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매스컴의 발달사근대사회의 형성과 매스컴(1) 근대 신문의 등장 * 조선시대 개국 초 - '기별' 또는 '기별지' : 예문춘추관에서 조정의 결정사항과 견문록 등을 기록하여 각 관청에 돌림 - 조 보 : 세조 때부터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하던 전근 대적인 관보 겸 신문형태(2) 근대 신문의 등장, 민족적 언론활동 발전 과정 * 우리민족이 주체적으로 근대에 적응하는데 실패하여 끝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의 시기로서 언론사적으로도 반외세적, 반전체주의적 민주, 민중적 자유 언론 운동이 태동하다가 실패할 시기 ① 한성순보 :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이며 열흘에 한번씩 발간 사용문자 는 순 한문이다. ② 한성주보 : 주간지이며 국한문혼용과 때로는 한글만의 기사 최초의 상업광고를 실었다. ③ 독립신문 : 한성신보에 대항하여 서재필이 발간한 한 국 최초의 민간 지이다.* 독립신문의 의의 - 논평과 비판을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고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가 가르쳐 주었다. 국민 계몽과 개화 운동의 확산과 추진에 절대적인 역할 을 수행하여 근대정치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행정신과 그 내용, 제작방법과 경영 들의 모든 면에서 초기 한국 언론의 모델이었다. ④ 대한매일신보 :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 사세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가 설 치된 이후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 국채보상운동과 언론의 역할 :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어났으며 나라의 빚을 갚자는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호응하여 빠르게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 이 운동의 취지를 널리 전파한 것이 신문이었다.(3) 최초의 공중전화와 영화 - 공중용 전화 : 1902년 3월 20일 통신업무를 관장하던 통신원이 한성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조정에서 전화를 사용한지 6년 만에 민간인이 전화를 쓸 수 있었다. -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영화 상영 : 황성신문에 실린 광고를 통해 보면, 동대문의 한성 전기회사 민심을 완화시키며 동시에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했을 뿐이다. 1920년 중반 이후부터 탄압을 강화하여 비판적 언론활동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ㄱ. 조선일보 – 1920년 3월 5일 창간. 남녀학생을 동원하여 한글 보급반을 조직하고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다. ㄴ. 동아일보 – 1920년 4월 1일 창간. 브나로드 운동으로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과 함께 문맹퇴치, 농촌계몽에 큰 성과.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일기장을 지웠다가 정간 당한 유명한 사건.② 다양한 잡지 - 잡지 : 개벽, 동명의 창간 - 문예잡지 : 창조, 폐허, 백조의 창간 ③ 라디오 방송의 도입 - 경성방송국의 개국 : 조선총독부가 1926년 11월 30일 설립한 한국 최초 의 방송국. 언어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썼고 청취료가 유일한 재원이었다. - 방송의 사명을 오직 보도방송에만 두었다. - 한국 최초의 방송 :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에 의하여 개시된 호출부호 JODK 방송. ④ 영화 - 한국 최초의 극영화 :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가 발표. - 무성영화 : 나운규의 '아리랑' 예술적인 개화를 보게 됨. - 최초의 발성영화 : '춘향전'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염.해방 이후의 매스컴(1) 미군정기의 매스미디어 * 미군정의 언론정책도 점령정책의 틀 내에서 전개되어, 미군정은 표면적으로 언론자유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점 령 정책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언론을 통제하거나 이용하는 정 책을 실시. * 미군정이 방송의 모든 권한을 철저하게 장악하여 '미군정 한국어 방송'이라 불리우짐. * 이렇듯 미군정기에 국영으로 운영되었던 한국 방송은 결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국영으로 정착.(2) 1950년대의 매스미디어 * 이승만 정권은 정권에 대한 비판조차도 반공에 위배된다는 명분으 로 탄압, 매우 강력한 언론탄압 신문 : 소유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성향이나 신문기업이 정치권력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논조가 결정되어 이른바 '여당지'와 '야당지'가 확연 하게 구분되는 경향을 보여년 일부 기사를 문제 삼아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가자 굴복 * 1960년대 말부터는 대부분의 신문들이 선정적인 주간지를 창간, 치열한 경쟁을 하기도 함. 방송 * 1961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라디오서울 들 3개의 상업라디오 방송이 등장 * 1961년 KBS-TV, 64년 TBC-TV, 69년 MBC-TV가 개국 * 1964년부터 정부는 방송법을 제정, 시행박정희 시대 매스컴- 공식적 법령의 제정과 비공식적인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통해 언론의 한계를 설정 - 언론으로 하여금 유신과업의 선도 역을 맡도록 조장 -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의 발동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제약 - 양적인 팽창, 매체의 통합소유 형태와 복합기업 형태의 증가추세, 상업주의 의 팽배 - 정부주도형의 기업 활동에서 재벌이 경영하는 언론기관이 필연적으로 정부 의 통제를 받음 - 발행인들이 정부에 동조함에 따라 언론경영주 측과 편집인 및 기자들 사이 에 대립관계 형성(1) 1960년대 *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언론의 협조가 필요 때문에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강제적인 언론 통제를 시작했다. * 5.16 군정은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여 9개 항목의 보도금지사항을 발표하고, 곧 포고령 제11호를 발표해 일정한 시설기준을 갖추지 못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모두 취소 신규 등록을 접수하지 않았다. * 전국 언론기관의 91%가 강제 폐간. 시설기준은 1962년 12월 공포 된 헌법에서 명시되고 1963년 12월 제정된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 5.16 군정은 1961년 말부터 언론계 정화를 공공연히 표명했지만 결국 '언론 길들이기' 용 엄포에 그친 것이다.- 5.16 군정은 1962년 6월에는 '건전 신문기업 육성'이라는 명분하에 '언론 정책'을 발표 - '언론정책 시행기준'에서 드러난 주된 내용은 단제와 증면 실시 * 언론정책은 그 명분과는 달리 언론을 구조적으로 통제. 1964년 한일수교 반대시위가 거세지자 언론보도를 형식을 빌려 15일 발표- 언론기본법의 재정 : 신군부 정권은 계엄 해제 후에도 저항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안전판으로 언론기본법을 재정함 - 보도지침 :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하루도 빠짐없이 각 신문사에 은밀하게 시달하는 보도통제 가이드라인. - 땡전뉴스 : 1980년대 KBS/MBC 9시 뉴스에서는 9시를 알리는 종이 '땡~' 하고 울리면 앵커는 “친애하는 전두환 각하께서는~”부터 나와서 이를 일 컬어 비꼬는 말. - 3S 정책 : 스크린, 스포츠, 섹스 3S로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 -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 : 1985년 12대 총선에서 방송의 불공정 보도는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됨(2) 컬러 TV의 방영과 VTR 보급 - 정부는 전자 산업의 육성을 위해 1980년 8월 1일부터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의 시판을 허용. 1980년 12워 1일 KBS 제 1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 시험 방송을 실시. (3) 광고 시장의 성장 - 전두환 정권 시절의 언론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경제 규모가 커짐으로써 소비 수준이 향상되고 아울러 시장 쟁탈을 위한 경쟁이 치열.6. 