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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의 정치 사회문제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지역격차★과목명: 서양사회 경제사★학과: 사 학 과★학번: 0600081★이름: 권보라★담당교수: 이기영 교수님★제출일: 2008년 12월 4일 목요일머리말이탈리아는 우리와 같은 단일정부를 채택한 나라이자 지역불균등발전에 따른 지역격차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곳이다. 지역통합과 분권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며, 남과 북의 지역차가 매우 커 통일국가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차이가 심하게 나는 곳이다.이탈리아는 지역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적 대응을 시도하고 있으며,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노력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 지방분권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먼저 이탈리아의 남과 북의 상황을 알아본 후 불균형적인 지역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1.남부이탈리아와 북부이탈리아이탈리아는 지역적 개성이 두드러진 나라이다. 남부, 중부, 그리고 북부가 각각의 지역성의 띠고 있으며, 인접 주나 도시 간에도 차이가 두드러지고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지방적 개성은 ‘중앙’에 대한 ‘지방’의 활력이라는 바람직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남부와 북부간의 이질성이 제일 큰 문제이다11세기 이후 생성된 중세도시(comune)의 발달은 이탈리아의 중북부에서 발견되지만, 남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봉건적 전통이 잔존하여, 이탈리아식 상업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올 수 없었다. 중세의 자치도시는 상인층과 장인집단에 의해 건설 되었으며 이들은 동업자조직인 길드를 통해 수평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중소기업이 중심이 된 오늘의 산업 지역적 경제발전에서도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또한 16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외세의 영향력과 침략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북부는 알프스 이북의 선진문화가 유입되어 시민문화가 싹틀 수 있었으나,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스페인의 부르봉왕조가 전근대적인 봉건주의를 유지하여, 사회구조적 차별성이 고착 되었다. 따라서 남부문제는 현대적이고 동시대적 문제일 뿐만 아되어 있고, 토양이 척박하며 강수량도 적은 편이어서 농업에 적합지 않은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보아 북부는 선진화된 지역에 근접하여 자본주의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으나, 남부는 지중해 영역으로 자본주의적 발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치에 존재하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통일을 전후하여 남부는 인구학적 차원에서 사망률의 감소와 출생률의 높은 수준이 맞물리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하였으며, 척박한 토양에서의 농업 산출물이 남부의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에 대규모의 대륙 이민이 일어났다. 북부에서는 남부에서 유입된 이민자들을 노동자로 고용하여 북부의 산업화를 더욱 가속시켜 나갔다.2.남부 이탈리아의 경제역대의 이탈리아 정권들은 낙후된 남부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나, 파시스트들은 남부문제를 외면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개발계획을 포기하여 남부와 북부의 경제력 차이는 더욱 확대되었으며,1945년 이후 현제까지 세 종류의 발전계획이 수립되었다.첫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정부가 자본이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하는 정책으로, 1945년 우파정권이 집권하면서 지속적으로 취해왔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두 번째. 좌파의 주장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국가에 의한 지속적인 남부특별지원정책만이 남부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세 번째.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반영된 국가가 개입하되 자립갱생을 위한 계획에만 투자를 국한시킨다는 것이다. 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 정책으로 남부개발기금에 중앙정부는 30년간 대략 245조 리라(약 127조원)를 지원했으며, 직접투자보다는 신용대출이나 사업지원금으로 사용되었다. 국가기금 지출은 농업발전에 50%,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과 건설에 28%, 20%가 관광산업과 공업, 수공업에 사용되었다. 60년대에는 남부에 대규모의 산업기지들이 건설되었다. 나폴리 부근의 알파로메오 자동차공장, 타렌트에 1천만 톤 생산규모의 제철소와 건설은 자본집약적이어서 남부지역의 높은 실업률을 낮추지 못하였다.1990년 이탈리아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88년 국가총예산의 30%가 인구의 37%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에 지출되어 지출의 불균형을 이루었으며, 투자부문에서 남부는 국가 총 투자액의 12%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복지비(장애인 연금과 퇴직연금, 의료비, 생활지원금 등)의 40%)가 남부에 지출되었다. 여전히 남부는 북부에 비하여 낙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노동인구의 30%만이 일자리를 갖고 있으며 생활수준은 북부의 60%에 불과 하다.이탈리아의 평균경제 성장률이 1987년 3.1%였지만 남부는 겨우 1.6%에 머물렀다. 특히 남부의 팔레르모의 경우 도시평균소득은 전국 70위였으나 지출은 7위를 기록하였다, 이런 현상은 공공자금이 산업부분에 투자되기 보다는 비합법적으로 유출되고,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되거나, 조직폭력집단 즉 마피아에게 흘러가는 증거였다고 볼 수 있다. 마피아가 남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GNP의 25%~40%를 차지하고 있다.3.남북 지역 격차사회경제적 남북 격차는 국가통일 이전부터 존재했고 지속적 해소 노력이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민주당 중심의 후견주의 체제로 인해 더욱 악화 되었다.