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2년 5월 23일. 내 생일이다. 올해로 난 41살이 되었다. 20대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대 초반이라니... 세월이 정말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뜻 깊고 행복한 날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날 위해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고, 내 회사에 몰래 찾아와 나의 직원들과 함께 깜짝 파티를 열어주었다. 내 아내는 내가 영화사업을 시작한 후부터 직원들을 많이 챙겨준다. 아랫사람과 잘 지내는 것 또한 윗사람의 도리이며 의무란다. 직원들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도시락을 싸와 몸보신도 시켜주고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때때로 그 도시락 맛을 잊지 못해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사원이 있을 정도이다. 그 덕분일까... 단순히 부하직원과 사장의 관계를 넘어 우리는 가족처럼 잘 지낸다. 또한 내 아내는 우리 부모님을 너무나 잘 모신다. 시부모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1주일에 최소 한번은 부모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도 가고 외식을 하러 간다. 오늘도 날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고 한다. 부모님께 살갑게 구는 아내를 볼 때마다 ‘아~ 결혼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 덕분에 너무나 행복함을 느낀다.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내 아내뿐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 나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준다. 나는 장난꾸러기 아들 둘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공주님의 아빠다. 혁, 준, 별. 내 아이들의 이름이다. 우리 혁이는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다. 1학년 때부터 줄곧 반장을 놓치지 않더니, 이번엔 학생회장이 되었다. 정말 날 닮아 포부가 큰 아이인 것 같다. 큰 아들이어서 그런지 듬직한 면이 많다. 동생들 아끼고 챙길 줄 아는 우리 혁이가 아빠의 입장에서 너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은 아이다. 발렌타인데이 때는 초콜렛을 두 손 가득 받아왔다. 여자 아이들도 잘생긴 건 아나보다. 하하하^^ 운동하는 것을 좋아해 주말마다 혁이와 준이를 데리고 농구도 하고 수영도 하러 간다. 며칠 전부터는 혁이가 아이스하키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가르치고 있다. 처음엔 좀 위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줄곧 열심히 하는 혁이를 보면 그런 걱정도 사라진다. 이제 제법 어깨도 넓어진 것 같고 남자가 되어가는 내 아들을 볼 때 마다 너무 뿌듯하다. 준이와 별이는 이란성 쌍둥이다. 이제 막 10살이 되었다. 10대에 접어들었다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귀엽다. 준이는 나를 많이 닮았고, 별이는 내 아내를 많이 닮았다. 이 아이들이 티격태격 하면서도 잘 지내는 걸 보면 어쩔 땐 나의 연애시절이 생각날 때도 있다. 그만큼 우리를 너무 닮았다. 우리 다섯 식구가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아주 판박이라고 할 정도이다. 준이는 골목대장이다. 항상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대장 역할을 한다. 매번 친구들과는 우리 집 정원에서 모임을 갖는다. 아내가 해주는 간식을 아이들과 함께 나눠 먹고는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갔다 하면 함흥차사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라 그런지 다치고 들어 올 때도 간혹 있다. 그렇지만 다치면서 큰다고들 하지 않는가. 남자아이라 별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 준이는 나중에 커서 운동선수가 된다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근데 내 아내는 날 닮아 잘생겼다며 모델이나 연기자를 시키고 싶다고 한다. 우리 별이는 애교가 너무 많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 과일 드세요. 아~해봐.” 할 때 마다 꼬옥 껴안고 뽀뽀를 해준다. 비 오는 날에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우비를 입고 노란색 장화를 신고 내 우산을 들고 나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역시 이래서 딸이 좋은가 보다. 별이 웃음소리가 너무나 예뻐서 우리 공주님이 웃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할 때마다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라고 느낀다.나는 성공한 사업가다. 어릴 적부터 생각해 왔던 내 꿈은 나만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허황되고 막연한 꿈만을 좇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 프로젝트고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래서 영화사업에 뛰어든 것일 수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곧바로 사업을 한 것은 아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나서 나는 증권회사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을 선도하는 곳에서 일을 배워야 경제적 관념에 대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곳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등등 많은 것들을 배웠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을 살면서 갖춰야 할 인성과 태도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경험 중에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이제 사업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의 경영 노하우를 많이 깨우쳐 나만의 영화 제작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를 위해 투자도 하고 있다. 한때는 ‘자수성가한 XX 영화사 대표’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실린 적도 있다. 그 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내는 그 잡지를 열 권 넘게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까지 했다. ‘우리 남편 정말 멋지죠?’ 라고 자랑하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나는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스텝들을 구성하며 시나리오도 직접 쓰고 있다. 예전에 처음으로 만들었던 영화의 시나리오는 나의 아내가 쓴 것이다. 연애시절 장난삼아 하던 말이었는데 진짜 이루어 준 걸 보면 우리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싶다.
