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열풍1. 한류(韓流)의 정의한류(韓流)란 한국 가수들의 노래, TV드라마, 영화 등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 대만, 일본등 동아시아 국가에서의 유행과 열기를 지칭하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중국어로 같은 발음인 한류(寒流)는 시베리아에서 몰아치는 찬바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댄스음악과 드라마, 패션 열풍이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 몰아쳐 본래의 의미를 바꾸고 이제는 새로운 의미의 한류(韓流)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류는 중국 대륙을 뛰어넘어 홍콩과 대만, 베트남 등 동남아까지 거센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문화가 동아시아의 대중적 문화 영역에서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10대 중심인 대중문화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수한 영역에서의 문화접변 현상이 전체적인 문화상을 변화시키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동일한 의미로 특히 중국에서는 ?한국 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한쭈(哈韓族)와 ‘한국 마니아’란 뜻의 한미(韓迷)라는 언어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으며, 이것을 단순한 문화접변 현상의 결과로 나타난 언어의 생성으로 한정하기에는 그 파급효과와 영향력이 상당히 크게 자리잡고 있다.2. 한류(韓流)의 배경중국에서 한류가 본격적으로 몰아친 것은 1998년 대만에 2인조 남성 댄스 가수 ‘클론’이 상륙하면서부터이다. 일본의 댄스보다 힘이 넘치고 무술을 보는 듯한 극적인 구성의 클론의 댄스는 중국인들의 맘을 사로잡았으며, 무엇보다 쉬운 멜로디로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들로 일찍이 한류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초기 한류의 유형은 몇몇의 인기가수들의 의해서 확산된 한국대중가요의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단지 1~2년만에 중국 본토와 홍콩은 물론 베트남 등 중화 상권이 미치는 동남아에까지 확산되어 이제 한류의 물결은 단지 연예인 몇 명의 유명세를 넘어서서 가요, 음반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게임 심지어 음식과 옷과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퍼져가고 있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 안재욱은 였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가 초래한 중국내의 문화적 충격과 혼란을 한국 풍의 문화가 완충역할을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둘째, 한국문화는 세련되고 화려한 서구 대중문화를 수용하여 나름대로 실정에 맞게 새로이 가공, 독자적 특성을 갖추어 새로이 창조함으로써 기존의 서구문화 또는 일본, 홍콩문화와는 차별화 된 요소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인터넷 등 통신수단의 급격한 발달로 시간적 경과 없이 동양적 정서에 맞게 쉽게 가공되어 침투되었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대만, 홍콩, 베트남 등지에 용이하게 흡수되어 왔다. 셋째, 중국이 개방개혁정책을 전개하는 와중에 홍콩, 마카오 등이 중국에 귀속되고 대만에 대한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다분한 이들 문화들이 쉽게 유입되었고 이에 중국국민들이 홍콩과 대만문화에 너무 심하게 빠지는 상황을 경계한 중국당국이 대중문화의 균형적 성장을 위해 한국연예인들에게 문화를 개방함으로써 외국문화 접촉이 용이해진 것도 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이와 더불어 한국방송물의 중국에서의 인기몰이가 한류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에서 97년부터 한국의 TV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별은 내 가슴에”가《성몽정연(星夢情緣)》란 제목으로 당시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역에 방송되는 스타TV 계열의 중국어 방송인 ‘봉황대(Phoenix TV)’에서 방영되어 예상 밖의 호응을 얻으면서, TV드라마를 통한 한류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 드라마에 등장한 안재욱은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이어 한국에서 방영된 최신 드라마들이 봉황대를 통해 차례로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97년에는 MBC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CCTV의 채널 1을 통해 방영된 후부터 중국 시청자들의 본격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97년 6월 15일부터 12월 14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중국 CCTV 채널 1에서《애정시십요(愛情是什?)》라는 제목으로 방영의 중이다... 지난 해 중국에서 크게 히트한 를 부른 박진영, 중국에서 방영된 한국 TV드라마 ‘미스터 Q'로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 스타가 된 김민종 등이 2001년 판 한류 버전의 주인공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미 이들의 노래를 담은 ‘한류 2집’이 베이징에서 인기 리에 나돌고 있다...한류가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것은 2-3년 전부터. 한국 가요와 드라마들이 TV에 방영되면서 중국인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등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들은 韓迷 (한국 매니아)로 불리는 한국 팬들을 만들어냈다. 으로 김희선과 안재욱이, 최진실은 로 중국 대륙에서도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이 기사를 통해 이종환 기자는 한국서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수와 드라마들이 중국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한국가수를 향한 ‘매니어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계속 한류를 추적한 이종환 특파원이 7월 12일에 쓴 기사를 이어서 보자.