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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장을 다녀와서-상 갤러리 평가A+최고예요
    내가 다녀온 미술관의 이름은 “상 갤러리”로써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어떠한 미술관을 가야할지 고민을 많이 여러 군데를 알아보았다. 평생에 다시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샤갈 전시회”를 가려고도 했으나 많은 학우들이 봤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평소에 관심이 많은 우표문학 시리즈 전시장을 찾았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표를 수집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우표를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우표를 보면 그 사회의 문화와 시대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우표의 배경이 되는 사진이나 그림 등은 그 발행일의 기념이나 특정행사 또는 문화적 관심사나 소중한 것들을 발행하기 때문이다.그러한 면에서 우리나라 우표에서 우리 문학작품이 여러 해에 걸쳐 실리게 된 것은 1994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특히 우표 배경그림으로 우리 문학작품이나 고대 소설이 실리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우리 정부나 사회에서 문학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소중함을 일깨웠다는데 있다.문학, 그림, 글 등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고 보존 발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지난 10월 10일 우리나라 우표의 문학시리즈 배경 그림을 그린 월암 정영남 선생님의 우표문화시리즈 전시회장을 관람했었다.상 갤러리 전시장은 인사동 입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2층의 구조로 되어 있으나 월암 선생님의 작품전은 1개 층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작품의 개수는 그동안 정보통신부에 의해 발행된 우표 그림 시리즈 13점을 비롯한 기타 약 20여 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의 크기가 모두 50호 크기 이상으로 제작되어 있어 관람하는 입장객의 입장에서는 시원하고 자세하게 작품을 관람 할 수 있었다.특히 작품은 모두 우리나라 고대 소설이나 구전소설 등 문학작품 등을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속의 모습을 수목담채화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우선 우표 문학시리즈의 전시 작품으로는 구지가, 정읍사, 찬기파란가, 제망매가, 왕오천축국전, 여수장우중문시, 가시리, 사모곡, 홍길동전, 춘향전, 혈의 누, 구운몽, 그리고 흥부전등 13점이다. 모두 중?고등학교 문학, 국어, 역사 시간에 한번 이상씩 듣고 배웠었던 작품들로써 우리의 머릿속에 작품의 이야기, 배경들을 알고 있을 정도로 친숙하고 반갑다. 때문에 미술, 문학 작품에 평소 관심이 없고 쳐다보지 않던 사람들도 친숙하고 쉽게 작품을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았다.내가 관람한 첫 작품은 ?흥부전?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흥부전의 내용을 그림에 담았다. 특히 흥부전을 비롯한 모든 우표문학 시리즈 작품에는 항상 오른쪽 상단이나, 왼쪽, 또는 왼쪽 상단에 항상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나 이야기를 설명해 두었다. 이야기의 설명은 때에 따라서는 순수 한글으로, 때로는 현제는 사용하지 않는 고대 초기의 한글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문으로,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표현 또한 우표의 배경이 되는 그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작가의 세심한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작품을 좀더 쉽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흥부전에는 한글로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함양과 운봉 두 얼품에 형 놀보와 흥보가 살았는데 놀보의 심술로 쫓겨난 흥보가 죽은 ........ 흥보 부부는 금술이 좋아 아들만 아홉형제를 줄줄이 낳았으나 양식은 늘 모자란다. 어느날 처마밑에 제비 한쌍이 집을 짓고 새끼를 치는데...”이 작품은 한글로 적혀 있었고,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쉽게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림을 보면 왼쪽에 흥부집이 빨래줄에 제비들이 앉아 있고, 대청과 마루에 애들이 놀고 있고, 흥부가 부인을 집 앞에서 맞이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을 보면 가난하게 살고 있는 흥부의 집이 어떻게 작가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특히 평소 제비가 일반 가정에 쉽게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이 좀 특이한 점은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주인공의 이름들이 흥부 놀부가 아닌 흥보, 놀보로 표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작 소설의 내용이 그렇게 표현 되었으리라 짐작을 한다.다음의 작품으로는 ?구지가?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가락국 시비 “구해국 건국신화”의 내용으로 “영신군가” 또는 “구지봉영신가”라고도 한다. 내용은 가락국에 아직 임금이 없어 9명의 추장이 백성들을 김해 구지봉에서 신의 소리가 들려 추장들은 모든 백성들을 구지봉에 모아 놓고 신의 계시대로 흙을 파해치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그렇게 않으면 구워 먹으리” 라는 노래를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불렀다.그림의 특징으로 울창한 산속 맨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기원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것은 아마 백성들이 작품의 내용대로 무엇을 기다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는 구지가의 한문시가 적혀 있다.?홍길동전? “조선조 세종때 서울 사는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천한신분 때문에 도적의 두목이 되어서 할빈당이라....”