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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운동] 미군정하의 노동운동
    (한반도는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으로 인하여 남조선에서는 미 군정이 북조선에서는 소군정이 실시되었다. 노동운동은 대부분 남조선에서 많이 발생하였고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들도 대부분 미군정하의 남조선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미군정하의 노동운동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겠다.)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의식주 등 생활 유지를 위한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여 개별 자본가에 대항하고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한 실력 행사의 방법으로 파업, 농성의 투쟁을 시작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된 뒤에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 사항을 수용할 수 있는 정치 권력의 수립과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 개선, 임금 인상 ,노동 운동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개별 자본가에게 대항하고 특히 국가에 대하여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과 노동 운동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촉구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이 아니라 노동자와 국가의 직접적인 대결이라는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하다.미 군정하의 산업 현황과 고용 수준식민지 경제가 낳은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하여 미 군정기 산업 생산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더욱이 일본인 자본가와 기술자들이 본국으로 철수하고 식민지 경제의 순환 구조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공업 생산은 대부분 정지하였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방직업의 경우, 경성방직과 종연방직, 광주공장만이 1945년말부터 가동되었으나 원료와 기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비한 운영 실적을 기록하여 생산 가동율은 1946년37.59%,1947년 53.1% 수준에 불과하였다.반면에 철도운수업에서 미 군정의 산업 복구 실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미 군정은 종합적인 행정 기구로서 운수부를 설치하여 일부 공장 시설의 건설과 전화 공사를 실시하였고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에 요구한 기관차 250대가 한국에 공급되지 않자 미국산 중형 기관차 100대를 가져와서 철도 수송위축으로 인하여 실업자의 수가 증가하였다. 특히 일본, 만주 등으로 징용되어가거나 일본의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생활하던 노동자들이 귀국한 뒤, 실업자의 규모는 고용 노동자의 2배를 넘었다. 그러므로 실업자들은 미 군정에 생산 복구를 요구하며 생계 유지 투쟁을 전개하였고 고용 노동자들도 직업을 잃으면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인식하에 해고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미 군정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물가를 상승시킨다고 하여 임금고정화, 노동계 관습의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임금 정책(군정 법령 제14호, 1945.10.10)을 발표하였다.당시 가장 높은 노동 임금을 받던 인쇄 공장 노동자들조차도 자신의 노동 수입으로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실질임금이 가장 낮은 철도 노동자들과 일제 시대부터 미 군정기에 이르기까지 가계 보충적 저임금 구조에서 생활하던 방직업 여성 노동자들이 여전히 기아적 생활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하에서 철도 공장과 방직 공장 노동자들이 가장 치열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노동부 통계에 의하면 8.15 이후 1947년 12월까지에 204건의 노동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방직 공장에서 75건, 철도 공장에서 23건이 발생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방직업과 철도 운수업에서 발생한 노동 운동은 기본적으로 생존권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결성의 사회적 배경8.15 이후에 대부분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치 조직이 건설되었고, 이러한 조직 결성을 기초로 3개월 만에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1945년11월5일에 결성되었다. 전평은 전국의 50여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위원장, 서기국 조직부 선전부 등으로 전국평의회의 집행위원회라는 노동 운동 지도부를 구성하고 각 지방에 있는 산업별 지부를 총괄하기 위하여 지방평의회를 두었다.전평 결성의 사회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로부터 착취당하였던 노동자들의 민족적 계급적 자각이 권력의들의 대중적 기반이 필요함을 절감한 좌익 세력에 의하여 조직 결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전평은 노동자 계급의 일상적 이익을 옹호하며 활동하는 노동조합의 전국적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 투쟁을 지도하는 정치적 대중 조직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갖는다.정치적 변화와 전평의 정치활동전평은 방직업 공장의 자주 관리 운동, 친일 관리인 배척 운동과 철도 등 군정 직할 공장의 생존권 투쟁 등 전국적 수준에서 고양되는 대중적 투쟁 역량을 기초로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평은 결성 강령에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을 강조하였는데, 각지의 공장 단위에서 노동 운동이 활성화되자 이를 '노동자 계급의 기본 조직의 강화, 계급 의식의 철저화, 제국주의 전쟁의 방지 그리고 인민 정권 확립을 위한 정권 투쟁의 일부분 또는 수단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일본인과 친일 자본가 소유의 공장에서 자주관리 운동이 전개되자 이 운동을 통하여 국가 건설의 경제적 기초가 달성된다고 하여 자주 관리 운동을 권력 수립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공장 관리 운동에 대한 비판적 문제 의식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전평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국가 건설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미.