“과거 홍콩을 중심으로 대륙으로 퍼져나간 광둥어 노래붐이 이제 한국어로 옮겨 붙었다고 중국인들은 말한다. 신세대 사이에서는 한국 노래 한두 곡 쫌 부를 줄 알아야 따돌림받지 않게끔 됐다. 베이징 어디에서나 ‘ 등 한국노래 음반이 쉽게 눈에 띤다. 한국에서는 유행의 뒤안길로 사라진 도 중국 곡으로 번안돼 한창 택시 안에서 흘러나온다. 는 베이징 가라오케를 석권했다.... 중국 안방에 한국 드라마 붐이 일어난 뒤 한국 노래가 가세했다. 2월에 대성황을 이룬 H.O.T.의 베이징 공연에서는 H.O.T.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렸고, 이내 H.O.T. 상표를 단 화장품도 생겨났다. 젊은이들을 겨냥한 도 이때 생겨나 성업 중이다. H.O.T. 음반은 10만장 이상 팔렸다. 음반뿐만 아니라 가수들도 직접 중국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지난해 후난 위성 TV는 ...NRG를 출연시켜 대성공을 거뒀다. 그 후 코요테, TTMA 구피 등이 연이어 중국 TV에 출연했다. 관영 CCTV까지 한류 보급에 가세, 5월 구이린에서 열린 NRG와 베이비복스 공연 이런 한국 붐은 현지에 있는 기업들의 의도적인 마케팅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엘지전자는 한국서 만든 텔레비전 드라마를 더빙 비용과 함께 기부하였는데, 이런 전략이 한국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 엘지 측의 입장이다. 한국 노래를 듣고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빠져버린 신세대 매니아 청소년들은 패션과 음식, 소비 패턴과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열성적인 팬들은 팩키지 투어를 통해 한국에 순례여행을 떠나며, 꿈에 그리던 스타를 만나고 촬영 장소를 방문한다.그러면 이러한 한류를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불고 있는 한국대중문화 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될 수 있다.첫째, 같은 유교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어 정서적 공감이 가능하며 이것이 적절한 시기에 동아시아 인들의 구미를 돋구었다는 것이다. 특히 몇 해 전 전통유교 사상과 적절한 로맨스가 가미되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사랑이 뭐길래’ 라는 드라마가 최근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데에서 이러한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에서 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때에 전통적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구세대와 톡톡 튀는 신세대의 가치관의 대립을 주제로 방영된 이 드라마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도 구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의 차이로 고민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할 수 있는 드라마로 재미와 감동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노인층의 소외와 젊은 계층의 극단적 반감을 완화시키고 조화와 화합을 아름답게 그려낸 드라마는 중국인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둘째, 한국의 문화는 미국문화와 일본 문화의 장점을 소화한 뒤 그것에 다시 한국만의 독특한 색깔을 잘 가미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은 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미국의 급진적 개방문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그들 자신들도 할리우드영화보다는 한국의 영화를 선호한다고 말하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된다.중국의 한국 대중음악 소개 전문방송인 '서울음악실'이 마련한 한국 가수 모창 대회에는 1백여개 팀 가운데 선발된 7개 팀이 무대에 올라 HOT, SES등 웬만한 한국 사람도 따라부르기 힘든 신세대 가수들의 노래를 한국말로 거침없이 불러 경이로움을 자아냈다"클론, NRG, HOT 등의 세련되고 화려한 댄스가수들이 가세해 한류열풍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특히 HOT은 작년 베이징 공연 이후 발행부수 100만 부가 넘는 음악잡지 ?당다이거탄?의 인기순위에서 5개월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콘서트가 이들의 인기를 유지시키고 한껏 북돋운다지만, 중국과 한국이라는 실제적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중국팬들이 한국연예인들을 접할 기회는 아주 적다. 때마침 다양한 미디어들이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알리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뮤직비디오는 이제 단지 가수와 그 노래를 알리는데에서 나아가 하나의 큰 경쟁력 있는 문화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98년 ‘조성모’의 ‘투헤븐’에서는 드라마틱한 구성과 대스타들의 캐스팅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동아시아의 전체적 대중가요들을 분석해보면 정적인 동양적 가치를 보유하면서도 서구의 댄스음악의 도입으로 점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의 서구적 음악을 수용하고 자국의 방식으로 승화시킨 일본의 음악문화도 무시할 수 없지만 중국, 대만, 그 외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국의 음악을 상업적으로 지원하고 발전시켜나갈 체계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예를 들면 한국 노래들이 중국을 휩쓸기 전까지, 즉 한류가 불어닥치기 전까지 중국에서의 음악은 거의 발라드나 춤이 전혀 없는 정적인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가 나오기 전에 트로트가 주를 이루었으며 개인의 음악적 노력과 성숙된 매니아 층의 확산으로 한국의 음악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되어갔다. 4,5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신세대들에게 선풍적인 이다.