기독교민주당(DC)의 후견 주의적 권력체제는 남부 이탈리아의 지역 구조정책이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이탈리아의 후견주의는 직업정치인들이 선거 지지를 반대급부로 일자리, 연금, 공공보조뿐 아니라 주택과 건축허가 및 상업허가에 이르는 각종 공적 자원을 사용해 온 정치?경제적 제도의 기능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더욱이 1973~4년 1차 유가파동 이후 국가 경제정책이 북부 대공업에 집중하게 되면서 남부에서는 산업화가 중단되고, 점차 가족소득 보호를 위한 공공지원 정책과 공공부문을 위한 전통적 정책만 유지 되었다. 남부의 총 주민소득과 자원 및 소비수준은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였으며, 1980년 남부주민 1인당 생산(1260만 리라)은 당해 연도 이319871인당 GNP51.953.357.355.61인당 총 자원*61.267.273.970.61인당 민간소비66.368.373.168.4*1인당 GNP+1인당 순수입 재화와 서비스1). 지역 간 불균등 발전이탈리아는 이중경제구조(economic dualism)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 국가이자 지역적, 경제적 격차가 매우 큰 나라이다.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 중부의 라치오(Lazio) 이남의 8개 주)로 이루어진 메조지오르노(Mezzogiorno) 지역이 가장 낙후되어 저개발 상태에 있고, 중-북부 지역은 산업과 인구 측면에서 매우 발전된 상태였다. 중-북부 지역은 전통적 산업지역인 북서부) 지역과 1960년 이후 신흥 산업지역으로 부상하여 이른바 ‘제3의 이탈리아’로 불리는 북동부지역 및 중부지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은 경제 성장률과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북서부 지역은 토리노, 제노바, 밀라노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기계?화학?섬유?자동차 등 전통산업이 발달하여 1950-60년대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1960년대 포드주의 위기 이후 북서부지역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중부와 북동부지역에서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산업지구를 형성하여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남부지역은 낙후된 산업구조, 후진적 농업 등 여려 요인으로 인하여 1950년대부터 상대적으로 저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많은 인구가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3.이탈리아 지방분권 정책①.지방이양 정책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지방분권의 계기는 1968년 2월 ‘보통주’에 대한 대의제 기구의 도입을 규정한 법령이 통과하면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지역예산을 뒷받침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15개 보통 주에서 주 의회가 구성되었지만 권환, 재정, 인사권들의 지방이양을 규정한 규정은 다시 2년 후에야 공포되어 주 정부가 실질적으로 출법한 것은 1972년 4월이었다.그러나 중앙집권세력은 지방정부로의 권한 이양에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중아부처는 자신들의 지방사무소 등을 통해 권한을 분산1975년 7월 두 번째 지방선거에서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가 대약진을 하면서 지방자치 옹호자들은 더욱 힘을 얻었다, 중앙정부와 중앙집권 세력들이 쉽게 권력을 이양해주지는 않았으나, 지방자치주의자들은 새로운 중앙부처인 자치부와 의회의 지방자치위원회로부터 지지를 얻어내 지방분권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을 강화하였다. 1977년에는 주요 정당 사이에 이른바 616법령이라는 법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 졌으며, 이법에 따라 보건, 주택, 도시계획, 교통, 농업, 산림, 소기업, 공공업무 등 주요한 분야의 입법권이 지방으로 이양되었고, 지역이 총 국가예산의 1/4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의료체계에 대한 실질적 운영권을 이양 받았다. 616법령은 지역이 실질적인 공적권한을 국가로부터 이양 받았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제도적 변화였다.또한 각종 지역개발계획의 권한도 지방으로 이양되었다. 토지이용계획, 경제계획, 구조 계획 등에 대해서 지역이 관할권을 갖게 되었으며 1950년부터 메조지오르노 지역의 개방계획을 담당해온 남부개발기금도 1991년에 폐지되었고 1986년 법률에 따라 기능과 권한은 모두 남부의 지방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리하여 몇몇 지역에서는 도시계획 및 환경 부문에서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어 내었다.물론 유럽의 지역화 된 나라들에 비해 지방정부의 계획 권한이 약하지만 계획 이양 이후 지역계획은 크게 개선되었다.② “북부문제”와 연방주의지역주의가 1990년대에 가장 강하게 대두되었던 것은 ‘북부문제'(northern issue)와 관련이 있다. 지역주의는 북부문제와 관련하여 연방주의로 변화하는 양상까지 보였다. 여기서 이른바 북부문제가 나타나게 된 배경과 그에 대한 해법으로 대두된 이탈리아의 연방주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이탈리아의 연방주의는 ‘북부동맹’(Lega Nord)이라는 정치정당의 전략과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993년 이탈리아 고위 정치인, 산업, 재정가, 마피아 상층부 까지 연루된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면서, 북부동맹은 이른바 ‘북부문제’를 제기 하였다,
    인문/어학| 2009.05.06| 3페이지| 1,500원| 조회(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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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의 역사
