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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속 불편한점 평가B괜찮아요
    생활속 불편한점 10가지1) 버스카드의 불편함◇ 버스를 탈때 교통카드를 넣었다 뺏다 하는게 너무 번거롭다.대책 : 핸드폰걸이로 사용하면 잊어버릴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주사용하는곳에 칩을 넣어 계속 가지고 다닌다.2) 형광등의 불편함◇ 자려고 누웠는데 불을 끄지 않고 누웠다. 다시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끌 수 있었으면 좋겠다.대책 : 박수 소리로 불을 끌 수 있게 만들거나, 리모컨 같은 간단한 버튼 조작만으 로도 불 을 켜고 끄고 있게 만든다.3) 키보드 마우스 선의 불편함◇ 컴퓨터 책상에선 항상 키보드와 마우스 선이 엉켜있어 지저분해 보인다.대책 : 마우스와 키보드가 일체형으로 디자인된다.4) 포인트카드의 불편함◇ 포인트카드 적립을 하려고 하면 꼭 그 카드가 없어서 적립을 못하는 불편함 이 있다대책 : 한카드로 여러개를 적립할수 있는 카드를 만든다. 단 통합사용은 할수없다..5) 샴푸용기의 불편함◇ 샴푸용기나 세제용기 내용물의 양이 얼마큼 남았는지 알기가 어렵다.대책 : 용기 밖의 특정부분을 투명으로 만들어서 밖에서도 손쉽게 내용물의 양을 알 수 있 게 만든다.6) 도서관 콘센트의 불편함◇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쓸경우 콘센트가 부족하여 불편하다.대책 : 각 책상마다 콘센트를 설치 한다.7) 종이달력의 불편함◇ 종이달력을 사용할 때 1달이 지나면 찍어내야 하는 점이 불편하다.대책 : 달력을 찍어내는 식이 아닌 넘기는 식으로 만들거나, 3개월의 내용이 한 페 이지에 나와 있어 매달 찍지 않고 3개월에 한 번씩 찍을 수 있게 만든다.8) 운동화건조의 불편함◇ 운동화가 더러워 빨았을경우 건조를 시켜야하는데 마땅히 건조시킬수 있는게 없어 오래동안 기다려야 한다대책 : 건조대에 운동화같은것도 건조할수있는것을 만들어야한다
    생활/환경| 2009.06.09| 2페이지| 1,000원| 조회(17,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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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문화기행
    프랑스 (파리)1일차 10:00~10:30파리 오전 도착10:30~11:00숙소로 이동11:00~12:00점심식사12:00~18:00 오르쉐 미술관 관람18:00~19:00 저녁식사19:00~22:00 라데팡스 관광22:00 ~ 숙소 복귀후 취침오르쉐 미술관 라데팡스2일차 07:00~08:00 기상08:00~09:00 아침식사09:00~15:00 루브르 박물관 관람15:00~18:00 노트르담 성당 과 마레지구 관광18:00~19:00 숙소 복귀 후 저녁식사19:00~21:00 몽마르뜨 언덕 산책22:00 ~ 숙소 복귀 후 취침루브르 박물관 마레지구 몽마르뜨 언덕3일차 07:00~08:00 기상08:00~09:00 아침식사09:00~12:00 베르사유 궁전(거울의 방)관람12:00~13:00 점심식사13:00~ 16:00 베르사유 정원 관광16:00~17:00 저녁식사17:00~19:00 세느강에서 유람선 탑승19:00~20:00 에펠탑 관람20:00~22:00 사이요궁 쪽으로 이동22:00~ 숙소 복귀후 취침베르사유궁전 세느강 에펠탑 사이요궁4일차 07:00~08:00 기상09:00~10:00 샹젤리제 거리를 향해서 이동10:00~12:00 개선문 관람12:00~13:00 점심식사13:00~ 16:00 룩상브룩크 공원 관람16:00~ 17:00 숙소 복귀17:00~18:00 공항에 도착 후 18:00시 비행기 탑승샹젤리제 거리 개 선 문 룩상브룩크 공원▣ 여행비용교통비: 지하철 10회 회수권 :7유로(파리는 버스보단 지하철이용이 용이하다),RER선 이용(5유로)식비 : 1일차: 점심을 프랑스 거리에 있는 샌드위치로 간단히 해결(5유로)2일차: 루브르박물관에 들어가기 뿌왈란이란 곳에 가서 빵을 사서 들어갑니다. 점심을 박물관내에서 해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10유로)3일차: 프랑스에서 프렌차이즈 형식인 프런치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뷔폐 형식인데 스테이크 고 기 하나를 주문하고 나머진 샐러드 파스타 등은 무제한 공짜입니다!(12유로)4일차: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 이용(9유로)숙박 : 하루에 25유로 총 3일 75유로입장료 : 루브르 박물관 : 9유로오르쉐 미술관 : 5.5베르샤유 궁전 거울의 방: 5.3유로베르사유궁전 정원 : 13유로개선문 입장료 : 7유로기타 : 음료와 기타 먹을거리 : 20유로한화: 약 30만원 가량소요TIP☞ 일단 숙박을 한인민박에서 해결합니다. 한인 민박은 25유로에 아침과 저녁을 해결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숙박업소입니다 특히나 학생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 입니다 식비 만해도 아침, 저녁을 해결 할 수 있으니 여행 경비가 많이 줄어드는 편입니다. 비행기 값을 제외한다면 3박4일의 파리 여행은 저렴하게 즐길 수 가 있습니다.