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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 정치] 광혜군과대북정권
    한국정치사 발표문{한국정치사광해군과 대북(大北)정권머리말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은 昏君, 그의 재위년간은 昏朝라고 매도당해왔다.{) 昏君은 어둡고 용렬한 국왕이라는 의미이고, 昏朝는 어둡고 문란한 시대라는 의미이다.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일파가 조선후기 내내 집권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과 북인은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제시대이후로 일인학자와, 홍희, 이병도에 의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광해군을 명·후금 교체기에 중립외교를 펼쳐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한 외교전문가였으며 당파 싸움의 희생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광해군대의 정국상황과 함께 大北이 정권을 잡아가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1. 광해군의 즉위과정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식 왕비의 소생이 아니었으며, 위로는 長子인 임해군이 있었다. 그는 왕이 될 수 없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세자에 책봉되는 행운을 얻었다. 세자가 된 그는 分朝{) 分朝란 조정을 나눈다는 의미로서 광해군에게 인사권이나 상벌권 등 국왕의 권한을 일부 떼어줌으로써 근 왕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수집토록 하는 등 전란을 위한 활동을 위임한 것이다.를 이끌고 평안도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모집과 전투독려, 군량 운반 등 전란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여서 대성공을 거두었다.백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순탄한 즉위를 기다리던 광해군은 의외의 복병들을 여러개 만나는데, 그것은 첫째로 明나라였다. 명은 그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세자책봉을 거부했다{)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동안 5차례 책봉주청사를 보냈지만 명은 모두 거부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서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해군의 즉위과정을 조사하러 사신까지 파견하였다{) 1608년 선조의 訃告와 광해군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명에 갔던 사신 이호민에게 명 禮部는 광해군 즉위의 부당성을 따졌고, 이호민 등은 엉겹결에 임해大北파인 정인홍은 선조에게 광해군에게 빨리 전위하라고 하고, 전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전하는 유영경 때문에 고립되어 개미새끼 하나 의지할 곳이 없고 장차 어진 아들을 보호하지 못하고야 말 것 이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이 상소는 조정에 일대의 회오리를 불러 일으켰는데 즉 광해군이 세자로 결정된 지 17년 동안 堂上官 이상의 고위관료로서 공공연하게 선조의 전위문제를 거론한 것은 정인홍이 처음이었다. 당시 그 논의의 편벽함과 과격성으로 전체적인 공감을 얻지 못했던 정인홍은 이 상소를 계기 로 다수 부류로부터 절대적인 추앙을 받게 되었으며, 광해군의 막중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선조는 정인홍과 그를 사주하였다는 이이첨, 이경전 등을 유배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고 유영경을 비호했다.하지만 광해군의 정치적 위기는 선조가 급서(急逝)함으로써 해소되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선조가 죽은 당일에 언문교지를 내려서 즉위시켰다. 이로써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였고, 위기에 몰렸던 광해군을 적극 변호했던 정인홍 등의 대북파는 은인이자, 협력자가 되었다.2. 光海君初의 정국운영세자의 지위로 오래 있었지만 명의 공인을 받지 못한 데다가 적자(영창대군)와 장자(임해군)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자기세력의 구축이 절실했다. 때문에 즉위 초에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는 모두 왕권확립과 강화를 위해 필요한 정치적 행위들이었다.즉위 후 광해군은 濁小北 또는 柳黨으로 불리던 유영경 세력을 제거하였다. 선조말년의 상황은 영의정 유영경일파가 집권연장을 위해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정부의 요직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세력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정계에 각 당파를 고르게 배분해서 등용시킬 수 있었다. 즉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대북, 소북, 서인, 남인의 정치세력은 왕권 및 정통성 확립이라는 군주측의 과제{) 광해군은 부정적인 붕당관을 가지고 있었다. 