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ReportSuprematism절대주의차 례1. 절대주의(Suprematism)란?2.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절대주의 회화3. 절대주의 이전의 말레비치의 회화 - 절대주의의 등장배경1) 서구 미술사조의 영향2) 이콘의 영향4. 절대주의의 종결5. 오늘날의 새로운 해석* 도판목록* 참고문헌1. 절대주의란(Suprematism)?1915년 12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당시의 페트로그라드 Petrograd)에서 개최된 《0.10(zero ten)》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미래주의 전시회(The Last Futurist Exhibition of Paintings)’에 말레비치는 35여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0.10》은 대상의 소멸과 부재를 의미하는 ‘zero’라는 절대주의적 주제와 이를 추구하는 10명의 화가들의 전시회라는 의미였다. 이 수프레마티즘 Suprematism이라는 용어는 최상의 주도권, 지배권을 의미하는 불어의 suprematie에서 차용하여 만든 말레비치 고유의 신조어로, 이 전시의 팸플릿 속 「큐비즘에서 수프레마티즘까지, 회화에서의 새로운 사실주의」라는 선언문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이 전시에 출품한 새로운 추상회화들을 통해 그는 이제껏 진실이라 여겨져 왔던 기존의 대상적인 세계가 환영이었음을 폭로하고 이 세계의 참된 실재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자연을 재현하는 것을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여 이미 자연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 것이 미술에서의 진정한 창조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사각형의 형태를 선택하여 ‘비대상 회화’를 추구하게 된다. 말레비치에게 있어서 사실주의란 형식과 내용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된 물체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이 비대상 회화가 바로 새로운 사실주의인 셈이었다.2.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말레비치는 이 전시에서 다른 절대주의 회화와는 달리 을 천장 아래 모서리에 걸었는데[도판 1, 2], 이는 보통 러시아 가정에서 이콘서 주어진 것을 단순화하고 정화하면서 창조된 것인 반면, 말레비치의 추상은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감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또한 가장 근본적인 대비인 흑백대비를 통해 환기되는 감정이 모든 미술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사각형을 이성의 창조물이라 생각하였으며, 절대주의 이전에는 창조적인 화가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왜곡된 형태들과 자연의 모방물만이 존재했었고 자연을 떠나서 회화는 존재할 수 없었지만 절대주의는 절대순수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다양하게 절대주의를 탐구한 말레비치는 을 통한 흑백대비의 실험 후, 17년까지는 다색의 색채실험을 하고[도판 5, 6], 1918년에 [도판 7]을 통해 극단적인 순수성을 완성하였다. 따라서 은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말레비치는 오브제 부재의 흰색 세계에 도달했다. 흰색의 사각형은 흰 바탕 위에 떠오르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무제한적이면서 동시에 제한적인 색채인 흰색 안에서 사각형은 끊임없이 보이고 사라진다. 은 회화의 한계를 시각화 하면서 무한한 자유로 들어가는 작품이다.3. 절대주의의 등장배경1) 서구 미술사조의 영향1900년 말레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아카데미 키예프 Kiev를 다닌다. 그곳은 동시대 미술과는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그는 오히려 민중 예술에 전념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의 이콘을 제작하거나 집안을 장식하는 기하학적 문양이나 동물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옮긴 후에 많은 작품들을 경험하게 된다. 시시킨이나 레핀의 작품들[도판 8, 9]에서 사실성과 색채의 강렬함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야외스케치를 통해 모방적인 회화에 열중하게 된다.첫 번째 모스크바 체류기간 동안(1904-1905) 신인상주의를 발견한다. 작은 터치와 순수한 색상의 톤, 강렬한 색감이 그의 그림에 나타난다[도판 10, 11]. 1907-1908년에는 상징주의에 심취하여 당시 신비주의와 풍자적인 내용에 관심이 상징주의 문학과 연관되어 원색적이고 단순한 형태, 독일의 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직접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이었다. 말레비치도 큐비즘적인, 그렇지만 좀 더 섬세하고 좀 더 실질적인 구성을 사용하면서 상징주의를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도판 15].그 이후 브라크나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배경으로 대상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다. 그는 원근법을 완전히 제거하여 큐비즘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당시 모스크바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미래파의 움직임을 개입시킴으로써 큐비즘을 극복하려한다. 큐비즘의 공간적인 구성과 미래파의 역동적인 시간성의 조합은 러시아인들이 추구하던 정신적 내면을 보게 한다. 말레비치는 이 입체-미래주의의 시기를 후의 비대상의 시기인 절대주의와 구분하기 위하여 ‘기계적 절대주의’라고 하였다[도판 16-19].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래주의자들이 제작하여 1913년 페트로그라드에서 두 차례 공연된 미래주의 오페라 에서 말레비치는 의상과 무대장치를 맡게 되는데, 여기에서 Suprematism의 추상적 구성의 처음 발단이 시작된다. 