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이마트§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은 1930년 미쓰코시 경성지점으로 1945년 삼성생명이 인수하여 동화백화점으로 운영하던 중 1963년 (주)신세계백화점으로 상호 변경하여 오늘날 극내 최고의 백화점으로 한국유통업을 이끌어 왔다.1992년 삼성그룹과의 독립인정발표가 있은 후,유통전문기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1992년 독립한후 ,독자경영 기반구축을 위해 사업다각화에 박차를 가하여 1993년 이마트 창동점을 개점을 시작하여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시스템, 신세계 인터네션날, 신세계 I&C, 조선 호텔 등을 사업부 및 관계사로 사세를 확장하여 경영하여 왔다. 현재는 유통을 중심으로 건설, 호텔, 정보통신사업부 등 4대 핵심사업군을 설정하여 지속적인 확장을 하고 있다. 신세계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판매점을 도입하였는데 그것이 한국형 디스카운트 스토어인 이마트였다. 국내 최초의 할인점인 이마트는 국내 유통업태의 변혁을 가져왔고, 현재전국에 14개의 점포로 확장하였으며 할인점부문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이마트 사업부는 신세계의 주력사업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마트는 6개의 백화점 점포아 더불어 신세계백화점의 양대축을 구성하여 매출규모 2조 2천억원을 상회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여 왔다.#이마트의 중국진출신세계는 국내유통시장의 개방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항에서 보다 공격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993년 이래 홍콩사무소를 중심으로 중국유통시장 진출을 검토하던 중 일본계 유통업체인 야오한의 요청을 받고 상해 포동지구의 넥스테이지 쇼핑물 1500평을 600만 달러에 임차하여 신세계백화점을 개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세계에 좋은 인식을 갖게 된 상해시의 고위인사가 상해시 인민정부 상업위원회산하 국영기업인 상해상업주심주식회사를 신세계에 소개하여 상해상업신세계백화점유한회사(이마트)를 신세계 500만 달러 상업중심 10만달러의 자본금으로 특혜적 합작회사를 1996년 말에 설립하게 되었다.이마트는 장기적으로 볼 때 국내시장만 가지고는 점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신세계로서는 중국진출이 중요한 사안이었으며 국내 유통시장개방에 따른 외국업체들의 국내진출공세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서도 중국진출은 그 필요성이 컸다고 할 수 이다.상해 이마트는 시간이 촉박했고 여건이 미비한 가운데 개점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상해상업중심주식회사는 대외관계와 행정적인 업무를 도와주는 가운데 본사파견직원들과 현지사원들이 단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점포를 열어야 했으므로 매일밤 철야 작업을 하다시피 준비에 매달렸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결과 예정된 날짜에 성대한 개점식을 가질수 있게 되었으며 개점 첫날은 너무 많은 인파가 밀려 현지 경찰이 입장인원을 제한할 정도였다.유통업의 해외진출은 유통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제조업자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상해 신세계백화점은 우리나라 유통업체로서는 최초로 해외진출이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상해이마트는 할인점으 도입시깅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중국시장에 한국 유통업체의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선진국의 유수한 유통업체의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해시에 출점하여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한국유통업의 수준을 중국소비자에세 알리고 있으며 추후 진출에 따른 인지도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상품과 친절한 서비스의 우수한 점포로 이마트는 첨단의 할인업태로서 이미지 구축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세계 이마트는 중국시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일종의 안테나숍 기능을 하고 있다. 