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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 평가A좋아요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1. 들어가며2. 연구 동향3.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1)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2) 양반서얼의 통청 운동(3)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4) 서민층의 성장(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4. 마치며1. 들어가며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차에 걸친 전란은 조선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법제상으로는 조선초기에 세워진 양천제는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변화는 신분구조에 큰 영향을 주어 조선초기에 설정된 신분법제는 실제상에 있어서는 거의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18,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은 신분구조의 변동을 가속화시켰고, 변동의 방향은 신분의 상승이동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는 신분변동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 동향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신분변동의 전개양상을 각 계층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2. 연구 동향신분에 대한 연구는 해방 이전에는 특수신분층의 해명이라든가 사회신분의 특성을 개괄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주였는데, 거의 공통적으로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 등 각 신분의 권리 ? 의무가 다르며 각 신분이 고정 ? 세습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개별 신분층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심화되어 공장(工匠) ? 향리(鄕吏) ? 고공(雇工) ? 백정(白丁) ? 서얼(庶孼) ? 한량(閑良) 등의 실체가 밝혀졌고, 노비제와 그 변화도 검토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연구방법이 모색되고 연구자료의 확대가 이루어져 연구는 양이나 질 모두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았다. 신분제연구에 사회학적인 방법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계층이동론이 활발하게 제시되는가 하면, 연대기뿐만 아니라 방목(榜目) ? 족보 등 다양한 자료가 이용되고 많은 호적이 새로 발굴되어 이용되었으며 기존에 이용되었던 호적도 재검토되었다. 1980년대에는 조선시기 신분제를 보는 시각이 확대되고 신분제를 재검토하려는 새로운 노력도 증폭되어 나타났다. 고문서나 호적 분석을 통한 신분구조의 분층을 포괄하고 있으며, 양반층과 중인층 인구의 증가는 곧 면역 인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양반층의 군역 기피현상은 軍籍收布制가 실시되던 16세기 후반부터 일반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布納化 이후 군역부담에서 수반되는 여러 특권과 권리가 상실되고 납포의 의무만 남게 된 군역 자체의 질적 저하에 있었다.) 역제 자체의 질적 저하는 양반층의 군역이탈을 유도하게 되었고, 군역이탈로 인해 양반층은 속처가 없어 무역으로 한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중인도 실역과 달리 한헐하던 제위와 무학 ? 군관 ? 기패관 등 중인층의 직역을 기피하여 빠져 나감으로써 소속된 바가 없어져 무역으로 한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한산이란 용어는 다양하게 쓰였는데, 무역무직의 한유자로서의 한산은 軍案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입적하지 않은 한량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으며 속처가 없어 적에서 빠진 한유자로 존재하였다.) 이들 한산은 숙종 16년에 서얼과 함께, 숙종 37년에는 사족 ? 품관 ? 군관 ? 교생과 함께 한유하는 무리임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제반 한유자는 양역변통론의 전개 당시 유호포론의 대상자인 「유호」로 파악되기도 하여 면역층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18세기 중엽 균역법 시행 이후부터는 중인층의 직역자까지도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는 존재로 합법화되었다. 한편, 유역 하층민은 선파 ? 훈족을 모칭하거나 호적에 모록하기도 하고 각급 관청의 私募屬 에 투속하기도 하여 유학 ? 업유 ? 충의위 ? 교생 ? 군관 등을 모칭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함께 피역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며, 호적에서 빠져 나가 한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히려 신분을 격하시켜 사천이 됨으로써 피역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각종 재원확보를 위해 시행하였던 納粟政策에 따라 납속품직을 취득한 유역 하층민의 납속수첩자들도 피역하고 있었다. 비록 납속수첩자는 면역의 혜택이 자손에게까지 근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수첩자 본인만 한유하거나 호적에 납속이란 단서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피역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기술관이 되거나 중앙과 지방의 잡직 또는 吏胥가 되어 사족양반으로부터 대대로 천시받고 차별받았다. 가문내에서는 「呼父呼兄」도 못하고 부모의 재산은 적자의 1/7~1/10을 상속받는데 불과하였다. 법제상으로는 적출의 후사가 없을 때에는 첩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어 모시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19세기 까지는 그러한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양자를 받아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한 혼인 관계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천첩자녀에 한하여 양반과 혼일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그 후 많은 천첩이 속량되어 양첩자손과 천첩자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자 결국 대개의 서얼이 양반과 혼인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서얼수의 증가와 적서갈등의 심화로 제반 모순이 누적되어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얼금고의 지속으로 많은 인재가 사장되고 있었으므로 위정자들은 서얼소통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조 때 李珥의 주장에 따라 納粟許通法을 만들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서얼을 관료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인조 때에는 고위관료들의 찬반토론을 거쳐 限代法을 만들어 서얼자손들의 영구적인 금고를 해제하고자 하였다. 한대법에 의하면, 양천자손은 손자대부터, 천첩자손들은 증손자대부터 허통하여 문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등과 후에는 요직은 허용하되 淸職만은 불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납속허통법에 의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일부 부유한 서얼들뿐이었고 등과 후 벼슬길에 진출하는 자도 극소수뿐이었기 때문에 서얼들의 불만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崔錫鼎등의 건의에 의하여 친서얼인 경우에는 業儒 ? 