단일붕당 위주의 정치체제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고로 붕당의 화는 亡人지 않 고 주로 향리인 합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정계 전반을 원격조정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山林으로서 향리에 은거하면서 정계에 이이첨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이첨은 한때 외척이면서 소북세력인 유희분(광해군 처남)과의 세력다툼에서 밀려 좌천되기도 했으나 정인홍의 강력한 이이첨 옹호와 重用論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외척인 유희분은 광해군의 분조시절부터 자신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광해군을 도왔으며, 광해군이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광해군 초반 정국에 자신의 친척들과 자신의 인맥들을 정계에 등용시켰다. 그리고 淸小北·濁小北論으로 탁소북인 유영경 당이 아닌 청소북을 등장시켜서 소북파를 다시 결집시켰다.이에 정국은 유희분의 소북과, 이이첨의 대북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하였다. 여기에 손녀를 세자빈에 앉힌 박승종이 가세하여 소위 3창{) 문창부원군 유희분, 밀창부원군 박승종, 광창부원군 이이첨 이렇게 3창인데, 이들 사이는 복잡하다. 이이 첨과 박승종은 사돈지간이다. 즉 박승종의 아들과 이이첨의 딸이 혼인하였는데, 여기서 난 딸이 세자빈으 로 간택되었다. 그러므로 이이첨도 외손녀가 세자빈이 되었으므로 외척이 되었다. 그런데 박승종은 소북 이다. 광해군 초 유영경일파로 지목되어서 좌천되었는데, 유희분이 새로이 소북파를 결성했을 때 끌어들 였다. 그렇게 때문에 이이첨과 사돈간이면서도 박승종은 유희분과 결탁하여 이이첨과 대립하였다.이 정계를 주름잡았다.정국의 중추적 역학을 담당하지는 못했으나 서인은 남인과 함께 備邊司의 정책결정기능을 수행했으며 국방력의 근간을 이루는 지방 병권을 통제하고 있었다. 당시 병력은 중앙의 훈련도감과 지방의 속오군이 주된 병력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만에도 군권의 확보가 정권장악의 변수가 아니었다.{) 광해군시대에는 군권장악을 통한 왕권확립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때는 임진왜란 이후이고, 북방의 후 금이 급성장하고 있는 상태여서 당연히 병권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초기 정국에서는 군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문대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대·소북의 執法論理는 왕을 자연인과 다른 객체로 인식하고 국왕의 권능에 해가 된다면 누구든지 처벌에 차별을 둘 수 없다는 법가적 논리임에 반해 서·남인의 전은론은 부모형제의 천륜이 우선적임을 내세워 왕을 자연인과 동일선상에 놓고 왕법의 적용에 탄력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대에 서인과 남인사이에 벌어졌던 예송논쟁과 일맥상통하는데, 서인이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 지 않고 宗統과 嫡統을 구분한 반면 남인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承重에 의한 적통을 주장했던 것 이다.정책상의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각 당의 정통성이나 권력유지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광해군 3년에 소위 晦退辨斥 사건이 일어나 그 내용이나 결과가 당시 정계와 사림에 큰 충격을 주었다. 회퇴변척의 발단은 1610년(광해군 2) 이른바 五賢이라 불리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晦齋 이언적, 退溪 이황 등을 문묘에 배향시킨데서 비롯되었다. 정인홍은 그의 스승인 南冥 조식이 문묘종사에서 제외된 데 대해서 불만이었고, 또 대북인 조식문하의 성리학적 정통성이 인정받지 못한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황과 이언적을 척신 정치기인 명종연간에 벼슬을 탐하여 조정에 나아갔던 변변치 못한 인물들이라고 매도하고 조식을 찬양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 상소내용이 알려진 직후 朝野를 막론하고 전국이 들끓었다. 조정에서는 남인과 서인까지도 정인홍을 공박하는데 가세했고,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해버렸다. 지방유생들도 상소하여 兩賢을 변호하고 정인홍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대북측 사림에서도 정인홍에 대한 지지 상소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강력한 정인홍 옹호로 사태가 진정되었지만 지방유림들이 대북파에게서 등을 돌리는 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조식 성리학을 부각시키고 북인 학통의 정통성을 확보하려한 정인홍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후로도 대북은 꾸준히 조식에 대한 재평가 운동을 벌려 광해군 6년에 영의정이 추증되은 대북만의 공신녹훈을 막아내려 했지만 실패하고 대북은 定運공신이 되었다. 이 사건이후 대북의 정치적 지위와 입장은 매우 강화되었고 소북은 실세하게 되었다.{) 대북이 내세운 것은 김직재옥사에 연루된 유영경의 추형논의였다. 즉 광해군 초에 유영경일파를 철저하 게 타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역모가 일어났다고 하면서 유영경을 추형하자고 했다. 유영경은 소북으 로써 당시 유희분의 재결집 소북에게 있어서는 큰 약점이 되었다. 즉 당시 유희분은 소북을 재결집할 때, 유영경이 정권을 좌지우지할 때 참여했던 소북세력을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영경을 추형하 게 된다면 소북내의 과거 유영경 세력까지 입지가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유희분과 소북은 강력히 대북만의 공신녹훈을 반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북만의 정운공신이 녹훈되었고, 유영경은 부관참시 당하 면서 소북은 실세하고 말았다.그러나 본격적인 연립체제의 붕괴는 광해군 5년에 일어난 七庶之獄 사건에서 발전한 계축옥사였다. 