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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고대의 방사와 유생
    중국고대의 방사와 유생들어가며공자는 세계 역사상 예수, 석가모니와 함께 삼대성인(三大聖人)의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공자의 유교(儒敎)가 서양의 기독교와 인도의 불교와 함께 세계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뜻한다. 지금 까지도 중국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유교문화의 흔적은 동양 사회에 끼친 그 영향의 크기를 나타내고 있다.따라서 공자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기본이 된다. 공자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유교를 알 수가 없을 것이고, 유교에 대한 이해 없이 중국문화나 동양문화를 얘기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유학을 자기네 정치의 기본원리를 설명해 주는 학문으로 정립한 이후, 중국의 정치 사회는 20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유교의 윤리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여 왔다.따라서 중국의 정치 사회는 물론 문학, 예술등 중국문화 전반에 걸쳐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다. 공자를 모르고는 중국의 정치나 사회를 얘기할 수 없고, 중국의 사상이나 문학 예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동양의 여러 나라들에 걸쳐서도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그러면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시대 배경은, 공자의 학문 생활은, 정치사상과 윤리사상은 어떠했는지 공자로 대표되는 유교에 대하여 알고 싶은 호기심에 유교의 기원이 되는 문헌 중에 고힐강이 쓴 『중국 고대의 방사와 유생』을 읽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춘추시대의 유교가 아니라 진한 시대의 유교에 음양가(陰陽家), 봉선설(封禪說), 신선설(神仙說), 참위설(讖緯說)등 유교에 다른 사상이 결합된 유교에 대하여 서술하였으므로 먼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하고 이후에 동양 사회상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유교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공자의 생애와 사상과 현재적 시점에서 보여지는 공자에 대하여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서문(序文)이 책은 令), 신령(神靈), 음률(音律), 복색(服色), 식물(食物), 도덕(道德) 등을 시작으로 제왕의 체계와 국가제도까지 포괄한 것이다. 음양오행사상이 언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음양설은 『주역(周易)』에 기원하며, 오행설은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에 기원한다고 말해도 좋다. 비록 음양오행사상은 그 발생시대가 자세하지 않더라도 체계적 학설로 된 것이 전국시대 이후라는 점은 거의 정설이라 해도 좋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뒤를 이어서 한 대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전성시대가 되었다.이러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미치는 영향으로 발생한 세 가지 큰 특징은 먼저, 종래 천자(天子)가 되는 데에는 수명(受命)[상제(上帝)로부터 사방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나 혁명(革命)[전대의 천자가 받은 명(命)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필요성으로 나오게 된 것이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로 이는 크게 신봉되었다. 둘째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덕설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삼통설(三統說)이라 불리는 학설이 생겨났다. 세 번째로는 명당설(明堂說)이라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천자는 어느 특별한 건물에 거주해야만 하며 이 건물 전체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의 정청(正廳)이 있고 또 각각에 두 개의 행랑방이 딸려 있다. 천자는 1개월마다 거주장소를 바꾸며 그 달에 들어야 할 음악을 듣고, 그 달에 제사지내야 할 신에게 제사지내고, 그 달에 행해야 하는 정치를 집행하며 만 12개월만에 이 1순환이 완료된다.2. 봉선설(封禪說)고대의 왕은 물론 신권(神權)을 가장 숭상했지만,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은 좁고, 사방의 지역도 모두 소국가로서 개화된 나라도 있지만 미개한 나라도 있었으며, 교통의 장애로 인해 쉽게 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멀리 나갈 가능성이 없었고, 멀리 가서 신을 예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춘추(春秋), 전국(戰國)시대에는 제(齊)와 노(魯)가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태산(泰山)은 이 두나라의 경계였다. 사람術)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또는 많은 약방(藥房)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며 방사들의 채색과 구래의 무축(巫祝)들의 상업적 행위가 더해져서 이 사상은 정심(精深)한 것과 경박한 것, 철학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게 되어고 그래서 신선설은 일종의 인간세상 탈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4. 유학의 존중과 경서의 편찬묵자(墨子)의 정치적 주장에 의하면, 천자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인물은 인민 중에서 선거되어야 한다고 한다. 천자가 출현하면, 이번에는 천자쪽에서 훌륭한 인물을 찾아 삼공(三公)과 제후(諸侯)로 삼는다. 선거 이외에 선양(禪讓)이라는 방법도 있었다. 천자가 나이가 들면 가장 훌륭한 인물 한 사람을 찾아서, 그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다. 묵자는 근본적으로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층민중 가운데서도 능력만 있다면 지위가 최고인 천자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묵자가 제시한 고인(古人)의 그러한 예는 요(堯)와 순(舜)이다.순(舜)은 원래 역산(歷山) 기슭의 농부였고, 황하변에서 도공(陶工)일을 하고 뇌택(雷宅)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으며 상양(常陽)에서 장사를 한 적도 있는 일개 순수한 평민이었다. 그러나 그의 덕행과 재능을 요(堯)가 알게 되어 요의 선양을 받았다.이 얘기는 묵자의 선전에 의해 뜻밖에도 사실(史實)로 되었으며, 귀족의 지위를 인정하는 유가조차도 인용하게 되었다.유가(儒家)의 본지(本旨)는 구래의 계급을 유지함에 있었다. 그들은 군주의 극악스러움이 걸(桀), 주(紂)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면 결코 타도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타도된 후 새로운 군주가 추대되어도 계급제도는 본래대로인 것이다. 이점이 유(儒), 묵(墨)가 사이에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따라서 묵가는 천자와 제후가 성립하는 유래를 문제로 삼은데 비해서, 유가는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유가가 문제로 삼은 것은 조정의 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귀족의 계승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왕국과 후 거기에 한층 더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셋째는 소위 학문과 신화를 모두 육경(六經)의 기치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써 공자가 진정 교주가 되게 하고 육경이 진정 천서(天書)가 되게 하여, 이를 빌어 황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양한(兩漢)시대[전한말부터 후한초]의 민신(民神)이 잡다한 사회 에서 이러한 것이 대량으로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참위의 내용은 대단히 복잡하여 , 경(經)을 설명하는 것 외에도 천문(天文), 역법(曆法), 신령(神靈), 지리(地理), 역사적 사건, 문자,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설명하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영역이 넓어도 성격은 간단하여 참위의 제작자는 음양5행의 체계에 우직스럽게 집착해 서술했기 때문에, 서술하는 것이 많았다.이러한 참위에 대하여 후한의 광무제는 신봉이 대단히 강하였다. 광무제는 참위를 매우 열심히 읽었는데 어떤 때에는 일식(日食)이 있었기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해 낭하(廊下)에서 읽었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읽어서 감기에 걸리고 병이 들어 기절한 적도 있었다. 