노태우 정권의 매스컴- 언론기본법 폐지 : 노태우 정권이 '6.29 선언'에서 내세운 언론자율화 방침은 외형적으로 상당부분 실행. 대체입법으로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음. - 신문사와 방송국의 증가 : • 신문 방생 자율화 조치에 따라 전국에서 신문의 창•복간이 활발하게 이루어 져 신문수가 급증하면서 언론시장의 엄청난 양적 팽창. • 카르텔체제가 무너지고 자유경쟁체제를 가져왔으며, 기존 언론사 대 신생 언 론사의 대립구도를 가져옴 • 신문의 연중 무휴 발행으로 확대, 중앙일간지들은 지방 동시인쇄를 통해 지 방시장을 잠식해갔으며 석간지들이 조간지로 전환. • 무한시장경쟁은 자본력의 과다경쟁성격을 띠면서 대신문사와 중소신문사 간에 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7. 1990년대 대중매 1992년 모토로라 『마이크로택 Ⅱ』출시, 당시 휴대폰 대중화를 주도 우리나라 최초의 핸드폰은 93년도에 삼성에서 나온 ts1700 ② 1996년 1월 미국 퀼컴사에서 1993년에 개발한 CDMA방식을 도입 인천과 부천 지역에서, 그 해 4월에 서울 전 지역에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가 개시 ③ 1997년 10월 1일부터 한국통신프리텔, 한솔 PCS, LG Telecom등 3 개 사가 동시에 016,018,019 등의 번호로 PCS 상용서비스를 실시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계속 막아온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을 허용한 조치. '단계 적이되 상당한 속도의' 일본대중문화 개방 방침 천명.8. 2000년대~ 현대까지- 뉴미디어의 발전 • UCC : 전문가 집단이 아닌 일반인들도 기존의 미디어보다 빠르고 의미있 는 정보들을 생산하면서 확산. UCC의 빠른 발전과 함께 저작권 침해와 부적합한 콘텐츠의 범람, 명예 훼손과 프라이버시의 침해, 정보조작, 유언 비어 등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음. • DMB : 이동통신과 방송이 결합된 새로운 방송서비스. 무분별한 지상파 TV 컨텐츠 재전송을 막아 방송 3사의 독과점체제를 막고, 다양한 방송산 업 발전을 유발. 지역방송은 권역별 송신이 방송법에 보장되어 있는 데 지역방송의 보호, 지역문화발전, 이를 통한 지역 산업발전과 지역성장을 도모한다는 당연하고도 거창한 취지때문에 DMB 방송을 반대함.- 현재 노무현 정권의 언론 정책 언론 관계법 = 언론개혁과 관련 신문법과 방송법, 언론피해구제법 등 3개 법안 • 신문법 : 신문사 최대주주 및 그 일가의 소유지분 상한선 제한과 시장점 유율 제한이 최대 쟁점. • 방송법 : 방송사 최대주주와 그 일가의 소유지분 상한선을 하향조정하는 것과 방송사업자 및 위성방송사업자의 허가권을 정보통신부장관으로부터 방송위원회로 이관하는 문제가 쟁점. • 언론피해구제법 : 반론보도청구 및 정정보도 청구 외에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서ow}
차 례1부. 한국의 민주주의화 과정을 사회운동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반공규율 사회’의 형성과 사회운동 (해방부터 61년 5 ? 16군사 쿠데타 이전)○ 반공규율사회의 형성○ ‘반공규율사회’에서의 사회운동○ 4 ? 19혁명□ 개발독재?권위주의 시기의 사회운동 (61년 군부정권의 성립부터 군부정권이 퇴진하는 87년)○ 5 ? 16군사 쿠데타○ 박정희 체제○ 전두환 체제○ 개발독재 ? 권위주의체제의 제도정치와 사회운동□ 민주주의 이행과 사회운동의 변화 (87년 이후 민주주의 이행의 시기)○ 1987년 6월항쟁과 군부세력의 합헌적 재집권○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 경로에서의 변화○ 시민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사건○ 시민운동의 정치적 성격○ 시민운동의 성장과정○ 저항적 사회운동 단체들의 합법화 및 조직적 발전○ 관변단체들의 자율화 위한 시도2부. 민주화 이후의 시민사회□ 시민사회의 의미□ 시민운동의 의미□ 시민운동의 분화□ 시민운동의 활동 분야□ 시민운동의 문제점□ 발전방향- 각각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 시민운동의 바람직한 발전방향1부. 한국의 민주주의화 과정을 사회운동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한국현대사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사회단체의 종류로, 여기서는 저항적 사회운동단체와 관변단체, 시민단체로 나누고자 한다. 저항적 사회단체는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표출되었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이 참여하게 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민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저항적 사회운동단체의 사회운동은 지배체제가 규정하는 ‘합법성’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한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 하게 된다. 두 번째 관변단체는 정부 혹은 지배권력의 후원이나 인정속에서 존재하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종속적인 단체들을 말한다. 일종의 정부후원적 단체(government-patronized organizations)들인데, 이러한 정부종속성은 권위주의 시기 ‘한국노총’과 같은 대중조직에게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1950년대 반공규율 사회속에서 사회운동이 처한 조건의 핵심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운동 내에서 대중운동(민중운동)은 광범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바탕으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통상 시민단체(ngo)라고 하는 것은 대중운동(민중운동)이라는 성격보다는 특정한 과제를 중심으로 몇몇 상근 간사가 핵심이 되어 운영하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의 여론을 타거나 언론의 긍정적인 보도가 없으면 소기의 조직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대중운동은 언론의 긍정적 보도 없이도(혹은 부정적인 보도를 뚫고)조직력과 투쟁력을 바탕으로 여론을 변화시키면서 소기의 조직목표를 쟁취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극우반공주의적 상황에서, 또 지배체제의 ‘백색테러’의 난무속에서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방어적 생존’을 도모하게되고, 그 결과 대중조직 자체가 권력에 적극적으로 굴종적인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노동조직과 농민조직도 ‘어용’조직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민족주의적 성향을 띠는 조직마저 ‘친공’조직으로 / 비판적 성향을 띠는 지식인이나 집단마저 ‘용공(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으로 규정 → 탄압)또 한편으로는, 이 시기 사회운동은 식민지 시대의 운동정치, 즉 반제국 반봉건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정치?