이 역모는 광해군 5년 3월 조령의 銀商 살해범인들인 七庶子의 국문을 통하여서 그들이 정협 등의 무인을 동원해서 광해군을 제거하고 國璽를 인목대비에게 넘긴 뒤 수렴청정하다가 영창대군을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고, 역모를 총괄 지휘한 우두머리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며 서인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서인들이 체포, 구금되고, 삭탈, 유배되었으며 김제남은 賜死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며 대비에게까지 문제가 비화되었다. 이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 조정이 텅 비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이는 왕통에 대한 도전이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띠고 나타난 것으로 광해군은 서인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대북은 이 기회를 노려 삼당의 연립적 질서를 해체하려 하였다.이 사건이 이후의 정국을 討逆정국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몰아가게 된 이유는 역모 조사 때 우연히 인목대비의 유릉저주사건{) 선조말년 선조의 병이 심했을 때, 그 원인이 죽은 의인왕다.
    인문/어학| 2004.06.16| 7페이지| 1,000원| 조회(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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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과 통일문제
    북한과 통일문제1. 북한 경제난의 원인은 무엇인가?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심각한 식량난, 경제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물론, 93년 대냉해 피해와 94년 우박피해, 그리고 95년 이후의 연이은 대홍수는 농업을 피폐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북한의 자연조건 역시 농업으로써는 불리한 조건이다. 또 혹자는 사회주의 자체가 갖는 모순, 즉 '집단농장체제에 의한 생산성에서의 비효율성에 의한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지금의 북한의 위기에 한 일부분일뿐 그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그렇다면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크게 두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 북한 사회주의 자체의 모순에서 현재 위기의 원인을 보는 관점과둘째, 남한과 미국에 의한 위기의 발생이라는 관점이 있다.1. 북한 사회주의 자체의 모순북한의 현재 경제 위기가 단순히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일시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바로 '북한이 갖고 있는 사회주의 그 자체의 모순에서 발생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위기는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며,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겪고 있는 위기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면 북한 사회주의 자체의 모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한 예로 이러한 것을 들 수도 있다. 북한 사회는 분명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그 이념에 따라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 북한에서는 관료라는 지배계급과 인민이라는 피지배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북한에서는 자립 자족경제를 이야기 한다. 자국안에서 모든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 자족경제를 위해서는 지배계급은 더욱 더 노동자로부터 착취를 강행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자국안에서 경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경제기반이 점점 얇아져 가는 것이며, 구조적 모순 하나하나가 자꾸 쌓여만 간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이 어느 한계점에 달했을 때, 모순점들이 엄청난 위기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를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95, 96년의 대홍수로 인해 북한이 그토록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좀더 쉽게 생각해 본다면 남한 사회에서 연이은 자연재해가 났다하여 전 국민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식량이 부족하면 해외에서 사오면 그만인 것이다.하지만 북한의 경우 자립, 자족경제라는 이념아래 대외경제면에서 홀로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화난 등으로 무역자체가 이루어질수 없는 상황에까지 처하게 된 것이다. 특히 주위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북한의 이러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게 개방을 하자니 자신들의 이념, 이데올로기가 무너져 버릴테고, 그러자니 어중간한 상태속에서 더욱 폐쇄정책을 강행 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현 상황을 만들었다.2. 미국, 남한에 의한 위기의 초래.북한을 바라볼때는 북한 만이 갖는 구조적 특성이 있다. 