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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중세의 희망, 연옥
    중세의 희망 '연옥'사학과 3학년Ⅰ. 서론Ⅱ. 본론1. '연옥'이란 명칭의 유래와 그 개념2. 연옥의 체계와 그 의의3. 중세 기독교의 창안 '연옥'Ⅲ. 결론Ⅰ. 서론고대부터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해오고 있었다. 여기에서 종교는 사후세계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형상화시켜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려 했다. 이런 불안감은 기독교 신앙과 결부되어 12세기에 '연옥'이라는 개념을 창조해냈다. 이렇게 하나의 중간적 저승이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친 사고와 상상 작용, 신앙과 행위, 신학적 논쟁만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사회 심층에서의 운동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옥'의 탄생을 심성사적인 큰 변화라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사회나 정치적인 현실들과의 더 큰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역으로 서구인들의 마음에 그처럼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이 당시의 사회나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본고에서는 연옥의 명칭유래와 그 체계정립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세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연옥'이 그 당시 사회적·정치적으로 어떤 필요성을 가졌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연옥'이란 명칭의 유래와 그 개념불로 정화를 받는 과정을 통해 이승에서 지은 죄를 지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지인(知人)들이 성당에서 열심히 대도를 해줌으로써 고통의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불로 정화를 받는 그곳에 대한 의문으로 '연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있어 연옥은 그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연옥은 아니다.『연옥의 탄생』의 저자인 르 고프는 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긴 중세라 부르며 중세란 여러 장기적 지속 현상들의 들쭉날쭉한 전체라고 보았다. 그가 연옥을 연구한 것도 이러한 장기적 지속 현상들 중 하나로, 연옥 신앙이란 기독교가 성립하던 고대 말기로부터 19세기까지 지속된 현상인 것이다.이렇게 연옥이 구체적인 장소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단지 '정화하는 불in igne purgatorio' 등에서 보이듯이 형용사형으로만 이 단어가 쓰였다. 그러다가 12세기말경에 가서 드디어 '연옥purgatorium'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자크 르 고프는 최종적인 연옥의 탄생과정을 언어 상의 변화를 통해 확인했다. 12세기말과 13세기 초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in purgatorio'라는 말은 '연옥에서'인지 '정화하는 불 속에서'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이후로는 장소로서의 연옥이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어느 쪽의 표현도 그곳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1995, 문학과 지성사, p.24 재인용)'연옥'의 개념은 서양 봉건사회가 그 체제를 갖추어가던 12세기 고유의 산물로서, 그 사회의 논리적 체계 및 정신적, 영적 요구들의 반영인 것이다. 즉, 종말론의 퇴고(이미 2-4세기에 시작되기는 했지만 12세기에 본격화된)와 더불어 개인적 죽음과 집단적 (최후) 심판 사이의 중간 시기는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가 연옥의 탄생으로 나타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세에 자리답기 위해 예고된바 종말을 먼 미래로 연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최후 심판이 있기까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그들의 망자들을 위해 연옥이라는 '신세계'를 마련했던 셈이다.2. 연옥의 체계와 그 의의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12세기말에 자리 잡는 것은 3대 처소의 체계이다. 13세기 이후부터 단테에 이르기까지 어떤 스콜라 학자들의 이론적 저작에서는 저승의 "5대 영역"의 체계가 발견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깊이 물든 12세기 사상가들이 3대 체계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은 그의 저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의 정신에 충실한 덕분이었다. 12세기 인간들, 특히 성직자들의 논리적 틀 전체의 변화였다. 둘에서 넷(또는 그 반대)으로의 변화는 별로 혁신적일 것이 없었다. 12세기의 전반적 구조 변화와 일치하는 진정한 변화는 구원에 있어 인간들의 네 범주가 셋으로 줄어든 데 있었다.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하고 1140년경에 그라티아누스가 재정립한, 네 범주의 인간들- '전적으로 선한 자들, 전적으로 선하지 않은 자들, 전적으로 악하지 않은 자들, 전적으로 악한 자들'- 이 있다. 그런데 그 대신에 3대 범주-'전적으로 선한 자들, 전적으로 악한 자들, 중간으로 선하고 중간으로 악한 자들'로 나눈 것이다. 여기서 중간으로 선한 자들과 중간으로 악한 자들은 같다, 즉 정화하는 불 속에 있는 자들이라 말한다.