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의현대미술에 관하여 연구목 차Ⅰ. 서론 ..........1Ⅱ.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 ............21. 1970년대의 화가들 ....22. 모노크롬 회화와 그 극복 ............4Ⅲ. 형식논리의 극대화 .....71. 시대의 조류 ...............72. 형식적 모더니즘 .........83. 환원의 미학 ..............10Ⅳ. 결론 ..........13참고문헌 ...14Ⅰ. 서론1970년대의 한국의 미술을 이해하기 앞서 우리는 1960년대의 서 마련했다. 전국을 무대로한 대단위 초대전 형식인 현대미술제가 일리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초의 일이다. 1973년 대구현대미술제를 시발로, 서울, 광주, 부산, 춘천, 전주 등지에서 현대미술제가 열렸다. 또 한편 1970년대 초반 주목할 만한 현상은 한국일보가 개최한 한국미술대상전이 열림으로써 민전시대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국전이라는 등용의 관문에만 의존해야 했던 신인의 등장이 민전이란 보다 자유롭고 진취적인 전시기구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1970년대 미술의 전개에 하나의 커다란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자극되어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가 각각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을 개최함으로써 화려한 민전시대를 맞고 있다.1970년대 미술의 또 하나 두드러진 현상으로는 잇따른 원로작가들의 작고와 과거 미술에 대한 재조명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허백련, 노숭현, 김은호, 변관식, 박승무등 이른바 6대작가로 지칭되는 동양화의 노장들이 잇따라 타계하고 권진규, 김환기, 박래현, 도상봉등 대표적인 작가들 역시 타계했다. 동양화단의 6대가의 타계는 이들로 대표되었던 한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해방 후 세대에 의해 화단의 구조가 재편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유독 많은 회고전이 열렸다는 것은 작가를 재평가하고 미술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그 중요성을 간파하게 했다. 이봉상 유작전(1970), 정규 유작전(1971), 이중섭 회고전(1972), 권진규 1주기전(1974), 이종우 회고전(1974), 변관식 회고전(1975), 박수근 10주기전(1975), 김환기 회고전(1975), 이인성 유작전(1977), 한국 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1978) 등이 1970년대에 열린 대표적인 회고전으로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이중섭, 박수근, 이상범, 변관식의 회고전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불우한 삶을 살다간 천재 화가 이중섭에 대한 연민과 향토.그룹의 일련의 기획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 현실과 실현 탈관념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의 구조적 문제와 이에 동반된 물질의 실험이란 점을 감안할 때 1970년 전반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실험의 열기와 방법의 적극성이 두드러졌던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반기의 실험적 성격이 매재의 확대를 통한 구조적 변혁에 주로 맥락되어 있는 반면, 후반기는 내면적 구조의 문제로 환원되는 검증작업이 심화되었던 시대로 볼 수 있다.미술개념의 확대는 종래의 형식적 틀인 회화와 조각을 벗어나 단순히 평면과 입체라는 구조적 현상만으로 명명되는 탈회화화 탈조각화의 기류로 발전되었다. 흙, 종이, 천, 물, 나무, 낙엽, 돌횟가루, 로프, 시멘트관과 같은 가변적이고 원초적인 매재의 적극적인 원용과, 공간과 시간, 장소와 환경의 문제, 상황 속에서의 미술의 위상 등 본질적인 물음들이 제기되었다. 메일 아트와 야외공간에서의 작업과 퍼포먼스등이 활발하게 진작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1970년대 후반기는 회화의 평면화 문제가 더욱 심화되면서 모노크롬 회화가 크게 부상된 시대로 특징된다. 이미 1970년대 전반기에서 시도된 개념화작업은 그리지 않는 회화로서의 방법적 특징을 확대시키는 한편, 평면의 구조적 문제와 곁들여 획일적 모노크롬의 유행 현상을 진작시키기에 이르고 있다. 모노크롬 회화의 유행 현상은 국제적으로 미니멀리즘과 맞물리면서 1970년대 후반 미술의 표층을 강하게 지배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모노크롬회화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기린의 흑색 모노크롬 작품의 개인전에 이어 1975년 일본 도쿄 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전(박서보, 권영우, 허황, 이동엽, 서승원) 등에서 촉발되어 1970년대 후반기 현대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 부상되기에 이르렀다. 모노크롬 회화 가운데서도 유독 백색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금욕주의적인 한국의 정신주의적 성향과 맞물리면서 집단적 개성으로서 독특한 인식을 이끌어냈다. 국제적으로 파상 높았덕호, 주태석, 지석철)으로 비근한 일상의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대상을 극도의 사실적 수법으로 묘사해 놓은 이른바 차가운 리얼리즘의 경향을 추구해 준 그룹이었다. 그 방법적 문맥으로 본다면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포토리얼리즘에 연계되어 있으며 이들의 의식은 여전히 개념적인 작업의 범주에 머물고 있으나, 이에서 촉발된 현실인식은 점차 수단으로서의 리얼리즘을 넘어 비판적 리얼리즘으로서의 이념의 길을 열게 했다. '사실과 현실'에 이어 1981년에 출범한 '시각의 메시지'(고영훈, 이석주, 이승하. 조상현)도 하이퍼리얼리즘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다.동아미술제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이후 출범한 중앙미술대전에서도 이같은 신형상이 압도적인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종래의 묘사적 리얼리즘과는 그 맥을 달리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앞의 책, p225Ⅲ. 형식논리의 극대화1. 시대의 조류우리가 70년대의 미술 가운데 응시할 문제는 75 ∼ 80년 사이의 미술동향이다. 왜 하필이면 75년부터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이 해부터 한국현대미술의 집단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둘째는 모노크롬 회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셋째는 그 결과「평민의 회화 화」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기에 있어 주의를 모으는 것은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즘이라 칭하는 미적 모델이 태동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리라 본다. 