프랑스에는 볼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여행을 했던 파리의 경로를 적어봅니다.1일차 오전에 파리 도착하여 숙소로 이동 합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서 오르쉐 미술관 관람을 시작합니다. 오르쉐 미술관은 대형 기차 역사에서 미술관으로 1986년 12월 9일에 개관된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는 오르세 기차역이었습니다. 지하철의 개통으로 도심지의 역으로써의 존재가치를 상실한 오르세 역은 1940년 폐쇄되기 이릅니다. 그 후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작업 끝에 1986년 12월에 미술관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특징으로 자연조명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품이 갖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감상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오르쉐 미술관 관람 후 오후엔 라데팡스를 관광합니다. 파리의 위성도시 라데팡스는 역시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인데, 현대의 건축물들로 가득하고, 많은 회사들이 들어서 있는 현대적인 산업도시입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을 위해 개장과 동시에 입장합니다. 루브르가 워낙에 커서 하루를 돌아도 다 못 관람하므로 중요한 작품들만 관람해야 시간을 절약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어 가이드는 필수로 이용해야 하는데 워낙 난해한 작품이 많아서 설명을 들으면서 봐야지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총 8개 부문의 컬렉션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레인트미술관, 파라오이집트부문, 중세, 르네상스, 왕정복고시대, 공예품 부분, 중세프랑스와 이탈리아 조각을 모아놓은 부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회화부문, 중세루브르 역사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루브르에서 3시경에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노트르담 성당과 마레 지구에 가서 관광을 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은 800여년 동안 파리와 함께 살아온 파리의 상징이며, 프랑스 초기 고딕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몽마르뜨 언덕으로 출발하는데 몽마르뜨 언덕은 주간이 아닌 야간이 더 분위기도 좋고 볼거리도 많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가장 놓은 지대인 몽마르트르 언덕은 서기 후 150년경에 생 드니가 순교한 전설적인 사적지입니다. 이 언덕에는 유명한 사크레 쾰른 대성당이 있습니다.3일차 아침에 일어나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출발, 베르사유궁전에서 거울의 방과 베르사유 정원을 관광 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의 서남 쪽 20km의 지점에 위치해 있고 1623년부터 1789년까지 167년간 프랑스의 4대왕이 머물던 곳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루이 14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정원사를 동원하여 웅장한 베르사유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매일 밤 호화스런 파티를 열었습니다. 정원 구경 할 때에는 자전거를 빌려서 구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카트차량을 대여해주는 곳에서 카트를 빌려 관람하면 더 좋고 재미있는 관람이 될 거라 생각 합니다. 숙소에서 일행을 구하여 3명 정도 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야간에는 세느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해질녘쯤에 에펠탑으로 가서 에펠탑을 충분히 본 뒤에 사이요궁 쪽으로 이동 합니다.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어진 건물이고,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300미터가 넘는 세계최고의 강철탑이 었으므로 또한 평면구조 상의 미감을 자랑하며, 파리 전체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에펠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이요궁에서 야간에 좋은자리를 잡은 뒤에 맥주나, 와인을 살짝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일 것입니다.
