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 소설 Ⅱ.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vs애드리안 라인(Adryan Lyne)Ⅲ. 촬영기법 및 영화비평Ⅳ. 맺음말Ⅰ. 소설 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나보코프의 는 한번쯤 접해볼만한 작품이다. 본인도 이 소설을 읽어보긴 했지만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때는 이 작품에 반해서 영어판 까지 사고했었는데 말이다...역시 시간이란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이런건 좀 안 잊었으면 좋겠지만...^^; 각설하고 ~.... 이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랑의 광기’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소모시키는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다. 이성이나 관습을 카오스의 도가니에 부어버리는 극단적인 사랑은 시대에 따라 성스런 광기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는 독특한 사랑을 갈구하는 수많은 초상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 레르몬토프의 에 나오는 주인공 뻬초린에게도 사랑은 광기와 동일한 것이었다. 나보코프 에 나오는 40대 남자와 어린 소녀와의 애정행각은 사랑이 아니라 광기라고 명명해도 될듯하다.소설 초반부에서 험버트는 롤리타의 이미지를 지저분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성도착을 숨기려 한다. 험버트에 따르면 자신은 어떻게 하려했던 것이 아닌데 단지 그녀의 외모가 너무 매혹적이고 또 유혹적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 신화 속의 샘의 요정 나이아스, 전설의 사이렌과 그녀를 겹쳐놓는다. 험버트는 자신의 ‘위험하고 타락한 욕망’을 전화해야 할 의무를 의식하고 있다. 즉 그는 롤리타의 이미지 조작을 통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자신의 과오를 씻으려 한다.그녀의 향기는 그 옛날 리비에라의 연인과 같다.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하고 거친느낌이다. 곧장 내 남성을 자극하는 강한 냄새............갈색머리의 강렬한 향기가 사랑스럽긴 하지만 좀더 자주 머리를 감아야 할 것 같다.)잡지나 광고에 나오는 귀여운 들창코인가 하면 옛 시골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은 충분히 동정적이다. 롤리타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을 죽음뿐” 이라고 했는데 어쩜 험버트의 파멸은 예견된 것이었을까?잃어버린 롤리타를 다시 찾은 험버트가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임신한 17살의 롤리타에게 다시 돌아와 줄 것을 호소하는 장면은 사랑이란 이럴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롤리타는 험버트를 속이고 이용하고 그리고 끝내는 도망간다. 그토록 배반을 당하고도 끝까지 그녀에게 사랑을 바치는 험버트의 눈물은 괴물의 눈물일까 인간의 눈물일까. 어쩌면 사랑 자체가 인간을 광기로 몰아가는 괴물일까?험버트에게 숙명적인 사랑이 롤리타에게는 그저 게임에 불과했다. 속이고 이용하고 그리고 끝내는 도망간다. 그러나 그런 롤리타를 부도덕하다고 나무랄 수 있나? 어린소녀를 가두어 그 젊음을 희생시킨 험버트 보다 롤리타가 나쁘다면 얼마만큼 더 나쁜가? 이 소설을 읽는 중에도 그리고 읽고 나서도 이들의 관계와 사랑이라는 것, 성적 도착, 광기, 욕망, 도덕성 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데 신기하고도 골치 아픈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결론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더 모호해진다는 것이다.어린 소녀와 중년남자와의 사랑은 러시아의 소년과 중년 여자의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롤리타와 험버트의 사랑에 대한 관계는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세계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과의 사랑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이사도라는 열일곱 살 연하인 아름다운 금발머리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에게 반하였다. 모스크바의 젊은 시인은 멋쟁이 신사에 주정뱅이요, 방랑시인이자 도덕적 한계성을 뛰어넘은 자였다. 그의 성격은 어떤 점에서 롤리타의 행위와 거의 비슷하다.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예세닌의 에로스와 광기는 험버트의 그것과 서로 공통분모를 갖는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롤-리-타. 세 번 입 천장에서 이빨을가 롤리타 라는 소녀에게 매혹되어 파멸해가는 과정을 남성에 대한 냉소적인 관찰을 통해 블랙 코메디로 그렸다. 영화는 소설의 줄기는 전혀 바꾸지 않았다. 다만 첫 시작 부분이 소설의 끝부분인 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고는 험버트가 어떻게 그를 죽이는 상황에 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소설과 비교해 볼 때 영화에서는 호텔 ‘도취된 사냥꾼들’의 소란한 밤을 표현하는 장면은 소설에서보다 훨씬 줄거리를 줄이고, 험버트와 롤리타의 미국횡단 여행을 최대한 축소시켰다. 다만 화면에 등장시키지는 않았지만 존 레이 박사에게 중심 나레이터 역할을 하게 했다.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나리오에서는 소설에서보다 에로티시즘이 훨씬 더 신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롤리타의 순진한 도움을 얻어 험버트가 수음을 하는 장면은 시나리오에서 삭제되었고, 대신 험버트와 롤리타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그 자리를 채운다. 