당시 참위는 모두 81편이 있었는데, 하도(河圖)9편, 낙서(洛書)6편 이외에 하도(河圖), 낙서(洛書)30 및 칠경위(七經緯)36편이 그것이었다. 당시에는 칠경위가 내학(內學)이라 칭해지고 본래의경서가 외학(外學)이라고 칭해졌다. 위(緯)라고는 해도 그 지위는 도리어 경(經)의 상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상 이 책의 내용을 부분별로 간단히 나누어 보았다.다음으로는 전반적인 유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공자에 대하여 알아보겠다.7.공자의 출생공자의 조상은 당시 제후국의 하나인 송나라 왕실의 후손이다. 계보를 더욱 더듬어 올라가면 은나라 마지막 왕이자 폭군으로 이름난 주왕의 庶兄 미자(微子)의 동생 연(衍)부터 이어 내려왔었다. 공자는 이렇게 자신의 피가 멀리 은나라로부터 흘러내린 것이라 해서 은나라 사람으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키가 10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로 늠름한 대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에도 분명히 밝혀진, 공자 이전부터 있어온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사상이다. 의 요전(堯典) 첫 머리에는 요임금의 정치업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자신의 위대한 덕을 잘 밝히시어 온 집안을 친화케 하셨고, 온 집안을 화목케 하심으로써 백성들을 모두 다스리셨고, 백성들을 밝게 다스림으로써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셨다. 백성들은 이러한 감화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만 보아도 공자는 여러 곳에서 나라를 덕으로 다스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덕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은 일정한 자리에 있으되 여러 별들이 모두 돌며 떠받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덕치가 천자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이 세상에 이룩하는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써 통제하여야만 백성들이 올바로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즉, 덕치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여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공자는 언제나 다스리는 사람의 올바른 행동을 강조한다. 덕치란 치자(治者)의 수신(修身)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치자의 행위는 직접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 치자의 몸가짐이 바르냐 바르지 못하냐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성패(成敗)에 연결된다. 이것이 공자가 이상적인 정치방법으로 받들었던 덕치주의의 바탕인 것이다. 따라서 덕치주의는 도덕정치이며 또한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뜻하는 것이다.둘째는 예치주의(禮治主義)이다. 예악의 치라고도 말하며 예와 음악으로 백성을 다스림을 말한다. 이것은 덕치가 한결 구체화 된 것으로 예악은 백성들의 마음을 선도하고 질서를 바로 잡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날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인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길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온다면 그 영향을 받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은 자기 힘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의 힘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안회가 다시 묻길 인을 실천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가 대왈편)
    인문/어학| 2004.07.20| 12페이지| 3,000원| 조회(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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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 전후의 한중관계
    서론 : 임시정부 전후의 시기1910년은 우리에게 매우 치욕적인 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점령당했고, 조선이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은 해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고, 1919년에는 중국의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망명정권이 수립되어 1945년까지 한국의 당위적 정치실체로서 존속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한국이 강점되 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이 일제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졌을때 중국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즉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만주정권이 전복되고 청이 멸망하게 된 것이다. 몇 천년을 이어오던 소멸하지 않을 것 같았던 중국의 황제지배체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중국은 황제지배체제에서 공화국으로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화국은 중국 내에 군벌 세력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중국은 군벌세력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내의 군벌 세력들은 독자적인 힘으로 세력을 구축한 것이 아니었다. 즉, 당시 중국 내에 침투해 있던 제국주의 세력들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벌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권력 강화를 위해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때문에 중국의 이 시는 군벌 세력에 의해 분할 점유된 시기이지만 엄밀히 그 내면을 살펴보면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이렇게 볼때 당시 중국이나 한국의 관계를 보면 매우 유사한 듯 하다.즉, 과거 한중관계가 책봉, 조공의 어찌 보면 군신의 관계, 혹은 주종의 관계라고 말할수 있었지만, 이시기는 중국과 한국이 제국주의에게 점유된 점에서 좀 평등해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중국을 살펴 볼 때 당시 중국이 군벌세력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다고 하였지만 1925년에 실시된 국민당의 북벌로 인해 군벌의 통치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중관계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 요동지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910년 부터 1940년까지의 한중의 관계에서는 한국, 중국, 요동 등에는 형식상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화민국, 그리고 만주국이라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있었으나 당시의 이들은 모두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의 중화민국은 어떠한 관계였는가. 이제 우리는 중국과 한국 모두 제국주의에게 휘둘리고 있었고, 과거의 책봉, 조공 관계는 이미 깨어졌다고 판단되어지는 이시기의 한중의 관계에 대해서 정치외교적인 면을 중심으로 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관계앞에서 말했지만 이시기 중국과 한국은 모두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에게 침략당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기는 중국과 한국, 요동이 일제에 저항한 역사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중화민국이라는 국가(정부)는 존재하였으나, 이들 국가가 당시 한국과 중국의 이익과 주권을 명실상부하게 지켜주지 못하였기에, 이시기 한중관계의 주체는 양국의 국가가 아니라 저항적 민중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또한 당시 중국은 북양군벌, 호법정부, 중국공산당, 중국국민당이라는 4개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여기 때문에 매우 혼란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4개의 세력과 각각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중국(중화민국)과 한국(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 정치외교적인 면을 중심으로 하여 다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하기로 하자.