이렇게 순수 한글로 적혀 있어 현 시대의 어떠한 사람도 모두 글을 해석할 수 있다. 내용은 홍길동이 하늘을 날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또와 기생에게 날아가고 있는 장면으로 주인공인 홍길동이 바보스런 관리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무엇을 훈계하는 것만 같다.?구운몽?의 시대는 조선 후기 숙종 15년(1689)에 김만중이 지은 고대소설로 귀양지 어머니 윤씨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림 왼쪽에는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으로 시작하는 작품 설명이 있다.작품의 특징은 가운데 주인공 약 10여명만을 칼라의 색채로 채색하고 나머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희색의 명암으로만 그림을 처리하였다는 점이다. 중앙의 둥근 멍석위에 중요한 사람들이 앉아 있고(양반으로 보임), 그 주위로 무수히 많은 일반 서민들이 둘러싸고 설교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사실 이것이 어떠한 장면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의 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든다.?혈의 누? 이것은 소설 “혈의 누”에서 옮긴 것으로 실제 우표로 발행된 그림을 실제 그림의 중요한 부분만을 이용한 것이고 실제 그림은 좀더 크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일본, 미국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주인공 옥련의 삶을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서울 중앙청으로 생각되는 건물에 걸려있는 성조기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부분이 검은색 회색으로 표현이 되어 있으나 그림 구석에 위치한 성조기아 특이하게 붉은색 파란색으로 칼라를 갖고 표현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다.?사모곡?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보다 더 크고 지극함을 낫과 호미에 비유하여 읊은 노래이다. 글은 한글이 온전하지 못하고 현재 쓰는 한글이 옛날 우리가 사용하던 구어체의 글씨이며 한문을 섞어 쓰고 있다. 부부가 넓은 논에서 남편은 낫으로 풀을 베고 아낙네는 옆에서 자식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이다. 뒤로 둘이 사는 것으로 보이는 집이 있고, 무엇보다 화려한 색깔인 노랑, 분홍, 초록, 파란색을 사용하여 그린 꽃들이 참 아름다웠다.?여수장우중문시?는 고구려 영양왕때 명장이었던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보낸 한시로 유우중문이라고도 한다. 그때의 시를 그림 왼쪽 상단에 한문으로 적어 두었다. 그림은 을지문덕 장문이 수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성곽위에서 직접 편지를 적고 있는 내용으로 특이한 점은 모든 그림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칼라로 표현하는 작가의 특징대로 을지문덕 장군을 비롯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만 색을 입혔다는 점이다.?찬기파란가?는 신라 제 35대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십구체 향가로써 경덕왕이 영복승을 찾다가 충담사를 만나 “그대가 지은 찬기파란가, 사뇌가의 뜻이 매우 깊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묻자, 충담사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는 대목이다.?정읍사?는 정확한 제작 연대는 없지만 경덕왕 이후 구백제 지방의 노래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내용은 정읍현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왼쪽에 순수 한글로 가요를 적어 놓았으며 큰달의 크기가 사람만 하게 표현 된 것이 밤늦은 시간과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춘향전?은 우리 모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판소리 소설로써 내용상 춘향과 이몽룡의 연애담이 중심이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춘향이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에 맞서 절개를 지킨다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호수가에서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와 이를 지켜보는 월매와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는 방자가 그려져 있다. 그네를 타는 춘향이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 모습에서 그녀가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모습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예체능| 2004.10.28| 5페이지| 1,000원| 조회(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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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고] 소비자 행동론
    ☞ 동일한 제품군에 해당되는 2개의 브랜드 중 하나는 남성 소비자에게 호소하는 광고를 다른 하나는 여성 소비자에게 호소하는 광고를 골라 각각의 메시지 전략을 기술하시오.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제품은 자동차 이다. 그리고 기아자동차의 스펙트라와 GM대우의 칼로스 다이아몬드의 두 브랜드를 선택 하였다.전체적으로 스펙트라의 경우 남성 소비자를 대상으로 광고를 하고 있고 칼로스 다이아몬드의 경우 여성 소비자에게 호소 하는 광고 이다.먼저 기아자동차의 2003년형 스펙트라 광고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현대 자동차는 하반기 신차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장나라를 내세워 준중형차 ‘스펙트라’의 광고를 선보였다. 광고의 제일 첫장면은 장나라가 화면에 꽉차게 나온다. 광고가 나올당시 장나라는 남성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여배우였다. 여기서 남성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게 한다. 이는 기아 자동차가 첫 시판에 시선을 확 사로 잡을수 있게끔 하는 전략이다.