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원 운동량 보존 토의 : 이번 실험은 <이차원 운동량 보존> 실험으로 탄성충돌과 비탄성충돌 두 가지 실험을 하였다. 운동량 보존 법칙은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실험으로 접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탄성충돌이란 두 물체가 충돌하는 계의 전체 운동 에너지가 변하지 않는다면 운동에너지가 보존되고, 이러한 충돌을 탄성충돌이라고한다. 반면에 비탄성 충돌이란 충돌 전과 후의 운동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 충돌을 말한다. 하지만 비탄성충돌의 경우에도 운동량은 보존된 실험에 있어서 탄성충돌의 경우 퍽 하나를 테이블 중앙에 위치시킨 다음에 다른 퍽 하나를 비스듬히 충돌을 시켜서 적당하게 입사각과 속력을 정하여 실험에 임하였다. 반면 비탄성 충돌의 경우에는 퍽에 비탄성 충돌용 지그를 끼운 후에 두 퍽을 충돌 시켜 그에 따른 속도와 각도를 재었다. 처음 실험 시에 먹지에 점이 찍히지 않아서 다른 문제가 있나 봤더니 퍽의 가운데 잉크를 찍게끔 하는 부분이 제거되어 있어서 퍽의 자취가 찍히지 않아서 다른 퍽으로 교체를 했어야 했다. 이번 실험에서는 결과 값에 첨부한 것과 같이 오차가 큰데 그 까닭으로 첫 번째로 측정에 어서 오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속도와 각을 측정하기 위해서 직접 자와 각도기를 이용하여 측정을 하였는데 이때 사람이 직접 하는 지라 완벽하게 값을 측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번째로는 풋 스위치를 밟는 타이밍의 문제인 것 같다. 즉, 퍽이 손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밟아주어야 하는데 이때도 조원 각자 역할분담을 하다 보니깐 약간의 오차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오차는 크게 났지만 이번 실험을 통해 선운동량 보존 법칙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비틀림진자 토의 : 이번 실험은 비틀림 진자를 사용하여 그 주기를 측정함으로써 철사의 강성률 해보는 실험이었다. 여기서 강성률이란 외부에서 가한 힘에 대해 물체의 모양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쓰이는 비를 말한다. 대체적으로 실험은 쉬었으나 처음 실험 시에 주기를 잘못 측정함으로서 다시 한번 측정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이번 실험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지속적으로 회전하는 것을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실험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많이 한 실험이었다. 이번 실험에 있어서 오차의 원인을 찾자면 제일 큰 실수는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 점, 다시 말해서 더 이상 꼬여 있지 않고 곧게 있는 점을 찾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인 듯싶다. 그리고 실험실 안이 매우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놨었는데 바람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다. 회전 할 때, 받는 공기저항도 오차의 큰 원인이 된 것 같다. 시간이 된다면 철사 줄에 따른 결과값을 비교해 보고 싶었으나 시간적으로 부족한 실험이었던 터라 그러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쉬웠다.
#Homework.디지털 논리 회로 설계 중 NAND based circuit, AND based circuit, OR based circuit을 Circuit 디자이너, Process 엔지니어, Device 디자이너의 관점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Circuit 디자이너의 관점 >Circuit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회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 보다 NAND based 혹은 NOR based 회로를 설계함으로서 회로를 단순하게 만드는 회로 단순화 작업(수업 시간에 배운 Bubble Pushing)을 하기 용이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rocess 엔지니어 >NOR based의 경우에는 병렬구조이기 때문에 순차적이 아닌, 임의의 access(random access)이기에 Data의 access가 용이하다. 이에 비해 NAND based는 직렬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data를 access 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 NOR based circuit은 data 안정성도 좋다. 그래서 NOR로 회로를 설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evice 디자이너 관점 >NAND based 와 NOR based의 구조적인 차이인 NAND based는 직렬, NOR based 는 병렬인 것으로 인해서 집적도, 용량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NOR는 병렬구조로 모든 부분에 접합을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용량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NAND based 는 용량을 최소화 할 수 있어서 집적도를 늘리는데 좋다. 그래서 NAND based로 회로를 설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Homework.