業武라 호칭하도록 하여 일반 상민과 구별하게 하였다. 또 업유의 아들이나 손자 때부터는 양반과 같은 호칭인 유학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납속허통법을 개정하여 납속이란 전제조건을 삭제, 서얼들이 문무과에 와 생진시에 응시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얼들의 벼슬길은 그렇게 넓기 못하였고 사회적 차대 또한 조금도 완화되지 못하여 결국 18 ? 서학 교인 尹持忠이 제사를 폐지한 이른바 「珍山事件」이 적발되고 형조에 남인과 중인출신 邪學罪人들이 포획되었다. 이 때 정조는 다음과 같이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대체 중인이란 양반도 아니고, 상인도 아니고 그 중간에 있어 가장 교화되기 어려운 존재이다. 權日身 ? 崔必恭 등에게 의리를 일러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하라 (《正祖實錄》권 33, 정조 15년 11월 경진).그 후 정조가 죽고 세력변동에 의하여 집권한 노론 벽파는 순조 원년(1801) 천주교 탄압을 빙자하여 辛酉邪獄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잡아들였다. 여기에서 조선에 천주교가 수입된 이후 신앙공동체의 지도층을 살펴보면, 정조 8년부터 정조 15년 진사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초창기에는 양반세력이 주도하였으나 그 후 신유사옥이 일어나기까지는 중인세력이 중추를 이루게 된 것이 주목된다. 곧 초창기 지도인물 12명 가운데는 중인출신으로 金範禹 와 崔昌顯 ? 최필공 외에 양인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반의 신분에 속하였다.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 10년간에는 지도층이 38명으로 확대되면서 교회지도층의 주류가 중인신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것은 중인층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될 문제였다.한편 근래에는 넓은 의미에서 중인에 속하고, 17세기 후반부터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京衙前의 성장을 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조선 전기에는 취재로 충원되었지만 후기에는 주로 경아전집안에서 충원되었다. 이들은 권세가의 ?人으로 들어가 그 세력을 이용하여 중앙관서의 서리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16세기 후반에 와서 중앙관서의 실무를 완전히 장악하고, 관청에 근무하면서 서리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손쉽게 치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치부가 쉬워졌던 것은 조선 후기의 생산력이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란 후에 경제규모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 곧 생산력의 증대로 이어지면서, 경아전들은 여기서 발생한 잉여생산을 통치구조가 이완된 틈을 타서 중간면화 ? 삼베 ? 모시 ? 담배 ? 채소 ? 인삼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감자 ? 고구마 ? 고추 등의 외래작물의 도래와 확산으로 농산물의 상품생산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업적 농업이 전개 되었다.) 이와 같은 농업기술에서의 변화는 경영방식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업생산력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력이 절감되고 그에 힘입어 경작 가능한 면적이 확대됨으로써 17~18세기에 이르면 廣作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층 내부에서는 토지소유 및 경영을 확대해 나가는 부농층이 형성되고 있었고, 이들은 시장의 발달과 상품유통의 활발한 전개와 더불어 농업생산물을 상품화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② 공장의 경제적 성장조선 전기의 수공업은 거의 국가통제하에 운영되어 사적 생산활동이 저해되었는데 비해 조선 후기에 이르면 17 ? 18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수공업체제에 변화가 오게 된다. 종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현물공납으로 조달하다가 대동법의 실시, 화폐의 유통, 상품경제의 발달 등에 힘입은 이후로는 공인 등 상공업자를 통해 조달하였다. 따라서 관청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공장들은 관공장에서 이탈되어 갔고 이는 관영수공업체제의 해체를 가져와 관장수공업의 私匠化 현상이 나타났다. 관장의 사장화 현상은 인조대에서 숙종대에 이르는 17세기 후반에 심해졌다. 관영수공업의 해체로 관에 예속되어 있던 공장들이 관의 통제에서 풀려나 자유수공업자로 전환하면서, 사장이 크게 증대되어 이들에 의해 전업적 생산이 이루어져 생산활동이 활발해 졌다.한편 각 지방에서 현물로 공납하던 많은 관수품을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공인이 구입하여 납품하도록 함으로써 공인들은 생산비를 먼저 대주어 수공업자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先貸制的 수공업조직이 성립되었다. 즉, 상인들이 자본을 투자, 생산에 참여하여 그 생산품을 판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 商人物主의 출현으로 상업자본이 생산에 투입됨으로써 민간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생산장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다.
    인문/어학| 2005.06.22| 17페이지| 1,500원| 조회(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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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이상의 날개 분석 평가A좋아요
    [현대소설선독]이상의 「날개」1. 작품 개관「날개」는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으뜸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이상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모더니즘 계열의 심리주의적 글쓰기 방식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는 이야기의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술 방법으로는 이 작품의 내용을 똑같이 전달할 수는 없다. 세계에 대한 지식과 자각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작품의 형식이 뒤바뀌는 것이다.이 소설의 부부관계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 이다. 아내에 대한 예속자, 혹은 기생적 존재로서 사회성이 없는 나 에 비해, 아내는 나를 지배하고 사육 하는 위치에 있다. 외출 , 내객 , 돈 이라는 단어들이 알려 주듯이, 아내의 직업은 창녀이다. 쉽게 말해서, 나 는 꽃 에 매달려 사는 기둥 서방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 관계이다.이러한 종속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소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의 매음 현장은 나'에게는 금단의 공간이며, 외출을 통하여 아내의 가학적 감금에서 일단 풀려 나온 나 는 다시 아내가 쳐놓은 시간에 감금된다. 자정 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외출 시간은 아내의 매음과 나의 자유 방임이 묵계된 시간이다. 이러한 자정의 시간과 반대쪽인 정오의 사이렌은 강요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전환점이 된다. 