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지향의 일본인1장 일본문화론의 출발점1. 환상의 옷을 입은 '일본론'2. 포크와 젓가락3. 작은 거인들4. 축소의 문학적 상상력2장 '축소지향'의 여섯 가지 모형1. 이레코형2. 쥘부채형3 아네사마 인형형4. 도시락형5. 노멘형6. 문장형3장 자연물에 나타나 축소문화1. 밧줄과 수레바퀴2. 축경-풍경기호로서의 정원3. 돌과 모래만의 자연-아름다운 포로4. 분재-정교한 실내악5. 꽃꽂이-우주의 꽃잎6. 상자 속에 들어간 작은 신들4장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축소문화1. 4조반의 공간론2. 달마의 눈꺼풀과 부동자세론3. 이치고이치에의 문화4. 주객일체와 화의 논리5. 현대 사회의 하나미치6. 도구와 사물에 대한 사랑5장 산업에 나타난 축소문화1. 일본정신과 트랜지스터2. 축소의 경영학3. 로봇과 빠찡코4. 나루호도의 사고방식6장 '확대지향'의 문화와 오늘의 일본1. 타인의 땅을 끌어오는 문화2. 사무라이 상인3. 넓은 공간에 대한 공포4. 탈출과 회귀의 일본적 조건5. 명예백인의 탄식6. 도깨비가 되지 말고 난쟁이가 되라Ⅰ.서언고등학교 시절에 작문책에서 일본과 우리나라 아이들을 비교한 재밌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내용은 일본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때 내쫓김을 당했고 한국의 아이들은 잘못했을때 골방에 가두어졌다. 즉 일본아이들은 넓은 곳에의 내몰림이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한국의 아이들은 좁은곳에 갇히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이이야기는 일본의 축소지향적인 성향을 대변해 준다. 행정학특강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읽게된 이어령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은 이렇게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일본인의 성향에 대해 좀더 잘알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1983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은 이어령 교수의 입지를 적어도 일본에서는 앨빈토플러 정도의 명사에 준하는 정도에 올려놓을 만큼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책으로 여전히 아직까지도 일본인이 아닌 사람에 의해 저술된 일본론을 논하는 책들 중 '현대의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한 책중의 자신이 문학자 이었음을 글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당부분 설명의 재료로 일본의 전통시인 '하이쿠'를 사용하는데 그가 문학자가 아니었던들 그런 분석은 어렵지 않았겠는가 싶다.다음 장에서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은 축소지향을 분류하는 하나의 분석 틀이다.2. 제 2장 '축소지향'의 여섯 가지 모형1) 이레코형상자 안에 작은 상자를 넣고 다시 더 작은 상자를 넣는다. 밖에서 볼 때는 하나의 상자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작은 상자들이 연속적으로 들어있다. 이러한 축소 지향형이 이레코형 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일곱 벌을 한 세트로 하는 화분이나 이레코 솥 같은 것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등산이나 여행을 할 때 가지고 다니는 코펠도 이런 이레코형 축소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일본의 시계는 우리나라 시계보다 시간이 늦는다고 하는 데 그 이유는 일본 시계가 똑이노딱이노 하는 식으로 '노'라는 단어를 연발하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는데 이는 '노'라는 일본어가 그들의 언어습관에 상당한 비중으로 사용되는 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데서 오는 것으로 '하이쿠' 한 수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겠다.「봄의 눈이 긴자의 뒷골목의 삼층의 벽돌집에 포근하게 내린다」이 시에서 보이는 '∼의'가 바로 '노'의 해석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의 언어습관에서도 이처럼 '의'를 남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의'를 연용함에 의해 긴자가 점점 축소되어 벽돌집 지붕이 되는 것이다.이런 '노'의 축소의 문법은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문과 정반대의 운동이다. 바깥에서 중심을 향해 수축해 들어오는 물결을 따라, 언어(이미지)의 파문이 생긴다 파문의 고리가 보다 작은 고리로 옮겨지는 그 수축작용은 '노'가 폭발하는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노'의 그 폭발력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죄어드는 이상한 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이렇듯 공간을 축소해 가는 지향성이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열자의 긴 낚싯대라도 한자의 간다라는 만지는 미륵이 있다. 신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서 몰래 하는 것까지 손에 쥐듯이 에마(발원할 때 신사나 절에 봉납하는 말 그림의 액자)에 일일이 써서 만질 수 있게 한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눈과 귀로 듣기보다는 손으로 보고 듣는 민족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이다.미학적 관점에서 쥘부채는 하나의 휴대용 미술품이다. 이 사람들은 한국인에 비해서 고정된 액자보다는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두루마리나 에마키 같은 것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법도 하다. 다니고 다니는 미술품이라는 축소지향성 외에도 주리부채의 좁은 부분에다 그림을 그리려면 그 대상이 꽃이건 산이건 간에 보다 작게 보다 세세하게 축소시킨 모양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접는데 따라 그 축소된 그림은 더욱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진다. 