변혁적 운동 전통과 단절되어가고, 우익화 질서에 적응해가는 즉, 전후 새롭게 ‘이식된 민주주의’의 질서자체를 전제로 ‘이식된 민주주의’의 새로운 문제점들(부정선거나 집권당의 부패 등)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새롭게 성장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 달리 변혁적 이념으로 무장한 운동이나 대중들의 ‘좌익적’지향은 소멸해 가지만, 다른 한편에서 ‘미국식’민주주의의 ‘기준’이 정착하면서 그러한 기준에 따라 ‘반민주적인’정권과 제도정치의 행태에 비판적인 운동으로 성장해 갔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새로운 운동의 발전속에서 우리는 4.19혁명을 맞게 된다.○ 4 ? 19혁명4.19혁명은 해방이후 정치’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고, 나아가 성장해 가는 저항적 사회운동을 더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예방적’억압체제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운동정치의 급진화와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전두환 체제1979년 10.26사건으로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박정희식의 개발독재체제는 더 경직된 전두환식의 권위주의체제로 재구조화하게 되는데, 1980년 광주항쟁 때 일어난 양민학살을 고려할 때, 1960년대 또는 70년대식 권위주의 체제의 ‘유혈적 재강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광주항쟁으로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권위주의체제는 이후 더욱 ‘전체주의’적 방향으로 경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저항도 더욱 대중화 ? 국민화 되어 가게 된다. 이렇듯 새롭게 강화된 권위주의체제에서 제도정치는 더욱 협애화하게 되는데, 여기서 제도정치에서 배제당한 제도정치 세력이 운동정치에 전면적으로 합류하게 되고, 이로부터 1980년대 초반에 ‘제도정치와 저항적 사회운동(재야)의 전면적인 결합’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함께 권위주의체제의 유혈적 재강화는 운동정치의 혁명화 ? 급진화를 촉진하는 도덕적 기초로 작용하게 되는데, 1980년대는 70년대의 저항적 사회운동이 급진화 혹은 혁명화해 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급진화로 인해 자본주의 비판적 운동정치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적 사회운동도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급진화와 함께, 70년대의 사회운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투성도 나타나게 되는데, 화염병과 바리케이트, 점거농성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저항적 사회운동의 전투성에 권위주의체제는 더욱 폭력적으로 대응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 등 저항적 사회운동 참여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도 나타나게 된다.○ 개발독재 ? 권위주의체제의 제도정치와 사회운동개발독재체제 혹은 권위주의체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인 제도정치 영역과 자율적인 사회운동 영역이 극단적으로 축소된다 분화라고 표현하는데 비록 제한적이지만 어느정도 자율적인 제도정치적 공간 및 시민사회적 공간의 확장은 사회운동에 대해 양면적인 효과를 갖는데,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 온건한 사회운동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감을 부여함으로써 사회 운동의 다원화를 추동하는 효과를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적 대중운동 자체의 조직적 발전 및 저항운동의 다양한 영역으로의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1980년대 말의 시민운동1980년대 말 시민운동의 부상은 바로 민주화가 초래한 제도정치 및 사회운동 공간의 자율적 확자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 동안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종속적 위치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시민사회 내에, 전투적 민중운동의 투쟁으로인한 군부국가권력의 약화에 조응하여 자율적인 사회운동 기구들이 분화하게 되고, 그것이 이른바 1980년대 말의 시민운동이 된다.○ 시민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사건시민운동 출현과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89년 7월 부동산 투기 근절 및 경제정의 실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정의신천시민연합(경실련)의 출범이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출범한 시민운동 단체들과 이전부터 활동하여오던 시민운동단체들은 1994년 9월 한국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를 결성하여 집단적 실체를 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민운동은 전반적으로 비(非)민중 운동적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기존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적절히 대면하지 못한 이슈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의 ‘틈새시장ㅇ’을 공략하게 되고 그 결과 급성장하게 된다.○ 시민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시기 시민운동은 그 이전의 시민운동에 비해서는 반독재 민중운동의 ‘전투성’이나 ‘혁명적 지향’을 공유하지 않으나, 정부 및 제도정당, 기득권 체제 및 세력을 비판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이전 개발독제 체제 아래서 왜곡되게 고착된 정부 및 제도정치에 대한 비판과 민주적 개혁(비록 이전 시기와 같이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지는 않지만)이 ‘시대적 당위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운동과 시민단체를 들을 이해하기 전에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시민사회란? 국가권력과 대비시키는 자유주의적 시각, 그리고 이를 국가 권력과 구별되지만 경제구조와도 구별되는 제 3의 영역으로 파악하는 시각, 두 가지가 가장 고전적인 시각이다.고전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사회를‘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집합체’로 이해했다.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은 재산권을 기반으로 사상과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와 같은 상호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장,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공간이 바로 시민사회라고 생각하였다.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합의에 의해서 정당성을 부여 받은 것으로 시민에게 봉사하고 개인들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했다.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한 자유를 강조 하였다. 소위 신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고전주의적 정치관과 시장경제를 결합시켜 시민사회와 시장을 거의 동일시 생각하였다. 그 결과 개인이 갖는 선택의 자유와 사적 소유권,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시민운동의 의미시민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시민운동의 의미와 목표가 달라질 수 있는데 3가지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자유주의적 시민운동은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정치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감시는 물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입법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주요 활동 목표로 정하고 있다. 행정부에 대해서도 경제 활동에 대한 부당한 규제를 비판하고 예산에 대한 감시와 평가, 납세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 및 감세운동 등을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동시에 시민운동은 시민사회의 에너지를 결집 하고 극대화 하는 것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헤겔과 마르크스는 시민사회란 개인들의 보편적 이기심이 갈등하는 공간으로서 시민사회 스스로 이와 같은 갈등 상황을 해결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
