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은 있어도 불가능은 없는 장애인-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애인의 직업을 중심으로-Ⅰ. 머리말최근에 장애인 복지이념이 ?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이 교육활동, 직업 활동 등 사회 참여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여가?종교 등의 욕구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방향으로 변해가면서 장애인의 복지 증진에 대한 여러 정책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이런 정책의 개발은 비효율적인 행정과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이 없다.?장애인의 날?이 있는 매년 4월에는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의 성공 신화를, 연말에는 어렵고 힘든 장애인에게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반짝? 관심이 나타난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중된 시각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자리 설 곳 없게 만들어 소외시킨다. 우리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만들어 내는 편견은 장애인을 움츠리고 장애인으로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이런 사회의 현실을 바탕으로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애인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인 직업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장애인을 조금 더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과 다른 관점으로 사회를 살아가는 장애인을 경험할 수 있기에, 불편은 있어도 불가능은 없는 장애인의 모습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과 장애인의 직업의 부정적 모습을 주제로 삼았다.Ⅱ. 장애인의 정의와 구분1. 장애인의 정의? 기능 장애 - 심신의 구조적. 기능적 손상자체를 의미? 능력 장애 - 손상에 의한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활동에 나타나는 2차적 장애를 의미? 사회적 불리 - 손상과 능력 장애로 인해 사회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불이익으로 편견, 차별 등을 의미장애에 관한 정의 및 의미는 국가 및 시대에 따라 사회나 문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장애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는 일반집단의 평균으로부터 일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시대나 사회의 가치기준상으로 볼 때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사회적 등의 통스러운 암흑의 시기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장애인은 악령이나 마귀가 붙은 것으로 이단시했으며, 생산이나 전쟁에 유용하지 못한 장애인을 부정기, 유기, 조소시하였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냉담한 우생학적 방법으로 장애인을 처우하여 생존권을 박탈하였고 로마인들은 농아자(청각장애인)를 강물에 던져 익사시키거나 투기장에 이용하였으며, 출생 시에 장애가 명백한 아동들은 목을 베어 광장에 매달았고, 출생 시에 건장하였으나 어릴 때 장애를 갖게 된 아동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장애인관은 기독교가 출현하여 전파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중세사회(5-15세기)중세에 와서는 장애인이 귀족의 총애와 보호를 받기도 하였고, 어떤 지역에서는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극히 일부였고 고대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계속되었다. 장애인을 악마가 들린 것으로, 심리적인 병은 신의 벌로 생각했다. 이러한 과학적인 무지와 미신적 편견을 가지고 있어 이 시대의 장애인들은 무능력자, 귀찮은 존재자로 취급되어 인간적 존엄성과 생존을 유지하기가 곤란한 지경이었다.? 근대사회(16-19세기)근대 산업사회에서는 기능주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기계화, 대량생산의 시대로, 실용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인간의 유용성, 생산성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장애인의 문제를 노동생산적인 입장에서 영속적인 결손노동력으로 보게 되었다. 16-17세기에 정신장애, 정서장애를 미친것으로 보고 사회에서 분리하게 되었고 17세기에도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로 멸시, 냉대, 가치절하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장애인을 일반인과 분리하여 비인간적으로 다루었고 이는 유럽의 여러 곳에서 수용소가 출현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20세기-)20세기가 되어서야 장애인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특수아동 치료에 현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지능측정에서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고 여러 세기 동안 부인된 서비스에 보다 접근하게 되었다. 반면에, 장애인에 대한 공포나 분리는 여전하였고 주요 해결책은 직업재활이나 소득유지 프로그램의 적용이다. 그러나 이 정책에서는 장애인의 신체적 조건과 작업능력을 중시하면서 장애인은 지속적인 의존생활, 낮은 보수, 제한된 승진의 기회를 갖게 한다.? 사회. 정치학적 관점본질적으로 손상이나 기능장애에 의해 초래된 사회적 불리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애는 개인의 무능 때문이라고 보다는 주로 구조화된 사회적 환경이 장애인의 욕구와 열망에 부응되지 못한 때문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장애인은 다른 비 특권집단과 마찬가지고 하나의 소수집단으로 볼 수 있으며 장애인의 문제들을 내적 개인적 결점이라기보다는 사회, 경제적 질서와 같은 외적 결점으로 본다.Ⅳ. 장애인의 취업 현황1.장애인의 취업 일반 현황취업 장애인 중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비율이 28%로 취업 구조가 열악하다.〈재가 취업 장애인의 경제활동 분야 >구분의회의원?관리자전문가기술공?준전문가사무종사자서비스종사자판매종사자농?어업기능원?관련기능 근로자장치?기계 조작?조립원단순노무직계비율1.02.65.46.37.28.919.012.39.727.6100.0전국비율)2.68.110.114.212.911.58.110.611.110.8100.0취업장애인의 취업분야는 주로 단순노무직(27.6%), 농?어업(19%), 기능원 관련 근로자(12.3%)에 편중되어 있고, 단순 노무직에 대한 일반 취업비율이 28%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건데, 장애인의 취업구조가 열악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교육 및 전문기술 양성과 함께 장애인 지향적 취업 아이템개발을 요한 것으로 나타남? 