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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자서전 평가A좋아요
    1979년 7월3일경기도안성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벗어나 현재 살고 있는 수원에 오게된 나이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한 다섯 살 때 인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나이는 여서, 일곱살 때부터.. 그러니까 유치원에 다닐 때 부터이다. 일곱 살 때 경기도 수원에 연무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을 다녔고 유치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많은 친구를 접하게 되었다. 친구와 처음 싸움을 했던 경험을 쌓기도 했던 그 당신 한창 호기심 많고 장난이 많았던 어린시절이었다. 그 이후 유치원을 졸업하고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잠자리, 방아깨비 등을 잡으러 다녔다. 집 앞이 창룡문이었기 때문에 잔디밭도 많았고 풀숲도 많아서 곤충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곤충중에 제일 싫어 했던건 사마귀였었던 것 같다. 사마귀는 생긴 것 부터 무섭게 생겼고 백과사전에서 보면 자기가 자기 친구를 먹는 그림이 있어서 사마귀가 날 잡아먹지는 않을까 굉장히 무서워했다. 어떤날은 친구가 잠자리를 잡아서 날개와 머리, 꼬리를 떼고 몸통만 성냥불에 구워 먹으렴 장조림 맛이 나면서 아주 맛있다고 해서 진짜로 몸통만 잘라낸 다음 성냥불로 굽고 먹어보았는데 생살을 씹는 기분이고 물론 맛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몸통의 겉만 탔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지낼 쯤 초등학교 학년 때 전학을 갔다. 어렸을 때여서 만남고 이별을 못느꼈는지 그리운 친구도 연락을 끊지 못하는 친구도 없이 가게 되었다. 새로 전학온 학교는 시설도 좋았고 친구들도 옷도 잘입고 공부도 잘했다. 전학와서 몇 달 생활하다보니 그전까지 없었던 좋아하는 여자애도 생겼다. 다들 그랬듯이 나도 똑같은 남자애들처럼 좋아하는 여자애를 놀리고 장난치는 재미로 학교 생활을 했다. 공부는 물론 초등학교 때니까 스스로 하는 일은 없고 어머니가 하랄 때 하는 것이었지만 내생각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4학년, 5학년, 6학년이 될 때마다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많이 바뀌었다. 5학년까지는 내가 여자애들을 일방적으로 좋아했었던 반면 6학년에는 날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세네명 생겼났다. 물론 좋았는데 표현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그중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지껏 내가 살아오면서 제일 재있었고 추억에 남는 때라고 하면 초등학교 6학년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만난 친구들은 지금까지 13년동안 아직도 만나고 연락하고 있다. 이때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친구들과 십년이상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방식이 남달라서 였을 거라 생각된다. 정년을 얼마 남기시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남자아이들은 엄청 맞으면서 강하게 자랐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혼나야 했는지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셨었다. 그때부터 내생각의 개념도 많이 바뀌게 된 것같다. 6학년 때를 잠깐 얘기하면 그 때 당시 내가 그반에서 운동도 잘했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들이 많았다. 자연적으로 여자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졸업하기 전에는 다과회날을 정하고 팀을 짜서 연극을 하고 다과회를 즐기게 선생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러면서 연극 연습을 위해 팀내 친구들과 하루하루 날을 바꿔가면서 친구집에서 연습을 했다. 물론 대본도 우리가 썼다. 우리팀은 그 때 당시 최고로 인기 있었던 봉숭아 학당 을 했었는데 그 중에 내가 맡은 역은 주인공인 맹구역할 이었다. 대사할 분량이 엄청 많았다. 어떻게 그걸 다 외웠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마 그때 당시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던것 같다. 결국 그날 연극 1등은 우리팀이 선정됐고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준비하신 학용품 등을 선물로 받았다. 그 때 다른반 6학년 친구들이 구경을 와서 많이 재미있어 하면서 한편으로 부러워들 했다. 지금도 동창회 모임이 있으면 그때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리고 나서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우리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한 십분은 걸어 들어가야 하는 먼 곳으로 발령 받았다. 