여름캠프로 찾아가서 다시 만난 후 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시나리오에는 남아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살짝 아쉽다.^^) 호텔 ‘도취된 사냥꾼들’에서의 섹스 장면은 시나리오에서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는 카메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되었었다. 즉 에로시티즘은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롤리타라는 인물은 시나리오에서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하고, 유혹적이며, 대체로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소녀로 험버트를 속여 넘길 궁리에 가득 차 있다. 한편 험버트는 님펫광이자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아버지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사실 소설에서의 험버트는 딸인 롤리타의 친구들까지 외모로 그녀가 님펫축에 드니 못 드니 하는 식으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많이 삭제되었다.큐브릭은 검열을 의식한 때문인지 소설에 들어있는 에로틱한 장면들을 아무것도 살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소설에도 시나리오에도 없는 독자적인 장면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본인이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던 영화시작의 나이가 좀 많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그녀는 나보코프의 롤리타보다 성적 도발성이 부족했고 헐리우드 스타에 가까운 편이었다. 반면 험버트 역의 제임스 메이슨(James Mason)은 유럽풍의 세련미를 갖춘 외모로 성도착증 아버지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런데 제임스 메이슨은 이 영화에서 연기한 성 도착적 성격을 3년 전 자신이 출연한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는 큐브릭의 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예를 들면 두 남자 간의 경쟁, 탐정소설적인 줄거리, 미국횡단 여행 등이다.애드리안 라인(Adryan Lyne)의 애드리안 라인 이 이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던 당시, 미국에서는 도덕성을 내세우는 기성세대가 영화 속의 폭력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면서도 성(性)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만큼은 한층 엄격한 규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스테픈 쉬프(Stephen Schiff)가 쓴 영화의 각본은 큐브릭의 보다 나보코프 소설의 줄거리를 한층 더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또한 분명한 것은 큐브릭의 영화보다는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가 더 야하다. 하지만 줄거리에 충실하다는 것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의미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 쉬프는 퀼티와 관련된 제2플롯을 제거해버렸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에서 퀼티는 렘즈데일의 롤리타의 집에 험버트가 처음으로 왔을 때 그녀의 어머니인 샬롯이 유명한 극작가라며 퀼티를 언급하기 시작해 댄스파티 때도 보이고, 캠프장에서 롤리타를 데리고 나와서 갔던 호텔에도 그가 있었으며 심지어 그곳에서 험버트와 퀼티는 꽤 오랫동안 대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드리안 라인(Adryan Lyne)의 에서는 퀼티와 관련된 제2플롯을 제거해버려 소설을 전혀 모른 체 마지막의 살해 장면을 봤더라면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애드리안 라인 또한 큐브릭 감독처럼 소설 상의 뒷부분인 험버트가 퀼티를 살인한 후의 모습을 영화의 제일 앞으로 가져와 보여주는데 사실 살인동기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몽롱한 눈빛으로 도로 한복판에서 S자로 운치아교정기를 하고 추잉껌을 씹는 모습으로 어린소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몸짓을 보여주었는데 개인적으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에서 롤리타 역할을 연기했던 슈 리온 보다 외모 상으로는 덜 예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소설속의 롤리타에는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 속에서 표현된 롤리타는 어린 유혹자로서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런 유혹은 이 남자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금기가 되지 않는다. 