    생활/환경| 2009.06.09| 3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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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콜롬부스에 관한 이야기
    ◎ 콜럼버스 항해과정과 아메리카 정복과정 ◎콜럼버스 하면 생각나는 말은 새로운 땅 다른사람이 가지 못한 땅을 맨처음 밟은인물이라는 정도에 지식만 가지고 있었다. 이번 스페인문화와 예술 수업의 과제물을 하므로써 콜럼버스에 대한 많은 지식이 쌓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지금부터 항해과정부터 아메리카를 정복한 과정에 대한 글을 쓰도록 하겠다.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요즘 들어서는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문명이 파괴되고, 수많은 인디오들을 죽음으로 내몬 정복의 물꼬를 튼 인물로 부정적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콜럼버스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콜럼버스를 통해 당시 서구열강의 무자비한 문명파괴를 비판한다고 생각된다. 고등학교에서 세계사시간을 통해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당시 시대를 봤을 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누군가가 그 즈음에 신대륙을 발견했을 것이다.1. 콜럼버스의 항해 과정콜럼버스는 총 4차례에 걸쳐 신대륙을 항해했다. 콜럼버스의 생애에 대해서 우선 보자면 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항해사가 된 그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행하면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가스띠야 왕국(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을 설득해서 탐험항해의 자금을 원조받는데 성공했다.콜럼버스의 밴느 1492년 8월 3일에 스페인을 출범했다. 첫 번째 기항지(寄港地)는 아프리카 해안 앞바다의 카나리아 섬이었으며, 9월 6일에 이 섬을 출범하여 다시 서쪽으로 항해했다. 이때부터 장기적인 항해로 접어들자 수부(水夫)들은 심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되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항해의 속행을 강행하여 마침내 그 해 10월 12일에 대륙을 발견했다.이듬해 3월에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귀항(歸航)했고 의기양양한 탐험가를 스페인은 최고의 영예로써 맞아주었다. 그 후 그는 직접 중국, 일본. 콜럼버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가망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아시아로 간느 항로 발견에 오랫동안 집착하고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그가 발견한 육지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총독으로서는 실패하여 사실상 그 직책을 파면 당한 채 구금상태로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거기서 자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두 번 다시 행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소문으로는 가난해져서 죽었다고도 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1506년에 그가 죽을 당시는 그런 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人)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당하였다.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그는 1506년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된 채 죽었는데,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서양 사람에 의한 아메리카대륙 발견은 1000년경 노르만인(人)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發端)을 구축하게 된 점에서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콜럼버스는 탐험을 하면서 만나는 땅과 인디오들을 볼 때 하느님의 전파와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생각한 것이다. 탐욕스러운 다른 선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원들을 비난하기는 좀 그렇다고 본다. 새로운 미지의 땅을 찾는 탐험선에 탄 선원들은 분명 그 시대의 최빈층과 물질적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탐험선의 선원이 된 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콜럼버스는 두가지 마음으로 선원들에게 원주민들에게 선량하게 대하고 잘 대접해서 보낼 것을 명령했을 것이다. 에스파냐 국왕의 영향력이 미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년 후 코르테스에 의해 아스텍 문명이 파괴되고, 40년 후 피사로에 이해 잉카문명이 파괴된다.)콜럼버스가 맞이하는 신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가 만나는 원주민들은 벌거벗은 상태였지만, 모두 아름답게 생겼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땅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그는 감탄해 마지 않는다. 