-대한민국 -Ⅰ.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민주주의는 인류가 발견한 보편적 이념으로서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그 국가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고유한 민주적 유산을 발굴하여 이것을 계승하고 배양·발전시키는 동시에 선진 민주국가의 공통적인 민주주의 유산과의 조화를 도모함으로써 그 국가의 발전은 물론 인간의 존엄을 최대한으로 구현시키기 위함이다.그러나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우리는 일제(日帝)의 잔혹한 식민지에서 민족적 해방을 맞이했으나 남북의 분단으로 새로운 민족적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해방 이후 미군정(美軍政) 3년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UN을 배경으로 미국의 국가이익과 세계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왜곡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국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인 ‘자유’에 내포된 구성원의 ‘자율적 의사’를 배제하고 외형적인 제도화에 치중하였으므로 지난 50여 년 간 한국 민주주의 파행적 운영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1948년 제헌국회가 수립되어 제1공화국이 출범한 이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헌정질서는 무수한 민주(民主)와 반민주(反民主)의 대립이라는 진통을 겪어 왔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우리의 실정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민주주의에의 관념에 사로잡혀 이를 도입함에 기인하는 역사적 경험이다.또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로 인한 민족적 전통의 단절과 혼란으로 민족적?사회적 동질성의 희박과 식민지 문화에 젖어 있는 반(反)민족적 세력의 존재로 인한 지식인 계급의 분열이다. 더구나 자원의 지역적 편중과 일제의 수탈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궁핍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여건에서 남과 북의 체제대립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즉 ‘국가안보’를 위하여 우리의 경제력은 막대한 소모를 가져왔다이라는 국가형태의 시작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밝히는 1948년의 제헌헌법보다도 거의 30년이나 앞서는 1919년 4월 13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부수립 이후 수차에 걸친 개헌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은 한 글자도 손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 볼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오천 년의 역사 속에 처음으로 ‘민주 공화제’라는 정치체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또한 헌법의 전문에 명시되는 3?1독립정신은 그 때부터 분명히 이어지는 법통(法統)임을 부인해서는 안된다.)2.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1)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발전과 더불어 확립되어 온 인간공동체의 보편적 진리이다.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를 도입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그것이 실제로 8?15해방과 더불어 전개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립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려받은 유산은 단지 조선시대의 군주정치와 일제의 식민지통치의 잔재인 권위주의 체제에 불과했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유산 아래서 민주주의 체제는 우리의 역사적?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미군정에 의해서 다만 규범적 명제 속에서 형식적으로만 모방된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허다한 문제점을 낳게 한 출발점이었다.미군의 한반도 점령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한국지배를 방지하는 것으로서, 점령정책의 주요 목표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일치된 노선에 따라 미군정이 한국의 정치상황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트루만(H. S. Truman) 대통령은 한국에서 실시할 미국의 중요한 정책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①국제적 대립관계로 인하여 고난을 겪은 한국의 긴 역사의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앞으로 어떠한 분쟁이라도 방 마련되었으나, 이를 운영하는 지도자의 비민주적인 속성으로 인해 국민의 참여는 왜곡되어 모순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4?19혁명으로 나타난 것이다.이승만 정권은 소수의 독점자본과 경찰전제(專制)를 바탕으로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봉건적 통치체제의 유지를 위해 헌법개정, 선거에서 행정관료의 동원, 야당과 언론의 탄압, 나아가서 반대자에게 테러를 가하고 선거의 결과를 조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관료들은 계획목적을 달성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비호하기에 급급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경찰은 야당에 대한 감시, 기습연행 및 온갖 위험에 앞장서는 하수인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행정부에 권력이 집중되어 입법부와 사법부는 자치적인 의사결정기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이승만 정권을 위한 거수기 내지 단막극의 무대로 전락되어 부패를 가중시켰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의 경찰과 관료가 동원되고 급기야 선거의 결과를 조작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이와 같이 당시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 하에서는 일반시민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권마저 위협 당하는 법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상태’에 이르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의 정당한 저항권은 혁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2) 4?19혁명과 장면정부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4?19혁명으로 새로이 성립된 제2공화국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크게 표출된 반면, 그것을 실제로 