교복을 처음 입는 것도 생소했고 남자들만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중학교엔 별로 정이 들지 않았다. 거의 중학교 시절은 기억나는 일이 없고 특별한 일없이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있다면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현재로 얘기하면 일진회에 소속되어있는 친구가 잇는데 쳐다본다고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길래 그 당시 기분도 안좋고 왜 맞았는지 모를는 상황이었기에 화가나서 그 친구를 흠씬 두들겨 패줬다. 쌍꼬피 터트릴 정도 맣이 때렸는데 다음 쉬는 시간에 그 써클에 소속되어있던 한 이십명되는 친구들이 우리반 교실로 몰려와 날 겁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일대일만 상대한다고 했더니 서로 붙자고 해서 내가 그럼 하루에 한명씩 붙자고 하고는 그날을 무사히 넘겼다. 그 이후에는 말만 붙자고 했지 한두번도 아니고 매일 싸울 수는 없어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는 청소도 않하고 빨리 도망만 다녔었다. 그 친구들이 왜 도망가냐고 따지러 왔을 때 우리반에 전학온 친구가 그 때 당시 우리보다 한 살 많은 애였는데 그 친구들과 얘기하며 잘 풀어서 그 이후론 아무탈없이 중학굘ㄹ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학력고사라는 입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그나마 중학교때보다 적응을 잘했다. 친구들도 많이 사겼고 중학교때 전적이 있어서 날 건드리는 불량학생도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선도부장을 하면서 착실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에 우리 학교에 동아리가 많았었는데 YMCA회관을 빌려서 다른 학교 여고와 조인해서 하는 문학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문학동아리는 현대 소설을 읽고 난 후 모두 모여서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회장이 한 주제를 정하면 서로 자신들이 읽고 느낀 생각을 서로 공감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해가야 하고 말 실력도 있어야 했다. 거기에 여학생들도 있으니 잘해야 겠다는 생각은 저절로 들게 마련이었다. 이때부터 이서에 눈뜨기 시작한 것 같다. 여학생들에게 말 걸기도 힘들고 얼굴이 빨개지고 그런데 그런것도 한 두달 후에는 재밌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같이 놀이 공원도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 견학도 가면서 재밌게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새 고3이 되었다. 한창 대학 진학 때문에 심란 할 때였다. 나름대로 공부는 하고 있었지만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래도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에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하였는데 1차 서류심사에서 합격을 해서 진해로 가서 2차 체력검사와 신체 검사가 있었는데 신체검사에서 일명 오다리라서 시험에 덜어지게 되었다. 사관학교에 지원하면서 그에 대해 준비하느라 시간을 많이 뺨앗기고 정신이 헤이해 졌을까 수능 백일 정도를 남기고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른 담밸였다.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다. 수능시험을 치고 난 후 대학진학에 있어서 선택한 전공은 건축 공학이었다. 이무것도 모른채 그 당시 인기가 많았던 학과였다. 인천대,수원대,경희대,한서대 이렇게 접수를 하게 되었다. 경희대 외에는 다 합격했는데 그 중 선택한 대학이 한서대 건축과 였다. 수원대는 야간 합격이라는 핑계로 집가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대학교 1년을 자취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철없이 대학 1년을 마쳤는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자원입대를 하여 군생활을 하고 무사히 마친 후 대학 복학하기전 1년동안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역시 국가고시는 짧은 기간동안 만만치 않은 시험이었다. 다시 대학교에 복학하여 군대도 갔다왔으니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대학생활에 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점 선택에 강요를 받는 생활이 되었다. 이 선택이 옳을까 전 선택이 옳을까 가끔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지껏 살아오면서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를 깊이 한적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고등학교때 공부열심히 할 걸 하는 후회는 없다.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도 선택을 해야 안다. 하지만 그때도 내 선택은 나중에 후회없는 선택을 하도록 노력할 것이고 그게 지금 현재의 내모습이다.