이민 문제는 프랑스 사회의 가장 풀기 힘든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고도 성장을 계속하던 시기에(1960-70년대)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인 데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동구권이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프랑스나 독일에 밀입국하기 위하여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고 있다.외국인은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째는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프랑스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근래 프랑스로 이민온 자로써 주로 포루투갈인이나 알제리, 모로코에서 온 북아프리카 사람들이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프랑스 경제 부흥을 위해 불러들인 사람들로 그 수가 아주 많이 늘어난 실정이다. 그리고 또한 아시아인도 부분적으로 프랑스 인구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주로 정치적 이유로 대량으로 받아들인 ‘보트 피플’이었다.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인 수는 약 45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프랑스 사회에 통합하지 못하는 외국인 2세(Beurs)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약 1400만명(전체 인구의 약 1/4)이나 되는 셈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미움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실업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외국인들이 빼앗아 간 것처럼 생각한다.1977년 프랑스 당국은 이민자들에게 그들의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재정적으로 뒷받침 할 ‘귀국보조’를 법제화하기도 했다.최근의 각종 선거에서 외국인 추방을 강령으로 하는 국민 전선의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프랑스 국민의 감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국민들과 회교도들과의 갈등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체 이민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그레벵(알제리인, 튀니지인, 모로코인)들은 프랑스 사회에 통합하지 못하고 자신들끼리 '게토'를 이루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이민 2세들 역시 최근 급증하는 결손 가정의 프랑스 자녀들과 어울려 청소년 범죄를 증가시키고 있다.******?외국인 ①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 (이탈리아, 폴란드)②경제 부흥을 위해 1960년대부터 들어온 외국인 (포르투갈, 알제리)?1960-70년대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인 데에서 비롯됨.?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인 수는 약 450만 명으로 추산******?프랑스 국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일자리를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1977년 외국인들에게 ‘귀국보조’ 법제화함.?마그레벵(알제리인, 튀니지인, 모로코인)들은 ‘게토’를 이루며 가난하게 생활1)노동제도① 노동 시간1831년에 산업 근로자로서 어른의 경우 14시간~16시간으로 법정화되었던 노동 시간은 점진적으로 단축되었다. 1936년 6월, 인민 전선(Front Populaire)정당은 주당 40시간의 법정 노동 시간 제도를 제정하였다. 1982년 주당 법정 노동 시간은 39시간으로 단축되었다.② 휴식 및 휴가주당 휴식 시간이 1906년 7월에 법률상 주당 연속 24시간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봉급 생활자들은 주당 2일간의 휴식 혜택을 받고 있으며 몇몇 기업들은 주당 4일 근무제를 적용하고 있다. 1936년 6월 20일에 제정된 법률에 의해 연 2주의 유급 휴가를 인정하였다. 1982년에는 유급 휴가가 5주로 늘어났으며(프랑스의 이 유급 휴가 기간은 다른 나라들의 유급 휴가 기간보다 훨씬 더 길다), 그외 경조 휴가 및 교육 휴가와 년 10일에 해당하는 휴일이 있다.③ 퇴직퇴직 연령은 1983년 법률에 의거, 37년 6개월 동안 직장을 다니고 사회 보장 제도의 일반 제도에 분담금을 납부한 모든 봉급 생활자에게 60세로 감소되었다.******1>노동제도?노동 시간-점진적으로 단축되고 있음1936년 인민전선 정당 주당 40시간으로 법정 노동시간 제도 제정→1982년 39시간으로 단축?휴식 및 휴가-오늘날 봉급 생활자들 주당 2일간의 휴식 혜택몇몇 기업들 주당 4일 근무제를 적용?퇴직-1983년 법률에 의거 60세로 감소2)노동조합노조 가입자수는 현재 매우 소수에 머무르고 있다 : 대략 봉급 생활자의 10%만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다.또한 프랑스 노동 조합은 복수노조주의의 특징을 지닌다 : 노동자의 조합 활동은 무정부주의, 프루동 학설, 마르크시즘, 개량주의, 기독교 등 여러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요 노동 조합들의 역사는 분열로 점철되어 있다.오늘날 프랑스의 제1노동조합은 비조합원들의 노조라 할 수 있다.① 노동 총연맹(C.G.T.)② 프랑스 민주주의 노동연맹(C.F.D.T.)③ 노동자의 힘(F.O.)④ 프랑스 기독교 노동자 동맹(C.F.T.C.)⑤ 간부 총연맹(C.G.C.)⑥ 국가 교육 연맹(F.E.N.)*******2>노동조합?현재 노조 가입자수 매우 소수에 머무르고 있음?오늘날 프랑스의 제1노동조합은 비조합원들의 노조라 할 수 있음① 노동 총연맹(C.G.T.)② 프랑스 민주주의 노동연맹(C.F.D.T.)③ 노동자의 힘(F.O.)④ 프랑스 기독교 노동자 동맹(C.F.T.C.)⑤ 간부 총연맹(C.G.C.)⑥ 국가 교육 연맹(F.E.N.)cf)노동 총 연맹 (CGT) 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프랑스 최대의 노동 조합 중앙 조직이다. 1895년에 설립되어 20세기 초에는 생디칼리즘(혁명적 조합주의)를 표방하고 '자각한 소수자'에 의한 '제네스트'(직접 행동)를 통하여 사회 혁명을 지향하였다. 1906년의 대회에서 채택된 '아이앵 헌장'이 그 정점이며 이를 통해 정당의 존재를 부정하고 직접 행동에 의해 사회 혁명을 실현하며 노동 조합이 생산과 분배를 조직화하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선언하였다.그러나 1907년 직접 행동에서 패한 이후 생디칼리즘은 퇴조하기 시작했고,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서기장인 L. 주오 등 주류파는 지금까지의 반전 입장을 버리고 정부와 '신성 동맹'을 맺고 전쟁 협력으로 바꾸었다.제1차 세계 대전 때 주류파가 단체 교섭을 중요시하는 '개량주의'의 길을 취했던 것에 반대하고 볼셰비즘의 입장에 선 소수파가 1922년 탈퇴하고 통일 노동 총 연합(CGTU)을 발족시켰다.인민 전선 정부가 성립되기 2개월 전인 36년 3월, 양자가 통합되었으며, 그 후의 공장 점거 투쟁 등을 고양시키는 한편, 노동 조합 가입의 완전 자유, 직장 위원회의 임명, 7-15%의 즉시 임금 인상 등을 보장한 '마티뇽 협정'을 성립시켰다.