(1)대한제국 멸망에 관한 중국의 여론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였을때 청국이나 중화민국은 솔직히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특히 청나라는 일본이 마관조약을 어기고 한국을 강점한 데 대하여 한 마디 공식적인 항의도 하지 못한채 자신들도 대한제국이 멸망한 그 다음해에 멸망하고 말았다. 청의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대한제국과 청국이 체결한 통전제를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중국은 「동아최근이십년시국론」이라는 사설에서 을 지적하면서 중국이 적절히 조치하였다면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그 주된 활동무대가 일보이었기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했으며 또한 한중관계에 대한 전통적 인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일합병을 오랜 속방의 완전한 상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입헌파의 대한인식도 혁명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헌파역시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에 대해서는 배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고, 하며 분개하였나 그 이면에는 위의 혁명파와 똑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보황파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계초를 비롯한 입헌 보황파는 대한제국의 멸망이 중국의 타산지석이고, 대한제국 멸망에 대한 그들의 눈물과 안타까움은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종주권을 상실한 데서 결과한 것이었다라고 하며 대한제국 멸망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중국인들에게 경계하였다.이렇게 볼때 조선의 멸망에 대한 중국 조야의 대응 태도는 혁명파나 보황파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한중관계에 대한 전통적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후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때도 나타난다. 즉 중국은 전통사회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한국을 도왔다고 볼 수 있으며 또 한가지는 중국의 안보를 위해서이다. 9.18사변 이후 많은 국민당 인사들이 동북, 즉 요동이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으려면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였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어쨌든 중국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고 분노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이유가 아니라 중국인들 내면에 있는 전통적인 한중관계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삼일운동과 오사운동한국과 중국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한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여 일제의 한국강점에 저항하였으며, 특히 중국과 요동은 한국인는 3. 1운동이, 중국에서는 5. 4운동이 일어나 양국의 반제운동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성원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3. 1운동이 일어날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북양군벌정권은 일제의 지지하에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다른 외교적 목표가 있었기에 일본을 자극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또한 일제의 군사적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는 요동의 봉계군벌은 한국의 독립당인들이 자기의 관할구역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3. 1운동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지지할 것을 북경정부에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아무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심지어는 북경정부는 독립인사들을 진압하고 오히려 그 대가로 연길에서의 일본군 철병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내었다. 북양군벌 정권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의 압력하에서 취한것이기는 하나 한인들이 요동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한국 임시정부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손문과 국민당이 지도한 남방의 호법정부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손문은 한국의 독립이 중국의 안위와 동아의 평화와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한국이 이렇게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이 중국내에서도 한국인들의 전면적 저항에 고무되어 5. 4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중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도 5. 4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중국청년의 애국운동을 성원하였다. 3. 1운동과 5. 4운동 이후 일본이 요동에 출병하여 한국인뿐만 아니라 요동의 원주민들까지 학살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중국 각지에서는 한중 양국이 합작하여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한국의 3. 1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나 그 영향으로 인해 중국의 5. 4운동을 촉발시켰고, 또한 한국과 중국의 항일 투쟁의 연계고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매우 뜻깊다 할 수 있겠다.(3)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동의 중화민국 호법정부비폭력적 민중저항운동인 3·1운동련하고, 외교부분에서는 중국에서 한중친목회 등을 조직하여 선전활동에 종사케 하며, 중국외교단을 조직하여 중국 남북정부와 각 성장, 독군과 교섭케 하여 우리 나라가 정치행동이나 군사준비 상에서 편의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우리나라의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진학시켜 한중 양국의 연합행동을 요구한다. 고 규정하였다. 1921년에 중화민국 호법정부가 광주에서 수립되고 손문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무장관인 신효식으로 하여금 광주로 파견하여 호법정부로 부터 승인을 받도록 교섭하게 하였다. 손문을 접한 신규식은 고 하면서, 임정이 마련한 「한중호혜조약안」5개조를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상호 정부를 승인하고, 군사, 외교경제적인 면에서 상호 협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손문이 1925년 북벌을 개시하기도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인정 대표의 호법정부 상주와 한국학생의 군사학교 입학만이 실현되었다. 비록 호법정부는 한국의 임정을 공개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한국임정의 존속과 활동은 중국정부의 사실상을 승인과 협조 아래에서 이루어졌다.(4) 한국독립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한일투쟁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는 중국공산당의 입장도 손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1운동 당시에는 아직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지 않았으나,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이 운동이 고 칭송하였고 모택동 등 공산주의자들은 한중국민호력사에 적극 참여한 바 있었다. 1922년에는 중공대표와 한국임정 대표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각국공산당 및 민족혁명조직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상호 지지와 합작을 약속하였다. 1924년 아래 손문 주도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 1차 전국대표회의에서 국공합작의 통일전선이 구축되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막론하고 한국과 중국, 기타 외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광주에 운집하여 북벌에 참여하였다. 이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1925년에 개시된 북벌 죽 중국의 혁명전쟁에 적극 동참하여, 중국의 혁명가들과 함께 일본 등 제국주의 열.