일반적인 구직방법한국사회 복지학회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장애인이 실체 취업 과정에서 직장을 구하는 방법 및 그 경로는 44.2% 정도가 가족, 친지, 이웃 등의 개인적인 관계 망을 통해 취업하고 있고, 14.9%가 장애인 단체의 소개를 통해, 그리고 14.9%는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행정기관을 통해 취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애인 관련 단체나 행정기관 및 장애인 고용 촉진 공단을 노동당 장애인위원회는 “장애인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명목 하에 장애인들을 이용하며 그 위험한 철거용역을 시키고, 그들의 삶과 별다를 바 없는 노점상들을 짓밟게 하고, 용역에 이용했던 장애인들에게는 술 한 잔 사주는 것으로 끝내며 그 많은 돈으로 몇몇 권력을 쥔 사람들의 배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이 이들을 과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라며 실망을 표했다.2)여성장애인의 성매매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각 나라마다 전체 인구의 10%(그중 여성이 45%를 차지한다고 본다)에 해당하는 인원이 장애인이라고 평균적인 수치를 밝히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인구를 대략 4천 5백만으로 볼 때, 전체 인구의 10%인 450만 명이 장애인이고 그중 45%인 약 200만 명을 여성장애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5년마다 실시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0년도 장애인실태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장애인은 모두 약 150만명으로 추정될 뿐이며 여성장애인은 약 50만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이 드러난 수 보다 드러나지 않은 수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는 수치이다. 여성장애인은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소수자들이다. 이러한 여성 장애인은 조금이라도 그보다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여성장애인이 갖는 사회적인 여러 가지 조건과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①여성장애인 성매매 유입경로여성장애인이 선급금을 받고 성매매 현장에 유입되더라도 100만원 150만원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고 그 돈이 빚으로 여성 장애인에게 덜미가 되어 평생 그 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일반 여성이 흔히 인식하는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과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정신지체 여성장애인이 성매매에 유입되는 상황은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요약해 보면 업주가 직업소개소에서 비싸게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여성장애인들은 상품으로 칠 때 그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업주들은 일부러 여성장애인럼 성매매 산업에서 일반여성에 비해 훨씬 심한 학대와 모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장애인이 스스로 업소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업주들이 다루기 쉬운 여성장애인을 성산업에 끌어들이는 경향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보면 더 이상 여성 장애인의 성매매 문제는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보여진다.빈곤과 경제생활의 절대적인 어려움, 성매매 시장에서의 현실적인 이유 등을 통하여 여성장애인의 성매매 유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성매매 여성장애인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애인 등록이 되어있지 않거나 기준에 못 미치는 장애인이 상당히 있을 수 있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대통령령으로 따로 범주를 정하는 것보다 현실적 장애를 가진 자를 장애인으로 정의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여진다.③여성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개선방향여성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의 개선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은 물론 여성장애인 교육권 확보, 여성장애인에 대한 폭력 근절 그리고 여성장애인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연구 실시, 여성장애인 자조단체 활성화와 지역협력체계망 조성 등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3.장애인 직업의 긍정적인 측면①장애인과 고용장애인 고용 정책은 21세기에 들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통사고, 안전사고, 노령화 등으로 인한 장애인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개입은 사회가 갖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장애인 고용정책은 장애인의 삶의 안정과 사회 참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장애인 고용은 장애인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통합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과제이다. 장애인에게 고용은 노동 시장에서의 지위 확보 이상의 의미, 즉 생존권과 노동권 확보, 그리고 사회적 차별의 제거라는 의미까지 갖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 장애인 고용촉진법이 제정 ? ?공포되어 시행되고 있으나,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의 장애인 고용은 상당히 저조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의 고용에 대한 욕구 파악과 함께 장애