바로 북한은 남한과 대치 상태, 그리고 크게는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쟁적 구조에 놓여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적 구조는 북한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남한에서 한 미 합동 군사 훈련 이 한 번 시작 되면 이에따라 북한 역시 모두 전시체제에 들어간다라는 것이다.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 문제점은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문제에서 자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이다.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한반도의 세력을 움켜 쥘 수 있는 형태, 주한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는 형태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내 통일을 달가와할 리는 없다.또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생존해나가야 하는 우리나라 정부 역시 북한 관련 정책에 있어 북한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북한에 대한 봉쇄정책, 조건부 식량원조의 방침, 등은 미국과, 남한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2. 남한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비교하라.1988년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을 계승하는 정책으로, 국회에서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 통일방안은 남북간에 누적된 불신과 대결의식, 그리고 이질화(異質化) 현상을 그대로 둔 채 일시에 통일을이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를 제시하고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는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 통일국가의 수립절차는 남북대화의 추진으로 신뢰회복을 기해나가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을 통해민족공동체헌장을 채택한다. 그리고 남북의 공존공영과 민족사회의 동질화, 민족공동생활권의 형성 등을 추구하는 과도적 통일체제인 남북연합을 건설한다. 이어서 통일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인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남북연합단계에서는 민족공동체 헌장에서 합의하는데 따라 남북정상회의 ·각료회의 ·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을 두기로 규정되어 있다.
    학교| 2003.12.10| 2페이지| 1,500원| 조회(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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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루몽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줄거리2. 옥루몽 대표 인물의 설정 양상①긍정적 계열의 인물②부정적 계열의 인물3.다양한 소설적 형태로 나타난 옥루몽① 영웅소설로써의 옥루몽②여걸소설 혹은 여장군소설로써의 옥루몽.③ 가정사소설로써의 옥루몽Ⅲ.결론Ⅰ. 서론옥루몽은 64회의 회장체(回章體)로 된 소설로서, 분량의 3배가되는 대장편소설이다.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인기를 모은 소설 가운데의 하나로써, 구성이 치밀하고 규모가 방대하며 표현 문장이 빼어날 뿐 아니라 여성들의 성격이 아주 개성 있게 부조되어 있어서, 고전소설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영웅적 주인공 양창곡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군담이 곁들여 지고 있는 이른바 영웅소설. 군담소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강남홍에 초점을 맞추어본다면, 여걸소설 혹은 여장군소설에도 속한다.Ⅱ. 본론1. 줄거리천상계에서 옥황상제가 백옥루를 중수하고 선관들을 초대하여 낙성연을 베풀 때, 문창성이 취중에 읊은 시 가운데 지상계를 그리워하는 면모가 보이자, 옥황상제는 미소한다. 문창성이 선녀들인 제방옥녀. 천요성. 홍란성, 제천선녀. 도화성과 마하지에 핀 연꽃을 꺾어가지고 술을 마시며 희롱하자, 옥황상제 밑에 있는 신불은 자신의 법력으로 이들을 인간계로 내려보내, 각각 문창성은 양창곡, 제방옥녀는 윤소저, 천요성은 황소저, 홍란성은 강남홍, 제천선녀는 벽성선, 도화성은 일지련으로 태어나게 한다. 한편 지상계에서는 중국 남쪽의 옥련봉 밑에서 사는 양현이라는 처사가 마흔이 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고 기남자를 얻는다양창곡이 과거에 응시하러 상경하던 길에 적극적이고 활달한 남성적 기녀 강남홍을 만나 인연을 맺으니, 강남홍은 양창곡에게 항주사사의 딸 윤소저를 그의 배필로 천거한다. 강남홍이 창곡을 황성으로 보낸 뒤 항주의 부중으로 들어가서 윤소저의 시녀가 되기를 자원하니, 둘의 우정은 깊어만 간다. 이 무렵, 소주자사 황공이 강남홍의 미모를 탐하여 연회를 베풀고 강남홍을 겁탈하려 하자, 강남홍은 강물에 투신 자살한다. 그러나 윤소저가 이 일을 미리 짐작하고 잠수를 잘하는 손삼랑이라는 여인을 잠복시켜 비밀리에 강남홍을 구출, 강남홍은 어선을 타고 표류하다가 남쪽 탈탈국에 도착하여 절에 가서 몸을 의탁한다.한편, 창곡은 황성에게 편지를 받아보고 강남홍이 자살한 줄 알고 못내 슬퍼한다. 창곡이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니, 황각로와 노상서가 각각 자기의 딸과 혼인시키기 위하여 구혼한다. 창곡은 이를 거절하고 윤상서의 딸 윤소저와 결혼하자, 창곡은 황각로의 딸과 결혼하라는 천자의 명령을 어긴 죄로 하옥된다. 