즉 대낮의 정점으로서의 정오는 아내와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또한 정오라는 것은 시침과 분침이 정확하게 마주치는 시간이므로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가 합치되는 시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따라서 마지막의 날개와 비상에의 소망은 박제의 무력과 유폐된 시간으로부터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 거릴 수 있는, 거세된 현실적인 삶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일상에서의 탈출의 욕망이며, 아내라는 구속성과 위선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아의 확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2. 문체와 표현상의 특징「날개」는 프롤로그와 본문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둘은 서술 태도나 표기 방식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프롤로그와 본문을 서술하는 주체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한자 표기와 전문적이고 관념적인 용어, ∼이오 , ∼하오 와 같은 고어투의 서술어미에서 한글 표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단어들, ∼이다 와 같은 서술어미로 변모하게 되는 것 등은 목소리와 인식으로만 존재하는 프롤로그 속의 추상적 나 가 구체적 공간에서 드러내는 면모를 반영하는 문체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프롤로그에 나타나는 전문적이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어휘들은 본문에 들어가면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용어들로 대체된다. 예를 들어 생활 이라는 추상명사 대신 번지 와 가구 · 아궁지 · 미닫이 · 방 이 있는 구체적 생활 공간이, 여인 대신 아내 라는 구체적 존재가 자리잡는다. 그것은 지적이고 논리적인 존재로서의 의식 속의 나 와 구체적인 생활 공간에서의 어리석고 무력한 현실 속의 나 의 분열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분열된 모습은 본문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 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불 속에서 아내가 늘 흔히 쓸 수 있는 저 돈의 출처를 탐색해 내는 일변 장지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랫방의 음성은 무엇일까를 간단히 연구하였다.나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낮잠을 자기에 착수하였다.문장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얻어냈다 , 생각하였다 , 시작하였다 등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어휘들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획득 , 탐색 , 연구 , 착수 와 같은 전문적이고 논리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상황과 표현 사이의 이질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사용은 독자로 하여금 결국 서술 내용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백치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어 주인공의 의식에 주목하게 하고, 분열되고 박제상태가 된 천재에 대해 비극적으로 인식하도록 한다.또 다른 문체·표현상의 특징은 소유격 조사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내 방, 내 체온, 내 안력, 내 마음, 내 자리옷, 내 내의, 내 이부자리, 내 몸뚱이, 내 이불, 내 게으름, 내 주의, 내 조석밥, 내 머리맡, 내 바지 포켓, 내 머리, 내 눈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은 내 아내 낯을 보아 좋지 않은 일인 것만 같이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큼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까닭은 이 33번지 18가구 속에서 내 아내가 내 아내의 명함처럼 제일 작고 제일 아름다운 것을 안 까닭이다.제시된 텍스트처럼 생략되어도 좋을 일인칭 주어들이 지나칠 정도로 반복되면서 타인의 행위나 물건들을 자신의 그것과 엄격하게 구분짓고 있다. 또한 전혀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는 아내에 대해서도 내 아내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분명한 소유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일인칭 주어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해서 사용하거나 소유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서술은 궁극적으로 행위나 생각의 주체, 소속을 강조함으로써 그 상황 속에서의 인물의 의식의 흐름에 주목하게 만든다. 나 는 피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서술의 출발은 항상 자신의 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데, 다시 말해 나 는 누구이며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의 서술을 이끌어 가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살펴볼 특징은 빈번한 부정적 서술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내 가 사용하는 ∼없다 , ∼아니다 , 알 길이 없다 나갔는지도 모른다 외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등의 일련의 부정적 서술어들은 외부세계로부터 차단·소외되고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반영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아내 의 경우 있다 , 많다 등의 서술어와 연결되어 있어, 나의 부정적 현실이 더욱 강조된다.3. 텍스트 분석(1) 프롤로그 분석형식적인 측면에서 프롤로그는 7개의 소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연애와 여인과의 생활을 대비시키는 단락과, 그대들에 대한 당부의 말로 이루어진 단락, 자신의 이론 단락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굳바이 라는 인사말로 구분되어 있다.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를 아시오? -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상징한다. 당시 지식인의 보편적인 모습이며 현실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 위트와 패러독스로 가득찬 소설을 쓰겠다는 말로, 프롤로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굿바이. - 전도된 세상에 대한 작별의 인사이며 날개와 동일시된다.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 19세기를 버리고 20세기의 사상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로 기존 소설의 문법을 버리고 새로운 문법을 추구하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여왕봉과 미망인…… - 여왕벌과 같은 존재인 아내를 의미한다.프롤로그와 본문이 문체와 내용에 있어서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해석이 많은데, 위의 예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대략적인 내용, 소설을 쓰고 난 후의 후일담적인 성격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2) 본문 분석. 구체적 의미 분석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 두 칸으로의 나뉨은 아내와의 단절된 삶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의식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다.