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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세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Ⅰ. 들어가면서지난 학기 “중세사” 수업을 수강할 때, 「고전소설 속의 역 사여행」이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하는 레포트가 있었다. 당시 그 책은 나에게 기존의 생각의 틀을 변화시켜 주기에 충분한 책 이었다. 하지만 이번 책 역시 실망을 주지 않았다.교육실습을 하면서 틈틈이 책을 접했는데 학생들에게 조금씩 이런 얘기를 언급해주는 것이 어떤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국한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전소설 속의 역사여행」이나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라는 책은 아직 학생들이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지만, 기존의 국사교과서를 벗어나서 사고의 폭을 넓게 하고, 상식을 넓혀주며 그리고 1759년 결혼식장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Ⅱ. 책의 내용1759년 초여름, 창경궁에서 한 혼례식이 치뤄졌다. 신랑 66세의 영조, 신부 15살의 정순왕후의 혼례식이다. 요즘이야 사진기나 혹은 캠코더 등으로 혼례장면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글과 그림'으로 이 혼례식의 모습을 자세하게 남겨 두었다. 이렇게 자세히 정리해 둔 것이 바로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이다.이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 간택에서부터 납채 친영 등 혼인의 주요 행사는 물론,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의궤 끝에 그려진 16.5m 길이의 반차도에는 혼례식에 참여한 사람과 가마 의장 말들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이 책은 이렇게 영조의 혼례식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를 바탕으로 영조대의 왕실 혼례문화에 대해 비교적 쉽게 풀어낸 것으로, 전체 7장에 걸쳐 혼례의 핵심적인 사항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먼저 1장에서는 '의궤'의 자료적 가치와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의 의미 등을 설명했다. 의궤란 것은 국가의 중요 의궤에는 각종 공문서 및 업무의 분담,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도 추가되어 기록되었다. 실명제를 사용하여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하게끔 했다. 부실공사가 많이 생기는 요즘 이런 선조의 실명제의 지혜를 배운다면 많은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의궤는 보통 5내지 9부 제작해서 왕에게 올리고 관련부서와 지방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 조선후기의 사고를 산지에 설치해서 보관했다. 여기서도 후대를 생각하는 선조의 섬세함을 본받을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고의 관리와 점검을 철저히 하고 그 가치도 중시했다.의궤 중에서 가장 화려하면서 체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가례도감의궤」이다. 가 례는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 예법을 기록했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揀擇 : 후보선택), 납채(納采 : 청혼서보내기), 납징(納徵 : 결혼예물보내기), 고기(告期 : 날짜잡기), 책비(冊妃 : 왕비책봉), 친영(親迎 : 별궁으로 가서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 : 혼인 후의 궁중잔치), 조현례 (朝見禮 : 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를 뵙는 의식) 등 혼인의 주요 행사는 물론 혼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가례도감의궤는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이다. 그리고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왕실 결혼식의 변화상을 포착하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중 「영조준순후 가례도감의궤」는 의식 절차가 보다 정밀하고 체계화 되었고, 의궤내용도 한층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났으며, 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적 역량까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의궤이다.2장에서는 반차도의 재료와 그린이, 또 반차도에 나타난 혼인 행렬에 대해 다뤘다. 반차도의 재료는 종이류, 물감류, 붓류를 비롯하여 붓을 담는 그릇류 및 그 밖의 재료들이 있다.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물감이 없었기에 천연색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린 사람은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들이었다. 김홍도나 신윤복이 대표적인 화가차도를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대로 실은 3장에서는 당시 왕실 혼례식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이어 4장에는 영조와 정순왕후에 대한 설명이 있다. 4장은 우리가 흔히들 듣고 공부한 부분이 되겠다. 영조는 출생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52년간 왕위를 지켰고 탕평책, 균역법등 후세에도 남을 훌륭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또한 가장 오래 산 왕으로 그의 치세가간동안은 정치 문화의 부흥기였다.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두어 청계천 사업을 통해 홍수를 막고 경제와 실업문제도 원활하게 해결했다. 이것은 미국의 루프벨트의 뉴딜정책을 떠올리게 한다.1757년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66세의 노왕은 15세의 꽃다운 정순왕후를 계비로 들이게 된다. 정순왕후는 김한구의 딸로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 아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정치적 이유에서 서로 갈등이 깊어가고 있었다. 