My name is Kim mi so. I am Sangmyung university student as senior. I have been admitted through examination into the third year class last year. At that time, I didn`t feel a passionate love for the school so much, because I have been admitted Sangmyung university before long. Just I thought "I am a Sangmyungian." , this fact makes my heart flutters. Now that finish one year, on second thought, I led a meaningless life nothing to do. I think that the time was so regrettable, and spend a time in vain, so I am distressing. From now on, I will have a precarious school life with Sangmyungian`s dignity. I was born in Buchoen. As I was a child, Buchoen was very peaceful and restful village. But now, that place became a busy street. So it is very complicated and noisy. Nevertheless, Buchoen is always relieve my mind. There is a family of four. My dad, mom, older sister, and me. My dad works for trading company as owner. He is smart and generous. He taught me an attitude and a humanity which have to make a living. My mom is housewife. She always take care of our family. She always wake up early every morning. Because, she prepare breakfast for us. She taught me a way of loving another person. And my sister is employed in a bank.
My favorite food is all kind of noodles, such as spaghetti, calguksu, naengmyun, etc. Especially, I like calguksu. I am not sure whether any of foreign countries enjoy this food or not. Anyway, whenever I eat calguksu, I feel so happy. Even if, I eat it everyday, I'll never become disgusted with it. I love this food very much. Also, I can make a cook calguksu.
What can I do better than others?There is nothingI am good at special something, but I am a good cook a little bit.As I was a child, the kitchen is very exciting place. I grew up as I saw my mother who cooked a delicious food used a kitchen utensils arranged neatly, so I met with cooking in a very natural way.I can tread on the gas that there is several food which show to others. but, not much... I can cook sandwich, pasta, and ddukboki tastily, and even Kimchijjigae which is one of the foods that my father's favorite food .I really like to I pride myself on my cooking.So, I used to prepare the delicious food for my precious family.
★ Elegy poem 에 대해서...★Elegy : 슬픈 감정으로 엮은 서정적 노래. 그리스어의 엘레게이아(elegei? 애도가)에서 유래된 말로 비가, 애가, 만가(輓歌)라고도 한다.그리스어로는 장송가를 가리키며 여섯 운의 행에 다섯 운의 행이 계속되는 2행 단위의 시를 가리켰으나 뒷날에는 형식보다도 정신을 존중하게 되었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과 죽은 사람의 추억 등을 노래하는 애석한 내용을 주로 한 시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레이의 [전원 무덤의 애시], 실러의 [방황], 셀리의 「아도니스」 등은 유명하다. 일반적으로는 애수와 비수(悲愁) 등을 노래하는 시의 형식을 가리키고 있는 바와 같이 비속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서구에 있어 비가는 본디 애도(哀悼), 만가(輓歌), 비탄(悲歎) 등과 중복되는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인습적으로는 '죽음과 애처로운 묵상(默想)'이라는 한정된 개념상의 범위가 주어졌던 장르 용어였다. 그러다가 콜리지(colerdge, 영국 비평가)가 비가를 '생각이 깊은 영혼의 소유자에게 적절한 시의 형식이다.'