그 뒤 창곡은 다시 노상서의 참소를 입어 다시 강주로 유배된다. 양한림 창곡은 이곳에서 본부 기생으로 음률에 능하며 우아한 여인 벽성선을 만나 가연을 맺고, 다섯달만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을 제수받고는 천자의 명령에 따라 황각로의 딸과 다시 결혼한다. 이때 남만이 중국을 침공하여 창곡은 대원수로 출정하고, 강남홍은 적국의 지휘관으로 출전함으로써 서로 대치한다. 그러나 강남홍은 상대편 장수가 명나라의 양창곡임을 알고 명진으로 도망하여 창곡과 상봉하고, 명군의 부원수가 된다.한편, 적국인 축융국의 공주 일지련은 홍원수와 접전하다가 생포되어 명진으로 와서 양원수를 본 뒤 연모의 정이 생겨, 만진으로 돌아가 부왕을 움직여 명나라에 항복하게 한다. 일지련은 근면, 검소하고 총명한 여인으로 강남홍과 벽성선의 장점을 나누어 가진, 이들의 중간적 인물이다. 이때 양부에서는 황부인이 선랑을 투기한 나머지 벽성선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나 곧 실패한다. 선랑은 시골의 한 암자로 가서 숨어살지만, 다시 모해를 입고 온갖 고초를 겪는다. 양창곡이 개선하고 입성을 하니 천자는 양원수를 연왕에 봉하고, 홍원수를 만성후에 봉한다. 또한, 천자가 황부인의 조상을 밝혀 척결하고 유배시키자 황부인은 곧 개과천선한다. 이렇게 해서, 연왕 양창곡은 두 부인인 윤부인, 황부인과, 세 첩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과 함께 온갖 영화를 누리다가 마침내 천상계로 돌아가 다시 선관이 된다.2. 옥루몽 대표 인물의 설정 양상옥루몽은 100여명이 넘는 많은 등장 인물이 묘사되고 있는데, 특기 할 것은 보조인문들조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사건전개에 따른 우연성을 최대한 배제할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대한 신뢰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점이다.옥루몽의 인물은 긍정적 인물과 부정적 인물로 대별되는데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상을 여기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①긍정적 계열의 인물천상 문창성의 꿈 속 존재이면서, 현세 존재인 양창곡은 선인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출생이 지닌 천상존재와의 관계성은 그가 지상세계의 영웅적 일생에서 부딪치는 행운과 시련이 천상에서의 죄에 대한 벌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벌이라는 것은 지상세계의 무질서와 불의를 해결하는 행위를 통해 씻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보상이 곧 천상에서 지은 죄를 사함받고 천상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환원적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지상에서 천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충신, 간신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서 양창곡은 전형적충신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한다. 그 수행의 과정에서 구현되는 긍정적 가치는 유교적 덕목의 대표적 항목인 충과 효로 집약된다. 즉 가족내적 관계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의 실현이 중심이 되고, 국가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천자에 대한 충의 실현이 중심이 된다. 그런데 옥루몽은 충효의 실현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시련이 군담계 영웅소설에 비해 월등히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초기 몽자소설인 구운몽에서 물려 받은 특성으로써 애정적 요소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켜 군담적 흥미와 애정적 흥미의 균형을 이루려는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또한 양창곡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확고한 선인형의 성격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 전개에 있어 지루하거나, 구성상의 해이함이 없는 박진감과 흥미유발을 끊임없이 유도하고 있다.작가가 양창곡에게 탁월한 영웅적 능력을 부여했으면서도, 그가 현실사회에서 시련을 당하는 것은 양창곡의 지상적 삶을 천상에서의 죄에 대한 벌로 간주하고 서사적 전개를 펼쳐 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초월적 기능은 천상에서 양창곡에게 무여한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현실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해결 방안으로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목표에 입각한 긍정적 가치를 구현하는 인물상의 활약으로 집약된다. 즉 양창곡을 위시한 다섯부인을 비롯한 양창곡의 다섯자식과의 관계망을 통해 대화홧의 장을 펼쳐 보임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미세한 갈등을 야기하는 개별적인 전개도 결국은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장치로서 구실 할 뿐이다. 곧 핵심적인 등장인물들을 통해 긍정적 가치를 구현하는 과정 및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②부정적 계열의 인물옥루몽에서 긍정적 가치를 거부하는 부정적 계열의 인물로는 노균, 황소저, 황여옥, 춘월을 들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노균은 양창곡과, 황소저와 춘월은 벽성선과, 황여옥은 강남홍과 각각 대립을 통한 갈등 양상을 표출하게 된다. 그러나 노균과 춘월은 전형적인 악인형의 대표격으로, 황소저와 황여옥은 일시적 악인형으로 묘사된다. 