서양 미술의 이해1. - 라스코 동굴 벽화라스코 동굴 벽화는 프랑스 도르도뉴현(縣)의 몽티냐크 마을에 있다. 1940년 이 마을의 소년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동굴의 벽면에 그려진 채화와 각화(刻畵)는 800점 이상이나 되며, 들소 ?야생마 ?사슴 ?염소 등이 주로 그려져 있고, 고양이나 주술사(呪術師)와 같은 인물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동굴에 그려진 동굴벽화는 알타미라동굴의 벽화와 함께 프랑코 칸타브리아 미술의 가장 유명한 구석기시대 회화로 여겨지고 있다. 동물화는 대개 크게 표현되었으며, 주동굴(主洞窟)에 있는 검은소 등은 가로가 5m 이상이나 된다. 동물상은 어느 것이나 약동적이며 생기에 넘치고, 기법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어 보인다.수렵이나 채집의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어둡고 침침한 동굴에서 살아갔던 우리 선조들도 주변을 아름답게 하려했던 욕구가 당연히 있었던 모양이다. 벽화를 보고 참으로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물이구나 새삼 느꼈다. 주로 그림들은 자손의 풍요나, 사냥의 성공 등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동물 그림들이다.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 것 만같이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잘 표현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무엇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혔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그림들을 보고 또한 그리면서 그들의 기원들을 빌었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웃음이 나왔지만 다시금 조상들의 생활을 알게 한 좋은 계기가 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2. - 카타콤 내부의 벽화카타콤 벽화는 기독교 초기미술을 보여주는 벽화로 1874년 스페인의 한 귀족이 알타미라 지방에서 채석작업을 하던 중 암벽에 여러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동굴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야생의 소와 말들 그리고 맘모스,사슴 따위의 동물화였다. 이 그림 들은 약 3만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사냥이 잘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로 카타콤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한다고 한다.피에트로대성당 입구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또한 이 조각의 얼굴은 비잔틴 시대의 것을 그대로 표현하였고 기하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는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옷주름을 표현 했는지 신기했다. 그들의 능력에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4. - 최후의 만찬작품의 제목은 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으로 1493-1497년 제작된 벽화 템페라이다. 이 작품의 크기는 460 x 880cm 정도이고,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로서 1999년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이 그림은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에 이르는 내용을 조형화한 것이다.이 작품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 출생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로써 그의 특색화면 한 가운데 위치한 예수의 몸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원근법으로 작품이 짜여져 있지만 감상자의 입장에 그 원근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이상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음을 의미한다.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뛰어넘는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독창성,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형식미,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뛰어난 방식 등 이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된다.5. -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이 작품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적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화를 칠해 만든 작품으로 1857년에 제작되 현재 파리 루브르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그림은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나이 든 세 농촌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앞부분은 농촌의 실제 생활을, 뒷부분은 아름다운 자연과 목가적인 농촌을 그렸다.