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변천과정과 의의Ⅰ. 서론Ⅱ. 본론(1) 실크로드의 기원과 세 개의 교역로(2) 실크로드의 개척자 와 실크로드 깨운 사람들(3) 중국의 서역경영(4) 실크로드의 의의Ⅲ. 결론Ⅰ. 서론수업시간 전반적인 내용이 “실크로드에 대해 이해를 하고 실크로드 문화를 이해 하기”였기 때문에 실크로드에 대한 원론적인 것이 궁금하였다. 예전 고등학교 세계사 때 부터 들었는데 정확히 실크로드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리포트 주제를“실크로드의 역사와 의의”로 잡고 실크로드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보기로 했다. 실크로드에 대한 것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실크로드의 기원과 교역로, 실크로드의 개척자 와 실크로드를 깨운 사람들, 중국의 서역경영 과 같이 이론적이고 원론적인 것을 위주로 하였고 실크로드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Ⅱ. 본론(1). 실크로드의 기원과 세 개의 교역로“실크로드(silk road)”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 이 19세기 후반에 중국의 각지를 답사하고 나서 1877년 「중국」이라는 책 5 권을 저술하였는데 제1권 후반부에 동서 교섭사를 개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유럽과 인도로 수출되는 주요품목이 비단(Silk)이었던 것을 감안해서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자이텐스트라센(Seidenstrassen, 비단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의 명명을 따라 실크로드라고 부르게 되었다.실크로드의 길로는 3개가 있는데 스텝로, 오아시스로, 해양로가 있다. 첫째 스텝로는 몽골리아 ·중가리아 등 아시아 북부의 스텝지대를 횡단하여 그곳 유목민의 많은 집단을 통하여 상품 수송이 중계되었다. 흑해 북부 연안에 살고 있던 스키타이인의 예술양식이 B.C. 5세기 이후 동방에 전해져 이 길의 오랜 연혁을 말해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는 스키타이인이 살던 곳으로부터 동방으로 향하는 상업로를 소개하고 있다.이 길을 통하여 시베리아의 귀중한 모피가 서방에 수송되었는데, 특히 몽골리아하여 서방에 전함으로써 이 길의 의의가 매우 컸다.두 번째 길을 오아시스로 이다. 동 ·서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과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의 오아시스를 연결한 통로로서 고대에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중국 특산의 비단을 로마의 시장에까지 운반한다는 의미로 ‘비단길(silk road)’이라는 애칭이 이 길에 주어졌다. 이 길의 서부를 구성한 이라크∼시리아 간의 여러 오아시스는 ‘비옥한 초승달지대’로도 잘 알려졌지만, 그것은 예로부터 페르시아 만 과 지중해를 연결한 ‘동서간의 다리’, 혹은 아시아∼유럽의 통랑 으로 더욱 유명하다. 또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파미르, 혹은 인더스 강 근처에 도달하는 길은 BC 6세기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지만, 다시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 정벌 또 그에 따른 헬레니즘 세계의 성립으로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다.그 당시의 중국은 비단을 산출하여 서방에 다소 알려지기는 했지만, BC 2세기 말 한나라가 서역의 투르키스탄과 관계를 강화했을 때, 파미르고원은 더 이상 동 ·서 아시아를 격리시키는 장벽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오아시스 루트는 세계사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고, 여러 오아시스 국가의 대상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인도 ·이란의 3대 문화권이 아시아의 내륙부인 이 길을 통하여 서로 접촉하게 되었다.세 번째 길을 해양길이다. 동남아시아 연안의 여러 항구를 해상으로부터 연결하여 동쪽은 중국, 서쪽은 인도의 해안에 미치고, 나아가 홍해와 페르시아만 항로를 접속하는 길이다. 선박무역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미처 발달되지 못하여 날씨나 바람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다만 단거리무역만이 행해졌다. 그리고 이라크와 이란을 연결하는 페르시아만 항로는 선사시대에서부터 그 자취를 볼 수 있고, 3세기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동방무역로의 하나로서 크게 발달하였다.한편 B.C. 1세기 말 이집트에 진출한 로마제국은 페르시아의 동방무역에 대항하여 홍해 항로를 발달시키고, 이 방면으로부터 인도와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행1∼2세기경에는 인도의 이민과 문화를 동남아시아에 보내 그 지역의 개발에 공헌하였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도 B.C. 3세기부터 무역을 한 자취가 있으며, 중국은 이 무역을 통해서 남해의 값비싼 물품들을 가져가기도 했는데, 이란과 인도도 이에 참가하고, 로마 상인까지도 이를 이용하였다.(2).실크로드의 개척자1) 장건서역은 죽음과 공포의 세계였다. 미지의 세계이기도 했고 대월지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지나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 사람이 장건이었다.장건은 흉노땅에 들어섰지만 곧바로 흉노군에게 체포되었다. 처음부터 대월지로의 사신파견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장건은 흉노에서 10년간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포로생활에 충실하여 그곳 흉노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신절(황제의 명을 받은 사신의 신분증)을 항상 휴대했다.흉노인들은 점차 장건을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장건은 기회를 잡아 탈출을 감행하였고 결국 대월지를 찾아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천산산맥은 말할 것도 없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지나야했다. 그리고 고원지대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야했다.