정치현실과 접합시킬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였다.4?19혁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자각을 나타낸 것으로 근대화를 향해 성큼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부정부패의 독재정치는 인민의 자연권에 기인하는 최후의 저항권의 발동을 촉진시켜 기존의 정치권력에 항거하는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4?19혁명 이후의 민주당 정권은 독점자본과 결탁하여 시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7대 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둔 1969년 1월 7일 당시 민주공화당의장서리 윤치영이 기자회견에서 “조국근대화 작업의 달성이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되는 우리의 실정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지상명령의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금지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정권연장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이는 ‘조국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의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전제(專制)의 시작이며 장기집권의 야욕을 채우려 수식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3공화국의 효율성과 경제적 업적을 바탕으로 한 정통성의 창조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반민주적 전환 이였다.당시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제를 지향하였지만 실제로는 여당의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국의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의 가치가 유보되었으나 19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으로 노동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2) 유신체제와 박정희정권3선개헌에 이어 1972년 10월 17일 일명 ‘10월유신’에 의해서 급속한 국가발전을 표방한 이른바 ‘유신헌법’이 채택되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과 제도는 더욱 위축되는 과정을 걷게 되었다. ‘10월유신’의 명분으로 미·소간의 ‘해빙시대’를 맞이하여 국제적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국내적으로 석유파동(oil shock)을 포함한 경제적 위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급박한 국내외의 상황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내세워 약 2개월간의 헌법조항의 효력을 일체 정지시키는 비상조치(10월유신)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3선개헌과 1971년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나타난 국민적 저항과 3번 이상의 장기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박정희 정권이 10월유신을 단행한 실질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그 동안 움츠렸던 시민들의 참여욕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국민적 저항운동이 나타남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4) 민주화와 문민정부(1) 노태우 정부1988년 2월에 출범한 제6공화국의 노태우정권은 제6공화국의 헌법이 여야가 의회에서 합의를 통해 마련한 개헌안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문민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평화적?합법적 정권교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군부정권하의 인물의 교체에 지나지 않았다.노태우정권은 선거과정에서 제5공화국의 비리와 부정척결을 통해 구시대의 단절을 공약하였으며, 이에대한 국민적 요구의 수용, 민주화의 조속하고도 완벽한 실현이라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출범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는 4?26총선 이후 4당체제의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정치적 효율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출범 후 2년이 지나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결국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직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여야의 합의에 따라 증언을 가졌으나 증언의 내용과 진행상의 문제로 원만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90년 1월 22일 ‘보수대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 선언은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2) 김영삼정부1992년 12월 18일은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하나의 대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다. 즉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다른 대통령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명정대하게 치러진 선거이며, 특히 1963년 이후 순수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선출되었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실질적인 문민정부(文民政府)’의 출범이다. 또한 역대 어느 선거에서 보다 많은 표차로 당선됨으로써 정통성과 정당성을 더욱 구비했다고 할 수 있다.제6공화국 제2기라고 할 수 있는 김영삼 정권은 ‘신한국의 건설’이라는 개혁의 기치 아래 구악을 일소하고 군사정부5명)
사회주의 [社會主義 socialism]협동적으로 자유평등한 사회를 형성해 사리사욕·타인이 지배하는 불공정·빈곤 등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사상 사회운동·사회체제를 총칭하여 이르는 말.목차1. 유토피아 사회주의 2.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3. 사회주의운동 4. 러시아혁명 후의 사회주의운동 5. 제2차세계대전 후의 사회주의운동 6. 발전도상국과 사회주의 7. 현존 사회주의 8. 사회주의 경제 9. 사회주의 정치 10. 사회주의와 자유협동적으로 자유평등한 사회를 형성해 사리사욕·타인이 지배하는 불공정·빈곤 등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사상 사회운동·사회체제를 총칭하여 이르는 말. 그 원류는, 사유재산 없는 형동생활을 찬미한 스토아철학이나 그리스도교 등의 교의(敎義)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중세 말기 농민투쟁의 이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자본주의경제의 모순과 억압을 비판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하는 특징을 부각시켜, 자본주의(Capitalism)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Socialism이라는 용어는 1827년에 영국 오언파의 기관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통용되었다. 한편, 공산주의(Communism)는 어원적으로는 라틴어의 코무네(공유재산)에서 유래하여, 1840년대에는 보다 철저한 공유제도(共有制度)를 보다 혁명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와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공산당선언(1848년)》을 집필했다. 