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신교육운동Ⅰ. 신교육운동의 의미와 특성《신교육운동의 의미》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번져 나간 교육개혁 운동을 뜻한다. 이는 형식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학교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민주적 시민사회에 게 실생활중심적 ? 아동중심적인 것으로 개혁하려 한 교육운동이다. 교사중심, 서적중심, 암기주심, 강의중심의 구교육에서 학생중심, 생활중심, 활동중심, 참여식 교수법으로 변화를 시도한 학교교육의 내용적 변화운동이다.《신교육운동의 특성》(1) 실생활중심의 교육라틴어 중심의 교육내용과 주입식 서적 중심의 형식적 교육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은 직접경험을 통한 실생활중심 교육의 형태를 띠었다.(2) 아동중심의 교육권위적이고 주입식인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국 학습자인 아동을 억압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려는 것이므로 아동중심 교육의 성격을 지녔다.(3) 지역사회 학교운동실생활중심으로 교육내용을 개혁하려는 교육관에서는 실생활의 무대인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들어 있게 마련이며, 신교육운동은 지역사회 학교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Ⅱ. 신교육운동(1) 신학교-영국영국의 세실과 레디가 1998년 아보츠홀름에 설립했으며, 영국의 공중학교의 비현대적 교육방법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근대적 과학정신에 의해 현대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의 교육을 표방했다.(2) 전원학교-독일신학교의 영향으로 독일 리쯔가 1898년 설립했다. 라틴어 중심의 교육내용과 주입식 서적중심의 학교를 지양하고, 근대어와 국어, 자연과학과 기술교과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실과 고등학교였다.(3) 노작학교-독일케르쉔슈타이너가 처음 노작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에서 유래되어 케르쉔쉬타이너에 의해 구체화되고 가우리히에 의해 발전했다. 손을 이용한 생산적 수공업 작업을 통해 심신의 발달과 실생활에 대한 준비를 시켰다.(4) 듀이의 실험학교1896년 듀이가 시카고 대학에 설립하여, 아동을 억압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아동의 흥미와 필요에 따라 생활과 경험중심 교과로 구성했다.(5)합과교수운동-독일1908년 독일의 라이프찌히 지역 24개 초등학교에서 시행된 교육운동으로, 단편적인 지식만을 주는 전통적인 교과중심과정을 경험중심과 생활중심의 종합교육과정으로 발전시키려했다.(6) 몬테소리의 아동의 집몬테소리 여사가 로마의 빈민자녀를 위해 1907년 창설한 학교로, 놀이도구를 이용하는 몬테소리법으로 교육했다.Ⅲ. 현대의 교육사상가《듀이(John Dewey, 1859~1952)》(1) 철학사상①도구주의 진리와 지식은 인간생활에 봉사하는 수단이다.②경험철학 경험철학에서 말하는 경험이란 생활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뜻한다. 즉, 생활체와 환경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③상대적 진리관 진보주의의 기본철학의 핵심은 ‘변화’이다. 즉, 세상은 변화하며 따라서 사람도 변화한다는 것이다.(2) 교육의 본질①교육은 생활이다.②교육은 성장이다.③교육은 계속적인 경험의 재구성이다.④교육은 사회적 과정이다.⑤교육은 피교육자의 자발적 활동과 적극적 참여를 요한다.(3) 교육목적교육은 생활과정이며 교육을 하는 그 자체가 교육목적이다.(4) 교육내용생활경험과 필요한 가치적인 순서로 ①직업과 유희, ②지리와 역사, ③수학과 자연과학을 들고 있다.(5) 교육방법흥미, 용기, 관심을 유발시켜야 하는데, 행함으로써 배우는 법과 문제해결법이 효과적이라고 한다.《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1952)》(1) 교육사상아동을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존재로 보았으며, 아동 스스로 자신의 잠재능력을 전개해 나간다고 보았다.(2) 작업이론작업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작업(노작)을 통하여 인성을 형성하고 자신을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인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유아에게 바람직한 작업을 제시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3) 정상화이론정상화이론은 어린이가 작업에 진정한 흥미를 가지고 만족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내적 훈련과 자신감을 발달시키고 목적지향적인 작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4) 교사의 역할교사의 역할은 ①환경의 유지와 관리자의 역할, ②동기유발의 기능을 발휘하는 역할, ③방임자가 되는 역할이라 하였다.《니일(A.S.Neill, 1883~1973)》(1) 섬머힐 학교니일은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여러 가지 교육적 경험 끝에 영국에서 1924년 자신의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곳이 바로 아이들을 학교에 맞추는 대신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추는 학교이다.(2) 아동관①어린이는 본래 현명하고 현실적이다.②아이들은 본래 성실성을 가지고 태어난다.③어린이들은 사랑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④아이들은 일하기를 싫어한다.⑤어린이들은 이기적이다.⑥어린이의 흥미는 직접적이다.⑦게으른 아이는 없다.(3) 섬머힐 학교의 특징①섬머힐 학교는 자유와 창조적 활동을 중시하는 학교로 자유가 기본방침이기는 하지만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이 아니라, 자치기구에 의해서 남에게 방해되는 것은 규제를 받는 경우도 있다.②이 학교는 이성을 중시하는 지식교육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품성교육에 더 치중한다.③이것은 대안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열린학교, 열린학습의 방법을 취한다.