가족 관계 중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고찰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같은 역할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여러 가지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우선 가족끼리의 의사소통과 분위기의 조성을 위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섯가지 조건은 근접성, 친숙성, 유사성, 보상성, 그리고 개인적 특징이라고 생각한다.우선 근접성은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과 부딪히며 접하는 거리를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가깝게 있으면 더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다음으로 친숙성이 있다. 우리는 자주 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즉 자주 접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친한 관계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그리고 유사성이라는 것은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사람을 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유사성이 친교관계를 촉진하는 이유로는 첫째, 서로 유사하면 상대방의 속성을 이해하기 쉽고 두사람 사이에 일어날 접촉의 성격을 예상하기 쉽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을 감소시켜 접촉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우리는 유사한 상대에 대해서는 그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친교활동을 촉진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사한 사람들간의 관계는 서로에게 보상을 가져다준다. 유사한 사람끼리는 서로의 태도나 의견에 대해서 공감과 강화를 많이 주고받게 되므로 긍정적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태도나 취미가 유사한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적인 활동이 많아져 접촉의 기회가 증대되므로 친한 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우리는 나를 좋아하고 즐거운 체험을 제공하며 도움을 주는 보상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이렇듯이 보상성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보상은 매우 다양하다.첫째는 상대방으로부터의 호감과 애정이다. 우리는 나를 좋아하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둘째, 즐거운 체험을 함께 나누는 사람과는 친해진다. 함께 대화나 취미활동을 통해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한 보상적 효과를 지닌다.셋째, 정신적 또는 물질적 도움은 인간관계를 촉진하는 주요한 보상적 요인이 될 수 있다.이러한 보상성과 관련된 속성이 보완성이다. 우리는 우리와 보완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지니지 못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보완적인 상대방으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지니지 못해 부러워하는 속성을 지닌 사람은 더욱 높이 평가되어 호감이 증가되는 경향이 있다.이 외에 개인적으로 가지는 특징이 있다.이러한 사항을 바탕으로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적용한다면 가족관계의 개선을 비롯한 인간적이고 친밀한 가족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때리는 부모가 없으면 매맞는 자녀가 없다.' 일반적으로 매를 때리는 부모의 속사정은 자녀가 올바르게 자라 주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를 맞는 자녀의 입장에서는 때리는 부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노와 공격심을 느끼게 된다. 이는 곧 때리는 부모를 사랑하거나 존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만일 부모가 자녀를 때릴 때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매를 맞고 잘되는 자녀가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매를 많이 때려야 그 매를 맞은 자녀가 잘 자랄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를 맞는 자녀는 일반적으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부모를 향한 공격심과 적개심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부모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등의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이러한 심리현상이 우울증과 분노심과 공포심 그리고 나아가서는 강한 죄의식을 갖게하여 무기력하고 나태한 성격을 소유하게 하는 자녀의 성격특성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자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문제를 가진 자녀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문제를 가진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가정의 부모는 불행하다 못해 처참한 느낌을 갖는다.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에 문제 자녀가 있으면 그 가정은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과 기능을 상실한 가정이다. 가정의 참 위치는 때리고 맞는 부모 자녀 관계를 형성하는 곳이 아님은 물론 서로 비난하고 저주하는 곳도 아니다.오늘날 가정의 의미가 퇴색되고 가정이 이룩해야 할 좋은 양육환경을 조성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곧 가족 성원간의 응집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응집력의 결여는 부모의 바람직하지 못한 양육태도에서 비롯된다.문제 가정을 형성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양육 태도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다만 자녀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정이 시끄럽고 부모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들 때문에 불행한 부모는 없다. 다만 부모가 부모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는 자녀가 고통스럽고 불행할 뿐이다. 문제를 가진 자녀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녀의 문제를 보았을 때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제부모가 문제자녀를 기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학자들, 임상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녀를 직접 양육하는 부모들은 자녀의 문제는 자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났거나 아니면 생활 주변에서 학습하게 된 버릇에 의한 자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잘 양육하고 싶은 것처럼 모든 자녀들도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자녀의 올바른 성장과 관련된 부모와 자녀들의 염원은 어찌보면 동일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를 문제가 없는 훌륭한 자녀로 양육하고 싶은 욕심처럼 그 욕심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할 수 있도록 자녀의 성장본질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 합당한 양육을 한다면 어떠한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못할 것인가?