이들 점포르 중심으로 점포개발의 경험과 중국시장에 관한 정보가 축적되면 앞으로의 신규점포개발에 대한 시행착오가 줄게 되어 출점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한국인력이 파견되어 실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인력양성의 효과도 있다.#중국의 유통시장중국은 인구 14억의 거대 시장으로 전세계 유수기업들이 앞다투어 진출하고 이다. 현재 빠른 속도로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있으며 1993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이, 편의점, 하이퍼마켓, 전문점 등 다양한 업태가 일본, 홍콩, 유럽계 고매업체들에 의해 도입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야오한, 다이에이, 지스코, 이또요가도 등은 슈퍼마켓의 진출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고 서구 유통업체로는 까르푸, 월마트, 메트로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유통시장의 변화는 대도시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특히 해안 지역의 도시들과 홍콩 인접도시들에서는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소비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여러 대도시 상권 중 신세계가 진출해 있는 상해시의 상권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상해시는 중국 제일의 도시로 면적이 서울의 10배 인구는 약 14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1인당 소득 및 소비가 북경, 천진 등 다른 도시보다 높은 수준이다. 중국내 다른 지역보다 높은 소득 및 소비지출을 배경으로 상해시에는 다양한 형태의 소매업이 발달하고 있다. 상해 시내에는 중국계 백화점, 슈퍼마켓 뿐 아니라 외국계 백화점, 할인점, 슈퍼마켓 등이 다수 진출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 시가지인 포서지구에는 상해제일 백화점, 화련 상하 등 중국으 상위권 백화점들이 운영중이며 외국계 업체들도 다양한 업태로 영업하고 있다. 백화점으로는 이세탄, 쁘랭당, 태평양, GMS 등이 영업중이며 할인점으로는 쟈스코, 까르푸, 메트로, 슈퍼마켓으로는 야오한, 다이에이 등의 외국업체들이 진출해 있다. 포서지구 이외에 황포강 동쪽에 위치한 포동지구의 개발이 현재 가속화되고 있어. 이지역의 상권도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포동지구는 중국정부가 금융의 중심지로 육성할 계획이며, 현재 신공항 및 다수의 고층건물이 건설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지역 상권은 아직 미약한 편이지만 곧 거대한 상권으로 부상할 전망이다.#현지화 전략1)상 권이마트는 1997년 2월 상해 포서지구에 위치한 트레리드센터 건물 1,2층을 임차하여 영업면적 3천8백 평의 대형매장으로 현지의 상업중심측과 합작형식을 취하여 이마트를 개점하였다. 이마트 상해점이 들어 선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포동신구의 종합개발계획과 포서지구 내 개발구 추진계획을 근간으로 태평양 서안의 금융, 무역, 과학기술, 문화, 정보의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2)상품구성이마트는 1층의 약 2천 평 매장에 식품과 비식품 등의 생활필수품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2층은 남녀 의류, 패션잡화, 레져, 생활, 문화용품 등을 취급하며 임대상가로 운영되고 있다. 1,2층 전체는 원스톱쇼핑이 가능한 전 생활공간의 컨셉을 가지고 있으며 취급상품의 종류는 1만5천 품목정도 이고 시중가보다 20-40%정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잇다. 이마트는 현지화전략으로 중국인들의 특성중 하나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점을 공략하기 위해 각 진열대마다 매일 2-3개씩 신상품을 구비함으로써 개점 초기 7천여 종이었던 상품의 수가 현재는 1만 5천여 종으로 늘었다. 신상품을 단순히 새로 진열해 판매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연판매나 시식코너를 운영하는데 시연판매나 시식행사는 고객들을 끌어모으는 효과가 있는 행사이다. 