독일에서 1875년에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고, 1890년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는데, 노동조합조직에 의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지도적인 역할을 하자,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대항적인 것으로는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레닌이 이끄는 당이 러시아혁명(1917년)을 달성하고 다음해 러시아공산당이라 개명한 뒤 엄격한 규율에 의한 혁명전략을 정통적인 공산주의운동으로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재발족되었는데, 여기에 가입한 사회당·사회민주당의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였고, 특히 서독의 사회민주당은 1959년 마르크스주의 지도이념을 포기하였다〔발전도상국과 사회주의〕제2차세계대전 뒤 사회주의사상은 과거의 식민지·종속국이었던 발전도상국으로 확산되었다. 몇몇 국가에서 외국자본과 상인이 지배하는 사적(私的) 경제의 배제, 국유경제의 발전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서유럽제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과 자국의 사회적·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사상이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를 지역조건에 맞추어 수정한 아프리카사회주의, 전통적인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사회주의 등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개발도상국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이다.〔현존 사회주의〕제2차세계대전까지 사회주의국가는 소련과 몽골뿐이었는데, 전후에 그 수가 크게 늘어 1980년대 중반 사회주의국가는 16개국에 이르렀다.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 알바니아는 쇄국주의를 취하고 있으며, 중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소련과 대립하였는데, 1970년대 이후로는 사회주의국가들보다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과의 협력을 중요시하였고, 베트남전쟁 뒤에는 베트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편 캄보디아문제를 둘러싸고 베트남·소련·중국이 대립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국가들의 상호관계가 원활치 못했던 기본적인 원인은, 각국의 역사적·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혁명 후 이미 60년이 경과된 소련, 194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건설을 시작한 나라들, 1950년대 말, 197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들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사회주의체제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국가, 사회주의가 아직 건설도상에 있는 국가, 사회주의건설이 막 시작된 국가, 한편 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 선진국·중진국·발전도상국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이같은 차이가 해소되기에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들은 서방측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낙후되어, 이들 국가들은 후진성 극은 본래의 직업을 가진 근로자이므로 의원활동에 전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의회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 및 그 밖의 집행기관, 그 지휘를 받는 행정기구가 실제 통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커지나, 관료주의와 비능률이 끊임없이 문제로 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조합·청년단체 등의 역할은 크다. 이들 단체는 정책형성에 참여하고, 대표가 의원으로 선출되며, 각종 행정위원회와 심의회에도 대표가 참여하고 있는데, 사회단체는 전국적인 큰 조직이므로 일반근로자의 의사가 평상시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공장 등 기업근로자의 집단을 사회주의 정치제도의 기반으로 하는 개혁이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에 의원은 직장단위에서 선출된 자와 지역에서 선출된 자의 2종류로 이루어졌다. 소련에서는 직장단위의 집회가 선거후보자를 뽑고, 그 적격성을 검토하며, 당면한 정치문제를 검토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직장의 중시는 헝가리에서 공장민주주의로 불렸으며, 지역단위 주민집회의 역할도 중요시되었다.〔사회주의와 자유〕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 헌법은 개인(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하여 상세하게 규정하고 이의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들이 이제까지 주장한 다수의견에 따르면, 개인의 권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노동의 권리, 노동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을 권리,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의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무료로 진료를 받을 권리, 주택보유의 권리, 무상교육을 받을 권리 등 사회적·문화적 권리이다. 사회주의의 성과는 이들 권리로 구현되고 있고, 언론·출판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는 위에 든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의 강화에 도움을 주는 정도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의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제일의적으로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들은 선거권을 포함한 국가와 사회의 업무에 참여하는 개인의 권리를 인권체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 제3의 견해는 참여의 권리와는 별도로 언론·출판이라는 표현의 자유가 독립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그러나 이러한 과제가 별 진전을 보지 못하자, 1983년 Y.V. 안드로포프 지도 아래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총회는 소련이 아직은 발달된 사회주의의 출발점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사회주의의 개선을 전략적 과제로 정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K.U. 체르넨코 또한 이 노선을 계승하였다. 1985년 이데올로기보다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M.S.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글라스노스티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양대 축으로 하는 개혁정책이 제시되면서 소련공산당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90년 공산당의 권력독점이 폐기되고 대통령제가 채택되었는데, 그해 3월 소련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사회주의국가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91년 7월 소집된 공산당중앙위 총회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폐기를 골간으로 하는 신강령안을 채택하였으며, 11월 공개된 신연방조약안에는 USSR(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국호를 폐기하여 소련 국호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였다. 1991년 8월 소련연방체의 존속을 명분으로 한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로 소련에서의 공산당은 사실상 그 종말을 고하였고 1992년 1월 1일을 기해 독립국가연합이 창설됨으로써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해체되었다.