서구의 것과도 다르고 일본의 것과도 다른 특수한 회화형태가 출현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70년대 중반 이후의 미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70년대 후반의 미술의 명세표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남긴 문제들을 알아보고자 한다.70년대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가르는 척도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특정 작가들의 양식 적 집단화속에서 그 직접적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아방가르드 협회」나「ST 미술학회」등이 제기한 실험적 성향의 미술이 과했지만 매년 커미셔너제도를 도입하여 커미셔너에게 작가선정, 테마설정, 진행 등 전시의 제반문제를 모두 일임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작가의 성향을 요구했다. 그에 반하여 대규모로 열렸던 「서울현대미술제」는 유망한 신진들을 선발하여 후진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전국 규모의 것이었다. 각 도를 중심으로 열린 지방현대미술제의 경우는 현대미술의 전국적 확산을 기하고 아울러 서울집중의 문화구도를 지역에 분산시키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몇 번의 전시를 열대가 지방 특유 보수의 벽에 부딪쳐 조기에 종료되고 말았다.요약하자면 「에꼴드 서울」이 집약의 성격을 띠었다면 「서울현대미술제」는 발굴을, 그리고 지방현대미술제는 확산을 띠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미술운동이 상당히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구도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계획이 모두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발상과 달리 인간적인 연대의식을 조장하는 대의기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70년대 말에 이르면 특정 양상의 보급창구로 변질되었지만 이 단체들의 창작의 풍토를 진작시키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을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토착화에도 일정 부분 생산적 성과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개성의 출현」이라는 불길한 조짐은 이미 이러한 단체들이 만들어질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짐들은 당시의 미적 경향을 뒷받침한 이론의 행적들을 더듬어볼 때 좀 더 자세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오늘의 회화는 그 고유의 방법에 의해 역시 고유의 평민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평면으로 되돌아왔다고 해서 평면이 곧 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화가 회화에로 환원되었을 때 비로소 회화는 진정한 평면을 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회화가 회화에로 환원」된다는 것은 「평면의 회화적 텍스처화」, 즉 색채 또는 형상이 캔버스와 꼭 같은 차원에서의 그리고 그 속에 통합된 실재성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70년대 미술은 무표정, 무감각,무감동한 공어진다.
1970년대 페미니즘 미술의영향력에 관한 연구.목 차Ⅰ. 서론Ⅱ. 본론ⅰ. 性(성)과 페미니즘 미술.ⅱ. 사회와 페미니즘 미술.Ⅲ. 결론Ⅳ. 참고 문헌Ⅰ. 서론.20세기 초 참정권을 쟁취하기까지 펼쳐진 서구 여성운동을 페미니즘의 '제1차 물결'이라 한다면, 1960년대 이후 새롭게 활성화한 여성해방운동을 페미니즘의 '제 2차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2차 물결로 페미니즘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현상 또는 문화운동 가운데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제2차 물결이 일어나게 된 큰 요인은 현대 여성의 경제적 지위 변화를 사회의 인식과 관습이 좇아가지 못한 데서 비롯된 갈등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영향이다.이주헌, 『미술로 보는 20세기』, 학고재, 1998, p. 248.1970년대 여성운동의 부상은 여성미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페미니스트가 미술 분야에 개입한 가장 직접적인 효과 중 하나는 매체, 영화, 텔레비전 못지않게 문화적인 생산과 미술에서의 재현이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이라는 점을 우리들에게 환기시킨 점이다.2) 로지카 파커, 그리젤다 폴록,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이 영철, 목 천균, 시각과 언어, 1995, p. 204.또, 1970년대의 페미니즘 미술에서 급부상한 작품의 주제는 다름 아닌 '성'에 관한 것이었다. 1970년 페미니즘 미술운동이 일어난 이후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서로 접촉하여 유지하면서 그들의 육체와 성적인 느낌들을 재고하여 이를 미술에 표현해 왔다." 1970년대 중반에 조안 제멜과 한나 윌크 같은 페미니즘미술가들은 여성적 성에 관한 새로운 표현들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으며 그들이 보았던 과거 여성들의 수동적이고 이상화된 이미지들은 남성적 관점에서 재현된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T.구마 피터슨, P. 매튜스, 『페미니즘 미술의 이해』, 이 수경, 시각과 언어, 1994, p .52.그리고, 여성 운동은 60년대 팝아트의 남성 우월주의와는 성격이 서 아이러닉하게도 보다 남성적임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작가들의 작품은 낭만적인 향수에 젖어 있기 보다는 대담하고 힘센 구성력을 지닐 뿐만 아니라 가볍고 유연한 형식을 구사하는 대신 견고하고 무게 있는 형식을 지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함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명을 받지 못했던 까닭은 부당한 미술사적 경시풍조 때문이었다고 코미니는 결론을 내린다.이보다 더 충격적인 분석은 1973년에 발표된 캐롤 던칸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회화에 나타난 남성 우월주의와 그 예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뉴저지 램마포 대학의 미술사 교수인 던칸이 분석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여성을 소재로 한 회화, 그 중에서도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그리고 기타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작품이다. 이 당시의 작가들은 상징주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있었지만, 그들 역시 성적인 관계를 오로지 남성적 경험의 관점에 기초하여 바라보았던 이전 세대의 가정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분석한다.