악인형의 전형적인 노균은 우선 기능적 인물이라는 점이 특별히 부각되고 있다.이런 설정은 소설사로 볼 때, 19세기 소설로서의 성숙미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인물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형상시켜 보려는 창작 의식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균을 창곡과 극히 대조적인 간신으로 등장시켜 놓고 매도한 것은 창곡의 충의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작품 내용상 노균은 상대적인 핵심인물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필연성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중요사건의 발단을 야기하고 있는 악인형 인물로는 황자사, 황소저, 춘월등을 꼽을 수 있다.강남홍과의 대립 관계에 있던 황자사인 황여옥은 자신의 권세만을 믿고 감남홍을 전당호에서 겁탈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이 때 강남홍을 물 속에 뛰어들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운도사에게 무예와 접법, 도술 등의 비법을 전수 받게 된다. 그 후 강남홍이 양창곡과의 재회를 통한 활약상은 기상천외한 것으로 드러난다. 즉 황자사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시련상은 오히려 강남홍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선을 시기 질투하여 엄청난 사건들이 속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흥분과 긴장성을 끊임없이 조장시키면서, 벽성선의 지조와 절개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구실을 하고 있으며, 황소저는 후에 자기 반성을 통한 자신의 성격을 반전시키게 된다. 그러나 황소저의 시비 춘월은 노균과 같은 맥락에 놓이는 전형적인 악인형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최후를 맞이한다. 이러한 얽힘과 풀림은 작품의 가치를 격상시키기에 충분한 요소들인 것이다.
    인문/어학| 2003.12.10| 5페이지| 1,000원| 조회(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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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론
    Aristotle이 B.C. 367년 비극의 고장 아테네로 처음 왔을 때는 비록 Aeschylus(B.C. 525-456), Sophocles(B.C. 495-406), Euripides(B.C. 480-406) 등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들이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 있었으나-기실 이들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망했다-그들의 극작품들은 계속 공연되고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관극하였으며, 또 이 공연들의 관극을 바탕으로 삼아 「시학」(Poetics)을 펴냈다.「시학」에서 Aristotle은 비극의 본질을 기술했다. 그가 비극에 관해서 쓴 것은 이에 각별한 열의나 관심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Plato의 아카데미에 수학하면서 Plato의 철학 체계를 정리하고 수정하는 중에 시 혹은 문학이 스승의 강렬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Aristotle의 「시학」은 인류 최초의 문학 비평서요 비극론이다.오늘날에도 비극의 정의와 본질에 관한 문제를 논할 때 여전히 우리는 Aristotle로부터, 좀더 정확히는 그의 「시학」에 표명된 관점들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물론 그가 비극의 정의나 본질에 관해서 어떤 최종적인 말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고대 그리스극을 모델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비극론이라고 볼 수 있는 Aristotle의 「시학」을 분석하고 천착하여 과연 그의 비극관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조명해보기로 한다.Aristotle의 「시학」은 모두 26장으로 된 45쪽 정도의 짧은 책이다. 그는 이것이 비극 연구라고 책 어디에서도 말한 적이 없고, 또 실제로 서두에서 그는 나는 시 자체와 그것의 여러 종류들을 각각의 특질에 주목하면서 말해보고자 한다. 라고 했을 뿐 비극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극이란 단어도 3장까지는 나열을 위해서 사용했을 뿐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시학」은 이렇게 처음에는 시, 곧 문학 일반을 면밀하게 분류하는 작업을 하지만 4장에서는 비극의 정의를 내리는 등 비극을 논의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음이 점차로 명백해지며, 실제로 비극론이 책 전체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4장은 앞 장들에서 언급한 것을 정리하여 공식적으로 비극의 정의를 내리고 비극의 6개 요소를 소개한다. 이 Aristotle의 비극 정의는 그 이후의 나머지 부분이 이를 부연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때 「시학」의 가장 핵심이고 중요한 대목이다. 비극은 요컨대 진지하고 완결되기에 충분히 긴 액션의 모방이며, 특히 정서적 카타르시스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이어서 비극의 6대 요소가 제시되었다. 