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만물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물질의 근원 및 본질이다. 중국철학적 용어를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하였으나 도가인 노자ㆍ장자가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가지는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중국의 한나라 시대에는 음양오행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우주 자연의 운행,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 의학 및 길흉, 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송대에 와서는 유가에서 이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서 그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어 나간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의 보편적인 것을 이라 하였고, 기는 형이하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철학의 중요 개념으로 다루었다.이 이기철학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주요 심성론으로 전개되는데, 도덕적 근거가 되는 선악의 문제를 마음속의 성정에서 찾고 있어 이와 기를 주로 가치론적으로 다루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칠 논변과 인물성 논쟁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성을 이, 정을 기로 보는데 그치고 있으나 한국철학에서는 성론을 다시 이기문제로, 그리고 정론 또한 이기와 관련하여 문제 삼으면서 선악 및 모든 가치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데서 이와 기를 가치론 적으로 보려는 특색이 있다.이는 선의 근거, 그리고 기는 악의 근거로 삼았다고 하겠으나 이는 언제나 선한 존재요 기는 선한 것도 약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선과 악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도 하여 어려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 선도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므로 선과 악이 모두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기라고 보고 가장 실질적인 요소로 문제 삼는다.그러므로 실질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아 들어가는 조선 후기의 실학은 바로 이 기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것이다. 그 밖에 현대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기의 의미는 "이 곳은 기가 세다"라고 할 때와 같은 형세ㆍ기운ㆍ조짐. 그리고 양생과 관련하여 신체상의 생명력ㆍ힘ㆍ정기 및 생체에너지 등의 뜻으로도 쓰이기도 하며 넓은 의미의 기는 좋은 기와 나쁜 기를 총칭하지만 좁은 의미의 기는 좋은 기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또한 기는 바람과 같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또한 무게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어떤 근원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기는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있고 생과 사에 직접, 간접적으로 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숨쉬는 공기, 우리가 생활해 가는 땅에 대한 지기, 물에 관한 물기 그리고 날씨를 이야기하는 천기, 전기, 생기, 분위기, 살기, 음기, 양기, 습기, 온기, 냉기, 한기, 향기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고, 기가 막힌다, 기가 살았다, 기가 차다, 기가 죽었다, 기가 세다, 기가 약하다, 기세등등하다, 기운이 넘친다, 기운이 없다, 기가 다 빠졌다 등. 기에 관한 수많은 말들이 있고 또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하고 있다. '끼'라는 말도 역시 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기와 관련된 것들이며 우리 인간은 태기가 있어서 새 생명으로 잉태되었다가 생기가 끊어지거나 사기가 온몸에 퍼지면 이 세상과의 인연도 끝나는 것이다. 즉, 기로 시작해서 기로 끝나는 것이다.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느낄 수 있다. 떠올리기도 싫은 추억을 생각한 해도 그 기에 의해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되며 예전에 경험했던 기쁜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게 됨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그 아련한 추억에 젖어 그 당시의 기운을 느낄 수도 있고, 미래의 아주 성공한 자신을 상상하면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낄 수 있다.기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 앞에서 무시하는 태도로 손가락질을 한다든지 손바닥으로 머리를 툭툭 친다든지 하면 상대방은 무척 기분 나빠하거나 신경질적으로 손 치우라고 할 것이다. 