영조사후 정순왕후는 31세에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와 관계가 안좋았듯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갈등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던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을 역모죄로 몰아 그 집안을 박살냈으며 정조의 신임을 받던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정치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순조의 친정체제가 이루어지자 정순왕후는 수렴을 걷고 상징적인 왕실최고의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1805년 6월 영조의 무덤인 원릉(元陵) 옆에 모셔졌다.5장에서는 왕비 간택, 혼인예법, 왕비수업 등 황실의 혼례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들의 결혼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왕실의 혼사에는 세 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팔도의 처녀들을 모으고 처녀들을 뽑는데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비용과 정치적인 부담감 때문이다. 당시 간택은 용모와 언어가 주요한 기준이었다. 정확한 얼굴을 알 수는 없지만 한말에 촬영된 사진을 통해 대체적인 용모 기준을 추정할 수 있다. 아마 당시의 미인물을 보내는 것을 납징이라고 한다. 길일을 택하는 것은 고기,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은 책비, 왕비를 맞아들이는 봉영, 혼인후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의 여섯 가지 예법이 「국조오례의」의 가례에 기록되어있다. 왕실의 친영의식에 필요한 것은 친영전까지 있을 별궁이다. 삼간택 후 별궁에서 친영 때까지 교양과 수련을 쌓는다. 이곳에서는 상궁의 지도 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장희빈이란 역사극에서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나온다. 단기간에 많은 학습과 동작, 태도, 예절을 학습해야 하기에 혹독하게 수업을 받게 된다. 이 수업 후에 친영의식을 통해서 왕비로 맞아지게 된다.6장과에서는 행사의 책임자와 실무자, 혼례식의 순서, 각 장인들의 업무 방위, 혼례식에 사용된 물품, 혼례복 등 ‘가례도감의’에 담긴 내용을 자세히 분석했다. 의궤의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각종 공문서, 행사의 모습 등 행사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설명했다.행사를 주관하는 담당 관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총책임자는 도제조로 3정승 중 한 명이 맡았고 부책임자는 제조 3인으로 판서급에서 담당했다. 이외에도 도청, 낭청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관리자들의 관직을 봤을 때 그만큼 중요하고 가치있는 예식이 되겠다. 행사의 담당은 현직 관리들이 겸직을 하다가 행사가 끝나면 원래의 직책으로 복귀하게 된다.의궤에는 행사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이 문서의 형식별, 날짜별로 모여 있다. 이런 문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되는데, 물품, 장인의 이름, 경호모습이나 왕의 거동모습 등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계사질(啓辭秩)에서는 일정에 따라 모든 준비를 완료하며 예관질(禮關秩)에서는 각 관청에서 일을 맡겨 준비한다. 또한 이문질(移文秩)에서는 업무 협조를 위해 공문을 모으고, 내관질(來觀秩)에서는 경호를 계획한다. 품목질(稟目秩)에서는 사용된 물품을 재활용함으로 당시 영조의 검소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감결질(甘結秩)을 통해 품이 재활용되고, 장인들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놋그릇을 만드는 유장, 화로를 만드는 권로장, 작은 화로를 만드는 소목장 그리고 은장, 동장, 소목장, 칠장, 옥장, 시장(열쇠공급), 대인거군(톱질), 각수, 입사장, 침선비, 다회장, 두석장, 마조장, 천혈자, 마경장 등 29명의 장인들의 소개와 이 장인들이 필요로 하는 재료를 소개하고 있다.그리고 별공작의궤는 각방에 필요한 물품을 추가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한 별공작에서 행해진 사항들을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추가 지원 업무’에 해당하는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별공작의궤와 수리소의궤의 기록을 통해 혼례식과 관련하여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Ⅲ. 책을 읽고 나서우리가 쉽게 영조 하면 생각나는 것들은 다음이다.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경종이 즉위한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책봉 당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하는 신임사화, 그리고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 또한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고, 「속오례의」와 함께 「속대전」을 편찬해서 왕조의 법치 체계 전반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고 균역법의 실시와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세자와의 관계에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이 정도가 대부분 영조에 대해 배우고 익힌 지식들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정치, 역사적인 사실을 익히고 공부하는 데서 벗어나서 혼례문화나 다른 문화분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를 통해서 당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데 현재 교육상으로는 너무 정치 역사적인 것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에서 외규장각의 역사를 설명하는 당시 프랑스 사람이 조선시대
    인문/어학| 2003.05.08| 8페이지| 1,000원| 조회(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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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와 불교 평가B괜찮아요
