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대 청소년교육과 3학년 청소년육성제도론 공통] 학교교육과 청소년육성 정책의 특징을 비교하여 논하고, 주요 청소년육성 관계법들에서 ‘청소년’을 어떻게 규정(정의)하고 있는지 각 법의 목적과 특성에 따라 설명하시오.Ⅰ. 서론Ⅱ. 본론1. 청소년과 청소년육성1) 청소년의 개념2) 청소년육성의 개념2. 학교교육과 청소년육성정책1) 학교교육의 개념(1) 정의(2) 역사(3) 특징(4) 필요성2) 청소년육성정책의 개념(1) 정의(2) 역사(3) 특징(4) 필요성3) 학교교육과 청소년육성제도의 비교3. 주요 청소년육성 관계법들에서의 청소년 규정과 특성1) 민법2) 아동복지법3) 근로기준법4) 소년법5) 청소년 기본법6) 청소년 보호법4. 청소년육성정책의 발전방향1) 청소년육성정책 조정 총괄기능의 강화2) 청소년육성정책 기구의 합리적 일원화3) 지방자치단체 청소년업무의 정체성 확보 및 시설정비4) 청소년관련기관의 협력체제 구축 및 청소년 참여 유도Ⅲ. 결론Ⅰ. 서론청소년육성정책을 이론적으로 들여다보면 청소년 육성은 넓은 의미의 교육에 포함되는 개념이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교육의 의미와는 다른 점이 있다. 청소년육성은 청소년들이 학교교육에서 배양한 지적능력을 바탕으로 도덕적, 정서적 감성적 능력을 함양하고 이러한 능력함양에 영향을 미치는 유익한 여건을 조성하며 유해한 요인을 순화제거 함으로서 지?덕?체를 고루 갖추어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청소년 육성은 청소년교육은 청소년교육과는 그 성질과 수행체계를 달리하면서도 상호보완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 두 기능이 균형을 이룰 때 넓은 의미의 교육은 참된 효과를 나타내어 결과적으로 청소년의 조화로운 성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청소년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하나인 청소년육성이 현실에서 얼마만큼 구현되느냐 하는 것은 청소년육성에 관한 정부의 기본방침이며 계획인 청소년육성정책의 방향과 범위에 달려있고 그러한 방향과 범위는 이와 관련한 사람, 재원, 사회여건 등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소년육성정책1) 학교교육의 개념(1) 정의학교교육이란 제도화된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을 말한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학교 외 교육, 사회교육 또는 성인교육과 대조시켜 흔히 그렇게 부른다. 흔히 형식교육과 동의어로 쓰이며 유치원·초등학교·중등학교·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총칭한다.(2) 역사광복 후 남한은 민주국가로 발전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학교교육도 이에 발맞추어 3년간의 군정기간에 민주교육의 기초를 닦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교육의 기회균등을 전제로 한 학제가 마련되었다. 즉, 유치원(2년)에서 출발하여 국민학교(6년)·초급중학교(3년)·고급중학교(3년)·대학(4년)·대학원(2∼4년)을 잇는 6-3-3-4의 단선형 기간학제가 마련되고, 국민 개학을 지향하는 의무교육제도의 제1보가 시작되었다. 각 급 학교가 추구할 교육목적이 민주적 민족교육으로 정립되었다. 즉,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적 자유 독립의 교육이었다. 이와 같이 학교교육의 민주적 체제 정비와 함께 ‘새교육’운동이 전개되어 교과내용의 개편과 교육방법의 개선 노력이 활발하였다. 교과내용의 개편은 종래의 학문 중심 교육과정에서 아동의 생활과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 중심 교육과정이 단원학습의 형식으로 재조직되었다. 또한 종래의 억압적·획일적 주입식 교육방법을 지양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와 창의적 활동을 조장하는 아동중심주의가 장려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3학기제를 폐지하고 2학기제로 하여 1학기를 9월부터 2월까지, 2학기를 3월부터 8월까지로 하였다. 그 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새로운 <교육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속에서 한국교육은 ‘민주국가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지닌 사람’을 교육의 목표로 하였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국민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단선형 학제를 수립하였다. 유치원(2년)·국민학교(6년)·중학교(3년)·고등학교(3년)·대학(4∼8년)·대학원(2∼4년)의 기국적으로 점차 확대 실시되었다. 이 시기 학교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교육정책을 요약하면 평생교육의 진흥, 전인교육의 실시, 이데올로기 비판교육의 강화, 유아교육의 확대, 영재교육의 확대, 대학의 학생정원령 등을 들 수 있다. 교육재정면에서는 교육세법을 신설하여 학교시설과 교원처우개선에 소요되는 재원의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3) 특징① 학교교육의 임무 : 학교는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 담당. 아동들에게 사회의 전통과 가치, 지식을 전승시켜 사회체제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역할을 담당.② 학교의 공공성 : 학교의 설립주체에 관계없이 공공성이 높음.③ 기술의 전문성 : 교사, 학생들 간에 이루어지는 교수 학습 활동은 복잡하고 전문적인 특성을 지님. 교수-학습활동은 표준화되기 어려움.④ 목표달성과 구성원의 협력 : 학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습자, 교사, 학부모들의 상호협력이 필수.⑤ 교원의 성과 : 학교의 주요 구성원들인 교사는 교과목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학생지도에 대한 전문성과 능력 소유.⑥ 학교의 성과 : 학교의 성과는 학생들의 지식 기술 및 태도의 변화 등을 포함하여 평가하기가 쉽지 않음. 학교교육의 성과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생 됨.(4) 필요성첫째는 생활의 진보와 그 복잡화란 사실 때문이다. 현대생활이 급격하게 변하며 직업이 전문적으로 분화해 가는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단순한 모방식 생활교육 정도로 삶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충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하게 된다.둘째, 사회 그 자체의 영속성을 위한 대문이다. 사회는 변화 발전되어야 하지만 성원의 조직적인 교육을 통해서 유지, 계승된 문화의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다.셋째, 생활유산의 누적화란 사실이다. 인간이 생활 속에서 생산한 것 중에 비교적 일반성, 객관성을 띤 것은 집단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문자, 기호, 형상 등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적극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넷째, 현대적 국가의형성이라는 정치적 과제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통일적인 국가가 성립됨에 따라 정책이 규제 일변도로 운용된 연유는 권위주의 정권 탓이다. 정통성이 취약한 역대 군사정권은 청소년들의 반정부 활동을 봉쇄하려는 의도 하에 그들을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가둬 놓는 방안을 찾는데 몰두했을 뿐 계발, 육성해야 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성장으로 생활이 향상되고 또한 경제성장의 폐단으로 생겨난 인구의 도시집중, 빈부격차, 황금만능주의, 유해환경의 심화로 비행 청소년이 급증하면서 범죄의 연소화, 집단화, 흉포화 현상이 만연하게 되자 학부모는 물론 정부 당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1987년에 제정된 “청소년육성법”은 그러한 절박한 상황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출현했다. 