병렬(직렬) -> 직렬(병렬)로 변환하는 회로의 용도와 쓰임새에 대해서 설명하시오.병렬 -> 직렬 직렬 -> 병렬이러한 기능을 하는 회로는 시프트 레지스터이며, 병렬(직렬)로 입력된 입력 값들을 직렬(병렬)로 출력을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병렬 -> 직렬로 변환하는 회로는 Parallel - to - Serial Conversion 이고, 직렬 -> 병렬로 변환하는 회로는 그의 반대인 Serial - to - Parallel conversion이다. 단적인 예로는 데이터 통신 시스템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지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는데 컴퓨터는 내부적으로 병렬형식 데이터로 동작한다. RS232 표준 또는 전화선과 같이 직렬 케이블로 통신하기 위해서는 그 데이터는 먼저 직렬 형식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A가 데이터 로드하며 8개의 클럭 펄스를 공급하는데 시프트 레지스터 A의 8비트 데이터 출력은 직렬 통신선로를 통해서 8비트를 동시에 로딩하고 있는 시프트 레지스터 B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시프트 레지스터 B가 8개의 데이터 비트들을 모두 수신한 후에 이를 병렬 출력 선로를 통하여 컴퓨터 B로 전달한다. 이러한 사항들은 두 컴퓨터 사이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통신의 간략화 된 형태이며 시프트 레지스트가 시스템의 핵심임을 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이러한 것이 병렬(직렬) -> 직렬(병렬)로 변환하는 회로의 용도와 쓰임새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우리나라 역사를 말해 주며, 오늘날 우리를 존재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조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문화유산은 그만큼 중요하고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문화유산은 꼭 가치 있고 예술성이 뛰어난 훌륭한 것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도구로서 평범하고 사소한 것이지만 선조들의 손 떼가 묻은 흔적이 있는 것이면 모두 문화유산인 것이다.이러한 문화유산을 깊이 있게 바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다가가려고 한다면 저절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수십 년간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종묘’라 하면 그저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인 도심의 숲과 그 안에 있음직한 커다란 기와집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다.일반인들은 종묘에 관해서라면 특별히 들은 이야기도, 교과서에 배운 바도 없다. 종묘는 들어가 본 사람도 많지 않은 데다 일반의 관심을 끌 만한 사물도 없다. 길 건너편에 있는 ‘창경궁’의 동물원이나 벚꽃놀이가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에게 가장 볼만한 구경거리였던 데 비해 종묘는 그저 침묵과 무관심 속에 버려져 왔던 것이다.이러한 종묘가 근래 갑자기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5년 말 유네스코 총회가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에 포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20여 년 전부터 세계문화유산을 선정, 그 보전 보호를 위해 국제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해 왔다. 현재 세계 150여 개국이 참가하여 자연유산을 포함, 약 550여점의 세계유산을 지정해 놓은 상태다. 우리는 역하가 깊고 문화유산이 풍부한 민족으로서 이 협약에도 뒤늦게 가입한 꼴이 되었으며, 지정을 얻은 문화재는 현재 다섯 곳에 불과하다. 95년말 에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그리고 종묘가 지정되었고, 97년 12월에 수원 화성과 서울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에 추가로 지정된 것이다. 물론 문화유산은 누군가 관심을 가지든 가지지 않던 장엄하고 조화로운 석불 조각과 석굴 구조로, 또 불국사는 훌륭하고 정교한 석탑 ? 석교 등으로 우리에게 1200년 전 신라인의 예술과 기술, 신앙과 숨결을 자랑스레 전하고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국가 수난시 끈질긴 저력과 신앙심으로 불교 경전을 새긴 팔만 장의 목판을 독특한 기술과 구조로 완벽하게 보관해 온 목조건물로서, 지금까지 손상 하나 없이 그대로 보관해 온 슬기가 빛을 발한다. 이들은 세계문화유산의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문화유산이다.반면 종묘는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인해 비로소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높은 전통식 담장에 둘러싸인, 몇 만 평에 이르는 도심 속 숲과, 널찍한 마당 뒤 장엄과 정적에 잠겨있는 숲 속의 길고 커다란 기와집, 높고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장엄한 기둥의 행렬이 보는 이를 압도하고, 기둥이 만들어낸 기다란 주방이 어두운 신실을 지키는 가운데 건물 전체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절제된 장엄미를 무겁게 풍긴다.