다음은 장나라가 스펙트라를 바라보면서 차의 이모저모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자동차의 전면과 후면을 비춰주는데 이는 스타일은 부드럽고 세련된 이미지를, 후면스타일은 전면과의 조화를 통한 뉴 스펙트라만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강조했다. 헤드램프, 라디에이터 그릴, 알루미늄 휠, 프런트 범버 등을 개선, 신규 적용함으로써 고품격의 세련된 이미지로 중형차 수준의 준중형 세단임을 강조했다.장나라는 스펙트라의 변화를 꼼꼼히 살피며 스펙트라만의 장점을 보여준다. 살짝 웨이브 진 긴 머리와 차분한 블루빛 데님 소재 의상으로 기존에 발랄하고 어리기만 하던 장나라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연출했다.장나라가 움직이는 스펙트라를 보다가“와 ~ 달라 졌다. 얼굴도 속도~ 스펙트라가 달라졌다. 음... 소리도~‘’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속을 관찰하는 장면에서는 실내는 실내는 편안함과 고급스러움이 조화된 인테리어를 표방해 부드러운 느낌의 베이지색을 주 인테리어 칼라로 정했으며 첨단 메탈 센터 페시아를 적용해 고급스런 이미지를 높였다. 또한 체인지 레버, 파킹레버 등 버튼 류와 오토 인디케이터 판넬을 크롬화해 세련된 이미지로 등장한 장나라가 한층더 세련미를 높였다.특히 '우리나라 스펙트라'라는 자막은 장나라, 우리나라, 그리고 스펙트라 라는 말을 운율감 있게 조화시켰다. 이렇게 스펙트라의 새로운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장나라가 자동차의 앞부분에 뽀뽀를 한다음 정면을 바라보며 마지막의 결정적인 말을 남긴다.“ 오빠두 스펙트라고 바꿔!!~ ”이로 인해 남성들이 스펙트라를 한번쯤 더 생각하게끔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다음으로는 GM대우의 칼로스 다이아 몬드광고를 살펴 보겠다.GM대우 칼로스 다이아몬드 는 GM대우가 최근 대한민국을 대표 하는 소형차를 표방하여 야심차게 내 놓은 제품이다. 소형차 소비자들이 가장 아쉬워했던 사양인 알루미늄 휠, 파워스티어링,핸즈프리, ABS, CD 플레이어 등을 기본으로 장착한 ‘꿈의 소형차’라는점을 강조하기 위해 CF도 누구에게나 가장 꿈 같은 순간인 연인들의 프로포즈를 소재로 삼았다.
    학교| 2003.06.14| 2페이지| 1,5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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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과 영역] 음악과생활(시험문제와 정리) 평가C아쉬워요
    고대의 음악음악사에서 고대는 선사 시대로부터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까지를 일컫는다. 이시대의 음악에 관한 자료는 매우 적지만, 옛 문헌과 동굴.무덤.사원 등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에서 당시에도 음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있게 한다.당시 음악으로는 시편에 붙여진 단성의 노래가 많이 불리었고, '리라'와 '아울로스' 등의 악기가 사용되었으며, 피타고라스에 의해 음악 이론이 발달되기도 하였다.중세의 음악6세기부터 15세기까지를 중세라 하며, 성가(찬트)의 발전과 다성 음악의 시작, 세속음악의 출현 등이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중세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던 크리스트교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성가는 10세기까지 발전했고, 11세기에는 다성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양식은 후에, 노트르담 악파나 아르스 노바 음악으로 이어졌다.또한, 십자군의 원정 등으로 나라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성가 이외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인 일반 세속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귀도 다레초는 악보와 계명 창법을 고안하여 음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르네상스의 음악1450년부터 1600년까지를 르네상스 시대라 한다. 르네상스란 서유럽 여러 나라의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의 부흥 운동이다. 이러한 사회적 기운은 음악에서 세속 음악과 다성 음악, 기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르네상스 음악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나타나서 영국·이탈리아·독일 등으로 퍼졌다. 그리고 조스캥 데 프레와 라소가 중심이 된 네덜란드 악파와 영국의 작곡가들은 3성부의 다성 음악 작품을 작곡하였고, 네덜란드 악파에 의해 모방 대위법이, 루터에 의해 찬송가 형태가 확립되었다.또한, 르네상스 초기에 4성부 조직이 확립된 후에 후기로 가면서 5·6·7·8성부의 다성적 기법이 성행하였고, 무반주 합창곡의 작고, 장조와 단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성 음악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바로크의 음악1600년 경부터 1750년까지를 바로크 시대라 한다. 이어 있다. 16세기경부터 시작하여 점점 발달한 것으로, 종교적인 내용으로 된 교회 칸타타와 세속적인 내용으로 된 세속 칸타타로 구분된다.귀도다레초 (Guido d'Arezzo) : 990/995년경 아렛초 - 1050 아베라나. 이론가·교육가이며 아렛초 또는 그 근처에서 출생. 공적으로는 ① 시창을 손쉽게하기위하여 성요한 성가의 각행의 개시음의 6개의 실러블을 헥사코드에 맞추어서 계이름부르기의 기초를 세우고, 또한 변조-mutation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창안하였다. ② 핵사코드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착오없는 솔미제이션과 뮤테이션을 확립시키기위하여 귀도의 손 이라고 불 리는 수법을 고안해냈다고대음악 (Ancient Music)고대음악은 기원 전부터 9세기까지의 음악을 말하며, 이 시대의 음악은 회화물, 문헌적 자료, 현존하는 악기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나 상당히 제한적이다.고대음악은 주로 성악중심이었는데, 그 특징으로는① 단성음악(Monophony)이었다는 점과② 종속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순수한 감상용이 아닌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는데, 특히 종교상의 의식이나 행사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③ 음악은 신과 통할 수 있는 Channel이라고 생각하는 등 음악에 신비감을 부여하기도 하였다.