성격상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모들 특히 악습을 가지고 있는 많은 부모들이 자기들의 성격과 행동양상에 표출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만 올바르고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자라주기를 바라는 욕심에는 적지 않은 모순이 있다. 마치 부모 게가 자신은 옆으로 걸으면서 자녀 게에게만은 앞으로 똑바로 걷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녀가 밝게 자라 주기를 바란다면 부모 또한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통한 바른 생활 습관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자녀를 잘 기르지 못하는 부모들은 성격상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모들이다.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상의 문제는 부모들 자신이 원해서 가진 문제가 아니다. 부모들 문제 역시 그 부모들의 부모에 의해서 양육된 성격이다. 그러므로 부모들 자신이 그들의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함은 물론 설사 본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를 개선할 의향이 없다. 혹시 좋지 않은 성격을 개선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개선 불가능한 것이 성격이다. 성격은 성격을 재조정해 주는 상담전문가에 의해서만 개선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차이점Ⅰ. 머리말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 표기 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지식인에게 한문은 낯선 문자가 아니었고 문자에 대한 자신감은 저술을 感發(감발)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司馬遷(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려 인종 23년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러한 영향아래 만들어진 것이다.『삼국유사』는 무인정권과 원나라의 성립이라는 두 가지의 사건과 그 배경아래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승려였다는 점에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변화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이렇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현재의 우리에게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등불’이 됨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지는 다름대로의 특징과 이를 통해 각각의 서적에서 중요시해야 될 부분을 찾아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삼국사기』란 어떤 책인가?『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중엽 곧 12세기에 만들어진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역사서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라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원전 57년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정립하던 삼국시대, 신라 통일기를 거쳐 자인 김부식은 각 부분의 머리말?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는 총 50권으로 본기 28권 ? 지9권? 표3권? 열전10권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구성은 사마천의 사기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본기와 열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본기(本紀)는 역대왕의 재위기간 중에 일어난 사실을 연(年)? 월(月)? 일(日) 순으로 엮은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본기는 총 28권으로 신라본기 12권, 고구려본기 10권, 백제 본기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신라본기 12권에는 통일신라 7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외형상으로 신라에 편중되어 있지는 않다.연표(年表)에는 삼국의 연대를 중국의 연대를 대조하였다. 박혁거세 즉위년(기원전 57년)부터 경순왕 9년(935년)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지(志)는 역대 제도의 연혁이나 제도사 또는 문화사를 기록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잡지라고 하였다. 제사와 음악을 1권 분량으로 정리하고, 옷? 그릇? 집 등은 2권 분량으로, 지리는 36권 분량으로 정리하고, 조직과 벼슬에 대한 것은 79권으로 정리하였다. 이는 일종의 자료편이라 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신라 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열전(列傳)은 특기할 만한 인물을 가려 그 전기를 써 놓은 것으로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인 기전체 역사서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인물기준을 항목별로 만들어 자세하지 않고, 여성 부분 즉 왕후 ? 공주에 대한 열전은 없다.10권의 열전 가운데 김유신 한사람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통일 전쟁기인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어 위국충절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2.엮은이 김부식은?김부식은 문종 29년(1075년)에 태어나 의종 5년(115난관의 묘청(妙淸)의 난 때 닥쳐왔다. 이 당시 김부식은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하여 묘청의 난 진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진압은 그다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김부식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 세력인 정지상 ? 김안 ? 백수한 등의 목을 베었다. 정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세상에서는 말이 많았는데 정지상이 김부식 자신보다 문장을 더 잘하였기 때문에 이를 시기하여 일부러 죽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묘청의 난은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쉽게 진압 하는가 했는데 반란군의 처분을 놓고 다시 개경의 유신들 사이에 분란이 생겨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이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吏部事)에 승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史 上柱國 太子太保)의 자리도 겸하게 되었다. 