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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통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1.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배경1. 이탈리아의 배경이탈리아의 통일과 발전을 저해하던 중요한 원인은 자유도시가 번영하고, 분립하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중앙에 버티고 있는 교황국가, 그리고 반도의 북부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세력 등 다양한 원인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바로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세력의 축출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은 자연히 오스트리아로 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 쪽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이 국민의식의 고양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2. 독일의 배경30년 전쟁은 연방제후의 분립을 결정지음으로써 독일의 통일을 가장 어려운 과제로 만들어 놓았다. 30년 전쟁은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간의 전쟁이었는데, 독일은 여기에 휩쓸림으로 해서 약 300여개의 연방 국가로 쪼개져 그 힘은 미미한 것이 되었다. 비인 회의의 정통 주의에서 독일 영방이라는 정치적 단체 성을 띤 조직을 만들면서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권력을 위해 분립 주의를 선택한 것은 국민적인 반감과 함께 국민주의 운동의 투쟁 목표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국민들은 불만의 표시를 혁명으로서 구현하였고, 이탈리아에서 있었고 성공했던 독립 전쟁의 승리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 발전을 추구하는 독일 애국 협회의 형성을 유발하였던 것이다.2.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과정1. 이탈리아의 통일비인 회의 이후 오스트리아의 세력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잠식하였고 그결과 조국의 자유와 통일을 염원하던 카르보나리의 비밀결사운동과 마찌니의 청년 이탈리아당도 힘을 쓸수가 없었다. 할수 없이 이탈리아 통일의 과제는 북이탈리아의 사르디나 왕국이 떠 안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르디나 왕국은 시민계급의 성장이 순조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즉위한 에마누엘레 2세는 선왕 알버트의 아들로 반동시대에도 계속 자유주의 헌법을 지키고 카부르라는 유능한 인물을 수상으로 중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카부르는 자유주의자로서 교황령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철도를 건설하여 국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을 알고 동맹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국력이 약한 사르디나가 혼자의 힘으로 대국 오스트리아를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때마침 나폴레옹 3세에 의하여 크림전쟁이 발발하였고 카부르에게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여 어려워진 영국과 프랑스를 곤경에서 구해내었고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적대관게에 있던 프랑스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프롬비에르 조약으로 자신감을 얻은 카부르는 드디어 1859년 4월에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초기에는 동맹군쪽이 우세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사보이와 니이스를 점령한 후 오스트리아와 단독으로 강화하는 배신을 했고 이로 인해 사르디나는 롬바르디아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 전쟁이 사르디나에 의한 이탈리아 전토 통일 운동이라는 사실을 모른고 동맹을 맺었으나 이를 알게 되자 새로이 이탈리아라는 강대국이 탄생되고 프랑스와 국경이 접해있게 되므로 이를 두려워하였고 국내의 구교도 세력이 사르디나의 교황령의 침공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르디나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와 이탈리아인에게 민족통일의 염원을 자극하게 되어 영국의 주선으로 투스카니, 모데나, 파르마 등의 국가가 자진하여 통합되었다. 이리하여 사르디나는 중부 이탈리아의 통일을 달성하였고 나아가 교황령마저 대부분을 취하여 통일의 단계에 다가서게 되었다.이후 통일의 무대는 남부로 옮겨지고 가리발디가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1860년 시실리와 나폴리 왕국을 타도하여 엠마누엘 2세에게 바침으로써 북부의 베네치아와 교황령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었고 마침내 1861년 엠마누엘 2세가 초대왕으로 추대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정식으로 내외에 선언되었다. 그 후 베네치아와 교황령은 1866년과 70년 각각 병합되었다.2. 독일의 통일분열과 혼란 속에 빠져 있던 독일에서는 7월 혁명 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관세 동맹이 결성되어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인 통일이 달성되었다.그러나 2월 혁명 당시 고조되던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실패하고 이후 통일 과업은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통일의 사업을 이끌어 갈 세력이 프러시아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보수적인 전통이 강하여 오히려 민족통일에 방해가 되었고 독일의 경우에는 통일 사업이 열강의 분열정책에 대항하는 성격을 띤 것이어서 군국주의적 색채가 뚜렷하였고 행정능력이 뛰어나고 번영되어 있는 프러시아가 주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러시아의 통일 운동은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관세 동맹인데 1834년 결성되어 프러시아의 영역에서만 실시되던 이 동맹은 이에 가담하는 영방간의 자유교역을 이루었고 동일한 특권이 부여되는 관계로 1842년 까지는 대부분의 독일 영방이 포섭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제적 통일의 영향으로 영방 국가간에 밀접히 협력을 이룰수 있었고 국민주의 운동의 중추세력을 이루고 있던 중산계급의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각 영방간의 경제적 유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프러시아의 지도하에 정치적 통합을 쉽게 이룰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드디어 프러시아는 관세동맹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오스트리아를 제쳐두고 통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운동으로 진행되어 온 독일의 통일운동은 그 최종단계에 이르러 자유주의 사상에 반대하는 융커(지주 귀족)출신의 비스마르크에 의하여 종결을 짓게 되었다.