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모든 문화의 중심은 기독교가 되었다.음악을 지도하는 장소도 교회요, 지도하는 사람도 기독교인이었다.6세기 말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세는 그 재임기간 중에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가들을 집대성함으로써 카톨릭 전래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 (Gregorian Chant, Plain Chant)를 제정하였는데, 이후 1000년 동안 기독교 음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그 특징으로는 단성음악(Monophony), 무반주곡(A Capella), 도약이 없고 주로 2도진행, 음역이 제한적이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중세(9C)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다성음악의 정선율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중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뒤를 잇는 낭만주의 음악과 근대음악에 하나의 규범을 이루었던 시기이다.고전파 음악은 한 마디로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 음악이라고 하겠다.이제까지 있어온 음악양식이 조화·균형·통일감을 가지고 완성되었으며, 내용면에서는 상당히 인간적인 특징을 갖는다.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인 소나타형식 이 확립되어 대부분의 기악작품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2개의 대립되는 테마를 제시하여 그것을 변화·발전시키고 다시 테마를 반복하는 3부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제시부→전개부→재현부) 주제선율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전개부에서 주제가 교묘히 꾸며져 나가는 과정이 고전파 음악감상의 KEY POINT라고 할 수 있겠다.또, 느린 악장의 가요적 선율의 아름다움도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인데, 주제조작의 기교는 베토벤에서, 선율의 아름다움은 모짜르트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특히 모짜르트의 선율의 아름다움은 기악곡은 물론, 다수의 오페라와 가곡에서 잘 보여지고 있다.실내악곡·교향곡·협주곡 등 모든 기악형식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소나타 형식 에 의해 작곡되었던 것이다.이러한 기악의 발달로 고전주의 시대에는 기악이 성악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세이전에는 성악중심이었고, 바로크 시대에는 성악 과 기악이 대등)이 시기에는 3명의 비인 고전파, 즉 하이든·모짜르트·베에토벤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활약하였다.모짜르트는 우아하고 세련된 기교를 가지고 이태리·블란서의 남부 상류층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하이든은 북부독일의 억압당하는 서민계층의 마음을 대변하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고 하였다.베에토벤은 모짜르트의 화려한 기교·완벽한 형식미에 하이든의 내용의 충실성을 겸비한 고전주의 양식의 완성자이다.두산 대백과 사전고대의 음악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에서 이미 상당히 고도로 발달한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그림이나 조각 ·기록 ·전승(傳承) ·악기 등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단지 음악작품 그 자체는 한 곡도 남아 있지 않아 그 음악의 연구는고, 시대적으로도 음악은 이미 바로크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내용을 보다 넓은 뜻으로 다루어 인문주의적인 예술 창작태도, 조화와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탐구, 명확한 표현, 그리고 그러한 음악의 배후에 있는 인간상이라는 점 등에 착안한다면, 15세기 말~16세기의 음악에는 확실히 르네상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이 시대의 음악작품은 음역이 전대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넓어지고 새로운 음공간이 개척되어 있다. 이는 회화에서의 원근법의 탐구와 비교가 될 것이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 정량기보법(定量記譜法)의 보급도 르네상스의 과학정신과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르네상스음악의 숨결은 14세기 프랑스의 마쇼, 이탈리아의 란디니 등의 작품의 감미로움 속에서도 느낄 수 있으나, 15세기의 부르고뉴악파의 음악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뒤파이 등의 궁정 샹송은 중세의 전통을 답습하면서도 그 인간적인 정감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15세기 말~16세기에 전개되는 플랑드르악파의 음악으로 르네상스음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오케겜, 오브레히트 등에 의한 폴리포니기법의 개척에 이어 조스캥 데프레의 음악, 특히 그의 미사곡에 이르러 르네상스음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성립된다. 그 일관된 모방양식과 명확한 악절구분, 가사와 음악과의 밀접한 연결, 균형잡힌 악곡구성, 완성된 순환(循環) 미사곡의 형태, 미사 각 부에서의 정선율(定旋律)의 유기적인 통일과 변용, 절도 있는 정적인 표출력 등은 음악에서의 르네상스적 요소로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에도 플랑드르악파에서 많은 대작곡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16세기 후반의 데 몽테와 라수스의 작품은 그 강렬한 표출의욕면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이들 16세기 후반의 후기 플랑드르악파의 음악작품은 뒤에 나오는 제수알도나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작품 등과 더불어, 미술사상에 있어서의 마니에리스모와 비교될 만한 것이다. 플랑드르악파의 작곡가들은 유럽 전 지역에서 활 후에 오는 독일음악의 황금시대를 다졌다.또 16세기 전반에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에 대응해서 새로운 종교이념에 의한 종교음악이 성립되어 특히 독일 루터파의 코랄, 프랑스 칼뱅파의 시편가, 영국교회의 성가 등은 그 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시 이 세기에는 악보 인쇄술이 발명 ·보급되고 또한 많은 음악이론서, 계몽적인 음악입문서가 간행되어 폭넓은 음악보급에 도움이 되었다.