던칸에 따르면, 그들의 작품은 무기력한 여성적 이미지를 늘어놓거나 창백한 누드를 그리며 종종 그 누드를 작가 또는 감상자들에게 '피동적이고 농염하게' 보이게 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의 성적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입증하기 위해, 또 부르주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취해졌다. 20세기 초의 미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와 같은 남성우월주의와 성적 지배는 "여성을 능률적으로 집단에서 소외시켰으며, 이와 같은 소외를 주도한 것은 아방가르드 작가들" 이었다고 던칸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많은 여류 작가들은 다시금 따돌림을 당하고 제거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문화적 창조는 프로이트적 용법에 따르면, 남성적 리비도의 에너지로서 기능한다는 이념에 입각하여, 또는 여성을 자연과 동일시하는 낡은 관념이 부활됨으로써, 마지막으로 여성은 "인간문화를 구축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비도덕적인 열정과 본능의 창는 것은 아니다. 감상자는 한사람의 초상, 즉 일반화된 남성의 육체가 아니라 필립 골럽이라는 특정 인물의 육체와 대면하는 것이다. 실비아 슬레이는 미술에서 여성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을 비판하려는 시도로 벌거벗은 남자를 그리는 일군의 현대의 여성미술가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종래의 모티프만 바꾸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산출한다고 생각하는 한, 남성의 지배를 대체 할 수 없다.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남성적 예술관의 지배에 맞서 여성의신체를 이용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방식이다.G. 폴록, R. 파커, p. 162-165.또, '신체 미술( body art)'은 여성의 신체를 남성만을 위해 남성이 만들어온 의미에서 해방시키고 여성을위해 여성의 신체를 되찾으려는 시도로서 여성의 신체, 그것도 대개는 미술가 자신의 몸을 이용한다.미술 작업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해 보다 은유적으로 탐구해온 인물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주디 시카고이다. 그녀는 여성의 성적, 신체적인 모든 기능을 나타내는 노골적인 이미지를 사용해 여성의 성을 탐구한다. 1960년대 중반 시카고는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상징적 논제들 보다 형식적 논제들을 다룬 대형 미니멀리즘 조각 작품을 발표했었다. 1973년경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나의 느낌을 나타낸 명확한 추상이미지들"을 전개시켰다.G. 폴록, R. 파커, p.166.페미니즘 운동의 표본처럼 간주되어지고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그것은 다. 이 작품은 삼각형의 형태로 가톨릭의 성찬용 식탁을 상징하고 있다. 접시에 그려진 혹은 붙여진 서른 아홉 개의 형태들은 역사적으로 여성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서른 아홉 명의 여인들을 의미하고 있는데 각각의 자리는 그 여인들을 찬양하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 그것은 피부색이나 성별 또는 신분 등 모든 사회적 측면으로 보았을 때 신원 추정이 불가한 어떤 정체불명의 여인들을 위해 지어 놓은 사당일 뿐이며, 아무런 정치성도 띠고 있지 않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페미니즘 미술 현황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다."우리 사회에서도「여성신장」이니,「여성상위」니 하는 따위의 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략) 그것이 가시화되기에는 여전히 요원한 일인 것 같다. 페미니즘이 단순한 여성상위의 연구가 아니라 정치, 사회적 배경 이해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가시화의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을 것 같다."우리 여성 미술의 첫 모임으로 「표현」그룹 (회원 노정란, 윤효준, 이은산, 최예심, 김명희, 유연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발족하여 20여회 그룹전을 꾸며온 이 그룹은 학연이나 지연으로 모인 여느 그룹과는 달리, 방보기, 집, 처용가, 등 공동 테마를 개발하여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주고 받고 헝겊, 실, 종이 등 비예술적 재료를 사용하여 여성적 표현을 실험해왔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역사적 통찰이 깊이 있게 뿌리내리지는 못했다.김난영의 작업은 여성이 본 남성의 성기 묘사를 통해 남성의 성적 횡포를 회화화하며 박경인은 남성, 여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왜소화된 인간을 문제로 다루면서 인간의 동물화, 또는 동물화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주시한다.한편 김춘자는 '여성=생성의 근원'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경우이다. 그녀는 풍부한 식물이미지를 동원하여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성과 순환 작용을 성적 현상으로 해석한다.이혜주는 '우리 사회 속에 자리한 또 하나의 타자' 즉 여성의 억압된 현실상황을 극명하게 문제 삼는 경우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평범한 삶이 현상화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평범함 속에 늘 버려진 존재가 있다.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존재란 여성이며, 이러한 여성의 모습이 이혜주가 다루는 내용의 골간을 이룬다. 그리하여 작가는 모든 여자가 무덤 속에 갇혀버린 비극적 상황, 남성들의 질서 속에서 일탈된 여성의 소외현장을 날카롭게 묘출함으로써 세계, 문명, 사회 등 기존질서가 지닌 허구성을 들추어낸다.이들 작가들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성적 문제로 모아지며, 성의 본체를 상징적, 환서 활동하는 예술가로 여성운동에 전면적으로 참여해 왔고 그녀의 작품은 이론적이나 실천적으로나 정치 투쟁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전통적인 예술 오브제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미술에서의 급진적인 표현 활동에 착수해온 페미니스트 미술가 중 한사람이다. 1976년의 은 가정 내의 노동의 성별분업에 대한 여성운동의 새로운 이해와 그녀 자신의 자녀 양육 경험을 연결시켜 출산과 자녀양육을 둘러싼 여성의 갈등의 결과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하지만 그녀 작품의 효과는 미술계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지의 지면에도 널리 악평이 게재되었다. 켈리 작품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특별한 전략은 단순히 그 작품을 상투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혀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G. 