특히 추잉껌을 씹었다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손가락에 감았다가 다시 씹는가 하면, 책, 심지어 자동차에까지 붙이곤 하는 모습은 님펫(nynphet)과 소녀의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비교해서 큐브릭의 영화에서는 슈 리온이 제임스 메이슨의 욕망에 시종일관 무관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슈 리온은 자신에게 욕망을 품은 남자를 성가시게 괴롭히고, 자신의 여배우로서의 매력을 보여주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1966년 영화가 촬영에 들어간 지 얼마 후 미국에서 미성년자의 성행위 표현을 금지하는 법안이 가결되었는데, 이런 사실로 볼 때 애드리안 라인 감독이 미리 자체 검열을 한 것은 타당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드리안 라인은 줄거리를 바꾸고 롤리타를 부분적으로 변질시켰다. 즉 그의 영화는 성인 남자가 자신의 12살짜리 의붓딸에게 품은 금지된 사랑이 아니라 유혹적인 성인 남자의 한 소녀를 향한 에로틱한 열정을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멜로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Ⅲ. 촬영기법 및 영화비평먼저 shot size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애드리안 라인 영화의 맨 첫 장면을 보면 extreme long shot으로 넓고 푸른 산, 들, 그 들판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을 비추어준 다음 넋이 나간 체 S자로 도로한복판에서 차를 몰고 가는 험버트를 클로즈업 시키면서 그의 피 묻은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에 들려있는 실핀을 e다.
고골의 희곡 에 바탕으로 하여 1949년에 제작된 Henry Koster의 영화 은 원래의 희곡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적 상황이라는 골조는 같지만 첫 장면부터 그리고 결론까지 다르다. 지금부터 희곡 과 영화 을 비교, 분석 해 보자.먼저 첫 장면부터 살펴보자. 희곡에서는 제1막 1장의 시작을, 시장이 자선병원장, 교육감, 판사, 경찰서장, 의사, 경찰 두 사람 등을 불러놓고 마을에 비밀 명령을 받은 검찰관이 뻬쩨르부르크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리고 병원장, 교육감 등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충고한다. 이 충고하는 과정의 대사에서 그들이 얼마나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받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암모스 표도로비치 : 안똔 안또노비치, 그럼 당신께서는 무엇을 사소한 죄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죄도 죄 나름이죠. 저는 모든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있다고 모 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런데 그 뇌물 이라는 것이 무엇 인줄 아세요? 사냥개 보르조이 종의 강아지입니다. 이건 전혀 다른 문 제지요.시장 : 아니, 강아지건 뭐건 뇌물은 뇌물이지.암모스 표도로비치 : 아니죠, 안똔 안또노비치. 이를테면 만일 누군가가 500루블 나가는 털외투를 받고, 그 부인에게는 숄을......시장 : 그래, 당신이 뇌물로 부르조이 종 강아지 정도밖에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어쨌 다는 거야? 그 대신 당신은 하느님을 안믿자나............┛즉, 원작에서는 부패하고 타성에 빠져있던 마을의 유지들이 이때까지 무책임하게 방치되어 있던 마을 곳곳을 정돈하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다. 이런 식으로 그 시대의 부패와 부조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서는 첫 장면에, 시장에 두 남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이 약을 먹으면 건강해지고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며 약을 판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 두 남자의 어색한 행동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그들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이때 주인공 남자는 약의 효능을 거짓으로 설명하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며 반복적으로 딸꾹질도 아닌 ‘띵~’ 하는 소리를 내곤 하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다보면 이 남자가 무엇인가 거짓된 행동을 하거나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의 선을 넘어선 행동을 할 때, 즉 부조리적 상황에 있을 때 이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이 ‘띵~’하는 소리의 효과는 희곡 1막 1장에서┏흐리스찌만 이바노비치는 무슨 말인지 비슷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한 소리를 낸다.┛의 대목의 소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주인공 남자는 약을 실컷 팔다가 한 노파가 실제로 지금 자신의 남편이 아프다며 약을 사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미안하여 솔직히 이 약은 효과가 없다고 말하게 되고 이를 다른 마을 사람들이 듣게 되어 약을 팔던 두 남자는 사기꾼으로 몰리게 되고 도망가게 된다. 이렇듯 영화에서는 지배계층 뿐만 아닌 서민계층, 피지배층에서도 이미 부조리함, 부패가 만연되어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 이다. 약을 팔던 두 남자는 의견충돌로 헤어지고 주인공 남자는 후에 닥칠 엄청난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Napoleon의 서명이 되어 있는 종이를 떨어진 신발 바닥에 깐다. 그는 길을 걷다가 식사중인 근위병을 만난다. 빵 조각을 조금이라도 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다. 