이러한 벼슬은 모두 왕 아래에서 국사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위치였다.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로 한 것은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이었다. 왕은 그를 도와줄 여덟 사람의 젊은 관료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끝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정적은 생겨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난 것도 반대파의 거센 압력에 밀린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유교주의의 대의명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보려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도 그 같은 이상을 실현하거나 거울로 삼자는데 있었다.김부식에게 내려진 시호는 문열(文烈)이었다. 김부식의 문집은 20여 권이 있었다고 하나 이제는 전하지 않는다. 김부식의 많은 글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우리나라 문장가의 대가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송나라 사람 서긍, 마지막으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김부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12세기의 상황아래에서 그 때의 지식인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민족주의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Ⅲ. 삼국유사란 어떤 책인가?『삼국유사』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라는 의미 이외에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음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저자인 일연의 영향으로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만약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기술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제를 가졌기 때문에 내용의 잡다(雜多)함이 특징이 되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는 이유가 되고 있다.1. 삼국유사의 체제『삼국유사』는 총5권으로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이렇게 9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각 편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王曆), 준(準) 역사서로서 기이(紀異),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興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三大分)해 볼 수 있다.왕력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분이 되는 부분으로 중국?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등 역대 여러 왕의 세계(世系)와 그 연대(年代)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기이(紀異)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 그렇기 때문에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연구자들은 흥법(興法) 이하가 중국의 승전(僧傳)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말한다. 일연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승전(僧傳) 세권의 목차를 보면 고승전(高僧傳)과 속고승전(續高僧傳) 그리고 송고승전(宋高僧傳)이다. 이 세 책은 거의 유사한데, 중국의 승전(僧傳)이 대체로 이런 양식으로 쓰여 졌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는 분명 상당한 영향관계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불교의 역사 그 자체의 전달에서는 일치하지만, 일연의 관점에서 설정된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2.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고려 후기의 승려이며 학자인 일연은 1206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이었으며 이름은 견명이었다.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아홉 살 나던 해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처음에는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일연은 열네 살 되던 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가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승려로서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스물두 살에 승과(僧科)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고 전란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곧은 수도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서,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세속의 지위에 큰 의의를 부여할 바가 아니나, 그가 얼마나 자기 생활에 충실했던가를 알게 해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마흔네 살에 정림사(定林社)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회연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때부터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왕명을 받들어 불교 행사를 주관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남아 유일하게 전하는 불교 관계 저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曹洞五位)’를 찬술하기도 했다.일연이라는 이름은 만년에 쓴 것으로 본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로는 개명의 이유를 분명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옛 사람들의 작명 습관으로 보아 세속에서의 이름과 승려가 되어 처음가진 다.