폴록, R. 파커, p. 211-217시카고의 작품이 여성적인 것의 찬사에 기반을 둔 것으로 신화적, 역사적 그리고 경험적인 반면에 켈리의 작품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모성애 개념에 입각해 정신 분석적 시각을 보여주며 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격 지워져 있다.T. 구마 피터슨, P. 매튜스, p. 95.바바라 크루거는 여성 억압적인 사회 현실을 고발한 작품은 서술적 경향을 강하게 띠어왔다. 그 대표적 작품가운데 하나가 바바라 크루거의 이다. 이 작품은 1989년 4월 워싱턴에서 열린 낙태 찬성론자들의 시위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인데, 단순히 낙태 문제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여권, 여성의 성 상품화 등의 문제를 두루 포괄하고 있다. 비단1950-1960년대뿐 아니라 지금도 스스로를 소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성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회문화에 대해 작가는 지금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러 여성의 몸은 이제 가장 치열한 문화 전쟁터가 돼버렸다.이주헌, 『미술로 보는 20세기』, 학고재, 1998, p. 253-254.크루거는 때로 시각적으로 상당한 자극을 주기도 하는데, 대부분 그녀의 작품은 글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글자와 사진들을 병합하는 그녀의 작품 양식은 러시아 구성.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를 중심으로-目 次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를 중심으로 -Ⅰ. 머리말 ......... 1Ⅱ. 기업 문화 예술 지원의 근거와 그 효과, 지원 형태 . 31. 기업 문화 예술 지원의 근거 .... 32. 기업 문화 예술 지원의 효과 .... 63. 기업 문화 예술 지원의 형태 .... 12Ⅲ.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의 역사 .......... 141. 서구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 역사 .......... 142. 우리나라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 역사 .. 153. 한국 기업메세나 협의회(Korean Business Council For the Art)의 기원과 정의, 활동 사항........ 16Ⅴ.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 활성화 방안1. 기업적 측면 ........의 의장인 캐서린 도어는 아틀란타에서 개최된 '1999년도 Ameican for the arts'라는 콘퍼런스에서 '밀레니엄 시대에서의 고용을 위한 다섯 가지 주요 특질'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그 다섯 가지 특질이란 비전을 명료화하는 능력, 모호함에 대한 포용력, 결과에 대한 지향, 협동정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서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놀이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다. 이 특질을 보면 모두 예술을 통해서 계발되어 질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캐서린 도어가 말한 '밀레니엄 시대에서의 고용을 위한 주요 특질'과 관련이 있는 좋은 예로써, 브뤼셀에 기반을 두고 있는 메뉴힌 재단(Menuhin Foundation)을 들 수 있다. 천재 바이올니스트 메뉴힌 경의 유지(有志)와 기업 재단 등의 스폰서 십으로 설립된 이 재단의 사업목표는 음악, 예술을 통한 어린이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음악적 표현을 촉진하고 독특한 이벤트 조직(예: '시타(sitar)에서 기타(guitar)', '평화를 위한 목소리'등)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 만나기, 포럼을 창설하여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과 재현을 진작시키기, 메뉴힌 경에 의해 제기된 여러 가지 문화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실행해서 그것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정리된다. 이 재단의 재원조성은 자체활동에 의해서 획득되는 기금, 지방정부, 국가, 그리고 유럽정부의 지원, 개인기부자와 기업재단에 의한 스폰서 십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재단이 확보한 조성금에 대해서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세금면제를 받고 있다. 최근 중요하게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The MUS-E Project로 모든 어린이들이 아동기 때부터 예술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학교에서의 예술 도입을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개방을 통해 그리고 어린이들의 창의적인 잠재성을 일깨움으로써 폭력, 인종차별, 소외 등을 막는데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정길배, 앞의 논문, pp. 23∼34.기업의 예술에 대한 지원, 즉 기업들의 예술에 대한 적0.하지만 서구에 비해 기부자에 대한 혜택이 적기 때문에 이로써는 민간 재원의 흡수 효과가 미비하다. 기업과 개인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손비 혜택을 받는 공제 한도의 확대와 기부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 단체의 확대가 더욱 필요하다.4) 노사관계의 개선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종업원들은 자신이 제공한 노동의 대가로써 단지 임금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대우를 원하게 된다. 기업은 종업원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기업이 종업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사내 문화활동을 후원하는 방법과 외부의 문화 예술 단체를 후원함으로써 종업원들의 자긍심과 애사심을 높여 주는 방법이 있다.죤 피크/ 이 주혁 역, 앞의 책, p. 45.포항제철의 사원 주택내의 공연장을 이용한 활발한 문화 예술 활동은 앞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종업원들을 위한 그러한 배려는 문화시설이 빈약한 대우중공업이나 현대 등 다른 대기업의 노사 갈등이 격심할 때에 포철은 이를 평화롭게 넘길 수 있게 하였고김영중, 앞의 책, p. 36.이로 인한 간접투자 효과는 측정하기도 어려웠다. 평소 인간의 심성을 문화예술로 다듬었을 때 마음의 여유가 생겨 갈등을 합리적으로 풀어 나가고 한층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5) 기업의 PR 기획대부분의 문화 예술 행사들은 그 행사를 후원하는 기업을 PR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기업의 간부가 유명스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대중매체에 소개될 수 있는 기회는 좋은 예가 된다. 