라고 진술한 이후, 그것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시라는 의미 외에 보편적으로 애상적 경향을 띤 시를 분류, 정의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18세기경부터 슬픔을 나타내는 악곡의 표제로 많이 쓰이기 시작하였다.고대 소아시아의 애도가 양식이 그리스로 전해진 것이며 엘레게이온(elegeion)이라는 2행 연구의 시형으로 쓰이고 간결하기 때문에 묘비명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형은, 로마의 시인 사이에 계승되어 카툴루스, 오비디우스 등의 작품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 독일의 시인들에게 답습되었다. 그러나 근대에는 보통 내용에 중점을 두고 육친이나 친구 ·연인 등의 죽음이나 불행, 또는 실연당한 슬픔에 잠긴 심정을 읊은 시를 널리 엘레지라 부르게 되었다.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괴테의 《로마 엘레지 Romische Elegien》, 밀턴의 《리시더스 Lycidas》, 토마스 그레이의 《묘반의 애가》, 셸리의 《아도es the turf in many a mould'ring heap,Each in his narrow cell for ever laid,The rude Forefathers of the hamlet sleep.< 8연 : line 29-32 >Let not Ambition mock their useful toil,Their homely joys, and destiny obscure;Nor Grandeur hear with a disdainful smileThe short and simple annals o the poor.< 9연 : line 33-36 >The boast of heraldry, the pomp of pow'rAnd all that beauty, all that wealth e'er gave,Awaits alike th'inevitable hour;The paths of glory lead but to the grave.< 11연 : 41-44 >Can storied urn or animated bustBack to its mansion call the fleeting Breath?Can Honour's voice provoke the silent dust,Or Flatt'ry soothe the dull cold ear of death?< 13연 : line 49-52 >But knowledge to eheir eyes her ample pageRich with the spoils of time did ne'er unroll;Chill Penury repress'd noble rage,And froze the genial current of the soul.< 17연 : line 65-68 >Their lot forbade nor circumscrubed aloneTheir growing virtues, but their crimes confined;Forbade to wade through slaughter to a throne.And sh 죽음을 제시하면서 죽음앞에 만민 이 동등하다는 것을 형상화시킨다.? 인간의 유한성과 적절한 삶의 문제에 대한 Gray의 관심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천박한 사회적 조건이 일시적인 덧없는 경계일 뿐이라는 것과 재능, 지식에 대한 사랑과 죽음은 인간 사회에 공통된 것이 라는 걸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능을 개발하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 받는다는 사실에 슬퍼하지만 궁극적으로 죽음이 이 모든 차이를 없앤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첫 연의 만종소리에 해가 저물어가는 들판으로, 황혼이 가물거리는 저녁 풍경이 점차 어둠에 휩싸여 가는 과정을 저속 촬영하는 듯한 그의 묘사는 시 전체의 어조를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삶의 세 계에 파고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형상화하고 독자는 저녁 만종소리와 함께 발을 들여놓은 죽음의 세 계에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몰입을 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렇듯 죽음은 삶의 세계에서 몇 발자국 너머에 자리하는 존재인 것이다.? Gray의 시선은 촌부의 힘겨운 삶과 고통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그들의 마지막 보금자리로서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삶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다. 도덕은 한 사회가 과거를 읽어낸 결과들의 집합체 이며 전통적의 결정체로 본다면, 이런 면에서 Gray가 부귀와 권력의 상징들로부터가 아닌 시골 교회의 공동묘지에서 도덕의 텍스트를 구하려 함은 죽음 앞에 평등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의도가 숨어있지 않을까?시골 묘지에서 쓴 비가만종은 사라져가는 날의 조종을 울리고소떼는 나직하게 울면서, 느리게 풀밭을 지나간다.밭가는 사람은 지친 걸음으로 터벅터벅 집으로 가고이 세상엔 어둠과 나만이 남는다.이제는 눈앞에서 가물거리는 정경도 사라지고엄숙한 고요가 온 세상을 감싼다.다만 풍뎅이가 붕붕거리며 날아가고졸려운 종소리가 먼 양의 우리를 달래어 줄 뿐이다.