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쇄된 공간 안에만 머물고자 하는 나 의 내적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아내는 내 모이를 여기다 주고 나간 것이다. - 모이 라는 표현을 통해 아내에 의해 사육되어지고 있는 나 의 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그러나 왜 그들 내객은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하는 예의 관념이 내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돈의 교환 가치로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 음운의 유사성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자의식의 과잉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공간적 구조공간에 대한 묘사는 식으로 점차 좁은 공간으로, 안쪽으로 향한다. 이는 주인공 “나”가 어두운 방안-그 중에서도 이불 속-에서의 연구, 아내 방에서의 장난을 하는 모습과 결부시켜 볼 때 유아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방은 모태의 이미지를 가짐과 동시에 아내의 감시 아래에 생활하는 감금 장소의 역할을 한다. 즉, 주인공에게 있어 가장 안락하고 적합한 공간임과 동시에 아내와 그녀의 내객에 의해 감금되는 것이다.이러한 공간에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이 외출이다. 외출은 곧 보호와 감금의 세계에서 보다 트인 곳으로 지향하게 되는 의식의 반영인 것이다. 작품 서두에서 공간의 범위가 축소되던 것이 외출을 통하여 처음으로 확장되며 몇 번의 외출을 거듭하면서 점차 더 넓어진다. 의 순으로 외출을 거듭하면서 나 는 닫혀진 공간에서 점차 열려진 공간으로 나가는데 네 번째 외출까지만 해도 돌아오던 것이 마지막 다섯 번째 외출 이후에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잠시 외출하는 의미가 아닌 완전히 빠져나옴, 또는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 다섯 번째의 외출은‘탈출 ,‘보호와 감금의 절대적인 상태인 모태로부터의 분리, 박제화 되었던 정신의 거듭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문/어학| 2005.05.14| 5페이지| 1,000원| 조회(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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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전통 축제 놀이] 고중세의 축제와 놀이
    고중세의 축제와 놀이1. 축제의 일반적 이론마쯔리;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는 고대 일본의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어 문화유산을 느낄 수 있는 도시이다. 기온 마쯔리는 일본 중요 무형민속문화재로 약1100년 전에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기원했던 어령회(御靈會)가 그 기원이다. 매년 7월 1일부터 31일까지 일본 곳곳에서 행해진다. 이 그림은 기온 마쯔리의 모습인데 여기서의 하이라이트는 17일에 있는 야마보코 행진으로, 거대한 야마보코가 거리를 행진한다. 이 야마보코를 보기위해 각 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리오 카니발; 현재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리오 카니발은 여름에 벌어지고 있다. 본래 이 카니발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이교도들의 의식에서 시작된 것으로 19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도입된 것이다. 기독교적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움을 만끽한다는 것이 지나쳐서 엄청난 규모의 춤판, 퍼레이드, 노출, 음주, 폭력, 때로는 사람의 목숨을 잃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일상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일탈 현상의 극단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오 카니발에서 유명한 삼바 춤 퍼레이드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정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다.2) 축제의 의미축제는 축일과 제일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축제를 의미하는 ‘festival'은 祝日을 뜻하는 ’festi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므로 축제는 반드시 일정한 날짜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그 뿌리는 종교의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성스럽고 궁극적인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에 강력한 사회 통합력을 가진다. 따라서 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종교적인 의미와 기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3) 축제의 기원과 기능앞서 말했듯이 축제는 제의와 밀접하게 연관 된다. 대개 한국의 축제는 부여의 정월 영고(迎鼓), 고구려의 10월 동맹(東盟), 예의 10월 무천(舞天)에서부터 기원한다고 본다. 이는 모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나라 활력을 되찾아 다산과 풍요를 기약하며, 바뀌는 절기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달래는 제의양식이 인간의 삶의 고비에 원용된 것이 통과의례인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과 성년식, 혹은 관례, 약혼식, 장례 같은 것이 계절의 고비처럼 삶의 고비로 매듭지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마지막 통과하는 관문이 죽음이고 이에 따르는 의례가 상례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활동의 정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현세에서 타계(他界)로 옮겨간다고 믿어왔으며, 상례에서는 그러한 관념들이 일정한 행위로 표현되고 있다.정리하면 하늘의 관념, 신성의 존재가 인간사회의 시조나 임금의 형태로 제정일치 양상을 보이다가 왕정(王政)이 수립되면 풍요제의 ? 계절제의도 세시행사로 정착되면서 왕가의 통과의례가 차츰 일반화 된다는 것이다.5) 축제의 역사적 의의오늘날 민속놀이나 행사는 원초적 고대 사회의 생활에서 전승된 지난 삶의 일부이다. 축제가 간직한 놀이나 행사의 민속 현상은 그런 생활권의 잔존물이라는 뜻에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삶의 현장에서 연장되어 나온 단편적 행위 전승으로서 민속놀이나 행사가 주축이 된 축제는 바로 과거의 현장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그것이 비록 단편적이고 그 맥락을 일관되게 연결지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행위로 전승된 그 파편들이 실제 생활의 일부를 이루었던, 계절의 순환에 따라 실제 거행되었던 월력 제의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제의가 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던 원초적 사회?고대 사회의 삶의 반영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구체적?역사적 일부이며 그 전승이라는 뜻에서 축제는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다.2. 고대의 축제-제천의식부여의 정월 영고(迎鼓), 고구려의 10월 동맹(東盟), 예의 10월 무천(舞天) 등은 모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음주가무를 하였던 일종의 공동 의례였다. 이것은 상고시대 부족들의 종교 ? 