    사회과학| 2004.07.20| 6페이지| 2,000원| 조회(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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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중세 정치사상사 평가B괜찮아요
    서론중세는 여러 점에서 근대로 이어졌다고 하는 빈번한 주장은 중세 정치 사상이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한 결실을 보게 된 근대 정치이념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각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즉, 다른 영역보다 이념의 영역에서 그러한 연속적인 발전이 현저하였다. 우리에게 중세는 정치사상과 정치제도들이 실제로 어떻게 출현하였던가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천년이상에 걸친 이 기간 동안에 서유럽에는 공공 정부의 문제에 관해 모델로 삼을 만한 기존의 유형이나 정치적 경험을 갖추지 못한 사회가 출현하였고 또한 성장하였다. 게르만족의 침입의 기세가 한풀 꺽이고, 다소간의 질서와 평온을 되찾게 되자, 공공의 질서와 평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공적생활을 어떻게 규제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관심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러한 문제는 당시에 쉽게 해결한 만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중세에는 정부와 법률에 관한 두 개의 주요한 이론들이 있었다. 바로 상향적 이론과 하향적 이론이다. 상향적 이론은 인민주의 정부론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는데, 이는 권력의 원천이 인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향적 이론은 권력의 원천이 그리스도교의 이념이 지배적이게 됨에 따라 신 자체로 간주되어졌다.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1)St. Augustine. 354 430 북부 아프리카의 히포의 주교. 4대 라틴교부의 한사람으로 수도원을 창설했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수도승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는 신이 군주를 매개로 인류에게 법률을 반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3세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권력이 신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밝혀 동일한 생각을 표명하였다. 이것은 신정적 이론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 중심이던 중세의 지배적인 정치이론이었다. 중세정치사상은 대체로 보아 이들 두 이론의 갈등의 역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세정치 사상은 압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이론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당시 중요했던 것은 통제의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대제는 대대적인 법전을 편찬하고 정비하여 제국의 주권 문제에 있어서 황제가 지상의 통치자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교권주의는 이렇게 해서 확립되었다. 이는 명백히 로마 교황청의 기본 이념과 정면으로 상충하는 것이었지만 분열된 서로마 제국의 교황은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제압할 현실적인 힘이 없었다. 이러한 서유럽의 현실은 8세기 후반 교황청과 새로운 서유럽의 실력자로 부각되기 시작한 프랑크족의 지도자 피핀과의 연대를 낳았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크족과의 연대를 통해 실추된 교황권을 회복하려 했고 프랑크족은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 서유럽 지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러한 두 세력의 결합은 카로링 왕조를 탄생시켜 서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주었다. 카로링조의 샤를마뉴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서유럽을 통일하였고 교황 레오3세의 지지하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위는 카로링조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카로링조의 쇠퇴로 인해 서유럽의 경우 황제가 교황의 보조자로 격하되기까지 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붕괴 후 서유럽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10세기 오토 대제는 독일 마자르족을 격퇴하여 독일에 평화를 정착 시켰고, 951년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교황청과의 제휴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중세 서유럽의 로마 황제권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의 경쟁과 서유럽 내의 여러 국가들의 성장과 더불어 로마 교황청과 서유럽 패권국들 간의 연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모하였다.W. 울만은 성직자 정치론을 통해 신정적 통치이념의 본질을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교황은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교회를 이끌고 계도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으며 교황의 지배 수단은 법률이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만약 교황이 정신사를 판단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왜 또한 세속사를 판단하는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을 주장했다.후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중세 말기 변화욕구는 그 결실을 맺게된다. 정치공동체인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신이 모든 자연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권력을 궁극적으로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주권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마르실리우스에 의하면 국가는 시민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로서 시민집단의 자율성은 완전히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상향적 정부와 법률이론이 신도집단인 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상향식 이론은 공의회주의로 등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교회의 전체 공의회는 교황보다 상위에 있었으며 주권자는 교황이 아니라 신도집단 전체였다. 공의회주의의 등장은 일시적인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왔지만 교황권은 한 세대가 지나지기 전에 이전의 교황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이는 공의회주의자들이 평신도의 역할을 무시한 채 그들의 사상을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스콜라 철학스콜라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진리로 삼고 이 전제 위에서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고 학문적 체계화를 목적으로 하여 출발하였다.일반적으로 스콜라 철학이라고 하면, 9세기부터 중세 말에 이르는 기간에 발달한 철학을 말한다. 