Bernoulli's theorem (베르누이의 법칙)유체역학의 기본법칙 중 하나이며, 1738년 D.베르누이가 발표하였다. 예를 들면 굵기가 다른 유리관 속에서 물의 수면 높이를 관찰했을 때, 굵은 쪽 유리관에 연결된 물기둥은 그 높이가 낮아지고, 가는 쪽 유리관에 연결된 물기둥은 높이가 높아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베르누이의 법칙”수조에 굵기가 다른 관을 그림과 같이 장치하여 물을 흐르게 하면 가는 곳은 유속이 빨라 압력이 작아서 수위가 낮아진다.유체는 좁은 통로를 흐를 때 속력이 증가하고 넓은 통로를 흐를 때 속력이 감소한다. 유체의 속력이 증가하면 압력이 낮아지고, 반대로 감소하면 압력이 높아지는데, 이것을 “베르누이의 정리” 라고 한다.★베르누이의 법칙이 적용된 마그누스 효과 ① ★★베르누이의 법칙이 적용된 마그누스 효과 ②★★간단한 실험으로 알아보는 “베르누이의 법칙①”1234★간단한 실험으로 알아보는 “베르누이의 법칙②”★위에서 아래로 스핀★우에서 좌로 스핀★간단한 실험으로 알아보는 “베르누이의 법칙②”야구의 커브볼 원리를 이해한다면 베르누이의 법칙도 이해하는 법!!{nameOfApplication=Show}
한국전통문화-민속박물관-차례P.1---------------------------------------차례P.2---------------------------------------출생P.4---------------------------------------놀이P.5---------------------------------------교육P.6-------------------------------------성년식P.8---------------------------------------혼례P.10-------------------------------회갑과 장례P.12-------------------------------사당과 제사▶출생우리 나라는 아버지와 아들로 대를 이어가는 부계사회이므로 혼인을 하여 남편집단으로 시집온 여성들을 통해 대를 잇게 된다. 그러므로 혼인한 여성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이 낳는 일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은 가계계승자, 즉 아들을 낳아야 조상에 대한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한 아이, 특히 남아의 출생은 한 집안 또는 가문의 경사가 됨은 물론이며 특히 시집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를 출산한 산모에게는 비로소'어머니'라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시점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큰 통과의례의 하나였다.출생과 관련된 의례는 출생 이전의 기자행위에서부터 영아(영兒)가 무사히 일년을 넘겼음을 축하하는 돌잔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사를 포함한다. 출산과 관련된 신앙과 의례는 아이를 점지해주고 순산(順産)과 산육(産育)을 담당한다는 삼신에 대한 신앙행위가 그 중심을 이룬다. 금줄을 문에 매다는 행위는 출산을 알림과 동시에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아 아를 보호한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태 처리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행위들은 태어난 아이의 장래를 좋게 하려는 주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기자기자란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벌이는 여러 형태의 주술적 행위 및 이와 관련된 관념을 말한다. 기자신앙은 삼국시도 있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에는 마을마다 태를 처리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데, 남아의 태는 항아리에 넣지만 여아의 그것은 바가지에 담아 묻는다. 제주도에서는 삼거리 노상에서 태를 태운 다음 재를 그릇에 넣어 봉한 뒤 물에 띄운다.*돌돌은 아기가 태어난지 꼭 한해가 되는 날이다. '첫돌', '두돌' 하듯 이 말은 아기의 나이를 표시하기도 한다. 돌날 아침에 돌을 맞은 아기에게 돌 옷을 입히는데,남자아기는 저고리, 바지,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 남색쾌자 등과 복전을, 여자아기는 색동저고리, 다홍색 긴치마, 당의 등과 조바위를 입힌다. 돌상은 안방이나 대청에 차리는데 특히 국수, 백설기, 수수팥떡 등 장수와 무병, 부정퇴치와 관련된 상징적인 음식이 놓인다.*금줄금줄은 부정(不淨)한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목적으로 대문이나 동네 어귀를 가로질러 매어놓는 줄이다. 일반적인 새끼줄과 달리 금줄은 왼쪽 방향으로 꼬아 만든다. 아이를 낳은 집에서는 출산한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대문에 금줄을 친다. 