소 양군의 진보적 정책'이 실시되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산업 건설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평이 어떻게 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 투쟁 역량을 국가 건설의 차원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는데, 신탁통치 논쟁,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라는 정치적 변화는 그 시험 무대가 되었다.신탁통치 논쟁과 노동운동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에 대해 찬반의 의견이 대립될 때 전평의 정치적 입장은 노동자들의 정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평은 처음에 '신탁통치 절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조선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사항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전평은 신탁통치가 국가 대규모 참여로 진행되었고 그 밖에도 영등포 지역 등 공업 단지에서는 노동자들의 '모스크바 3상회의지지 결의대회'가 거행되었다. 한편으로는 신탁반대세력(대한노총)으로부터의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평 산하의 노동자들의 정치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결국, 국제 정치 세력의 한반도 정책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찬탁' '반탁'의 정치적 대립이 증가하였고 노동자들도 전평과 대한 노총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메이데이와 노동 운동한국의 노동 운동사에서 메이데이는 중요한 행사로 기록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1923년 최초의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고 이후에 합법적 집회와 비합법적 시위 운동을 통하여 메이데이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평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사회적 여건 속에서 메이데이 기념 행사를 개최하여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1946년에 거행된 메이데이 기념 행사는 당시 식량 사정 악화와 미소공동위원회 개회라는 정치 사회적 쟁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평은 신탁통치 논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을 고양시키려 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쌀 획득 등 생존권 확보를 위한 대중적 활동과 미소공동위원회의 참가라는 정치 활동이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쌀 획득 투쟁과 실업자 조직" 이라는 문헌은 전평의 활동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전평은 식량 부족의 원인을 "미 군정이 결정한 공정가격 정책을 문란하게 하는 대자본.대지주"에게 돌리고 있으며 , 대부분의 노동자°농민°시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통한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이 강조되었는데 1946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가 그 계기가 되었다.총파업운동노동조합은 중요 도시의 대공장에서 총파업 운동을 전개하여 집권 정치 세력을 불신임하고, 시민 소요를 관철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결과를 창출하려 하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노동조합의 총파업 운동은 의식적인적 규모로 발전하였던 9월 총파업 운동은 미 군정기 최고의 혁명적 소용돌이가 되었다. 또한 1947년 3월 22일의 총파업 운동도 전평 산하 노동자들의 부분적 참여로 정치 사회적 긴장을 초래하였다.미 군정의 노동 정책의 변화미 군정이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강제적 재의 조정 정책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파업 운동은 계속되어 1946년 8월까지 1년 동안 1000여 건의 파업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에 미 군정은 전평의 결성대회 진행 과정, 조직 구조, 운영 자금, 활동의 성격, 지도적 인물들의 일제하 경력과 성향 등을 상세히 분석한 뒤, "군정 노무과는 전평이 한국의 유일한 노동 운동 조직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영향력 아래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강력한 규율과 조직력을 갖는다면 미 군정으로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전평은 이제 노동자들이 제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효율적 압력 집단으로 활동할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미 군정은 노동자들과 공산당의 제휴를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활동을 억압하려는 종전의 정책을 변경하고 개방적인 노동 정책을 결정하였다. 미 군정의 새로운 노동 정책은 법령 제97호 '노동 문제에 관한 공공 정책 공포 및 노동부 설치'(1946.7.23)이었다.이 법령의 목적은 "한국 경제의 유효한 기능을 조장하고 임금 노동자의 복지를 조성 발전시켜서 노동 조건을 개량하여 유리한 고용 기회를 진척시킨다. "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미 군정이 허용하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법령은 노동 쟁의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내리고 있었다. 노동부장(이대위)은 "최근에 우리의 노동 운동에 정치 혹은 사회 운동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 것은 노동 운동이 아니다. 그러한 노동 운동은 얼마든지 개선될 여지가 있다. ..... 법령 제19호에 의하여 노동자가 함부로 공장을 폐쇄할 수 없으니 생산은 여전히 하 노선