근위병들은 구르라면 구르는 자신들의 말을 그대로 듣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Can you do that?”이라며 빈정대며 빵 조각을 멀리 던지며 강아지보다 더 빨리 뛰어가서 집어오라고 한다. 조금 전까지 시장에서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떠들며 노래를 부르며 약을 팔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근위병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한다. 결국 근위병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는 걸어가다 말이 먹던 여물을 먹게 되고 말은 그가 주인인줄 알고 그를 따라가게 되며 때마침 이 장면을 본 근위병들은 그가 말을 훔쳐가는 줄 안고 그를 감옥에 가둔다. 이때 시장 등 그 지방의 유지들은 자신의 지방에 파견되었다는 검찰관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다가, 투옥된 그가 의심스러워 그를 보러 가는데 우연히 Napoleon의 서명이 된 종이를 발견하게 되고 모두가 그를 검찰관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Napoleon이라 서명이 된 부분만 보고 그를 검찰관으로 으레 생각하는 지방 유지들의 경솔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검찰관이라 착각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주인공 남자가 와인잔을 페치카에 던져버리자 모두들 그를 따라하며 너무나 왕성한 그의 식욕에 모두 놀라는데 이 두 장면에서 역시 주인공은 ‘띵~’하는 소리를 내게 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중앙에서 파견된 검찰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소화가 안 된다는 검찰관에게 누군가 주는 약은 시장에서 자신이 거짓말 하며 팔던 그 약이다. 검찰관과의 식사를 하는 이 자리에 있을만한 마을의 유지도 그의 거짓말에 속아 그 약을 샀던 것이다. 모르고 그 약을 마시려다 헛기침하며 약을 뱉는 그를 보며 어느 관객인들 웃지 않을 수 있으랴...다음날 거짓 검찰관이 된 그가 시장 등과 문밖으로 나가자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한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칼집에서 칼을 빼지 못하는 모습과 겨우 뺀 칼을 들고 노래 가사를 몰라 어쩌면 자신의 욕망일지 모를 “to the sky”만을 연발하다 노래가 끝난 줄 알고 몇 번이나 칼을 넣으려다 마는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면 과연 그가 검찰관일까...하고 의심이 갈 만 한데도 영화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 의심해 봄직한 청년의 언동까지도 직책을 숨기기 위한 연극이라 희곡에선 여기지만 훨씬 더 의심 갈 만한 영화에서의 거짓 검찰관의 모습을 보고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 하다.희곡의 흘레스따꼬프는 오히려 거짓 검찰관 노릇을 완벽히 했다. 자신이 썼다며 여러 작품을 시장의 부인인 안나와 딸인 마리야 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하고 각 나라 대사들과 했다며 각종 게임의 이름을 열거하는가 하면, 궁중에 실제로 드나들었던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반면 영화에서 거짓 검찰관은 시장 집에서 허겁지겁 식사할 때라던가 파티에서 흥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태우는 행동이며, 장부를 검사할 때 너무나 우습게 대강대강 보는 등의 그의 행동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소를 자아내게 만든다.희곡과 영화의 또 하나의 차이점은 희곡에서 흘레스따꼬프는 지방의 유지들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말해 돈을 뜯어낸다. 사실 ‘뜯어낸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 지방의 유지들에게 뇌물이란 것은 일상화된 것이고 그 돈은 흘레스따꼬프에게 주려고 가져온 돈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에서는 지방의 유지들이 직접 돈 자루를 들고 와서 차례로 건네준다. 그들은 거짓 검찰관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들 준다. 한명이 검찰관을 찾아오고 그가 미쳐 나가지도 않았는데도 다른 마을의 유지가 들어오고 방에서 미처 나가지 못한 앞사람은 옷장이나 침대 아래, 위, 이불 속, 상자 안으로 바쁘게 숨는데 이 장면 역시 한 마을의 관료로써 적합하지도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비웃음만 나오게 하는 대목이다.또 희곡에서 흘레스따꼬프는 시장의 아내 안나와 그의 딸 마리야 둘 모두를 농락한다. 특히 딸 마리야 에게는 결혼까지 약속하며 농락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시장의 아내 마리야가 거짓 검찰관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그는 무시한다. 그녀의 관심을 그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 그녀와 하는 대화 중에 마리야가 그의 가족에 대해 묻자, 당황한 검찰관은“I have no wife. None of my family had wife. My father didn't like wife......Ohh...I I mean my mother didn't like my father's wife”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검찰관은 오히려 그 집 하녀인 리쟈 에게 관심을 보인다. 물론 리쟈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후에 그녀 덕분에 죽음을 모면하기도 한다.무엇보다 희곡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 부분이다. 