남아를 낳았을 때는 줄 틈으로 숯덩이와 빨간 고추를 일정한 간격으로 꽂고, 여아의 경우는 작은 생솔가지와 숯덩이를 꽂는다.금줄은 대문의 양 기둥에 걸쳐지지 않고 양기 둥에 한 줄씩 늘어뜨리는 지방도 있다. 금줄은 대체로 세이레, 즉 21일 동안 걸어두지만 지역 또는 집안에 따라 달라 일곱이레, 즉 49일 동안 걸어두는 곳도 있다.▶놀이아이놀이는 성별에 따라 구별된다. 놀이감과 놀이 방식에 각 개의 성적(性的) 특성이 잘 반영되어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익히고 성적인 특성을 학습해 나간다. 사내아이들의 놀이로는 고누, 땅재먹기, 자치기, 제기차기, 장치기, 깡통차기, 딱지치기, 돌치기, 말타기, 군사놀이 등이 있다.이러한 놀이는 놀이 감이 따로 필요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것들이 소용된다. 딱지치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의 놀이들은 나무를 다듬거나 종이를 접고 오려서 놀이감을 만다. 학도는 대개 6,7세에 입학하여 14, 15세에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20세가 넘도록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서당교육이 끝나면 형편에 따라 향교나 서원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였다. 서당의 교과과정을 보면 千字文 童蒙先習 등 기초단계부터 通監 , 사서삼경, 唐宋文 등에 이르는 한문 교재들을 강독(講讀). 제술(製述).습자(習字) 등의 방법으로 가르쳤다. '강'이란 배운 글을 읽거나 외우게 하는 교수 방법이다.거의 모든 서당이 남아(男兒)만을 교육하였으나 간혹 여자의 규방교육을 위한 가숙(家塾) 형태의 서당 설립되기도 하였다. 조선말기까지 서당수는 전국적으로 약 1만 6천 개소에 달했다.*향교향교는 유학교육을 위해 지방의 군현에 설치한 관학 교육기관이지만, 대성전과 같은 건물이 있어 선현에 대한 제사의 기능과 아울러 지방 유림들의 집합소 기능을 동시에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가 내러졌고, 각 군 현에 학교가 설립된 사례의 나타나므로 이 시기에 향교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군 현 단위로 재정비되면서 과거제도와 함께 그 운영이 본격화 한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이다. 향교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공급받는 등 국가의 재정적 지원으로 운영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해야 할 교수(敎授)와 훈도(訓導)가 제대로 충원된 적이 없었고 비용도 모자랐으므로 따로 지방 사족들의 지원을 받아 점차 지방 자치적인 운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교생(敎生)은 양반과 평민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숙사는 동재(同齋)와 서재(西齋)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정원은 큰 고을에는 90명, 군에 50명, 현에 30명으로 규정하였으나 실제 학생 수는 이보다 많았다.현재 남아있는 향교는 남한에만 231개가 있다. 여기에 전시한 모형은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향교건축물인 나주향교를 1/80로 축소한 것이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나주향교는 전라도의 4대 향교의 하나로서 조선 태조 7년(보다는 '들돌들기' 혹은 '들참례'라고 하는 실질적인 성년식을 가졌다. 이것은 주체측에서 미리 정해놓은 돌을 들어올리게 하여 힘을 측정한 다음 한 몫의 노동력으로 인정하는 의식이다. 두레조직과 같은 노동조직에서 주로 이 행사를 담당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전통적 관례의식은 사라졌다.*들돌들기‘들돌들기’는 마을공동체 또는 농사조직에서 새로운 성원을 받아들일 때 가입 조건으로 그 집단에서 미리 정해놓은 돌을 들어올리게 하는 신입의례다. 들돌들기는 ‘들참’, ‘입참례’, ‘신참 례', ’바구리', ‘나다리', ’주먹다드미'등 지역에 따라 부르는 말이 다르다. 들돌들기에 쓰이는 돌의 명칭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들독‘, '등돌', ’든돌', ‘진쇠돌', ’당산돌', ‘신돌’, ‘초근돌', ’차 돌백이‘ 등이 있다. 들돌의 모양은 대개 타원형이거나 원형이다. 한 마을이 가지는 들돌의 수는 보통 한 두개이며,주로 당산 나무 밑, 노두목, 정자앞, 당집 앞, 장자집 마당, 텃논 등에 놓아둔다. 들돌을 드는 방법으로는 땅뜨기, 물박치기, 허리에 올리기, 가슴팍올리기, 등넘기기 등이 흔하고 가슴에 품고 당돌기, 어깨에 매고 당나무돌기, 머리 위로 치켜 올리기, 들돌을 지게에 지고 양손으로 귀잡고 일어서기 등 여러가지가 있다.*삼가례관례의 절차는 ①택일(擇日) ②준비 ③시가례(始加禮) ④재가례(再加禮) ⑤삼가례(三加禮) ⑥초례(醮禮) ⑦자관자례(刺冠者禮)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시가례(始加禮), 재가례(再加禮), 삼가례(三加禮)는 관을 세번 갈아 쓰는기본적인 3단계 절차다.시가례는 상투를 틀고 치포관(緇布冠)을 쓰며 사규삼(四揆衫) 혹은 난삼( 衫)을 입는 첫단계 절차다. 재가례에서는 초립 혹은 유건을 쓰고 조삼과 혁대를 두르고 혜(鞋)를 신는다. 삼가례 때는 복두(혹은 갓)을 쓰고 난삼 또는 도포를 입고 신을 신는다. 이어 술을 마시는 초례를 행하고, 빈객(賓客)이 자(字)를 지어주는 자관자례(刺冠字禮)를 행한 관자가 사당에 이 사실을 알리는 고유식(告由式)작한다. 신부가 술과 떡을 만들어 친정으로 첫 나들이 가는 것을 근친(覲親)이라고 한다. 근친은 혼례의 마지막 절차라고 할 수 있다.