쥘부채의 미학은 이렇게 세세한 분할성에도 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긴장과 집약의 미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고메루(속으로 집어넣다)의 지향력이 이레코문화라면 오리다다무(꺾어 접다)의 지향성이 쥘부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접는 상품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며 실용적 상품이라는 측면에서 방과 방사이의 벽을 접는 '후스마(방문)'과 오리다다미 우산이라는 흔히 볼 수 있는 접는 우산이 바로 이 쥘부채형 축소지향성의 예시가 될 만한 것들이다.3) 아네사마 인형형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비행기는 전장 1.6밀리미터에 날개폭이 1밀리미터, 또 세계 최소의 움직이는 오토바이는 전장 17.5센티미터 무게 1.7킬로그램이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기록의 보유자들이 일본인이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을 만든 그 사람들이 일본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쌀알에 글자를 새겨넣는 경주를 할 정도의 사람들이니까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이 것 보다는 좀 더 보편성을 가진 현상을 비교대상으로 해야할 텐데, 일본의 인형은 이웃한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단연 발달해 있다. 인형이라고 하면 축소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루'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정신이 하리쓰메테이루' 즉 정신이 팽팽하게 채워져 있다는 뜻이며 음식을 채우면 도시락이 되고 마음을 채우면 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반대로 '보잘 것 없는 것'을 의미하는 '쓰마라나이'라고 하는 데 '쓰메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네 집단의 틀에 채울 수(쓰메루)없는 사람은 '무라하치부"라고 해서 따돌림을 받고 회사의 울타리 속에 '쓰메루'할 수 없는 사원은 '마도기와'족이 되어버린다. 형식상으로는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사원교육이나 학교교육의 대부분은 아직도 쓰메루하는 주입식이며, 지식이나 정신을 쓰메코미(주입식)하는 것은 군국시대의 모습 그것이다.일본인의 특유한 단결력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온 국민을 한 묶음으로 '일억총평론가'니 '일억총백치'하는 표현도 쓰메루 문화의 한 단면으로 1억을 마치 한 사람으로 축소시켜 도시락통 같은 한 틀 안에 쓰메루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볼 수 있다.일본인이 한자를 읽는 방식도 특이한데 가령 春이라고 써놓고는 '춘'이라고 읽지 않고 하루(봄)라고 발음하는 훈독을 하는 방식으로 소위 '화자'나 '국훈'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영어의 스프링을 '봄'이라고 읽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인 것이다. 한 글자에 여러 음을 쓰메루해 놓은 것도 축소지향의 문화 속에서만 있는 현상으로 일본의 和는 '융합'이라기 보다는 이질적인 것을 쓰메루 하려는 축소지향의 산물이며 일본어인 가라(空)와 오케스트레이션을 합쳐 가라오케라는 말을 만들어낸 일본문화가 외교정책으로 나타나면 전방외교술이 되는 것이다.5) 노멘형앞의 것들이 주로 공간의 축소라고 한다면 노멘형 축소지향성은 행동의 시간적인 축소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호쿠사이의 '파도'라는 그림의 예를 들고 있는데 한 순간이라도 그 움직임을 멈춘다면 이미 그것은 파도가 아니다 파도는 꽃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이 아니며 움직임 그 자체다 그런데 호쿠사이는 순간의 사물로서 제시해 놓았다. 그럼으로써 파도의 무한한 확산과 연속적 시간인데, 일본에서 문장이 발달한 것은 그들이 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가계에 대한 중시는 오히려 우리의 경우가 훨씬 더 하다고 할 수 있고 우리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족보로 나타나게 된다. 족보와 문장의 차이는 역시 가시적이냐 관념적이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관념적 체계적 문자 존중의 문화적 산물이 족보라고 한다면 문장은 가계의 역사성과 그 집단을 감각적인 표상의 형태로 나타낸 것으로 시스템이 아니라 도형성에 기초한 감각으로 보는 가계가 되는 것이다.집단의 명예와 단결을 표시하는 가문이 노동자 세계에서는 '한텐'이 되고 상가에서는 이 같은 심벌을 '노렌'이라고 하며 자신의 신용과 친절을 노렌에 걸고 일하게 되는 것이다. 한텐이나 가문, 노렌은 모두 어느 추상적인 명예, 신용, 책임 등을 하나의 시각적 기호로 나타낸 '축소'의 한 양식이고 현대의 문장은 미쓰비시나 미쓰이 같은 회사의 마크가 되어 회사원 각 개인의 깃에 달고 다니는 배지가 되었다.이 문장형 인생으로부터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바로 일본인으로 태어난 운명이기도 하다. 번의 문장에 소속되어 한 평생을 살지 않으면 사무라이는 로닌의 신세가 되어 외톨박이로 고난의 길을 보내게 된다.일본인의 집단주의는 문장형에 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이념 추구라기 보다는 맹목적인 집단 추구에 흐르는 수가 많다. 그 것이 어떤 성격의 집단인가 하는 것 보다 그 집단이 어디에 소속되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어제의 적이라도 그 집단에 들어가면 충성을 다한다.그래서 일본인은 생리적으로 혼자 있으면 불안을 느낀다. 하나의 틀(문장)이나 조직에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자유로운 여행까지도 관광회사의 깃발 아래 모여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이 일본인이다. 천황은 일본 전체의 문장 구실을 한다고 할 것이다.일본인은 명함을 대단히 중시한다고 한다. 이 또한 문장형의 축소지향성의 하나로 한 장의 명함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쥔 듯한 기분 그 작은 종이에평정된다