스콜라라는 말은 본래 성직자를 양성하는 수도원 부속학교를 지칭하며, 이 학교의 교사들의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사실 6∼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중세 초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어는 누구의 의심이나 비판 없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의한 생활의 변화와 사상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회의주의가 싹터 종전과 같이 무조건 교회의 교리에 맹종할 수는 업게 되었다. 이에 그리스도교에 학리적인 체계와 근거를 부여하여, 합리적 신앙으로 기독교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대두한 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의 목적은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찾는 데 있었다. 즉 이론에 의하여 신앙을 변호하고, 철학에 의하여 교회를 옹호하고, 지성에 의하여 권위를 부활하고, 논리에 의하여 신학을 입. 이 시기는 보편은 실재이고, 보편은 사물 안에 존재한다. 라는 말로 표현되며 역시 보편은 실재로 파악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시기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이며 그는 무엇보다 우선 신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세 번째 시기인 후기 스콜라 철학은 스콜라 철학의 해체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대는 의지의 자유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코틀랜드 사람인 둔스 스코투스와의 논쟁에 의하여 시작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의지의 자유에 관한 특정한 척도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받는다고 하는 온건한 결정론을 대변하였는데 반하여, 스코투스는 인간은 자유로우므로 그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고 자신의 공정에 의하여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의미하는 엄밀한 비결정론을 자신이 신봉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는 보편은 명칭이고, 보편은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 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유명론으로 표현하는데 즉, 보편 개념은 사물에 앞서서도 또 사물 안에서 존재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는 단지 인식 주관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명론은 그리스도 교리가 이성 인식에 전적으로 통하지 않는다고 설명함으로써 더욱더 그리스도 교리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결국 신앙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의 분리가 행해졌고, 신앙을 이성에 적합하게 정립시키려 했던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실패와 이후의 와해로 스콜라 철학이 사라졌다고 보지는 않으며 그것은 신교 내의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스콜라 철학으로 18세기 초까지 존속하였고 가톨릭 교회안에서는 오늘날까지 남아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교권과 속권의 분쟁다음에서는 중세의 정치사상을 교권과 속권으로 구분해 살펴보겠다. 유럽 사회가 부족제에서 봉건제를 거쳐 점차로 왕조국가로 변해 가는 동안 공적인 논쟁은 기독교적 유럽세계 전체의 지배권에 초점이 모아졌다. 다시 말해 교황이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최고권을 갖느냐에 대한 여부를 둘러싸고 교황측심은 인간의 참된 운명인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세속적인 일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하며, 그 결과 영혼을 목자처럼 돌보는 기능을 담당하는 권위가 영혼의 순간적 회피에 불과하는 사멸적 육체에만 영향을 미치는 권위보다 휠씬 더 숭고한 것임은 두말한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교황파의 주장은 세련된 논리를 갖춘 것이었으며 동시에 기독교 교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교황측의 사상가들은 ‘통일성’이라는 관념을 일관성 있게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신 아래 하나의 교회에 의한 하나의 통치를 주장했던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과 교황 우월론의 교의를 위한 가장 위대한 창도자이다. 그는 아랍의 회교권을 통하여 서구에 역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과 결합하여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아퀴나스는 정치적 권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성에 기인 할 뿐만 아니라 또 신의 의지에도 달려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권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 하나는 노예제이고 이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민통제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 불평등의 자연적인 결과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도적 필요성 때문에 발생된 자연적 결과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부형태분류에 따랐고 통합을 잘 이룰 수 있다는 이유로 군주제를 좋은 정부형태로 생각하였다. 원칙적으로 정부의 의무는 일차적으로 시민들도 하여금 덕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통합과 항구성으로 표현되는 평화와 질서라고 아퀴나스는 역설한다. 이것은 당시 중세의 시민적 무질서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또한 인구의 규모를 유지하고 시민의 복종을 유지하며 적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는 것 등과 같은 정부의무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정부의 의무 사항을 추가시켰다. 또한 아퀴나스는 근본적 진리는 신앙의 진리이며 인간의 최대 관심사
    사회과학| 2004.07.20| 10페이지| 2,000원| 조회(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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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북한의 교육 평가A좋아요