그 후 4년 만에 제정된 ‘청소년기본법’과 “1?2차 청소년육성 5개년 계획”을 수립, 시행함으로써 정부가 주도적으로 청소년정책을 이끌어 가는 시점까지 와 있다.(3) 특징① 청소년은 신체적ㆍ정신적ㆍ사회적으로 아동에서 성인으로 가는 과도기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대략 9-13세에서부터 22-24세의 연령에 해당하는 자이다. 청소년기는 인생단계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의 시기이며, 급격한 변화의 시기로서, 루소(J. J. Rousseau)는 사회적 존재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점에서 제2의 탄생기(rebirth)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청소년기는 신체적, 지적, 사회적, 도덕적, 정서적, 성격적인 측면에서 아동기와는 다른 여러 가지 발달적인 특성을 보이며, 이런 특성은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청소년육성, 청소년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청소년육성의 이념과 방법 등의 필요성을 시사한다.② 청소년육성은 "청소년들이 학교교육에서 배양하는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도덕적ㆍ정서적ㆍ감성적ㆍ신체적 능력을 함양하도록 하고, 이러한 능력함양에 영향을 미치는 유익한 여건을 조성하거나 유해한 요인을 순화ㆍ제거함으로써 德ㆍ體ㆍ知를 고루 갖추어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사회적으로 합의된 복합적인 사회규범의 체계로서 청소년육성정책, 청소년계가 된다.3. 주요 청소년육성 관계법들에서의 청소년 규정과 특성1) 민법(1) 청소년 규정제4조(성년) 사람은 19세로 성년에 이르게 된다.(2) 특성청소년의 신체적 정신적 성숙과 사회진출 시기가 앞당겨짐에 따라 성년 연령을 낮추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며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공직선거법」, 「청소년보호법」,「소년법」등 여러 법령에서 선거권 부여 등의 연령 기준을 만 19세로 규정하고 있는 등 만 19세 이상인 사람을 성년으로 인지하는 사회 경제적 현실을 감안하여 민법상 성년 연령을 만 19세로 낮추었다.2) 아동복지법(1) 청소년 규정제3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제1항 아동이란 18세 미만인 사람을 말한다.(2) 특성아동의 범위를 18세 미만인 자로 하고, 모든 국민과 국가 등은 이들 아동을 보호, 양육하고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육성할 것을 의무화하며, 어른들로 하여금 이러한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 조성과 어린이에 대한 애호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하고 있다.3) 근로기준법(1) 청소년 규정제64조(최저 연령과 취직인허증) 제1항 15세 미만인 자(「초·중등교육법」에 따른 중학교에 재학 중인 18세 미만인 자를 포함한다)는 근로자로 사용하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고용노동부장관이 발급한 취직인허증(就職認許證)을 지닌 자는 근로자로 사용할 수 있다.(2) 특성취직인허증은 본인의 신청에 따라 의무교육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는 직종을 지정하여서만 발행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장관은 거짓이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제1항 단서의 취직인허증을 발급받은 자에게는 그 인허를 취소하여야 한다. 사용자는 18세 미만인 자에 대하여는 그 연령을 증명하는 가족관계기록사항에 관한 증명서와 친권자 또는 후견인의 동의서를 사업장에 갖추어 두어야 한다. 미성년자는 독자적으로 임금을 청구할 수 있으며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근로시간은 1일에 7시간, 1주일에 40시간을 초과하지 못다.
[방통대 무역학과 4학년 한국경제의 이해 B형] 한국농업정책의 전개과정에 관해 논하시오.Ⅰ. 서론Ⅱ. 본론1. 농업정책의 개념2. 한국농업정책의 전개과정1) 1950년대 농업정책(1) 농지개혁(2) 주요 농업정책(3) 고리대부채의 증대2) 1960년대 농업정책(1) 중농정책의 표방(2) 농어촌고리채 정리사업의 실시(3) 농협정비3) 1970년대 농업정책(1) 이중곡가제(2) 새마을운동4) 1980년대 농업정책(1) 농업정책의 대전환(2) 복합영농정책5) 1990년대 이후 농업정책(1) 농업구조조정정책(2) 농산물 수입개방(3) 국민경제상 농업의 비중(4) 농업생산성의 증대3. 한국 농업의 현황과 전망4. 한국농업정책의 발전방향1) 국내 농업정책의 개선2) 식량자급을 위한 기술개발 강화3) 지속적인 농업을 위한 환경농업추진4) 식량자급률 증가를 위한 정책5) 영농법인의 벤처기업화6) FTA체결로 인한 농업분야 지원정책Ⅲ. 결론Ⅰ. 서론지난 반세기 고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국 농업은 크게 변모하였다.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이 6%이하로 낮아지고 농민의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주요곡식의 자급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식량 자급률은 30%에도 못 미친다. 한국농업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된 농업생산 기반 속에서 기아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50년이 지난 요즘은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농업 역시 급속하게 성장 하였다. 여러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농업성장과 비교해 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지금처럼 성장한 농업성장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추세인 세계화와 개방화의 국제적인 환경변화 속에서 한국 농업은 정체를 맞이하게 되고 특히 1997년에 발생한 IMF 금융위기는 한국경제와 농업부분의 구조조정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2000년대 이후 농가소득은 도시 근로자소득의 약 70%에 불과하여 농가소득 문제가 심각하며 WTO 체제에서 농산물 수입개방에 따라 농업의 구조조정 문제는 가장 시급한 문었지만 이러한 잉여농산물의 대량 도입으로 농산물가격이 평균생산비 이하의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어 농민들의 소득을 떨어뜨리는 압력요인으로 작용하였음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이다. 물가안정을 위한 미국의 잉여농산물 방출은 농산물가격을 하락시켜 중상층 농가에 많은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② 임시토지수득세전쟁 등으로 악화된 재정구조 개선 및 안정적인 군량미 확보를 위해 시행되었다. 