하지만 그밖에도 언론의 관심을 끌 만한 좋은 방법들을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가 있다.6) 지역사회와의 유대를 위한 투자기업은 그가 존립하는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선린관계를 구축하고 문화 예술계의 지도자들과의 유대를 증진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거나 혹은 국제적인 규모로 사업을 하는 다국적 기업으로서는 진출하는 지역에서 판매를 촉진하거나, 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의 설립을 계기로 좀 더 체계적인 지원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3. 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Korean Business Council For the Art)의 기원과 정의, 활동 사항1) 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의 기원과 정의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을 의미하는 용어는 대체로 세 가지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업의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이 사회 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출발한 미국에서는 Business Support to the Arts로 표기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기업의 예술투자(Business invests in the Arts) 또는 기업의 문화예술 연대(Business-Arts Alliances)라는 어휘가 전차 많이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기업이 그들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문화 예술에 투자를 하거나 문화예술과의 연대관계를 가지고 지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영국과 유럽에서는 대체로 기업의 문화 예술 지원이 기업의 스폰서 십(Business Sponsorship)으로 일반화되고 있는데 영국의 A&B는 기업의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즉 기업의 스폰서 십이란 한 기업이 어떤 문화 예술에게 그 기업의 이름과 제품 혹은 서비스를 홍보해 줄 것을 분명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금전을 지불하거나 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지출행위의 일부인데 여기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수행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다음의 경우들이 이에 포함된다고 예시한다.·문화예술행사의 갈라 오프닝 나이트, 예술과 관련된 심포지엄, 전시, 페스티발, 학술, 관광, 문화예술인과 단체에의 시상에 대한 지원·특정 퍼포먼스나 이벤트에 대한 지원·예술 교육, 장애자 관련문제, 고령자, 극빈자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등기업의 지원금은 한 예술단체가 자체의 경비로 사용이 가능한 다음과 같은 여타의 소득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자체의 소득수입 : 소득수입(earned incom계의 다양한 문화와 미학을 포함하는 폭 넓은 예술 문화적 지원과 예술,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 방식, 평가, 참여, 교육, 예술가와 예술행정에 대한 인식과 전문가적 증진을 중시한다. 관리 법령으로는 자금지원으로 1. 지역 원조 기금 2. 뉴욕 주 목적 기금 3. 연방 정부기관의 기부금 등이 있다. 크레이그 드리즌/ 김영찬 역, 『예술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민음사, 1997, p. 85. 참조.즉, 국립 주 예술 정부기관 회의 같은 기구를 두고 작가들의 다양한 지원과 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여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협력하고 있으며, 영국은 예술위원회(The Arts Council of England)와 같은 기구를 두고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예술을 확산하고, 작가들의 개성과 실험을 지원하며, 각 세대들의 독창성을 배양하고, 문화의 차이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원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있다.한국문화정책개발원,『주요국가의 문화 예술 진흥기관 활동』.1997. p. 89.영국, 북아일랜드 국제예술위원회(Vising Arts Office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와 같은 유사한 기구를 4∼5개 씩 설치하고 있다.우선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문제는 문화관광부의 1%예산 배정달성에 발맞추어서 미술분야의 창작지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시장개척분야의 지원이 절실하다. 이는 다분히 포괄적인 정책개념을 수반 할 수밖에 없지만 1999년도에 문관부가 해외아트페어 참가비를 보조한 형태와 같은 직접적인 지원의 형태도 있지만 간접적인 차원에서 시급한 것은 국민들의 미술품 감상과 시장접근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부여를 들 수 있다.미술품의 국제화에 대한 요구는 다가오는 문화시대에 있어서 한 예술가가 국력에 얼마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러나 정책의 지원이 산발적이거나 각 부처간의 단편적인 지원제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소액다수에 그치는 방법보다는 적어도 세계미술계나 시장에 진출한 작가들의 경우다.
박물관/미술관 경영에 있어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관한 연구목 차머리말..1Ⅰ.박물관/미술관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와 운영..........21. 박물관/미술관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22. 박물관/미술관 운영의 경영적 접근......3Ⅱ.예술 경영의 현재(우리나라를 중심으로)..51. 예술경영의 특징과 주요 분야...............52. 우리나라 예술경영의 현황....63. 예술경영의 발전을 위한 과제...............8Ⅲ. 90년대 이후의 큐레이터의 변화.............101. 소장활동에 있어서의 큐레이터의 활동의 변화..............적으로 개방된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상우 저, 『한국의 박물관』, 기문당, 1995 p.p7-8사실 서양의 계몽군주들이 박물관/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승리의 후속 조치로 개관된 중앙박물관(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의 완전 개방이라는 본보기를 들 수 있다. 