    (중국 사상·학술 분야)1. 들어가면서저자「아서라이트」는 불교가 중국에서 뿌리내리게 되는 과정과 함께 이후 불교 자체는 쇠퇴하면서 중국의 역사,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발전과정을 「준비기-정착기-독자적 성장기-전용기」 의 4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했다.중국사회는 외래문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수용과 거부를 되풀이하면서 그들 외부적 요소들로부터의 영향을 꾸준히 받아왔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저자는 중국사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발전과정을 심도있게 추적하였다. 그럼 구체적인 책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중국사와 불교제 1 장 한대의 사회와 사상종교라는 것은 몰락해 가는 문명과 그 계승자 사이에서 연속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대승불교가 문화가 몰락해 가는 한대(漢代)에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대(漢代:B.C206.∼A.D.220)의 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해 보자.진(秦)제국에 의해 이루어져 강력한 통일 중국을 계승한 한은 화북평원에 위치하여 중국문명을 이어 갔다. 한 제국은 기존의 봉건귀족이 몰락되고, 새로운 제국 하에서 토지를 획득한 사람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했다. 그들 밑에는 농민들이 존재하여 소작지나 소유지를 경작하며 세금을 내고, 부역과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다. 한 대에는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한대의 사상은 로마제국의 제국적 실용주의와 같은 형태의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 전성기에 발전된 사상과 가치체계는 이후 중국사상사의 출발점이 되었고 당시 중국에 침투하기 시작한 초창기의 불교와 경쟁하게 됐던 것이다.한대의 사상체계는 유교이다. 유교는 새로운 제국 질서와 새로운 호족지배층이 제국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그들의 지적 대응책으로 나오게된 사상체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 제도, 사건 및 자연현상은 질서있고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고 우주란 그러한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체계 자체의 근간은 밑으로부터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제 2 장 준비기한제국 체제의 쇠퇴와 붕괴과정 속에서도 불교승려들은 그들의 금욕적인 생활이 시문의 소재에 인용될 정도로 수도 장안 사회 내에 확고한 존재였다. 불교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서서히 중국 안으로 자리잡아 갔다는 근거이다. 기존체제에 대한 소외감과 중국인이 예비적인 적응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단계에서는 중국인의 생활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준비기라고 저자는 분류하여 두 측면을 고찰하였다.앞 장에서도 살폈듯이 귀족세력, 환관, 신흥부호, 지식인계층 등이 권력투쟁을 통해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찾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중국 지식인들은 국가와 사회의 무질서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그들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이러한 탐구와 과정에서 많은 사상가들은 도교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후에 지배적인 사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하지만 도교의 지도력이 강화되자 쇠약해진 한나라 정부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을 갖추었고, 이 힘은 '황건적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부구조의 권위는 완전히 궤멸되었고, 권력은 황건적의 난을 통해 사적 군사력을 보유하고 지방에서 세력을 확보한 군벌세력들에게 넘어갔다. 결국 서서히 거대한 제국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초교파적 질서체계가 종말을 고하게 되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급속히 전파된 불교는 생명력 있는 사회를 재건할 수 없었고, 쇠퇴와 붕괴를 경험하면서 서서히 전래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이런 순조롭지 못한 출발을 염두해 두면서 불교가 중국인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가교가 놓여져야만 되는 원인은 바로 문화간의 상이성일 것이다. 중국어와 인도어는 서로 차이가 있으며 두 문화전통에 있어서도 서로 상반되었다. 중국 사상가들은 이상적 현세에 관심을 인도 사상가들은 내세의 추구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그리고 불교경전의 번역사업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정치적 분열기가 시작된 시기부터 남북이 통합되어 독자적 성장기를 이루기까지를 정착기라고 한다.1. 남부지역고대 문명은 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서 남부지역의 중심은 양자강이었다. 양자강 유역의 토착세력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하였다. 즉 그들을 유학사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신도교 사상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독특한 남조불교가 형성되었다.남조불교는 처음부터 관념, 사상적 취향, 어휘 등에 있어 신도교의 틀에 맞추어 졌다. 불교사상에 관한 많은 토론이 청담(淸談)이라는 신도교풍의 방식을 따라 행해졌다. 도교의 어구와 개념을 주로 이용한 혜원(慧遠)과 점진주의 그리고 이와 대립되는 순간주의의 개념을 이용한 지둔(支遁)이 대표적인 불교전파에 공헌한 사람이다. 점진주의는 지식과 지혜의 완만한 축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유교전통과 유사하고 순간주의는 토착 도교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은 양극화는 선종(禪宗)에서의 중심 논쟁거리가 되며 그 이후 고개를 드는 유교의 학설이 다시 내부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 주요요인이 된다.