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빌헬름 1세는 군비의 확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국민의 반대여론을 누으기 위하여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비상시국을 명분으로 하고 의회와 헌법을 무시하고 군비의 증강을 우선으로 하는 철혈정책을 강행하였다.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하게 된 것은 군비강화가 완수된 직후였다.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와의 대립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문제를 계기로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유인작전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프러시아는 전쟁을 미리부터 계획한 비스마르크의 외교와 참모총장인 몰트케의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전쟁을 진행시켜 나감으로써 7주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통일에 있어서 불가피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예상하여 빌헬름 1세의 비인 점령의 의사를 만류하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영방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프러시아는 복독일연방을 조직하고 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보오전쟁에서의 프러시아의 승리는 나폴레옹 3세를 크게 당황케 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책략에 걸려 보오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동안에 프러시아는 이미 프랑스의 동부국경을 위협하는 강력한 통일제국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출병의 실패 및 1864년 제 1인터내셔널의 결성에 따른 노동운동의 급속한 고조로 인해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궁지에 빠진 나폴레옹의 유일한 활로는 전쟁에서의 승리밖에 없었다.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를 전쟁에 끌어들였다. 프러시아 측으로 보아서 이 기회에 연방 각국을 대외전에 분기시켜 그 독자적 의식을 노리고 아울러 국민적인 유대를 강화시키는 것이 국가발전에 있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즉각 프랑스의 약점을 드러냈고, 반대로 프러시아의 국민적 단결력이 반영되었다. 개전한지 겨우 1개월만에 세당(Sedan)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는 확정되고, 프러시아군이 프랑스에 침입하자 프랑스에서는 여지까지의 불만이 폭발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나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국방정부도 항전이 불가능해지자 강화를 수락하게 되었다. 이에 독일의 연방제후들은 베르사이유 궁전에 모여 프러시아의 왕인 빌헬름 1세를 독일황제 카이저로 추대하였고 독립제국으로서 선포함과 동시에 헌법을 제정하여 마침내 통일의 목표를 완성하였다.
    사회과학| 2004.04.19| 5페이지| 1,000원| 조회(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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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사상] 19세기의 정치사상
    1. 서론19세기는 혁명의 시대로서 근대 시민 사회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혁명으로 인해 온 유럽에 계몽 사상과 자유주의 이념이 발전했다. 이로 인해 구 시대의 구 체제, 구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다. 법치국가에 의한 중앙집권화가 가능해졌고 민족주의의 발전과 함께 국민 국가 형성의 목표를 설정하였다.이와 같은 시도와 변화에 의해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발생하여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계급화 현상이 일어났다.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인구의 도시로의 이동이 증가하여 도시문제가 생겨나고 사회주의화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훗날 제국주의와의 미묘한 관계 즉 대립적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위와 같은 정치적 혁명뿐만 아니라 정신, 문화적으로도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테면 전쟁 및 대립으로 인한 공동체(연대)의식이 생겼으며 뒤에 민족주의 등으로 발전한다. 문예 사조의 다양성과 독창성으로 인해 수 많은 문학, 철학 분야의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너무 다양하고 독창적, 독자적 이어서 통합적이지는 못했다. 종교계의 변화는 교권이 보다 세속화 되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산업화에 따른 기술적인 진보가 학술적인 체계등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콩트의 실증 사회학같은 실증주의, 즉 “실증적 지식은 경험과 사실에 기인한다.”등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9세기의 대표적 사상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2. 19세기의 정치 사상1. 보수주의보수주의는 현재를 과거의 최종 단계로 보고 현존하는 가치를 중시하며 진보를 반대하는 절대군주, 전통지배 계층의 지배 원리이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즈음하여 자유, 평등의 사상이 널리 퍼지자 이에 반대하는 사상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19세기에 맞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 인식적 요구를 필요로 하였고 프랑수주의의 성향을 잘 나타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정신은 너무 추상적이다.”라고 비판하고 “구체적인 것은 기독교 윤리, 과거의 지배 원리”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전통과 관습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고, 인간성의 판단은 신과 역사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에 대해서는 경험있는 지배층에 의해 유지되는 비 이윤적인 제도라고 하면서 옹호하였다. 