일례로 지난 9월 갓 잡은 연어구이 시식을 실시한 결과 30분 동안 50킬로의 연어가 절판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상해는 중국에서도 가장 번화한 도시지만 아직까지 사회주의 생활패턴이 많이 잔재해 있으며 또한 국가에서도 생필품을 제외한 사치품의 소비에 대한 제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식품쪽의 상품비중을 60%이상으로 높였다. 특히 식품 중에도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단 것을 좋아하는 특성을 감안하여 과자쪽을 강화했는데 과자는 전체 식품중 10%가 넘는 매출비중을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최근에는 구정선물로 인기를 모아 기업이나 단체들이 대량구매를 하고 잇다. 중국은 아직 사회간접시설 중 물류 등 제반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내륙에 위치한 상해는 신선한 채소나 과일, 수산물의 공급이 좋지 않다. 따라서 이마트는 다소 물류비가 많이들더라도 신선한 채소와 과일 수산물을 직접 공급하는 직영체제를 운영함으로써 고정고객을 다수 확보하게 되었다. 채소있으며 이미트는 전단광고를 항상 같은 크기에 일정한 포맷으로 함으로써 광고지만 보더라도 이마트 광고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광고지를 보고 쇼핑을 오는 고객이 50%이상이며 , 상품가격표시, 판매행사 고지, 상품설명 등의 ㅔㄹㅎ를 까르푸보다 2배 이상 점내에 설치하고 광고물도 시작적 효과가 크도록 이마트 고유의 노란색과 중국의 빨간색을 혼용해 사용하여 고객들이 원래 구매하려고 했던 품목 이외에도 다른 상품에 관심을 가질 수 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이마트는 가르푸가 할인행사를 실시할 때 행사르 진행함은 물론 까르푸가 행사를 전혀 하지 않을 때에도 깜짝행사를 실시함으로써 까르푸를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례로 월드컵유치로 프랑스 다농요구르트사에서 점내에 미니 축구장을 설치해 골인시키는 사람에게 경품을 주는 행사를 이마트가 프랑스업체인 까르푸보다 먼저 유치해 실시하기도 했다.#문제점 및 향후 계획중국의 유통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단 독 투자를 불허하고 합작 또는 합작 투자만을 허용하는 제도적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소매업만 허용하고 도매업은 원칙적으로 불허하지 만 시험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동일 지역내에 허가 업체수를 최대 2개로 제한하는 정책등의 제약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점과 더불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정책조정이 잘 안되어 혼선을 빚는 경우도 많다. 이는 법규미비와 투명성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중국정부의 외자기업의 내수 활동에 관한 법체계가 정비되지 않아 관련 법규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법규가 있을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법체계의 허술함은 중국진출시 큰 문제점으로 나타니고 있다. 신세계의 경우도 진출 초기 한국상품의 중국수출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기지고 전체 상품의 90%이상을 한국제품으로 구성하였으나 중국정부의 자국상품 판매압력으로 현재는 단지 5%의 한국 상품만이 판매되고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
§한국의 씨티 은행§최근의 세계 금융시장에서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의 하나를 금융의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내지는 세계화라고 이름 붙이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씨티뱅크는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은행 중 하나로서 90개 이상의 국가에 진출하여 약 8만5천명의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은행 중 지난해 가장 많은 순익을 거둔 은행이기도 하다.씨티은행의 이런 급부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소비자 금융에 대한 집중투자와 함께 수익성이 좋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사업확대였다. 소수의 개업에 의존하는 도매금융보다는 일반고객을 상대로 하는 소매금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현금인출기(ATM)를 도입, 대 고객서비스를 강화하고 신용카드사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나갔다. 