희곡에서의 결말은, 흘레스따꼬프가 시장의 딸과 혼인을 약속하고 떠난 뒤 시장이 검찰관을 사위로 얻은 기쁨과 사람들의 축하에 빠져 있을 때 흘레스따꼬프가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 한통을 우체국장이 가져오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그 청년을 검찰관으로 착각했었음을 알게 되고 모두 흥분해 있던 찰나, 실제 검찰관이 등장함으로써 모든 등장인물들은 당황하고 경악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이때 모든 등장인물이 멈춤으로써 관객도 멈추게 되고 극적 긴장감과 함께 희곡은 끝난다. 반면 영화를 보면, 실제 검찰관의 등장으로 거짓 검찰관과 그의 수행원 야콥은 감옥으로 가게 되지만, 야콥의 농간으로 다시 실제 검찰관이 거짓으로, 거짓 검찰관이 실제 검찰관이 되는 듯 보였으나 거짓 검찰관 노릇을 하던 그는 자신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며 검찰관은 더더욱 아니라고 시인한다. 이를 본 실제 검찰관은 그의 솔직한 모습에 감명 받아 이 거짓 검찰관 역할을 한 청년을 새로운 시장으로 임명한다. 진짜 검찰관은 거짓 검찰관 노릇을 했던 청년의 그 단면만 보았기에 그가 정말 정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검찰관이 거짓 검찰관역할을 하던 청년의 그동안의 행동거지 등을 보았더라도 그를 검찰관으로 임명했을까? 진짜 검찰관의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의단면만 보고 그를 마을의 새로운 시장으로 임명한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롭게 시장으로 임명된 그를 위해 마을 사람들과 지주들은 또 다시 축하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때도 역시 그는 칼집에서 칼을 제대로 뽑지 못하며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며 칼집에서 칼을 뽑았는데도 칼이 없는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즉, 세대가 교체되고 사람이 바뀌어도 부조리한 사회 상황이나 관료사회의 악은 그대로 재현되리라는 모습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 를 읽고서는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글을 전개할까...하고 많이 망설였다. 까쩨리나와 까바노바의 인간형을 중심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까쩨리나와 기존의 수구적 봉건적 가치관의 상징인 까바노바. 이들을 중심에 놓고 이러한 두 인물 형 사이에서 지향점을 잃고 격동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인물형이 남편 까바노프적 인간형을 비교해 볼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작품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노래를 놓고 그에 대해 고민해 볼까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작품에서 계속 제시되는, 그리고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뇌우’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뇌우’는 1막의 9장과 4막의 1,3,5,6장에서 다섯 번 등장한다. 뇌우를 천둥소리와 우레 소리 등의 청각적 이미지와 구름의 모습 등의 시각적 이미지로 나눈다면 맨 처음 1막 9장의 바르바라와 까쩨리나가 대화할 때 나타나는 뇌우는 청각적 이미지의 천둥소리라 할 수 있다. 뇌우가 오는 것을 안 까쩨리나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자고 한다, 바르바라는 뇌우는 아직 저쪽에 있다며 까쩨리나를 안심시킨다. 즉 저쪽에 있는 그리고 곧 그들에게 다가올 뇌우는 까쩨리나와 바르바라에게 닥칠 불행이라 할 수 있겠다. 까쩨리나는 자신에게 곧 닥칠 그 불행을 미리 예견하고 두려워하며 그것을 피하려 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바라가 까쩨리나에게 뇌우가 다가온다는 것을 말한 후에도 책에서 보면 천둥소리가 두 번 더 들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작품의 긴장성을 더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4막 1장에서의 뇌우는 시각적 이미지의 뇌우라 할 수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 둥근 천장 아래로 몰려드는 사람들과 먼 하늘로부터 몰려오는 뇌우는 둘 다 시각적 이미지로 유사성이 있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천장 아래 모인 사람들이 발견하는 그림은 리투아니아의 파멸을 그린 그림으로 작품이 점점 더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을 예고하면서 비극적인 결말까지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작가는 작품의 내용이나 주인공들과 전혀 관계없는 제3의 인물인 행인들의 대화로 은근히 작품의 후반을 암시한다.다음으로 4막 3장에 나타나는 뇌우는 ‘(멀리서 우레가 친다)’로 청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모스크바에서 까바노프가 돌아온 후 바르바라가 까쩨리나를 걱정하며 보리스를 만나는 대목이다.보리스 :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요?바르바라 : 지금 오빠하고 산책로로 갔어요. 어머니도 함께요. 괜찮으시면 당신이 한번 다녀가세요. 아니에요, 오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요, 당신이 어면 정 말 당황하게 될 거예요.(멀리서 우레가 친다.)뇌우가 몰려오려나? (주위를 살펴본다.) 비가 오는군요. 사람들이 이리로 몰려 오고 있어요. )1막 9장에서 까쩨리나와 바르바라가 대화를 하다가 뇌우를 먼저 발견한 것은 바르바라 였고 여기서도 뇌우가 다가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바르바라이다. 