또한 종묘는 외적인 건물 구조나 내적인 신위 배치에 있어서 성리학의 강렬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왕가의 사당으로서, 현재 정전에는 49위의 신위를 19개의 신실에 모셨으며 별전인 영녕전에는 34위의 신위를 16개 신실에 모셔 두었다. 건물의 배치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의 내부 구성에도 성리학적 의례제도는 엄격히 준수된다. 역대 군주 가운데 왕호가 박탈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아예 그 신위를 정전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왕비의 신위도 지위와 품격에 따라 엄격히 배열했다.정전과 별전의 구분 또한 철저했다. 어찌 보면 조선의 정치 ? 문화가 바로 여기에 압축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창덕궁은 전각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궁궐로서 돈화문, 후원, 낙선재 등이 알려져 왔던 터이고, 수원 화성은 정조 임금의 효심이 깔려 있고 또 훌륭한 축성기술의 자취가 잘 남아있는 도성이다. 이들 두 문화재도 이번 유네스코 지정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과 베르사유 궁전 및 정원, 독일의 쾰른 대성당 등이 포함된다.러시아도 비교적 뒤늦은 1990년에 가입하여 성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중심지와 관련 기념물군, 그리고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붉은광장 등이 등록돼 있다.역사가 짧은 미국의 경우는 많은 자연유산이 지정된 데 비해 문화유산으로는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여신상 등이 포함된 정도다.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보루브드르 사원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이 대표적이며, 베트남의 오래된 왕도인 후에의 역사기념물군도 인류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협약에 비교적 늦게 참여했다. 중국의 경우 만리장성이 첫 번째 지정 유산이었음은 당연한 일이겠고 이어 명청시대의 궁정인 자금성, 돈황의 천불동이 있는 막고굴, 진시황제의 능이 포함됐다.일본의 경우는 오층 누각을 중심으로 삼중의 호가 둘러싸고 있는 16세기 이래의 대표적 성곽인 히메지성을 필두로, 나라호류지의 8세기 이래 고대 건축물과 각종 불상 및 여러 문화재가 등록됐다. 교토 역사유적은 일본의 천년 도읍지로서 역사기념물에 지정된 경우다.이들 가운데는 우리의 문화유산보다 훨씬 역사도 깊고 규모도 큰 것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은 시대성과 규모보다 얼마나 오랫동안 후대의 인류에게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문화유산으로서 인식돼 왔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오래된 문화유산 중에는 단지 관광 명소로만 이용되는 곳도 허다하며, 또 어떤 것은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간신히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고 또 일반의 인식이 낮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관광 대상으로만 방치된 것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우 고대의 문화가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문화유산까지 잘 보존하는 것에 비해 우리는 소홀한 점이 많다.훌륭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스란히 들어 있다. 선인들이 가시적인 조각과 건축으로 형상화한 그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것은 원형의 보존분석과 이해가 필요한 것도 그 안에 반영된 사상과 신앙을 올바르게 도출해 내기 위해서다.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 석굴암과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을 완벽한 조형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선 석굴암은 정각을 통해 석가보살이 석가여래가 되고 석가여래는 진리 자체가 되어 비로자나불로 변모하는 순간을 항마촉지인성도상이라는 도상으로 함축하였다. 그 건축은 고도록 발달된 기하학적 비례에 기초하여 다양하게 전개될 뿐 아니라 화엄사상의 법계의 원리와 상통하는 수리적 비례 안의 조화율이 적용되었다. 이에 비해 불국사는 여러 모습으로 분화된 불신을 여러 불국토에 나누어 배치하면서 자력신앙과 석가정토를 강조하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석가여래의 다른 모습이요,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은 석가여래가 설한 진리의 형상화요,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석가여래의 자비심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석굴암의 항마촉지인상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조성된 항마촉지인 성도상의 원형이 되었으며, 불국사의 분화된 불신에 따른 여러 전각의 공존은 이후 가람 배치의 원형이 되었다.석굴암과 불국사의 건립은 751년 김대성의 후원 아래 동시에 시작됐다. 돌을 다듬은 솜씨로 보아 설계 역시 당시의 천재적인 조각가와 건축가에 의해 역시 동시에 진행되었음에 틀림없다.석굴암에서는 정각을 통해 석가보살이 석가여래가 되고 석가여래는 진리 그 자체가 되어 비로자나불로 변모하는 순간을 항마촉지인 성도상이라는 도상으로 함축하였다. 말하자면 불신의 모든 변화의 다양성을 한 몸에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불국사는 여러 모습으로 분화된 불신을 여러 불국토에 나누어 배치하면서 석가정토를 강조하고 있다.