씨티은행이 금융권에서 최초로 ATM을 도입하고 미국 전역에 ATM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76년. 다른 미국은행보다 무려 10년이나 앞선 것이다. ATM의 등장으로 씨티은행은 일반 미국 고객으로부터 대대적인 호응을 받았다. 시간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은행창구 앞에 서서 기다리기 보다는 손쉽게 돈을 넣거나 뺄 수 있는 ATM을 찾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 씨티은행 고객의 80%가 ATM을 이용하고 있고 하루 거래량의 절반이 ATM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ATM을 소비자의 눈에 쉽게 띌 수 있고 접근이 용이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씨티은행을 고객에게 친숙한 은행으로 만들었다.#한국의 씨티은행씨티은행은 1967년 우리나라의 기업들에게 기업금융(corporate finance)을 제공하면서 한국에 진출했다. 씨티은행은 당시 국내재원을 통해서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던 포항제철, 한국전력, 전주제지, 상업은행, 외환은행 등의 기업들에게 상업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월남전 종식 후 70년대 중반에는 우리해외건설업체들에게 현지금융 및 건설보증을 제공함으로써 해외건설 붐을 일으켜 건설 금리보다는 대 고객 서비스, 다양한 상품, 공격적 마케팅으로 국내 금융시장을 파고들고 있다.씨티은행 한국지점은 1967년에 기업금융을 시작으로 국내영업을 시작했지만 1986년부터 시작된 소비자금융 부문이 동 은행의 전략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금융 부문은 1986년 광화문에 서울지점을 개설한 이후 같은 해 부산지점을 개점했으며 압구정, 명동, 대치, 방배, 여의도, 강남, 반포, 올림픽, 남천동 등 11개 지점들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다. 씨티은행은 주로 중산층 이상의 고객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은행거래에 있어서 금리 등의 금융조건뿐만 아니라 쾌적한 은행 내부, 집기 및 친절제일의 서비스 등 비 금융조건에서 시중은행들과 경쟁하고 있다. 고객 수에 있어서 씨티은행은 약 1%의 시장점유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씨티 소비자금융의 영업전략은 가계자금을 흡수하여 다시 가계자금으로 방출하는 소비자금융의 중개역할을 하는 데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영업의 모든 운용기준을 소비자에게 두고 있다. 즉, 신상품의 개발, 대 고객 서비스의 제고, 지점망 확충 등 모든 영업활동이 소비자만족의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전략들이 시행되고 있다.점포 전략으로는 지점을 인구밀집 지역에 집중시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지점망으로부터 야기되는 영업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각 지점의 단기간 내 흑자전환을 꾀한다. 적정인원을 배치한 소규모 점포를 주종으로 ATM과 같은 지점 외 경로의 판매방식을 혼합하여 인력부족을 보완하고 인건비 등의 경비절감에도 주력하고 있다. 상품 및 영업 전략으로는 중장기 투자성 예금의 경우 경쟁은행보다 1% 이상 높은 금리를 제공하며 단기 거래성 예금의 경우 24시간 영업체계, 씨티뱅킹 등 질 높은 서비스를 통해 고객층을 넓히고 있다. 전문화된 영업부서 간의 유기적인 운영으로 영업력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씨티은행 한국지점의 영업조직은 일반 불특정 고객에 대한 상품소개 및 홍보를 담당하는 마케팅부, 대출을 연계시키는 상품도 연구했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이 냉담할 것으로 분석됐다. 그 즉시 상품도입은 포기됐다.점포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씨티은행의 국내점포는 모두 11개. 지난92년 부산 남천지점 이후 신규개설을 하지 않았다. 목 좋은 곳이 많았지만 수익률게임에서 성공할 것 같지 않았다는 게 씨티 관계자의 설명이다. 씨티은행은 이렇게 벌어들인 돈 중 30%를 지역사회에 투자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다."지역사회가 우리에게 비즈니스를 하도록 허락해줬다"는 존 리드 회장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씨티직원들은 "한국에서 1백~2백년만 영업하고 철수할 씨티가 아니다"고 되뇌인다. 일찍 눈떠 멀리 내다보는 씨티은행의 모습이다.1. 