원주민들은 그를 하늘에서 온 사자로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온갖 환대를 하기도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이 황금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황금을 바치고, 구슬 등과 바 계속 항해한다. (포르투칼과 에스파냐 모두 인도를 찾기 위해 바닷길을 이용한다. 포르투칼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까지 가는 길을 개척했고, 에스파냐는 콜럼버스를 통해 서쪽-대서양-을 통과하여 인도까지 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서인도라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도 처음에는 항해에 대한 뚜렷한 자신감이 없었고, 선원들을 잘 이끌어야만 했다. (선원들이 그의 뜻에 따라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그는 초기 항해거리를 줄여서 기록했다. 선원들이 쉽게 희망을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씩 움직인 것 처럼 기록했다. 항해 기록을 살펴보면 콜럼버스의 욕심을 볼 수 있다.'나의 항해는 훌륭했고, 내 판단도 정확했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조레스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한 것이다. 항로를 측정하는 조타수들이나 선원들의 판단을 흔들리게 하기 위해 훨씬 더 항해한 것처럼 속였다. 오직 나 한사람만이 인디아스로 가는 이 항로에 정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선원들 중 어느 누구도 진짜 항로를 알지 못한다. 인디아스로 가는 항로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콜럼버스의 항해록 中)콜럼버스의 1차 항해는 쿠바까지만 발견했다. 이후의 4차 항해는 모두 쿠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4차 항해에 이르러서야 신대륙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의 이 항해로 유럽은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바닷길에 관심을 가졌던 나라가 포르투칼과 에스파냐였기에 지금의 중남미지역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그들의 지은 지명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결과적으로 아메리카의 문명은 파괴되고, 멸망한다. 그리고 1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의 수많은 침탈아래 놓이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 든다.2. 콜럼버스 아메리카 정복과정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서 교섭의, 아메리카 발견을 전후해서 동양이 수동적으로 되고 서양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콜롬버스의 개인적 공적만을 말할 수는 없다. 콜롬버스가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그 당시의 형세로서는 결국은 누구든지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의지력, 탐구심, 재능에 있어서 콜롬버스가 누구보다도 탁월하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콜럼버스가 '신세계'에서 맨 먼저 한 일은 1492년 10월 12일 아침에 치른 의식이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기괴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며 어떤 형태로든 모든 유럽인의 발견 여행의 한 절차에 속하는 이 의식을 이제 인디언 나라들의 총독이 된 그가 모든 격식을 갖춰 치르게 하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제독이 해안으로 가 왕실의 기를 펼치게 하고서 여러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그 땅을 스페인 왕실의 영토로 접수하였다.콜럼버스가 최초로 발견한 땅에 그 당시 살고 있던 인디언들은 타이노 문화권에 속하고 언어적으로는 이른바 아루악족에 속하는 부족이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은 단순한 형태의 사회조직 속에서 생활하였고, 물질문명은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그들은 엄격한 사회단체를 구성하였으며 추장(Kaziken)의 영도 아래 공동 소유의 땅을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농업 이외에 토기 굽기와 목화에서 실 잣기가 행해졌다. 아루악족은 아직 금속을 사용할 줄 몰랐다. 콜럼버스의 기술에 따르면 "그들이 우리에게 일종의 말린 풀(담배)을 포함하여 앵무새, 무명실꾸러미, 창, 그밖에 다른 많은 물건들을 가져왔다." 그가 열거한 이 물건들은 인디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콜럼버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도' 총독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비로소 무게를 실어 줄 중국의 보물을 찾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황금찾기가 이후의 항해 과정, 인디언들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실제로 서인도 제도에 금이 있었는데, 그것이 불과 얼마 뒤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인디언들은 얼마 나지 않들었다.
    인문/어학| 2009.06.09| 6페이지| 1,000원| 조회(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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