    북한의 교육들어가기북한은 교육과 문화를 인간개조사업, 사상혁명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교육과 문화의 정치, 사회적 성격을 강화시켜왔다. 즉 교육과 문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상으로 간주되었다. 혁명의 관점에서 형성된 북한의 이념교육과 이념문화는 남한의 교육, 문화와 서로 조화될 수 없게 됨으로써 현재 남북 동포간에 서로 다른 의식구조와 행동양태가 노출되고 있다.북한이 현재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자 는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북한은 대외적인 측면에서 다방면으로 변화를 모색하면서 대내적 파급효과를 우려하여 주민들의 정치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혁명체제의 고수를 위해서 우리식 사회주의 에 걸맞는 인간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탈냉전, 탈 이념의 세계사적 추세에 맞추어 개방과 개혁을 통한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우리식 사회주의 에 걸맞는 공산주의적 새 인간 양성이라는 기존의 정치사상교육의 목표가 계속해서 현실성 있는 정책노선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본 보고서는 북한의 교육이 북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원칙과 목표 그리고 거기에 따른 수업방법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알아보고자 한다.1. 북한 교육의 기본 원리북한의 교육은 사회주의 교육이다. 즉 북한은 사회주의 교육에 대하여 사람들을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공산주의적 혁명인재로 키우는 것 이라 정의한다.{)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 1977그리고 이 같은 사회주의 교육의 기본원리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혁명화, 노동 계급화, 공산주의화하는 데 있다고 한다. 특히 자라나는 새 세대들을 위한 교육은 당과 수령에 충실하고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북한은 이른바 사회주의 교육 에 관한 이념적 기초를 법률로 규정하고 또 이의 내용과 방법을 이론 체계화하여 교육의 지침서로 이용한다. 즉, 사회주의 교육의 이념에 대해 헌법 제 43조에서 국가는 사회주의 교육학관한 테제』{) 북한은 1977. 9. 5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를 발표했다. 동 테제는 제1장 사회주의 교 육의 원리, 제2장 사회주의 교육의 내용, 제3장 사회주의 교육의 방법, 제4장 사회주의 교육제 도, 제5장 교육기관의 임무와 역할 교육사업에 대한 지도와 방조 등 5개 장으로 되어 있다.라는 교육의 종합지침서를 마련했다. 이 『테제』는 그 간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발표된 김일성의 연설 교시 명령 등을 일정한 체계 맞추어 재구성한 것으로 북한식 교육의 이념은 후대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화하는 것이며 이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적 새 인간으로 양성하는 것 이라 한 다. 이와 같은 교육을 인간개조 라하며 이러한 인간 개조의 본질을 사상개조, 즉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라 풀이한다.그리고 교육사업에서 견지할 원칙을 제시한 바, 1당성 노동계급성의 구현, 2주체의 확립, 3교육과 혁명실천의 결합 등이라고 한다. 북한은 당성 노동성의 구현과 관련, 사회주의 교육은 혁명의 환경과 목적에 맞도록 전개해야 한다는 이른바 교육에서의 주체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혁명실천에 결합되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교육의 혁명성 에 대해 사회주의 교육의 목적에 관한 사상은 자본주의의 교육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입장을 확고히 고수하며, 노동계급을 위하여 투 쟁하는 혁명가 공산주의자들을 키우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정치사전」사회과학 출판 사, 1972결국 북한식 사회주의 교육은 사람이 혁명을 위해 철저히 희생정신을 발휘하도록 하는 의식화 교육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을 깨우치는 자유 민주주의적 교육이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2. 북한 교육의 이념과 목표공산주의에서는 교육을 인간의 잠재력, 창의력, 개성을 개발하는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공산당에 충성하는 공산주의적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사업으로 취급하고 있다. 즉 교육이 인간개조를 위한 정치사업, 혁명과업 으로 규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사상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한 정치교화를 실시하는 핵심적 수단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사상혁명이란 바로 낡은 사상을 뿌리뽑는 인간개조사업으로서 공산주의의 완전 승리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는 계급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설명된다. 이 때문에 북한은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 가운데서 특히 사상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북한 지도부는 정치사상교양을 체제유지를 위한 사상투쟁 으로 보면서 북한 체제의 존립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북한에는 개인의 의식과 행동까지 포괄하는 절대적 가치인 주체사상이라는 유일 사상 체계만이 존재한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교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교시는 주로 교육과 학습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즉, 북한이 말하는 공산주의적 새 인간이란 전체를 위하여 개인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인간이다. 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다만 전체를 대표하는 김일성 부자만이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직 김일성 부자만을 따르는 효자와 충신이 공산주의적 새 인간의 전형이 되어 왔다. 따라서 북한에서 교육은 주체사상의 구현이라는 명분으로 실시되고 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유일 사상으로서 모든 분야의 지도지침이 되고 있듯이 교육에서도 주체의 요구대로 라는 표어가 최고의 지도원칙이 되고 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주체 혹은 공산주의적 새 인간 의 척도는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도에 있기 때문이다.3.북한의 교육정책의 특징북한의 모든 교육정책수립과 집행은 노동당 중앙 위원회가 총괄적으로 지도 감독한다. 그 밖의 각 지방 당 및 교육기관에 조직되어 있는 당 기관들이 교육의 세부 사항을 통제한다. 따라서 북한은 당에서 결정된 모든 정책들을 즉시 교육에 반영할 수 있는 일사분란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당 기관들이 교육의 세부 사항을 통제한다. 따라서 당기관들은 항시 매 시간마다 제기되는 당 정책을 민감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고쳐야 한다 고 주장 해 왔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치 생활이며 정치적 생명을 이어 나가는 과정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집단주의 교육원칙은 그 목표와 정책, 내용과 방법 등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에서는 개인의 개성과 소질과는 관계없이 모두를 집단에 소속시켜 수령과 당을 무조건 따르는 정형화된 인간을 기르기 때문에 이러한 집단주의 교육에서는 전체를 위한 하나는 있어도 하나를 위한 전체란 존재하지 않는다.4. 북한의 교육행정체계와 교육제도1)북한의 교육행정체계북한의 전반적 교육체계는 노동당의 엄격한 통제와 감독을 받고 있다. 교육을 관장하고 있는 당의 전담 부서는 중앙위원회 비서국 산하의 과학교육부 이다.{) 북한공산정권 수립초기에는 당 선전선동부에서 교육을 관장하다가 과학교육부를 별도로 신설하였다.이곳에서 주요 교육정책이 입안되며 그 집행과정을 지도, 감독한다. 각 도(道)당과 군(郡)당도 당해 지역의 교육행정을 통제하며, 각급 학교를 직접 지휘 감독한다. 행정적 집행기관인 정무원의 교육위원회 산하에 고등교육부와 보통교육부가 설치되어 있는데 전자가 일반대학과 사범대학을, 후자는 교원대학을 포함한 그 밖의 각급 학교의 교육행정업무를 수행한다. 예외로 김일성 종합대학은 교육위원회의 관할 하에 있지 않고 정무원 직속으로 있다.2) 교육제도북한은 1996년도부터 신학기를 4월 1일로 설정했다.{) 북한은 원래 4월1일이었던 새 학년을 1969년도 경제과업 완수를 위해 필요한 인력수급 을 원활히 한다 는 이유로 9월 1일로 변경한 바 있다.