*목기러기목기러기는 혼례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초례 직전에 행하는 전안례(奠雁禮) 때 사용된다. 과거에는 산 기러 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이루면 한쪽이 죽더라도 다른 짝을 찾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전안례 때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은 부부간의 백년해로를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목기러기는 신랑이 혼례를 치르기 위하여 신부집으로 갈 때 붉은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간다. 이때 목기러기를 안고 가는 사람을 안부(雁夫) 혹은 '기럭아비'라고 한다.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낮은 상 위에 붉은 보자기를 깔고 뒤에 병풍을 친 전안청 (奠雁廳)을 마련한다. 사모관대로 정장을 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서면 전안청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안부가 전한 목기러기를 상위에 놓고 두 번 절하는데, 이것을 전안례(奠雁禮) 라고 한다.*납폐함혼례절차의 하나인 납폐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장과 예단을 담는 함이다. 일반적으로 ‘함'은 그 안의 내용물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함에는 혼수(婚需)와 예장(禮狀), 그리고 물목(物目)을 넣는다. 혼수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르나 신부의 의상(衣裳) 각 두벌과 패물 및 혼서지는 어느 경우나 반드시 들어간다. 예단은 청색과 홍색의 색깔잇는 치마감으로 한다. 함은 무명 8자로 된 ‘함질끈'을 마련하여 석자는 땅에 끌리게 하고 나머지로 고리를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만든다. 함을 지고가는 사람은 ‘함진아비'라고 하여 흔히 첫 아들을 낳은 복 많은 사람에게 맡긴다. 함은 마루에 상을 놓고 그 위에 홍보를 덮은 뒤 받기도 하고, 상위에 시루를 놓고 그 위에 얹기도 한다. 함을 받은 신부 측에서는 함에 손을 넣어 잡히는 옷감 색에 따라 부부의 장래를 점치기도 한다. 신부집에서는 함진애비를 비롯한 신랑측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낸다.*친영친영은다.
한국전통문화-양주별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의 정의】*서울과 중부지방에 전승되어온 산대놀이의 한 분파.종류 : 산대놀이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지정연도 : 1964년 12월 7일기능보유자 : 김순희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애오개(아현동)?가믄돌(玄石)?사직골 등지의 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州內面)에 전승되는 탈놀음을 별산대라고 부른다. 양주별산대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양주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라 하며, 그는 양주 최초의 가면제작가 라고도 한다.초파일?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그 밖에 명절이나 기우제(祈雨祭) 때도 연출되었다. 놀이 전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고사에는 조라(산제에 쓰는 술)와 떡과 삼색과일?소머리?돼지다리 등 푸짐한 제물이 준비된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앞놀이(길놀이)가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한다. 놀이터는 양주 사직골로, 불곡산(佛谷山) 계곡 입구의 사방이 경사진 곳이 천연의 노천극장 구실을 하였고, 한가운데는 개복청(改服廳)과 삼현청(三絃廳)이 설치되었으며 그 주위에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관객들이 앉게 되고, 조명은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밝히며 밑에서 위로 비추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다.놀이는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가 따르는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묵극적(?劇的:팬터마임)인 몸짓과 동작 ?사설, 그리고 노래가 곁들여져 가무적인 부분과 연극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등장인물은 상좌 2명과 먹중 4명과 완보(完甫)?옴중?소무(小巫)?연잎?눈끔적이?샌님?취발이?말뚝이?쇠뚝이?왜장녀?애사당?원숭이?포도부장?도령?해산모(解産母)?신주부?신할아비?미얄할미?도끼?도끼누이 등이며, 탈은 대개 바가지탈로 현재 22개의 탈이 있어 역할에 따라 겸용하기도 한다.놀이는 모두 8마당 9거리로 짜여졌으며 제1마당은 상좌마당, 제2마당은 옴중마당, 제3마당은 먹중마당, 제4마당은 연잎?눈끔적이마당, 제5마당은 팔먹중마당, 제6마당은 노장마당, 제7마당은 샌님마당, 제8마당은 신할아비?미얄할미마당이다.사설(대사)은 봉산탈춤이 비교적 운문적(韻文的)이라면 별산대놀이는 평범한 일상회화로 비어(卑語)를 쓰며 동작은 하나의 전기적인 역할을 한다. 춤사위는 한국 민속가면극 중 가장 분화?발전된 것으로 몸의 마디마디 속에 멋[神]을 집어넣은 염불장단의 거드름춤과 멋을 풀어내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구분되어 몸짓 또는 동작이 유연한 형식미를 갖추었다. 