사실상 중간으로 선한 자들도 중간으로 악한 자들도 악인이므로, 그것은 선악을 동일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를 이단적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188년경 유명한 피사의 '우구치오'를 꼽을 수 있는데, 그의 『대요 Summa』에서는 당대의 변화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전적으로 선한 자들 - 이들을 위해서는 감사를망자들 ->전적으로 악한 자들 - 이들을 위해서는 산 자들을 위한 위로를(드린다)중간들 - 이들을 위해서는 완전한 사면이나 좀더 견딜 만한 저주를(구한다)12세기에는 7이라는 수에 기초한 모델들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7가지 죄악과Gluttony(탐식), Greed(탐욕), Sloth(나태), Envy(시기), Lust(정욕), Pride(교만), Wrath(분노).7성사,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능력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주된 경향은 이원적 체제를 삼원적 체제로 바꾸는 것으로써, 삼원적 체제는 상반된 두 범주의 정면 대결 대신에 세 요소간의 좀더 미묘한 상호 작용을 도입했다. 이런 체제들 중 하나가 '성직자·귀족·농민'이라는 이른바 삼대 위계 les trois ordres 이다. 이는 특이한 유형의 삼부적 체제로서 전체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다른 한 요소, 즉 지배당하지만 자신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표상에의 길을 열어 줄 것으로 알았던 계급과 대립시키고 있다. 연옥 탄생의 모델이 된 삼부적 체제도 12세기 후반부터 그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며, 봉건 사회의 변천하는 구조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먼저 있던 두 범주보다 나중에 또는 그 밑에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겨난 세 번째 범주의 부상에 의한 중간의 지위 향상이다. 즉, 연옥은 이중으로 중간적 개념이다.체계의 근본적 적용은 사회학적 차원에 속한다. 그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흔한 형태는 위대한 자들과 중간인 자들과 작은 자들 maiores, mediocres, minores을 구분하는 것이다. 13세기초에 프란체스코가 자신이 창설한 교단의 형제들을 '더 작은 자들 les Mineurs'이라 일컬은 것도 이 체제에서 빌린 이름이다. 체제의 가장 의례적인 적용은 도시의 발전에 의해 변모된 봉건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큰 자들(속인들과 성직자들)과 작은 자들(도시 및 농촌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부르주아들'이라는 중간 범주가 생겨났던 것이다.부르주아(Bourgeois) : '성 안의 사람'이란 뜻으로, 성안에 거주하는 귀족들에게 여러 가지 서비스를 하는 계층이었다. 이 중에서 본래는 중세부터 도시에 거주하던 프랑스 시민을 가리켰으나, 근대 민주주의혁명- 부르주아 혁명-의 담당계급을 특히,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한다.도시의 발전에 따른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 즉 성직자까지 포함한 귀족층과 평민층 사이의 중간 범주의 도입과 연관된다. 체계의 두 번째 특성은 '그 중간적 요소가 양극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삼부적 체제의 중간 범주가 양극 사이의 교량 역할을 가능케 하지만, 한쪽에서 봉쇄되어 있는 연옥의 경우,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언제나 극히 적기 때문이다.이렇게 연옥 체계 속에 '정화'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연옥이 생겨남으로 인해 죽음 이전의 시간이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적어도 회개를 시작하기만 하면 지옥을 모면하고 연옥에 갈 수 있다'라고 설교하면서 최후의 희망을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삶이 다양한 시간성에 의해 구획되었다. 시간에 대한 13세기의 새로운 태도들의 특징인 종말론적 시간과 지상적 시간 사이의 결합이다.또한 연옥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발달과도 관계를 갖는다. 사회·경제가 팽창하고 특히 상업의 발달과 종교적 감정의 부흥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던 12∼13세기에, 돈과 이익, 탐욕을 쫓는 사람들, 특히 고리대금업자들은 자신의 죄를 갚으려는 강한 욕구를 가졌다. 그들이 번 돈의 일부를 도로 내놓아 이전에 죄를 지어 잃어버린 덕을 도로 산다는 개념으로 만개한 자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상인들의 자선은 근본적인 죄악을 용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연옥은 상인들에게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상인 특히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연옥의 논리로서, 이후에 자본주의적인 심성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연옥은 개인주의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줌으로써 고통을 완화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공동체적인 심성을 강화시켜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그 반대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연옥의 탄생 이후 사람들의 사고의 초점은 '나' 개인의 죽음과 그에 뒤이어 나오는 '나' 개인의 운명인 것이다. 말하자면, 중세의 민중 문화는 세계와 우주를 '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개인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3. 중세 기독교의 창안 '연옥'
    인문/어학| 2003.09.27| 4페이지| 1,500원| 조회(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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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사마천의 사기