Ⅰ. 서론Ⅱ. 본론1. 일본의 자동차 수입억제의 역사⊙ 전전기(戰前期)⊙ 전후기(戰後期)2. 전후 재건·발전기의 목표⊙ 전후 일본의 전략과 목표⊙ 일본 자동차산업의 기반구축⊙ 국민차 구상3. 산업재편과 외국인투자 자유화1). 자동차산업의 재편⊙ 삼분화(三分化) 구상⊙ 특정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 합병과 제휴⊙ 닛산-프린스 합병⊙ 도요타-히노, 도요타-다이하쓰 합병⊙ 미쓰비시-이스즈-후지2). 외국인투자 자유화⊙ 엔진 수입 자유화⊙ 자동차산업의 외국인투자 자유화 논쟁⊙ 이분화 구상과 미쓰비시의 반기⊙ 외국인투자 자유화의 완결Ⅲ. 결론Ⅰ. 서론1955년에서 1973년의 약 20여년간에 걸친 고도성장기의 일본경제는 그 내부에서나 세계경제와의 관련성에 있어서도 현저한 변화를 겪은 시대였다. 이 시기는 전후 부흥기를 지나서 일본경제가 세계무대에 등장하여 유사 이래의 비약적인 발전을 한 시기로서,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의 초석을 닦은 시기였다. 그럼 이러한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산업정책의 역할을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일본의 자동차 수입억제의 역사일본 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미국산 자동차의 판매를 격감시키면서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이처럼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는 국내시장에서의 외국 차 수입억제조치를 꼽을 수 있다.수입억제조치는 일본 자동차산업을 성공으로 이끈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자동차산업의 발전에 대한 수입억제조치의 효과를 전전(戰前)과 전후(戰後)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전기(戰前期)일본 자동차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일본 육군이 군용트럭에 관심을 갖게 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매년 2,000대 정도가 수입되었을 뿐 자동차를 직접 생산했다는 기록은 없다. 1918년의 「군용차량지원법」에 의해 도쿄가스전기와 이시카와지마, DAT자동차 등 세 회사가 자동차정부 차원의 조치를 필요로 했고, 일본 정부 역시 기업에 유리한 경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후 일본의 전략과 목표1950년대 일본의 산업발전은 일본정부의 보호주의적 산업정책을 묵인하는 국제환경하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서유럽 우방국들과의 협의 하에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질서의 구축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표준적인 국제무역이론에 따르면 완전경쟁 하에서는 자유무역과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 교역상대국 모두의 후생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무역정책의 수립과정에서 각 국 정부는 전략적 대응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게 마련이다. 전략적 환경이란 게임 참가자에 돌아가는 보수(報酬)가 자신뿐만 아니라 경쟁자의 행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 상황을 말한다.전후 일본이 선택한 개발전략을 공식적으로 GATT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실제로는 보호주의적 또는 개발 지향적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GATT체제의 경제질서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시 일본 기업으로서는 해외시장 진출이 생존을 필수조건이었고, 동시에 취약한 경쟁력 때문에 자국시장에 대한 보호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가 선택한 국내산업 보호전략은 완전경쟁과 규모에 대한 불변보수라는 가정을 완화한「신국제경제학」적인 접근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조망될 수 있을 것이다. 보호된 국내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은 보다 많은 생산이 가능하고 외국의 경쟁기업에 비하여 보다 단기간에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때라서 국내시장이 보호되는 나라의 기업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수출시장에서도 보다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후생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정책은 완전히 경쟁 상대국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미국은 자국의 안보상의 이익에 대한 대가로 GATT 질서를 외화만으로도 국산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를 용이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결국 국내 자동차의 자급자족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일단 일본 정부와 기업이 자동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공동의 인식에 도달한 이상,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일본 땅에서 수입차와 외국자본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일본 정부와 자동차업계는 활발한 의견교환을 통해 외국수입차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자동차산업 육성계획을 마련했다. 1951년 10월, 통산성이 자동차산업 지원을 위한 업계의 의견을 묻자 닛산, 도요타, 오타자동차 등 기존 자동차 3社는 공동으로 정책건의안을 마련했다.이들 자동차 3사는 ① 일본개발은행의 설비자금 대출지원 ② 시설재 도입 촉진 ③자동차부품 수입 촉진 ④소형차에 유리하도록 차등과세 실시 ⑤외국산 자동차에 대한 물품세 중과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통산성은 1952년 4월, 업계의 지원요청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다음과 같은 지원정책을 발표하게 되었다.① 시설 및 장비교체자금 지원: 대체 또는 수리에 필요한 자금의 50%를 기업합리화법에 의한 융자와 일본개발은행 융자로 충당한다.② 자재·부품·전력의 안정적 공급(필요한 경우 특수부품의 수입 허용0, 철강·타이어 등 국산자재의 가격인하 및 품질향상을 위해 노력한다.③ 선진기술의 도입: 일본의 산업잠재력을 활용함으로써 수출을 촉진하고 수입을 감소시킬 경우에 한해 외국자본의 진출을 허용한다.④ 완성차수입을 국내거주 외국인용, 기술개발용, 기타 특수목적 등에 한정함으로써 안정적 수요를 확보한다. 