반주악기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젓대?해금?장구?북 등인데 꽹과리?호적 등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으며 반주장단에는 염불?타령?굿거리 등이 있다.연희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의 공통된 내용으로 남녀의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모욕, 서민생활의 빈곤상 등 당시의 현실 폭로와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정신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오늘날 산대놀이라 하면 이를 가리킬 만큼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양주별산대놀이의 역사와 배경】양주 별산대(楊洲別山臺)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본산대(本山臺)라고하는 녹번(碌磻), 아현(阿峴)등지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그리하여 연희자들은 쌀, 포(布)등을 지급받았다. 그들은 보통 편놈(便人)들로서, 인조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각기 분산되어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 이 단체(契)를 모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결과 녹번리(碌磻里)산대, 애 오개(阿 峴)산대, 노량진(鷺梁津)산대, 퇴계원(退溪院)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생긴 것이다.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약 200년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 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관아의 하리패인 아전(衙前)들이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 떠서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한다.이 때의 중심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으로 양주 최초의 탈 제작자 이다. 양주의 옛 읍은 교통의 요지로서 주막이 즐비했고, 또 양주목사(楊洲牧使)가 주재 (駐在) 하던 곳으로 한강이북에서는 가장 큰 고을이었다.이러한 배경속에서 민간화된 양주별산대놀이는 목사가 주재하던 객문동을 중심으 로 소위 '본바닥' 사람들만이 출 수 있던 독특한 탈춤으로 전승되었다. 양주 별산 대놀이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외에 가 뭄때의 기우제(祈雨祭)같은 때에도 연희되었다.격식대로하자면 놀이전의 고사(告祀)에는 조라(祭酒)와 떡과 삼색 과일 외에 쇠머리, 돼지다리등 푸짐한 제물이 올 라야 하고, 그 제물과 조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아야 놀이가 시작되었다.놀이비용은 마을유지들과 부가(富家)나 상인들이 추렴하고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 였다고한다. 놀이터는 주로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曲山) 아래의 사직골이 었고, 여기에는 당(堂)집이 있어 놀이의 가면과 여러도구를 보관했다.그런데 근래에 와서 사직당이 없어지고 놀이터가 경작지로 바뀌어 지금은 전수회관(傳授會館) 앞뜰에서 낮에 연희된다.원래 산대(山臺)란 말은 산붕(山棚), 채붕(綵棚), 오산(鰲山) 등을 전부 포함한 범 칭(汎稱) 으로 잡희(雜戱)를 노는 일종의 높은 무대 배경이나 무대를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 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公儀)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 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없어지고 민속극화된 뒤 부터는 산대놀이터는 더욱 간소 한 야외무대가 되고말았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산대극을 야희(野戱)로 분류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양주별산대놀이의 특징과 의의】양주 별산대놀이는 다른 한국 탈춤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歌舞的) 부분과 거기에 묵극적(?劇的)인 몸짓(科)과 덕담 (德談), 재담(才談)이라고 하는 사설(曰),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상연된다.상좌, 연잎과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小巫),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할미역(役)은 대사 없이 춤과 몸짓(mime)과 동작으로만 연기하지만, 그 밖의 역들은 대사 와 함께 춤과 몸짓 및 동작으로 연기한다. 봉산(鳳山)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데 비하여, 양주 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한 일상 회화조(會話調)의 대사이다. 그리고 옴과 취발이와 말뚝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대사 중 백미(白眉)로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말 없는 탈의 연기에서는 노장의 펜터마임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시종 대사한마디 없이 춤과 몸짓으로만 소무(小巫)와의 파계 과정과 농희(弄戱)를 훌 륭히 한 마당의 놀이로 성립시키고있다.