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세 미술관 (musee d'orsay) 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하루에 약 1만 2천 여명, 주말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이 미술관은 이제는 루브르 미술관을 능가하는 파리의 새 명소이다. 프랑스 파리 세느강변의 오르세. 1900년 세워진 대형 기차역사를 지닌 86년 미술관으로 개조해 시대와 예술을 관통하는 미술 오브제 로 만든 파리인들의 낭만과 멋이 시나브로 풍겨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오르세 미술관을 간 적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으며 써 볼 생각이다. 미술 관련 서적의 그림정도로만 통해서 보던 그림의 원본을 직접 감상할 수 있고 그것도 한 두점이 아닌 무수히 많은 작품을 한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루브르 박물관보다는 크지는 않지만 모두 3층으로 구성된 오르세이 미술관은 바로 이러한 행운을 가능하게 해준다. 원래 오르세이 미술관은 기차역으로 쓰이던 아르누보 양식의 구 오르세이 역을 1977년부터 개조공사를 시작하여 1986년 개관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르세이 미술관입구를 통과하여 들어가면 타원 모양의 높은 유리 천정이 인상적이며 개조전 선로와 플랫포옴이었을 법한 1층에는 지금 수많은 조각 작품들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오르세역은 눈부신 역작으로 마치 미술학교처럼 보인다. 그런데 미술학교는 역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역과 미술학교 건물을 서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라루에게 제안했다 화가 에두아르 드타유가 오르세 역의 설계자 빅토르 라루와 함께 이 역사를 둘러보았던 1900년 5월 22일, 그는 일기에 그렇게 적어놓았다고 한다. 80여년 뒤 그의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고 오르세는 만인을 위한 미술학교로 우뚝 서 세계각지에서 온 관람객들을 서구 미술사상 가장 화려했던 19세기로 실어 나르고 있다고 한다.오르세 미술관은 1814~1914년까지 서양 미술계를 지배했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곳에 전시중인 작품들은 이전에 루브르 미술관과 죄드뽐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작품을 이전한 것이다. 작품 면에서는 일반인들이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인상파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아울렌티가 설계한 것으로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에 비해 작품수가 많고 또 대부분이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전시작품은 크게 회화, 조각, 정식미술품으로 구분된다. 프랑스 근대 조각가를 대표하는 아르누보 작가들의 독특한 장식미술세계와 미술관 콜렉션을 대표하는 회화작품을 대표한다. 자연조명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품이 갖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미술관의 설립배경은 이러하다. 1900년 7월 14일 세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완공한 이곳은 원래는 기차역이었다. 파리 최초로 전동차가 드나들던 오르세역은 1871년 파리 꼼뮌 때 불타 없어진 옛 오르세 궁전 자리에 세워졌다. 기차역에서 한동안 영화 촬영장으로 전시장으로 사용되면서 철거될 뻔했던 오르세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1977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이곳을 근, 현대미술관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부터였다.수년 간에 걸쳐 재건축 작업 끝에 1986년 12월 1일 오르세 미술관으로 다시 세상과 만나게 된 이 미술관은 매력적인 예술 공간이다. 이 건물은 1804년에 최고 재판소로 세워져 오르세궁이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그 후 대화재로 불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오르세역으로 다시 지어졌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과 유리를 잔뜩 사용하여 건설되었던 이 역은 호텔을 병설하고 엘리베이터 같은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인 역사였으나, 사회의 극심한 변화와 기술의 진보에 대응하지 못한 채로 1939년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폐역으로 방치되었던 이 역을 호텔로 만들려는 계획을 중단시키고 미술관으로 개조할 것을 입안한 것은 퐁피두 정권이었다. 이어서 데스탱 대통령에 의해 오르세 미술관 구상이 발표되었고, 1986년 12월 9일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오르세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높이 32미터의 유리 돔을 이용,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철도역이었을 때 사용되었던 커다란 시계가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오래 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발상으로 그것을 지켜나가는 파리인들의 예술성의 상징이 바로 오르세 미술관인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19세기, 정확하게는 2월 혁명이 일어난 184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4년까지 제작되었던 회화, 조각, 포스터, 가구, 악세사리 등이 모여있어, 시대적으로는 루브르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를 잇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오르세에는 바로 인상파를 중심으로 신인상파, 후기인상파 등 후학들 그리고 사실주의, 절충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나비파 아르부노 등 19세기의 기타 주요 미술 흐름이 1848-1914년의 시간띠 속에 연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 시간띠는 1949년의 2월 혁명과 1차 대전 발발을 기종점으로 한 것이다. 오르세에는 이 무렵의 미술뿐 아니라 건축, 문학, 사진, 영화, 음악, 출판문화, 장식예술 쪽의 자료도 소장하고 있다.이 모든 것들이 19세기 프랑스 문화의 영광을 한 것 자랑하고 있으나 주지하듯 그 뒤에는 숱한 혁명과 갈등의 사회상이 포연처럼 깔려있다. 그런 까닭에 한 세기의 미술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현란한 이미지의 파노라마 속에서 관자는 언뜻언뜻 피 묻은 시대의 발자국을 읽게된다. 관내로 들어가면 일단 밑으로 내려가는 게 순서다. 가운데 통로에 조각작품들이 진열 되어있고, 우측 방에 앵그르와 들라크르와가 자리하고 있다. 앵그르와 들라크르와는 19세기의 전반의 주요흐름이었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 중 1848년 이후의 제작품은 루브르를 떠나 이곳 오르세에서 진열되고 있다. 