매트릭스조직 리스크예방- 씨티은행 서울지점 대표실의 정회승 부장은 보고채널이 5개다. 한국대표, 뉴욕의 도매금융담당, 아시아태평양 지역 및 북아시아지역의 커뮤니케이션담당, 런던의 이머징마켓담당 등. 물론 모든 사안을 5개 채널에 보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고객, 지역, 국가, 상품에 관한 것이냐에 따라 보고대상이 다르다. 씨티은행 만의 독특한 조직체계이다. 모든 씨티 직원들은 이처럼 조직의 그물에 걸려있다. 이른바 매트릭스 조직. 정 부장은 조직에 적응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고. 언뜻 보기에 매트릭스조직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우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용이 더 들 수도 있다. 업무중복이 많아질 가능성도 높다. 씨티은행도 이 점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채택하는 이유는 "견제와 균형"때문이다.리스크를 전방위적으로 체크하자는 것. 사실 리스크에 대한 씨티은행의 인식은 다소 남다른 데가 있다. 대출심사는 리스크 관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씨티은행은 고객이 원할 때 돈을 내줄 수 있는 유동성 리스크를 가장 우선시한다. 이밖에 거시후행지수(GDP 이자율등) 미시선행지표(콜 환율 등) 사건분석(은행퇴출 등)을 통해 리스크를 상시 관찰한다. 북의 남침에 대비한 비상계획(컨틴전시플랜)도 있다. 남들이 보면 리스크에 대한 과잉반응 같지통계적 척도를 사용하여 모든 품질 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문제 해결 과정 및 전문가 양성 등의 효율적인 품질 문화를 조성하며, 품질 혁신과 고객만족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사적으로 실행하는 종합적인 기업의 경영 전략’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이 정의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첫째로, 6 시그마는 통계적 척도(statistical measure)라는 것이며, 두 번째로, 6 시그마는 효율적인 품질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기업의 경영 철학(management philosophy)이며, 세 번째로, 전사적으로 실행하는 종합적인 기업 전략(business strategy)이다.6 시그마를 개념적인 측면에서 넓게 본다면 기업 운영 철학의 하나로 종업원들의 일하는 자세, 생각하는 습관, 품질을 중요시하는 기업문화의 조성을 의미한다.6 시그마는 모든 프로세스를 정량적으로 평가하여 품질 개선 활동의 우선 순위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효율적으로 프로세스 관리를 수행한다. 여기서 ‘효율적’이라는 의미는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아래서 객관적 통계 데이터에 근거하여 효과를 최대로 올릴 수 있도록 지혜롭게 일하는 것을 뜻한다.6 시그마는 고객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프로세스의 문제를 찾아서 통계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문제점 해결을 위한 품질 혁신의 단계라고 부르는데, 모토로라나 GE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법으로, 네 단계로 나누어 MAIC(measurement-측정), Analysis(분석), Improvement(개선), Control(관리) 문제 해결 과정이라고 부른다.이 품질 혁신 4단계의 내용을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1단계(측정): 주요 제품 특성치를 선택하고, 필요한 측정을 실시하여 품질 수준을 조사하며, 그 결과를 공정 관리 카드에 기록하고, 단기 또는 장기 공정 능력을 추정한다.2단계(분석): 주요 제품의 특성치와 최고 수준의 타 회사 특성치를 벤치마킹한다. 차이분석을 통하여 최고 수준의 제품이 성공 중요한데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진출국가의 고위 간부로는 정부나 재계에 잘 알려진 현지인을 선임하고 있다. 또한 사회 각계와의 광범위한 교류와 마케팅 촉진을 위해 국제문제 전문가와 현지 전문가를 동시에 고용, 해당지점의 토착화를 적극 도모하고 있다. 금융상품도 현지사정에 적합한 상품을 전략적으로 개발, 선보인다는 전략이다. 최근 씨티은행이 내놓은 「내 집 마련 더블 대출」이란 신 금융상품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한국의 독특한 틈새시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2. 글로벌 성장기업 전략- 씨티은행은 일찍부터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어 왔다. 