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그밖에 매화타령(梅花打令), 백구타령(白鷗打令), 천자(千字)풀이, 덕담(德談) 등으로 가짓수가 많은편은 못되며, 그것도 덕담외에는 처음의 허두만 조금 부르다 곧 재담이나 춤으로 바꾸어버려 동작의 신호적인 큐의 역할을 한다.민속예능(民俗藝能)의 일반적 특성으로 연출 시간에는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의 흥(興)과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었다. 산대놀이의 반주악기로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2, 젓대1, 해금1, 장구1, 북1로 구성 되지만 이밖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리와 장구만으로도 춤을 춘다. 반주악(伴奏樂)은 완중(緩重)한 염불, 리듬이 명확한 타령, 유장(悠長)한 굿거리곡 등을 사용한다.산대춤은 봉산 탈춤이나 오광대(五廣大)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전아(典雅)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 경기인의 기질이나 궁중무 (宮中舞)의 영향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더 분석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우선 양주 별산대춤은 크게 거(그)드름식 춤과 깨끼식 춤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과 공통된 내용으로 조선조 서민문학(庶民文學)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巫堂), 사당(寺堂), 하인(下人) 및 기타의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 폭로와 풍자, 호색(好色), 웃음과 탄식 등을 보여주며, 그 주제는1)벽사(酸邪)의 의식무(儀式舞)와 굿2)파계승에 대한 풍자3)양반에 대한 모욕4)남녀의 대립과 갈등5)서민생활의 실상(實相) 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특권계층과 형식 도덕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다.이것은 세계 어느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 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時流)의 악폐(惡弊), 당시에 호사를 부리는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 상(相)은 임진, 병자의 양란이후 새로 일어난 서민문화를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서민예술의 하나인 산대놀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양주 별산대놀이의 연희자도 다른 탈춤의 경우와 같이 대두분 반농반예(半農半藝)의 비직업적인 연희자들로 구성되어 왔으며, 이속(吏屬)과 무부(巫夫)가 많았다. 일반인들은 탈을 쓰면 조상의 넋이 겁을 내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하여 꺼려왔기 때문이기도 하다.【양주별산대놀이의 모든 춤 소개】제1과장 상좌춤상좌춤은 15-16세된 어린 중이 연희자와 관객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잡귀를 물리치며 사방신께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무이다. 상좌춤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연희자가 추는 춤으로서 웬만큼 추어서는 그 춤의 멋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며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사위를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전통문화-수문장 교대의식-【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조선시대 왕궁에는 수문군이라는 군대가 있어 궁궐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서울시는 조선시대 수문군이 교대하는 의식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6년부터 재현해 오고 있습니다.【행사기간】○ 전반기 행사 : 2003. 3. 1 ~ 8. 31춘 계 근 무 : 2003. 3. 1 ~ 5. 2혹서기 근무 : 2003. 7. 1 ~ 8. 31수문장교대의식 : 2003. 5. 3 ~ 7. 17○ 하반기 행사 : 2003. 9. 1 ~ 11. 30추 계 근 무 : 2003. 11. 17 ~ 30수문장 교대의식 : 2003. 9. 1 ~ 11. 16【행사시간】수문장 교대의식 : 10:00 ~ 16:00 (총 4회 실시)【장소】경복궁 광화문, 흥례문【행사내용】궁성문 수위의식 행렬 및 수문장 교대의식【주최】한국문화재보호재단【기대효과】우리 스스로에게 잊혀져 가는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기를 마련하고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립니다.*전통가치구현: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를 다시 한번 체험해보고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좋은 계기를 마련한다.*학습의 기회: 그 동안 전통적인 문화유산에 관한 학습의 미비로 잘 알지 못했던 과거조선조 시대의 사회상이나 문화적인 면을 학습하는 기회를 제공한다.