왼쪽으로 도미에, 밀레, 루소, 코로, 쿠르베와 리얼리즘이 나오고 뒤이어 샤반느, 모로 1870년 이전의 드가, 마네, 모네, 르느와르 풍경 오리엔탈리즘의 방들이 이어진다. 맨 끝에는 19세기의 건축 전시물이 나온다.이 곳에 전시된 회화 작품은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걸작들이다. 루브르의 고전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에 걸친 미술품들로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파, 아르누보중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테마 예술품, 가구 재료, 건축 구조물, 포토 그래피, 유명 작가들의 스케치북과 노트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그들의 기법 등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작품은 3개 층에 분산되어 전시되어 있다.1층에는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 '이삭줍기'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제 3 공화국시대의 작품과 프랑스, 벨기에, 글래스고 등지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3층에는 고갱의 '타이티의 여인들'을 비롯하여 마네, 드가, 모네, 세잔, 고호, 르노와르 등 손꼽을만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물론 전시의 중심은 그 시대에 탄생한 인상파 회화이지만 이 미술관에는 단순히 인상파의 명화 뿐만이 아니라 그 그림들이 탄생한 당시의 건축 양식이나 풍속 등도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르세에 가면 19세기라는 역사의 드라마를 실감할 수 있다. 미술관의 이와 같은 의도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것은 1층의 가장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오페라좌 코너이다. 나폴레옹 3세 지휘의 파리 대개조 사업 중 최대의 문화 사업이었던 오페라좌는 보불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875년에 완공되었다. 이 코너는 오페라좌를 둘러 싼 당시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는데, 샤르르 가르니에(1825-98) 설계의 오페라좌의 내부를 잘 알 수 있도록 세로로 잘라낸 단면의 정밀한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유리로 된 바닥 아래에는 1914년 당시의 오페라좌 주변의 거리가 100분의 1 모형으로 펼쳐져 있어서 당시를 상상하며 그 위를 걸어다닐 수 있다.아울러 카페와 세느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베란다도 있으니 작품 감상중 지친 몸을 쉬기에는 그만이다. 사실 이 오르세이 미술관의 그림을 하나하나 감상하자면 이 곳도 시간이 걸리니 서두르자. 하지만 시간이 없다면 3층부터 관람하기를 권한다. 그 이유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인상주의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3층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은 작가별로 전시되어 있어 각 방마다 그 작가의 작품세계에 빠져 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고호의 색깔과 선, 아름다운 파스텔 풍의 르노와르, 야생적 분위기의 고갱과 작가의 기구한 운명 때문인지 왠지 슬픔이 깃들어 보이는 드가. 여행 중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또 하나의 감동이 아닐 수 없다.
< 남도 시가 문학 >문예창작학과20030099 박민지Ⅰ. 송강 정철에 대하여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은 조선 선조(14대)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율곡 이이와 동갑나기인 정철은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중국 초나라의 굴원이 지은 이소에 비겨,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오늘날 송강의 시비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예술관 입구에 있는데, 이는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도민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짓고 관동별곡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송강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과 경남 영일의 오천서원 별사에 제향되었다.송강 정철이 전라남도 담양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 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탓으로 궁중에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에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일어나자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정개청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 세력을 추방하였으며, 다음 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세자 책봉 문제인 건저문제(조선 선조 24년인 1591년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 땅에 유배되었다. 57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 임금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하였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Ⅱ. 다녀온 유적지1. 식영정(息影亭)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1호소 유 자 : 사 유소 재 지 :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75-1규 모 : 정면2칸, 측면2칸시 대 : 조선시대(1560)지정연월일 : 1972년 1월 29일식영정은 달의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뜻으로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우며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대표적으로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같은 쟁쟁한 문인들이 이곳에서 대자연의 흥취에 한껏 빠져들었다고 한다.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이 창건하여 장인인 석천 임억령에게 증여한 것이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취를 해치고 있지만 옆에는 근래에 세운 송강의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고, 뒷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숲이 얕은 담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죽록정이라는 이름을 걸맞게 한다. 