예술 생활이 담겨 있는 제정일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제천행사는 힘든 농사일과 휴식의 관계 속에큼 추수감사제 때에는 국왕의 친제(親祭)가 거행되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때에는 노래와 춤이 행하여졌는데,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풍작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면서도 씨족사회 이래의 전통을 이은 축제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행사이므로 「국중대회」라 하였다. 또,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국경일에 죄수들을 특사하는 것을 연상시키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행하여지고 있는 동제와 그 시기나 내용 · 성격 등에 유사점이 많다.3) 동맹(東盟)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하던 제천의식이며, 東明이라고도 한다. 동맹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후한서』등에 처음 보인다. 『후한서』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대회 하니 이름 하여 동맹이라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도 대략 같은 내용의 기록이나 다만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할 때 목수를 신좌에 모셨다.」라고 약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동맹의 10월 제천은 농경의례로서 부족사회 공동체의 추수감사제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동맹은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宋史』의 「나라 동쪽에 굴이 있고 세신(歲神)이라 부른다. 늘 시월 보름에 맞아서 제사하는데 이것을 팔관재(八關齋)라 한다. 그 의례가 매우 성대하여 왕과 비빈이 다락에 오르고 크게 풍악과 연음을 베풀었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다만 팔관회는 서경에서는 10월 보름, 개경에서는 11월 보름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고대 제천의식에 호국신앙과 불교요소들을 가미한 다양한 문화복합체였으나,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했던 고려로서는 동맹의 계승 의식이 많았다. 결국 동맹은 고려 말기까지 팔관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1,500년을 유구히 계승되었고, 고대 부족사회 공동체의 제의에서 비롯하여 왕궁 제의에까지 승화, 발전하였다.3. 중세의 축제-불교행사 중심으로고려시대에는 태조 이래로 국가나 왕실의 융성과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각종의 불교행사가 많았고, 각 개인에 있어서도 史』禮志 중 팔관회와 연등회에만 있는 것이며, 연등회 때 백희잡기를 연출하는 사람들을 山台人이라 칭하고 특히 이들 庭殿山台邑을 燃燈都監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연등회 때 백희잡기를 즐겼다는 것은 연등회에서 행한 하나의 놀이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축제적 성격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연등회 당시 여러 歌舞들이 많았는데, 王母隊歌舞를 연주하며 55인이「君王萬歲」혹은「天下太平」이라는 글자 모양을 만들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또한 비정기적으로 열린 특설 연등회가 있는데, 특설 연등회는 불교의례에 연등의례를 병설하는 형식을 취하여 불교의례와 상호교섭하게 함으로써 습합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낙성, 경찬 등의 불교의례는 축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전승의례의 축제적 요소와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그리고 4월 8일 연등회도 있었는데, 이 때는 전국 사원마다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수많은 등을 밝혀 찬불 예배를 하였음은 물론, 집집마다 등을 달고 경축하였다. 이 날에는 특히 대중들의 즐거운 놀이가 베풀어지기도 하였으므로 4월 8일은 민족적은 명절의 하나와 다름이 없었다. 공민왕 때는 어린아이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민간에서 성행하여 오는 呼旗놀이를 궁중에서 연출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연등회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어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등을 밝히는 의식이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많은 종합적인 文化祭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는 팔관회도 마찬가지였다. 연등회의 개설은 비록 조정에 의하여 행해졌다 하더라도 그 행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반 민중이었다. 즉 『고려사』에 전하는 연등회에 관한 기사는 왕실 귀족에 한정한 행사가 아니라 공사에 의하여 경향 각지에서 행하여진 일반화된 풍속이었다. 결국 4 ? 8 연등은 불탄일에 대한 축제이고, 정월 연등과 2월 연등은 풍년을 기원하는 온 백성의 민속적 ? 국가적 축제였다.2) 팔관회(八關會)팔관회는 태조가 신라의 풍습을 이어 받은 泰封의 연중행사를 그대로 계승하여 건국한 해(918) 11월 궁중의 儀鳳樓에서 팔조는 이러한 축제를 중앙집권을 위해 이용하려 하였고, 그것은 지방의 신을 통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내용은 각 고을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설치하고 그 제의를 유교식 예제에 맞게 봉행하는 것이었다.4. 고중세의 놀이1) 고대와 중세의 놀이의 기원과 의미우리 민족의 놀이 전통은 대체로 원시 시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는 설이 많다. 하지만, 그 시대의 놀이는 기록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어떤 놀이가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놀이에 관해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그 시대의 놀이는 특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이기보다는 삶의 행동 양식 그 자체, 또는 의사소통 과정 그 자체를 놀이라 할 수 있다고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농경문화와 초기 부족 국가가 형성되면서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며 행한 전투 활동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전투 놀이나 체력 단련 놀이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부족 단위의 신앙적 행동들도 제의 형태의 놀이와 가무로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해지는 동명성왕의 이야기나 전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부족장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2) 고중세의 놀이1.무술 연마삼국 시기의 민속놀이들은 역사 기록과 무덤 벽화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 시기 이미 무술연마놀이, 체력 단련놀이, 지능 겨루기 놀이, 탈놀이, 어린이 놀이 등 여러 부문에 걸친 다양한 놀이들이 널리 퍼져있었다. 삼국시기 사람들의 용감하고 민첩한 기질을 보여주는 무술 연마 놀이로는 활쏘기, 말 타기, 칼 쓰기, 창 쓰기, 수박희, 석전(돌팔매놀이) 등이 있었다.활쏘기에는 말을 타고 하는 騎射와 서서 쏘는 步射가 있는데 삼국은 두 가지 모두를 중시하였다. 고구려에서는 ?堂에서 청소년들에게 궁술을 가르쳤으며, 신라의 화랑 관창은 기사에 능했기 때문에 부장으로 발탁되었다. 백제에서는 일반인들까지도 모아서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칼 쓰기와 창 쓰기는 고구려인들의 민속놀이에서 주요한 종목의 하나였다. 고구려무덤 벽화에서 기마전투장면에 칼다.