    제출일 : 2003년 4월 15일世界史的인 通史 - 司馬遷의 『史記』사학과 3학년{OOO1. 序言 - 『史記』 명칭의 기원『史記』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 중국의 漢 武帝 시대의 太史令 司馬遷에 의해서 찬술된, 중국의 첫 번째 紀傳體 通史이다. 그리고 이것은 淸나라 乾隆 연간에 중국의 正史로 정해진 『二十五史』 중에서 제일 첫 번째의 역사서이기도 하다.『史記』의 본래 명칭은 『太史公書』였다. 이것은 저자가 「太史公自序」에 스스로 붙여 놓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본래의 명칭은 사라지고 『史記』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래 '史記'라는 말은, 先秦時代 이전에는 열국(列國)의 역사서를 통칭하는 말이었고 漢代에 와서도 모든 先代의 역사서를 범칭하는 것이었다.{ 淸나라 錢大昕의 『漢書考異』에는 "옛날 여러 나라의 역사를 다 '사기'라고 칭했다(古者列國之史, 俱稱史記)"라고 했다. 王國維의 『太史公繫年考略』에는 "태사공이 지은 130편을 후대 사람들 이 '사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이(사기)는 태사공 스스로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漢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사기'는 다 옛날 역사를 넓게 통칭했던 것으로, 태사공의 책(130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史公所著百三十篇, 後人謂之史記, 史記非公所自名也. 漢人所謂史記, 皆泛言古史, 不指太史公書)"라고 하였다.그러던 것이 東漢의 班彪, 班固 부자에 와서 이미 임의로 『太史公書』를 『史記』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 후 東漢時代 말기의 荀悅, 晉의 陳壽 등 역사가들을 거쳐 오는 동안에 차츰 『史記』라는 명칭을 썼다. 唐代에 이룩된 『隋書』의 「經籍志」에서부터야 비로소 정식으로 司馬遷의 『太史公書』를 가리켜, 『史記』라는 고유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2. 史記의 저자 : 司馬遷司馬遷(기원전 145-기원전 85년)은 字가 子長으로 龍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대대로 史官이 많이 나온 관료가문으로서, 이미 周 왕조에서 여러 대에 걸쳐 사관을 지낸 바 있고, 그의 아버지 司馬談도 武帝時代에 太史令을 지냈다.{ 사마천의 아버지 談은 일찍이 천문학과 역학(易學)을 익힌 박식한 지식인으로 특히 명주(明主), 현군(賢君), 충신(忠臣), 사의(死義) 등의 사적을 밝히는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안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司馬遷은 10세 때 이미 옛 전적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뒤 당시의 이름난 經學家인 董仲舒, 孔安國을 따라서 『春秋公羊傳』, 『古文尙書』를 배워 先秦時代에서 漢代에 이르는 학술사상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깊이 파악하였고 그밖에 천문학과 역수(曆數)에도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청장년 시절에는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역사적인 유적지와 옛 성현들의 발자취를 답사했고 특히 孔子의 유풍이 남아 있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이런 유람을 통해서 각 지방의 풍습을 살피고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고찰하였으며 역사적인 인물들의 奇聞逸事 등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문일사(奇聞逸事)란, 기묘한 소문이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기이한 일을 말한다.그 뒤로는 마침내 벼슬길에 올라 郎中이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아버지 談과 사별한 뒤였다.기원전 110년, 한 무제는 동쪽으로 巡狩하여 泰山에서 封禪한 다음 연호를 元封이라고 改元했다. 이때 司馬遷의 부친 太史令 司馬談은 周南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선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司馬遷은 다행히도 여가를 허락받아 아버지에게로 가서 임종할 수가 있었다. 談은 아들 遷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우리 조상은 周 왕조의 太史였다. 아주 오랜 上古의 虞夏時代에는 天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중간에 와서 쇠퇴해졌는데 나에게 이르러 유업이 중단될 수야 있겠느냐? 네가 다시 太史가 된다면 이는 곧 우리 조상의 유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천자는 천년 漢 왕조의 대업을 계승하여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였으나 내 거기에 수행하지 못했으니, 이는 아! 나의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太史가 되어라. ...(중략)... 지금은 漢 왕조가 흥해서 海內가 통일되고 명주, 현군, 충신, 사의가 많이 있는데 내가 太史令의 몸으로 그런 사례를 논평 기재하지 못하고 천하의 史文을 폐기하고 말았으니 내심 심히 두렵고 안타깝구나. 너는 내 이런 심정을 잘 살펴주기 바란다!司馬遷은 아버지의 이 간절한 유언을 듣고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소자 비록 불민하오나 선대인들이 편열해 놓은 舊聞을 남김없이 논술하되,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3년 뒤 그는 그의 부친의 뒤를 이어 역시 太史令이 되어 드디어 『史記』를 저술하는 일을 시작하였다.그 후 天漢 2년, 匈奴 토벌에 나섰던 李陵이 겨우 5천의 보병으로 기마부대를 주력으로 하는 8만의 匈奴軍과 싸워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李陵 자신도 적의 화살을 맞고 실신하였던 중,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武帝는 그가 匈奴에게 투항했다고 해서 크게 노하고 조정에서 처벌하도록 했다. 이때 신하들은 모두 화가 미칠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했는데 司馬遷이 감히 당당하게 李陵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에 무제는 더욱 화가 나서 그를 투옥시키고 끝내는 무서운 宮刑에 처해버렸다.