    고대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이다. 이 옛말은 아직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발길을 이탈리아로 끌어들이고 있다.연간 이탈리아를 찾는 관광객의 수는 국민의 수와 거의 같은 약 5000만 명 정도로 단순히 길이 좋아서 이탈리아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이탈리아는 중세의 건축물이 숨 쉬는 북부의 밀라노를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 신들을 쉼터인 신전이 남아있는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이르기 까지 역사를 간직한 생활 속의 박물관인 이탈리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1.이탈리아의 정치이탈리아의 정치는 기독교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연립내각이라 말 할 수 있다.1946년 6월 2일 공화제와 군주제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법제상의 국민 투표와 여성이 참정한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1947년 12월 이탈리아는 공화제로 바뀌게 되었다.공화정으로 국가형태가 바뀐 후 기독교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유지되었으며,1948년의 헌법에 의해 상하 양원제의 의회를 창설했다. 하원은 630명으로 구성되며 ,상원은 선출인원 315명과, 종신의원으로 구성되며 독립된 사법부를 두고 있다.이탈리아의 사법 제도는 로마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나폴레옹 법전과 훗날의 법령에 의해 수정된 법체계를 바탕으로 하였다행정부는 총리를 우두머리로 하는 내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통령은 7년 임기로 의회와 소수의 지역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총리를 지명하고 총리는 장관들을 추천하는데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이들을 임명할 지명권과 국회의 해산권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지위이다.총리가 주축인 내각은 원외 전문가출신 일부 장관들과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하 양원의 신임을 유지해야 한다.의회의 의원들은 보통 직선제로 다수제와 비례 대표제가 혼합된 제도에 따라 선출된다. 1993년에 제정된 법령에 따라 의석의 75%는 한명씩 뽑는 선거구를 통해 채워지고 나머지 25%는 정당 비례에 따라 배분된다. 하원에는 . 북대서양조약기구인 NATO에도 가입하고 있다. 영국과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와는 주로 이민에 의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민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나가 있지만 남아메리카가 압도적으로 많다.2).군사이탈리아의 국방상의 최고정책은 최고국방회의에서 심의를 한다. 행정면에서는 국방성에 장관, 정무차관 3명을 두고 그 아래 육군부·해군부·공군부가 있다. 이전까지 이탈리아도 1년간 의무병제였으나, 2005년부터 지원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여성의 직업군인체를 채택하였다.2.이탈리아의 경제이탈리아의 경제는 예측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제’라고 부른다.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에 이은 제2의 농업 생산국으로, 2차 세계 대전 전까지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 발전이 늦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탈리아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토지소유의 확장을 제한하였으며 법률로 규정된 한도 이상의 소유지는 정부가 사들여 소농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으로 토지세분화가 진행되어 기대한 만큼의 생산성 향상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2년 농업발전 12개년계획, 1960년 농업발전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으며 계속해서 농업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1950년대 초반까지 경제구조는 기본적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유지(GDP의 20%)되었으나 점차 그 비중이 낮아지고 있어 2005년에는 GDP의 2.1%에 불과하다. 생산 활동 인구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5%(2001) 정도이다. 농가 수는 250만 가구이며, 경지면적은 1320만ha로 국토 면적의 43.8%를 차지한다. 2003년 농업 무역수지 적자는 74억 유로에 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육류·채소류·과일·포도·사탕무·감자·콩·밀·곡류·올리브·유제품 등이며 특히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주요 특산물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곡류·가축·육류 등이고 주요 수출 품목은 포도주·가공식품·과일·채소류 등이다.1).광업이탈리아는 광물자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양이 부족모 사기업인 자동차공업의 피아트, 고무공업의 피렐리, 사무기기의 올리베티사 등이 과점적(寡占的)) 체제를 갖추고 있다.황금의 사각지대라고 불리는 밀라노, 트라노, 제노바 일대의 북부지대에 밀집 하여 섬유, 금속, 섬유, 화학, 전자, 자동차, 섬유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주요 에너지원으로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반면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반영하는 많은 수공업 중소기업도 지금까지 존재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국내 경제안정에 기여한다. 중소기업은 각종 기계(공작, 목 가공, 섬유, 석 가공, 요업, 농업), 섬유, 식품, 잡화, 공예품, 가구, 피혁가공, 귀금속가공, 염색, 디자인 등의 생산을 담당하며 전체 기업수의 98%, 총매출의 75%를 차지하고 있다.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량의 75%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이탈리아는 유럽경제통화연맹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긴축된 재정 정책을 편 결과 낮은 이율과 물가 상승률에 힘입어 1999년 유로화의 첫 도입 당시부터 이탈리아 역시 유로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3).무역자원이 부족한 이탈리아는 원료를 수입하여 완성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국이다. 수출상품은 철강·석유제품·기계류·비료·플라스틱·합성섬유 등 모든 부분에 이르며 그 대부분이 공업제품이다. 그중에서도 자동차·기계·베어링·사무기기·자전거의 수출이 주종을 이룬다. 무역상대국은 주로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이고, 나라별로는 독일이 1위이며 프랑스·미국·에스파냐·영국·네덜란드·스위스 등도 교역량이 많다. 최근에는 헝가리 등 동유럽국가 및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가들과의 교역이 증가하고 있다.2005년 교역규모는 수출 3719억 달러, 수입 3692억 달러였고, 주요 수출품은 엔지니어링제품, 섬유의류, 생산기계, 자동차, 교통장비, 화학제품, 식품, 기계금속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엔지니어링제품, 화학제품, 에너지제품, 석유의류, 기계류, 식장은 활발하나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자본시장과 주식시장은 낙후되어 있다. 