또한 저기 넝쿨로 덮인 탑에서투정하는 올빼미가, 그의 비밀의 초당 근처를배회하면서 그의 오랜 고독의 영역을침범하는 사람들을, 달에게 불평할 뿐이다.저 무성한 느릅나무 밑 귀한 감격을 억눌렀고영혼의 창조력을 얼어붙게 했다.고요한 맑은 빛의 수많은 옥석이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동굴 속에 잠겨 있고많은 꽃들이 보는 이 없이 붉게 피어황야에 그 향기를 헛되이 뿌린다.굽힘없는 용기로 그의 농장의 작은 폭군에대항했던 마을의 한 함프덴이,어떤 말 없고 빛나지 못한 밀턴이,또 나라의 피에 대한 죄없는 크롬웰도, 여기에 잠잘지도 모른다.경청하는 상원의원들의 갈채를 독점하며,고통과 파괴의 협박을 무시하고,미소짓는 나라 사람에게 많은 돈을 희사하며국민의 눈으로 그 역사를 읽는 일은그들의 운명이 금했다. 그들의 커져 가는미덕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죄악도 제한했다.유혈의 강을 건너 왕위에 이르는 것도,또 인류에게 자비의 문을 닫는 것도 금했다.양심의 괴로운 가책을 감추고정직한 창피의 무안을 억누르거나사치와 교만의 신전에시신의 불꽃으로 향을 올리는 일도 금했다.광란한 군중의 더러운 싸움에서 멀리 떠나,그들의 근실한 소원은 빗나갈 줄을 몰랐고차고 외떨어진 인생의 골짜기에 따라그들 자신의 조용한 길을 걸어갔다.그러나 이러한 뼈라도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빈약한 묘석이 가까이에 세워지고서투른 시구와 모양 없는 조각으로 꾸며져서지나가는 사람의 한숨의 공양을 바라고 있다.학식없는 시전이 쓴 그들의 이름과 나이가명성과 비가를 대신한다.그리고 그가 사방에 써 놓은 성구는시골의 도덕가에게 죽는 법을 가르친다.어느 누가 말없는 망각의 제물로서이 즐겁고 걱정스런 삶을 체념하고,유쾌한 날의 따뜻한 뜰 안을 떠난 일이 있으며,그립고 아쉬운 눈으로 한번 되돌아보지 않았던가?떠나가는 영혼은 어떤 사랑하는 가슴에 의지하고닫혀가는 눈은, 어떤 효도의 눈물을 구한다.무덤에서조차도 자연의 목소리가 부르짖는다.잿속에서 조차도 그들의 불은 여느 때와 같이 탄다.이름없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이 시행으로 그들의 소박한 얘기를 전하는 그대를 위하여,만약 혹시 외로운 생각에 이끌려성격이 비슷한 어떤 사람이, 그대의 운명을 물어본다면어떤 백발의 시골사람이 답할지도 모른다.「새벽 동이 de) 및 「어느 시골 묘지에서 쓴 애가(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의 몇 연은 이 우울한 사건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742년 이후 그레이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학업을 계속하며 자신의 취미에 몰두하였다. 그는 역사뿐만 아니라 고전과 현대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호기심 때문에 당시에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던 분야인 엘리자베스 조 이전시대의 시와 옛 웨일즈 및 노르웨이 문학을 탐구하였다. 그는 회화와 음악을 감정하는 데 전문가였고 자연현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과학적인 관찰자였으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열렬한 예찬자였다. 그는 새로 개관된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는 경우와 자연에서 장엄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탐구하기 위하여 여름철에 호수지방과 스코틀란드를 방문하는 경우 외에는 케임브리지를 거의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거의 집필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매우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공부하면서 괴팍스러울 만큼 형식과 어법의 완벽함을 추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시는 자기자신의 다소 우울한 기질을 조심스러울 만큼 비개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송시」와 「애가」에 나오는 사색에 잠긴 고독한 화자는 바로 그레이의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딜레마의 극적인 투영이었다. 그 자신의 감정에 의해 채색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초기시들은 고백이 아니라 즉음, 삶의 비애 그리고 인간운명의 신비를 탐구한 공적인 성찰이다. 반면에 그의 초기시들-호언장담식으로 쓴 두편의 핀다 풍의 송시인 「시의 순행(The Progress of Poesy」과 「시인(The Bard)」그리고 웨일즈 시와 노르웨이 시의 번역시들-은 능숙한 문학적 수련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편 살아 있는 그레이의 모습은 그의 편지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편지 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들었던 그 시대의 가장 매혹적인 몇 몇 편지 속에는 그의 정다운 유머, 수줍은 애정, 그리고 폭넓은 지적 관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