무대 배경은 검은색과 흰색의 삼각형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것은 절대주의 최초의 선언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어두운 세계에 대한 태양의 일부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도판 20-22]. 말레비치가 이전까지 인물화를 위주로 그리다가 1915년 기하 추상작품들을 제작하게 되고 이를 ‘절대주의’라고 명명한 데에 있어서 1915년 이전의 추상작품이 나타나지 않아 그의 절대주의가 그 이전 시기의 흐름과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평가되었었는데, 이 오페라에서의 무대 디자인은 입체-미래주의적 화면구성과 절대추상작품이 동시에 나타나기에 말레비치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2) 이콘의 영향위에서 살펴본 과정은 서구적 이즘의 영향에만 집중하여 조명을 하였는데, 러시아의 전통문화는 동방 정교회의 영향으로 지극히 동양적이기 때문에 그런 전통의 입장에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당시의 러시아 회화는 고갱, 세잔, 피카소 풍묘사된다. 이콘을 농민 예술의 하나로 파악한 말레비치는 이콘의 내적인 교리나 상징체계는 제거하고, 외적 묘사로서 인물들의 생명력을 살리고 있다.캔버스의 크기나 비율도 이콘의 가장 보편적인 크기를 취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나 등의 이콘에서 나타나는 변형된 ‘정면성’ 법칙인 ‘3/4’자세, 과장되고 긴장된 눈동자의 시선, 그리고 루복 Lubok[도판 25]의 굵은 윤곽선이 피카소 그림에서도 보여지는 원시주의적인 요소와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팔의 표현에 있어서 가운데 인물의 왼팔은 옆에서 본 모습이고 오른팔은 앞에서 본 모습이라 기형적으로 보이는데, 이콘의 인물이나 건물들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다중시점’의 기법이다[도판 26]. 도판 27을 보면 이콘의 ‘비틀기’ 기법[도판 28]과 루복의 윤곽선이 뚜렷이 드러났음을 볼 수 있다.다양한 시공간적 차원의 사건들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형식은 이콘과 말레비치의 회화에서 그 지향점이 서로 상반되었다. 이콘에서의 병치는 천상세계의 원형을 순례하는, ‘절대적 시선의 체험’을 지상에서 가능하게 하려던, 로고스의 가시적 체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지만, 말레비치의 회화에서의 병치는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탈 이성, 탈 로고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병치는 무의 세계이자 얼굴 없는 세계인 비구상적 ‘비대상성’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리하여 결국은 그 어떤 얼굴도 등장하지 않는, 비구상적인 이콘회화인 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검은 사각형을 이콘이라고 말하며, ‘대상을 지워버린 텅 빈 이콘’이라고 한다. 그는 이콘 파괴론자처럼, 가시적인 이미지, 재현적 이미지의 상징적 연장성을 배제하고 이미지가 사라진 부재의 평면을 상정하지만, 그것을 또 이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말레비치의 수프레마티즘을 “이콘 공경론자의 이콘파괴주의”라고 말한다. 정교의 이콘이 성스러움을 상기시킨다면, 말레비치의 이콘은 성스러움이 사라진 의미에 대한 재의미화의 이콘이다.4. 절대주의의 종결은 의 ‘부재로 가 경계마저 허물고 있다.말레비치는 이 작품을 끝으로 절대주의를 종결짓는다. 그는 “더 이상 회화는 새로워 질 수 없는, 구시대적 잔재”라고 말하며, 자신의 개념을 논문 등의 글로써 표현하는 것에 더 주력하게 된다.오브제가 없는 세계가 도래하여 인간이 절대적으로 귀중한 존재가치가 되면 민중의 태양인 사회주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태도를 취한 말레비치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퇴폐적인 정신놀음에 불과했고, 그로 하여금 생산적인 활동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중을 위한 교육기관에서 단순한 그림을 가르치거나 공예품 제작을 도왔다. 공산당은 말레비치를 몽상가적인 철학자로 간주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말레비치는 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새로이 제작하는 그림들에 옛날 날짜를 기록하기도 하고, 추상회화 대신 구상화들을 그리는가 하면 결국 말년에는 초상화 제작에 전념하다가 57세에 암으로 죽게 된다[도판 29-33].5. 오늘날의 새로운 해석브라이오니 퍼(Briony Fer)라는 비평가가 추상에 관한 책 서두에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의 검은색 면에 난 많은 균열을 해석한 부분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한 때 새로운 것의 가장 분명하고 가장 생생한 엠블럼이었던 말레비치의 은 이제 과거가 남긴 유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때 그것은 미래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유토피아적 제스처로 서 있었건만, 그것의 균열이 난 표면은 그것에게 현대적 폐허의 모습을 부여한다. …… 이제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를 위한 기념비로서만 등록되어 있다.”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술가들은 잭슨 폴록처럼 물감의 물질성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서로 엉기게 뿌리거나 균열이 가게 두껍게 칠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물감이 이상적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것의 물질성을 포기했던 말레비치의 정사각형은 시간이 지나 균열이 감으로써 위대했던 그것의 기의는 날아가 버리고 혼돈으로 가고 있는 물질세계의 원칙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1)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