*자긍심 고취: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재현하여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깊이 새겨보고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관광객 유치: 영국 근위병 교대의식에 비견되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상품 및체험관광 상품으로 육성, 내?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활성화합니다.【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란?】조선시대의 수문장은 도성과 궁성의 각 문을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조선왕조는 도성과 궁궐의 수비를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해 예종 1년(1469)에 처음으로 수문장을 설치하고,『경국대전』에 법으로 제도화하였다. 원래 조선 궁궐의 각 문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성문의 개폐와 출입자의 관리·감독, 궁궐문의 수호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궁성문은 처음에는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닫기만 했던 것을 예종대 남이의 옥사가 있은 후 별도의 자물쇠를 만들어 궁성문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열고 닫은 후에는 열쇠는 반드시 승정원에 반납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만일 문을 여닫는 시간외에도 왕명을 받은 선전관이 개문(開門)과 폐문(閉門) 표신을 제시하면 특별히 열고 닫았다. 또한 국왕이 궐밖에 행차 시에는 궁궐문의 열쇠를 수문장이 직접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문장은 서반의 4품 이상 중에서 추천된 자를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근무를 섰다. 수문장이 모두 20명이었으나 정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때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43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으나, 전란후 원래대로 정비되었다. 특히 양난을 거친 후 도성과 궁궐의 수비와 당직 근무를 더욱 엄격히 할 필요가 생겨나면서 새로이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는 종6품의 관아를 설치하였다. 그 인원도 1746년(영조 2)에 반포된 『속대전』에는 수문장에 종6품직 5명, 종9품직 18명 등 23명으로 정해졌다. 그 후 1863년(고종 2)에 반포된『대전회통』에는 수문장이 29명으로 늘어났다. 이 밖에 조선후기에는 함흥, 전주, 수원 등지의 왕실 묘전(廟殿)을 지키는 4곳의 ‘각전수문장(各殿守門將)’ 이 설치되었다.조선시대의 궁성문을 수호하는 수문장의 책무는 단순히 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국왕의 안전은 물론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국왕이 임어하는 서울의 도성과 궁성문을 관장하는 수문장제는 조선시대 도성방어는 물론 왕실 호위체제의 선봉이자 핵심조직으로서 그 제도가 근대식 제도로 개편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그 역사적 기능을 다하였다.【고증과 재현은 어떻게 하였나?】본 고증작업은 경복궁의 흥례문 복원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이 건재하던 임진왜란 이전을 대상시기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궁성문의 개폐 규문장이 단독으로 열고 닫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승정원의 주서가 승지로부터 궁성문의 열쇠를 받은 후, 도총부 당하관인 낭청·액정서 사약과 함께 직접 성문을 열고 닫았다. 이처럼 3사람이 반드시 함께 모여야만 성문을 열고 닫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왕실의 수호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였다.광화문은 경복궁의 외문이자 남문 역할을 하였다. 광화문 앞에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 등의 6조와 각종 관청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모든 명령과 정교, 관료들의 상주와 복명이 이 문을 통해 전달되었다. 따라서 광화문에는 다른 어떤 문보다도 많은 장수와 입직군사가 배치되었다. 광화문에는 수문장 1명에 수문군이 대문에 30명, 좌우 협문에 20명 도합 70명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배치된 병사들은 중앙군인 오위의 기간병인 정병과 갑사, 그리고 대졸이다.광화문에는 호군으로 임명하는 요령장 1명과 정병 2인으로 구성된 요령군을 초저녁에 병조에서 방울을 받고 군호를 받아 흔들며 밤새 궁성을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광화문 문루의 종을 메달아 시각을 알리는 수종장과 이를 담당하는 수종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입직군사들은 3일마다 교대하되, 근무조 내에서 식사와 휴식을 번갈아 가며 하였다. 