루브르의 사례를 통해 서양의 계몽 군주들은 박물관/미술관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힘과 국민 결속의 에너지를 놀라움과 함께 자신들의 새로운 통치 도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와 서양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출발선상의 차이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쪽에서 그 차이를 더욱 확대시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양의 시민 혁명 정부나 계몽 군주들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개방한 박물관/미술관의 운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건물이나 소장품의 양적, 질적 향상에 기여한 반면에 타율적으로 개방된 우리의 이왕가박물관에서 시작되는 박물관/미술관 문화에서는 이러한 활력을 기대할 수 없었음이 당연 한지도 모른다.미셸 푸코는 박물관/미술관을 19세기 서유럽의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의 유럽인들은 박물관/미술관을 갖기 위해서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겪어왔던 것이다. 군주나 그 주변의 소수 귀족과 승려 계급이 예술 후원과 소비의 거의 유일한 주체가 되었던 구시대의 사회 체제를 민중 혁명으로 붕괴시키고 예술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예술생산에 있어서의 후원방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것이다. 이제 대중이 예술의 소비자이며 예술 생산의 후원자가 되었고 이전의 군주나 교회가 담당하던 후원자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시민정부의 박물관/미술관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박물관/미술관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 아래 대중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었으며 정치적, 교육적으로 지배계층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효과를 낳는 새로운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박물관/미술관이 19세기 유럽의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박사과정을 개설하지 않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예술경영은 실용주의적인 논리가 적용되는 분야이다.예술경영의 주요한 대상이 되는 예술공간과 예술단체를 하나의 조직으로 이해할 때 여기에는 우선 적으로 세 가지 정태적인 기본 분야가 필요하다. 바로 조직관리, 인력관리, 재무관리이다. 예술경영 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 가지에 대한 이해는 그 기본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좀더 동태적인 다양한 분야의 기획과 프로그램 개발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보다 많은 관객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예술경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홍보와 마케팅이 이루어지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일들을 가능케 하는 기초로서 재원조성을 해나가게 된다. 예술단체 내에서의 리더쉽과 이사회운영, 커뮤니케이션과 작문, 관객개발, 자원봉사제 운영 등은 이상과 같은 범주에 포함되는 하위 분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추가한다면 예술교육, 예술관련 법규, 예술정책, 예술경제학 등도 예술경영의 관심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신의 외, 『문화예술경영 이론과 실제』, 생각의 나무, 2002 p.23예술경영을 공연예술경영과 전시예술경영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보편적인 분류방식은 아니며 미국의 경우도 전공과정에서 공연예술경영과 전시예술경영이 분리되어 있는 학교는 극히 일부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대략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첫째는 흔히 우리가 전시예술경영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전시기획이 공연예술경영과는 달리 상당한 정도의 사전공부, 즉 예술사분야에서 의 박사학위과정 이수 정도의 학업을 쌓은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2∼3년간 다양한 경영관련 과목을 주로 공부하는 예술경영과정을 마치고 전시기획자, 즉 큐레이터로 나선다 는 것은 사실 상당히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대규모 박물관의 경우 전시기획에서는 전문큐레이터를 팀장으로 하여 예술경영전문가와 전시디자인전문가가 한 조가 되어 프로젝트를경영을 확산시키는데는 분명 효과적일 것으로 여겨지지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방안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가자격인증제를 도입하고 또한 그러한 자격을 취득한 사람을 의무고용토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일단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장기 적으로 민간 혹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규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범정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규제개혁 방향과도 배치될 수 있다.따라서 이 같은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는 그 여건과 제도시행 효과에 대한 좀더 다각적인 연구와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형편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할 것은 해당 기관이나 단체 종사자들의 의식과 행태 변화이다. 법제도 여건과 상관없이 아직까지 예술경영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예술공간과 예술단체 종사자들의 의식과 행태가 전문적인 예술경영의 확산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막연한 몰이해일 수도 있고 현재의 입지를 지키기 위한 반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직까지 예술경영을 전공한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예술경영을 전공한 사람들에 대해 도대체 배운 게 뭐냐는 식의 비아냥이 먼저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예술경영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지만 아울러 현장에서의 경험 없이 불과 2∼3년의 외국유학만으로는 예술경영 전문인력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같은 갈등은 궁극적으로 최근 신설되고 있는 다양한 예술경영 교육과정의 발전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적인 예술경영의 본격적인 도입이 서구적인 틀을 우리나라에 단순히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합리적인 경영의 틀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는 점이 명확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한국 적인 예술경영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또 한 가지 강조해야 할 것은 인턴제도의 확산이다.97년말의 경제위기 이후 몇몇 대기업들의 흐름을 명확하게 바라보며 주관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안목의 중요성이 제기된다.)Ibid, p.692. 