    인문/어학| 2003.11.16| 5페이지| 1,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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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형무소기행문] 서대문형무소 평가A좋아요
    문화유적지 답사라는 말에 나는 단순히 경복궁, 창경궁 같은 궁을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 있는 웬만한 궁은 모두 가봤고 그 궁들의 모습이 모두 비슷해서 그런지 궁에 대한 나의 느낌은 밋밋하고 재미없는 인상이었다. 지방에 있는 문화유적지도 생각해 보았지만 여건상 힘들었고 서울시내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유적지를 찾게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강의과제를 하게되면서 통해 일제시대의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었다. 10월 30일. 점심을 먹은 후 카메라와 필기도구를 챙겨 출발하였다. 노량진에서 종로 3가까지가서 3호선을 타고 40여분만에 독립문 역에 도착. 출구를 나와보니 바로 지하철역 앞에 독립공원이 있었다. 분명 푸르렀을 나무잎새들은 어디갔는지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벤치여기저기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참으로 평온하고 따스해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독립공원을 지나쳐 약100여미터를 걷다보니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 좀전에 독립공원에서 봤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뭐랄까 형무소를 처음 봐서 그런지 약간이 떨림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허름한 높은 담의 모습이 형무소란 느낌을 들게 하여 순간 압도당한 듯 했다. 형무소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동행들과 표를 구입한 다음 형무소 안으로 들어갔다.형무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처음 들어간 곳은 '기획전시실'로 이곳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전과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공간이다. 이곳에선 애국지사들의 약력과 활동, 사진 등을 전시해놈으로써 그들의 당시 활동 상을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2층으로 올라서니 서대문형무소가 설립된 역사적 배경과 우리 민족의 항일 저항 사를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한 '민족저항실'과 서대문형무소의 변천과정을 전시한 '형무소역사실' 그리고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대한 옥중생활의 실상을 전시하고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벽관, 독방을 재현한 '옥중생활실'로 잘 전시되어 있어 우리 선열들의 당시의 굽힘이 없었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안내원과 공익요원들이 잘 안내해주어 차례차례 빼먹는 곳 없이 관람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간곳이 어두컴컴한 지하 1층 체험전시관으로 이곳에선 그 당시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모습을 실제 사람모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은 애국지사들을 구금하고 고문했던 악명 높은 보안과 지하감 방으로, 애국지사들을 신문과 고문하는 곳 으로 일제가 저지른 잔혹한 각종 고문 모습들을 문헌과 고증을 토해 재현하고 있었다.여성들에겐 성고문, 물 고문을 가하고 전기고문, 각목, 채찍으로 고문하는 모습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답답함과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중간중간 더욱 실감나게 하기 위해 비명과 채찍소리등과 같은 음향장치와 모형들이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 당시의 실제모습을 보는 듯해서 섬뜩하였다.밖으로 나와서 표지판을 따라 다음 옥사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주색 벽돌로 지어진 7개동의 옥사가 보존되어 있고 그중 1915년에 지어진 제 10, 11, 12옥사는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작업 공장인 제 13옥사와 중앙사는 1923년에, 제9옥사는 1929년에 지어졌다. 이 옥사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와 싸우다 투옥되어 갖은 악행을 당하고 순국하신 역사의 현장으로 감시하기 편리하도록 T자형으로 만들어져 낮에도 빛이 차단되어 매우 어둡고 침침하였다. 사람이 없어서일까? 길게 휑하니 늘어선 감방들이 무척이나 썰렁하고 긴장감마저 돌았다.한평도 안되는 독방을 들어서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햇빛도 전혀 없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투옥시키다니 일제의 잔혹함과 비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일제의 끔찍할 정도의 잔인한 본성이 무서워졌다. 그런 독방에서 심리적, 육체적 고통으로 죽어갔던 애국지사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파 왔고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의 절대부족으로 평당 7,9명이 수용되고 위생 급식상태가 짐승우리와 같았던 곳에서 햇빛도 통풍도 없었던 곳에서 우리의 애국지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전시관 기록을 보면 그런 옥중생활에서도 국가독립을 위해 사옥벽면에 혈서로 '자주독립'이란 글귀를 썼다고 한다. 참으로 거룩하고 고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때 다시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 물음에 부끄러움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음침하고 싸늘한 감방에서 나와 제13옥사와 나병사로 발길을 옮겼다. 제13옥사는 1923년에 지어졌는데 투옥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작업장으로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에서 필요한 관용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일본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뒤엔 군수용품을 생산, 조달하는데 투옥자들을 강제노역시켰다. 