아미타여래는 석가여래의 다른 모습이요,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은 석가여래가 설한 진리의 형상화요,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석가여래의 자비심을 형상화한 것이다.그리하여 석굴암의 항마촉지인상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깊은 정신이 깃들여 있다. 위대한 예술품은 위대한 사상을 반영하고, 위대한 사상은 위대한 예술형식에 의해 구현되기 때문이다.두 번째로 종묘를 들 수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 건축 가운데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것 중 하나다.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독특하고 고유한 격식과 공간을 갖게 된 종묘는 기본적으로 한국 건축의 일반적 특성인 비대칭적 대칭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정전의동 ? 서월랑이나 신로등에 응용된 이러한 배치 기법은 한없이 고요한 종묘 공간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 또 단청까지 삼갈 만큼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 구성은 종묘를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물로 완성할 뿐 아니라 마치 일상적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리는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이 모두는 조선 왕조의 개국과 함께 이상적 사회 건설을 위해 펼쳤던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종묘 건축에 투영시키려고 노력한 결가다. 이 신성한 공간에선 지금도 매년 한 번씩 종묘제례가 펼쳐진다. 웅장한 음향효과에 도도한 기상을담아 종묘제례 절차에 높은 권위와 격조를 부여하는 종묘제례악,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동작으로 음악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어내는 일무는 조선 왕조 500년의 빛나는 이상과 높은 예술정신을 표현한다.세 번째로 해인사의 장경판전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인의 문화의식을 대표하는 민족의 걸작이자 한국의 불교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의 전령으로서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거울이요, 문화사의 영원한 자존심이다.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건축구조로 수백년 간 정판을 온전히 전하고 있다. 모든 방향에서 햇볕이 들어오고 습기 찬 바람이 돌아가도록 한 좌향, 원활한 통풍과 온 ? 습도의 조절을 위해 위아래로 크기를 달리한 창, 공기의 자연스런 유동을 돕는 판가와 경판의 처리, 습도조절은 물론 충해까지 방지하는 흙바닥 등 장경판전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응용한 하이테크 건축물이다.네 번째로 수원 화성이 있다.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
서론전후소설이란 한국전쟁이라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해방 이후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분열로 이데올로기적 문학이 절정을 이루다가, 남한만의 단독적 정부가 수립되면서 서구의 현대문학사조 에 대한 심정적 접근인 영미의 모더니즘 문학과 불란서의 실존주의 문학을 현대문학 , 혹은 국제적 문학 이라는 미명 아래 수용하기에 이른다.이들 서구의 현대문학 은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 문학이 지니는 폐쇄적 회로에 대한 부정과 대안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져 한흑구, 김병철 등에 의해서 영미의 모더니즘이, 양병식, 김기림 등에 의해서 실존주의 문학이 수용됨과 동시에 조연현, 백철 등에 의해 한국문학의 현대화가 모색된다. 해방 이후 한국의 모든 부분에서 건설의 욕망이 전개된 것처럼 문학에서도 국제적이고 현대적인 문학의 수용과 전개를 필요로 하였으며, 그만큼 서구 전후문학과 맥을 잇고 있는 현대문학 에의 경도는 시대적 조류하고 볼 수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 전쟁 후 10여 년 간의 문학을 일컬으며. 이는 특수한 전쟁 체험을 겪으면서 성장한 전후세대 신인들이 이룩한 문학이다. 전쟁의 파괴력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비인간화, 극한 상황에서 느낀 실존(實存)의 체험, 민족의 고뇌와 인간의 고뇌 등이 나타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본문에서는 전후문학의 전반적인 특성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본론1. 1950년대의 시대 상황1950년대의 문학은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모국어의 자유로운 구사로 자아를 정립하려던 해방 공간의 문학이 6.25 전쟁의 발발로 좌절되어, 전쟁의 격동 속에서 숱한 인명 피해와 비극의 회오리에서 자아와 현실을 투시하여 절규한 문학이다. 