이는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나쁜 기운이 손가락이나 손바닥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기가 상대방의 뇌파를 자극하여 이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기분이 몹시 언짢아진다. 반대로 오래간만에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서 악수를 하거나 손을 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 역시 손을 통해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기가 발산되는 곳은 바로 손이며 특히 손바닥이다. 그래서 기공을 하는 사람이나 기 수련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사용하며 무술 영화에서 장풍이라 하여 손바닥을 통해 기를 발산하여 바람을 만드는 것도 손이요, 프로 야구 맞이하면서 손바닥을 마주친다. 이것은 홈런을 친 사람의 강한 기를 자신들도 받기를 원하는 표현이다.손을 많이 사용하면 기가 강해지고 두되가 명석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유아들도 손을 많이 쓰는 교육을 많이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또한 여자가 남자들보다 오래 사는 이유 중의 하나도 여자는 설거지, 빨래하기, 집안 청소, 바느질, 뜨개질 등 손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남자보다 오래 사는 것이다. 중국에서 특이 기공사들이 기를 발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측정했는데, 기공사들이 기를 발할 때는 알파입자, 원적외선, 전자파, 정전기, 음파, 자기 등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그러나 이런 에너지들이 모두 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기란 과연 어떠한 에너지인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공사들에게서 나오는 것만이 기가 아니고 지구상에는 다양한 기가 공존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를 가지고 기를 정의하고 단정 짓는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에 보이거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 확연하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은 이미 그 기운을 인지하고 있고 우리 몸은 자동적으로 감지된 기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게 된다.미국의 의학박사들이 연구한 결과, 손바닥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항상 원적외선의 기가 나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실제로 특별히 기에 대해 수련하지 않아도 소주를 잔에 부어 놓고 맹물로 변하라는 주문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시계 방향으로 손바닥을 돌리면 초심자들도 알코올 성분이 많이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될 것이다.물도 육각수가 좋은 것은 역시 육각형 속에서 좋은 기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은 것이며, 나쁘고 부정을 타는 일을 당했거나 방지하고자 할 때는 소금을 뿌리는데 소금의 결정체는 피라미드 형상으로 역시 좋은 기가 발생하여 나쁜 기를 소멸시켜 주기 때문이다.이것이 기이며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운이 바로 기이다.사람에게 있어서 기의 원동력은 크게 나누면 세 가지이다. 그 첫째가 음식물이다. 일명 곡기라고 한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음식물을 통해서 그 기운을 직, 간접적으로 받는다. 식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물을 섭취해서 지상의 기운을 받고, 생선이나 해산물 섭취해서 바다의 기운을 간접적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도 여름에 보리밥을 먹는 것이 좋다고 나와 있는 것은 차가운 겨울의 기운을 먹고 자란 식물이기에 그 기운으로 여름의 더운 기운을 조금이나마 덜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음식물 중 어떤 것을 섭취했느냐에 따라서 건강이 좌우된다. 의학이 상당히 발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고 환자수가 줄지 않는 것 역시 우리가 취한 음식물에 포함된 중금속이나 농약 성분들을 같이 섭취함으로써 그 나쁜 기운이 우리 몸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그 다음이 천기이다. 천기는 바로 우리가 숨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 만물이 소생하는 데 필요한 태양빛을 제공한다. 사람은 잠시라도 숨쉬지 못하면 죽는다. 또한 이 천기가 나쁘던 건강이 나빠진다. 맑은 공기는 좋은 천기지만, 오염된 공기나 공해는 나쁜 천기이다. 그래서 이 천기가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의 건강이 좌우된다. 그리고 사람이 태양빛을 받지 않으면 얼굴이 붓고 힘이 없어지는 이유도 역시 필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택에서는 이 천기를 고려해야 한다.