북한이 신학기를 또 다시 봄 학기로 변경한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 학생들의 사상이완 때문이다. 즉, 매년 2월∼4월 사이 김일성 김정일 생일행사 관련 축제분위기에 편승하여 각급 학교의 졸업식 및 입학식을 진행함으로써 청소년 학생들에게 김일성 부자의 존재를 확고히 심어주고 김정일로 이어지는 대 이은 충성 을 유도하려는 조치로 분석된다.{) 북한선전매체(평양방송 96. 2. 10)에서 이와 관련해 김일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속 에 김일성을 민족의 영원한 수령으로,(유치원 높은반 :5세),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을 합쳐 모두 11년제로 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실시하여 왔다. 이러한 11년제 의무교육 실시는 무상교육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과 같이 모든 생산수단이 국, 공유화 되어 개인이 소비재 이외의 사유재산을 보유할 수 없는 공산체제에서는 유상교육이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만이 모든 교육 시설, 생산시설을 소유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상교육과 의무교육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은 95년부터 경제난의 심화로 교재를 사실상 공급하지 못하며, 각 학교의 자체 조달을 강요하는 실정이다. 즉 국어 수학 물리 등 주요 과목 교과서는 일부 공급하고 있으나 음악 등의 기타 과목의 교과서는 거의 공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에서 확인되고 있다.5. 교육내용 및 방법북한의 교육방법으로서는 깨우쳐 주는 교육 , 이론과 실천의 결합 , 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 , 조직생활, 성인교육의 추진 등을 제시 할 수 있다.이것은 공산주의적 새 인간 양성을 위해 집단 교육, 반복 교육, 조기 교육, 그리고 평생교육을 통하여 다양한 교화방법이 동원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북한의 교육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생활을 통한 정치사상 활동의 강화이다. 학교내의 정치조직들은 거의 정기적으로 상호비판과 자아비판시간, 이념학습, 조직규범에 대한 강의시간을 갖는다. 조직을 통한 정치사상교육에서는 긍정적인 학습법을 장려한다는 취지하에 인내력, 지구력 그리고 자발심을 고취, 함양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집단주의 교육방법뿐 아니라 이의 실천이나 생산활동과의 결합도 중요시한다. 학생에게 공부만 시키면 머저리 인테리 가 되기 때문에 노동을 시킴으로써 사상을 개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혹은 산 지식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수시로 생산노동에 동원하거나 혹은 집체적 군사훈련에 참여시키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교육방법의 실시는 학생 스스로 창의적인 사고를 하거나 외부환경에 자율적, 능동적으.
    인문/어학| 2004.06.14| 7페이지| 1,500원| 조회(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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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한중 관계사 평가A좋아요
    서론중국은 우리와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랫동안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온 나라였다. 또한 오늘날에도 한반도문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강대국중의 하나이며, 장래에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과 중국이 국교정상화에 합의한지 10년이 지났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한국과 중국은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속도로 교류 협력 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그야말로 전면적인 협력 동반자 관계 로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양국 관계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지리적 근접성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축적된 문화적 동질성, 그리고 경제구조의 상호보완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은 21세기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세에 대해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전략적 공동이익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과거나 현재보다도 미래가 더 긴밀하고 중요한 관계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서 알고 있듯이 19세기 중엽 즉 서구의 충격이 있기 이전에 동아시아 지역은 이른바 유교문명권 으로서 장구한 기간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서구와는 다른, 독자적이며 독특한 가치관, 규범, 규칙, 제도 등을 형성, 발전시켜 왔다. 즉 중국 스스로 지리, 문화, 정치, 등에서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면서 중화의 이적의 분별을 전제로 하는 중화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 다른 나라들과는 상하차등 적인 책봉, 조공관계를 당연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중화사상이나 책봉, 조공제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 왔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특히 중국 왕조의 한족 여부 또는 유교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조공국들의 경우에도, 중국과의 지리적 원근이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여건 특히 중국(유교)문명의 수용 정도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였음은 물론이다. 과거 한국과 중국은 책봉,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한 주종의 관계였다. 있었다. 한편 19세기말에는 두 나라가 공히 서구의 앞선 과학기술문명에 기반한 경제력, 군사력 앞에 무력하게 주권을 침탈 당한 적도 있었다.그러나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웠듯이 과거 한중관계는 전통적인 책봉, 조공의 관계였다.그렇다면 이러한 한중관계가 성립한 시기는 언제일까. 한, 중 조공관계가 언제부터 기원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 방면의 권위자 전해종은 삼국시대 후기에 남북조와의 관계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대구분을 하였다.{) 그는 조공관계가 사절의 왕래 특히 조공사절의 파견으로 유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서, 343년 고구려가 전연에 대하여 칭신한 이후에 조공관계가 성립하였으며 5세기 초부터는 정기적, 항속적인 조공관계가 되었던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전해종,『한중관계사 연구』(서울 : 일조각, 1970), pp 35∼43. 