전시기획에 있어서의 큐레이터큐레이터의 영향력 있는 그리고 주관적 결단은 비단 소장품 구입결정이나 미술관의 소장정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소장된 작품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시할 것인가. 기존의 상설전시 방식에서 벗어나 조금 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을까 등 끊임없는 질문과 연구를 통해 오늘날 큐레이터들은 상설전시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상설 전시란 큐레이터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하여 수집한 결과들을 대중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러한 상설전시는 그동안 연대기적 나열 또는 이즘이나 경향별의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되어 왔으며, 미술관의 상설전시가 바뀌는 기간은 2년 정도 걸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의 상설전시는 다른 기획전에 비해 대중에게 매우 진부하고 흥미 없는 전시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이러한 상설전시 방법의 구태의연함에 대하여 자성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험'을 중시하며 역사적 읽기에서 주관적 '해석'의 방법을 제안하는 테이트 갤러리의 니콜라 세로타, 상설전시와 기획전시의 경계를 허물고 작품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제안하는 프랑크프루트 현대미술관의 장 크리스토프 아만, '커플렛'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통해 6개월마다 변화하는 상설전시를 소개하는 암스테르담 시립현대 미술관의 루디 푹스등은 바로 미술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중에게 교육적이면서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에게 상설전시 이외에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실험적 시도를 제안하는 작가의 작업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물론 미술관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개되며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가는 주체이다. 오늘날 미술관 큐레이터는 작가의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가치를 판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
목 차서 론 .......1Ⅰ. 박수근 예술 세계의 시대적 배경 .3Ⅱ. 박수근의 生涯 ...51. 박수근의 生涯 .52. 박수근에 대한증언 ..........9Ⅲ. 박수근의 예술 세계의 성립배경 .141. 화업과정 .........142. 생활경험 .........15Ⅳ. 작품세계의 해석과 그 특징 .........181. 소미술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한국인의 주체적인 미적 체험과는 전혀 다른 식민지의 예술경험과 새로운 서양회화의 수용이 혼합되어 작가들의 주체적인 활동이 전개되지 못하고 심한 고초를 겪는 그러한 예술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Ⅱ. 박수근의 生涯1. 박수근의 生涯박수근(1914∼1965)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의 부농가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누이 3명이 있었으나 3대 독자로 어렵게 태어난 뒤 2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다.그가 5세때 서당에 다녔으며 7세때 양구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7세때 그의 아버지가 광산 사업을 실패하고 홍수로 전답까지 떠내려가면서 그의 궁핍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 시절에 공부는 잘 하지 못하였으나 미술은 잘해 교실에 걸리곤 했었다고 한다. 그는 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그린 크레용화를 좋아했다.그가 12세 때 「밀레」의 을 보고 감명을 받아 하느님께 "하느님, 내가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한다.) 한국미술연구소, 『우리의 화가 박수근』, 시공사, 1995, p.19.이런 것으로 볼 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미술적 재능을 인정한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은 그가 그림 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를 많이 해주고 집에 찾아와 미술 재료를 많이 주기도 하였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는 양잠원으로 있으면서 시계기술을 배워 시계점을 경영하였다.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보통학교 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학교에 다닐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18세 되던 해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1932년 제11회 선전(조선전람회)에 (도판1)라는 제목의 수채화를 출품해 입선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화가로서의 길과 재능에 회의를 가지던 그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려 그가 부엌살림을 해야 했다. 그의 위해 어려운 살림 중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냉면을 사주기도 하였다고 하며 아내의 해산 후 나온 피 걸레를 남에게는 더러운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자신의 사람 것 이어서 더럽지 않다며 손수 빨기도 했다. 또한, 친구 아기 돌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고 저녁상까지 차려서 기다리던 일과 집에 있는 사람이 걱정할까 봐서 무리하여 집으로 돌아오려 하다가 통금에 걸려 구치소 신세를 3번이나 지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미술연구소,『우리의 화가 박수근』, 시공사, pp.51∼56.