{ 사형 궁형 월형 의형 경형을 5형이라 하는데, 이중에서 남녀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자는 생식기를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하여 자손의 생산을 전연 불가능하게 하였으므로, 사형에 버금가는 극형이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와 같은 모욕, 이와 같은 고통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고 오직 한 길, 자살하는 길밖에는 택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더욱더 굳게 이를 악물었다. 오직 살아남아서 "하늘(또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을 이룩한다.(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라는 『史記』를 완성해야 한다고 하는 굳은 신념이 그를 지배했을 뿐이었다.司馬遷은 역사상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온 위대한 저술들의 '發憤'을 내세워 자신의 저술에 대해서 더욱 중차대한 책임감과 결심을 다졌다. 그 후, 그는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출옥했다. 그리고 바로 中書令이라는 직책을 맡았지만, 이것은 환관들이 맡아보는 일이라 그에게는 『史記』의 저술에도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후 약 10년간의 각고 끝에 마침내 저 불후의 명작 『太史公書』를 완성했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3. 史記의 5體制『史記』의 체재는 전 시대의 전적, 즉 『春秋』, 『尙書』의 「禹」, 「夏」, 『禮記』 등의 유례를 다소 참작하기는 했지만, 그의 풍부한 식견과 참신한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롭고 방대하며 훌륭한 기전체 역사서를 이룩했다. 이로써 후세에 이와 같은 체재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史記』는 「本紀」, 「表」, 「書」, 「世家」, 「列傳」 등 5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1) 本紀 : 세계(世系)와 연대 순서에 따라 역대 제왕들의 통치, 인사 등을 기록해 놓은 부분으로, 12편의 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本紀라는 체재는 司馬遷 자신이 「大宛列傳」에서 「禹本紀」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사마천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이미 있었던 체재였다.2) 表 :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해 놓은 부분으로 기사가 비교적 간략한 것은 世表로 만들었고, 보통인 것은 年表로 만들었으며, 비교적 상세한 것은 月表로 만들었다. 「漢興以來諸侯王年表」와 같은 것은 연도를 세로(날줄)로 하고 나라를 가로(씨줄)로 해서 만들었는데 이는 지방을 위주로 해서 천하의 대세를 보게 하기 위함이었고, 「高祖功臣侯者年表」와 같은 것은 나라를 날줄로 하고 연도를 씨줄로 해서 만들었는데 이는 시간을 위주로 해서 한때의 득실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와 같은 것은 연도를 날줄로 하고 사건을 씨줄로 해서 만들었는데 이는 대사건을 위주로 해서 군신의 직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문/어학| 2003.06.16| 3페이지| 2,000원| 조회(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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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대표 33인의 비폭력주장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대표’33인의 비폭력 주장,어떻게 볼 것인가이지원, 「‘민족대표’33인의 비폭력주장, 어떻게 볼 것인가 」 『역사비평』16 , 1992 봄.p.281∼2861. 서언2. 본문1) 3·1운동상과 폭력·비폭력문제2) 3·1운동의 비폭력성과 ‘민족대표’3) 3·1운동의 폭력성과 민중3. 결어1. 서언3·1운동은 식민통치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위해 우리민족이 감행했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서, 그 전개방법이 비폭력적이라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 필자는 3·1운동의 비폭력 투쟁의 허구와 그 한계를 통해 우리민족이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는가를 파악해 보고, 3·1운동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통해 정당한 3·1운동상을 밝혀보고자 한다.2. 본문1) 3·1운동상과 폭력·비폭력문제3·1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감행한 항일민족운동이고, ‘3·1운동에서 나타난 대동단결과 민주주의 이념’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 계승·발전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운동전개과정에서 비폭력적인 운동방침은 운동의 도덕성과 함께 3·1운동의 방법의 정당성까지 부각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비폭력투쟁으로만 보는 것은, 운동주체들의 역동적인 투쟁을 부정하고 운동의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3·1운동의 비폭력성을 강조하고 이를 선호하는 것은 두 가지 편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투쟁형태상 비폭력이 대화와 타협이 전제된 세련된 투쟁방법이라는 허위의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비폭력 투쟁을 주장한 33인의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편견이다. 특히 후자는 '민족대표'33인이 무서운 일제의 감시와 무기를 얻을 방도가 없는 상황 아래서 비폭력을 원칙으로 한 것은 당연하다는 논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과 편협적인 주장은 운동의 실상을 왜곡시키고 있다. 당초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운동전개의 3원칙으로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노선을 채택하였다.