또한 물품세를 인하하여 소형차 이용을 촉진한다.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광범위하고 실질적이 국내 자동차산업 보호·육성시책은 외국 자동차업체와의 경쟁에서 일본 자동차산업에 엄청난 이점(利點)을 안겨주었다. 나아가 경쟁력이 약한 일본 자동차산업을 불과 3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강한 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따라서 일본 자동차산업의 기반 구축과 관련한 정부·기업간의 상호작용의 특성을 논하기 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식의 자동차 생산을 모색할 수 있었다.국민차 구상이 거론되고 있을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자동차가 사치품으로 여겨져 일반인은 가질 엄두를 낼 수 없었고, 당연히 자동차 수요는 주로 사업용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산성은 일반대중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값싼 소형차를 대량생산한다면 국내 승용차 시장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통산성 제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차 요건〉①최고속도: 시속100km ②승차인원: 4인 또는 2인+ 화물 100kg ③연료소비율:30∼60km/ℓ ④내구성:10만km ⑤배기량:350 500cc ⑥차체중량:400kg ⑦생산단가 15만 엔(416달러) 이하(월 2,000대 생산기준)국민차 생산계획은 곧 찬반 양론의 공방전을 불러 일으켰다. 통산성의 국민차 개발계획이 승용차생산을 어느 한 회사에 집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차 개발계획에는 국민차가 갖추어야 할 성능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고 희망판매가격까지 명시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同계획에는 성능품평회를 열어 우승자에게 정부가 양산을 위한 지원을 하고 국내 승용차시장에서 사실상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수출시장에서 까지 독점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제안이 포함되어 있었다.이 계획을 검토한 업계는 동 계획서에 명시된 가격으로 동 계획이 요구하는 성능을 구비한 승용차의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955년 9월 1일, 일본 자동차 제조업협회는 ① 통산성 계획에 명시된 수준의 가격과 성능의 자동차생산은 불가능하며, ② 성능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자동차 제조원가를 통산성이 제시하는 원가수준보다 50% 높여야 하며, ③ 국민차 개념에 대한 업계의 추가 연구가 요망된다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당시 일본의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통산성이 제시한 국민차 개념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데 대체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통산성이 제안한 국민차 개발계획을 승용차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한 트랙조업체들을 몇 개 그룹으로 재편할 것을 제안했다. 당초 승용차 생산업체의 삼분화 구상은 경쟁력 강화에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승용차 제조업체의 수를 제한하자는 취지에서 구상되었다. 동 계획안에 따르면, 승용차 생산업체를 일반 승용차 그룹, 미니카 그룹, 특수차 그룹 등 3개 그룹으로 나누되 한 기업의 전체 자동차생산은 3개 그룹으로 나누되 한 기업의 전체 자동차생산은 3개 그룹 중의 어느 한 그룹에 한정하기로 되어 있었다.1962년 12월 8일에 나온 승용차 소위의 특별제안서는 현안인 자동차 수입자유와 및 외국 자동차자본의 국내진출 자유화에 대한 업계의 입장을 표명하였고, 자동차업계 재편에 대한 통산성의 입장을 지지했다.자동차산업은 타산업과 광범위한 연관성을 갖고 있고 많은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나라 전체의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따라서 늦어도 1964년 말부터는 자유화가 발효된다는 전제 하에, 판매체제의 조정은 물론 자동차산업의 생산체제확립과 개선이란 관점에서 구조조정을 위한 환경조성을 서둘러, 일본 자동차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 수출산업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기로 했다.이에 따라 이 제안서는 차종의 감축, 제휴·합병의 촉진, 신규 참여의 금지, 판매체제의 합리화, 부품산업의 합리화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제안서 대로 된다면 일반 승용차업체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닛산과 도요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동 제안서 및 승용차 생산업체의 3분화 계획에 대한 반대는 혼다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만약 통산성의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더라면 혼다는 시장에서 퇴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962년 초까지 통산성은 「승용차공업육성법」이라는 이름 하에 승용차 생산 3분화를 실현하기 위한 입법을 준비했지만 의회에 제출되지는 못했고 그 대신 특별조치법에 포함되었다.⊙ 특정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1963년 3월 25일 의회에 제출된 특정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관민치」라는 개념의다.