기의 관념은 고대 중국의 애니미즘 신앙, 즉 풍신(風神)에 대한 관념에서 그 단초를 볼 수 있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와서 비를 내리게 하며 비를 농경사회의 생산력에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바람은 생명력의 근원으로 생각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애니미즘 신앙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구름 또한 운신(雲神)으로 신격화되어 있었으며, 비 또는 우사(雨師) 등의 이름으로 신격화되어 있었다. 바알신앙에서도 바알은 기후신으로서 풍요와 다산이라는 생산성과 생명력의 근원으로 간주되었다.기라는 개념은 이러한 신앙관념을 바탕으로 두고 생겨났는데 아마도 두 가지 계통의 사고방식이 합쳐진 것 같다. 첫째는 ‘구름’의 모습을 본 뜬 ‘?’라는 글자가 발전되어온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공궤’(供饋)의 의미를 가진 ‘기’(?)라는 글자와 관련되어온 것이다. 원래 ‘기(氣)’는 ‘?’를 뜻하는 옛글자였는데 ‘?’의 개념이 합쳐지면서 포괄적인 의미의 ‘氣’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氣’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인 ‘공궤’의 개념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라는 글자가 생겨났을 것이다.이처럼 ‘氣’의 개념은 원래는 음식물, 즉 곡기(穀氣)의 섭취를 통한 생명력, 즉 생체에너지의 보충이라는 관념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애니미즘의 풍신과 운신에 대한 관념의 영향을 받아서 대기(大氣)의 움직임이 생명력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곡기와 대기 등을 포괄한 생명력의 통합적 근원으로서의 ‘氣’개념이 생겨났고, 나아가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유를 이루고 있는 ‘氣’개념이 생겨났던 것이다. 기의 개념이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자 생명력의 보충은 곡기의 섭취가 아니라 직접 대기로부터 흡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논어』와 『맹자』때까지만 해도 기의 개념은 전적으로 인체 내부의 생체에너지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순자』때에 오면 무생물도 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이 있었지만 인체 내부의 기와 인체 외부의 자연의 기가 서로 감응한다는 관념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자』, 『회남자』,『여씨춘추』등에 오면 외기와 감응할 뿐 아니라, 외기를 직접 흡수하여 생명력을 보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타났고 나아가서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라는 범신론적 신비주의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일은 의식, 즉 정체성의 상실을 동반한 변성의식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발생론적으로 보았을 때 애초의 기 개념은 단순히 생체에너지였으며 범신론적 사상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는데 점점 범신론과 결부되어갔던 것을 본다.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전통기(氣)사상은 은연중에 중국에서 내려온 유가, 도가의 전통 기학, 기철학(氣哲學)사상을 의미한다. 중국의 전통 기사상은 도교의 노장사상, 신선·연단(煙丹)사상, 유교의 공맹사상, 주역의 기사상,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의 이본론적 사상으로부터 유물론적, 기본론적 기학사상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정치, 사회 상황과, 제도에 따라 발전과 쇠퇴를 거듭해 왔으나, 중국 전통 기사상은 관념론적 기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유학의 이기론고(理氣論考)나 기학의 기론을 주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도의 기수련을 통해 신통(神痛)의 경지에 이른 도가나 불가의 도인, 고승들과는 달리, 기수련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사변적으로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정치, 사회, 인간·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기론에 그쳤기 때문에, 주도적인 이기사상을 보면 기는 형이하(形以下)의 존재로서 물질적, 물리적 자연의 기로 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理)·도(道)·성(性)은 형이상(形以上)의 존재로 이원론적인 또는 유물론자들의 기일원론적인 기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 중국의 전통 기사상-기학, 기철학은 근대에 와서 서구의 과학기술이 중국의 격변기, 개화기에 유입되면서 기를 단순히 전기, 질점과 같은 물질 에너지를 규정하고, 공산주의 체재하에 유물론적 기사상만이 용인되므로서, 합법적으로는 이학, 심학, 도학과 함께 융성해진 기학의 전통 기사상은 쇠락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전통철학에서 기철학, 기학은 중국 고유의 유가적정신과 그 속의 유학, 성리학의 인학, 이학의 주요 사상속에 대립적, 종속적, 대응적 범주로서의 기에 대한 이해에 그친 것이다. 