그는 개혁 보다는 현상 유지를 강조하였고 식민지 옹호론적 입장을 펴 과거의 지배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또한 주소의 자유주의적인 면을 미약한 주관으로 치부하고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신의 위치를 매우 강조하였다.이러한 보수주의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빈 체제이다. 빈 체제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전쟁이 끝나고 혁명의 불길이 사그라들 무렵 성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옛 사회, 국가, 제도로의 복귀였다. 그들은 보수주의, 정통주의를 앞세워 자유주의와 민족 주의에 반대하였다.이러한 보수주의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보수주의자들은 신의 위치를 최고로 여겼다. 기독교가 융성하던 시대에 그들은 절대 권력을 누리는 등의 특권이 있었기에 그것을 바랬고 정통성을 가장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윤리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도덕과 종교적인 문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정치는 예술과 자연현상 속에서 파악, 실현된다는 자유적, 추상적인 면에 대해서 반대했기 때문이다.그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도덕, 법, 제도 와 종교였다. 즉 복고적인 측면이었던 것이다. 셋째, 이들은 또한 보수주의적 국가론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는 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며 혈연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적인 질서인 법과 사상제도는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주의는 혁명후 한때에 지나지 않았다.2. 자유주의자유주의는 절대 권력의 횡포속에서 시달리던 민중들이 바라던 염원의 사상이었다. 중세의 농노들은 감히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 있었다.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유주의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을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중세를 부정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프랑스 혁명전까지는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했으나 혁명후에 보다 다양해지고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운동은 1848년 빈 체제 붕괴까지 각 국가마다 폭발적으로 발생되었으며 산업혁명, 1*2차 세계대전까지 커다란 사조를 이루었다.자유주의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이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개인주의 이념이다. 이것은 천부인권사상에 의거하여 일어났으며 기존의 사회적, 국가적 집단성에 대한 반대로서 일어난 것이다. 두 번째는 평등주의이다. 이것은 개인적 입장에서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세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는 특권 계층의 횡포와 신분의 차이에 의한 차별성에 대한 반대로서 일어나 개인의 동등한 도덕적인 가치와 지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세 번째는 보편주의로서 인류를 하나의 도덕적인 단일한 집단으로 보고 역사와 가치는 부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세계 시민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네 번째는 개량주의이다. 이것은 정치*경제등 법적인 제도는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자유주의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로 집단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특히 인간적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능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문제에서 개인의 자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이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을 하나의 이성적 존재로서 인정한다고 하는 점은 크게 중요하다. 두 번째는 대표성에 근거하 법, 정치, 경제, 사회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했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에 참여해야하며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투표 제도와 권한의 확대, 정치 참여에 대한 기회 부여, 개혁, 생존권보다 정치적 권리를 중요시 하였다. 실제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를 심하게 억압했었다. 변혁은 개혁에 비해 너무도 약한 변화였다. 개혁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깨지 않고서는 자유의 보장이 힘들었던 것이다. 산업 혁명을 거치고 식민지를 확보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소 줄어들자 이제는 생존권보다는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생존권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참정권의 확대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네 번째 국민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자유와 함께 정치와 교육의 분리를 요구하였다. 국민 국가의 개념은 국민이 국가의 주체라는 데에서 존중은 하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신체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자유도 보장해야 된다는 당연한 기본 전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정치와 교육의 분리 요구는 정치와 교육이 연관성 아니 정치가 교육을 장악하고 있어 제대로 된 교육의 실시는 물론 사고 체계, 비판성 등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후에 민족주의의 형성에 근본적 원인이 되었으며 대중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이할 만한 점은 자유주의를 요구하던 이들이 폭력적 계급 투쟁은 반대하였고 교육기회의 균등을 통한 이성적 측면의 자유를 원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기존의 폐쇄적이고 불합리적이었던 사상과 체계의 모순에 대항한 것으로서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던 시민 사회 발전의 싹이었다.3. 