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란스러움은 멀리 원경으로 밀려나 있으므로 화면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어 세 사람의 모습에서는 엄숙함까지 느껴진다.두 여인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한 여인은 자신이 모은 이삭들을 간수하고 있다. 시선은 오른쪽 끝 여인에게서 왼쪽의 두 여인에게로 부드럽게 흘러가서 세 사람을 한 무리로 파악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엷은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높이 쌓인 수확물들이 길게 늘어져 고전적인 풍경을 이루고, 오른쪽 건물 앞에는 말에 탄 지주가 일꾼들을 지켜보고 있다.노르망디의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가난한 생활을 했던 밀레는 과장하거나 감상도 섞지 않고, 일하는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당시 비평가들은 농민의 모습만을 계속 그리는 밀레를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였으며, 1857년 살롱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도 농사 일을 하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거만하게 표현되었다거나 '하층민의 운명의 세 여신'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밀레는 물람들에게는 분명히 충격이었고 신기풍이었다.생활의 한 정경에 나체를 들고 나온 주제의 대담성이 자극이었을 뿐 아니라 그늘에서 빛으로의 이행 부분을 없애고, 밝은 표현(나부의 살갗)이나 어두운 표현(남성의 복장)도 그 자체의 색체에 의해 평면적으로 포착, 그 색채를 극심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른바 [인상파]가 탄생되는 계기를 만든 이 작품은 나체 여성에 남성을 배치한 구상은 지오르지오네를 따랐고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라파엘로의 데생에 의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만든 동판화 을 따른 것이었다.마네는 그림에서 상징적인 내용을 걸러 버렸기 때문에 작품이 발표된 당시에는 회화의 이 작품과의 관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7. - 생각하는 사람작품은 프랑스의 조각가 A.로댕의 청동조상 생각하는 사람이다. 크기는 186cm이고1880년에 제작되어 현재 로댕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초에는 이란 이름이 붙여져 의 문 윗 부분에서 아래의 군상(群像)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서 크게 하여 발표,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단테의 을 주제로 한 의 가운데 시인을 등장시키려고 하는 로댕의 시도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영원히 계속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력하게 표현한 작품이다.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작품을 보고 진정한 예술이란 자연이 인간에게 비친 모습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다. 그것들은 어떤 생명적 통일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 색채는 단지 세가지로 격렬함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어, 마티즈 자신이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르와 등가의 것을 만들어 낸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이처럼 마티스의 작품에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종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주관적인 색채 표현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가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인 듯하다.9. -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바블로 피카소가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며 크기는 243.9×233.7cm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세 이름은 이다.화면에는 5명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가하학적 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조각을 나눈 뒤 한 화면에 종합하여 배열한 듯하다. 공간적 배경은 푸른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윤곽만을 표현하여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가운데 두 여인은 최초의 구상 단계를 유지한 편이나, 양쪽의 여인 셋은 신체의 조각들을 섞어 조합한 듯한 모습니다. 왼쪽 눈은 정면을 보지만 오른쪽 눈은 4분의 3각도로 옆을 쳐다본다. 또 등을 보이고 않은 아프리카 가면을 쓴 듯한 여인은 정면을 응시한다.파블로 피카소는 1905년에 이 작품을 구상하였다. 그는 100여 장이 넘는 소묘를 그리고 무수한 덧칠 끝에 이 대작을 완성하
프랑스의 유치원 교육과 우리나라의 현실아이들이 자라고 배우는 터전은 바로 가정이며, 가정에서 갖는 다양한 경험은 장차 아이의 지적?정서적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어렸을 때의 경험이란 어린이 자신의 의지나 흥미도 영향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모가 어떻게 해주는냐에 따라서 그 질과 양이 좌우된다. 때문에 부모와의 상호작용이라든가 부모의 양육 태도 등이 어린이의 성장 발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아니들이 같은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려 놀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기 힘들다. 또한 유치원 선생님처럼 효과적인 지도를 통해 좋은 습관과 태도를 길러 주고 지적 경험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유치원은 이와 같이 가정에서 체계적으로 제공해 줄 수 없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보충해 주고 효과적이게 어린이들을 지도 하는데 목적이 있다.