해방 전과 해방 후, 또는 해방과 6.25, 그리고 6.25 이후의 경험치를 기저로 한 작가들의 새로운 세계관에 의한 현실 파악과 변혁적인 기법에 의한 소설의 형상화로 50년대의 소설의 격동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현실성과 삶의 개인성이 유리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의 문학적 수용이며, 근대 소설의 극단적 양극화는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를 초래하였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극단적으로 강화해 감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절대화된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는 이념의 모색을 차단하고 그 결과 이념의 부재라는 정신적 공백을 초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선택이 가능했던 해방공간과 달리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신념 차원과 윤리 차원에서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고의 유연성 확보가 어렵게 되고 경직된 지적 풍토가 형성되었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문화권에서 남한과 북한이 이념이 다른 이질적인 문단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1950년대의 시대 상황은 폐허가 된 토양에서 혼란의 소용돌이를 겪는 가운데 이념적 경직화를 초래했고, 그 결과 지적인 사고의 폭이 좁아든 것이다. 당대 사회가 혼란을 동반한 가능성보다는 혼란 그 자체로 점철되는 아노미 사회였다는 의미이다. 이른바 신이 침묵하는 시대 였던 것이다. 전후문학의 후반부는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이 치열하게 이루어진 시대라 할 수 있다. 신의 침묵만이 강조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의 전후문학은 이중적 의미를 띨 수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50년대는 민족적인 신성한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밖으로부터의 충격에 대응하여 안으로부터 폭발하는 역사적 추진력의 자기발견의 시대 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파괴와 살육으로 점철된 한국전쟁은 한계상황을 강요했다. 휴전으로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종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상황은 연속성을 띠고 있다. 전후의 파괴를 복구하고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제반 노력이 집중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복구 의지만으로 전쟁의 상흔이 씻겨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생존권의 위협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일 수 없다. 정신사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정신사적 문제를 문학연구 편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2. 전후세대의 형성과 소설관의 양상한국의 현대 황 아래서 예술가, 특히 소설가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지식인은 오직 불안에 휩싸여 위기 의식을 자신의 사고 체계로 수용할 뿐 어떤 전망을 제시하거나 당시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불안 의식을 서구에서 수용해 올 뿐 한국의 현실에 대해 인간과 사회와 정치적인 면에서 극복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이런 현상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기성 작가나 비평가들이 전쟁이 일어나자 종군작가단에 가입하여 전쟁문학론이나 전쟁문학에 적극적이기는 하나 편협한 이데올로기 문학이나 관념적 전쟁문학만을 생산할 뿐이어서 전후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해방기 세대를 중심으로 한 문협의 지도부는 전후의 폐허를 문학적으로 구원하려는 의식보다는 해방기의 의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전후의 상황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단이나 작단은 전후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바 그것은 대부분 기성 작가의 부진 현상을 보여 주었다. 기성 작가들은 작품을 생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문학을 현실과의 관계에서 리얼리즘을 획득 할 수 없었는데, 이에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이 새로운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식이 전후의 현실에 대응하는 응전력을 갖추고자 했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김동리나 서정주 혹은 조연현보다도 손창섭, 장용학, 김성한, 전봉건 「후반기」동인, 김춘수 등이 전쟁을 보다 자의식적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소설을 검토하는 일은 전후를 통해서 그 상황을 자의식적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소설을 검토하는 일은 전후를 통해서 그 상황을 자의식으로 갖는 세대의 소설을 검토하는 일이 된다.3. 문제의 소재파괴와 혼란의 결과로 빚어진 불모의 토양에서 자라난 전후 문학은 다른 시대의 문학과 달리 이질적인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동안 대이동을 한 문인들은 종군작가단 이라는 집단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는 한국 전후문학의 연구 방향을 모색하는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4. 