    인문/어학| 2005.05.14| 12페이지| 1,500원| 조회(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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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 198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구조
    1. 198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전개과정1980년대 한국자본주의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모순적 귀결이었던 1979∼80년공황 에서 출발하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극심한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1986년 이후에는 국제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보이고 높은 성장세를 지속하는 등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기도 하였다. 깊은 수렁과 최고의 호황이 교체되는 가운데 경제규모는 1970년대에 이어 크게 팽창하였고 산업구조도 한층 고도화되었다. 국제수지흑자와 더불어 외채도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개발경제학의 연구에서 한국경제가 개발도상국 가운데서 수출주도공업화에 성공한 전형적인 모델 의 하나임이 새삼 확인되었다. 1980년대 한국자본주의는 경기순환 혹은 산업순환 면에서 볼 때 대체로 4∼5년 주기의 소순환을 두 차례 겪었다. 1979∼80년 공황에 이어 1980년 9월의 저점으로부터 다시 1985년 9월의 저점까지의 5년, 그리고 이때부터 80년대를 마감할 시점까지의 시기이다. 전기(前期)는 경제위기에 이어 구조적 불황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경제의 안정화 및 축적체제의 재편을 위해 부실기업정리 등 국가권력의 폭력적 개입이 이루어진 시기였고, 후기(後期)는 전후 최대의 호황(이른바 3저호황)을 구가하는 한편 미국을 위시한 선진제국의 개방압력이 본격화함에 따라 경제의 전면개방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구조조정이 시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2. 구조불황과 축적체제의 재편 : 1980년대 전반이 시기는 1970년대 산업순환의 모순적 폭발, 즉 1979∼80년 공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과잉중복투자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로 파악되는 이 공황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황, 즉 과잉생산공황과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더욱이 이 공황은 단순한 순환성공황이 아니라 순환메커니즘 속에 구조화된 여러 요소들, 예컨대 강도 높은 국가의 경제개입, 재생산구조의 종속성, 대기업에 의한 경제지배 등 구조적 요소들과 결합된 구조적 위기였다. 이에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특혜지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수출단가의 절하와 원화의 대미달러환율의 절하를 통한 수출의 확대가 주된 정책방향으로 제시되었다. 일련의 투자촉진책으로 1983년에는 경기가 다소 회복되는 듯 하였으나 1984년에 다시 침체로 빠져들어 급기야 1985년에는 기업의 부실화가 전반적으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합리화조치 및 부실기업정리 정책 등 한층 강한 개입정책을 구사하였다. 부실기업의 정리는 1986년 5월부터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78개의 기업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중 57개 기업은 제3자 인수, 21개 기업은 합병·법정관리·계열기업정리·청산정리(부도처리) 등의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정리과정에서 베풀어진 특혜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아예 원금자체를 탕감하거나 이자지급을 면제해 주었는가 하면 손실보상을 명목으로 한 추가대출·조세감면 등 8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지원하였다. 이 특혜가 소수 독점재벌에게 집중되었음은 물론이다. 반면 자금의 특혜적 배분은 조세감면에 의한 납세부담의 증대, 강제저축에 의한 은행돈의 기업전용, 긴축과 인플레 억제를 빌미로 한 임금삭감 등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노동자·농민 등 민중생활의 악화를 수반한 축적조건의 폭력적 재편은 자본의 비용측면에서 높은 효율성을 보장해주었다. 불황이 장기화하여 투자는 전반적으로 부진하였으나, 기계·전기전자 등에서는 가장 높은 투자증가가 이루어졌으며 이어서 산업용화학·자동차 등에서도 높은 투자를 기록하였다. 이에 상응하여 일반기계, 전기전자, 자동차 그리고 제1차금속 부문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자본의 재편과 함께 부품산업 육성 등 산업육성 방향은 내구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수출 중화학공업의 국내 생산기반을 확충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 결과 내구소비재 등 가공조립형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 생산물의 국내순환도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본의 성장은 놀라운 것이며, 이와 함께 정부의 정책기조도 개방확대의 불가피성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점차 이른바 3저 라는 호조건이 결합되어 연 3년에 걸친 호황으로 이어졌다. 1986∼8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12∼13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수출이 크게 늘어나 국제수지도 큰 폭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이른바 구조적 취약성으로 지적되어온 국제수지 적자누적 현상이 한 번에 일소될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대외채무도 줄어들었다. 이 호황은 한국자본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환경면에서 특히 유리하였다. 1980년대 경쟁의 격화로 선진각국은 보호주의 경향을 강화하는 한편 세계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저해하는 불안정 요인을 완화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는 등 모순적 태도를 보여왔다. 최대의 불안정 요인은 무엇보다 쌍둥이 적자 로 불리는 미국경제의 거대 불균형이다. 이른바 3저 란 바로 이 불균형의 시정을 위한 선진국간 모순적 협조의 결과였다. 이 3저 를 조건으로 한국경제는 전후 최대의 호황이라 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3저 란 1985년 플라자회담의 결과로 주어진 것인데, 저달러화, 저금리, 저유가 를 의미하는 것 으로 이들이 수출증대와 국제수지의 흑자화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었다. 1저유가는 원유도입 에 따른 외화부담을 직접적으로 경감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다주었고 또한 물가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2저금리로 외채의 상환부담이 경감됨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이자지불 부담이 크 게 감소하였다. 3특히 저달러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원화의 상대적 저평가는 한국상품의 대외 경쟁력을 제고시켜 수출을 크게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85년 9월의 플라자합의로 형성된 저달러체제로 인해 원화도 평가절상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여타경쟁국 통화에 비해 그 절상 률이 상대적으로 낮아 가격경쟁력 면에서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6 년 이후 계속된 소나기식 수출은 이들 국제가격변수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이 시기에는 특히 수출의 확대가 국민총생산의 지출구성 항목 가운데 돌출적으로 드러나며, 또한 수출확대는 위에서 지적한 3저 의 조건을 기반 한국경제의 흑자경제화 를 계기로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를 무기로 개방압력을 더욱 강화하였고 경제 전영역에 걸쳐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원화의 대미달러환율 절상에서 시작하여 제조업 생산물을 중심으로 전면적 시장개방이 이루어졌고, 외국인투자도 거의 완전하게 자유화되었다. 원화의 평가절상은 직접적으로 수출경쟁력을 좌우하여 한국경제에 명암을 드리웠다. 1985년부터 이루어진 원화의 평가절상이 그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1988년 말부터는 수출이 감소하고, 경제성장률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정부는 성장의 관건이 수출의 확대에 있음을 재확인하면서 저하된 경쟁력의 극복을 위하여 구조조정정책을 서둘렀다. 