비극의 6대 요소는 플롯, 성격, 사상 등의 내적인 요소와 어법, 노래, 장경(場景) 등의 외적인 요소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비극의 첫 번째 원칙이요 호인 플롯이고 그 다음은 성격과 사상이다.Aristotel은 「시학」에서 비극을 이렇게 정의했다.“비극은, 그러므로 진지하고 완결된, 특정한 길이를 지닌 액션의 모방이며, 극의 서로 다른 부분에 들어 있는 여러 다른 종류의 예술적인 장식으로써 아름답게 꾸민 언어로 되어 있고, 서술이 아닌 연기의 형식을 취하며, 동정과 두려움을 통해서 이 정서들의 적절한 카타르시스를 이룩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언어’란 말은 리듬, ‘조화’ 그리고 노래가 들어간 언어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부분에 들어 있는 여러 종류’란 말은 어떤 부분들은 운문의 매개만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들은 노래의 도움으로써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우선 모방, 액션 등과 같은 용어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모방은 mimesis'의 역어다. 앞에서 우리는 이 단어가 Aristotle에 앞서 Plato가 사용했음을 보았다. 아마도 Plato 역시 당시 흔히 사용되고 있던 것을 사용했을 뿐 이 단어를 쓴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단어를 본격적으로 예술론 내지 시론에 도입한 사람이 Aristotle이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겠다. Plato에 이어서 Aristotle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mimesis'는 단순한 의미의 모방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는 말하자면 예술적인 모방, 곧 재생이 아닌 재현이다. 예술적인 모방이란 자연의 창조 과정, 창조적 비전의 행위를 의미하며, 자연을 돋보이게 만드는 재창조다 Aristotle은 「시학」의 25장에서 시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방은 사물을 그대로가 아닌 이상적인 형태로 그리는 것이며, 만약 묘사가 사실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의가 제기될 때 시인은 하지만 사물들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상태로 그려져야 한다 고 대답하면 될 것이라면서 Sophocles가 자신은 사람들을 사실 그대로가 아닌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고 있다.모방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액션의 모방 에서의 액션 이다. 비극을 논할 때 액션이란 영어는 정신적 혹은 지적 삶(mental) 을 표현하는 모든 것, 합리적인 인품을 드러내는 일체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분석되어야 할 것은 액션에 붙은 세 개의 수식어 진지한(serious)', '완결된(complete)', 특정한 길이의(of a certain magnitude)'다. 'that is serious '는 that matter(중요한) 와 같은 뜻이므로 serious'는 'grave'와 'great'가 합쳐져 진지하고 중요하며, 도덕적으로 꽤 훌륭하다(good)는 뜻이다. 진지하고도 훌륭한 액션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비극을 희극과 구별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희극은 우스꽝스럽거나 도덕적으로 하찮은 액션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극은 진지한 성격의 진지한 액션들 을 다룬다.액션은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도중에서 중단되는 미완의 액션은 비극의 것으로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의 액션은 장황한 서사시와는 달리 특정한 길이 , 곧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적절한 길이, 완결되기에 충분한 길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액션은 제대로 전진하고 전개되어 파국에 이를 수 있는 길이여야 한다는 것이다.다시 한 번 Aristotle의 비극론을 정리하자면 네 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비극은 무엇을 모방 혹은 재현하는가이다. 비극은 진지하고 완결된 적절한 길이를 지닌 인간 액션을 모방, 곧 재현하는 것이다. 둘째, 비극은 어떤 언어로 되어 있는가이다. 비극은 운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서사시와 같으나 코러스도 갖고 있어서 결국‘epic+dithyramb’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비극은 어떤 전달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가이다. 비극은 내용을 무대 연기(action 혹은 performence)란 방식을 사용하여 전달한다. 넷째, 비극은 어떤 효과를 내는가이다. 비극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기쁨(pleasure)을 준다고 할 수 있다.Aristotel이 명시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표현한 비극의 정의와 비극의 효과, 곧 그의 비극관은 이상의 논의를 감안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Golden의 요약 속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보겠다.“...비극은 인간 생존의 애처롭고 두려운 국면들과 관련된 액션들의 모방이다. 이 모방의 형식은 고상한 주인공을 그것의 대상으로서 재현한다. 이것은 예술적으로 고양된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것의 제시 방식은 서술적이기보다는 극적이다. 동정(우리가 타인의 억울한 불행에 대해 갖는 감정)과 두려움(그러한 불행에 우리 자신도 쉽게 처할 수 있다는 감정)의 재현은 비극의 주인공이 도덕적이 아닌 어떤 지적인 잘못(비극적 결함) 때문에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필요로 한다. 어떤 주어진 비극의 효율성은 그것이 완결되고, 적절한 길이를 지니고, 필연성과 개연성의 법칙들에 따라 발전되는 플롯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다. 비극의 모방과 관련된 궁극적인 목표와 본질적인 기쁨은 카타르시스다.”