바로크의 음악바로크음악은 16세기의 르네상스음악에 이어 17~18세기 전반에 전개되었다. 이 음악은 원칙적으로 통주저음(通奏低音:書法)에 바탕을 두고 셈[强]과 여림[弱], 합주와 독주,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극(極)의 대비효과로써 심리적으로 감동과 극감(劇感)을 이끌어내려 한 것으로, 이 시대 미술작품에서의 바로크양식에 대응한다.바로크음악은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 분야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유럽에서 발전하였는데 극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오페라이다. 극과 음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으나 16세기 말의 피렌체의 G.카치니, J.페리 등이 당시의 인문주의 이념에 입각, 고대 그리스극(劇)의 재흥을 꾀하여 서창풍(敍唱風)의 모노디양식을 창시해서 근대 오페라의 방향을 잡았고, 그 후 몬테베르디의 작품은 이를 결정적인 것으로 하였다. 1637년에는 베네치아에 공개 오페라극장이 개설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다. A.체스티, A.스트라델라, A.스카를라티, 18세기의 페르골레시, 요멜리 등의 공헌에 힘입어 초기의 모노디양식은 근대 오페라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또한 오페라의 깊은 영향을 받고 종교적인 제재(題材)에 의한 극음악 ·오라토리오 ·수난곡(受難曲:패션) 등도 작곡되어 G.카리시미 등의 작품을 낳았다. 극음악의 이념을 실내악적인 방향으로 추구한 칸타타에도 볼 만한 작품이 적지 않다.한편 기악음악의 분야에서도 이탈리아의 주도권이 두드러졌다. 오르간음악의 프레스코발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기악합주곡분야의 비탈리, 토렐리, 코렐리, 비발디, 독주크라비해준다.
    학교| 2003.06.10| 6페이지| 3,000원| 조회(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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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 풍습] 전통 혼례와 결혼에 대해
    전통결혼 풍속중국의 전통적인 혼인은 우리의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부모가 한번 결정한 혼사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동의 여부에 관계 없이 성사되었으며, 부모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사자의 사랑 여부에 관계없이 성혼될 수 없었다.중국은 일찍이 서주(西周)시기에 혼인 절차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이 있었는데, 한대(漢代)에 이르러 "육예(六禮)"라는 완전한 절차가 형성되면서부터 그것은 수천년간 중국 민족의 전통적인 혼인 풍속으로 자리잡아 왔다. "육예(六禮)"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남녀가 혼인 관계를 맺기 위한 여섯 단계의 절차이다.1 제1단계 : 납채(納采)납(納)은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는 것이고 채(采)는 선택한다는 뜻이니 납채(納采)는 바로 구혼(求婚)이다. 이 예절은 남자집에서 중매쟁이에게 부탁하여 예물을 여자집으로 가져가서 구혼하는 것으로 만약 여자집에서 그의 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절한다는 의미이다.2 제2단계 : 문명(問名)납채(納采)가 통과된 이후에 남자집에서 초대장을 써서 중매쟁이에게 초대장과 예물을 여자집으로 보내면, 중매쟁이는 여자쪽의 성명과 출생 연월 시진(時辰)을 받아 돌아온다.3 제3단계 : 납길(納吉)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은 온 집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자집에서는 반드시 받아 온 여자쪽의 성명과 출생 연월 시진(時辰)을 가지고 자기집의 조상 위패 앞에서 점을 친다. 결과가 길(吉)"이든 "불길(不吉)"이든 관계없이 예물과 함께 중매쟁이를 여자집으로 보내어 사실을 통보한다.4 제4단계 : 납징(納徵)만약 점괘의 결과가 좋으면 남자집에서는 비교적 귀중한 예물을 준비하여 중매쟁이와 함께 여자집에 보내면 정식으로 정혼된 셈이다.5 제5단계 : 청기(請期)혼인 관계가 결정된 이후에 남자집에서는 길일을 택하고 이 길일을 잘 적어 예물과 함께 중매인을 여자집으로 보낸다. 만약 여자집에서 남자집의 정한 날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날짜를 다시 변경해야 한다. 따라서 "청기(請期)"는 상대방의 결정을 구한다는 것으로 상의한다는 의미를 가진다.6 제6단계 : 친영(親迎)결혼하는 날이 되면 신랑은 직접 중매쟁이와 함께 예물을 가지고 여자집으로 가야 한다. 먼저 신부의 부모를 만나 뵙고, 다시 신부집의 조상 사당을 배알하여 예물을 올린 후에 신부에게 수레에 타도록 권한다. 남자집에 도착하면 신랑은 먼저 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신부에게 수레에서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도록 권한다. 이때에 이르면 "육예(六禮)"가 모두 끝나게 되어 신부를 비로소 정식으로 집으로 맞아들이게 된다.육예(六禮)"의 모든 과정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제일 마지막 "친영(親迎)" 때 외에는 남녀 당사자는 줄곧 서로 만나지 못하고, 본인은 근본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없고 완전히 부모에 의해서 결정되며, 중매쟁이의 왕래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혼인이 맺어지는 것을 "중매쟁이를 통한 정식 결혼(明媒正娶)"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남녀가 직접 만나서 자유롭게 연애하면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법도에 어긋난 행위를 한" 것으로 인식되어 가정과 사회로부터 매우 큰 압력을 받거나 심지어 준엄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봉건적이고 독단적인 혼인에서는 남녀 쌍방이 근본적으로 연애를 하지 못하고 오직 혼인하는 날이 되어야만 비로소 서로를 알게 된다. 따라서 여자는 시집가면 오직 운명에 순종하면서 남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嫁鷄隨鷄, 嫁狗隨狗)"라고 한다.