어쩌면 그녀는 이 작품 전체에서 이 작품의 결말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반부에 가서는 자신이 오히려 오빠가 없는 틈을 타서 보리스와 까쩨리나를 만나게 해주는 음모를 꾸미는 음모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칼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로보아 이 작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라 본다. 물론 이 레포트에서는 그녀에 대해서는 서술하는데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겠다.4막 5장에서의 뇌우를 살펴보자.여인 :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였어요. 꼭 모자를 씌운 것 같네요.행인 1 : 저것 좀 봐요, 구름이 꼭 실뭉치처럼 감기고 있어요. 저 속에 뭔가 꿈틀거리고 있 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쪽으로 기어오는군요.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요!행인 2 : 자네는 내 말을 기억해 둬야 할 거야. 이번 뇌우는 절대 그냥 지나가지 않아! 내가 다 아는 바가 있어서 하는 얘긴데 누구 하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집을 몽땅 태워 버릴 걸세. 자, 저쪽을 보게, 분명히 빛깔이 심상치 않아! )먹구름으로 덮인 하늘과 실뭉치처럼 감긴 구름은 뇌우의 시각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우리 쪽으로 기어온다는 것은 불행이 다가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행인 1이 하는 대사에서 실뭉치같이 감겨있다는 말은 그들의 미래가 죽 펼쳐진 탄탄대로 라기 보다는 엇갈려있는 운명의 미래라 할 수 있다. 행인 2의 대사에서 누구 하나를 죽인다는 말은 불운의 여주인공 까쩨리나의 운명을 더욱 더 확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장에서도 작가는 행인이라는 제3의 인물들로 하여금 불길한 미래를 예견하는 등의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작품의 주인공들의 앞으로의 모습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마지막으로 4막 6장에서의 뇌우는 청각적 이미지의 뇌우이다.여지주 : ???어디로 숨겠다는 거지? 어리석군. 하느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어! (천둥이 친다.) 모두가 꺼지지 않는 불덩이에서 타게 될 것이다!(나간다.)까쩨리나 : 아! 더 참을 수가 없어!???까바노바 : 너는 잠자코 있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자, 누구하고 그랬다는 거지?까쩨리나 : 보리스 그리고리이치하고요.(천둥이 친다.)아! (정신을 잃고 남편의 팔에 쓰러진다.)까바노바 : 바보 같은 자식! 그 자유라는 게 바로 이런 거냐? 내가 그렇게 얘길 해도 들은 척도 않더니, 꼴 좋다! )작품 전체에 있어서 클라이 막스라 하겠다. 정신적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까쩨리나를 여지주는 더욱 더 몰아세우고 여지주가 무서운 저주를 까쩨리나에게 최고조로 퍼부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천둥이 치고 이것은 극적 분위기를 더욱 더 고조시킨다. 그리고 두 번째 천둥소리와 함께 까쩨리나는 마침내 쓰러진다. 이때 독자는 사건이 여기서 종결될 것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하게도 까쩨리나의 자살로 끝난다.
♣누런 피부, 하얀 가면♣어느 누구든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면 책의 제목을 보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은 책의 일부분인 동시에 전체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일ㅈ종의 환유요 메타언어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보자. 이라...평소 독서가 습관화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프란츠 파농 이라는 작가는 매우 생소했고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이란 단어 역시 그랬다. ‘책 표지를 보아 검은 피부는 흑인이고 하얀 가면은 백인이란 말인 듯하다. 그런데 왜 라 하지 않고 이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먼저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알아봐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넷으로 ‘프란츠 파농’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파농은 제3세계가 해방을 쟁취하던 20세기 중엽, 역사와 민중 속에 온 몸을 투신했던 지식인이자 정치가, 혁명가이자 전사,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였다. 또한 서른여섯 해밖에 안 되는 짧은 생애 동안 마르티니크 섬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알제리로, 알제리에서 프랑스를 거쳐 다시 튀니지로, 튀니지에서 아프리카 전역으로 옮겨 다니며, 정신과 의사, 작가,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투사, 알제리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아프리카 순회대사로 몇 겹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당시 잘나가던 흑인이었다. 