남부의 민중불교에 관해서는 지배층의 불교만큼 알려져 있지 못했다. 도교가 남부지방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화한 이야기나, 불교예식과 주문 등을 알기쉬운 용어로 설명하는 등의 노력으로 신도를 끌었다. 변방지역이 점차 중국의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토착민에게도 불교가 전파됐으며, 개인적 종교로서의 불교와 유교적 사고나 방식과 결합시킨 형태의 불교를 관리나 지방의 호족들에게 전파하였다.2. 북부지역북중국은 위대한 문화적 성취의 무대이며 사상가의 고향이고 중국인에게 최초의 정치적 통일을 가져다 준 진한제국의 본거지였다. 분열기 초반 북중국사회는 총체적인 분열상태에 처해 있었다.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배경으로 불교는 서서히 북조사회 안으로 뿌리내려 갔다.북부 전역에 걸쳐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던 초기의 배경에는 초월적인 힘을 쉽게 믿어버리는 이민족의 성향과 전쟁에 이기고 비를 불교예술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기 시작했다.제 4 장 독자적 성장기581년 이민족왕조인 후주(後周)의 젊은 관료가 자신의 군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수(隨)왕조를 개국하였다. 그러나 단지 군사적 · 정치적 정복만으로는 수세기 동안의 분열을 거친 후 야기된 전통과 관습과 성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북조와 남조는 생활방식에서 문화까지 많이 달랐다. 통일된 질서체계를 창출하려고 노력했던 수왕조의 통치자들은 세 가지 흐름의 전통사상을 이용하였다.도교를 국가통제와 관리 아래에 편제시켰고 유교를 선별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불교는 남북조 공히 재배층과 농민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는 수대와 그 뒤를 잇는 당대의 재통일노력 과정 중에서 남북조의 문화를 융화시키는 도구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사찰이 운영되고 고승들의 지고한 정신에 의해 교화되며,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와 건축가들에 의해 세련미를 갖춤으로써, 불교는 중국인의 생활과 사고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시기는 창조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중국불교의 황금기였다. 결국 불교는 황실이나 국가의 의례 속에서 필수 불가결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도 장안에서의 예술과 문화에서도 불교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국가 중심부와 지배층의 삶에 침투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생활 속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깊숙이 파고들었다.불교는 법률과 각종 규범들에 대해서도 폭넓고 손쉽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심지어 군대의 사기진작에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불교의 성장이 여러 분야에서의 자선사업 확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불교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이 시기에, 불교사상 중 인도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 결국 중국불교의 창조적 측면은 중국의 사상적 전통 속에서 불교사상을 재해석하고 재설명함으로써 획득됐던 것이다.선종은 지배층에 큰 인기를 끌었다. 선종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인도불교의 경향에 대해 중국의 사상적 전통이 반발하여 형성된 산물이었다. 선종 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폭넓게 경전이 읽혀지고, 유교사상의 부흥과 재구성을 위한 지식 공감대가 지식인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었다. 11세기의 학자 구양수(歐陽修)는 완벽하고 통찰력 있게 유교를 부흥시킬 방안을 제시하였다. 결국 불교와 도교사상을 흡수하여 11세기에 유교는 부활하게 된다. 신유학에는 "이"과 "기"의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절대적 원리인 "이"와 사실 또는 사건의 의미를 지닌 "사"를 대응시킨 것이다. 즉 불교철학이 고유사상에게 지적 세계의 주도권을 내어주면서 당시에 부흥하고 있는 유교에 의해 전용(轉用)된 하나의 주된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신유학의 대표되는 윤리적 보편주의는 대승불교로부터 전용됐던 사상이다.송 제국은 수많은 구제사업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송왕조는 정부가 앞장서 이를 수행했고 공동묘지를 관리하고 병원을 는 데 드는 재정을 국가에서 예산을 충당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의 자비사상과 그것을 구체화한 자선사업들이 중국정부에 의해 전용된 사례로서 파악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재래적 요소에 의해 끊임없이 전용되고 그 자체로도 점차적으로 약화되면서 송대 이래의 사회는 당대와는 현격히 다른 사회로 변하게 되었다. 송대부터 중국을 통치한 왕조들은 더욱 효과적이고 정교한 수단을 통해 유교라는 국교를 확대, 발전시켰던 것이다. 점점 강도 높게 개인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했다.하지만 농민계층을 신유학이 지향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농민의 불교에 대한 종교적 열정이 높았기 때문이다. 신유학이 농민들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드러나자 정부는 유교사상 안에서 변형된 신앙요소를 존속시켰다. 결국 민중들이 소박하게 섬겨왔던 신앙들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10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에 다양한 형태의 전용과정이 진행됐다. 이런 전용의 과정이 어느 정도는 종교로서의 불교의 한계와 약점들로부터 기인했다. 하지만 불교의 전용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동것이다.
    인문/어학| 2003.05.09| 10페이지| 1,000원| 조회(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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