    인문/어학| 2004.07.07| 4페이지| 2,000원| 조회(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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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소개글] 자기 소개글 평가A+최고예요
    간단한 자기 소개79년 수원에서 태어난 나는 교사 생활을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한살 많은 누나와 자랐다.소위 교육자 집안이라 일컷는 가정인지라 나의 잘못된 행실이 부모님께 누가 될까 싶어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말썽이나 장난은 치되 크게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가끔은 이런 상황을 (나에 의해서가 아닌 부모님의 직업에 대한 행동에 제약) 어렸을 땐 잘 몰랐고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선생님이나 주위 어른들이 교육자 집안 아들로 나를 평가하고 바라 보는 시선에 답답하고 숨막혀 탈피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마음이 약해 그렇게 벗어나 본 적은 없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오히려 이런 생각들이 오늘의 나의 인내심을 형성하게 해준 것 같다.중학교 때부터 미술과 음악은 아니었지만 예술적인 어떤 창의적인 것을 하고 싶어 했다.(정말 맹목적이었다. 그냥 그런 부류의 장래의 직업이 낭만적이라 생각했었다. 또, 그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은 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장래의 직업으로 삼고 싶어 했다.)그래서 택한 전공이 건축학이다.내가 원한 공간을 창조해내고 예술로 승화 시킬 수 있으며 또 그 것을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공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야 말로 정말 어렸을 때 생각했던 그런 것이었다.다음 질문들에 대해서 답이 나오겠지만 바로 위에 말들은 곧장 다 흐트러지게 되며 이제 반 개월 남은 시간 안에 최대한 나를 발전시켜 사회가 원하는 자격은 준비하되 갈 방향을 못 찾고 방황하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현재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올해 졸업하는 내게 과장 큰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진로 결정이다.졸업 후 진로 계획은 어떠한가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도 상당히 혼란스럽다.공부를 더 할 것인가. 취업전선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어느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4년 동안 배운 것은 포괄적인 맛을 본 것에 불과하기에 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로(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렸을 때 그토록 원한 건축 설계가 아니라 시공, 아니면 건축 재료이다) 나가 공부를 더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공부를 더하고 나왔는데 취업이 불문명하다면 그것도 크게 고려해봐야 할 문제이기에 쉽게 선택을 못 하고 있다. 지금 졸업해서도 경력사원이 아닌 이상 취업하기 힘든 상황에 말이다.(건축은 크게 건축설계, 건축시공, 건축재료, 구조역학 등으로 나뉘게 된다건축설계를 한다면, 소위 말하는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설계를 하는 것이고, 건축 시공을 한다면, 공사 현장에서 관리 감독하며 도면에 그려진 데로 부실하지 않게 건물을 세우는 것, 재료를 한다면, 여러 건축 재료 중 어느 재료를 쓰고 개발해야 합리적이고 진취적인가에 대한 것을, 구조역학이라 함은 설계 도면을 하청 받아 건물이 붕괴되지 않게 각종 철근량 이라던가 시멘트량등 적정한 물량을 산출하는 것이다)나의 꿈과 비젼,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인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나의 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학교때 생각했던 예술적인 부류에 근접한 일을 하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내 전공에서 보면, 공간을 창조하는 건축 설계로 방향을 잡아 그에 따른 자격증을 따서 건축가가 되어야 제격일 것이다.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텔레비전에 몇몇 나오는 건축가와는 달리 공급은 많지만 수요는 한정 되어 건축가가 집장사로 전락하는 마당에 내가 꿈꾼 길은 검은 구름만 잔뜩 끼어 있을 뿐 냉혹하게 말해 비젼은 사라졌다고 본다.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시공이나 재료 중 택하여 본 질문에서 그것에 따른 비젼과 10년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하는데, 내 자신 조차 어디로 향해 나아갈지 결정 못하고 있는 상황에 그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분명 거짓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내 생각을 되새겨 진실을 밝히는 글에 거짓을 말하기 싫다.