▶목차§최승희의 연보§.서론최승희의 재평가평가의 어려움§.본론최승희의 이데올로기(사상)최승희의 업적최승희 춤의 평가와 고찰최승희의 춤에 대한 일본인들의 평가(사끼요시 나츠미, 오자끼 히로지)§.결론서론최승희의 재평가한 인간을 평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평가의 대상은 많은 시간에 걸쳐서 관찰해야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 평가는 윤리와 도덕의 책임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기가 어렵거니와 더군다나 흑백 논리로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는 그녀의 예술을 재조명하여 바르게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최승희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느냐, 예술가로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확실해야 한다. 최승희가 무용으로 세계적 인물이 되었지 정치가로서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여자를 정치권에 집어넣어서 사상적 압박을 주는 평가를 한다면 그 예술의 본질과 특수성을 침해하게 되므로 이는 근본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를 평가 할 때는 이데올로기 요소를 앞세우지 말고 그 예술가 노릇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순 논리의 사고에 빠져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경우에 과거에 한국말고도 일본, 중국, 북한 해서 네 나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들의 행위가 교차되는 특수 상황에 살아야 했으므로 최승희의 행동을 평가하면서 그 어느 한 행위만을 보고 친일이다, 반일이다 하면 모순이 생길 우려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평가에는 이것을 예술을 해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이데올로기 교차로보고 총체적 평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최승희는 우리 나라 예술사(무용사)에 기록되어야 할 업적과 공적을 세운 사람이다. 일제시대에서부터 해방이 된 뒤로 육십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 춤꾼인 광대나 기생들은 사회에 서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춤을 배우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무용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때에 무용 연구소를 하고 있던 사람에게서 세계 무대에 내놓을 동양의, 또는 한국 토착의 무용극을 일구겠다는 목표를 가다듬었고 월북의 간접적 동기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초년기와는 달리 인생 후반기에는 춤을 만드는 창작자로 활동한 최승희에게 창작자로서의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평가의 어려움일제 강점기에 여성의 몸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우리 춤을 널리 알려온 최승희는 그 대단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라는 불명예에 가려 그 예술적 업적이 폄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해방 후에는 월북하여 북한과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그 이후의 종적에 대해 소문만 무성할 뿐 국내에서 최승희에 대해 연구가 그리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해방 이후에는 월북자라 해서 최승희의 이름을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불온시 됐다. 실체는 멀어져가고 이름만 남지 않을 수 없는 탓에 최승희는 전설 속에 가둬졌는데, 설상가상으로 북한에서의 숙청은 그의 존재를 미궁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또한 90년대 초까지 최승희의 춤 원본은 남한에서 종적을 감추다시피 하였다. 자진 월북한 최승희는 군사독재 냉전 체제의 살얼음판에서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정사의 명부에서 최승희는 지워지고 지워지기를 거듭했고, 야사 같은 전설에서나 회자될 뿐이었다. 한국 근대 무용사에서 최승희의 비중을 조금이라도 아는 쪽이라면 그러한 전설로 이어졌던 상황이 학술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얼마만한 황폐함을 불러왔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본론최승희의 이데올로기그녀의 사상을 평가를 할 때 현재 많은 부분에서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왜 그러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면 잘 알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예술혼을 위해서 오해의 소지를 가질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춤은 전부이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민족심 즉 애국심은 충만히 가졌다고 할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관한 참고자료1) 친일행위① 일본 후루타쿠다께오에 보낸 친일적 발언②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친일적 용어③ '멕시코인은 일본 최승희는 얼핏 보면 친일 행위를 하는 듯했으나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앞서가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의 본성을 나타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자 프라이팬을 가지고 춤을 추었고, 방송이나 신문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이겨서 즐겁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이겨 주어서 더욱 즐겁다" 는 말을 하기도 했고, 한국의 권투 선수 서 정권이 일본 선수를 눕혀 이기자 그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평양 축구 선수단이 동경에서 일본 축구 팀과 시합을 하면 시합장에 나타나 한국팀을 응원하였다.3) 용공적 행위① 1946년 월북② 『해방의 노래』,『조선의 어머니』, 『맑은 하늘아래』 등 사회주의적 작품 안무③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선(2회)④ 무용동맹위원장⑤ 인민배우⑥ 국가훈장 제 1급 받음⑦ 조국전선 중앙위원⑧ 인민군 위문공연4) 반당적 행위① 일본신문에 나온 6·25 사변 때의 최승희의 발언 (최승희의 반당적 행위와 이념에 대한 고민)② 중국공연 때 일본기자에게 한 말③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이 북한 탈출 후 잡지에 '최승희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렸다'고 폭로④ 『사도성의 이야기』라는 작품. 