그러나 3월1일 이후 전국적, 전민족적으로 운동이 확산되면서 투쟁양태는 33인의 요구와는 달리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거족적인 민중운동으로서 3·1운동의 실상은, 민중들이 운동의 지속성과 저항성을 확보하기 위해 폭력적인 투쟁을 한데 있다.즉, 3·1운동에서는 참가계층, 운동의 전개과정에 때라 투쟁양태나 강도가 극명하게 구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구사되는 폭력·비폭력 투쟁은 그 자체로서 모두 주요한 운동방법이고, 조건에 따라 상황적으로 선택될 수 있으므로, 어떠한 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투쟁방법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투쟁방법이 일제에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저항하며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자 했는가에 있다.2) 3·1운동의 비폭력성과 '민족대표'3·1운동의 비폭력성을 대변하는 주체는 33인의 '민족대표'들이다. 이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조선독립을 이루고자,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정부에 대한 독립청원을 성사시키고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심을 얻고자 했다. 이를 위해 폭력적인 민중시위보다는 '비폭력'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33인에 의해 주장된 비폭력 투쟁 방침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일제에 타협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안전판에 불과하였다. 이는 이들이 3월 1일 독립선언식 장소를 당초 예정했던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으로 바꾼 것에서 알 수 있다.비타협이 전제된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에서 비폭력 투쟁은 가장 대중적인 투쟁방법이 될 수 있으나,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에 의해 주도된 비폭력 투쟁방침은 저항을 포기하고 민중들의 분출되는 독립투쟁정신을 거세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33인의 활동이 3·1운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의 전과정을 놓고 볼 때 비폭력 투쟁이 운동을 주도하지 못하였고, 33인은 투쟁의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비폭력 투쟁의 모습을 견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 3·1운동의 폭력성과 민중3·1운동은 3월 1일 이후 민중들에 의해 급속히 확산·발전하였다. 33인의 '민족대표'가 3월 1일 이후 운동의 대열로부터 탈락한 이후에도 청년, 학생, 농민, 노동자, 중소상공인들은 투쟁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며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3·1운동의 거족적인 민중운동의 모습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민중들은 '민족대표'의 '요구'에 따라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던 것이 아니고, 그 운동의 초기부터 폭력투쟁을 지향하였다. 즉, 민중들은 민족적 계급적 모순에 대한 대응과 자각의 결과로 처음부터 폭력적인 투쟁을 지향했던 것이다. 특히 전 인구의 8할 이상이었던 농민은 무단농정, 중과세, 부역징발, 토지수탈, 소작료 인상 등에 의해 일제 무단통치의 최대 피해자였기에,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농기구 등으로 무장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소각하는 등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시위가 농촌으로 확산되는 순간부터 농민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여 주된 동력을 이뤘다. 그리고 노동자와 일부 소부르주아계급도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민중들의 폭력투쟁은 처음부터 조직되거나 일사분란한 훈련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고, 투쟁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민중들의 저항의지가 집합하여 표출된 것이었다. 따라서 민중의 폭력투쟁화는 단지 투쟁방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비타협적인 절대독립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33인의 '민족대표'로 상정되는 비폭력 투쟁과는 크게 대별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장기간 일제의 통치체제를 위협하고 절대독립정신을 천명함으로써, 민중이 민족해방운동에서 투쟁의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3. 결어필자는 본론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3·1운동상과 폭력·비폭력문제, 3·1운동의 비폭력성과 ‘민족대표’, 그리고 3·1운동의 폭력성과 민중" 세 가지로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글에 결어가 없으므로 이 글에 대한 약간의 비평을 더하여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3·1운동은 민중이 민족해방운동에서 투쟁의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 운동의 성격이다. 우리는 우리민족이 3·1운동을 평화적으로 비폭력 투쟁방침으로 전개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폭력적 진압을 부각시켜 그 잔학상과 부도덕성을 강조해왔다. 또한, 3·1운동의 비폭력적인 운동방침으로 운동의 정당성을 부각시켜주고 있다.
    인문/어학| 2003.05.08| 3페이지| 1,000원| 조회(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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