다만 33살의 나이라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고 항상 가정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며 부모님과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나는 과거의 실패(혹은 고통, 슬픔, 질병, 사망, 기다림등)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중학교 때 정말 친한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나보다 너무 빨리 떠나버렸다.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굿 프렌드였다.그 친구가 먼저 떠난 것도 너무 마음이 아팠으나 자식 먼저 보내고 오열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더더욱 가슴이 메여 터져왔다.이 놈의 자식! 받기만 하고 모 하나 드리지도 못 한채 슬픔만 남겨 주고 갔구나...!이래서 평소에 잘 해야 된다는 말이 나왔구나...중학교 때 한참 반항심에 물들어 있을 때 이 일을 당하고 나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따랐었지만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잊혀 지듯 항상 이런 맘이 내 안에 있으면서도 밖으로 실천이 안 된 적도 많았다.하지만 내 맘속에서 친구 부모님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 한 표현은 어색할지 모르지만 내 방식대로 부모님께 최선을 다할 것이다.인생을 마무리하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크게 성공하여 그에 따른 부를 축척. 이를 내 이름으로 된 장학회를 설립한다거나 사회에 환원한다면 그 양반 참 인생 잘 살았네 하고 나의 친족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도 기억될 것이 분명하나 나는 이런 큰 야망 까지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인생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나를 욕되게 하는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나에 대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나는 이 사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길 원하는가솔선수범. 이 말이 정답인 것 같다. 그 때 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 몸으로 직접 행동하는 것이 그 어떤 노력보다는 최우선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존경하는 인물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부모님. 학창시절 반항심에 가득 차 있었을 때도, 온갖 걱정 다 하시게 했는데도 나를 이만큼 키워 주셨다.과연 나도 결혼을 해서 내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 된다면 일일이 열거 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했던 오만과 방탕에 대한 보살핌을 해 주셨던 것처럼 내 자식을 내가 그렇게 키울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인문/어학| 2004.07.07| 4페이지| 1,500원| 조회(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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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과 사랑]조선시대의 성 문화 평가B괜찮아요
    성과 사랑조선의 성과 문화목 차 조선 시대 사회 성교육 혼인제 이혼제 간통 강간 매춘 춘화조선시대 사회조선 왕조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는 사회였다. 따라서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중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 역할 담당자로 인식하였다. 여성을 출산, 양육, 가사노동에 전념 시키기 위해 법적으로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두어서 재혼 금지, 남녀의 내외법, 칠거지악과 같은 부녀의 도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여성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으며,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내외법?조선 왕조는 유교적인 윤리 규범을 정착하고자 노력하였다. 즉 상하귀천에 따른 신분질서의 유지와 관혼상제에 있어서 유교의 윤리를 따르게 하였다. 가족을 기본적인 통치구조의 단위로 삼아 사회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가족 구성원 가운데서도 여성을 규제하여 확고부동한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내외란 안과 밖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남녀 부부를 의미한다. 남녀를 구별하고 부부간에 예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 남녀간에 서로 멀리하고 접촉을 피한다”는 것이다. 가옥구조에서도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히 구분하였고, 양반가의 여성들은 외간남자와 말을 건넬 때도 제3자를 통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풍속을 교화시킨다는 명분하에 내외법을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법률화했다.칠거지악?