투자신탁회사의 발달도 저조한 편이다3.이탈리아의 사회1).인종이탈리아의 주민은 대부분이 이탈리아인 이지만, 북부에는 독일과 프랑스계의 소수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혼혈민족이다.대부분의 이탈리아인도 순수한 고전고대 즉 로마인의 후예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탈리아는 일찍부터 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하여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울려진 혼혈민족이다.북부와 남부의 사람들만을 비교해 보아도 혼혈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부지방은 아마빛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남부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우리 아시아계 사람들과 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이탈리아는 혼혈민족이지만 국민성은 매우 낙천적이며 외향적이다.2).언어이탈리아는 혼혈 민족인 탓에 혼합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이다.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언어가 혼합되어 독특한 방언이 형성된 나라이기도 하다.현재 이탈리아의 표준어는 토스카나 방언을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이전에는 서로간의 방언만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정부차원에서 언어교육을 실시하여 의사소통은 가능해 졌으나 아직까지 일상생활에 쓰이는 방언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3).종교이탈리아에서는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교도이고, 그중 1/3 정도가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한다. 그밖에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결혼·장례식 등은 교회에서 올리는 것이 보통이며 가톨릭교는 이탈리아인의 생활·습관 속에 깊이 파고들어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정치적·경제적 면에서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반영한다.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물질적·정신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다.가톨릭교회가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탈리아 민법도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1970년 12월 이혼법이 성립되었다. 1929년 국교로 인정된 가톨릭은 1984년에 그 지위를 상실하였으은 피해를 법보다는 가족과 친척에게 호소하는 것이 빨랐고 그들의 피해는 정복자의 수중에 있는 공권력에 호소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범죄였다. 이것이 이탈리아 통일 후 시칠리아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집단화되어 마피아의 등장 배경이 된 것이다.마피아 규범의 첫째 조항은 법 집행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과 재산을 지키고 항상 비밀을 지키는 것이다. 처벌 받은 범죄자들은 복수를 하거나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수를 부탁하는 것도 시칠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탈리아 마피아 단체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래된 것은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로 ‘우리들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사 노스트라는 시칠리아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마피아 중의 마피아로서 전 세상을 재패하는 마피아의 본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농장의 대지주와 유착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성장했으나 전후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군림해 왔다.4.이탈리아 문화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에도 문화적·사회적인 지역주의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풍요로운 북부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남부를 멸시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후 산업개발, 외국과의 교류강화, 텔레비전 등 언론매체에 의한 자극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떨어져 관심이 약화되고 있고 전통적인 문화보다는 전위적인 예술이 성행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1) 문학과 예술이탈리아는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발전의 전진기지였다. 문학의 위대성은 14세기의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를 통해 꽃피었고, 아리오스토와 타소 이후에 형식주의를 거쳐 비토리오 알피에리, 우고 포스콜로, 알레산드로 만초니, 자코모 레오파르디 등을 통해 낭만주의가 발전했다. 20세기에는 이탈로 스비보 등을 위시로 현실주의를 추구하여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문학에 표현하고자 했다.시각예술에서는 조토,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베르니니, 티에폴로 등의 위대다.
    생활/환경| 2009.05.06| 8페이지| 1,500원| 조회(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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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정시기의 여성운동