소나무 등걸 사이로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멀리 올려다 보이는 무등산의 웅장한 자태는 당대 명인의 시심을 느낄 만하다. 빽빽이 들어찬 소나무 숲은 가족들의 나들이 공간으로 알맞은 곳이다.3. 가사문학관이 곳 가사문학관은 무등산 자락 담양군 남면의 가사문학권역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어, 새로운 가사문학 유적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 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시 선비들의 생활과 가사문학의 참 맛을 맛보게 해준다.전라남도의 북쪽에 위치한 담양군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 많은 문화 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 곧은 선비 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 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무등산 정기 어린 이 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 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 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전라남도 담양군에서는 이 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 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다. 그런데 의 내용에는 당시에 이른바 '성산의 사선'으로 일컬어졌던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정철이 차례로 제작한 한시 의 의취와도 부합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은 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해진다. 또한 작품 속에서 찬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그 대상이 김성원이라는 설과 임억령이라는 설이 대두된 바 있다. 형식은 3·4조 위주의 음수율에 85행 169구로 되어 있다. 문학사적으로 조선 시대 전기 강호 은일가사의 흐름 속에서 특히 송순이 지은 의 경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성산별곡」은 등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성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지명으로, 정철이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대립되어 있다. 젊은 시절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적 토대를 닦을 때 지은 것으로 보는 견해와 그 후 나이가 들어서 지은 작품으로 보는 견해 등으로 갈라지고 있다. 「성산별곡」에 한문투의 표현이 많고, 옛날의 고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이나 등에 비해 우리말 표현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작품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25세를 전후한 시기라면 김성원은 36세를 전후한 나이였는데 이런 사람에게 선옹이란 표현을 쓸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점과 작품의 내용을 보면 신선처럼 사는 김성원의 삶과 풍모를 부러워하며 찬양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점등을 고려할 때 그의 나이가 40을 넘어서서 강원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평창으로 내려와 은거하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작시기를 그렇게 보면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유배와 출사를 계속하는 자신의 삶과 한가롭게 신선처럼 사는 김성원의 삶을 비교하여 그것을 찬양할 동기를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성격을 지닌 「성은 정철 자신이요 사랑하는 님은 선조 임금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신화와 임금의 관계로 설정했던 것은 조선시대 문학의 일반적인 현상중의 하나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미인곡」은 한 여인이 그 지아비를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마음에다 빗대어서 자신의 충절과 연군의 정을 고백한 작품으로 외로운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고신연주의 지극한 정을 유려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이다.2음보가 1구절을 이루는 것으로 계산 할 때 이 작품은 126구의 길이를 가진 가사이다. 율격으로 볼 때 3·4조가 중심을 이루며, 작품의 구성은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서사, 춘원, 하원, 추원, 동원, 결사등의 여섯 단락으로 짜여 있는데, 서사에서는 조정에 있다가 창평으로 퇴거한 자신의 위치를 광한전에서 하계로 내려온 선녀에 비유해서 노래했다. 춘원에서는 봄이 되어 매화가 피는데 그것을 사랑하는 님에게 보내고 싶으나 님의 심정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의구심을 노래했다. 하원에서는 화려한 규방을 표현해 놓고 이런것들도 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공허 할 수밖에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추원에서는 맑고 서늘한 가을철을 묘사하면서 청광을 님에게 보내어서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추게 하고 싶은 애타는 마음을 노래했다. 동원에서는 길고 긴 겨울밤에 독수공방하면서 꿈에서나마 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잠이 들지 못하는 자신을 노래했다. 결사에서는 님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어서 벌·나비가 되어 님의 옷깃에 앉고 싶다는 소망을 간절히 노래했다.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가지 여성화자의 독백으로 되어있다. 여성적인 행위, 정조, 어투 어감 등을 잘 살리고 있으며, 그러한 정서를 사계절의 순환과 맞물리게 구성하여 절묘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미인곡」은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나서인지 후대에도 이를 모방한 작품이 대거 등장한다. 나중에 송강이 지은 을 비롯하여 김춘택의 , 이진유의 , 양사언의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충군의 지극한 정을 읊은 것으로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에서 영향을 받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