민족주의민족주의는 19세기 식민지 및 분열되어 있던 독일, 이탈리아등에서 통일을 바라며 나온 사상이다. 민족주의는 애국*애족적 정신에서 기인하였고 민족 자결주의, 국민 국가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민족주의의 개념은 현대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애국심과 국민의식의 융합체이자 이에 의한 심리상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발생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자연 발생적 지역민족의 위신, 자존심과 관련하여 민족의 정치적 열망에 의한 발현이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가 있다.첫째는 혈연, 지연, 문화, 언어, 종교라는 구체적인 역사의 동질성의 입장에서 보는 객관설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는 특히 단일 민족이라는 데에서 혈연과 지연의 영향이 크고 미국같은 경우는 문화나 언어의 면이 크게 작용한다. 두 번째는 민족감정과 민족의식이 작용하여 실질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사실에 대한 공통적인 감정과 심리적 요인을 중시하는 주관설이다. 세 번째는 주관설과 객관설을 합한 절충설이다. 이 세가지의 이론 모두 역사적인 공동운명 즉 개인, 사회, 국가적인 면에서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할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이론이지만 분명히 정치 활동의 영역에 포함된다.민족주의는 국가 지상주의와 더불어 다른 민족과의 대립, 투쟁으로 인해 발생되었고 이러한 민족의식의 고양은 후에 보다 심화되어 제국주의화 되기에 이르렀다.민족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절대왕정 등장시기 에서부터 빈 체제붕괴, 즉 1884년 2월 혁명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국가 중심적인 면이 매우 강했으며 국민적 요소는 결여된 상태였다. 제 2기는 베르사유체제 까지의 기간인데 이 시기에는 국민 국가의 권력 증대와 이에 따른 제국주의적 대립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각자 팽창욕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은 서로 대립하며 자신들의 이득을 취했던 것이다. 또, 이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적 성향은 초기까지는 민족주의에서 인정하였고 대중이 민족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으나 산업혁명의 대 불황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보수주의자로 변질되었다. 제 3기는 1차 대전 이후에서 2차 대전까지의 기간인데 탈 식민지화 속에서 민족주의가 들고 일어났는데 신 제국주의, 식민주의 속에서도 폭발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에 대항하여 일어났다는 점에
    사회과학| 2004.04.19| 6페이지| 1,000원| 조회(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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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의 예술 문예
    1. 19세기의 예술, 문예의 상황18세기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인해 사회는 혼란함과 불합리함이 넘쳐흘렀다. 프랑스 혁명의 돌발과 낭만주의의 대두는 18세기 말엽에 일어 났던 거의 동시적인 일이었다. 두 사건의 원인의 연관성을 찾기전에 본질적 특성 한가지를 지적한다면 이는 곧 불합리성의 등장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도 이 불 합리성이 적용되는데 혁명은 오랫동안 바래오던 이성의 시대를 맞아들일 것이라는 점을 믿었다는 잘 알려진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전통주의적*계층적 사회에 의해 지금까지 억압되어왔던 강한 불합리함이 혁명에 의해 고삐가 풀렸으며 낭만주의자들은 이 사건의 전환을 극히 상서롭게 생각했다.19세기 전반은 낭만주의의 전성기였다. 낭만주의는 혁명과 반혁명에 엇갈린 19세기 전반의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개인의 감정과 전통을 중시하여 역사학의 발달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또 낭만주의는 민족 운동을 촉진하는 역할 외에 자유주의가 반대하는 국가주의에 이용당하는 면도 있었다.문학에서는 독일의 고전 문학을 완성시킨 괴테나 실러에게서 낭만주의 문학의 싹을 엿볼 수 있으며 하이에*노발리스 등에서 전성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위고, 영국의 워즈워스*바이런 등도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음악에서는 슈베르트, 슈만, 바그너, 쇼팽 등이 낭만주의 음악을 남겼다. 미술에서는 프랑스의 들라루크아가 색체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회화를 완성하였다.철학에서는 18세기 말 칸트가 독일 관념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는데 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계몽 사상을 극복하였다. 그의 사상은 피히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동적인 발전 개 념을 제시하여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낭만주의는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으나, 리스트의 경제학 등이 그 예이다.19세기 후반에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현실주의적인 경향이 크게 대두 하였다. 문학에서는 낭만적인 아름다움보다 현실 생활과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 내지는 자연주의 사조가 나타났다. 스탕달과 발자크에서 비롯된 프랑스의 사실주의 문학은 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와 여자의 일생을 저술한 모파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디킨스, 독일의 하우프트만을 비롯하여 러시아에서는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나왔고 노르웨이의 입센은 인형의 집을 통하여 여성 해방을 묘사하면서 근대극의 창시자가 되었다.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사실주의적인 작품이 나타났는데, 만종 등 전원 풍경을 즐겨 그린 밀레와 쿠르베가 유명하다. 1870년대에는 주관적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빛과 색채를 중시하는 마네, 모네 등의 인상파가 나타났으며, 세잔, 고흐 등은 주관주의에 반발하여 자연의 개성을 추구하는 후기 인상파로 알려져 있다. 조각은 로댕이 인간의 깊은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다.2. 낭만주의와 사실주의1. 