중국의 봉건사회에서 혼인은 부모의 독단에 의해 엄격하게 "육예(六禮)"에 따라 진행될 뿐만 아니라 신분 차별이 엄격하여 두 집안의 비슷한 환경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지위가 높은 집안은 지위가 높은 집안을 찾아야 하고, 지위가 낮은 집안은 지위가 낮은 집안을 찾아야 하며, 부유한 집안은 부유한 집안을 찾아야 하고, 가난한 집안은 가난한 집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집안이 맞지 않아 어울리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청춘남녀들은 비록 진실하게 서로 사랑할지라도 가정환경의 차이로 가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비극을 낳게 되어 봉건 혼인제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이외에도 과거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간의 지위 역시 불평등하였고, 특히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아 겁탈혼( 婚)·매매혼(賣買婚) 납첩(納妾) 강제결혼(逼婚) 등의 현상이 존재하였다. 권세와 지위가 있고 재산이 많은 남자는 마음대로 일반 여성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어 첩이 많았다. 봉건 제왕은 더욱이 "3궁(三宮)" "6원(六院)" "72빈비(七十二嬪妃)"를 소유하였다. 그렇지만 여자는 어떠했는가? 자유롭게 남편을 선택할 권리도 없었고 재혼할 권리도 없었다. 일단 남편이 죽거나 남편에게 버림받으면 반드시 죽을 때까지 과부로 수절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없었다.중국 봉건 혼인제도의 잔재는 근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로 인하여 근대 이래 중국의 혁명사상에서 혼인의 자유와 남녀평등을 제창하고 부모의 독단적인 혼인과 여성 박해를 반대하여 여성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줄곧 혁명의 중요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0년 4월 13일, 중국 정부는 혼인법을 공포하였는데, 제1조에서는 "부모의 독단적인 강요와 남존여비, 자녀의 이익을 경시하는 봉건주의 혼인제도를 폐지한다. 남녀 혼인의 자유, 일부일처, 남녀 권리 평등, 여성과 자녀의 합법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신민주주의 혼인제도를 실행한다"라고 명확히 규정하였다.현대중국의 혼인법은 중국에서 수천년간 지속되어 왔던 봉건 혼인 가정제도가 철저하게 폐지되고 새로운 형식의 혼인 가정이 법률의 보호하에서 수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 9월, 중국은 1950년에 제정한 혼인법의 기초 위에서 다시 새로운 혼인법을 공포하여 원래의 규정을 더욱더 강조하고 아울러 적당한 수정과 보완을 가하여 결혼 연령을 남자 20세와 여자 18세에서 각각 남자 22세와 여자 20세로 상향 조정했다.삼국시대의 혼인풍속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도(奏樂圖)와 품을 추는 무악도(舞樂圖)가 있는데 요즈음 노래방이 유행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유래가 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가을에 산과 들에서 술자리만 벌어지면 장고 치고 춤추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실내에서 가라오케로 노래방으로 형태가 바뀌었을 뿐 춤과 노래를 즐기는 풍속은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남녀가 모여서 노래하고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진다. 그래서 인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해모수와 하백의 딸이 부모의 허락도 얻지 않은 채 자유결혼을 하여 낳았다.나는 하백의 딸인데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여러 아우들과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자신의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신산 아래에 있는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나를 유인하여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까닭에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고 나를 드디어 이곳으로 내쫓았습니다.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었다는 말에서 이 당시 일반적인 혼인풍속은 중매혼 이었으나 자유결혼도 가능했음을 말해 준다. 중국의 역사책인 에는 동명왕 주몽의 아버지 탁이왕이 먼 곳에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자 계집종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꾸짖으니 '하늘 위에 무슨 기운 하나가 떠 있다가 계란만 해지더니 저에게로 와서 그 뒤부터 태기가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었더니 아들을 낳았다 하였다. 이 설화에서 계집종이 아이를 밴 것은 남녀가 자유스럽게 만날 수 있었고 성의 교제도 자유스러웠음을 말해 준다.역시 중국의 고구려전에 보면 '그곳 풍속은 음란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장난하고 놀며, 아무런 귀천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자유연애의 풍속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밖에
    인문/어학| 2003.06.25| 14페이지| 1,000원| 조회(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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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의 기원] 조선공산당, 코멘테름