농민에게 부과되었던 모든 조세를 통합하여 등급별로 토지수익의 일정 비율을 현물로 납부하게 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 하에서의 현물납부라는 점에서 분배농지에 대한 현물상환과 함께 농민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3) 고리대부채의 증대금융전반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 근대적인 금융은 주로 도시부문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불안정한 농업생산과 낮은 생산성하에서 농민에게 부과된 현물납부 부담은 곧바로 중ㆍ하층 농민들의 식량부족 등의 문제를 발생시켰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고율의 고리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 1960년대 농업정책1960년대 초까지 1950년대 농촌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여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정책이 표방되었고, 특히 식량증산과 농산물 가격지지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1961년 농산물가격유지법에 의해 농산물가격 조절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제도화되어 미곡을 중심으로 하는 농산물에 대한 가격지지가 이루어졌고, 경제개발 계획의 실시와 연관하여 개간과 간척을 중심으로 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농협이 중간매매가 되어 고리대보상이자율(20%)과 상환이자율(12%)의 차액을 정부의 재정지원을 통해 충당함으로써 사채를 처리한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였으나 우선 사업 자체를 통해 정리된 액수가 전체 고리채 추정액에 상당히 미달하는 것(30~40% 수준)이었고, 사업 이후 후속조치로 농협을 통해 농민들에게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의 목적대로 고리채의 근절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50년대에 양립되어 있던 농업은행과 농협을 통합하여 종합농협으로 일원화하고 정부가 그 운영을 장악하였다.국 농업을 자급적 성격에서 벗어나 상업적 농업으로 변모시켜 나갔다.(2) 새마을운동새마을운동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 등 농춘사회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개발정책으로 정신계발, 환경개선, 생산기반 정비와 유통구조개선, 소득증대 등의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신계발은 새마을운동의 이념적 기초로서 줄곧 강조되었는데,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이름하에 한편으로 농촌에 잔존하고 있는 전근대적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문제를 정신자세의 문제로만 귀결시키는 한계 또한 지니고 있었다. 환경개선과 생산기반정비사업은 정부의 지원을 기초로 하면서도 농민들의 노동력과 자금을 반강제로 동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그 비민주성(유신체제하의 대중동원정책)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 추진과정에서 환경개선에 투입되는 생산자재(특히 당시 불황으로 인한 재고문제가 심각했던 시멘트 등)는 농촌시장을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도로정비와 농촌전화사업은 농촌지역의 시장경제 확대를 더욱 촉진하였다.4) 1980년대 농업정책(1) 농업정책의 대전환식량수입 억제를 위한 국내증산정책과 정부의 농산물 가격지지라는 정책흐름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점차 후퇴하면서 농업정책기조의 대전환이 1980년대에 나타난다. 농업정책의 핵심은 1970년대 농업정책의 대전제를 제거하는 방향, 즉 수입개방을 포함한 시장기능 활성화(정부의 농산물시장에 대한 개입축소)와 이를 토대로 한 농업구조조정정책이다. 수입개방을 포함한 시장기능 활성화를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하고 동시에 국내농업의 비효율적인 부문을 도태시켜 그 과정에서 배출되는 농지와 노동력을 다른 산업분야로 이동시킴으로써 경제전체의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것이다.(2) 복합영농정책복합영농정책이란 주곡 이외의 고소득 작물과 축산류를 복합적으로 생산하여 농가소득을 올린다는 것이다. 국내농산물 가격지지 후퇴로 인한 농가경제의 악화를 보완하기 위해서 시도되었는데, 애초 수입개방의 기조하에서는 실현가능)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쌀 생산량의 경우 1960년대에는 1단보당 300kg 정도이던 수확량이 2000년에는 500kg 정도로 증대되었다.이러한 생산성향상에는 지금의 비료투입량이 1960년대 초에 비해 4배나 늘어난 점과 관개수리시설이 확충되어 천수답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점, 또 농어기계화가 진전된 점이 작용하였다. 이 결과 쌀의 경우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여 그 처리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까지 한 것이다.3. 한국 농업의 현황과 전망1) 한국 농업의 현황(1) 한국 농업경영구조의 특징① 영세한 경영구조의 지속과 규모별 농가계층의 변화-경영규모의 변화우리의 농업경영은 기본적으로 영세경영구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1960년대 초반의 농가 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0.9ha이던 것이 지금도 1.4ha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리고 평균적으로는 영세경영이지만, 계층별분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 중간층이 감소하고 양극층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1970년대에 와서는 오히려 중간층이 증가하고 상농층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중간층이 감소하고 상농층의 비율이 증가했다. 1990년 무렵 이후로 3ha 이상을 경작하는 상농층의 비중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05-1.5ha의 중농층은 1970년대에는 증가하였으나 다른 시기에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상농층의 절대부족과 앞으로 확대되는 수입개방폭과 값싼 외국산 농산물 가격수준 등을 고려할 때 대규모 전업농이 단기간내에 형성된다고 보기는 어렵다.② 농지임대차의 증가우리나라는 농지개혁에 의해 일단 경자유전의 자작농체제를 확립했지만 그 후 이 자작농체제는 붕괴되고 소작제 또는 농지임대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 농지임대차의 성격에 대해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데, 어쨌든 임차료가 일제시대와 같은 고율소작료는 아니며 순수임차농보다는 자기 농지도 보유하면서 임차도 겸하는 농민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일제시대의 소작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임대인 중 비농민 부재지주의 경우는 이농 후 보소가 될 수 있다는 게 응답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앞으로 50년간 농촌사회 인구 대부분은 후기고령인구(85세 이상)로 변해 노동력이 취약해지고 보건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등의 다양한 문제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2) 다문화가정의 증가농촌에서 다문화가정은 더는 낯선 모습이 아니다. 2012년에 결혼한 한국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국제 결혼한 비율은 평균 6.3%이지만, 이를 농림어업 종사자로 한정하면 그 비율이 26%에 이른다. 농림어업 종사자 4명 중 1명은 국제결혼으로 다문화가정을 이룬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농촌지역 다문화가정은 1만4952호(6만7040명)에 이른다.