다른 은행들이 해외영업의 수익성 악화로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씨티은행은 그 지역에서 쌓은 고객과의 관계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점포망과 조직을 유지 확대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 최근 국내에서도 점포 수를 줄이는 국내 은행들과는 달리 점포 및 업무를 확대시키고 있다. 올해 안에 적어도 분당 일산 상계지점 등 3개 지점을 더 설치하기로 확정했다. 현재 국내 점포수는 11개로 외국계은행 중 가장 많다. 이러한 점포증설 움직임은 그 동안 고수해온 고소득자 중심의 영업을 벗어나 마케팅 타깃을 중산층으로 확대하려는 전략의 일환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것은「성공의 이전(Success Transfer)」 방식이다. 한 지역에서 거둔 성공은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한 지역에서 새로운 금융상품이나 경영기법이 성공하면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는 방식이다. 씨티은행은 「공유된 비전(Shared Vision)」이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 어느 지점에서나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충족시키는 것을 경영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 즉, 한국지점은 문화가 비슷한 동남아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금융상품이나 경영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씨티은행은 세계적 차원의 경영전략을 펼치고 있다. 고객들로 하여금 전 세계 어느 씨티은행 지점에서도 「항상.
Ⅰ. 골프 소개코스 위에 정지하여 있는 흰 볼을 지팡이 모양의 클럽으로 잇달아 쳐서 정해진 홀(球孔)에 넣어 그때까지 소요된 타수(打數)의 많고 적음으로 우열을 겨루는 경기이다. 골프코스는 들판구릉산림 등 66만~100만㎡의 넓은 지역을 이용하여 정형(整形)되어 있고, 해변에 만들어지는 시사이드 코스와 내륙에 만들어지는 인랜드 코스가 있다.넓은 코스에 숲이나 계곡, 연못, 작은 산 등의 장애물을 인공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자연의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기도 한다. 볼을 처음 치기 시작하는 지역인 티잉그라운드 및 페어웨이러프벙커워터해저드그린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페어웨이와 러프를 총칭하여 스루더그린이라 하고, 벙커와 워터해저드를 총칭하여 해저드라고 한다.또 코스와 경계는 목책이나 말뚝으로 표시하는데, 경계 밖을 OB라고 한다. 볼을 쳐서 넣는 구멍인 홀의 수는 정규의 것은 18개로 18홀이라 부르며, 전반의 9홀을 아웃이라 하고 후반의 9홀을 인이라 부른다. 공식 선수권대회를 행할 수 있는 코스는 전체길이가 6,500야드(5,940m) 이상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한 홀에 볼을 넣고 나면 다시 다음 티그라운드에서 새로운 홀을 향하여 플레이한다.초창기에는 이들 코스의 구획도 골프장의 넓이에 따라 달랐으며, 홀의 수도 일정하지 않았다. 즉 홀 수가 27~72개인 경우도 있는 등 통일되지 않았는데, 1764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Saint Anderws)에서 18개로 개조되었고, 이것이 모델이 되어 현재의 모든 코스 단위는 18홀로 고정되었다. 이때부터 골프의 기술적 수준이 스코어에 의해 기록에 남게 되었다.골프 코스는 2타로 그린에 도달할 수 있는 홀 10개, 3타로 도달할 수 있는 홀 4개, 1타로 도달할 수 있는 짧은 거리의 홀 4개로 조합된 것을 표준형으로 본다. 그린에의 샷은 정교한 기교를 필요로 하고, 마지막으로 지름이 11㎝도 채 못되는 홀에 볼을 넣는 것은 당구와 같은 섬세성을 필요로 하므로 종합 스포츠로서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한편,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교회의 총본산이기도 했다.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는 왕실의 중앙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서 이 도시의 주변에서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골프가 상당히 번창했다. 