지금부터 이 대단한 사람이 쓴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이 책의 서론에서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하여인간과 인간간의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나의 동포인 유색인종을 위하여내가 믿는 인류를 위하여인종편견 때문에사랑과 이해를 위하여(P.12)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 장 한 장 살펴보도록 하자.Ⅰ. 흑인과 언어파농은 제1장에서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채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받게 된 피지배자들의 심리에 주목한다. 백인 들은 자비로운 조력자를 가장한 채 야만인을 계몽한다는 미명 아래 흑 인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강압적으로 부과했던 것이다. 문제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언어에 정통함으로써 지배자와 동일 한 지위가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이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파농이 과거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말한다. "아직 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 이상 검둥이도 아니라는 저주가 나에게 내린 것이다." 파농이 느꼈던 저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검둥이로서의 자기 삶을 살 방도가 없다는 데 있다. 다만 백인의 언어, 불어만이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수단이 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파농 자신이 프랑스어라는 백인의 가면으로 자신의 검은 피부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일 수 있다고 본다. 이 인종차별 이라는 것. 짧게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모두 황인종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전혀 없는 나라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염색한 머리, 맥도날드, 코카콜라, 조기 영어교육, 심지어 렌즈의 색에도 파란색을 넣는 등의 백인 지향은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극심한 인종주의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이나 예술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국어를 깨치지도 못한 3∼4살 때 벌써부터 영어학원에 다닌다. 이야말로 내가 이미제목으로 언급한 `누런 피부, 하얀 가면', `누런 육체, 하얀 정신'이다. 물론 그것에 반발하는 민족성·민족문화·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과 민주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배타적·우월적이고 계급과 부권주의를 온존시키려는 것인 한, 식민지 체질 그대로다. 그런 반발이 거센 만큼 우리의 식민성, 특히 문화적 인종주의는 강력하다.세계화니 하는 미명으로 횡행하는 미국제국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가운데 기든스나 톰린슨 류의 탈권력화한 세계화문화론이 아니라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민족주의 없는 민족' 추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Ⅱ.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제2장에서는 유색인 여성과 유럽인 남성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이 장에서 그는 유색인 여성이 열등감, 혹은 흑인의 세계관의 지표 역할을 하는 아들러의 항진, 곧 과잉보상이라는신만의 고도(孤島)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흑인에게는 탈출구가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백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 백인의 강력한 힘에 대한 흑인의 동경, 튼튼한 보호막을 확보하기 위한 흑인의 집념, 이것이 흑인의 자아 그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구성성분이다.파농은 백인 청년이 물라토 여성에게 청혼을 한다면, 그 여성의 심중에는 틀림없이 뭔가 중요한 심리적 동요가 일었을 것이라 본다. 과거 금기 혹은 동경의 대상이었던 한 집단으로의 편입, 승인 혹은 동화에 대한 설레임 같은 것 말이다. 심리적인 자기모멸, 열패감, 그로 인한 비극적 결과물들, 그리고 빛에 도달할 수 없다는 허무감 등은 단숨에 사라질 것이라 본다. 아닌 듯 하면서도 지금도 유색인 여성이 백인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 이런 미묘한 감정을 약간은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은 백인 남성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실제 내 주위에 어떤 한 여성이(물론 그녀는 한국인이다.) 미국의 한 유명 대학교수와 결혼한 케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녀 또한 한국에서 인재였고 미래가 촉망받는 여성이었지만 미국인들은 그녀를 그녀 자체보다는 일단 황인종 여성으로 먼저 보아 결혼 후 처음에는 여러모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Ⅲ.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마르세유에 도착하자마자 홍등가로 달려가 백인 창녀와 관계를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흑인 청년들의 도착적 열등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제3부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에 관한 이야기 이다. 