첫째, 시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하고, 둘째,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셋째, 음란하여 낳은 자식에 대한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할 수가 없고, 넷째, 투기가 심하고, 다섯째, 나쁜 병이 있고, 여섯째, 말이 많아 대가족제도를 운영할 수가 없고, 일곱째, 도둑질을 한 경우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 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 봉사가 보편적 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 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조선 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 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농민과 하층민의 부녀자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 이었다.성 교육임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에서 오늘의 성교육과 다르다. 여자들은 주로 어머니로부터, 남자는 서당에서 논어 공부를 마친 다음 '보정(保精)' 이라는 성교육 과목을 배운다. 성교육 내용에는 성교 횟수도 포함되는데 중국 도가서인 '포박자 (抱朴子)'의 예를 들어 20대는 3~4일에 한번, 30대는 8~10일에 한번 정도가 적당 하다고 했다.혼인제우리나라 혼인 풍습은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거기서 살다가 어느 정도 아이가 크면 시집으로 가는 서류부가혼이었다.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결혼식은 여자집에서 하되 처가에 머무는 기간이 짧아지게 되었다. 이를 반 친영제라 한다. 이런 변화는 여성에게만 재가를 금지하는 등 균형 잃은 결혼 문화를 낳았다. 이로써 부계중심 친족 구조가 자리를 잡았으며, 여성 생활은 제약이 심해지고 여성의 지위는 더 열악해 졌다.이혼제앞서 말한 소위 '칠거지악'으로 대표되는 이혼사유를 적용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아 최소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삼불거'가 있었다. 삼불거란 처를 쫒아낼 수 없는 세가지 항목으로써 첫째, 쫒겨나면 갈 곳이 없다든가. 둘째,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지냈다든가, 셋째, 가난할 때 시집와 집안을 일으킨 경우 그러나 삼불거에 해당되어도, 나쁜 병에 걸렸다거나 간통을 한 경우는 예외로 쳤다. 또한 부모에 대한 불효도 구제받지 못했다. 그럼 조선시대 여성들이 매일 이혼의 공포에 시달렸을까?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이혼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정절 이데올로기에 기인한 것으로, 재혼도 할 수 없는 이혼녀의 양산은 사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칠거 사안 중 음란과 시부모에 대한 불효 외에는, 거의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간 통조선시대 간통의 개념은 지금과는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 모두 기혼 유무를 막론하고 혼외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모두 간통으로 취급했다. 미혼 남녀간의 성 관계도 문제가 되었다는 말인데 미혼 남녀의 경우는 기혼 남녀의 간통에 비해 가볍게 처벌 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간통으로 인정 되었다. 또한 간통죄는 부부 상호간의 고소 여부에 상관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었다.간통 처벌간통을 저질렀을 때의 처벌은 가장 보편적이었던 화간이었을 경우 장형 80대의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간통녀가 유부녀였다면 10대가 추가되었다. 반면 남자는 처가 있는가의 여부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간통죄가 형식적으로는 쌍벌주의를 표방했으나 형량에 있어서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조간일 경우에는 장형 100대로 화간에 비해 20대가 많았다.강간조선시대에도 강간은 상대방의 의사가 무시된 물리적 강압에 따른 성행위로 엄연한 범죄 행위였다. 그러나 강간을 당한 여성은 동정을 받기보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먼저 받는 분위기 였다. 그만큼 강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현재 자료상으로 나타나는 조선시대 강간 가해자들의 대다수는 많이 배운 양반 신분의 남성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강간의 대다수가 사회 신분 및 지위에서 비롯된 권력성 성범죄 였다는것을 알 수 있다.강간 처벌조선 시대에는 양반가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을 때와 천민 여성이 강간을 당했을 때가 너무 달랐다. 천민들은 법의 통제력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강간자의 사회적 위세에 굴복 되기 쉬운 미천한 신분이기도 했다. 특히 주인이 자기집 여종을 강간한 경우가 많았을 텐데 국가는 오히려 눈감아 주었다. 오히려 강간에 저항하다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여종이 처벌 받는 일이 있을 정도 였다.매 춘조선시대에는 매춘 행위가 일절 금지 되었다. 매춘은 풍속을 문란시키는 음란한 행위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명분일 뿐 실제로는 기녀나 첩과 같은 양성적인 매춘이 제도권 안으로 흡수 되어 있어 다른 나라에 비해 필요성이 덜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기녀를 제외한 일반 양인 여성들의 매춘을 일절 금지했지만 음성적으로 양산되는 매춘을 막을 수는 없었다.