낭만주의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합리주의의 극단성에 반발하여 나온 것으로 이성의 중시보다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해방을 요구했다. 또한 계몽사상의 개성적인 면과 고전주의에 의한 형식적인 면을 깨고 정신적인 자유를 누릴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의 허점은 보수주의로 흐른다는 것과 전체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민중의 의사가 무시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면은 칸트를 시작으로 피히테, 셸링을 거친후 헤겔에 와서 독일의 관념론은 큰 성과를 이루게 된다. 낭만주의에서는 철학보다도 역사 부문에서 더 뚜렷하게 그 성과를 찾아볼 수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낭만주의적, 국민주의적 사조의 영향으로 역사에 대한 연구 의욕이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연구는 주로 중세에 대한 동경에 의해 이루어 졌으므로 중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바꾸는데 영향을 미쳤다. 니이버의 [로마사], 랑케의 [세계사]등이 대표적이다.과학이 발전했던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역사학의 세기가 된 이때에는 사물에 대해 역사적인 면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생겨 났다. 특히 법학과 경제학 분야에서의 역사학이 대표적이다. 과학적 역사학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면에서도 낭만주의의 경향이 나타났다. 18세기 독일 문학에서 이미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고 괴테의 [파우스트] 나 쉴러의 [빌헬름 텔] 에서는 이러한 면이 더욱 뚜렸하였다. 하이네나 노발리스등의 활동은 시 분야에서 매우 활발했다. 각 국가별로 낭만 주의에 의한 문학적 활동을 살펴볼 때 가장 주도적이었던 나라는 바로 영국과 프랑스였다. 이 두나라는 수 많은 면에서 낭만 주의의 성향과 활동이 뛰어났던 나라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빅토르 위고라는 대 문호가 있었는데 그는 [스탈 부인] , [레 미 제 라 블] , [샤토부리앙] 같은 유명한 낭만주의 문학을 이루어 내었다. 이에 비해 영국의 낭만 문학은 더욱 화려하였다. 특히 시의 분야에서 수 많은 시인들이 배출 되었는데 바이런, 키이츠, 쉘리, 워즈 워드 등이 대표적이다.음악에 있어서의 낭만 주의 경향은 고전 음악을 완성한 베토벤에서 시작된다. 낭만파 음악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전기의 음악가들을 살펴 보면 시와 음악을 결합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예술 가곡을 확립한 슈베르트, 독일 국민 오페라를 수립한 선구자이고 라는 오페라를 작곡한 베버, 신선한 리듬과 색채감이 풍부한 화성법으로 매우 품위 있는 작품을 많이 작곡한 작곡가이자 평론가인 슈만 등과 멘델스 존, 쇼팽은 피아노 음악에서 끊임없이 표현의 가능성을 발전시켰고, 베를리어즈는 표제 음악을, 리스트는 교향시를 창시하여 표제 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유로운 감정주의 같은 새로운 경향에 영향을 받은 낭만파 음악은 초기의 청순했던 분위기 대신 난숙한 관능의 체취, 자아의식의 태동, 새로움의 탐구를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모든 음악적 양상들이 복잡하고 방대해져서, 복잡한 반음계적 화성과 관현악곡의 악기 편성 확대, 음악과 음악 외적인 요소(문학, 미술)와의 결합이 심화된다. 바그너는 악극을 확립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 분야를 융합한 총체 예술을 추구하였고, 브루크너와 말러는 교향곡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볼프와 R.슈트라우스는 예술 가곡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비제, 베르디, 푸치니는 낭만파 가극의 정점을 이루었다. 신 고전파로 일컬어지는 브람스는 지나친 표제적 경향을 피하고, 고전적인 형식을 답습하면서 낭만파 정신을 살리려 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독특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교향곡과 무용곡을 작곡하였다. 바그너의 반음계주의를 비롯한 이 시기의 모든 음악적 발전은 현대을 향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대 작곡가로 , , 등 30여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바그너는 음악을 극적인 내용과 결합시킨 악극을 창시하였으며 , , 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지닌 브람스는 신 고전주의를 주장했으며, , 등의 작품이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특유의 민족적인 색채를 독일의 낭만주의적인 기법으로 작곡했으며, 피아노 협주곡 내림 나단조, 교향곡 , 서곡 , 발레 모음곡 등의 작품이 있다.미술의 분야를 살펴보면 대표적인 작가는 드라크르와가 낭만 주의 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어 제재의 신기성과 색체의 사용으로 다른 시대와 구별되고 있다.2. 사실 주의낭만주의의 사조는 1830년대를 경유하여 점점 퇴색하여 갔고, 낭만주의의 감정적이고 즉흥적이었던 것에 반대하여 점차 냉정한 현실주의, 자연 주의가 19세기의 중엽에 등장하여 이 시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낭만주의의 공상적, 회고적 경향에 대한 반대이자 과학의 발전과 산업 혁명의 영향에 따른 근대 문화의 불가피한 발전 과정이었던 것이다. 낭만주의 사상의 대표 격인 독일의 정신 철학이 지극히 사변적 경향을 띄고 있는데 비해서, 자연주의에서는 실증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꽁트의 사회학에서 그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종래의 이상적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경험한 사실 자체만을 인정하여 그것을 통하여 사회현상에 대한 일정한 법칙이 성립됨을 강조하여, 사회과학의 연구와 역사의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주의의 경향은 영국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경험철학을 발전시켜 도덕 및 입법의 기본원리로서 공리를 내세운 벤담과 절충적인 밀에 의하여 대표되고 있었다. 공리주의는 영국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영국 국민들은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방임주의라는 미명하에 무절제한 자유 경쟁과 개인 이윤추구 현상이 대두되자,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윤리 사상이 곧 공리주의이다. 공리주의 윤리설에서 제시되는 인간관은,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선한 행위를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쾌락과 행복을 주는 공리성에서 찾고 있는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행위 원칙을 도출해냈다.