설문에서 학자들은 다문화가정이 더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농촌에서 신붓감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다 지속적인 홍보·교육으로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동안 단일민족이 지나치게 강조돼 국제결혼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이제는 결혼이민여성도 엄연한 국민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정부도 다양한 정책으로 다문화가정을 지원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결혼이민여성을 대상으로 안정적인 정착과 단계별 영농교육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한 올해 예산을 지난해보다 8.6% 증가한 17억6600만원으로 책정했다.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정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다문화가정 통합교육을 하고 있다. 앞으로 농촌지역에서 다문화가정은 더욱 증가해 농촌의 모습이 과거와는 다르게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3) 농촌의 새로운 주축 귀농인귀농·귀촌은 이미 농촌 사회의 한축으로 자리매김했다. 통계가 이를 증명해 준다. 귀농·귀촌 가구수는 2010년 4067호, 2011년 1만503호, 2012년 2만7008호로 매년 급격히 늘다 지난해에는 3만호를 훌쩍 넘겨 3만2424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2000년 이후 지난해까지 귀농·귀촌 가구를 모두 합치면 10만가구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귀농·입됐다.
[방통대 무역학과 4학년 한국경제의 이해 A형] 광복 이후 1950년대 한국경제에 관해 논하시오.Ⅰ. 서론Ⅱ. 본론1. 해방과 분단2. 1950년대 경제상황1) 6·25 전쟁의 피해2) 한국경제 상황3.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1) 미국의 경제원조(1) 미국의 대한경제원조(2) 한미 간의 경제원조협정(3) 경제원조의 실상2) 한국경제의 재편성(1) 자본축적의 대외의존성(2)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3) 농촌경제의 파탄과 농민층의 경제적 몰락4. 장면 내각의 경제정책1) 경제제일주의 천명2) 국토건설사업 시행3) 경제개발 5개년 계획수립5. 근대화의 대전환 1960년대6. 한국경제의 나아갈 방향1) 50년대에서 현재2)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한 방안(1)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2) 기업 구조 개혁(3) 인적 자원 개발(4)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통한 국가발전Ⅲ. 결론Ⅰ. 서론해방과 분단을 겪으면서 맞이한 1950년대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참담했다. 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폐허로 경제적 기반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으며 명명했던 1950년대였다. 그 당시 정권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분주한 노력들을 했지만 친일파 청산과 미국의 경제 간섭 등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과 환경적인 요소 때문에 큰 실효성을 거둘 수는 없었다. 또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한국사회는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1950년대 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도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하는 상황도 겪어야 했다. 물론 이 계획은 박정희 정권에서 실현된다.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195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 시기의 경제정책과 한국경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될 1960년대로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차 후 한국 경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시하도록 하겠다.Ⅱ. 본론1. 해방과 분단해방이후 일본의 식민지 경제구조가 붕괴하면서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구조가 우리나라의 대외무역구조를 해체시켰다. 더군다나 6.25전쟁으로 인해 그나마 존재하던 업과 같은 수입대체산업들, 그리고 유리, 시멘트, 석탄채굴, 비료, 전력생산과 같은 기초 산업 건설을 위하여 쓰여 졌다. 정부 관리의 외환과 대충자금Counterpart Fund, 즉 국내 생산자들에게 원조물품을 판매함으로써 조성된 외화가 설비자금의 원천이었다. 면과 소모사worsted 생산시설을 수입하는데 필요한 외환은 정부보유 외환뿐만 아니라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시설자금, ICA 산업기계자금, ICA 중소기업자금, UNKRA(United Nations Korea Reconstruction Agency) 자금을 이용하여 충당되었다. 이러한 원조보조금aid grants도 새로운 산업시설을 도입할 때 필요한 주요 외환의 원천으로 사용되었다. 정부보유 외환은 원조자금이 여의치 못할 때에 대체자금으로 사용되었다.예를들면, 제일모직이 1956년 4, 896추의 소모 방적기를 수입하고자 했을 때, 원조자금에 기초하여 소모 방적기를 수입하려는 정부의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보유달러 454,421달러를 사용하였다. 미국 원조금을 얻은 기업가는 수입대체산업, 소위 "달러 따먹기"에 투자하였다. 이는 당시의 기업이 부를 축적하고 초기 재벌이 되어가는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1950년대 삼성의 두 가지 중요한 수출대체산업(제당을 위한 1953년의 제일 제당과 소모사 울 생산을 위한 1954년의 제일 모직)은 결국 미국 원조금으로 설립되었다.3.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1) 미국의 경제원조(1)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미국은1950년대 대중의 인기가 떨어져 보수야당에게 도전을 받고 있던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여러번 시도. 그러나 이는 마지막 순간에 보류되거나 실패 혹은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로 성공을 거두지 못함. 미국은 이승만정권이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할 때까지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2) 한미간의 경제원조협정마이어협정(52. 5.24) -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설치와 한국정부가 원조와 관련해 지켜야 할 의무조항을 명시.우는 물가와는 반대로 쌀값은 하락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계는 크게 위협받았고, 농민들은 궁핍한 농촌을 떠나기 시작하였다.4. 장면 내각의 경제정책1) 경제제일주의 천명민주당 정권은 출발 직후부터 경제문제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경제제일주의’를 정책의 지표로 내세웠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경제부문 행정에 있어서는 사회복지의 증진을 대목표로 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려 합니다. 신정부가 기도하는 바는 첫째로, 과거 부패정권이 취해온 관권경제와 불균형한 산업구조 등을 지양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둘째로 농어촌 중심의 투융자계획을 증대하고 소득증가를 도모해서 위축된 중소기업의 건전한 운영을 조장함으로써 균형적 산업구조의 형성을 촉진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1961년도 예산편성 지침에서는 경제제일주의 정책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4월혁명 과업의 완수와 경제자립의 목표 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부패된 관권경제를 일소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계획성 있는 자유경제체제하에 국민경제의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제반 시책을 단계적으로 실현하는 방향에서 … 예산을 편성한다.