여기에 기학이 그렇게 수많은 이론과 범주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과학화, 체계화 되지 못한 원인이 있다고 본다. 기철학, 기학에서 말하는 기의 대부분이 기의 단편적 편파적인 일면만을 강조하거나, 지나치게 형이상적인면만을 기의 범주로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전통 氣기상에서 기본론적 기학이나 이본론적 이학/성리학, 심본론적 심학모두가 범주오류와 한계를 지닌 이론으로 이는, 기의 실, 실상을 경험해 보거나 보지 못한 유가의 이학/심학의 이론가들이 상위의 기에 대해 무지한대서 나온 결과라 볼 수 있다.기사상은 음양이나 오행의 개념을 수용하여 더욱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음양은 원래 주역(周易)에 나타나는 개념이고 오행(五行)은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에 나타나는 개념으로서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농경사회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음양은 천지(天地), 부모(父母), 한열(寒熱), 청탁(淸濁), 장부(臟腑), 수화(水火), 주야(晝夜) 등 대립적인 사물, 성질 ,경향, 특성을 의미한다. 오행은 목, 화, 토, 금, 수의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을 통하여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한다. 상생은 사물을 변화 발생을 촉진시키는 것이고 상극은 사물의 변화와 발생을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극은 목극토(木克土), 토극금(土克金),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 등의 서로 거스르는 관계를 나타내며, 상생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등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한다. 음양이나 오행의 개념도 애초의 개념은 단순한 자연현상 내지 자연의 물질의 개념이었는데 점점 기의 변화, 운동, 성질,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로 철학적 범주화되어 갔던 것이다.중국사상에서 기(氣)가 우주론적으로 그리고 인간론적으로 근원적인 힘으로 이해되는 것은 분명하다. 일례로 중국인민대학의 철학교수인 장입문(張立文)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기의 범주가 지니는 철학적 의미를 정리하였다.첫째, 기는 자연만물의 근원 또는 본체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정미한 물질로서 천지만물의 통일적인 기초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이다.둘째, 기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질료 혹은 원소로 이해된다. 기 자체는 일종의 매우 미세한 물질현상으로서 형질을 갖추지 않은 혼동상태이며 응결되어서야 형상이 있는 사물이 된다. 말하자면 기는 만물과 현상의 공통된 본질로서 세계만물의 통일적 원리인 셈이다.
◎ 목 차 ◎Ⅰ 서론 : 머릿말Ⅱ 본론1. 대약진운동이 일어난 원인2. 대약진운동의 전개3. 대약진운동의 결과Ⅲ 결론 :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서론아직 중국에 대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아나가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본 ‘인생’이란 영화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곳에서 매번 똑같은 음식을 먹고 철이란 철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 모으려 하고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들까지 너나할 것 없이 전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첫 번째 주제인 ‘대약진 운동’에 대하여 대약진 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레포트를 작성할 것이다.우선 대약진운동을 하기 전에 모택동에 대하여 알아보자면 모택동은 혁명사상가와 정치지도자였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그는 그 당시의 중국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삶을 살았다. 1921년에 중국공산당의 창당에 참여했고, 1949년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서Ⅱ 본론1. 대약진운동이 일어난 원인중국 인민의 대다수는 공산당의 승리.. 즉, 혁명을 환영했다. 모택동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운명이었던 후진성과 곤궁의 종식을 약속했다. 1952년에 신정부는 공언한 약속을 상당 정도로 실행에 옮겼다. 농촌에서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몰수된 토지는 농민들이게 분배되었다. 도시에서는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그리고 끊임없는 물자 부족이 진정되어져갔다. 또한 뒤이은 몇 년간 문자 해독률과 교육, 보건, 생활수준 등에서 두드러진 향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경제 전략은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데 초점이 놓여진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공업 기반을 건설하기 위한 자본의 축적에 놓여있었다. 