한국 전후문학 연구의 과제한국 전후문학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데는 당대의 시대상황이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생존의 문제가 첨예한 현실로 제기된 시대에는 문학이 현실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 형상화를 기하기에는 너무나 다급한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었고, 역사의 방향성 모색을 위한 전망이 서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학의 내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전면에 부각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은 당대 문학의 특성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서 연구 방향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당대의 문학에 대한 외적인 제약조건으로 대두된 것은 한국전쟁이다. 우선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이데올로기가 전쟁의 양태로 나타난 것이 한국전쟁의 성격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리전쟁이라는 시각과 자생성을 띤다는 시각으로 나뉘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당대의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연계 지어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는 전후문학 그 자체보다는 그 이후의 문학은 연구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전쟁기의 문학활동 양상에 대한 객관적 조명이 이루어져야 하고,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며, 그 문학적 성과에 대해 문학사적 안목의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의 문학적 의미로 1민족어의 재편성 2휴머니즘의 회복 3 정신사적 과제 등이 논의 항목으로 지적된 것은 연구의 방향과 연관하여 시사하는 바 크다.위에서 본 시사점을 바탕으로 기존의 전후 문학에 대한 연구의 방법론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 포함될 수 있는 검토 항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1 1950년대를 전쟁상황으로 규정하고 출발하는 현상 차원의 논리 전개는 문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문학의 형식 조건과 연관되는 논리를 수립해야 할두 영역의 상보적인 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구체적으로는 소설사회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전후문학, 특히 1950년대 소설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접근은 대체로 내용사회학적 방법이 주로 동원되었다. 전쟁의 참담함을 고발하고 전후의 상흔을 치유하는 이야기라든지, 후방에 미치는 전쟁의 영향 등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구조적 발생론으로 지칭되는 구조사회학적 방법은 적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갈등의 사회학 혹은 아노미의 사회학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장편소설의 부진 현상이 규칙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1950년대의 문학을 병자의 심리학 이라고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의 와중에서 존재의 무의미와 허무의 체험을 다루고 있는 문학은 사회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 시대는 총체성을 지향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 작품에 다수 등장하는 죽음은 심리학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손창섭이라든지 장용학의 경우에 그러한 방법론이 기능적일 것으로 보인다.시학적 분석은 시나 희곡의 영역에서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셋째 문학의 주제적 확대라는 측면의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그 가운데 논의될 수 있는 것으로 휴머니즘 을 들 수 있다. 전쟁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는 휴머니즘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살육의 현장을 다룬 문학이 휴머니즘의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그 휴머니즘이라는 것의 내용이 기실 분명치 않는 점이 있다. 휴머니즘을 막연히 인간성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것은 논리의 깊이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본주의에 대한 인본주의라는 서구식의 대립개념을 상정해야 하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막연한 단계의 휴머니즘이라는 점에서는 그 한계와 의미를 분명히 하면서 우리 문학의 정신사와 연계되는 특징을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