나병사는 말 그대로 나병들의 전염병자를 격리 수용시켰던 옥사다. 제13옥사를 돌면서 일제는 참 야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진 고문으로 옥사에 투옥시켰는데도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투옥자들을 강제 동원시켜 일을 시켰다니 야비하고 무자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그들의 만행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는 게 참 씁쓸했다.날씨까지 바람불고 점점 어두워져서 그랬을까? 다음 장소인 사형장 근처에 다다랐을 땐 나의 기분도 상당히 가라앉고 울적해졌다. 사형장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사형장 앞엔 커다란 미륵나무 하나가 있는데 사형수들이 사형장으로 끌려오면서 마지막으로 이 미륵나무를 붙들고 억울함과 한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그 맺힌 억울함으로 사형장안에 있는 또 하나의 미륵나무는 삐쩍말라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미륵나무에 얽혀있는 슬픈 사연을 읽고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서 미륵나무를 보니 그 당시의 사형수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고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륵나무를 만지면서 그들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잠시나마 기도를 했다.마지막으로 일제와 싸우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자 한 추모비에 들렀다. 일제는 광복후 애국지사들의 수형기록자료들을 모두 불태워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 하였다.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야비했던 일제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추모비에 놓여진 국화꽃과 순국하신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들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잠시 묵념을 하고 발길을 옮겼다. 서대문형무소를 모두 돌아보고 나오면서 그 느낌은 참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이 날 관람했던 관람객중에는 어느 초등학교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고학년인듯한 아이들이 지도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사뭇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고 연령이 높으신 분들은 줄곧 한숨을 쉬시며 '나쁜 놈들 나쁜 놈들....'하시며 울분을 참지못하셨다. 몇몇 분들은 눈가에 눈물이 고이시기도 하셨는데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내 마음도 아파 왔다. 완전히 그분들의 마음을 느끼진 못하더라도 관람하면서 조금이나마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분들을 보면서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이런 역사의 현장들을 직접 체험하여 과거의 역사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생각 없이 숙제 때문에 가는 게 목적이었는데 다 둘러보고 독립공원쪽으로 내려올 땐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의 잔인하고 잔혹한 수많은 만행에도 불구하고 조국자주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그들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고 다시 한번 애국지사들을 생각하고 돌이켜보게 되었다. 단지 숙제 때문이 아니라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외치는 애국지사들을 마음속 깊이 되새길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입구에 있던 3.1절 기념비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내려오면서 그 기념비를 다시 보니 마음이 벅차 오르고 나의 조상들이 자랑스러웠다. 독립공원 근처에서 꽤 오래살았었는데 이런 곳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무관심 속에 묻혀지냈었다니.. 그래도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면서... 선열들게 너무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우리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라면 더욱 더 많은 곳을 알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근대사를 나름데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참 무지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느꼈다. 그 아쉬운 점은 그 보존실태가 더욱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길게 늘어선 옥방들이 있는 사옥에 들어섰을 땐 휑한 썰렁함이 느껴졌다. 단지 입구에 간략한 설명만이 있을 뿐 그냥 방치해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내원이 이런 사옥 같은 각 역사의 현장마다 배치되어 있어 그 당시의 모습과 사진 등을 설명해 준다면 더욱 실감이 날텐데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곳은 단지 안내표지판에만 의지하여 간략한 설명만 읽고 둘러보게 되어있어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며 관람하기가 힘들었다.
    인문/어학| 2003.11.09| 3페이지| 1,000원| 조회(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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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박의 발달사] 선박의 발달사 평가A+최고예요