현재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유치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 명칭이라든가 유치원 교육에서 강조되고 있는 면은 나라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국은 초등교육 준비를 위한 주비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프랑스나 영국 같은 유럽에서는 어린이들의 올바른 생활 습관, 원만한 성격형성등을 중시한다.이제부터 세계 최고의 유치원 취원율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유치원 교육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만 두 살이 된 어린이들은 유치원에 다닐 수 있다. 한 반에 평균 25명의 어린이들이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무상으로 교육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유치원이라는 존재는 초등학교 취학을 앞둔 예비교육이라는 측면과 직장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어린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만 2세라는 어린나이부터 유치원에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상이라는 점이 눈에 띄게 다르다. 프랑스 정부는 이와 같이 교육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뜻 있는 유치원 교육의질을 높이고 양을 늘리는 등 많은 면에서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수준이 된 것임에 틀림 없다.본론으로 들어가서 프랑스의 유치원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 것일까? 과연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슷한 수준은 아닐까? 그 대답은 확실하게 “Non"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유치원을 학교라는 수준에서 체계적이고 알차게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정규 대학 수준 이상의 전문 엘리트 배출기관을 ?Ecole?이라 부르는 프랑스에서 유치원을 ?Ecole?이라 표시하는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은 어떠한가?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한국의 유치원은 탁아원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직업을 가진 직장부모들의 경제적 편리함 때문에 아이들을 잠시 맡겨 두는 정도의 그런 탁아원 말이다. 단지 탁아원이라는 의미에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유치원을 학교라는 수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유치원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수업을 받게 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쓰기, 읽기는 물론 간단한 덧셈과 뺄셈같은 산수도 가르치는 것이다. 또 즐겁게 그림그리는 것도 자주한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어린이들에게 짧지만 아름다운 시를 암송시킨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어렸을때부터 시를 암송하게 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단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훈련도 유치원에서 철저하게 지도하고 있다. 자기 옷과 신발을 정돈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말이다.한국과 차이가 나는 점 하나가 프랑스인들은 특히 자기나라 말인 모국어, 불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국어에 대한 교육을 가장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모국어를 사람하는 마음 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렸을때부터 조기교육이다 뭐다 영어 가르치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깊이 반성하고 또 해야 될 문제이다.프랑스의 유치원 체제에서도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프랑스 유치원 선생님들은 흔히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유치원 보모들과는 다르다. 교실과 운동장에서 당당히 선생님으로 행세하는 것이다. 화장실과 식당, 유치원앞 보도 에서는 정부에서 고용된 아줌마와 여순경들이 어린이들을 보살펴 주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나라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 정부가 그런 지원을 해주리라곤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다. 역시 프랑스 정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는 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더 들게끔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내가 프랑스 유치원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교육적인 면에서 특히 감동받은 것은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자녀에 대해서도 그들 국민들과 똑같이 아무런 차별없이 교육의 혜택을 베풀던 프랑스라는 나라의 관대한 자세였다. 이것도 하나의 똘레랑스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점은 확실치 않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프랑스 자기나라 교육에 대한 자신감 만큼은 크다는 것이다. 얼마나 부러운가? 