    미군정 시기 여성운동- 공?사창제의 폐지운동-★과목명: 한국자본주의 발달사★학과: 사학과★학번:0600081★이름: 권보라★담당교수: 홍순권 교수님★제출일:2008년 12월15일 월요일머리말해방 후 미군정기의 경제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발표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여성운동에 관한 것을 다루고자 한다. 미군정기의 여성운동이란 바로 ‘공창폐지’운동으로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는 불법성매매를 없애기 위한 여성들의 운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원래 공창제도는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법이 아니라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유곽은 원래 일본에서 생겨난 공인 집창촌을 뜻하며, 국가가 매음 업자를 일정한 장소에 모아 보호·관리하는 것을 공창제 라고 한다.일제식민지를 겪으면서 공창제가 한국에 유입되었으며, 해방 후 미군정 시기 여성운동자들에 의하여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미군정의 정책 실행이라는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1.미군정기 여성의 실태와 여성정책미군정기 전반을 통하여 생산의 위축, 인플레이션을 통한 급격한 물가의 상승과 실질임금의 저하, 극도의 식량난으로 경제상황은 열악한 상태였으며,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상태 역시 열악하였다. 여성들은 전반적인 무권리 상태와 남성에 비하여 문맹률이 높았다. 1944년 여성의 95%정도가 미취 학자였으며. 47년에도 여성의 87%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취 학자였고, 여성들을 얽매는 봉건적 인습의 지속도 여전한 상태였다.이런 상황 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여성들은 미군정에 대한 기대가 높았는데, 해방으로 일제식민지 착취구조의 최하층에서 소외받고 있던 여성들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과 동시에 자본주의과 가부장제에 의한 이중 삼중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로 인정이 되었던 것이다.미군정은 당시 여성들의 요구를 외면 할 수 없었다. 미군정 시기에 여성들에 대한 몇 가지 정책을 내놓았는데 대표적인 여성정책은 여성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 공창제 폐지, 교육정책의 개혁에 따른 여성교육기회의 부녀계가 설치되었다. 부녀국의 직능 및 임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있었으나 여성에 대한 계몽활동이 주 활동이었다. 부녀국은 출판활동으로『새살림』을 발간하면서 여성계몽에 대한 활동을 다양화해갔으나, 여성운동단체들을 부녀국에 등록할 것을 꾀해 가면서 부녀국의 활동은 결국 우익여성운동단체의 지도와 지원, 좌익여성운동단체에 대한 탄압의 매개 고리가 되기도 하였다.여성참정권의 실현은 미군정기 여성의 법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19487년 3월17일에 공포된 법률 175호 ‘국회의원 선거법’에 근거한 것으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참정권의 부여가 여성들의 제반 법적 지위의 개선이라는 전반적인 목표에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미군정의 정책 중의 하나로 교육정책의 측면에서 교육기회의 확대와 균등화의 실현이라는 교육개혁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여성의 교육기회가 부분적으로 확대되었다. 공창제의 폐지는 일제시기부터 여성계의 주요 요구중의 하나였으며, 해방직후 좌우익 여성운동단체가 모두 공사창제의 완전폐지를 주장하였다.2. 미군정하 공사창의 실태1)공창의 실태해방이후 공사창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상륙한 서구의 개방적인 성문화로 요정이나 술집들의 증가와 퇴폐적인 성풍속이 사회에 만연하였으며, 수요의 급증에 따라 공사창의 수는 증가하였다. 특히 미군병사만을 상대로 하는 창기집단이 생겨나는 등 여성들의 성의 상품화 현상은 가열되고 있었다.공창들의 창부가 된 동기는 빈곤으로 인하여 창부가 된 자, 부모의 사망 등으로 인하여 창부가 된 자, 유혹 혹은 기타로 된 자, 부모가 팔아서 창부가 된 자 등등 다양한 동기가 있으나,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창부가 된 사람이 제일 많았다. 창부의 연령은 19세부터 45세였으며, 공창업에 종사한 연수를 보면 최고가 18년을 한 사람이었으며, 이들은 경제적인 빈곤으로 창부가 되어 창기유직에 의해서 여전히 출입이 제한되고 포주에게 인신 구속되어 증하였다.사창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기생에 대한 대대적인 신체검진에 나서는 등 단속을 강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창들의 수효가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통하여 사창의 대부분이 비공식적으로 매매춘 행위를 하고 있었으며 상당수가 성병에 감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947년 서울시 보건위생국의 검진 걸과) “1947년 9월 서울시내 기생, 여급 등 접객업자에 대한 검진에 의하면 총 수진자의 43%가 보균자로 판명되었으며 기생 수진자 400명중 보균자는 30%, 여급작부 900명중 임질은30%, 매독은 20%가 보균자로서 총수진자1727명중 보균자는 767명이다”고 나타나 성병의 만연이 상당히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다. 이에 당국은 기생검진 방침과 검진 확대에 대해 기생측은 상당히 강경하게 대응할 태세를 보였으며,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였다.3.공사창제 폐지의 경과와 여성운동1)미군정기 공사창제 폐지운동의 경과미군정기 공창페지 운동은 해방 직후 여성단체의 결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방후 여성단체가 활발하게 결성되면서 다양한 여성운동의 목표와 행동강령을 제시하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성단체는 공창만의 폐지가 아닌 공사창제의 동시적인 폐지를 주장하였다.미군정하 공?사창 폐지에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초기에는 좌익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이었다. 1946년 5월17일 군정법령 70호로 [부녀자의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의 금지]를 발포하였다. 군정청의 인신매매금지법령이 발표되자 사회단체는 물론 당시의 각종 일간지들도 이를 모두 공창제 철폐로 받아들여 크게 환영하면서 공창이 폐지되었다는 기사를 좌우익 신문 모두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이와 같이 군정법령 70호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혼란스럽게 전개되자 1946년 5월28일 미군정은 법령 70호가 노예적 인신매매를 금지한 것이고 공창 폐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이에 언론과 여성단체, 사회단체는 실망스러운 의사를 표명하였고마 제공하였지만, 대부분 무지한 창녀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오히려 법령의 발포로 공창을 운영하던 포주들은 공창의 사창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게 되었다.)여성단체는 좌우익을 망라하고 더욱 대대적으로 연대하여 1946년 9월 10일에는 독립노동당 부인부 발기로 부총, 여자국민당, 애국부녀동맹,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종교부인 각 단체 등 좌우익여성들이 합동해서 ‘부녀단체 총 결속연맹’을 만들어 폐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여성단체들의 공창폐지 주장이 더욱 높아졌지만 미군정은 즉각적인 조치를 내리지 않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군정 점령국이었던 일본의 경우 공창폐지 법령이 신속하게 처리되었던 것에 비하면, 이해 할 수 없는 측면이다.