노동당에서 자본주의적 무용극이라고 비평(일본잡지)⑤ 안막, 최승희 숙청 기사⑥ 최승희 숙청과 김일성 교시⇒ 최승희는 함부로 언동을 하는 수가 많았는데, 대개 상대가 약자이기보다는 강자일 때에 더욱더 강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내가 이런 사람인데 네가 무엇이길래 이러느냐" 하는 식의 감정적 행위로 나타났다. 공연하는 동안에 북한의 고위 간부인 당원이 최승희에게 뺨을 맞았던 소동이나 문화선전상 허정숙과 심한 충돌을 한 것들도 같은 맥락의 사건들이었다.아무튼 최승희는 누구에게나 "내가 세계적 예술가"라는 것을 명분으로 앞세워 권위를 확보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정치계에서 상당히 높은 비판의 소리를 들었을뿐더러 김일성에게서까지 비판을 받기도 했던 듯하다. 그 독재적이고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행위가 표적이 되어, 최승희는 이른바 부르조아적 예술가, 불평불만하는 반당 창작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한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 공연에서 깨달았던 동양 발레의 정립이라는 큰 이상을 실현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선 민족 무용극이 그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주로 솔로 댄서로만 활동했으므로 제자를 몇 사람 두었을 뿐이지 그 활동은 거개가 공연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무용극의 무용수를 기르려고 엄격하고도 체계 있는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조선 민족 무용극에 따른 공연 어법을 꾸준히 연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민족 무용극을 정립하려면 서양의 발레처럼 기본 동작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조선 민족 무용 기본 동작을 창조하는 노력을 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이른바 〔조선무용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이라는 글이다.이와 같이 최승희는 우리 민족 무용의 기본 동작을 그 나름대로 최초로 체계화했고 또 무용극에서 중요시되는 극적 요소의 여러 가지 표현 동작을 창작했다. 이 점이 우리나라 무용 발전에 큰 업적이 되었다 할 수 있다.또 최승희가 우리 나라 무용, 특히 조선 민족 무용극을 발전시키려고 우리 악기의 개조와 우리 악기를 이용한 오케스트라 편성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북한 민족 악기가 나왔고 이러한 전통 악기 개조 운동은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들이 앞으로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이 일을 최승희가 먼저 시작했음이 앞으로 큰 공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최승희가 창조한 근대 한국 무용은 한 백 이십 몇 가지에 이른다. 그 춤의 내용을 보면 서정적 정서가 풍기는 향토적 작품과 민족 정신을 나타내는 고대적 작품이 있으며 다음으로는 광대나 기생들이 추어 왔던 전통적인 춤이 있고 민요에 맞춘 춤도 있다.일제 시대에서부터 해방이 된 뒤로 육십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 춤꾼인 광대나 기생들은 사회에서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춤을 배우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무용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때의 무용 연구소국 무용가는 그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오늘날 각 대학에 무용과가 신설됨에 따라 한국 무용은 최승희가 이룬 무용을 바탕으로 더욱 더 현대성이 있는 것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한국 무용도 분석해 보면 춤동작에 좀더 전통적인 춤사위가 많거나, 아니면 탈-전통춤의 춤사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하여, 기본 무용 형식에서는 최승희의 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최승희의 근대 한국 무용은 현대 한국 무용으로 그 핵이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 최승희가 창조한 근대 한국 무용이 현대 한국 무용으로 이어지는 요즈음에 최승희의 것을 한국 무용의 본질 문제와 공연 형식의 양식화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새로운 한국 무용으로 전환하려는 몸부림으로 보아지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우리 춤의 본질은 그 율동이 내면에서 표출되는 것인데 최승희의 춤은 물리적인 육체 운동법으로 하는 서양 무용의 동작 원리에다 한국적 정서를 수용한 것이므로 서구적 미학의 바탕에 한국 미학이 접목된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춤은 한국 미학의 바탕에 서양 미학이 접목되는 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한국 무용을 예술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따른 이론이 양분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하면 공연장의 넓이에 따라 상반된 두 가지 한국 무용이 선명하게 특징지워질 것이다. 곧, 서양 미학을 바탕으로 한 춤은 큰 무대에서 추는 대극장 무용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고, 한국 미학 바탕의 무용은 무대가 좁은 소극장 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미학 바탕의 새로운 한국 무용을 정립하려면 공연장이 반드시 소극장에서 중극장까지쯤의 무대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승희가 창조한 근대 한국 무용처럼 공연 형식이 동작을 꾸며야 하고 그 동작도 섬세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정적 동작이면 배제되어 버린다. 따라서 오늘의 춤 곧 현대 한국 무용은 소극장 무용으로 전환하여 한국 고전 무용의 본질을 추구하는 춤이 되어야 바