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 정책은 경제면에서 살펴보면 관권경제의 부패로 인한 산업구조의 불균형을 지양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함으로써 자립적 국민경제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1960년 11월 정무원 사무처에서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70% 이상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경제 문제라고 응답하였다. 이를 근거로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는 독자적 정책이 아니라 ‘대중추수주의적’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경제제일주의 정책의 채택은 출범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여론조사 결과는 오히려 경제제일주의의 천명이 시대적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민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계획?이 시작되는 해인 1960년이 4개월이 지난 4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4.19혁명으로 실시되지 못했다.5. 근대화의 대전환 1960년대1960년에서 1961년 사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 당시 재계의 기업가들은 두 차례의 위기를 맞는다. 1960년 4월 학생혁명에서 "부정축재자"라고 불린 이들은, 장면 과도정부 하에서 부정축재를 조사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장면 민주당정부는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적 근거인 "부정축재 처리 특별법"을 통과시키지도 못하게 된다. "가장 민주적이나 가장 약체"였던 장면정부는 대기업들의 로비와 압력이라는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부정축재자들이 4월 학생혁명으로 등장한 장면 정부에 정치자금을 대는 주요한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혁명으로 초래된 사회적 불안정과 소요 하에 장면정권은 대기업가들로 구성된 한국경제협의회에게 정치자금으로 2억 환을 기부할 것을 요청했다. 장면정권은 자신들이 처벌하여야할 사업가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장면정권은 초기단계에 있는 신생재벌들조차 처벌하고 징계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군사혁명위원회가 1961년 5월 권력을 잡았을 때 이들의 의도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본가들을 통제,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행정부 기간 동안 재계지도자들 특히 막 자라나던 한국재벌들은 정치적 커넥션과 체계적인 지대추구활동을 통해서 자본을 축적했던 방식 때문에 국민의 비판 받아왔고, 이러한 이유로 박정희 군사정권은 "부정축재"에 대한 형사처벌을 진행시키려 했고 이들의 자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한국의 자본주의발전국가capitalist developmental state23)의 "규율disciplinary"의 성격은 군사 쿠데타의 초기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1950년대 후반, 그리고 정면정부 기간 동안 정부는 경제발전을 목표로 추구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한국 근대화가 대전환을 이루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제발전이 정치러에서 8,581달러로 크게 늘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다음과 같이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같은 기간 중에 농림어업 부문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6.6%에서 5.4%로 현저히 축소된 반면, 광공업의 비중은 16.3%에서 31.9%로 2배 가까이 확대되었으며,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 부문의 비중도 47.1%에서 57.9%로 증대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경제는 지난 30년의 고도 성장기를 통해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룩해 GNP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더불어 질적인 변화도 급속히 진전되어 전통적인 농업사회가 1세대 만에 공업화 사회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처럼 전체적으로 보면 급속한 성장과 구조변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으나, 경제의 내부를 살펴보면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농업부문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태에 머무르고 있으며, 비(非)농업부문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또한 공업부문 내에서도 조립·가공업은 상당히 발전되었으나 부품·소재 공업은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서비스업은 과도하게 팽창되어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2) 형평의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경제를 평가해보면 다른 발전도상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평을 유지하는 가운데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이는 1949년의 농지개혁으로 소농체제가 형성되고 6·25전쟁으로 실물자본이 대부분 파괴됨에 따라 자본축적의 역사가 짧았고, 교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인적 자본이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될 수 있었으며, 수출증대로 고용기회가 확대되어 실업자가 크게 줄어든 것 등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소득분배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는 자본집약적인 중화학공업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소수 재벌 그룹으로의 과도한 경제력집중 및 극심한 부동산투기로 인한 부동산가격의 폭등 등에 기인한 것이었다. 최근의 정치적 민주화추세와 소득분배 문제, 넓게는 형평의 증진문제는 현재 가장 중요한 경제·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한문고전강독 공통]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를 각 한 편씩 선택하여 한시 감상법에 의해 감상하시오.Ⅰ. 들어가며Ⅱ. 한시 감상법1. 한시의 개념1) 한시의 정의2) 한시의 특성2. 한시의 유형1) 고체시(古體詩)(1) 오언고시(2) 칠언고시2) 근체시(近體詩)(1) 절구(2) 율시(3) 배율3. 한시 감상법4.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한시감상1) 오언절구(1) 잠에서 깨어나(睡起) - 서거정(徐居正)(2) 한시감상법에 따른 한시감상2) 오언율시(1) 진중음(陣中吟) - 이순신(李舜臣)(2) 한시감상법에 따른 한시감상3) 칠언절구(1) 춘일성남즉사(春日城南卽事) - 권근(權近)(2) 한시감상법에 따른 한시감상4) 칠언율시(1) 영월군루작(寧越郡樓作) - 단종(端宗)(2) 한시감상법에 따른 한시감상Ⅲ. 