    ▶ 노 젓는 배의 시대1) 통나무(선사시대) 아주 오래 전, 인간은 물위로 통나무 한 조각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건널 때 그 통나무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고, 배의 역사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2) 통나무 보트(선사시대) 몇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더 많은 갑판을 갖고 중량품도 실을 수 있는 뗏목이 만들어 졌는데 그것은 오늘날 까지도 쓰이고 있다. 짐을 싣기 위한 또다른 방법은 통나무 안에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Ⅰ.서양의 선박의 발전▶ 이집트선문명의 발생지인 나일강에서 사용된 배로 강을 올라갈 때나 지중해의 계절풍이 불 때는 돛대를 사용하고, 내려올 때는 노를 젖는 방식의 배입니다. 이집트선은 짧은 나무판자를 이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종강도가 아주 약하므로 큰 파도를 만나 선수와 선미가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호깅 트러스 (Hogging-Truss) 라는 굵은 밧줄을 배의 앞뒤로 연결한 것이다.▶그리스 군선 (BC500년경)과 로마의 군선그리스의 대표적인 군선은 겔리선이라 불리었으며 지중해에서의 해전시 돛보다 노를 이용한 항해가 가능한 특징이 있었다. 노의 종류는 1단식, 2단식, 3단식이 있었고 단거리라면 10노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 양현의 노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저음으로써 선회반경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에서는 수중에 층각이라는 것으로 적의 배를 격침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층각이란 것은 그리스 군함의 주된 무기로 용골의 선단을 연장하여 금속을 씌운 것으로서 매우 위협적이었다 한다.로마시대의 배는 그리스 갤리선을 그대로 계승했을 뿐으로, 다만 갤리선의 단수를 크게 늘렸으며 용골과 일정한 간격의 늑골을 뚜렷이 하고 외판을 비롯한 구조부재의 결착은 네모난 촉꽂이를 써서 카벨 이음식으로 다시없이 튼튼하게 만들었다.(로마시대의 군선) 이처럼 로마 시대에는 용골과 늑골 등 골조를 먼저 세우고 그 위에 외판을 붙여나가는 frame first 조선법을 확립하였다. 이처럼 로마 시대에는 용골과 늑전혀 다른 설계 방식으로 발전해 온 북유럽 선박이 도입되었다.▶범선출현이전의 유럽의 선박500년 경 북유럽을 차지했던 게르만 부족은 여러 가지 선박을 개발했다. 전형적인 교역선은 선체가 넓고 흘수가 깊었다. 처음에는 돛대를 하나만 세웠지만 나중에 선박의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개의 돛대를 세웠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러한 배를 나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덴마크 항구의 앞바다에서 나르 한 척을 인양한 이후 이 배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족과 바이킹족은 나르로 교역하고 탐험했다. 나르는 중세 말기의 주력 상선인 콕으로 발전했는데 콕은 흘수가 깊어 항해하기에 편리했고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북유럽의 해전은 대체로 육상 전투의 연장이었다. 콕의 선수와 선미에 망루를 세워 적의 공격을 막고 궁사들이 발사용 갑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적의 군함에 접근하면 선원들은 화살을 쏘아 적함의 선원과 병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군함들은 서로 얽혀 백병전을 통해 승부를 결정했다. 14세기에 대포가 등장할 때까지 북유럽의 항해선에는 적함에 큰 손상을 입히거나 침몰시킬 만한 무기가 없었다. 1340년 슬러이스에서는 대규모의 궁사와 보병을 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콕 군함 약 400척이 해전을 치렀는데 이들은 단순히 서로 얽혀 활을 쏘는 백병전을 벌였다.대형 대포는 선수나 선미에 탑재되었고 소형 대포는 측면 난간에 탑재되어 적함의 선원을 공격할 때 사용되었다. 1406년에 만들어진 영국선박 크리스토퍼 오브 타워가 대포를 탑재할 수 있는 최초의 선박이었다. 중세 말이 되어서야 적함 선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현측 대포를 탑재하기 시작했다.바이킹족의 대형 보트는 군함이라기 보다는 수송선에 가까웠다. 바이킹족은 대형 보트에서는 거의 싸우지 않았고 대형선에서 싸울 경우 백병전을 할 수 있는 갑판을 만들기 위해 보트를 서로 묶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8, 9세기 경에 대형 보트에 돛대가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며, 그 이전에는 노를 사용하여 항해했다. 대형 보트는 매우 약해들은 나침반, 선미의 키 및 큰 삼각돛에 대해 알게 되었다.▶대항해시대의 개막 (범선의 등장) : (캐랙선, 캐라벨선 → 갈레온선)ㆍ캐랙선Carrack은 마스트가 3개이다. 선수루상에 fore mast, 선체 중앙에 main mast, 선미루상에 mizzen mast 가 있고, fore mast 에는 횡범(fore sail), main mast 에 하부에는 사각주범(main sail)과 상부에는 사각정범 (top sail), mizzen mast 에는 삼각형인 종범(mizzen sail)이 각각 장치되어 있다. 이밖에 선수 앞쪽으로 뉘어져 뻗어있는 가름대(bow spirit)밑에도 작은 사각범 스피릿 세일(spirit sail)이 있다.main mast 와 fore mast 범장은 북해선인 코그선과 같고, mizzen mast 의 범장은 지중해의 라틴 세일 장치와 동일하다. 이는 사각범을 달은 횡범은 뒷바람을 잘 받아 순풍에 좋고, 삼각범으로된 종범은 역풍을 잘 뚫고 나가는 장점이 있어 캐랙선은 마스트 수를 늘리고 두 가지 범장을 채택한 다장선이다.캐랙선의 외판은 여러 판재를 맞대어 붙이는 카벨 이음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선수루와 선미루가 있고, 선미에 고정타가 달려 있어 북해선과 같다. 그러나 하체 부분은 선수와 선미부가 다같이 둥글게되어 있어 지중해선 그대로이다. 이와같이 캐랙선은 범장은 북해선에 가깝고, 선체와 선형은 지중해선에 가깝다. 캐랙선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450 년경부터 이고, 그 후 300 여년간 범선 전성시대에 나타난 범선은 상선과 군선을 막론하고 모두 캐랙 범장을 개량해 나간 것으로 캐랙선은 서양 범선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ㆍ캐라벨선Caravel은 포르투갈에서 개발된 삼본 마스트선으로 삼각범만을 쓰는 배이다. 캐라벨은 13 세기부터 어업 활동에 쓰여지다가 점차 연안 항해선으로 커지고, 15 세기 들어 서는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 같은 데도 쓰여지기에 이른 것이다.캐라벨은 횡범을 주로 쓰는 캐랙선 보다 선저가 평탄 하고, 선수루를 선수부 맨 끝으로 내 보내고 있으나 갈레온은 fore mast 의 돛면적을 크게 잡아 속력을 높이기 위해 선수루를 좀 뒤로 물리고 선수 앞 끝은 새 부리모양의 이른바 beak head 로 되어 있다. 이것은 외모로 캐랙과 갈레온을 구별 할 수 있는 확실한 특징이다.Ⅱ. 동양의 선박 (중국, 일본, 한국)▶중국의 선박중세의 가장 뛰어난 선박 기술자들은 중국인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중국의 정크는 수세기 동안 유럽의 어떠한 선박보다도 우수한 선박이었으며 화물 적재 공간이 넓었고 항해 능력이 탁월했다.1405년에 중국 해군 제독 정화는 25,000명이 탈 수 있는 거대한 군함을 제조하여 남서 태평양과 인도양을 탐험하였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이런 항해와 발견물들을 하찮게 여겼다. 