유녀 , 화랑조선시대 매춘에 종사한 직업 중 대표적인 것이 기녀라고 할 수 있지만 기녀는 일부 양반 지배층만을 상대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기녀는 제도권 내의 매춘녀라 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인 매춘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선시대 제도권 밖의 매춘녀는 이른바 '유녀' 와 '화랑' 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기녀처럼 신분상 매춘행위를 하도록 지배층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매춘녀들은 아니다. 단지 간통 등의 이유로 순결이나 정조를 잃어버린 양인 여성들이거나 그 밖의 천민 여종들이었다.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여성의 정조를 강조한 조선시대에 양인 여성들이 매춘부로 전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양인 여성들의 매춘행위를 근절하고자 했다.춘 화춘화의 발전 배경 김 홍 도 신 윤 복춘화의 발전 배경농업 생산력 증진에 따른 서민층 부농이나 상공업 활동으로 돈을 모은 부민층의 형성으로, 더 이상 유교이념을 내세운 양반사대부의 지배력이 전체 사회를 완벽하게 이끌어 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문화는 사대부 중심만이 아닌 경제력과 지식을 갖춘 중인층이나 하급관료, 그리고 부민층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단원 김 홍 도김홍도는 김응환의 제자로 신라 때의 솔거 이후 우리나라 그림의 전통을 확립한 천재 화가이다. 7~8세 부터 20여세까지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 선생으로 부터 그림과 글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그의 그림 속에는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풍취가 깊이 드러나고 서민적인 체취와 독창적인 신선한 조형미가 담겨있다.신 윤 복조선의 화가. 자는 입부, 호는 혜원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 무속, 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데, 이는 유교풍의 사회에 대한 예술로서의 저항인 동시에 인간주의적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평가 되고있다.여기 까지에요~~ 너무 졸립게 했다면~ 죄송해요 감사합니당 꾸벅~^^;{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04.05.11| 41페이지| 2,000원| 조회(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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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정체감] 나의 성 정체감을 찾아서
    나의 성을 찾아서~성정체감이라는 말에 명료한 뜻을 찾아 이해하고 들어가는 시작부터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감추고 싶은 것, 말하기 껄끄러운 것이라고 무언의 말만 계속 하고 있다.이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있어 큰 불편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무의식속에 파묻혀 있는 부분 이었기에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에 있어서 어려움을 감출 수가 없다.과연,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나의 성정체감은 무엇인지 유년시절부터 차근차근 되 짚어보고자 한다.유년기....누구나 그렇듯 유년기시절의 성은 그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하게 그 나이 때에는 여자남자란 구분이외엔 서로의 몸에 대해 그렇게 표시되는 것이 없을뿐더러,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여자 남자의 구분에 있어 다르다는 것을 교육 해줬다 하더라도 모를 때이고 안다고 해도 아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유년기 시절을 떠 올리면서 별다른 기억을 찾아내지 못하는 와중에 너무 희안하게 생각이 든 것이 있는데, 소꿉장난 할 때 왜 여자 아이는 엄마 역할을 했고 남자 아이는 아빠 역할을 했을까? 과연 이 답을 알 수 있을까?초등학교...매년 생일 때는 어김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둔 앨범이 있는데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찍혀있는 사진을 보면 여자 아이는 한명도 등장하지 않다가 5학년이 되면서부터 여자 아이가 등장 해 있다. 크리스마스 때 카드 역시 5학년 때부터 여자아이한테 받은 카드가 있다. 생각해보니까 5학년 때 한 여자 아이로부터 나 너한테 편지 해도 돼? 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에 태어나서 처음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아이라 기억이 역력한데, 그때 내 대답은 그냥 무시 한 채 휙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갔다. 왜 그렇게 무시했는지 정말 한심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에 대한 어떤 그 무엇 보다 동성끼리의 부딪힘이 좋았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그러면 놀림거리가 되었을 뿐이었지 성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을 했었고 구분을 지을 수 있는 판단이 들어서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 여자 아이는 내가 이때 생각하지 못했던 성에 대한 구분과 의식이 조금은 빨랐던 것이 분명하다.