나가며Ⅰ. 들어가며한시란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이다. 또한 유교(儒敎)와 성리학(性理學)에 기반을 둔 정치 체계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기도 하다. 그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단순한 풍경이나 감정 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풍상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함축적 표현을 통해 간결하게 문장을 구성한다. 우리나라에 한시가 전래된 시기를 정확히 밝히기란 불가능하거니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는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을 따른다면, 한시가 민족의 문학으로 수용, 향유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종래의 국문(國文)과 한문에 의한 2원적인 어문 생활이 국문으로의 단일화 방향으로 진행되어 국문시가 그 주체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한문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시의 개념과 특성, 유형에 대해 알아보고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를 각 한 편씩 선택하여 한시 감상법에 의해 감상하도록 하겠다.Ⅱ.나라 이전 수 백년 동안 시체의 주류를 이루던 시 형식이다. 오언고시는 한 구가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것인데 二, 三의 격조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의 근원은 전대의 민요체나 가요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확실한 모양을 갖춘 것은 전한시대의 오언고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뒤 위말과 서진의 시대에 들어와서 삼조 와 칠자 사이에 이어 원적, 강 등으로 이어지면서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오언고시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보낸 "태평송"이 오언고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만약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에게 주었다는 "유우중문"을 오언고시로 인정할 경우, 이 작품이 우리나라 오언고시의 효시 작품이 될 것이다.(2) 칠언고시칠언고시는 시의 한 구절을 일곱 글자로 하여 짓는 것인데 四, 三의 격조를 지키는 것이 정식이다. 칠언고시는 오언고시 보다 늦게 발달한 형식이지만 이백과 두보에 이르러 높은 수준의 시체로 확립된다. 특히 두보는 자신의 불우한 삶과 연결되는 작품을 많이 썼는데 그는 이러한 시 속에서 풍자적인 서정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여 칠언고시의 수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칠언고시는 문헌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원효의 시와 '수로부인' 이야기에 나오는 '해가' 정도가 있을 뿐 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에 오면서 더욱 심화되어 이때에 편찬된 시집에는 고시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근체시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2) 근체시(近體詩)당나라 건국 이후에 지어진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구수(句數), 평측(平仄), 압운(押韻) 등의 규칙이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는 시를 이른다. 뜻을 위주로 지어졌던 한대의 시는 육조(六朝)에 이르러 점차 기교로 흐르게 되었고 심약(沈約) 등에 의해 엄격한 압운법과 평측법이 수립됨으로써 종래의 시와 다른 근체시라는 새로운 시형이 탄생되었다. 기승전결의 구법이 있으며, 연의 구성과시의 범주를 8구의 시에만 한정하기 시작했지만 절구를 율시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원·명대에 이르러서부터이다. 8구로 이루어진 율시는 각 2구씩을 묶어 첫 구를 출구(出句), 둘째 구를 대구(對句)라 한다. 이 2구가 연이 되어 4연을 각각 기연(起聯)·함연(聯)·경연(頸聯)·미연(尾聯)이라고 부르며 그밖에도 여러 명칭이 있다.율시의 각 연은 전체 시 안에서 적절한 역할을 함으로써 입체적인 시의(詩意)의 전개과정을 이루어내야 한다. 〈시법상론 詩法詳論〉에는 "기연은 문을 열면 산이 우뚝 가파르게 선 듯, 혹은 골짜기 사이로 구름이 솟아나와 가볍게 떠다니듯, 승연은 풀 속에 뱀이 숨듯 붙지도 아니하고 떨어지지도 아니하며, 전연은 1만 길이나 되는 큰 파도의 이면에 반드시 그만큼의 근원이 있듯, 함연은 회오리바람에 기가 모여 깊은 연못 속에 쌓여 있듯 해야 한다"라고 하여 작법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서사증(徐師曾)은 〈문체명변〉에서 율시의 원형을 상고시대부터 잡았다. 〈시경〉, 패풍(風)의 '구민기다 수모불소'(閔旣多受侮不少)의 구절과 〈서경〉 순전의 '성의영 율화성'의 구절에서 각기 대구와 성률의 교묘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시의 본격적 성립은 제나라 심약(沈約), 주옹(周)의 성률설과 당나라 상관의(上官儀)의 육대(六對), 유협(劉)의 사대(四對) 등 대구법의 영향을 받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율의 출현은 6조시대 음갱(陰)·하손(何遜)·유신(庾信)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운율로나 내용으로나 율시의 정체가 성립된 것은 초당(初唐)의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에 이르러서이며 이때 비로소 7율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5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률이 복잡하고 시의가 확대된 7율은 이보다 조금 늦은 성당(盛唐)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는데 이는 두보에 의해 시체가 완성되고 고도의 예술성을 갖추게 된 뒤부터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율시의 특징은 복잡한 대우와 성률의 법칙을 세밀하게 적용하여 운율의 아름다움을 최대게 하는 방법이다. 절구에서는 기·승구, 전·결구를 대우로 구성하기도 하나 율시에서는 반드시 제 3·4구, 제5·6구를 대우로 구성한다.(4) 평측법낮은 소리인 평성과 높은 소리인 측성(上聲·去聲을·入聲) 한시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운율을 맞추는 방법이다.4.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한시감상1) 오언절구(1) 잠에서 깨어나(睡起) - 서거정(徐居正)簾影深深轉(염영심심전) 발 그림자는 깊숙이 들어오고荷香續續來(하향속속래) 연꽃 향기는 끊임없이 풍겨오네.夢回孤枕上(몽회고침상) 꿈에서 깨어난 외로운 목침맡에桐葉雨聲催(동엽우성최) 오동잎의 빗소리 들리누나(재촉하네).(2) 한시감상법에 따른 한시감상① 한시분석◎심심(深深) : 깊숙한 모습. ◎속속(續續) :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이 시를 허균은 개미둑에서 방향을 틀고 선회한다는 말로 평하였다. 즉 좁은 곳에서 몸을 잘 움직인다는 뜻이다. 기구와 승구가 대로 되어있고 운자는 래(來), 최(催), 평성(平聲)이다.기구(簾影深深轉) : 시간의 흐름을 그림자의 변화로 시각화하여 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여름 낮의 한가한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를 둘러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승구(荷香續續來) : 첫구의 배경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연꽃에서 끊임없이 풍기는 향기를 향기라는 취각을 끊임없이 풍겨온다는 동작으로 시각화 하여 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전구(夢回孤枕上) : 여기서는 장면 전환이 이루지고 있다. 