자기 나라 교육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우리나라도 언제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우리 학부모들의 교육열과 어느나라 어린이들에뒤지지 않는 자질을 가진 우리 2세들은 상대적으로 모순 그 자체인 열악한 상황의교육 환경과 정신차릴 여유 없이 바뀌는 제도에 맡겨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용어는 1960년대 후반에 비평적 담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개념으로서 이것은 모더니즘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취하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모더니즘의 총체와 이론에 대해, 즉 구조주의에 대해 결정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용어는 자주 포스트구조주의와 연관되어 논의된다. 이 두 개념은 물론 공존하지만 어떤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구조주의에 속한 어떤 이론적 운동이라기보다 특정 시대, 특히 1980년대, 1990년대를 지칭하는 것이라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쉬운 개념 규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을 인식하는 데는 여러 다른 방법이 있다. 이들 서로 다른 방법들은 전적으로 상호 모순된다고 할 수 없지만, 사상가, 저자, 이론가들의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한 개념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갖는 복수성을 말해 주는 것이고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에 대한 비난을 돌이켜볼 때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바로 이런 접근 방법의 복수성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와 자주 연관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의 어려 문제들을 열어젖히는 데 관련되어 있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이론을 구성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의제들과 공명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식된다. 이것들은 저자들이나 이론가들의 입장에 따라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그러한 멘탈리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진보와 이성과 과학에 대한 모더니즘의 이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전자의 경우에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던 조건은 이데올로기의 죽음을 알린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경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세계의 우위성, 성차의 구성과 기능을 정당화하는 과학의 정통성, 그리고 대중 문화에 대한 고급 예술의 우위 등의 모더니즘적 신년에 대한 새로운 회의주의를 알리는 것이 된다.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대화, 소비 사회)와 테크놀로지(미디어)와 관련해서 - 과 일맥 상통 한다는 점이다. 서구적 개념 규정과의 양립성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되돌아보고 회고적일 뿐 아니라 타자로서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현재를 벗어나며, 현재 이후에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 역사성의 결여(오직 과저와 관련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서)와 역사에 대한 거부 그리고 그 자신의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 단지 타자의 것만을 가지고 있다 - 포스트모던은 일련의 현재들 속에서만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위치시킨다.이런 흐름은 처음에는 비극적 모더니즘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비역사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서 자신의 유산을 발견한다. 이둘 다는 비견할 바 없는 억압과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만들어 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우리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자료 필름들이 많지 않다고 해도 필름 보관소의 영화들은 참호 속 전쟁의 공포를 충분히 전해 준다. 보다 최근에는 유태인 학살의 묵시록적인 참상과 원자 폭탄 투하가 모더니스트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거의 대답 불가능한 질문을 안겨 주었다. 발명과 고안이 이렇듯 인간성의 전적인 절멸로 귀결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곤혹스러운 질문의 집합에 대해 보다 비관주의적인 양식의 모더니즘은 세계를 단편화되고 부패한 곳으로 제시하고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불가능한 곳으로 보여 준다. 같은 질문에 대해 포스트모더니티의 비역사적 해석을 제공하는 이론가들에 따르면, 과거와 관련해서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포스트모던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지배적인 경향은 보수적인 문화 상품을 공급하는 과거에 대한 비대항적이고 단방향적인 회고이다. 즉 이것은 주류 문화이다. 소수의 문화는 아방가르드적이고 대항적이다.그리하여 현대의 문화적 미학과 관련해 포스트모던은 두 가지 양식을 채택한다. 주류 양식은 매너리즘과 양식화 그리고 플래시백을 위해서 는 (빌리 와일더, 1950)의 앞부분을 쓸 수도 있는 식이다. 로버트 알트만은 (1992)에서 이 사건 조립의 페스티시 문화에 대해 언급한다(두명의 스튜디오 시나리오 작기들이 와 을 결합했을 때 어떤 대본이 나올 것인가를 논의한다).이러한 사건 조립의 맥락에서 볼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대단히 교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영화적 인용구의 액자 구조화처럼 보이지만 이 인용구의 상호 조정이 대단히 뛰어나 패스티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패러디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인용할 것들을 선택한 다음 이를 전복시킨다. 예를 들면 (1992)를 보자. 