대월지는 이란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유목국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침입도 없어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흉노에게 당한 일도 있고 한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나라와 연합해 흉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장건은 교섭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도중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더욱 가혹한 포로생활을 하다가 1년 후 왕이 죽고 난후 일어난 내란을 틈타 한나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13년만의 귀국이었다.서역탐사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생활을 감내하며 13년만에 서역을 왕래하였으니 그 노고가 대단하다.비록 장건이 대월지와의 교섭은 실패했지만 흉노와 서역의 나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중국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무제는 서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고조되었다. 특히 하루에 천리를 달린인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 전환을 시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실크로드의 개척을 가져왔다.2) 반초중국 후한 초기의 무장.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나라에 복종시켰고 중국과 서역간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학문에 뜻을 두고 수도로 진출하여 궁중의 도서관 사서를 하였다. 변경에 흉노족이 침범하여 자주 약탈하고 주민을 살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인으로 자원하여 흉노 원정군으로 가담하였다. 73년 원정군 수장인 두고를 따라 흉노토벌의 별장으로 재능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우고, 이후 31년간 서역에 머물며, 선선 ·우전(코탄) ·소륵(카슈가르) ·구자(쿠차) ·언기(카라샤르) 등지의 오아시스 제국가를 정복하고 부하 감영을 페르시아만 방면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군사마에서 장병장사를 거쳐 서역도호가 되고 정원후에 봉하여졌다. 서역을 토벌하고 반세기 이상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나라의 위령 밑에 복종시켰다. 102년 71세의 고령을 이유로 귀국할 것을 간청하여 뤄양에 이르렀으나, 다음달에 병사하였다.3) 현장법사중국의 불교 발전은 물론이고 중국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고승이다. 더욱이 그는 실크로드의 위대한 개척자로서 1300년전의 실크로드의 생생한 역사를 후대에 기록으로 전달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현장법사는 간다라와 탁실라를 비롯한 인도의 수많은 불교유적과 사원을 돌아보고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던 나란다에서 학문연구에 힘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 법사는 인도에서 그와 필적할 만한 자가 없게 될 정도로 실력을 발휘하여 천축에서도 그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아마도 석가 이래 현장법사가 가장 잘 불교를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현장법사는 승려를 포함한 모든 불자로부터 존경받았다.4) 실크로드를 깨운 사람들잃어버린 실크로드를 찾아내는 일은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과 싸우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을 연결하는 영원한 동서교역로 실크로드를 분지와 티베트 고원지대를 탐험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다른 사람은 영국의 스타인이다. 3차에 걸친 실크로드를 탐사하면서 일생을 타림분지와 중앙아시아 , 서아시아 조사에 바쳤고 그의 유해도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있다.이들 초기 탐험가들에 의해 실크로드는 서서히 베일을 벗으며 나타났고 이후 실크로드 학문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연구가 진행되며 인류 역사 문화의 보고로 자리 잡아 많은 사람들의 꿈의 답사지가 되었다.(3).중국의 서역경영한나라의 서역경영은 장건의 서역개척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서 회랑에 중국의 행정단위인 군을 설치하고 고사,누란,대원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고, 서역을 총괄하는 도호부를 설치하기까지 70~80년간 유지 되었다.그러나 화려했던 봄날은 8세기 중엽 무너지고 만다. 서아시아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시킨 이슬람이 동진을 거듭하여 파미르고원까지 진출하였고 751년 탈라스 강변에서 패하고 말았다.그 결과 파미르 서쪽의 실크로드는 완전히 이슬람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당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고 실크로드도 붕괴되고 말았다. 실크로드는 당나라 시대에 치고의 번영을 누렸고, 당나라의 붕괴와 함께 실크로드의 번영도 시들고 말았다.하지만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당대에 비해 교역의 중요도는 훨씬 떨어졌다. 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의 일이었다.이슬람은 동서문화의 새로운 중개자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바다를 통한 교역로(해로)도 새로 개척되어 실크로드의 중요도는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교역로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에 이르러 중국과 몽고 교류 덕택에육상 교역료 중요도가 다시 높아졌으며 원나라의 개방정책으로 인해동서간의 문물 교류가 세계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융성하였다.또한 원과 서방의 4오국으로 구성된 몽고 유목제국으로 인해 이 거대한 제국을 효과적으로통치 하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