    사회과학| 2004.04.19| 5페이지| 1,000원| 조회(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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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세계대전 후의 세계정세
    1. 제 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의 세계질서1. 제 1차 대전의 발생제국주의에 의해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의 식민지 재분할론을 중심으로 한 영국과 독일의 이해관계가 주축이 되어 알자스*로렌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발칸에서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결 등 전쟁의 위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결정적인 전쟁의 요인은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청년에 의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의 암살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양국의 문제 뒤에는 독일과 러시아라는 배후 세력이 있었던 관계로 국지적인 해결은 기대할 수 없었다.오스트리아가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즉시 세르비아의 위기를 고려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두나라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하게 되자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와의 개전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작전으로 인해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자 이를 구실로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고 일본 또한 영일 동맹을 내세워 참전했다.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전쟁 초기의 중립 정책을 버리고 연합군에 가담했다. 이에 유럽의 대부분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는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반전운동은 거의 붕괴되었다.독일 군은 재빨리 서부에서 공격을 가하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범, 프랑스의 영내로의 돌입에 성공하지만 마르느 하반에서 막혀 파리 점령을 눈 앞에 두고 전쟁은 장기화 되었다. 동부에서는 러시아가 우세하였으나 힌덴브르크장군에 의한 탄넨부르크의 회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전세는 교착되었다. 발칸 반도에서는 터키와 불가리아 등 독일측이 우세하여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점령하였고, 오스트리아 군은 1915년 이탈리아에 침입하였다.하지만 해군력에 있어서는 영국 함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독일 함대의 활동을 저지하여 해외 식민지를 탈취하는 한편 독일에 대한 경제 봉쇄를 강행하였다. 일본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령이었던 산동반도와 태평양의 독일령을 점령하였다. 독일은 영국의 경제 봉쇄로 식량과 일부 중요 물품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까닭에 장기화된 전쟁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장기화가 계속 될 수록 독일은 점차 불리해졌고 마침내 전쟁에서 약점을 드러내었다. 베르당 요새를 공격했으나 어마어마한 사상자만 내고 실패했다. 전쟁에서의 독가스와 전차의 등장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90만, 독일은 60만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비행기도 실전에 투입되었고 전쟁은 장기화와 함께 대규모화되어 어느 나라나 그 희생은 실로 엄청났다.장기화된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바로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중립을 지키고 교전 중인 나라들을 오가며 물자를 공급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영국의 경제 봉쇄를 풀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감행하였고 미국의 피해가 속출하자 미국은 1917년 4월 마침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미국은 군사적인 참전보다는 경제적인 원조를 통하여 참전한 것으로 그 위력을 보였고 여기에서 미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최고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국제적 발언권이 커졌다.러시아에서는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나 단독으로 강화를 하였고 이에 여력이 생긴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미 전세는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연합군에 반격 당하여 전쟁이 끝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불가리아, 터키, 오스트리아가 각각 화평을 청하였고 전의를 상실한 독일도 휴전을 제의했으나 국내의 반란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의 휴전 조건을 수락한다. 이리하여 30여국의 참전으로 3,700만 명의 사상자와 3,300억불이라는 엄청난 재화를 소모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2. 제 1차 대전 후의 세계 질서1919년 1월 연합국의 대표들은 강화조약과 전후 문제의 처리를 위하여 파리 강화 회의를 열게 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일찍이 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 원칙으로서 그의 연두교서에서 밝힌 바 있는 ‘14개조안’이 강화 회의의 원칙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비밀외교의 철폐, 해양의 자유, 경제 장벽의 제거, 군비 축소,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영토 처리, 국제 평화 기국의 설치, 그리고 무병합*무배상 등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강화조약의 조문으로는 부적절했다. 특히 추상적인 면 때문에 각국에서 내세우는 제각기 다른 이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당초 이것이 용납될 수 없었고 영*프간에도 프랑스가 독일에게 보다 가혹한 보복으로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데 대하여 영국은 세력 균형의 유지를 위하여 그 우세를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영구적인 평화라는 기대와 달리 영*프간의 이해가 절충된 안건이 마련되었다. 독일이 1919년 6월 수락하여 성립하게 된 베르사이유 조약이 바로 이것이다. 독일은 그들의 식민지의 권익뿐만 아니라 본토의 중요 공업 지역을 포함한 약 1/6의 땅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군비의 제한과 함께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이후 독일 이외의 패전국도 이와 비슷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쌍 제르망 조약, 불가리아에 대한 뉴일리 조약, 헝가리에 대한 트리아농 조약, 터키에 대한 세에브르 조약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패전국과 러시아의 영토였던 동유럽에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새로운 독립국이 탄생되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오직 패전국이 지배하던 지역에 한하여 허용되었고 이들 또한 영*프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으며 소련과 독일의 재기를 막는 벽과 같은 구실로서 만든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새로운 질서를 ‘베르사이유 체제’라고 말한다.하지만 이것은 패전국 독일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였으나 반면에 그 해외 식민지와 이권을 국제연맹이라는 승전국의 모임에 통치하에 넣어 전승국끼리 분배하였고, 신생 소련의 이해가 묵살되었다는 점에서 수많은 결점과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국제연맹은 전쟁의 발발을 막으려는 취지 라지만 어떠한 강제 조치도 갖지 못하는 능력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글러 먹은 얘기였다.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이미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2. 제 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의 세계질서1.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제1차 대전 후의 세계는 베르사이유 체제에 의하여 한동안 평화유지와 국제협조의 분위기가 이루어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발족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진 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제국에서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근대화 운동을 추진, 독립국의 경우는 낡은 전제정치의 혁신*불평등조약의 철폐를 외쳤고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어디까지나 전승국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세계경제의 변화였다. 1929년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공황이 각국에 큰 타격을 주게되고 이로 인해 평화의 분위기는 깨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기반이 약하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전체주의에 입각한 독재정치를 수립하고 침략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미, 영, 프, 소비에트 연방과 힘을 합쳐 이에 맞서게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시작되었다.독일*이탈리아 간의 성립을 본 히틀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것을 시작으로 침략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어서 체코를 협박하여 동유럽 진출을 적극화하였다. 이에 소련과 프랑스의 군사동맹에 참가했던 체코는 즉시 대응을 하였고 전면전의 기운이 맴돌았으나 영*프의 타협책으로 뮌헨회담을 열었고 이로 인해 체코는 희생당하였으며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며 협상이 이루어졌다.하지만 히틀러는 얼마후 뮌헨의 약속을 깨고 체코를 손에 넣었으며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이에 영*프는 독일에 선전하여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진공은 누구도 막기 힘든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개입과 프랑스의 점령등으로 인해 마침내 독일, 이탈리아는 유럽의 많은 영역을 차지하였고 이들의 공격대상은 영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을 쉽게 점령할 수 없게 되자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의 영역을 침범하였다. 이에 소련은 산업시설의 대부분을 후방으로 옮기고 강력한 항전체제를 갖추는 한편 영국과도 동맹을 채결하고 미국으로부터도 막대한 군수물자를 공급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는 처칠과 루즈벨트가 만나 대서양헌자을 선언하고 나찌스 타도의 목적과 전후 세계의 재건방침을 명백히 하였다.