던퍼믈 런과 퍼스와 같이 왕궁이 있던 다른 도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갤러웨이 주교 역시 대단한 골프 애호가였는데 이는 그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 남서부 지방으로 골프가 확산되는데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또한 몬트로즈의 후작 역시 이에 못지않은 골프 애호가였으며 이 같은 사 실은 이곳이 초창기의 골프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 경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17세기에 접어들면서 골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그 범위는 남동 지방에 서 시작하여 머나먼 최북단에 위치한 바람 많은 오크니 아일랜드로까지 뻗어갔다. 오크니 아일랜드에 골프를 도입했던 인물은 데이비드 몬테이드 와 제임스 딕슨이라는 사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골프가 이렇게 인기를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조직화된 게임의 형태를 갖추게 되기까지는 또다시 150여 년이 흘렀다. 그렇지만 열렬한 애 호가들이 골프를 즐길만한 공간은 충분했다.최북단에 위치한 케이스네스의 동해안에는 농장물을 재배하기엔 대단히 부 적당하면서도 여유있게 골프를 즐기기에는 매우 안성마춤인 모래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이 해변의 모래땅은 수세기에 걸쳐 바다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생겨난 곳으로 모래로 덮여진 광활한 부지였다. 지금도 영국의 많은 코스에서는 바다조개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그곳이 한때는 바다로 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강물은 이 모래땅인 황무지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침적토를 쌓아 올렸고 또 각종 씨앗을 운반해 왔다. 바다를 향해 부는 산들바람에 모래가 날리면서 커다란 언덕들이 생겨났으며 이 언덕들은 끊임없이 이동을 거듭 하다가 야생잔디가 그 속에 뿌리를 내려 그 장소에 영원히 정착을 하게 되었다.새들이 거름을 만들어 주고 또 스코틀랜드의 기후가 물을 공급해 줌서 열려 한국골프를 새롭게 도약시키는 계기가 된다.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延德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수업을 하여 3년 만에 일본 오픈경기에 출전, 8위에 드는 급성장을 보였다.1941년 한국인으로서 처음 일본 오픈경기에서 패권을 잡았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프로선수 중에서 한장상(韓長相)이 1972년 일본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우승하였다. 1971년 한장상김승학(金承學) 조는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골프에서 선전, 단체 5위에 들었다.1970년대에는 한장상이 한국 오픈경기를 제패하였고, 김승학은 아시아 서킷 1차전인 필리핀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이에 더하여 1974년 조태운(曺泰雲)이 한국 오픈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프로들은 큰 타이틀 5개를 쟁취하는 사상 초유의 황금의 3년을 맞이하였다.1980년대 이후 단연 최상호(崔上鎬)가 두각을 드러냈으며, 여자 프로골퍼로는 구옥희(具玉姬)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 국제적 명성을 떨쳤고, 원재숙(元載淑) 고우순(高又順) 등도 일본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재일교포 김영창(金榮昌)은 1981년 미국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아마시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세계 정상에 올랐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 1개, 1990년 베이징[北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 2개를 따냈다.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송아리 등이 세계프로골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며, 이러한 경기대회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골프 붐이 일어 대중화시대를 활짝 열었다.Ⅴ. 