〔유럽의 공산주의〕제2차세계대전 이후 J.B. 티토 지도 하에 혁명에 성공한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동구 유럽국가들이 공산화되었다. 이후 다극화체제의 세계정세 아래 1964년 루마니아가 탈소(脫蘇) 자유화를 선언하는 등 소련군 점령 아래 공산화되었던 국가들이 독자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체코사건은 이러한 독자노선 움직임과 관련해 소련과 충돌한 대표적인 예였다. 유고슬라비아는 1950년대 이래 기업의 자주관리조직을 전(全)정치조직의 기초로 두어 왔다. 소련 및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공산당의 강력한 지도체제가 확립되어 있으나 동유럽의 몇 나라는 복수정당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당 으면 생산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양자의 결합은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매매하게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소유의 노동력을 자기 의사에 따라 대가와 서로 바꾸기 때문이다. 자본은 노동력을 임금이라는 대가와 교환하여 구입하며, 구입된 노동력은 자본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상품화된 노동력은 구입자인 자본에 의해 자본화된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시키는대로 자본의 힘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노동하게 된다. 자본의 소유단위로서의 기업은 이렇게 노동을 자신의 힘으로 장악하여 생산수단과 결합시킴으로써 생산을 시행한다. 그러나 노동력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 속에 실존하는 이상, 노동력의 제공방법은 인간의 의사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측에서 본다면 형식적으로는 구입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살 수 없는> 요소를 가진 상품이다. 그 때문에 기업에 있어서는 노무관리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어떤 경제체제에서나 생산활동을 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으로 노동하기 때문에 공동노동의 조직화가 필요하다. 이상의 특징은 공동노동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특질이 되는 것이다.〔시장메커니즘과 자본주의〕생산된 물건의 분배방법에서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상품의 매매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진다. 분배에는 2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생산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생활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대인분배이고, 또 하나는 생산활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기능적 분배이다. 이 2가지 모두가 궁극적으로 상품매매와 시장메커니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우선 첫째로 각 기업은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자신의 의사로 결정할 수 있다. 둘째로 그 생산품은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에게 대가와 교환해서 제공하는 방법으로 공급된다. 즉 생산자가 불특정 다수의 수요를 예상하여 생산한 것을 거래하는 범위를 시장이라 하고,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을 일치있다.
*목 차*서론1. 인류학의 관점2. 인류학의 연구방법3. 인류학의 역사4. 인류학의 분류① 문화인류학② 사회인류학③ 민족학④ 문화 인류학파와 사회인류학파⑤ 체질인류학⑥ 선사고고학5. 인류학의 사회 기여6. 문제점과 발전방안결론참고자료인류학(人類學, anthropology)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분야로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생물학적인 특징과 문화적인 특징이 어떻게 연유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변화해 왔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 연구대상은 공간적으로는 문화인류학, 고고학, 형질인류학과 같은 광범위한 하위분야를 두고 있다. 문화인류학의 일반이론과 연구방법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 공헌하는 바가 클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고고학은 문헌기록이 전혀 없는 인류 문화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규명함과 아울러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초기 역사시대를 연구하고 있다.문화인류학은 전 세계에 정주(定住)하고 있는 여러 민족의 생활양식인 문화와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생활구조 등을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연구대상은 문화의 개념과 변동 등을 포함하는 문화이론을 비롯하여 가족, 친족, 혼인, 사회조직, 경제체계, 정치조직과 법질서, 종교, 퍼스낼리티, 언어, 예술, 환경 등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을 따로따로 떼어서 연구하지 않고 상호 관련시켜서 총체적으로 접근하고, 문화의 상대성과 비교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문화인류학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미래의 인간생존을 위한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인간생활에 공헌하는 바가 매우 크다. 방법론의 면에서 문화인류학이 다른 사회과학과 구별되는 특징은 문화인류학의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참여관찰을 주로 하는 현지조사에 의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사례분석과 여러 문화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이론을 형성한다는 것이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 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문자가 있는 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다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이 있고,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3. 인류학의 역사인류학은 19세기 중반 당시 유행하던 여러 학문들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초창기에는 진화론ㆍ우생학) 등에 큰 영향을 받아,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초기에는 진화론과 비교의 관점을 강하게 지녔다. 그 후 1900년 초기에 프란츠 보아스)가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의 기초를 닦았다. 고전적 인류학의 네 가지 접근법은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자연인류학이다.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속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학인류학 등이 있다.