빈 창고에서의 10분에 이르는 고문 장면은 가히 놀랄 만큼 공초에 가득 찬 동시에 대단히 코믹한 장면이기도 하다. 고문자인 다소 정신병적인 미스터 블론드가 1970년대 노래인 - 마약에 취해서 보는 현실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편집광적인 것에 관련된 노래 - 에 맞추어 춤을 추기 때문이다. 그는 희생자를 난도질하면서 노래에 맞추어 “내가 즐거웠던 것처럼 자네도 즐거웠는가?”라고 묻는다. 타란티노에 따르면 여기서의 영화적 인용은 코믹한 것과 공초적인 것을 결합한 애벗과 코스텔로의 괴수 영화이다. 이것은 또한 외양상 불필요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스콜세지 영화들의 폭력 장면을 상기시킨다.(예를 들면 , 1976). 이 장면도 영화에서의 다른 인용과 마친가지로 B급 영화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다시금 이것들은 그 극단에까지 밀어부쳐진다. 이 고문 장면은 특히 경찰과 갱스터 간의 박력 있는 총격전이라는 영화적 환상을 조롱한다. 여기서는 음악과 춤에 맞추어서 귀가 잘려지고 얼굴은 엉망으로 뭉개지며(총도 쏘기 전에 말이다), 음악과 춤에 맞추어서 사람이 불에 탈 준비가 된다. 정확하게 바로 이런 장면에서 아 영화는 패러디적인 것을 획득한다. 이러한 폭력의 사용을 통해 타린티노는 관객 - 영화의 관계가 사도마조히즘적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미스터 오렌지와 함께 피를 흘리면서 창고에서 죽어 갈 수도 있지만 출하는데, 물론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져 주기로 약속하고 링 위에 오르는 권투 선수, 누군가를 죽이는 임무를 띤 두 명의 갱, 영화 속의 등장 인물들도 물론 상호 텍스트적일 수 있다. 다시 타란티노 영화의 예를 들면 권투 선수 부치는 (로버트 올드리치, 1955)의 등자 인물 마이크 해머와 (자크 터너, 1956)에서의 배우 알도 레이의 외모의 상호 텍스트 이다.마지막으로 여러 개념 가운데 브리콜라주를 언급해야 한다. 이것은 여러 다른 스타일, 텍스처, 장르, 담론들의 조합이다. 대항적 포스트모던 예술이 있어 이는 한 담론 내에서 다른 단론의 혁신을 모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가령 누보 로망 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해체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랭 레네, 알랭 로브그리예의 영화에서 방향성이 모호한 몽타주를 사용함으로써 그대로 모사된다. 영화에서 다른 미디어의 질감을 모사하는 것으로 가장 흔한 경우는 1980년대의 많은 영화에서 - 주류 영화든 카운터 시네마든 간에 - 발견되는 비디오와 회화의 조형성일 것이다.주류 포스트모던 영화에서 장르는 복제될 뿐 갱신되지 않는다. 소재, 주제 및 스타일에 있어 오늘날의 관객은 모더니즘 영화의 이미지를 보든지 아니면 자기 시대의 미디어적인 이미지를 다시 본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사회적 혹은 정치적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스티븐 프리어즈, 닐 주던, 데니스 포터 등이 영국과 아일랜드 영화에서의 드문 예일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주요 이슈들은 영화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 주제의 소멸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영화의 매너리즘과 일치한다. 첫째로는 장르 및 지나간 영화들에 대한 거의 광적인 고착이다. 즉, 가장 나쁜 형식의 노스탤지어라고 할 만하다. 두 번째로는 텔레비전의 시각적 담론에 대한 천박한 모사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상 현실과 컴퓨터 그래픽의 세계를 실재의 위치로까지 조작해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주류의 포스트모던 영화 감독들은 대문자 C로 표기되는 문랑이 조지야식 창문과 결합되는 식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정신 분열증이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거부한 결과라고 본다. 보드리야르는 이 탈산업 사회를 커뮤티케이션의 황홀경에서 사는 스펙터클의 사회로 본다. 그는 이 사회가 전자 대중 매체에 의해 점유되었고 시뮬레이션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본다. 보드리야르는 이 탈산업 사회가 재생산과 재활용 사회여서 현식적인 것을 생산하기 보다 초현실적인 것을 재생산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것이 아니며 재생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재생산된 것, 즉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현실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것의 모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한 시뮬레이션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비교의 준거점으로서의 원전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현실적인 것과 그것의 복사물 사이의 구분도 별 의미가 없게 된다. 바로 재현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암묵적으로 소멸되는 것에서 보드리야르는 개인의 죽음을 인식한다.이 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업 기계가 개인(주체)에게 미치는 효과와 탈산업 사회의 기계가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우선 산업 사회의 기계가 생산을 위한 것이라면, 탈산업 사회의 기계는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산업 사회의 기계는 주체의 소외를 야기한다. 즉, 주체는 더 이상 생산 양식을 통제하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에 탈산업 사회의 기계는 주체의 단편화와 재현 속에서 주체가 분산되는 것을 초래한다. 그것은 역사를 갖지 않으며 영원한 현재에 붙들려 있다. 그것은 사실상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크 라캉에 따르면 시간성의 경험과 시간성의 재현은 언어의 효과이다. 그래서 만일 주체가 시간성의 경험을 가질 수 없다면, 즉 과거 혹은 미래와 연계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나’를 재현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 분열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