지주, 고리대금업자, 군벌 등 모든 기생 계층이 제거됨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를 위해서는 생활수준의 향상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경제의 관료들, 공장 경영자들, 군부 지도자들 등으로 이뤄진 하나의 계급을 창출하고 결집시키는 과정이었다. 하나의 계급으로 묶여지게 된 배경은 그들이 경제의 우선순위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노동자 농민 대중과 불가피하게 적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유는 자본의 축적이 중심 목표라 한다면 기초적인 인간 욕구의 충족은 자본 축적에 명백하게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모순은 산업의 극단적인 낙후함 때문에 특히 더했다. 1949~50년 시기의 인도와 비교해 보면 중국은 모든 주요 산업 분야에서 많이 뒤떨어졌으며, 1913년 러시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은 극히 높은 비율의 축적을 필요로 하였고 1950년대에 축적률은 높아졌다.축적과 인간의 생활상의 필요 사이의 모순은 비밀경찰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어떠한 저항도 봉쇄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저항의 잠재력은 1957년 ‘백화운동’에서 보여졌다. 모택동은 지식인들을 공산당에 매어놓기 위해 더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리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새 체재에 이해관계를 갖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비판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중 많은 것이 모택동 자신에 대한 공격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재빨리 운동을 중단시켰으며 수많은 지식인들이 투옥되거나 농촌으로 추방당했다. 중국의 공업화 패턴은 스탈린(경제 발전의 모든 측면들을 통제한 포괄적인 5개년 계획)을 모델로 하여 짜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제 1차 5개년 계획은 공업 기반을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급속한 진전은 이뤄내지 못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경제는 20세기 어느 시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 경제의 여타 부분과 비교해 보면 훨씬 뒤처지는 것이었다. 군사적 경쟁의 요구들이 그러한 전략에 대한 또 하나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특히, 국민당 잔당이 세운 대만정권은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전쟁은 그 위협이 말뿐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의 낭비와 비효율을 가져왔다. 이런 낭비는 빈약한 자원을 무기비 지출에 투하함으로써 가중되었다.중국공산당은 포위되었다는 분위기를 고의로 과장하여 노동자와 농민에게 훨씬 더 큰 희생을 강요하였다. 모택동의 전략은 중국의 빈곤이라는 물질적 장벽과 경쟁 및 축적의 필요, 이 양자 사이의 모순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어 갔다. 1956년 초에 성장은 서서히 멈춰져 갔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빠른 성장 속도를 촉구하였다.그는 이러한 모순을 결핍된 자본과 자원을 인민 대중에 대한 착취를 더욱더 증가시킴으로써 충당하려 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1958~60년의 ‘대약진 운동(제 2차 5개년계획)’ 이었다.2. 대약진운동의 전개사회주의 확립을 전제로 그에 적합한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15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자!’라는 구호아래 대중 동원에 의한 대약진 운동은 공업과 농업 생산의 두 면에서 모두 목표량이 무지막지하게 높게 설정되었고 새로운 노동 규율이 실시되었다.공업에서 대약진의 중심이 된 것은 철강의 증산운동이었다. 1957년 생산량의 2배를 증산하자는 모택동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래 설정되어있던 1958년도의 생산목표 620만 톤을 1,070만 톤으로 올리고 1959년도의 지표를 2,700만~3,000만 톤으로 올렸다. 이를 달성하기위해 공장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강압하여 식사 시간을 폐지하고 18시간 또는 24시간 교대제를 도입하고 모든 안전 근로 관행들을 폐지함으로써 설정된 목표량을 이루어 내려고 했다. 이러한 방법들이 실패하면, 공장 경영자들은 생산량 증가 수치를 허위로 작성하여 보고했고, 이것은 다른 공장들에 생산량을 더욱 높이도록 압박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도시에서 대약진 운동은 자체 모순의 무게에 짓눌려 이내 파산하고 말았다. 한두 번 정도는 노동자들에게 교대근무를 강제로라도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적 노동 시간이 될 수는 없었다. 