*1600년대 : 루소와 로케의 인식론적 접근법*1800년대 : 진화론의 발상과 인종적 분류법 - 허버트 스펜서,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1900년대 초기 : 프란츠 보아즈-프란츠 보아즈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미국 인류학계의 아버지라 불리 운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조사기록을 축적했으사회학적 측면을 빼앗아 갔고, 미국인류학의 관심이 사회체계보다 문화 항목들(items of culture)로 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이라는 용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현재 미국에서 문화인류학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넓은 의미의 문화인류학은 선사고고학과 인류학적 언어학 그리고 문화와 사회들의 비교연구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좁은 의미의 문화인류학은 특정 문화의 기록과 분석을 뜻하는 민족지와 특정 문화의 비교분석과 역사적 분석을 뜻하는 민족학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연구주제에 따라 종교 인류학, 친족연구, 경제 인류학, 정치 인류학, 법 인류학, 교육 인류학, 예술 인류학, 성 인류학 등으로, 이론적 성격에 따라 생태 인류학, 심리 인류학, 상징 인류학, 응용 인류학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최근에는 도시 인류학, 기업 인류학, 영상 인류학, 역사 인류학, 의료 인류학, 관광 인류학, 환경 인류학, 정보 인류학과 같은 새로운 분야가 등장하였다.-종교인류학다양한 사회에서 존재하는 종교현상, 즉 초자연적 존재와 힘, 그리고 그와 관련된 관념체계와 행위들을 대상으로 이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종교적인 의례행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우주관, 신앙체계, 지식의 습득과정, 의미의 상징화 과정 등을 심층적으로 연구한다.-경제인류학경제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의 다양한 논의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는데, 원시경제와 농민경제 및 그 변화에 관한 연구, 제 3세계 도시경제의 비공식부문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생산, 분배, 소비에 이르는 경제과정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와 논의를 한다.-정치인류학인간의 정치행위와 정치적 과정에 관한 이론 및 민족지적 연구에 촛점을 맞춘다. 주요 내용으로는 민족주의, 부족주의 등 국가와 민중의 담론, 권력과 국가의 상징과 의례 등을 민족지적 연구를 통한 비교학적 접근이다.-성 인류학모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행하고 생각하는 성이라는 인의식의 상태와 대립되는 집단의식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그 집단이 우주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표현을 말한다. 집단의식이란 그 집단의 평균성원들에게 공통된 믿음과 정서로서 그 집단의 고유의 체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위베르와 모스의 제물의례에 대한 연구와 에르츠의 죽음의 표상에 관한 연구 등은 전형적인 사회학 연보학파의 성과물인데, 이 전통은 그대로 영국 사회인류학의 전통이 되었다. 사회인류학은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 이론(Durkheim's theories of social facts)에 바탕을 두고 사회, 사회조직, 사회구조 등 사회적인 것을 강조하는 구조기능주의 이론으로 발전해 나갔고, 사실 추적적이고 경험적인 민족지적 전통을 구축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사회인류학을 사회와 문화들의 비교연구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고학과 인류학적 언어학 그리고 문화와 사회들의 비교연구를 포괄하는 미국의 문화인류학과 대비시켜 사용하는 용어이다.③ 민족학영국에서는 사회학이 인류학에 예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인류학이 사회학에 예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인류학을 민족(Ethnie, 에뜨니)의 연구, 곧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문화를 가진 집단에 대한 연구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고, 에두아르 샤반느는 민족의 연구라는 의미인 민족학(Ethnologie, 에뜨놀로지)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민족학(ethnologie, ethnology)이라는 용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민족학이란 민족의 역사적 연구와 현지조사적 연구 그리고 문화의 교차비교 방법과 일반화가 결합된 영역이다. 러시아와 유럽, 특히 동유럽에서는 인류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민족학의 연구 단위는 민족이며, 민족학은 민족의 비교분석과 역사적 분석으로 여겨지고, 민족의 비교연구와 역사적 연구 없이는 보편적인 인간과학은 어렵다고 본다. 영국의 인류학자들은 민족학을 민족의 역사적, 지리적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학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초기의 체질인류학은 사람들이나 다양한 인간집단들의 체질적 특징들을 측정하는 인체측정학)이었다. 그 후 체질인류학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 진화를 입증하는 연구가 되었다. 그래서 호미니드의 연구와 인간의 초기 화석 유물에 대한 연구가 급격히 발달하였고, 체질인류학은 뼈와 이빨 등과 같은 화석유물의 잔해에서부터 인간과 인간집단에 대한 정보를 재건할 수 있는 폭 넓은 테크닉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인체측정학은 인종집단들의 특징을 비교하는 것이었지만, 점차적으로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정교한 연구로 발전해 갔다. 현대의 체질인류학은 "의미 있는 연구단위는 인종이다."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다양성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인간집단들은 유전자의 분포라는 관점에서 정의된다."라는 견지에서 인간의 다양성에 접근한다. 현대의 생물인류학은 미시적 진화, 즉 각 지역집단의 진화와 변이를 이해하려고 하며, 인구학적 요인, 인간집단들간의 상호작용, 질병, 영양, 환경 등에 대한 연구와 인간유전학의 연구는 생물인류학의 개념적 도구들을 이루고 있다.⑥ 선사고고학고고학은 발생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전통으로 나눌 수 있다. 고전고고학과 선사고고학이다.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연구를 말하고, 선사고고학은 인간의 출현으로부터 문헌 역사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재건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은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사고고학은 고고학의 고유 영역인 반면, 역사고고학은 역사학의 보조과학이다. 고고학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들의 흐름을 규명하고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역사학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역사학은 기록된 문헌들을 연구하는 반면, 고고학은 기록된 역사 이전의 사회들을 연구한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고고학은 인류학이며 문화를 연구한다는 점이다. 고고학은 인간이 만든 도구와 상징물에 인간의 행위가 반영되는 방식을 연구한다.선사고고학 혹은 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