여성의 지위목차Ⅰ. 머리말Ⅱ. 봉건 사회의 구조Ⅲ. 여성의 지위Ⅳ. 자본주의 사회 구조로의 이행Ⅴ. 맺음말Ⅰ. 머리말중세 사회를 지탱한 기본 요소 중 하나인 봉건제는 사회유형이라는 개념과 중세인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토지와 무력의 소유자인 귀족층, 영혼구제를 담당한 성직자층, 생산을 담당한 농민층이나 도시민층 등으로 구성된 계급들은 각자 가진 기능과 계급간의 신분질서와 지배? 예속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사회형태로서 봉건제의 구조적 특징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이다.구성원들 간의 기능분화에 따른 신분질서와 지배?예속 구조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중세 봉건사회는 어느 사회보다 불평등한 사회였으며 신분과 직업의 세습화가 그러한 체제의 고착화에 크게 기여했다.불평등적 구조는 귀족층이든 농민층이든 간에 봉건제를 구성하는 국면인 주종제와 장원제 내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기능과 역할 분석을 통해서도 파악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그러나 이러한 이유만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불평등의 모습이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봉건사회 구조와 관련시킨 여성의 불평등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봉건적 요소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이는 수많은 연구를 통해 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불평등론은 주로 생상활동과 그 결과로 산출된 생상물의 소유권, 노동의 상대적 가치평가, 출산과 육아를 전담한 생물학적 특성과 같은 사실에 기초한 분업이론, 사유재산제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족제의 형태 등의 분석을 통해 알아보았다.그런데 이 같은 것은 결국 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고 봉건사회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특징에 근거하여 여성의 불평등론을 논하고 그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당시 여성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봉건적 사회체제 속에서 스스로의 권익을 찾으려고 투쟁하지도 않았다는 부분을 볼 때, 이는 본건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불평등론을 지적하는 부분적 요소이지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여성들은 불평등이 실현된 법과 관행에 대해 저항하거나 그 자체를 부수려는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계급화 하지 못했다. 즉 봉건적 제도와 관행 아래에서 여성은 스스로가 남성들에 비하여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타 의식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봉건 사회의 지배층은 봉의 수여와 군역납부를 기본으로 성립된 주권제를 통하여 지배와 예속 관계가 맺어졌다.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중심에는 당연히 남성들 중심의 계약 사상이 위치하고 있다.따라서 봉과 군역의 결합이 지배층 내에서도 남성 중심의 사회체제를 형성하도록 촉진시켰다.비록 귀족층 여성이 군역납부를 조건으로 봉을 소유할 수 있고 남편의 부재중에는 그 역할을 대행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은 남편이 부재하거나 사망하였다는 전제가 필요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 가운데서도 군역의 간접적 납부라는 형식이 개제되었다.더구나 혼인과 함께 봉에 대한 지배권이 남편에게 양도됨으로써 혼전에 상속녀로서 지녔던 특권마저 상실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따라서 귀족 계급 내에서 여성과 남성간의 불평등론은 계약사상을 바탕이라면 한 주종제와 함게 상속제의 특징 및 혼인에 따른 여성의 지위변화라는 사회적 구조와 제도의 틀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한편 장원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농민층의 가족제나 친족제도도 남자 중심으로 형성되었다.토지보유로부터 비롯된 지배층의 군역납부와 대칭되는 부역과 공납을 비롯한 농민층의 각종 의무를 영주들이 안정적으로 징수하기를 바랬고 이를 위해서는 농민보유지가 그의 권한이 미치는 한계내에서 손상되지 않고 상속되기를 바랬다.이러한 점에서 장원을 운영한 영주들은 혼인을 비롯한 각종 동기로 인하여 영주권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의 토지보유를 관습이나 상속법을 통해 근본적으로 차단하려 노력했다.또한 영주들이 장원 운영의 효율성 추구와 예속민의 지배수단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형성하려고 했다촌락공동체의 관습에 따라서 여성들이 토지보유는 물론 상속, 매매, 양도 등 재산권 행사에서 귀족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제약을 당했다.이러한 불평등은 당시의 혼인제도나 여성의 임금수준 등 여러 가지 관행 속에서 확인된다.Ⅱ. 봉건 사회의 구조봉건제(封建制)라는 용어는 봉(feudom)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하나의 통치구조와 연관성이 있다. 주군이 봉신에게 봉토와 함께 그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한 대신 봉신은 주군에게 군역을 비롯한 각종 의무를 납부함으로써 맺어진 쌍무적 계약제인 주종제(vassalage)가 성립되었다. 이 제도는 중앙집권적 지배구조가 무너짐으로써 수립되고, 또한 그것이 그 자체로서 그 구조의 발달을 촉진시킨 연쇄성을 지녔다.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무너지고 공권력이 약화됨으로써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체제의 창출이 요구되었을 때 주종제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힘의 중심점이 무너졌을 때 이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나 제도가 출현함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종제란 중세적인 시대적 배경 하에서 출현한 지배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주종제가 주군과 봉신간의 개인적인 지배와 예속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공권력의 약화와 함께 지배층이 친족집단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세력 확대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봉건적 사회구조는 지배계급 상호간에, 또한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에 수립된 불평등을 전제하고있다. 원래 봉건적 관습에 따라서 봉을 매개로 하여 계약이 성립되면 그 구조내에서 동일한 주군에 종속된 봉신들간에는 물론 서로 다른 주군에 속한 봉신들 사이는 그들의 권리와 존엄성이 보호되었다는 점에서 평등성이 전제된다. 이와 같이 동일한 계급과 계층 내에서의 평등성과 서로 다른 계급과 계층사이의 불평등성이 봉건사회의 이상이고, 그것이 그 사회의 정의였다.