    사회과학| 2004.04.19| 5페이지| 1,000원| 조회(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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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프랑스 혁명과 빈 체제 평가A좋아요
    1. 프랑스 혁명1. 발생 배경프랑스 혁명 직전,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오늘날 우리가 구체제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당시 군주는 절대 권력을 향유하였는데 교회는 그를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였고 그 대가로 자신의 종교를 신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유지시켜주었다. 절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군주는 영주의 권위와 성직자의 정치적 영향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그러나 군주는 그들의 사회적 우위는 유지시켜주었다. 즉 구체제는 특권 사회였다.프랑스는 이 당시 부활을 꾀하는 귀족 엘리트와 18세기 대중정치 운동으로부터 중앙 권력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상태였다. 이럴때는 유능한 절대군주만이 성공적인 국가 통치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착하기는 했으나 둔하고 무능한 군주였다. 그는 즉위 당시 튀르고라는 유능한 인물을 재무 장관으로 삼아 국가 통치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나 2년후 그를 해임해 버린후 국가 정책은 갈팡질팡하더니 결국 국왕의 통제를 벗어나 신하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다.프랑스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요인은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왕이 행정의 중앙 집권화를 계속 추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원래 루이 14세가 실시했던 것이지만, 그는 이것을 유지하기 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신분들 사이에, 그리고 각 신분 내부에 점차 자라나는 적대감이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제 1신분이라고 불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긴장이 발생했다. 교회의 영지내에서의 수입과 십일조에서 나오는 수입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이 수입은 성직자들 사이에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 이러자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내는 농민들에게 까지 분노를 사게 되었다. 프랑스 제 2신분인 귀족 사이에도 분열이 있었다. 바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된 관복 귀족과 대대로 귀족인 혈통 귀족과의 싸움이었다. 혈통 귀족은 1781년 최소한 4대까지 귀족이었던 사람에게만 장교직을 매매하도귀족에게 보인 혈통 귀족의 경멸은 가벼운 것이었다. 도시 중간 계급은 극히 오만한 귀족들의 태도를 감수해야 했다.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있던 이들 제 3신분 계급은 동질적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중 돈 많고 야심있는 부류는 관직 매입 또는 부유한 금융가의 딸과 가난한 귀족 아들의 결혼 등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렸다. 하지만 점차 귀족들의 반대와 차별이 심해졌고 이들은 재산을 모으고 자부심이 강해지자 이러한 차별에 분노했다.귀족에 대한 도시 부르조아지의 분노에 비해 농민들이 귀족 영주에 대해 느끼는 증오심은 한층 더 큰 것이었다. 영주들이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 및 시설 사용료는 농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다. 농민들이 불만을 갖게 된 원천은 이러한 장원제적 유습만이 아니었다. 인클로저에 의하여 농민들의 방목권을 박탈당하자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이처럼 사회적 적대는 긴장의 고조에 기여했고 결국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긴장은 혁명의 세 번째 요인, 즉 행정적 낭비와 부조리 때문에 계속 심화된 재정위기의 여파로 한층 높아졌다. 이러한 재정위기는 가격 상승으로 인한 구매력의 감소, 흉작 등으로 인해 가정에서는 빵을 사기 위해 수입의 80%이상을 써야만 했다. 이러한 가운데 실업률이 50%에 이르고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절망은 분노를 일으켜 이들을 잠재적 혁명가로 만들었다.2.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왕의 주요 장관들이 재정 개혁을 시도하자 귀족들은 반대와 함께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하였으며 세 신분의 대표회인 전국 신분화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신분회의가 개최되기는 하였으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왕의 태도가 제 3신분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제 3신분 대표들은 독자적인 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1789년 6월 20일의 이 테니스장에서 한 선서야말로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시작이었다.프랑스 혁명은 3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제 1단계는 1789년 6월부터 1792년 8월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이 기간은 프랑스의 운명이 국민회의의 손 안에 있었고 대체적으89년 6월말에 왕이 반동적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제 3신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원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확보하기위해 바스티유로 향했다. 바스티유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들은 파리에 혁명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1789년 두 번째로 일어난 봉기는 농촌에서 발생했고 이해 10월에 발생한 세 번째 대중 봉기는 빵의 가격 상승과 국왕의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발생했다. 왕은 이들에게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그러나 이러한 중간 계급의 승리는 도전에 직면했고 1792년 여름, 혁명은 제 2단계로 진입했다. 이 단계에서는 온건파가 몰락하고 급진 공화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평민들은 물가의 상승, 지도력이 부족한 지도자, 외국에서의 특권과 절대주의 파괴 혁명 등에 의해 실망만이 가중되었다.혁명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사건에 관심을 표명한 최초의 유럽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었다. 