이런 연유로 당대 세계 최고의 선박이 육지에서 썩어 갔다ㆍ 중국선의 특징(1) 격벽① Marco Polo-“선저의 한 군데가 파손되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획에 물이 침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② 기원 : Needham-중국선이 대나무 뗏목에서부터 발달했다는 설을 주창하면서, 매듭에 힌트를 얻어 중국선이 이미 2세기 경부터 수밀구획을 만들었다고 주장③ 김재근 : 중국선에서는 늦어도 당송시대에 이미 수밀격벽구조가 보편화됨④ 수밀격벽 구조는 서양목선범선에서는 채택되지 못하다가 18세기 말에 가서야 채택되었다. 니이덤은 이 점을 동양선이 서양선을 기술적으로 앞섰다고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로 들고 있다.⑤ 신안선의 경우 9개의 격벽이 있으나, 그 선저 내부의 肋板(늑판) 마다 20cm 정도의 정사각형 구명이 파져 있어 수밀성이 의문시되고 있다.⑥ 보통 늑골이 없는 동양선에서 선체의 횡강도를 부지시키는 역할(2) 외판구조① 외판은 촉꽂이 이음(carvel joint)으로 접합하였고, 단판이 아니라 복판구조도 사용② Marco Polo : 중국선의 외판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수리할 적마다 한겹씩 붙여나가 6겹까지 이른다.③ 조선도 세종 12년 경에 군선의 외판을 강화하기 위해판상에 선실을 구비한 누선형 선박 ② 평저선이었을 것③ 돛대를 2개 이상 가진 다외선이었을 것고려선- 수미개직 : 선수재와 선미재가 平直하여 고물과 이물이 뾰족하지 않음(2) 완도 발굴선① 1984년 전남 신안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② 선형 : 평저선형, 남아있는 저판의 길이 6.5m, 선체 중앙 너비 1.65m. 그러나 만곡부재도 평저한 저판의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저변의 너비는 2.3m 정도(복원한다면 길이 9m, 저판의 길이 7.7m), 너비는 외판이 몇 장으로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H판까지 있다고 하면 3.5m, 깊이는 1.7m③ 크기 : 이 정도의 크기의 선체라면 배가 1cm 침하 또는 부상할 때마다 필요한 중량, 즉 매Cm배수톤수는 약 0.2톤. 완도 발굴선은 10여톤으로 추정.④ 선체구조 : 완도 발굴선은 저판과 외판으로 逆梯(사다리 제)型 단면을 이룬 일종의 평저선형이고, 저판은 두꺼운 조재 5개를 창삭을 가지고 평탄하면서도 선수미 방향으로 완만한 만곡면을 이루도록 조립하였다. 외판은 흠붙이 겹쳐붙임식으로 矩(곱자 구)型斷面 나무 못으로 결착하고, 저판과 외판은 통나무를 L자형으로 성형한 만곡부재를 사이에 두고 서로 고착했고, 선체 내부에는 격벽이 없고 몇 개의 加龍木으로 횡강도를 보강. 저판은 平直面이 아니라 선수, 선미 쪽으로 가며 곡면을 이루고 있어, 저판이 모두 평면으로 되어 있는 전통적인 한선과는 다르다. 돛대는 중앙 선미 쪽에 치우쳐 설치되었고, 돛 하나만 설치.⑤ 중국선과의 비교 : 중국선은 평저선이기는 하지만 외판과 저판은 동일한 두께의 판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고, 더욱 장삭을 써서 저판을 고착한 예는 거의 없다. 게다가 중국선은 외판을 맞대어 붙이는 카벨 이음 방식으로 접합하였고, 피삭으로 판재를 결합한 예는 찾아 볼 수 없고, 격벽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완도선은 격벽이 전혀 없고, 加龍木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⑥ 한선과의 비교 : 외판은 흠붙이 겹쳐붙임(클링커)식 이음으로 동일. 그러나 완3m)
    인문/어학| 2003.11.09| 11페이지| 1,500원| 조회(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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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평가A좋아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역사에 대해서 배우고 여러 책을 접해 봤지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즉, 역사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적도 없거니와 고교시절 카의 책을 접했을때도 그냥 그의 말을 당연시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왜 역사의 본질적인 면을 알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역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아는 것이 역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역사의 부분 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 전반적으로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처음에서 E.H.Carr은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무의미하다던가, 쓸데없는 일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저술했다고 고백했다.19세기에 이룩한 풍부한 지식들을 후세에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기록해 두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기록하게 되면 국제적으로 연구되어 얻어진 명확한 결론과 발표된 새로운 이론들을 후세 사람들에게 잘 알릴 수 있을 것이다.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는 대답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대답을 하게 된다고 한다. 1830년대에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란 "사실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다"로 말했다. 또한 조지 클라크 경은 역사는 '사실이라는 단단한 핵'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이론의 여지가 많은 해석이라는 과일의 살' 과 같다고 과일에 대비시키고 있다. Carr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종합해 역사란 먼저 사실을 정확하게 수집하고, 그런 다음 해석이라는 사막 속으로 뛰어 들어라는 역사의 경험주의적이고 상식적인 학파들의 결론을 인용해 말하고 있다. 