목차들어가며1. 군위안부란1) 일본군 위안부 개념2) 군위안부가 등장한 시대적 배경3)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4) 군 위안부가 된 여성5) 생존해 있는 피해자 수2. 일제의 군위안부 동원 정책과 실태1) 일본군 위안소 설치시기 와 설치목적2)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정책3) 위안소의 상황3.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1) 제 1단계: 문제 제기와 운동의 시작2) 제 2단계: 피해자에 대한 국내 조치와 국제 연대 활동3) 제 3단계: 국제연합 활동 및 국제 기구의 본격적인 활동과 일본의 국민기금4) 제 4단계: 새로운 전진4.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 정부의 태도1) 한국정부2) 일본정부5.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1) 군위안부 문제해결의 필요조건: 노예, 범죄, 국제법 위반의 승인2) 일본 국내법을 통한 해결 모색3) 한국정부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관심 촉구맺음말들어가는 말1990년대 초기부터 사회적·국제적 이슈가 된 군위안부 문제는 많은 피해자의 명백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인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보상과 사과도 없이 10년 이상을 끌어오고 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식민지 잔재를 확실하게 청산, 극복하고 새로운 양국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는 이 시점에서 군위안부 문제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현재 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단체들이 피해당사자들을 도와 피해사실을 알리고 그 보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으나 가해자측이 특정한 단체나 개인이 아니라 당시의 일본군부와 정부인만큼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 군위안부의 문제를 다시 한번 다각적으로 다루어 봄으로써 군위안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앞으로 해결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1. 군'위안부'란1) 일본군'위안부' 개념일제 식민지시기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로, 반복적으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오래 동안 이들을 정신대라고 불러왔다.정신대(挺身隊)는 육군성 병무국. 의무국 등에서는 위안소를 설치하는 목적이나 군위안소의 경영 감독과 군위안부 동원 및 모집인원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령지뿐 아니라 미점령지에 군위안소를 설치하려는 계획도 미리부터 세우고 있었다.그리고 '위안부' 총동원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만주지역에 있던 일본 군인들에게 유행했던 말 중 29대 1이라는, 즉 일본군인 1명당 위안부 29명이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20여만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숫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은 한·일 협정 때 특별위원이었던 일본 자민당의 아라후네 의사가 1965년 11월 20일에 --의 후생공관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그는 연설 중 "일본 군대가 조선 위안부 14만 2천명을 학살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아주 구체적인 숫자인 셈이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20여만 명이 끌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젊은 여성들을 일본 황군의 '성 위안'을 위해 군사 정부가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20여만의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전선으로 수송하면서 성노예를 강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이다.많은 자료와 전 '위안부'들의 증언은 '위안부' 대부분이 조선인 여성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연행될 때의 나이도 11세에서 18세까지가 주이고, 28세까지 연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조선 여성의 연행의 범위가 넓혀져 갔지만, 그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던 층은 가난한 농민층이었다. 그것은 사기 및 강제에 의존했던 모집방식으로 비교적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반적 여성의 차별 위에서, 일본여성 내의 계급차별이 민족차별과 연결되고 여기에 다시 계급차별이 더해진 희생자가 바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였던 것이다. 이들은 하루에 3~40명을 상대했고 주말에는 아침 9시부터 셀 수 없이 길게 줄을 서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2000년 5월 31일 기준)북한의 경우는 북한의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18여명의 피해자가 군위안부로 신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000년 3월 30일~4월1일에 중국 상해에서 열린 [중국'위안부'문제 국제심포지엄]발표자료 근거)2. 일제의 군'위안부' 동원정책과 실태비인도적 행위의 압축된 모습을 성노예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를 통해알 수 있다.이들에 대한 동원은 1932년 일본 해군, 육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1937년 이후 본격적 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수는 그 추정치가 8-20만에 달한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좀더 앞으로 수치도 엄밀하게 계산해 내어야 한다.위안소는 일본군이 있었던 최전방까지 설치되었다. 