이러한 배분적 평등론을 기반으로 성립된 봉건사회는 철저하게 직업을 분화하고 신분질서를 나누었으며, 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그리고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러한 세속적 질서체계를 확립하는데 기독교 사상이 공헌했다기독교 사상속에 담긴 여성의 종속론은 바울의 원죄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즉 이브의 타락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이 시작이었다고 보는 것이다.신학자들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현세적 불평등론과 내세적 평등론 및 배분적 정의론이 봉건제라는 세속적 지배구조 속에서 귀족층 내부의 남성들간에, 또한 동일 계층내에서의 불평등성, 예컨대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성 그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지배와 종속을 이념적으로 정당화 시켜놓은 결과를 초래했다.현세적 불평등론에 대비한 내세적 평등론은 중세 말 하층 성직자, 도시만, 농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른바 농민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근본적으로 부정되지 않고 지속되었다,중세 말 일어난 농민반란의 이데올로기는 지상천국을 약속한 천년왕국설이다. 이는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장한 내세적 평등보다는 오히려 현세적 평등에 더 주목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이 같은 사실이 현실적 불평등을 인식할 중요한 근거가 된다.그러나 지배층과 남성들의 세력이 약화되지 않는 한 내세적 평등론과 현세적 불평등론이 법과 관행속에 실현된 현실성이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Ⅲ. 여성의 지위◆중세 봉건사회를 지탱한 요소 중 하나인 주종제 자체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불평등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었다.그리고 그 전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성이 양계친에서 부계친으로의 전환, 혈연과 재산상속에 있어서 남성 우선주의, 적자 우선주의, 근친 우선주의, 그리고 봉에 부가된 봉신의 의무 중 군역 납부라는 전사적 기능의 수행이라는 필요성 속에 구체화 되었다.주군과 봉신간의 보호와 봉사라는 관념은 무엇보다도 주군의 봉신에 대한 지배와 봉신의 주군에 대한 복종의 이념을 강하게 전제하고 성립되었다.이러한 봉건사회 구조가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결합될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 가부장과 가족 구성원간의 보호와 종속개념으로 확대되어 사회화됨으로써 굳건한 사회윤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즉 가부장권의 강화가 봉건적 체제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문화전파주의)페터 크네히트배경대항해시대 이래, 유럽 이외의 문화와 민족에 관한 서양인의 인식이 서서히 높아졌다. 동시에 유럽인이 아닌 민족을 인간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양문화와 아주 다른 그들의 문화형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화두로 떠올랐다.19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생물의 차이를 진화결과로서 설명하려는 진화론은 각 문화의 독자성을 ‘독립발생’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전체 진화과정 단계에 비추어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민족이동이라는 역사적 현상의 결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유사한 문화요소가 존재할 수 있는데, 그런 현상을 문화전파의 흔적이라 보는 문화전파론도 제기되었다.진화론이 당시의 학계에 준 자극은 매우 컸으며, 19세기 후반의 인류학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화관념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관념이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이라도 동일한 정신적 소질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인류의 정신적 제일성)관념이었다. 이 관념을 연구의 대전제로 삼은 학자는 어떤 민족이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경로를 밟아 단순한 문화에서 점차 복잡한 문화로 발전해 나간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만, 구체적 자료분석을 토대로 얻은 결론이 아니었다.이러한 약점을 느꼈던 것일까. 옥스퍼드대학 최초의 인류학 교수인 에드워드 타일러는 통계학적 방법을 차용하여 문화현상 간의 독특한 상관관계를 조사하였다. 세계 각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그는 결혼 후의 거주규제와 친족 간 기피관습 사이에 독특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그는 이 같은 두 현상사이에 내적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유착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더 비교해보면 그 발전방향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반대로 독일에서는 프리츠 그레브너가 타일러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착에 주목한 방법론의 근본원리를 높이 평가하며 그것을 문화의 지리적 분포를 검토할 때 응용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선구자의 한사람이 아돌프 바스티안이다. 그는 인류의 정신적 제일성을 인정하였다. 즉, 인류의 일원인 이상 어떤 인간이라도 동일한 정신적?지성적 소질이나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같은 정신적 제일성을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기본적 관념이라 보고, 이들은 ‘原質관념’이라 불렀다. 나아가 인류 공통의 원질관념은 각 민족이 지리적 환경 등 개별생활 조건에 따라 만들어낸 민족 독자의 관념, 이른바 바스티안이 말하는 ‘민족관념’을 구성한다고 보았다.프리드리히 라첼도 민족관념을 중시하였다. 그는 문화요소의 분포상황을 지도에 기입하고 분포의 실제범위를 파악하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역사적 민족이동에 의해 문화요소가 분산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문화요소는 서로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화요소들의 역사적 관계를 발견하는 데는 요소 자체의 형태가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였다.이후 그레브너와 동료 베른하르트 앙커만이 각각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에 관해 발표하면서, 각 지역에서 ‘문화층’의 존재방식을 논하였다. 이는 새로운 단계의 문화연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연구에 응용할 방법론에 관해서는 유럽과 미국 학자들의 견해가 다를 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조차 다른 경향을 보였다.