결국 원화절상 압력을 중심으로 한 개방압력의 수용이 산업재편의 방향을 결정짓는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구조조정은 개방의 확대와 한 몸을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개방의 확대와 이해를 같이하면서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국내 독점대기업은 국가의 각종 지원정책에 편승하여 제조업과 금융산업에서 그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비교우위의 논리를 내세움에 따라 힘없는 농업과 중소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산업구조의 조정은 힘이 약한 산업·자본, 노동자·농민 등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4. 중화학공업 재편과 독점적 축적기구의 발전1> 생산력 발전과 재생산·축적구조의 성격1) 산업구조의 고도화1980년대 초반에는 구조불황, 중반 이후에는 최고의 호황을 보인 한국자본주의는 1970년대에 이어 또 한차례 비약적 생산증대를 기록하였다. 산업구조 역시 수출주도산업의 변동에 이끌려 불균형 을 특징으로 하면서 고도화하였다. 산업 생산규모는 2.8배 가량 증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GNP는 약 52조 원에서 약 120조 원으로, 그리고 1인당 GNP도 거의 5천달러 수준에 육박하였다. 이러한 생산력발전의 결과 산업구조는 한층 고도화되었다. 1970년대에 이어 농림어업의 비중은 줄곧 감소한 반면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미 1980년에 제조업 생산화의 과정은 그 구성에서 노동집약적 조립가공형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국내 생산기반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둘째, 생산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일부 저가=저기술=저부가가치 기종의 생산 및 수출증대와 고가=고기술=고부가가치 기종의 높은 수입의존이 특징이다. 셋째, 노동수단의 높은 수입의존과 함께 기초소재산업의 생산기반 역시 취약하여 석유화학, 비철금속은 여전히 수입산업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넷째, 중화학 공업화의 확대과정은 기계장비 부문을 중심으로 소재나 부품공급의 생산 및 수출증대 현상을 동반하였다. 다섯째, 이러한 생산기반의 구조변화는 물론 수요구조 면에서 수출의 증대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내구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의 성장은, 개방의 전면적 확대 속에서 외국자본의 국내진출의 확대 및 기술도입의 급증현상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2) 재생산·축적구조의 성격앞에서 살펴본 한국자본주의의 양적 변화가 갖는 성격이 무엇인지는 생산의 기술·경제적 측면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그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요하는 문제이다. 먼저 생산요소의 수준과 그 결합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첫 번째로 공업화 과정에서 화폐자본과 함께 외국(특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의 도입에 주로 의존해왔던 생산수단의 경우, 80년대에도 여전히 도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과학기술 면에서는 생산기반의 구축에서 기초적 필수기술(예컨대 금형·열처리·용접·주물·도금 등) 부문이 취약성을 면하지 못한 가운데, 3저호황 이후에는 조립가공을 특징으로 하는 고성장산업에서 기술도입이 크게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생산력 발전과 고축적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해온 이른바 저임금·장시간 노동 이라는 노동조건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양질의 노동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은 늘어났고 임금상승은 생산성 증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잉여가치율은 노동시간의 연장과 실질임금의 저하 그리고 소비재가치의 저하에 따른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상승을.
    경영/경제| 2004.10.18| 5페이지| 1,000원| 조회(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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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와 역사] 영화와 역사의 관계
    세 사람의 토머스1. 울지, 모어 그리고 크롬웰토머스 울지(1472~1530), 토머스 모어(1477~1535), 그리고 토머스 크롬웰(1485?~1540) 세 사람은 영국 역사의 격동기로 불리는 16세기 전반부에 헨리 8세의 재상을 지낸 사람들이다. 울지는 1515년부터 1529년까지 대법관으로서, 추기경과 교황의 전권 대리인으로서 실질적으로 영국의 정치와 교회를 통치했다. 의 작가이자 법률가였던 토머스 모어는 일찍이 153년 의회의 하원의장을 지냈으며, 1529년에 울지의 뒤를 이어 대법관에 올라 1532년 사임할 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책 결정자 중 한 사람이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1533년부터 1540년까지 대법관을 대신해서 최고 재상의 자리가 된 국무대신과 국새상서로 있으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하였으며, 근대적 국가 체제 확립에도 기여하였다.이 세 사람은 토머스라는 이름을 가진 것 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들은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로 볼 때 모두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세 사람의 사회적·정치적 성공은 당시 영국의 사회 계급이 비교적 개방적이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로서 자주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울지나 크롬웰의 급격한 신분 상승에 대한 당대인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감정이 여러 가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대역죄로 참수되거나 참수될 처지에 놓였었다는 점이고, 이들의 실각이 국왕의 이혼 내지 재혼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2. 역사적 평가·울지 : 그는 자신이 정부의 모든 업무를 처리할 것을 자청하면서 왕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고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으로 1515년 대법관과 추기경에 임명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울지의 가장 큰 관심 분야는 외교 분야였으며, 학문과 문화 진흥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울지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이미지나 역사가들의 평가는 계속 변화해왔다. 생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었으며 사후에는 카톨릭과 신 울지의 후임으로 대법관에 올랐다. 그의 좋은 평판은 정치가가 아닌 판사로서 행한 공평무사하고 신속한 판결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 부분에서도 검열과 이단에 대한 불관용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사후평가는 가족들의 노력에 힘입어 신교 쪽과 영국 정부의 악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이 훨씬 우세하였다. 모어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견지한 논자들은 모어에게 씌워진 이단 박해 혐의를 파헤치고 거기에다 현실주의자 모어 의 타협적 태도와 책략을 들어서 원칙주의자 모어 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허구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메리어스에 의한 모어 전기는 나름대로 모어에 대해 균형 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는 이 전기에서 모어가 매우 야심 있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분석하고 있다.·크롬웰 : 크롬웰이 집권한 시기에는 종교개혁뿐 아니라 각종 사회개혁을 통해 영국의 국가 시스템 자체가 재조직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를 비롯해 기득층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몰락 이후 그에게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1953년에서야 제프리 엘턴이 크롬웰을 뛰어난 정치적 식견과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최고의 행정가이자 개혁가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 영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작품으로, 원래 1960년 로버트 볼트가 희곡으로 만든 것을 진네만이 각색하여 영화화하였다. 