그는 광주리 아주머니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로 그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작품에 광주리 장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아내를 통해 알 수 있는 일화 속에서 그는 너무도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고 또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2) 아버지로써의 박수근박수근의 딸인 박인숙씨에게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고 포근한 아버지로 기억되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꾸지람이나 매를 맞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화를 내고 꾸지람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행동을 보임으로 인해서 반성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박수근은 외출하였다가 돌아올 때면 아이들이 실망 할까봐 고구마나 깨엿을 사 가지고 오곤 했었다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일화를 통해서 아버지로써의 자상한 박수근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두 아들에게 박수근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장남인 박성남은 어린 시절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박수근은 '그림도 못 그리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비쳤다고 하다.) 한국미술연구소, 『우리의 화가 박수근』, 시공사, 1995, p.227.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람하고 부자연스럽던 손이, 재방공만큼 위력 있게 보이던 손이, 고단함을 껴안은 외로운 손으로 어른거리기 시작하였다.) 한국미술연구소, 상게서, p.227.이는 무능하게만 보이던 아버지를 이해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장남인 박성남은 늘 생각하면서 나는 진실하게 살려고 애썼다. 또 나의 고난의 길에서 인내력을 길렀다.) 이구열, 『박수근론』,『박수근 화집』, 경미사, 1976, p.101.라는 말에서 그가 추구했던 세계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이 앞서고 있으며 그것도 평범한 인간상이었다.그는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친구가 되려하였고 그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냈다.) 이구열, 상게서, p.102.그러한 그의 정의와 사람의 감정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그 자신이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는 면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즉, 위의 그 말을 통해 그가 가난한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관념화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인 인간애를 체험하였고, 또한 그 가난이 결코 그의 인간성을 손상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한 가난한 체험 속에서 그는 끈기 있게 그의 신념을 키워 나갔고 또한 그러한 신념으로 그의 예술을 성장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그는 그림을 천직으로 알고 그렸으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묵묵히 꾸준히 그려나갔다. 그의 작가적 태도에 대해 이구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언어기교가 없었고, 과묵한 화가였다. 반면 그 자신의 예술신념과 그것을 위한 성실성에선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구열, 상게서, p.104.향토와 민중을 사랑했던 그처럼 뛰어난 개성적인 작품이 국내외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의 생활은 극심한 가난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고 이와 같이 박수근의 인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 된 바 있다. 천성이 우직한 강원도 태생의 그는 남처럼 약하게 살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남에게 아첨하면서도 살 수 없었다. ……중략…… 그저 좋거나, 그르거나 그림을 그려 생활을 하고 그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그림만을 그렸다. 따라서 우리의 실정으로 보아 작품이 소품이 되고 팔기 위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목적이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그림은 옥석처럼 빛나고 있다.) 이경성,『한국의 현대미술가들』,『박수근론』평면화법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면성은 조용하고 따뜻한 감이 없지 않다.평면적 그림에서 이와 같은 안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도판12), (도판20), (도판26)에서도 평면화법으로 처리됨으로써 인물의 근육이나 내적인 볼륨 감각이나 혹은 현실적인 어떤 역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못하고 있다. 얼굴을 보면 표정을 알아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이목구비까지도 생략되어 나타난다. 다만 전체적인 형태 안에서 얼굴이나, 팔 등 체구의 방향감이 인물의 포즈나 동작을 나타내 줄뿐이다.(도판26)에서 인물 배치는 상하의 다른 부분이 결합된 상태처럼 배열되어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행인들에 대한 대상의 현실을 묘사하려는 것보다는 행인들이 갖고 있는 특성과 인물들의 동등한 가치를 부각시키려는데 중점을 두었다.(도판25)에서 인물의 배치는 마치 고대이집트 벽화에 나온 작품에서처럼 인물이 배열되어 있다. 하단부분의 인물과 상단의 인물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으나 윗 부분의 인물과 아랫부분 인물이 이야기 식으로 배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 작품에서도 역시 얼굴의 표정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고 있으며 인물이 지닌 개성적 표정 묘사보다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시골 노인들의 실상을 부담 없이 처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박수근은 다양한 시각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담으려는 의지보다도 도리어 그러한 복잡성을 지양하려는 의지를 그는 중요시 여겼던 것이다.화면에서 원근법이 사라진 이상 입체적인 면과 색채의 고유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박수근의 작품은 면과 면으로 구축된 상호의지의 질서를 버리고 모든 면들은 일제히 똑같은 일차원적인 평면에 눕힌다. 당연히 선묘는 생략되어 간결해진다. 더불어 이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빛의 강도나 색채도 절제되어 평면의 질서를 밟게 된다.3) 마티에르박수근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주는 특질은 그의 독특한 마티에르를 사용한 조형성이라고 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