유년시기와 마찬가지로 성에 있어서 뚜렷한 기억이 없기에 현재 어린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옛 추억을 조금이나마 되살려 볼 수 있는가 하는 마음에 구성애 성 고민 게시판을 찾아보고는 깜짝 놀랐다.내가 중학교 때쯤인가 알았던 자위라는 개념을 벌써부터 알고 그 에 대한 질문들을 보면서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꼈고 바로 창을 내려야만 했다.중학교..대부분의 이 시기 남자라면 포르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러하다.지금은 인터넷이 보급화 되어 포르노 테입 이라는 존재가 생소할지 몰라도 이 매체가 나에겐 처음으로 여성의 몸을 보게 해준 유일한 교육 책 이었다.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어 소리 지르며 저런 행위들을 하고 굉장히 기분이 좋은 듯한 신음을 내는지 또한 마스터 베이션을 통한 쾌감을 알게 해주던 시기였다.포르노는 내게 여성이란 내부는 이렇게 생겼고 남성과의 성 행위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해서 성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물론 성을 거짓과 과장으로 묘사한 포르노를 분명한 성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안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 당시 그런 것을 봤다고 해서 그런 거짓과 과장을 어느 다른 이성과 문제를 일으키며 지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때 아무런 성의식 없이 본 자료들이 지금에 와서 성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본다. 여하튼 포르노가 성이 어떻게 표현되었건 간에 유일하게 남성과 여성이 이렇게 생식기관이 다르다 라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성역활에 대한 구분은 (초등학교때 실과 과목이 포함 되어 있었다면) 중학교 교육 과정이었던 기술과목을 배우면서였던 것 같다.중학교 기술 과목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 예로 손수 못질을 해가며 책꽂이를 만들며 기타 간단한 몇가지 기계를 다루는 것을 배운다. 예전부터 실과나 기술에 대한 교과는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집안의 남녀의 역할에 대해 분류해 주었으며 나로서는 아무런 의문감이 없이 받아들이게 했고 가정에서 보았던 남자 여자의 그 역할을 재확인 해주었던 것 같다.이때 까지 이런 성 역할 태도를 판가름하게 된 현상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한다면, 그냥 무의식중에 그렇게 해왔던 것을 봐 왔었고 또 그것을 가르침 받았으며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내 또래 아이들도 그랬으니 나에게 있어 성 역활의 구분은 무조건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였지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이유를 못 느끼는 것은 당시 사회적인 문화의 가르침 이었다고 본다.고등학교..이성과 만나고 싶었고 스킨 쉽 하고 싶어 했던 때였다.이성 친구를 만나면서 팔짱도 끼고 싶어 했고 키스 등등 그 이상의 무엇이든지를 중학교 때처럼 웅크리고만 있지 않고 표출 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자신감이 생겼다.나보다는 힘이 약하고 여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만큼 믿음직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내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에서 막연히 이론으로만 형성되어 있던 남성의 역할이란 것이 이성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표면으로 드러나고 또한 그렇게 행동한 것을 보면 이 경험에서부터 나의 성정체감은 형성의 단계를 넘어 확립의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이쯤에서 본다면 나는 분명 어렸을 때는 동성이 최고 인줄 알고 어울리며 노는 것 밖에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만 고 학년이 되어 갈수록 여성을 좋아하고 극히 평범한 이성애자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 이후가장 먼저 군대 얘기를 빼 놓을 수가 없다.나에게 있어서 여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했고 내 성정체감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다행이 이성이 없는 곳에서의 2년 간의 생활은 내게 신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성이 남성으로 거듭날 수 밖에 없게 해주었던 곳이었으나 몇몇 친구들은 성가치관 혼란에 따른 동성끼리의 사랑을 애절하게 바라는 성향을 갖은 친구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가 몇 천명 모아둔 곳에 없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
    인문/어학| 2004.05.02| 4페이지| 2,000원| 조회(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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