이렇게 공창폐지 법령이 지연됨에 딸 사회상은 더욱 혼란스러워 졌다. 여성단체는 공창 폐지를 주장하난 사회일각에서는 성병의 만연이라는 우려를 내세워 공창의 존속이 오히려 바람직하는 견해를 내세우기도 하며, 포주들은 더욱 극성을 부려 공창의 수가 오히려 증가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사회전반에서 공창폐지에 대한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미군정도 더 이상 지연 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공창폐지법은 1947년 8월 22일 입법의원에서 통과되었고, 1947년 11월 14일 입법의원에서 제정하고 군정장관이 인준한 형식을 취하여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7호로서 ‘공창제도등폐지령’으로 공포되었다. 폐지령은 11월에 제정되었으나 시행일은3개월 후로 연기되었고, 즉각적인 실시가 아닌 3개월 후로 연기된 상태의 공창폐지법을 둘러싸고 실시를 연기하려는 포주들의 로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4.공사창제 폐지와 여성운동공창제 폐지가 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때까지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해방이후 좌우익 여성단체는 공사창제의 존속을 조선 여성이 당면한 여성문제들 중 중요한 하나의 문제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대응, 활동을 하는 양상을 보였다. 해방직후 좌익여성단체들이 공창폐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우익 여성단체는 성 초기 적극적인 활동을 펴 나갔다. 1946년5월17일[부녀자의 인신매매 및 매매계약 금지]법령이 공포되기 전인3월6일 “공사창제 폐지결의문”을 제출하였으며, “인간을 상품화시키고 부녀를 모독하며 부녀해방을 저해하는 큰 죄악‘인 공?사창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인신매매금지 법령은 공창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법령 공포 후 공사창이 급증하자 부총은 정당, 사회단체, 유지등 30여명을 초청하여 공사창제 대책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1946년8월10일에는 좌우익여성단체 14개가 합동하여 ‘폐업공창구제연맹’을 만들어 운동을 전개해 갔으나 좌익의 탄압과 부총의 약화로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우익여성단체들은 해방 직후 공창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좌익여성단체의 활동이 위축되어가면서 우익여성단체는 조국건설을 위한 계몽 외에도 공창문제에 대해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6년11월15일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은 미군정과 과도입법의원에게 제출한 건의문5개항을 통하여 창기를 폐지하고 신성한 사회법규를 제정 발표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우익단체였던 독립촉성애국부인회)경우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우익여성단체의 소극적인 관심에 진행도던 공사창제의 폐지 문제는 좌우익이 연대하여 결성한 ‘폐업공창구제연맹’의 활동으로 이어진다.2) ‘폐업공창구제연맹’의 활동과 여성단체의 연대‘폐업공창구제연맹’은 인신매매 금지령이 발표된 뒤 오히려 공창이 늘어나자 1946년 분열되어있던 14개의 좌우익 여성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되었다. 창녀갱생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이 연맹에는 여자국민당. 애국부인동맹, 불교부인회, 천도교부인회, 대한독립촉성 애국부인회, 부녀총동맹, 여자기독교청년회, 성병예방협회가 참여하여 8월10일 결성하였고, 위원장으로 독립노동당 부인회장인 김말봉을 선출했다.폐업공차구제연맹의 활동은 재원을 마련하여 창기 수용소를 만들고, 갱생에 필요한 교육 및 성병 치료를 위한 의료기관의 도움 등의 마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나 실제로는 다.
    인문/어학| 2009.05.06| 6페이지| 3,000원| 조회(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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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남녀 엿보기
    학번:0600081학과: 사학과이름: 권보라담당교수: 신태갑제출일:2008년 5월 30일 금요일이중톈 교수가 지은 중국 남녀 엿보기라는 책을 신청하고 읽게 되었는데, 책의 내용이 알차고 재밌었다. 책 제목에서부터 나오듯이 중국의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부부이야기, 가족이야기, 결혼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는 책 이다.이 책은 총 8개의 큰 주제로 나누어 놓고, 다시 8개의 큰 주제 안에 소주제를 4개씩 나누어 서술하고 있었다.제 1장은 중국남자 엿보기, 2장은 중국 여자 엿보기, 3장은 중국인의 성(性)엿보기, 4장은 중국 부부 엿보기, 5장은 중국의 첩 엿보기, 6장은 중국 창기 엿보기, 7장은 중국의 애인 엿보기, 8장은 중국의 음담패설 엿듣기라는 주제로 이루어져 있었다.8장에서 1장의 중국남자 엿보기와 2장의 중국여자 엿보기는 처음에 “이거 뭐니?”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1장의 내용은 중국 남자들에 대한 것을 적고 있었다. “이거 뭐니, 실망이다.”라고 생각한 것은 이 책에서 나오는 중국남자들의 대부분이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의 남자들이 모두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 뿐 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중국 남자에서는 영웅호걸들도 있고, 줏대 없는 도덕군자형의 남성도 존재하고 있다.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호걸들은 남성미가 넘치고, 무예를 닦으며, 전쟁터에 나가 싸움을 하거나, 업적을 쌓는 사람으로 나오나 여성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영웅호걸이다. 영웅호걸을 빼고 나서는,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과 줏대 없는 도덕군자형의 남성이 존재하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사람들로 나오고 있다.