즉, 오후의 낮 풍경을 묘사하다가 잠들어 깨어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결구(桐葉雨聲催) : 여기서는 오동잎에 떨어지는 굵고 세찬 소낙비와 소리를 드러냄으로써 강한 햇볕 아래, 긴 시간 동안을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연못 속의 연꽃과 온갖 초목들의 소리 없는 합창, 무르익는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동참하려는 듯이 사람도 낮의 단잠을 통한 노곤한 신체의 피로 회복과 무료한 여름 한낮의 심리적 피로감에서 벗어난 활기찬 의식으로 여름날 생명의 약동에 동참있다. 나아가서 진정한 신하, 진정한 장사라면 이러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5, 6구는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 숨어 있는 신하와 장사들이 나라를 구할 뜻과 행동을 맹서하면 이 정성에 감동되어 미물인 바다의 고기와 산천의 초목까지도 알아보고 협조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결국 평범한 백성들의 숨어 있는 힘을 숨어 있는 지도자들이 선도하여 나타나면 그들이 모두 일어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7, 8구에서는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숨어 있는 신하와 장사들이 나라를 구할 뜻과 행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일에 작가 자신이 앞장 설 것이며, 이러한 일이 성공하여 침략군을 다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은 목숨 버려도 좋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② 우국충정의 성웅 이순신옥포해전 : 도도 다카도라의 적선 26척 전멸, 적진포와 합포에서 적선 20척 추가 격멸, 적 2400명 가량 사망조선 수군 피해 : 부상자 2명에 불과, 함선 손실 없음이 시는 1592년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돌아오는 중에 임금의 몽진(피난)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는 마음과 국난 극복의 의지를 불태우는 충무공의 심정을 표현한 시이다. 임진왜란 중에 공은 여러 편의 한시를 남기시는 데 그중에서도 이 시는 초기의 작품이라 하겠다. 명장이자 시와 문장에도 유능하셨던 公에게서 문과 무를 겸비한 믿음직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시는 임진왜란 때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충무공의 의지와 결의를 담은 우국충정의 시라고 할 수 있다.③ 감상1, 2구에서는 작가의 갈등 상황을 제시한다. 임금과 세자가 도망가는 국가존망의 위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상황이 염려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다.3, 4구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는 숨어있는 신하와 장사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다.5, 6구에서는 나라를 구하려 나서는 일은 명분에 맞는 것이기 다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한문고전강독 공통]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를 각 한 편씩 선택하여 한시 감상법에 의해 감상하시오.Ⅰ. 한시감상법1. 한시의 구분2. 한시의 특징3. 한시의 감상법4. 시상의 전개방법Ⅱ. 오언절구 감상1. 음정중월(吟井中月) : 이규보(李奎報)2. 한시감상Ⅲ. 오언율시 감상1. 심양기내남씨(審陽寄內南氏) : 오달제(吳達濟)2. 한시감상Ⅳ. 칠언절구 감상1.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 신채호(申采浩)2. 한시감상Ⅴ. 칠언율시 감상1. 백마강회고(白馬江懷古) : 처능(處能)2. 한시감상Ⅰ. 한시감상법1. 한시의 구분한시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고시(古詩)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로 분류한다.고체시는 중국 당나라 이전에 지어지던 시를 통칭해서 불리는 명칭으로 근체시에 비해 격식의 자유로움이 있다. 하지만 당나라 이후에 고시의 형식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근체시라 하는 것이 바로 보통 말하는 한시의 대표적인 것들인데,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 왕성하게 중세를 풍미하던 한시의 형식이다. 발생 계기는 수나라에서 시작된 관리의 임용제도인 과거제도의 선발과정에 시작에 대한 평가를 위해 다소 인위적인 정형성을 가미한 것으로 인해 기인했다는 학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5언(言)과 7언(言),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의 형식 역시 근체시의 형식을 논할 때 사용하는 특징들이다.1) 글자 수에 따른 구분한 구절의 글자수가 다섯 글자면 오언시(五言詩)이고, 일곱 글자이면 칠언시(七言詩)이다.2) 기본 구성에 따른 구분율격을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시를 율시라 하는데, 율시는 구절의 수가 8구절로 이루어진 시를 말한다. 절구는 기본적인 율시를 반으로 자른 4구절의 한시를 말한다.3) 기본적인 한시의 형식오언절구(五言絶句)[글자 수는 20자], 오언율시(五言律詩)[글자 수는 40자]칠언절구(七言絶句)[글자 수는 28자], 칠언율시(七言律詩)[글자 수는 56자]4) 절구, 율시 이외에 배율(排律)의 한시가 있다.배율은 율시의 배로 나가는 한응각) : 그러나 절에 이르면 바로 알리라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 병을 기울이면 달 또한 비게 된다는 것을2. 한시감상이규보는 관료이면서 불교와 스님과의 관계도 깊었다. 이 시는 이규보의 불교 이해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선시의 의취를 풍기고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1구를 보자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 산속의 스님이 달빛을 탐하여산(山)속의 스님(山僧)이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물 속에 비친 달을 보았다. 우물 속의 달빛(月色)이 너무나 밝고 은은하여 스님은 그것을 갖고 싶었다. 즉, 탐심(貪)을 발동한 것이다.2구를 보자竝汲一甁中(병급일병중) : 하나 가득 병 속에 같이 담았네.그래서 스님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서(汲) 그 물과 아울러(竝) 달을 병(甁)속(中)에 담았다. 이것으로 그는 밝은 달을 병 속에 담았다고 생각하고 흡족히 생각하고 돌갔다는 것이다.3구를 보자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 그러나 절에 이르면 바로 알리니그러나 스님은 절에 이르러 물병을 열고 쏟아보면, 금방 알게될 것이다. 그가 누구라할지도 말이다. 설사 그가 바보라도 알게 될 것이라고 작중화자는 단언한다.4구를 보자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 병을 기울이면 달 또한 비게 된다는 것을무엇을 알게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물을 쏟기 위해 물병(甁)을 기울이면(傾), 달(月) 또한(亦) 보이지 않아 비어있는(空) 것을 말이다.왜 그러한가. 스님이 실용적 목적물인 물을 쓰기 위해 병을 기울이면, 하늘의 달빛을 받아 반사하여 사람이 달을 볼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인 물이 없어진다. 이렇게 반사 작용을 하는 물이 없어지면. 