이론의 특질문화가 일정한 발생지로부터 퍼졌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역사적인 방법으로서 파악하려 한 전파주의는 타일러가 만년에 이르렀을 무렵에야 대두하였다. 영국에서는 엘리엇 스미스가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조사한 경험을 토대로, 미라를 만드는 방부기술이 최고로 우월한 기술이며 다른 문화요소들을 만들어내는데도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집트의 문화요소가 차차 동방 등지로 퍼져나가 최후에는 태평양을 건너 신대륙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다.스미스의 이러한 공상적 전파주의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리치가 지적한 것처럼, 전파설은 20세기 초 영국 인류학계를 지배한 정통파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모든 것이 이집트로 통한다는 스미스 학설의 매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리버스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리버스는 친족관계와 명칭을 분석하였다. 그는 그레브너의 연구가 사회구조, 언어, 종교 등을 물질문화와 마찬가지로‘사물’로서 취급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사회구조 같은 문화의 측면은 물질문화에 비해 사람의 생활에 훨씬 깊이 연관된 것이기에, 사회구조적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 때문에 리버스는 멜라네시아의 결혼형태를 설명하는 데는 진화론적 방법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리버스는 그레브너의 여러 논문을 비판적으로 언급하였지만,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저서『민족학 방법론』(1911)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앞서 말했듯이 그레브너는 프로베니우스의 ‘문화권’개념을 이어받아 먼저 오세아니아 문화를 분석하는 데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화살을 테마로 선택하여 멜라네시아 자료를 분석하고, 그 지리적 분포를 입증하기 위하여 「멜라네시아의 활 문화」라는 논문을 썼다. 나아가 당시의 민족학에 학문으로서 가장 필요한 것은 확고한 과학적 방법론임을 통감하고, 방법론 확립에 적극적으로 몰두하였다.그레브너는 민족학 방법론 구축을 위해 역사학자 베른하임의 방법을 참고하였다. 그렇지만 민족학이 다루는 자료에는 문서가 적기 때문에 그레브너는 그가 ‘직접적 자료’라고 칭한 것, 즉 문자 없는 사회의 문화를 구성하는 각종 자료를 다룰 수 있도록 역사학적 방법을 변용하여 적용하였다. 그는 연구 자료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객관적 분석이라는 역사학 고유의 방법을 민족학 특유의 자료에 적용할 수 있는 민족학 방법론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레브너는 민족학을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이해했기 때문에 민족지 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엄격히 비판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민족학은 오히려 개개의 문화사실을 정확히 포착하여 그 인과관계 또는 역사관계의 파악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레브너가 제안한 연구법은 자료를 풍부하게 모으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진화주의자의 포괄적 일반론과는 아주 대조적이다.이 방법론에 따라서 자료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사물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해석한 후에야 비로소 연구의 다음단계, 즉 사물의 결합방식에 대한 검토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공간에 분산된 유사한 문화현상을 검토하고 그들의 역사적 계보관계를 조사하게 된다. 그레브너는 주관적 판단을 막기 위하여 확실한 방법의 토개가 될 규준 몇 개를 제시하였다.첫째, 문화요소의 형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문화요소가 이런저런 지역에 산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들 요소의 독립기원을 인정하는 것인 속단이다. 반대로 이들 요소가 서로 관계있다고 추정해도 좋다. 그러나 유사성을 인정하더라도 무엇이 유사한가를 구체적으로 결정할 때 주관적 판단에 빠질 가능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관적 판단을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레브너는 주관적 판단을 최소화하기 위해 ‘형태규준’이라는 첫 번째 주요규준을 설정하였다. 이 규준은 서로 비슷한 사물의 특징이 사물 자체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결과한 것이 아닌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형태규준을 응용하여 밝혀진 사물의 상호관계를 확정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주요규준이 필요하다. 이것이 ‘양적규준’이다. 이는, 어떤 지역 내에 예컨대 화살 같은 하나의 사물이 특정 유사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물과 함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타 몇몇 현상이나 요소들이 특징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경우에 성립하며 기능한다. 즉, 한 지역에서 문화복합이 존재하면,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독특한 관계를 갖는 경향이 있다.주로 통계적으로 확인 가능한 이런 특징적 문화요소 복합 외에 그레브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추가하였다. 그것은 해당 지역의 공통언어이다. 즉, 동일기원을 인정할 수 있는 문화요소가 분포한 구역전체에서 같은 語族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면, 이는 이 구역의 문화요소의 동일발생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이상의 두 규준은 형태가 유사한 문화요소들의 계보관계를 포착하는 기초가 된다. 연구된 사실이 연속적 공간에 분포해 있다면, 이 규준들을 응용하는 것만으로 계보관계는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나 분포지역이 잘려져 있거나 멀리 떨어진 경우에는 다른 보조규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문화는 단번에 넓은 지역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요소의 발생지와 현재 분포지역 사이에 전파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이 통과경로를 나타내는‘계속의 규준’은 특히 앞서의 두 규준의 증거능력을 한층 더 강화한다. 계속의 규준을 적용함으로써 공간적?시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문화들의 계보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