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은 중국의 경극에서도 자주 보이듯이 여성스러운 외모에, 가냘픈 목소리,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는 여성화된 남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어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고민만을 하는 사람이며, 결혼을 한다고 하여도 언제나 여기저기 휘둘리고, 돈을 잃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나치게 소심하고, 견식이 부족하며, 나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과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 당 고종 이치를 들 수 있다. 그는 황제의 신분이면서 국사를 아내인 측천무후에게 모두 맡겼다.당 고종 이치와 달리 책임을 지지 않는 인물로 당나라 원진의 전기소설 『회진기(會眞記)』에 나오는 장생을 들 수 있다.이 사람은 전형적인 위선자로 겉으로는 도덕군자인양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나, 최앵앵을 보자 혼이 나갈 정도로 자제력을 잃었고, 온갖 계책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녀를 손에 넣고, 그녀가 자신에게 몸을 허락한 뒤에는 그녀를 버렸으며, 자신의 행위를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이런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을 사랑하는 내용의 문학작품이 중국에는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인들 역시 이런 내용을 매우 좋아하는 이유는 평소에 남자를 보호해야 하는 여성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분신’을 보았으며, 평소에 남성에게 학대와 수모를 당했던 여성들은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들을 보면서 ‘희망’을 보았으며, 남자답지 못한 남성들은 전도된 역할에서 ‘자기 합리화’의 위안을 찾았던 것이다.중국남성의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들이 대부분 이었다면, 중국의 여성들은 이런 유약한 남성을 데리고 살아갈 생존력이 강하고, 강인한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이런 여성들의 대한 것으로 2장에서는 여러 종류의 여성들을 구분해 놓고 있다. 현모양처를 강요당한 여성, 약한 여자와 맹렬 여성, 음란한 독부와 정절의 열녀, 귀여운 여자와 말괄량이, 20세기의 신여성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고 있다.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남성을 데리고 살아가려면 여성은 강인함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강인함은 울룩불룩한 힘이 아닌, 생존력과 정신력이었지만, 중국 남자들에게 비추어진 강인한 여성을 맹렬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맹렬여성은 여성으로써의 매력은 전혀 느낄 수 없으며 우락부락하고, 힘이 무지막비하게 강하며, 남자를 휘어잡는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중국 고전 속에 등장하는 맹렬 여성은『수호전』에 나오는 고 대수, 손 이랑을 들 수 있다.그녀들은 강호를 휩쓸고 다니면서 살인, 방화를 밥 먹듯 저질렀으니 맹렬여성이라는 것이다.고 대수의 별명은 ‘암 호랑이’라는 뜻의 ‘모대충’으로 굵은 눈썹에 큰 눈, 통통한 얼굴, 굵은 허리를 지녔으며, 바느질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몽둥이와 창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싸움이 붙으면 20~30명의 장정도 덤비지 못했으며, 화가 나면 우물가의 난간을 빼어들고 남편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 대수에 이어 손이랑은 ‘여자 귀신’이란 뜻의 ‘모야차’로 도적 집안 출신 이었다. 아버지의 재주를 이어받았으며, 객점을 열어 객상을 범행대상으로 삼아, 마취약이 든 술을 먹여 기절시키고, 옷을 벗긴 다음 큰칼로 살을 도려내고, 크고 좋은 살을 황소고기로 속여 팔았다. 손이랑 역시 생긴 모습은 고대수와 비슷하게 생겼다.이렇듯 강인한 여성을 맹렬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은 이런 맹렬여성은 많지 않았다. 다들 현모양처를 강요당한 약한 여성들이 대 다수였다. 현모양처를 강요당한 여성은 절대로 음란해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음란하다고 여겨질 경우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국여성들은 우유부단하고, 도덕군자형의 남성들에게 언제나 현모양처임을 강요당하여야 했다.이렇게 여성들이 남성들의 억압을 받는 이유를 중국의 고대로 올라가 설명하고 있다. 예전에는 여성들을 매우 신성하게 생각하여, 여성을 숭배하는 것이 여성의 음부 의미하는 잉어를 숭배하거나, 여성의 다산을 의미하는 개구리를 숭배하였다. 모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아주 높았으나, 점차 부계사회로 가면서, 여성은 점차 남성들에 의해서 억압받는 존재가 되었고, 집안에서 가사일 만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남성들이 만들어낸 ‘예법’에서는 여성을 합리적이라는 방법아래에 억압하고 졸라매는 형태가 되었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복종해야 하며, 음,양 이라는 것을 만들어 하늘은 남자를 상징하는 양으로, 땅은 음으로, 해는 양으로, 달은 음이라는 이치를 만들어 더욱더 여성들을 속박하였다.개구리 여신의 형상을 하던 여와가 뱀의 형상으로 바뀐 것을 보면 부계사회가 얼마나 여성에게는 억압적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그 예로는 한나라 그림에서 개구리 여신 여와는 남근을 상징하는 뱀 형상의 복희와 서로 꼬리를 감고 있는 것인데, 뱀 형상의 출현은 생식 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뱀이 상징하는 남성생식기는 중요한 무기로 작용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남성들은 그것으로 여성을 정복하고 점유한다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라 말을 하고 있다.이렇게 중국의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서는 남녀의 결합이라고 불리는 결혼에 관한 내용을 적고 있다. 결혼과 관련된 절차와, 중매쟁이의 중요성, 결혼 후 여성의 지위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정실부인이 아닌 첩에 관한 이야기들을 4장에서 5장까지 하고 있다.우리는 흔히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중매로 결혼을 하였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도 한 결혼은 꼭 가문을 보고서 한 것도 있는가 하면, 자식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중매를 서서 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늘날 까지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며 평생을 함께 사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요즘은 살다가 맞지 않으면 이혼을 너무도 쉽게 하는 세상이긴 하진만 말이다.