결국 달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한 스님이 물을 긷다가 물 속에 비친 달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물과 함께 물 속의 달도 담아갔다. 그러나 돌아가서 물병을 비우면 달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달이 비친 물을 병에 담았다고 하여 달을 담은 것으로 착각할 스님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시가 은유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시는 불교 스님의 선시에 가까운 시로 생각된다.Ⅲ. 오언율시 감상1. 심양기내남씨(審陽寄內南氏) : 오달제(吳達濟)琴瑟恩情重 금슬은정중 : 부부 사랑은 크고 무거워도相逢未二期 상봉미이기 : 우리 만난지 이 년도 채 못 되오今成萬里別 금성만리별 : 이제 만리 밖에 헤어져 있고 보니虛負百年朞 허부백년기 : 백년 살자던 약속을 저버렸소地闊書難寄 지활서난기 : 머나먼 길 편지도 부칠 수 없고山長夢亦遲 산장몽역지 : 산이 첩첩하니 꿈길도 더디다오.吾生未可卜 오생미가복 : 내 목숨은 점괘로도 모르는 것須護腹中兒 수호복중아 : 그대 뱃속 아이나 잘 길러주오.2. 한시감상1) 수연의 1행 두번째 글자가 측성이면 측기법이 된다.瑟의 운은 質이요, 質은 측성이므로 이 시는 측기법으로 되어 있다.2) 운자는 각운이 期, 朞, 遲, 兒로韻目對로 압운되어 있으며 支字 韻이다. 각운이 한 행씩 건너뛰며 운을 다는 격구법을 지키고 있다.3) 함연과 경연은 대구를 이루어야 하는 대우법을 지키고 있다. 萬里와 百年은 時空의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의미의 대구를 이룬다. 땅이 넓음은 머나먼 길이며 있는 길이지만 산이 첩첩한 것은 높은 길이며 없는 길이니, 고저의 대구를 이룬다.4) 각운이 없는 각연 첫行의 다섯 번째 글자는 重(宋), 別(屑), 朞(치), 卜(屋)으로 모두 측성이어서, 각운과 한 가지 소리를 使用하지 않는다는 범칙을 잘 지키고 있다. 각운은 모두 평성이니 측성을 사용한 것이다.5) 세 번째 운목이 다섯 번째 운목과 같지 않게 해야 하는 호요가 비교적 잘 행해지고 있다. 제1, 3, 5, 7행은 운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다섯 번째 글자는 측성이 되는 것이니 세 번째 글자는 평성이어야 한다. 제 2, 4, 6, 8行은 평성으로 압운하기 때문에 세 번째 글자는 이와 반대되는 측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恩?重), (萬?別), (書?寄)는 各各 平聲과 仄聲으로 짜여져 있으나 (未?卜)은 仄聲과 仄聲으로탁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그와 헤어지기 전에 임신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생사는 나라를 위한 것이고, 뱃속의 아이는 가문을 위한 것이니 충효를 바탕으로 의미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장중하지는 않지만 긴박감이 있는 5언 율시 형식으로 이 시를 지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 진다.Ⅳ. 칠언절구 감상1.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 신채호(申采浩)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 인생 사십 년이 너무도 지리하여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 가난과 병 잠시도 날 떠나지 않는구나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 한스러워라, 물 다하고 산 다한 곳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 내 마음대로 노래부르기도 어렵구나2. 한시감상독립 투사, 신채호(1880-1936)는 “적과 타협하지 않고, 행동하는 독립투쟁”을 주장하고, 이를 철저히 전개하면서 라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 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시는 이러한 투쟁과 과업을 직접 몸으로 실천한 과정에서 겪은 작가의 고통스러운 심경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기구를 보자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 인생 사십 년이 너무도 지리하여산문적 의미는, “사람으로 태어나(人生) 사십(四十) 년을 살아보니 그 삶이 너무도(太) 지리하다(支離).”이다.기구에서는, 작가가 처해 있는 심리적 상황을 드러냄으로써 시적 배경을 형성하였다.작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자기의 “인생이 너무도 지리하다”는 갈등 상황을 드러낸다. 누구의 인생인들 지루하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너무도(太)”는 표현으로 그 갈등이 심함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는 “왜”라고 묻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다른 시와는 달리 자연 배경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갈등상황에 놓여있는 40대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승구를 보자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 가난과 병 잠시도 날 떠나지 않는구나산문적 의미는, “가난함과 병듦(貧病)이 서로 따라(相隨) 잠시도(暫) 내 몸에서 떠나징인 것이다. 백두산을 오르는 것은, 민족 독립 투쟁을 이끄는 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을 것이다. 백두산 등정은 현실에서 쫓기는 강경파 독립투사들의 다 하지 않은 영원한 심적 애저지의 근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현실에서의 쫓김은 어떠한 양상이었을까. 신채호를 쫓는 자들은 ,잔인하고 집요한 침략자 일본과 그 협조 세력일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탄압에 굴복하여 자신을 배신한 동료들, 그리고 마지막 한 부류들은 한 가족의 생계 때문에 현실적인 힘에 굴복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 주변의 친근한 일반 민중들이었을 것이다. 가까운 가족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그가 받는 상처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일본은 강경독립 투사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을 것이다. 회유되지 않는 강경파 독립투사들에게는 현상금이 걸렸을 것이고, 그들은 무장 공비나 불만불평 분자로 낙인 찍혔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협조했거나 협조할 가능성이 보이면 같은 부류로 단정하여 같은 정도로 정신적 경제적 탄압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막상 믿었던 친구나 고향의 친지들에게서 외면과 질시를 받게 되었을 때의 섭섭함은 어떠했겠는가는 상상이 가고 남는다. 이해관계에 얽매여 집단이 한 개인을 소외시키는 인간소외 행위는 지금도 범죄로 인정된다. 실제로 현대 조직 사회에는, 자신의 주장이 지극히 정당하고 우세한데도 집단의 부당한 이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소외를 당한다. 그러한 이유로 소외당한 그들은 보상심리로 더 철저하게 변절하기도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정신 병원 신세를 지거나 자살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러한 당시의 작가 처지를, 작가는 “水窮山盡處”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처지가 산을 오르다가 “낭떠러지에 이르고, 주위에는 마실 물마저 없는 어려운 상황”과 같다는 뜻이다. 자세히 말하면 물이 다했다는 것은 자신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세력이 다 사라져감을 말하고, 산이 다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