    목 차1. 들어가는 말2. 코민테른의 기원과 역할3. 조선공산당의 창당준비과정(1) 해외한인들의 사회주의 이념 수용(2) 국내한인들의 사회주의 이념 수용(3) 조선공산당 창당준비4. 조선공산당(1) 제1차 조선공산당(2) 제2차 조선공산당(3) 제3차 조선공산당(4) 제4차 조선공산당5. 조선공산당의 해체 「12월테제」(1) 당시 조선공산당의 상황(2)「해산결정서」,「12월테제」의 채택6. 조선공산당 재건운동7.「12월테제」에 대한 비판8. 맺는말1. 들어가는 말일제하 식민지시기에 국내외에서 다양한 경향의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운동방법과 그후의 국가 건설의 전망을 달리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한편으로는 서로 연대하면서 민족해방 운동을 전개해왔다. 그 중 중요한 한 줄기를 이루었던 것이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우리 나라의 각 사회주의 단체는 계급해방이 최고 강령이었지만 식민지라는 조건하에서 민족독립운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1920년대 초 우리 나라에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후 일제 식민지 시기 내내 사회주의 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사회주의 운동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는 전위당이 존재하는 시기는 4년(1925∼28) 밖에 안 된다.이 전위당 즉 조선공산당 은 설립과 해체에까지 코민테른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많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 단체들이 이 코민테른에 앞다투어 보고를 하고 승인을 받기 위해서 무수히 노력을 했으며 코민테른의 승인은 곧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최고의 구심을 얻고 또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당시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해체 그리고 코민테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2. 코민테른의 기원과 역할1917년 말부터 1919년 초까지는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었던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에게 해방의 자극과 희망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특히 볼쉐비키혁명 이후 레닌이 공포한 일련의 약소민족 해방선언 과 파리강화회담의 전후 처리원칙이 되었던 월슨의 민족자결에 관한 선언 은 약소민족에게는 일종의 복음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1917년 러시아에서 되어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대표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집하여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려 했으나 국내 사회주의운동세력의 반대로 실패하고, 김재봉·김찬·신철등의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1923년 6월경 조선공산당 건설의 준비기관으로 코르뷰로 국내부와 코르뷰로 국내부 청년회를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국내부의 구성원은 주로 화요회와 북풍회계로 구성되었다. 이 조직의 주도하에 사상단체들이 통폐합되었으며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 대중단체들이 전국적인 규모로 통일되었다.{) 강만길 외 11명 편찬 , 『한국사 15』 , 한길사 , 1994 P.169 참조4. 조선공산당(1) 제1차 조선공산당화요계를 중심으로 한 코르뷰로 국내부는 당 결성에 임박하여 4단체(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 합동을 추진하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조선기자대회를 추진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창당대회는 일경의 눈을 돌리기 위해 표면적으로 전조선기자대회{) 1925년 4월 15∼17일 3일 간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는 언론인들의 모임인 無名會에서 주최하 였다. 당시 『동아일보』,『조선일보』,개벽사 등의 기자 500여 명이 참석하여 언론의 권위신 장, 신문·출판물에 관한 법규 개정문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대중운동의 발전 등을 결 의했다.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인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된 것은 결코 우 연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의 사전 계획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 조선공산당 당원 의 상당수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m 당시 조선공산당 당원의 상당수 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음을 볼 때 가능한 일이었다.(최준,『한국신문사』,1967 ,일조각)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면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이것이 제1차 당 대회였다.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에서 4시 사이에 서울 시내 황금정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 2층에서 20명 내외의 주요 활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이 대회조선공산주의 단체의 대회가 성립되었고 거기에서 중앙위원회의 선출과 이 그룹들의 합동이 일어났고 앞으로 코민테른은 4월 조선공산주의 단체의 대회에서 선출된 이 위원회에 기초하여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의 발전과 향후 공산주의세력의 집결과 단결에 관한 사업을 수행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결정 은 음모적 인 지도 중핵과 더불어 합법적 {) 합법적 이란 의미는 제도적인 합법성의 의미가 아니라 통일적으고 민주적인 당대회에 기초한 합법성을 뜻한다.이것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가 1925년 4월 17일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을 아직 정식으로 코민테른의 지부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성대경 저,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 역사비평사 , 1988 P.47 참조이러한 이유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식적인 당 승인을 위해 1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의 검증을 감내해야만 했다. 조선공산당은 여러 분파와의 투쟁을 통해 1926년 3월 31일 코민테른의 정식지부로 승인되었다.4 제1차 조선공산당의 해체일제는 제 1차 조선공산당 결성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1925년 5월 7일 치안유지법의 조선내 확대 시행을 공포했다.{) 1020년대 들어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를 위협했으나 기존의 법으로는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할 법적 근거가 취약했기 때문에 치안유지법을 제정해야 했다. 