리는 지난 7일 토요일, 진주와 정연이와 함께 중앙대학교 아트센터 극장으로 향했다.7호선을 타고 상도동에서 내렸다. 4시부터 연극이 시작이었는데, 서두른 탓인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연극을 볼 생각을 하니 긴장되고 설레임으로 가득 찼다. 비록 문학개론 수업의 과제 때문에 연극을 보러 간 것이었지만, 나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우리가 본 연극의 작품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오델로」였다.셰익스피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시인, 극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왔으며 그의 작품 역시도 지금까지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떨리는 일이었다.내가 그의 작품들을 보고, 읽고 느끼는 것은, 스무 살이라는 영역 안에 제한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햄릿을 고2 때 읽은 적이 있다.그 땐 아, 그래서 비극이라고 하는구나.. , 참 안됐구나.. . 하고 느꼈었고, 그저 상황들을 비극적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연극을 볼 수 있었다.4대 비극을 모두 이해하고 비교하고, 그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델로」...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놀랐다.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예전에는 여기까지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에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내가 감상문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오델로」에 있어서 내 생각과 감정들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셰익스피어의 두 번째 작품인 「오델로」는 흑인장군인 주인공의 아내에 대한 애정이 악역 이아고의 간계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나 심리적 갈등보다는 인간적 신뢰가 돋보이는 작품의 하나이다.「오델로」의 줄거리는 이러하다.베니스의 장군이며 흑인인 오델로는, 무용의 매력으로 원로원 의원의 딸이며, 어린아이와도 같은 청순함을 지닌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얻어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그러나, 청년 장교이며 기수인 이아고가 깊이 그에게 앙심은 품은바 있어 데스데모나를 모함하여 그녀가 마치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꾸며 오델로에게 일러바친다. 맹장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성격인 오델로는 감쪽같이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죄없는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질투한 나머지 목을 졸라 죽인다. 이윽고 이아고의 간계도 탄로 나지만 때는 이미 늦어 결국 그녀가 순결하고 고결했음이 드러남으로써 자결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친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키아벨리즘의 이른바 여우와 사자의 비극, 강하지만 단순한 사자인 오델로가 교활한 여우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버리는 비극을 다룬 이야기로써, 오델로는 인간의 경솔한 의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야기 해주고 있는 작품이다.오델로가 심판관이면 데스데모나는 희생자라는 테두리 안에서 두 인물을 정열, 숭고, 사랑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하고 오델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이 세 인물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보겠다. 오델로는 그 엄청난 스스로의 사랑의 정열에 스스로의 운명만 불사르고 만다. 그의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더 이의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고 사랑과 믿음을 되찾기 위해 그는 스스로 준엄한 심판관이 되어 결국 그녀를 죽이게 된다. 반면 데스데모나의 사랑은 그야말로 숭고한 희생이라 하겠다.「오델로」에서 보여지는 상징성(암시의 장면이나 대사)들을 찾아보자.초반에 이아고와 로더리고와의 대화에서 이아고는 네, 녀석을 주인으로 받들고는 있지만 사실 주인은 나지. 그야 하늘도 알다시피 충성심에 받드는 것이 아니라 가면일 뿐, 실은 속셈이 있지 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아고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이아고라는 인물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 될 거라는 것을 예측 할 수 있다.부러밴쇼는 오델로에게 아내를 속인 여자야. 남편인들 못 속이겠나. 의미심장한 대사를 한다. 오델로가 데스다모나로 인해 사건이 일어 날 것이며 상처를 받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에밀리아의 대사중 의심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뿐이에요. 의심이란 건,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난 괴물이니까요. 이것은 오델로의 의심이 더 커질 것이며 결국에는 커다란 불행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데스데모나가 잠자리에 들기 전 바바리라는 몸종이 부르면서 죽었다는 노래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리고는 바바리처럼 노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는데, 이건 이미 데스데모나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넌지시 작가가 제시해주는 것과 같다.이처럼「오델로」라는 작품에는 암시의 장면이나 대사들이 매우 많은 것 같다.나는 또한 이 작품을 페미니즘 입장에서 분석해 보려 한다.16, 17세기의 적지 않은 영국의 기록들에는 또한 가부장제에 대두한 여성들의 저항의 목소리와 반항하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즉, 남성들이 규정해놓은 가부장제의 관행에 순응하지 않는 도전적인 여성들은 억압과 파멸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저항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활발하게 표면화되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가부장제 사회가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성을 제시해 놓고 모든 여성들에게 그 기준에 따르라고 강요했지만 여성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가 않았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세지면 거세질 수록 남성들의 불안감 역시 고조되면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정도 또한 높아졌으며,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상은 작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당시의 많은 문학 text들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셰익스피어의 「오델로」 역시 가부장제라는 억압적인 지배담론과 여성들의 저항 담론 사이에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이루어지던 시대상황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당신의 가부장제 담론에 맞서는 여성들의 저항의 목소리에 대해 어 입장을 취했는지 현재를 사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에 의해 묘사된 데스데모나, 에밀리아 등의 여성인물들과 오델로, 이아고 등의 남성인물들은 작가의 의도 여부와는 관련 없이 당시의 저항적인 여성상과 이를 억누르려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내 생각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