즉 북서부로는 쿠릴열도 중국과 러시아접경지역, 서쪽으론 인도의 앤더만 니코바르제도, 남서쪽으론 뉴기니아와 그 부 근의 섬에 이르기까지 조선 여성들을 끌고 다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여성들은 어떻게 연행되었는가? 한국의 생존자 증언을 통해 보면 현재 가장 많은 수 는 취업 사기인데 관권력의 공식 비공식의 강제, 물리적 폭력, 인신매매 등으로 연행되 었다.일본 우익들은 연행과정에서 피해자의 자발성 운운하거나 군위안부제를 공창제와 동 일시함으로써 일제의 관여를 부인하곤 한다. 일본 군관자료에서 이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미 나왔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법상엔 21세 미만인 여성이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원한다고 하여도 이는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였고 이 국제법에 일본은 가입하였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남측 피해자들은 16,17세 정도가 가장 많았고 국제법의 제한 범위를 넘은 여성들은 오히려 소수이다. 12, 13세의 어린이도 있었다. 이러한 소녀들을 일본군 통제 감시 관리 하에 있는 위안소의 '위안부'가 되었던 것이다. 21세 이상의 여성들도 대부분 공장에 가서 일한다고 연행하였다. 과연 일본군 '위안부'가 될 것이라고 알고 간 경우가 얼마나 있었을 것인가? 또 필요성을 들고 있다. 그밖에도 위안부 제도의 설치 이유와 목적의 하나로 군대의 독자적 재원 확보를 제시하는 것도 있다. 다만 위안소 허가 및 경영에 대한 세금 징수가 군 재정에 미친 영향, 특히 군직영의 경우 외에도 국가 및 군과 매춘업자 간의 이해, 결탁관계는 기본적으로 주목할 일임에 틀림없다.2) 일본위안부의 동원정책조선여성이 일본군위안부동원의 주요 대상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일제가 정책적으로 어떻게 그 동원의 근거를 마련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먼저 국제법상에서의 근거마련이다. 1904년부터 시작된 추업'상의 부녀매매단속에 한 국제간의 협정은 몇 차례에 걸쳐 관련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일제는 1933년의 성인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을 제외하고, 이와같은 국제조약들에 가입한다. 그러나 가입시 일제는 자국의 피식민지를 이 조약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다음으로는 군관리 하의 군위안부' 출입정책이다. 일전쟁기 1938년 중국도항단속에 관한 군관련자료들을 보면 당시 일반인들의 도항에는 그 단속이 매우 엄격하다. 그러나 제복을 착용한 일본군인 군속들은 이 단속대상에서 제외시키거나, 군대 위안소 개설자들의 한구(漢口)진출시 그들을 통제하지 않으며, 만주행의 경우는 위안부'들을 무기 자재 등의 군수품과 함께 도항시키고 있다.이외에도 1938년 한구위안소에서는 상해, 남경 등에서 양자강 도항시 위안부'를 수송순위 1위인 군수품으로 우선 수송'했다는 군관계자의 증언이 있고, 피해자들 또한 군수품과 함께 도항했던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데, 결국 일제가 중일전쟁기 이후 급증하는 군인 수에 비례하여, 군위안부'들의 수송을 우선적으로 실시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마지막으로는 일군 상층부에 의한 조선여성의 순결' 채택을 들 수 있다. 특히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상해주둔군 군의 아쏘오 데츠오(麻生徹男)는 오락소용' 여성들의 성병검사 후 이들 100여명 가운데 80명이 조선인 여성'으로, 이들은 성병이 극히 드물다'일본 정부에 효과적으로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합 등 국제 기구 활동도 벌였다. 이 활동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법, 즉 강제노동조약과 부녀매매금지조약,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국제 관습법을 위반했고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널리 확인시켰다. 이렇게 국제연합에서 벌인 활동은 남북한이 국제연합 가입후 첫 민간단체와 정부의 공동보조 활동이었다.3) 제 3단계: 국제연합 활동 및 국제 기구의 본격적인 활동과 일본의 국민기금국제적인 활동은 일본 정부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제 마당에서 일본 정부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여지게 되었고, 1995년 일본의 사회당 연립 정권 수립과 더불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 기금(이하 국민기금)이란 유화적이면서도 왜곡된 방식의 대응을 낳게 되었다.※ 국민기금의 문제점국민기금은 개인보상을 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가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일종을 고육책으로 수립한 것이다. 국민 기금의 문제는 무엇보다 성노예를 국가 범죄로 인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도의적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책임과 연결되지 않는 도의적 입장이란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입장이며, 인종 차별과 성차별에 근거한 것이다. 나아가 성노예를 범죄로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을 결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용인하는 것이다.국민 기금은 그 사업의 하나로 성폭력 문제에 대처하는 사업에 자금을 지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성노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조차 부정하면서 성폭력 문제에 대처하는 사업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다.또한 국민 기금이 당초 예정한 1조억 엔이 아니라 1천억 엔을 10년간 모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액수도 일본인 피폭자에 대한 연간 지출액인 1천 4백억 엔과 군인, 군속, 기타 국가총동원령에 따른 징용자 등에게 연간 약 2조엔을 지출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금액이었다.피해자 대부분과 운동단체는 일본의 국민기금을 반대 해왔다. 국민기금은 범죄행위에 대한 올바른 사죄방법도 자기 반성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