이장에서 그는 포기 신경증 환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포기 신경증 환자에게는 증거가 필요하다. 증거가 없는 진술 그 자체로만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확신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배우자와 대상적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도 그는 배우자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반복적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이러한 태도의 본질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포기 신경증 노니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자신의 분석절차 안에 포함시켰다. 그 이유만으로도 그는 고무적인 평가를 받을 만 하다.그러나 마노니의 성급한 분석은 “주체”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는 매우 진지한 연구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떤 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주체의 능력 그 외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재를 그의 연구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 역시 갈등의 병리학을 제시하는 듯한 마노니 저작의 일부분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말라가시의 성인들은 이질적인 환경에 동떨어지게 되면 전형적인 열등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데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에게는 유아기 때부터 열등 콤플렉스라는 세균이 잠복해 있음에 틀림없다” O. Mannoni, P.40이런 대목에 이르게 되면 마노니와 필자 사이에는 차이가 두드러지게 부각될 것이다. 마노니는 “식민주의적 착취는 다른 형태의 착취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식민주의적 인존차별주의 또한 다른 형태의 인종차별주의와 질적으로 다르다.” O. Mannoni, P.27고 부연한다. 나는 이런 그의 의견에 반대한다. 실상 어떤 형태의 착취든 간에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의미에서 착취란 것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는 결코 그 어떤 인종차별주의와도 다르지 않다.마노니는 말라가시인들에게 열등감 아니면 의존행위라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는 이 두 가지 해결책을 제외하고는 구원이 없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참고로 흑인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은 오늘날 까지도 지속된다. Steele and Aronson(1994)은 흑인학생들이 흑인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자기가 확인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훈구, P.196연구자들은 이러한 불안을 고정관념적 위협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위협이 흑인학 얻은 반면 흑인의 경우는 연구자가 검사를 실험하는 r서이라는 설명을 들은 조건에서는 백인과 비슷한 성적을 보였지만 연구자가 그들의 지적 능력을 검사하고 싶다는 지시를 받은 학생들의 경우 백인보다 못했다. 즉 ‘흑인학생들은 흑인은 열등하다.’ 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해서 항상 예민해 있고 자기들이 잘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평가 상황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마로니는 무의식적 신경증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프로스페로 콤플렉스”를 식민주의의 존재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결론을 적용할 만한 구체적인 토대를 마련하고 있지는 못하다.Ⅴ. 흑인성이라는 사실전체 장 중 에서도 가장 절창인 제5장, [흑인성이라는 사실]에서 그는 하나의 주체로 서지 못하는 '흑인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짤막한 대화를 인용해 보자.흑인: 난 못해요, 엄마.리지: 왜 못 해?흑인: 내가 백인들에게 어떻게 총질을 해요?리지: 그래? 그네들을 괴롭힐 다른 방도가 없잖아, 안 그래?흑인: 상대는 백인들 이라구요, 엄마.리지: 그래서? 그네들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돼지 잡듯 도살해도 괜찮단 말이냐?흑인: 그래도 저들은 백인이잖아요. (174p)파농은 이 대화를 분석하면서 흑인의 대사가 열등감의 표현이 아닌, '비존재'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P.174) 그 '유명한' 사르트르 역시 그러한 '흑인성', '비존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솔직히 나 역시 흑인들은 나와 같은 인간의 범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나쁜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특히 흑인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흑인이라는 존재는 짐승과 비존재라는 범주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파농은 말한다. "그들은 어딘가 존재한다. 하지만 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