이 치안유지법은 현재 크게 논란 이 되며 악법이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된다.치안유지법의 제 1조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전항의 미수죄는 이를 벌함 에서 보듯이 이 법은 민족해방운동세력, 특히 사회주의 운동세력에게 결정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운동가들은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법으로 투옥되었다. 치안유지법은 제 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서 그 악명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제 1차 조선공산당이 정비되기도 전에 대규모 검거사건이 일어났다. 일명 신의주사건 {) 신의주사건: 조선공산당과 .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사망에 즈음하여 민족감정이 격화되자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다. 조선공산당 산하에 설치된 6·10 만세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는 상해로 피신해 있던 김찬·김단야·조봉암 등 망명한 제1차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지시와 지원을 받고 권동진등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종의 삐라를 배포하는 등 전국적 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했다. 선전문건의 내용은 구체적이었지만 계급적인 요구는 극도로 자제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제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차질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6·10 만세운동은 제 2차 조선공산당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3 제2차 조선공산당의 해체제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은 6·10 만세운동에 쓰일 선전 문건이 우연한 계기{) 대규모 대중 시위에 대비해 약 5만 장의 전단을 만들어 어느 집에 감춰 놓았는데 , 그 집 식 구들과 아주 가까운 한 여인이 우연히 그 전단 뭉텅이를 발견하고, 두 장을 꺼내 친구들 사이 에 몰래 돌려보다가 재떨이속에 버린 것이 당시 위조 지폐범을 추적하던 왜경에 포착된 것이 다.로 사전에 발각되면서 촉발되었다. 제 1차 조선공산당의 후계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 상황하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검거가 시작되어 마침내 책임비서 강달영이 체포되고 여러 증거서류가 압수됨으로써 총 10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제 1,2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하던 화요계의 주요간부들은 거의 검거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강만길 외 11명 편찬 , 『한국사 15』 , 한길사 , 1994 P.176 참조(3) 제3차 조선공산당1 제3차 조선공산당의 결성1926년 6·10만세 사건으로 인하여 강달영을 비롯한 130명이 검거되면서 제2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지만 검거를 모면한 제 2차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김철수는 1926년 9월경 제 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제 3차 고려공산청년회는 제 2차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인 고광수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제 3차 조선공산1928년 1월에 조선공산당에 관한 코민테른 결정서를 내렸다. 그 결정서이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완전한 당의 실현과 모든 종파 및 그룹을 즉시 해체할 것. 둘째, 조선공산당은 지식계급과 학생의 결합체로 되어 있고 노동자·농민은 소수가 포괄되어 있음. 셋째, 공장내부 깊숙이 잠입할 것. 넷째, 광범한 노동대중을 조직할 것. 다섯째, 광대한 농민을 조직할 것. 여섯째, 광범한 국민혁명의 대중 당을 출현시키는 것이 조선공산당의 중요과제이다. 일곱째, 신간회를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로 형성할 것 등이다. 이 결정서는 신간회를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로 형성할 것 이라는 애매한 지시를 내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신간회 해체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는 않고 민족협동전선에 대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강만길 외 11명 편찬 , 『한국사 15』 , 한길사 , 1994 P.185 참조3차 당 대회는 이 결정서를 토의하고 수용했다. 다만 파쟁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종결되었다는 점을 답신하기로 했다. 또 3차 당 대회는 29개항에 걸친 코민테른에 제출할 국내정세보고 를 가결했다.4 제3차 조선공산당의 해체1928년 2월초에 제 3차로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1926년 6∼8월에 있은 제 2차 조선공산당 검거에 이어 1년 반만에 일어난 대 검거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내와 일본에서 김준연, 김세연, 김철등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를 비롯한 30여명의 관련자가 검거되었다. 이로써 제 3차 조선공산단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한창수 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 지양사 , 1984 P.89 참조(4) 제4차 조선공산당1 제4차 조선공산당의 결성제 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 1928년 2월 27일,28일에 제 3차 당대회를 서울 교외에서 개최하면서 제 4차 조선공산당은 시작된다. 이 대회는 원래 1928년 1월초에 예정되었지만 대표선정문제로 논란이 있어 열리지 못하다가 2월말에야 열렸던 것이다. 3차 .
    사회과학| 2003.06.25| 17페이지| 1,000원| 조회(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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