치밀하고 독특한 인물 묘사와 다큐멘터리적 미학 세계를 통해 한 인간의 신념과 양심을 탁월한 연출력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다. 는 토머스 모어가 울지의 후임으로 대법관직을 맡는 1529년부터 대역죄로 처형되는 1535년까지 사건의 시간적 전개 과정이 보다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보다 훨씬 심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이 영화의 구성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한 한 지식인의 삶을 부각시키기 위해 양심주의자 모어가 편의주의자 일색어의 도덕적 우월성은 눈부시리만큼 빛난다. 울지 역시 야망을 채우기 위해 국왕을 능멸하는 위험한 인물로 모어를 부각시키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지나치게 불공정한 것이며, 인물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시켰다.4. 영화 은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던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그린 1969년도 작품으로, 찰스 재롯이 감독하고 리처드 버튼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는 앤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고 동시에 앤을 통해 사내아이를 생산해 취약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려는 헨리와 왕비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한 결코 헨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앤,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심 축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러나 헨리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둘러싸고 국내외적 갈등 관계가 고조된 가운데 울지, 크롬웰, 그리고 모어 등에게도 상당한 역할이 주어진다.와 비교하면 등장인물의 묘사에 있어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쓴 점이 인정된다. 헨리의 열정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고뇌가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토머스 모어의 현실주의적인 측면도 아울러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앤 볼린은 당대 사람들이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고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울지와 크롬웰의 경우는 부정적인 측면에 보다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롬웰은 울지가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실각의 위기에 몰리자 주인의 위기를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 앤을 왕비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앤이 아들을 낳는 데 실패하고 헨리와의 사이에 틈이 생기자 이번에는 앤을 효과적 으로 제거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울지 또한 무원칙의 권력지향적 정치인으로 묘사될 뿐이다.5. 영화와 역사 사이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 사람의 토머스에 대해서는 실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과 에 나오는 울지와 크롬웰의 경우에는 유독 부정적 측면만이 강조된 반면, 토사적 평가에서 찾아보려는 관점이 있다. 크롬웰과 울지의 경우 그들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대체로 영화의 기본이 된 희곡들이 나온 이후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토머스 모어의 캐릭터는 윌리엄 로퍼의 모어 전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로퍼의 글은 모어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나 평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모어의 비범한 덕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비록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더라도 모어에 대한 당시 역사학계의 지배적 의견이 비교적 호의적이고 울지와 크롬웰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영화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을 것이다.두 번째 관점은 역사가나 예술가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가치나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1960년대 미국 민중들의 지배적인 윤리적 시각이 에서 부각된 모어의 도덕적 원칙주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브로드웨이에서의 히트를 거쳐 아카데미상을 휩쓸 정도로 호평을 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세 번째 관점은 대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이다. 한 번 형성된 대중적 이미지는 어지간해서는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토머스 모어에 대한 대중들의 호의적인 이미지는 로퍼의 전기에 힘입은 순국자의 이미지 외에 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희곡이나 영화 대본을 쓰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이상 등장인물의 캐릭터 설정시 그들이 가진 대중적 이미지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래저래 영화는 아무리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하더라도 과거보다는 현재를 반영하기 쉬운 모양이다.로 앙시앵레짐 문화 읽기1. 왜 인가?영화는 요즘 학생들이 글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역사 수업에서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생생한 인상을 심어 준다. 만든 영화로 18세기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는 접근 방식이 더 편리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지은 「위험한 관계」를 각색해서 찍은 스티븐 프리어즈의 를 역사 텍스트 로 이용하여 앙시앵 레짐 말기의 상류 사회와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의 문화를 들여다보기로 한다.2. 귀족과 평민의 겉모습과 수입프리어즈의 영화에서 우리는 귀족의 웅장한 저택과 성관, 그 내부의 화려한 가구와 섬세한 장식품, 그 사이를 오가는 귀족과 그들을 모시는 평민의 화려하고 서열화된 의상을 보다가 허름한 농가와 거기에 사는 농민의 헐벗은 모습을 보면서 천국과 지옥을 비교할 수 있다.귀족은 화려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를 벌어야 했을까? 영화에서는 세실 볼랑즈가 연금 6만 리브르를 받는다는 사실을 발몽 자작의 입으로 말하는 장면, 발몽 자작이 돈을 뿌리는 장면 등 돈과 관련된 장면들이 있다.18세기 도시의 임금 노동자의 연간 수입은 기껏해야 450리브르 남짓했으며, 귀족의 조건은 천차만별이었다. 연봉 3백 리브르를 받고 군인이 된 귀족이 있는가 하면, 라 트레무알 공작은 매년 식탁을 차리는 경비로 4만 4천 리브르를 썼다.3. 서간체 문학영화의 바탕인 원작은 메르퇴이 후작 부인, 발몽 자작, 투르벨 재판장 부인, 볼랑즈 부인, 세실 볼랑즈, 슈발리에 당스니 등이 서로 주고 받은 편지 175통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간체 문학은 등장인물의 생각과 느낌을 곧바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 문인이나 사상가들이 즐겨 이용하는 형식이었다.이 같은 경향은 당대의 문화를 반영한다. 18세기 말에는 글 읽는 능력이 서민층에서도 더욱 확산되고, 특히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서민층도 쉽게 편지를 쓸 정도로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로슈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파리의 서민층도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고 하므로, 영화에서 귀족이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4. 탈그리스도교영화에서는 투르벨 부인의 절대선과 발몽 자작의 절
    인문/어학| 2004.10.18| 7페이지| 1,000원| 조회(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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