한편 수당대에 이르러 양국간에 전형적 조공관계가 성립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서영수, 삼국과 남북조 교섭의 성격, 단국대 『동양학』, 11(1981), pp 186∼ 187.1조공관계 성립의 전단계 : 삼국시대 전반기의 관계(A.D. 8∼316)2초기 조공관계의 성립 : 삼국시대 후반기의 관계(317∼668)3조공관계의 발전 : 통일신라 및 고려와 당, 송과의 관계(669∼1279)4조공관계의 변질 : 고려와 요, 금, 원과의 관계(918∼1368)5전형적 조공관계의 성립 : 고려, 조선과 명, 청과의 관계(1368∼1894)한편 어느 외국학자는 한, 중 관계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호관계로서만 지속되었던 것도, 또한 많은 일본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중국의 끊임없는 정치적 압력, 지배와 한국 측의 종속이라는 관계의 연속이었다는 것도 모두 잘못이라고 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친 양국관계의역사적 실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시대구분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 Hugh D. Walker, "Traditional Sino-Korea Relations and Their . 유교문명권에서 중국 연호와 曆의 사용은 곧 중국황제의 권위에 신복한다는 표현이었으며, 따라서 황제를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어 사용 하는 것은 황제권위에 신복하지 않는다는, 책봉, 조공관계로부터 벗어나겠다 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한편 중국연호를 처음으로 채용한 것은 650년 신라, 중국책력은 624년 고구려에 의해서였다. 전해종(1970), p. 43.더욱이 신라나 고려 모두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것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를 전면 수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Walker(1975), pp. 25∼28.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대중국정책이 매우 현실적이었고, 때로는 공세적인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는 돌궐과 연대하여 수나라에 대항하였으며, 신라의 경우도, 삼국통일 직후에 당군을 몰아내고 통일을 달성하고 나서, (차후 있을지 모르는) 등의 정치적 압력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분적으로 사대, 조공을 행하였다. {) Walker(1975), pp. 25∼27. 또한 박충석, 유근호, 「조선조의 정치사상」(서울 : 평화출판 사, 1980), pp. 113∼114 참조.고려에 이르러, 물론 중국이 송, 요 금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주변정세의 변화에 대한 판단과 예측 능력이 뛰어났는데,{) 예컨대 고려는 1119년 초 송나라에 대하여 금과 손을 잡고 요를 공격하려는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현명하게 대처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송은 몇 년 후 에 금과 손을 잡고 요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얼마 뒤에는 오히려 금의 공격을 받아 도읍이 함락되고 결국 강남으로 쫓겨나 남송을 세워 겨우 명맥을 유지 해나갔다. 蔣非非, 王小甫 외, 「中韓關係史」, 古代卷(북경 : 사회과학문헌 출판사, 1998), pp. 190∼191상황에 따라 사대의 대상국가를 바꾸기도 하고 송나라의 원군요청을 거절하며 중립을 취하는 등, 매우 현실적인 태도로써 국가의 존립을 지켜냈던 것이다.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양민대학출판사, 1995), p. 299.즉,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여진족은 野人이라 불리며 이적 , 호로 라고 간주되었으며, 조선 전기 특히 세종, 세조 때에는 일부 여진족에게 조공을 요구하며 그들을 조선의 울타리 와 臣民 으로 삼기도 하였다.{) 황지련(1995), pp. 28∼73. 조선초기에 여진의 일부 추장들은 조선과 명에 대해 동시에 이중으로 조공을 하였다. 전해종(1970), pp. 52∼53이러한 상황에서 그토록 멸시하던 여진에게 조공관계를 맺게 되었기에 조선으로서는 그 굴욕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더 심해졌다. 그렇다면 아편전쟁 이후 현대시대에 이르러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2. 조선후기와 대한제국시대의 한중 관계는.....일반적으로 아편전쟁 이후를 중국의 현대시대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아편전쟁후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통시대 한, 중 관계는 책봉, 조공의 관계였고 그것은 조선과 청에 들어서 더 확고하게 굳어진 느낌이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청은 그들이 마치 조선의 주인인 양 모든 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듯 하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이 조선을 조금씩 넘보자 청은 주군 된 도리로써 조선의 정치적, 외교적 일에 간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간섭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끊을 수밖에 없게 된다.청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관심을 끊게 한 청일 전쟁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全琫準이 이끈 동학농민세력이 {) 吳知泳, 『東學史』, 영장서관, 1940, 112쪽봉기하여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袁世凱의 종용에 따라 청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청은 이것을 약화된 자기 세력을 다시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출병하였고, 이에 일본은 이를 대청 무력제압의 절호의 기부는 중국 공산당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더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3. 한국의 광복과 전후의 한중 관계는.....중국이 국공내전으로 혼란했던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건립되었고 중국에서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여, 혹은 서로 수교하여 협력하였으나 혹은 서로 단교하여 대립하기도 하였다. 즉 대만의 중화민국과 남한의 대한민국은 서로 승인, 협조하였고,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은 서로 승인, 협력하였다. 이러한 한중 4국의 협력과 대립의 관계는 6. 25가 일어나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당시 한반도 상황의 개입을 중국의 당연한 권리고 간주하였다. 즉 {) Allen S. Whiting, China Crosses the Yalu ; the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New York, MacMillan Co., 1965, p. 84∼85.고 하였고, 이와 아울러 중국은 적대적인 미제가 한반도를 점령하면 조선의 사회주의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아시아 제국의 혁명운동이 좌절될 것으로 판단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이러한 참전 목적은 대부분 성공적으로 성취하였다고 판단되어진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체제의 차이와 또한 냉전체제라는 세계의 분위기 속에서 차갑게 식어 버리게 된다.즉, 한국전쟁 후에도 오랫동안 미소 양국이 주도한 이른바 냉전체제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로 굴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서로 그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정식 국호 대신에 중공과 남조선이라는 별칭으로 서로 호칭하면서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조차 일체의 교통과 왕래를 끊은 상태에서 30여 년을 경과하였다.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3.
    인문/어학| 2004.06.07| 7페이지| 2,500원| 조회(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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