기계의 속도를 2배로 늘렸지만 기계만 2배 빨리 마모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상이한 산업 부문들 사이의 불균형은 생산의 농가가 살 수 있는 충분한 땅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중국공산당은 다양한 형태의 집단 노동을 도입하여 투자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생산을 늘리려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러한 과정은 대체로 더디고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국가가 생산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 매단계마다 농민의 동의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8년에 농민 협동조합은 평균 2만 5천 명 단위로 이루어진 농촌의 새로운 경제 구조인 ‘인민공사’로 합병되었다. 토지가 강제로 집산화되었고, 농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작업조로 편성되었다. 수천 개의 소규모 농촌 기업이 설립되었다. 농민들은 토지 상실에 반발하여 작업을 거부하거나 가능한 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인민공사 책임자들은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국가가 지정한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맞추려 했고, 목표를 맞추지 못하면 수체를 실제보다 크게 속이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인민공사’는 단순히 경제상의 조직은 아니고 공업, 상업, 교육 문화, 공안, 군사, 복지사업 기타 공공사업 전반을 관리 운영하는 행정조직이기도 하였으며 사원대표대회는 최말단 의회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북대하회의는 인민공사를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라고 하였다. 하지만 열광적인 시대풍조와 중국 민중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절대평등주의의 유토피아가 섞여가지고, 농촌간부의 상당수가 이를 공산주의의 즉시 실현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모든 생산수단과 각 합작사가 축적하여 온 식량, 개인집의 부뚜막, 쇠붙이, 돼지마저 공유로 하고, 공유식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제에 의해 절대적인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였다.1958년 말부터 다음해 봄까지 걸친 몇 회의에서 중공중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함이 지나치고, 평균주의가 농민 속에 공황상태를 야기시켜 생산을 파괴하고 있다고 하여, 공사가 아닌 생산대대를 소유와 회계의 기본단위로 삼으라고 지ㅅ하였다. 또한 1958년 11워의 중공 8기 6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장기의 계획 입안에 전념하기961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1958년은 풍작을 거둔 해였다. 하지만 그 다음 3년은 그렇지 못했다. 1959년의 식량생산은 1954년의 수준까지 내려가 버렸다. 그 사이에 인구는 1951년 보다 약 1억이 증가하였다. 1961년에는 기근이 중국 북부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시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대약진 중의 과로와 영양부족 때문에 질병을 앓는 병자가 증가하였고, 생산력이 낮은 지역의 농촌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모택동의 기대대로 경제가 팽창하기는커녕 대약진 운동은 10년간의 경제 발전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렀다. 1965년에 이르러서야 전체 생산량이 1957년 수준을 되찾았다. 그러나 1959~60년에 소련 고문관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백여건의 주요 건설 계획이 중단됨에 따라 더욱 악화 되었다.1960년 11월부터 다음해 6월에 거쳐 몇가지의 지시가 나와, 작은 면적의 자류지를 각호에 나누어주고 소규모의 가정부업과 지방시장에서의 개인거래를 인정하며, 공공식당을 정지하여 노동에 따른 분배를 중시하게 되고나서부터 [공산풍]이 억제 되었다. 그러는 동안 도시에서도 [노동과 휴양과의 적당한 균형]을 강조하는 지시가 나와 대약진 정책은 사실상 좌절되었다.3. 대약진운동의 결과1958년~1960년간의 대약진은 중국경제에 거대한 재난을 가져온 동시에 업무의 중심을 경제건설과 기술혁명으로 전환시켜 국가는 전대미문의 인력. 재력. 물력을 경제건설에 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민들은 자력갱생의 고달픈 분투로 일부 성취만을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5개년 계획기간(1958~1960)의 고정자산은 1차에 비해 75.1%가 증가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대약진시기 3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950~1979년 사이에 새로이 증가된 생산능력 중 58~60년 사이에 증가된 비중이 제강 36.2%, 제철 32.7%, 채탄 29.6%, 종이 33.8% 면사의 방적과 방추가 25.9%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약진의 3년 동안 대경유전이 개발되어 원유생산량도 증가하였으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