당시 근무 교대 시간은 대체로 궐문을 열기 전과 업무가 끝나는 신시(오후 4시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궁성문의 개폐 절차와 수문장 교대 절차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이러한 고증은 『경국대전』과 『왕조실록』을 근간으로 하고, 『승정원일기』·『일성록』·『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만기요람』·『춘관통고』·『대한예전』·『석담일기』·『반계수록』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자료를 참고로 하였다. 특히『국조오례의』와 19세기의 자료인『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에 보이는 수문 군사들의 배치와 자세 등은 본 행사의 고증에 큰 힘이 되었다.본 재현행사는 위와 같은 고증을 바탕으로 광화문의 개폐 절차와 수문장및 요령장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재현의 뜻】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의 재현은 경복궁의 중문(中門)인 흥례문 복원을 기념하고 월드컵 개최를 통해 한국의 격조높은 전통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엄밀한 학술적 고증과 분석에 의거하여 준비된 최초의 재현행사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조선시대 궁중문화를 소개하는 재현행사는 몇 차례 있어 왔지만, 궁성문 개폐와 관련된 재현행사는 처음있는 일로서, 조선시대 왕궁 수비의 절차와 궁중의 일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본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경복궁의 중문(中門)인 흥례문(원래의 명칭은 弘禮門)이 85년만에 복원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3개의 대문이 있었다. 경복궁의 내문(內門)인 근정문, 중문인 흥례문, 외문(外門)인 광화문이 그것이다. 조선의 백성이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고, 조선의 왕이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도 역시 이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경복궁의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은 조선의 왕과 백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이자 조선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그러던 것이 1915년 일제가 조선총독부의 청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의 근정문만 남긴 채, 흥례문을 완전히 철거하고 광화문은 건춘문 옆 한쪽 구석으로 옮겨놓았다. 조선의 맥을 끊는 잔인한 만행이었다. 해방후 광화문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흥례문이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동안 흥례문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흥례문이 복원됨으로써, 조선 궁궐의 상징이자 정궁인 경복궁은 아직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조선시대 수문장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궁성문을 여닫고 근무를 교대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은 물론 국가의 안위를 수호해 나갔다. 그러므로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 절차는 조선시대 왕실 호위 문화의 정수라는 의미를 갖는다. 조선왕조가 경리의 준비 및 수문장 교대절차를 준비한다.다. 승정원 주서가 승지로부터 궁성문의 자물쇠를 받는다.라. 승정원 주서가 도총부당하, 액정서사약과 함께 광화문으로 이동 준비한다.마. 수문장, 요령장, 수종장이 숙배하고 병조로부터 패와 군호를 받는다.바. 수문장은 요령장, 수종장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광화문으로 이동을 준비한다.사. 수문군(갑사·정병·대졸) 70명, 요령군(정병 2), 수종군(서운관생 2, 기수 4)아. 광화문 밖에서는 숙직 요령장이 요령군과 함께 대기 정렬한다.자. 광화문 문루에서는 숙직 수종장과 수종군이 문루에서 내려와 대기 정렬차. 취타군이 행진을 준비한다.3. 개문 관리 및 수문장의 교대 행군가. 平明(5시)에 초엄을 찬정하면나. 취타대를 앞세워 중앙 관리 및 수문장 수문 군사들이 광화문에 당도다. 승정원 주서, 도총부당하, 액정서사약이 광화문앞에 당도 한다.라. 요령장, 수종장 역시 휘하 군사들을 인솔하고함께 광화문에 당도한다.4. 수문장 및 수종장의 교대의식가. 중엄(북)을 치면나. 교대 수문장은 군호를 응대하고 수문장 패를 확인한 후에 서로 군례를 행한다.다. 지휘봉인 등채를 양손으로 잡고 수평으로 들어 상호의 경례를 한다.라. 군례를 마치면 출문부, 궤함의 민원사항 등의 당직 업무를 인수인계 한다.마. 업무를 인수인계 한 후에는 수문장과 수문군의 교대절차를 행한 후 정렬 대기 한다.바. 교대 수종장은 수종장 패를 확인한 후에 서로 군례를 행한다.사. 지휘봉인 등채를 양손으로 잡고 수평으로 들어 상호의 경례를 한다.아. 군례를 마치면 교대 수종장은 광화문의 2층 문루로 올라가 근무를 선다.자. 업무를 인수인계한 수종장과 수종군은 교대절차를 행한 후 정렬 대기한다.5. 궁성문 개폐와 요령장 교대가. 삼엄(종)을 찬정하면나. 승정원 주서, 도총부 당하관, 사약이 약시함의 자물쇠를 꺼내 함께 궁성문을 연다.다. 문이 열리면 문밖에서 대기중인 요령장이 문안으로 들어온다.라. 교체 요령장과 서로 요령장 패를 확인한 후 서로 군례를 행한다.마. 군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