이들은 필니츠 선언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전쟁을 하게되었고 프랑스군은 크게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국민 공회의 대표를 보통 선거로 선출하는 선거를 요구했다. 그리고 약식 재판을 통한 9월 학살을 일으켰다. 이들은 또한 루이 16세를 처형했으며 국내 개혁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의 일을 했다. 국민 공회의 지도부는 프랑스 국내의 이러한 정치 혁명을 수행하는가 하면, 매우 성공적으로 군대를 재조직하기도 했다.프랑스 주위의 나라들이 단합하여 프랑스를 위협했고 프랑스는 이에 군대를 조직하여 맞섰고 이들 동맹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그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공포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공포 정치 기간은 프랑스에서 무자비한 독재가 판을 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밖으로는 외국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던 구국 위원회는 국내에서는 우익과 좌익 양측의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구국 위원회는 프랑스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구국 위원회는 평민들을 채택했고 이 헌법에 의해 입법부에서 선출되어 5명으로 구성된 총통부에 행정권이 부여되었다. 총통부의 지배는 역사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치유할 수 없었고 이들은 결국 젊고 유능한 장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3. 나폴레옹의 등장보나파르트는 1793년 툴롱 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24살의 나이로 준장이 되었다. 총통부의 신임을 받은 그는 이후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스트리아를 물러나게 했으나 영국에게 패배하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총통부로부터 요청이 왔고 대중적인 신망을 얻고 있던 그는 시에예스와 함께 혁명기의 종말을 공표했다.나폴레옹은 코르시카 태생으로 출세 제일주의자로서 가능한 것은 모두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로서 프랑스의 군사학교에서 교육 받았으며 자신과 프랑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799~1804년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은 제 1집정관으로서 통치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독재자나 다름없었다. 새로 헌법을 만드는데 국민 투표를 제도화하여 찬성을 얻어내었다.나폴레옹은 유명무실한 입법부를 만들고 행정조직을 중앙 집권화하여 질서 정연하고 공정한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악성 인플레이션을 줄였다. 나폴레옹의 업적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 및 법의 개혁을 완성한 일이다. 이러한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는 과거 정치 경력은 묻지 않고 최고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등용했다.나폴레옹은 교황과 협약을 맺어 화해하였고 균형정책을 통하여 자신의 인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1804년 그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의관을 쓰게 되었고 온 국민들은 모두 환영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지켜보던 주의 나라들은 반 프랑스 동맹을 맺었으나 영국마저 프랑스와 휴전하고 대부분의 영토(식민지)를 프랑스에게 돌려주었다.나폴레옹의 지배 아래에서 중부 유럽의 영토는 혁명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행정 재조직으로 나타났으며 한편으로는 프랑스 혁명이 주요 평등주의적 개혁을 강요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나폴레옹이 이타주의적 동기에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급진적 변화를 시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광대한 영토를 방어하는데 효과적인 행정과 군대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합리적으로 거둬들이고 지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과감한 정책, 대륙체제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대륙체제는 나폴레옹이 저지른 첫 번째 중대한 실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은 여기서 계속된다. 두 번째 원인은 끊임없이 높아져가는 야심과 자부심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을 본 뜬 통합된 유럽을 꿈꾸었던 것이다.러시아에서 참패하기 전까지 나폴레옹의 군대는 연전연승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퇴각이 있은 이후로 반 나폴레옹 세력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황제를 무찌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뭉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공격을 재개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대패했고 나폴레옹은 퇴위되었으며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1년이 채 되지않아 그는 다시 황제에 오를 수 있었으나 연합군의 재빠른 저지로 다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쓸쓸히 여생을 마쳤다.4.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유산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시대가 서양 문명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에 형성되어 19*20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의 역사에 투영된 사상과 제도를 추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소중한 관념이었고 개혁의 바탕이기도 했다. 평등 역시 자유와 마찬가지였다.마지막으로 민족 의식, 민족적 자부심은 새롭게 획득한 자유를 공격하는 적들을 시민군의 힘으로 몰아냈을 때 프랑스인들의 마음속에서 싹 텄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인상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의 행정, 법적 개혁은 그가 몰락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저지대 지방,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에서 존속했다. 나폴레옹의 치세에 도입되었던 중앙 집권적 관료다.
    사회과학| 2004.04.19| 6페이지| 1,000원| 조회(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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