다음 주제로 Carr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상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즉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게 중요하지만 사실과 문서들을 제사지내듯이 너무 떠받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문서에 기재되어 있건 없건 간에 역사가의손으로 처리되었을 때 비로소 역사가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체는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봄으로써 성립하고, 역사가의 주임무는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6년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는 "역사상의 사실이란 역사가가 이를 창조하기까지는 어떤 역사가에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Carr는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 사람이 행한 행위에 배후에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 보라고 한다. 1장의 마지막에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는데 그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러나 뒤에 그는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각종 사건과 점차적으로 나타날 미래의 여러 가지 목적과의 대화라고 이야기 한다. Carr는 사회와 역사와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는 불가분한 관계로서 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보완하려고 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관계로는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가의 연구가 자기의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정확히 반영해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회가 어떤 종류의 역사를 쓸 것인가, 어떤 종류의 역사를 쓰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만큼, 그 사회의 성격을 의미 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 및 사회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액턴은 사회와 관련해 역사란 다른 시대의 좋지 않은 영향으로부터 우리들을 구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시대의 좋지 않은 영향과 환경의 억압, 그리고 우리들이 숨쉬고역사와 과학의 다른 점을 서술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선 다른 점을 서술하면 첫째, 역사는 주로 특수한 것을 취급하지만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취급한다. 둘째,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는다. 셋째,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넷째, 역사는 인간이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다섯째,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 및 도덕상의 문제를 포함한다 이다. 이에 그는 첫째 문장에 대해 역사가도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화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역사가란 언제나 증거를 검토하기 위해 일반화를 이용한다. 그리고 사실과 해석을 갈라놓을 수 없듯이,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를 다른 것 위에 올려놓을 수 도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에 대해 역사가는 일반화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하고, 어떤 한 묶음의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다른 사건에 적용하려 한다고 설명한다. 네 번째 문장에 대해 그는 이점이 여사와 사회과학의 현저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 그는 역사가란 자기 문제를 신의 조화력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풀어나가야 하며, 그리고 역사란 조커없이 노는 트럼프 놀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역사가는 과거의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Carr는 역사가들이 역사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역사를 더욱 과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엄격히한다는 것이라 한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서 Carr는 역사 연구는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역사가는 '왜?'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가져야 하며,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는 한은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위대한 역사가란 새로운 사실에 대하여, 또 새로운 자료를 대함에 있어서 '왜?'라는 문제의식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여러완만한 발전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가끔씩은 극적인 비약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보의 시대가 있듯이 퇴보의 시대가 있으며 결국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진보란 모두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결코 연속적인 것이 아니다.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되는 역사인식론이 금세기에 크로체(Benedetto Croce)나 콜링우드(Robin G. Collingwood)에 의해 피력되었었다. 즉 "모든 역사는 현대의역사(contemporary history)다" "모든 역사적 판단을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이기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라는 글들에서 보듯이 역사랑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E.H. 카는 그러나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는 끈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없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카는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카의 반론은 이렇다.첫째, 역사는 특수와 개별을 취급하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다. 