세계적인 골프대회*그랜드슬램①전 영 오픈 골프 선수권대회1745년 3월 9일 리스의 신사들이 은제 클럽을 걸고 연례적으로 경기를 벌일 것을 결정한 우 그 첫 경기가 공식적으로 열린 것은 1754년 5월 14일 이었다. 이 경기에 걸린 은제클럽의 헤드에는 세인드앤드류스라고하였다. 세계권위의 US오픈은 1994년 대회 창설 100주년을 맞이했으며 2001년 페블비치골프링크스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타이거 우즈는 메이져 사상 최다인 15타 차로 우승, US오픈 최소타(-12)우승 등 각종기록을 세우기도 했다.③미국 프로 골프 선수권대회1900년대 초 영국에서는 프로들이 클럽하우스에서 출입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마치 귀족들이 스포츠를 즐기는데 필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관습은 미국에도 그대로 전수되어 미국에서도 골프경기는 비교적 지위가 높은 부유층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즐기는 아마추어 스포츠에 불과했다. 그러다 1916년 몇몇 프로골퍼들이 영국과 같은 프로 골퍼 연맹을 결성하는데 뜻을 모아 해마다 매치 플레이 방식으로 그 해외 프로 선수권을 가르는 토너먼트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러한 뜻에 동조하여 스포츠 광이었던 필라델피아의 부호 존 워나메이커와 그의 아들 로드만이 우승배와 우승상금 25800달러를 희사함으로서 1916년 뉴욕 브로드빌에 있는 시와노이 컨트리클럽에서 매치플레이 방식으로 개최되었는데 영국 출신 짐반스가 족 허친슨을 한 홀 타차로 누르고 우승하여 사금 500달러와 우승배를 차지하였다.미국 프로 골프 선수권대회도 1차 세계대전으로 2년간 중단되었고 1919년에도 짐 반스가 우승함으로써 2연승 하였으며 1920년 에는 족 허드슨이 첫 대회 준우승의 한을 풀고 우승배를 차지하였다. 1916년 시작된 매치플레이 방식의 토너먼트는 1957년 까지 사용되었으나 1958년부터 차츰 골프 붐이 형성되면서 TV에서 골프경기를 중계함에 따라 중계하기에 편리한 스트로크 플레이 경기방식으로 변경되었다. 72홀 스트로크 경기 방식의 첫 우승자는 도 휜스터월드 였으며 이 대회는 또한 아놀드 파마가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한 유일한 그랜드 슬램 경기대회로도 유명하다. 이 대회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시 골프의 황제 잭 니클라우스가 1963년에 첫 우승한 이래 1971, 1973, 1975, 1981년 다섯 번 우승한 것이며 가장 큰 이변을 믹스트포섬이라고 한다. 스리볼매치는 세 사람이 개별적으로 자기 볼을 플레이하여 다른 두 사람과 개별적으로 매치 플레이하는 방식이다.베스트볼매치는 1인 대 2인 이상의 매치 플레이로, 인원수가 많은 쪽은 각기 자기 볼로 플레이하고 그 홀의 최소 타수를 지닌 사람이 한 사람의 스코어와 대항하는 방식이다. 포볼매치는 두 사람씩 한 쌍이 되어 각자 자기의 볼로 플레이하여 각 쌍의 두 사람 가운데 소수 타수자끼리 승부를 겨루는 매치 플레이로, 홀 공략을 서로 상의한다.어게인스트파는 각 홀의 파에 대항하는 매치 플레이로, 라운드가 끝나면 이긴 수가 많을수록 우위로 삼는 경기이며 많은 사람이 참가할 수 있다. 핸디캡이 있는 홀에서는 파보다도 1타가 더 많은 경우 하브(무승부)로 간주한다. 톰스톤은 코스의 토털파와 자기의 핸디캡을 거기에 더한 수만큼 치고 난 지점에서 플레이를 끝내고 그 지점에 자기 이름을 적은 기를 세운다.따라서 플래그 토너먼트라고도 한다. 타수가 같아도 출발점으로부터 먼 거리에 기를 세울수록 우위가 된다. 포인트터니는 어게인스트파와 비슷한 매치인데 파로 무승부가 되면 2점, 1타가 많으면 1점, 1타가 적으면 3점(이하 순차적으로 점수를 더한다)으로 총득점이 많은 사람을 우위로 하며, 많은 사람이 참가할 수 있다.파는 표준타수라는 의미로, 파 4의 홀을 4타(티에서 그린의 컵에 볼을 넣기까지 4회 치는 것)로 들어가는 것을 파를 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보다 하나 많은 타수로 들어가는 것을 보기, 반대로 하나 적은 타수로 들어가는 것을 버디라 하며, 둘 적은 타수로 들어가는 것을 이글이라 한다. 이와 같은 말로 경기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지 나타내진다.Ⅶ. 용구골프공은 골프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형태의 볼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그 실용성은 골프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 클럽의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초에는 '페더리'가 우든미사일 대신 사용되었는데, 이 우든미사일은 너도밤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둥글게 깎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