    인문/어학| 2003.10.07| 3페이지| 1,000원| 조회(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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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생전의문학사적의의 평가B괜찮아요
    허생전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99601021 박규일작가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傳)》《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참조:동아대백과사전』시점전지적 작가시점형식한문소설, 단편소설, 풍자소설문체번역체, 산문체, 문어체내용 및 줄거리허생은 10년 계획으로 남산골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가난을 못이겨 어느 날 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인 변씨(卞氏)를 찾아가 10만 금을 빌려 지방으로 내려간다. 그는 이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벌여 크게 돈을 벌고 좋은 일을 많이 한 다음 20만 금을 변씨에게 갚는다. 놀란 변씨가 그 뒤를 밟아보니 남산 밑의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깊이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변씨가 이완(李浣)을 허생에게 소개한다. 이완은 시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오히려 허생에게 비웃음만 사고 돌아간다. 허생의 비범한 인품을 알게 된 이완은 그를 기용하고자 다시 찾아갔지만, 이미 허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주제허생전의 주제는 무능한 사대부 계층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자각 촉구이다. 외국과의 교역을 주장하고 나라 안에서의 수레 운용 실시 등 작자의 실학적 입장을 보여주며, 특히 북벌론자인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풍자한 문제작이다. 허생이라는 인물을 부각시켜 매점매석에 의한 구체적인 돈벌이 방법이 제시되어 있으며, 허생의 일련의 행위들은 사회사상의 변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작가의 의식이 보수적임을 보여준다. 일만금의 돈으로 국가경제의 허실을 시험하고 나름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다가 그만두고 돌아와 이완에게 제시한 국가경륜의 방법으로 시사삼난의 내용을 묶어 무능한 북벌론자들을 매도하고 북학론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서 허생의 아내는 당시 사대부들의 현실성 없는 사고와 허위의식, 경제적 무능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며, 작가의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허생전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문학은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시대의 삶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그린 까닭은 무능하고 허위 의식에 가득 찬 사대부를 비판하여, 지배층에 대한 독자의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소설이 역사적 상황으로서의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며, 삶에 대한 인식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급변해 가는 조선조 말기의 현실, 특히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상업의 발달로 인한 격동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 시대에 있어서 글 읽는 선비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부각시켜 놓은 것이다. 박지원은, 이 작품에서 허생을 내세워 선비 계층의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의 실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 후기의 역사적 전환기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면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하나의 길을 열어 놓은 작품이다. 박지원의 소설문학은 종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제를 취급하고 소설형식의 혁신과 함께 조선 사실주의적 문학전통과 고전풍자문학전통을 새로운 단계로 계승 발전시키고 조선 중세 단편소설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것으로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인문/어학| 2003.10.07| 3페이지| 1,000원| 조회(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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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