고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즉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둘째,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화라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경우의 사건에서 얻어낸 교훈을 딴 대목의 사건에 적용한다는 것이다.셋째, 역사는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소위 과학적인 법칙이란 것도 하나의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個別的인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넷째, 역사는 불가피하게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 분야도 어느 정도까지는 지각하는 주체(인간)와 지각되는 객체(자연력)간의 상호관계와 의존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섯째,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인문/어학| 2003.10.29| 6페이지| 1,000원| 조회(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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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정책] 차이니즈나이트
    이 책을 들고 책방을 나서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시뻘건 책표지에 그려진 속옷차림의 여자와, 여기에 딱 어울리는 조금은 외설스런 책 제목, 과거 80년대 책을 보는 듯한 조잡한 사진들, ‘북경원인’이라는 이상한 별칭을 가진 지은이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찬찬히 책을 펼쳐보자 이내 그런 나의 망설임이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복희씨가 인터넷 문명을 열었다”는 다소 엉뚱하지만 너무도 신선한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저자는 읽는 이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천일야화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데처럼. 그러고 보니 '차이니즈 나이트'라는 책의 제목도, 그에 딸린 ‘밤에 읽는 중국인 이야기’라는 부제도, 모두‘아라비안 나이트’를 패러디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북경원인이 세치혀의 재담에만 능한 것은 아니다. '차이니즈 나이트'가 나의 관심을 놓치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중국의 산천을 누빈 북경원인의 탁월한 안목이 그 속에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개인적인 생각으론 좀 힘들 것 같지만 오늘날 적지 않은 정치, 경제학자들이 앞으로 20년 후쯤이면 중국의 국력이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물론 보다 진지한 학자들은 지난날 미국인들이 갖고 있었던 일본에 대한 경계심처럼 이 또한 괜히 불안심리를 조장하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전자통신 대국으로 떠오르는 인도와 함께 중국 역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대국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인도와 달리,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은 정보화 시대에 뒤쳐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한자 부수 입력법, 영어 알파벳 입력법 등 수십 가지 중국어 입력법으로, 중국인들은 오히려 키보드 몇 번 두드리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 저자는 한자가 중국문화의 중추로서 중화민족을 응집시키는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뜻과 모양을 하나로 아우르는 특유의 응축력으로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거대한 체스판'에서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세계제일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머지 않아 심각한 정치적 균열을 겪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인구가 너무 많아, 결국 세계적인 강국이 되지 못하고 기껏해야 지역강국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하였다.물론 그의 말처럼 “미국 독립선언 당시 이미 2억 이상의 인구와 세계 최첨단의 제조기술을 지닌” 일등 국가였던 중국이 향후 20년 내외에 미국을 대신할 만큼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 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한 중국인들은 백년동안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만만디!를 외치면서 말이다.설령 세계 제2의 국가로 남는들 또 어떠하리. 여불위가 시황제를 세운 이후로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해 온 이들은 2인자인 재상들이 아니었던가? 어떤 면에서 엄청난 국방비로 국력을 소진시키며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1인자 미국보다는 그들의 군사력에 기대어 급속한 재건에 성공한 일본이 더 영민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루쉰이 보여준 ‘정신승리법’에 의하면 중국은 언제나 ‘중국(中國)’. 예나 지금이나 세계 제일인 것을... 물론 중국이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세계적 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백색(마약), 황색(매춘), 흑색(조직폭력), 남색(밀수), 홍색(공산당 부패)의 다섯 가지 색깔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이 책에서 이 모든 색으로 어우러진 중국을 만날 수 있으며, 이에 더해 지은이가 말하는 녹색(환경) 위기에 처한 중국 또한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일례로 후난성의 타오웬(陶源) 현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중국 내 환경오염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과학| 2003.06.20| 3페이지| 1,000원| 조회(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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