    인문/어학| 2009.05.06| 4페이지| 2,000원| 조회(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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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말 전제개혁과 과전법
    고려 말 전제개혁과 과전법의 성립1.전민변정사업의 추진고려 말 토지제도가 와해되고, 농장이 발달하면서 사회?경제적 폐단이 발생하였다. 농장의 발달은 토지와 인구의 집중문제가 발생하여, 정부는 토지와 인구 두 가지 측면에 관한 대책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전민변정사업 이었다.전민변정이란 부당하게 농장에 들어간 토지는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농장민은 공민으로 만들어 공역을 부과하게 만들고, 과다하게 보유하는 사전을 환수하거나 조세를 부과하며, 고리대를 제한하여 일반농민이 농장민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농장을 혁파하고, 공역 부담 민과 공세 부과 지를 확보하여 재정을 넉넉히 하려고 하였다. 전민변정은 판도사, 도관, 지방관을 통하여 주진하기도 하였고, 별도의 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추진하였는데, 공민왕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최초의 전민변정은 농장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자겸 몰락 후 토지의 반환 조치와 명종18년 향읍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경인의 농장을 파취하고 서울로 돌아오게 한 일이었다.도감설치에 의한 정민변정은 무인집정이었던 김준의 몰락 후에 실시되었는데, 원종 10년 2월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궁원?사원?양반?군인?한인의 세전으로 권신에게 빼앗긴 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병량전에 소속시켰으나, 주인이 아닌 자에게 지급되어 시정되었으나 토지와 노비는 국고에 환수되거나 다른 권력자에게 들어가게 되었다.충렬왕 때에 전민변정은 극히 소극적이고 부분적으로 추진되었으나 왕의 무관심과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충선왕에 의하여 전민변정이 취해졌다.1298년 정월에 즉위한 충선왕은 즉위교서를 통하여 정치?경제?사회?종교에 관한 폐단을 광정할 것을 명하면서, 폐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고위직에 오른 신흥권력층을 지목하였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인사와 지방행정의 체계를 문란 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수사와 탈점으로 공신전?경기8현전 등 내외의 전정과 관노비를 차지하고,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어 농장경영에 동원하여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만드는 존재로 파악하였다.충렬왕은 사림원을 설치하여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세가의 토지를 공전으로 만들고 도망한 호를 공호로 삼았다.충렬왕이 퇴위하고 개혁이 중단되었으나, 충숙왕이 즉위하고 나서도 사회경제적 모순을 시정하려 노력하였다.충숙왕은 각도에 전민계정사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였고, 채홍철을 5도순방계정사로 삼아 공부를 다시 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갑인주안이 만들어졌다. 갑인주안은 양전을 통하여 파악한 전정의 점유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수조지의 점유관계가 정리되었다.충숙왕 5년에는 제폐사목소를 개편하여 찰리변위도감을 설치하였고, 규정액수 이상의 공신사전을 환본하도록 하였고, 사심관의 인민과 토지를 몰수 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으나, 충선왕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충목왕은 정치도감을 통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정치도감은원제의 명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 토지 탈점과 압량위전, 고리대 등의 농장폐단과 수조관계의 문제를 큰 개선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각도에 정치관을 파견하여 양전을 시행하였고, 토지 탈점자를 찾아 징벌하기도 하였다. 정치관이 정동행성에 투옥되면서 정치도감은 두 달 만에 중단되었다.정치도감에서 활약한 인물은 4명의 판사와 34명의 속관으로 가문의 배경없이 과거를 통해 진출한 사람들로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식견과 기개, 합리주의적 공정성을 지닌 인물들 이었다. 이들은 고려사회의 모순과 혼란을 야기하는 주체로 ‘환관 족속과 권세지가’를 지목하였고 이들을 구치하려 하였다.정치도감은 당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시정방향을 제시 하였으나, 원제의 명령으로 추진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2.전민변정사업의 한계전민변정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장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극복되지 않고, 악화되어 갔다. 전민변정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첫 번째. 당대의 최고 권력층이던 농장주의 저항이 강력하였다. 농장주들은 농장 혁파를 반대하였는데, 그 사례로는 충렬왕 5년 도병마사가 경기의 사급전을 직전으로 지급하자고 건의하자, 사전을 많이 가지고 있던 송분 등이 반대하여 경기 8현의 사전을 제외시킨 일, 충선왕 2년 양전을 하여 공부를 증가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점거한 토지가 관에 들어 갈 것을 염려한 재추들이 논의를 중단시킨 일이 그것이다.또한 농장 혁파 관을 탄압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충목왕 시절 정치관이전 녹사 조광을 이 노비를 탈취한 좌정승 노책을 궁치 하다가 오히려 노책에 의해 녹사 적에서 제명당한 일이 그것이다.두 번째. 추진세력의 미약한 점이었다. 전민변정을 추진한 세력은 국왕과 신진관료였다. 국왕은 권세가의 토지탈점을 견제하고, 국용을 확보하기 위하여, 신진관료들은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입지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의 주체는 국왕이었는데, 왕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적대적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변정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정되었기에 왕의 측근세력은 비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입장과 국왕의 입장은 대립되었고, 결국 정치 세력사이의 대결양상이 나타났다.충선왕이 사림원을 설치하고 농장의 폐단을 제거하려 할 때의 대상은 충렬왕의 측근세력들이었고, 추진세력은 충선왕에 의해 발탁된 신진관료로 충선왕의 측근세력이 되었다.거세 대상이 된 충렬왕은 원을 끌어들여 복위하였으며, 충선왕의 측근세력인 신진관료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세 번째. 원의 간섭이 개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원은 고려의 사회모순이 극대화되면 지배에 불리하기 때문에, 사회모순을 방치하지 않았다. 원은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응방을 혁파하고, 소속 전지와 노비를 환급하였다, 원은 부원세력을 비호하면서, 그들의 경제기반인 농장을 혁파하는데 방해를 하였다. 그 예로는 충목왕 3년 정치도감의 명령에 의해 환자와 호강자의 전장을 철폐했다는 이유로 밀성부사?여흥부사?서주부사를 이문소가 투옥한 사실을 들수 있다.정민변정의 한계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세 가지의 한계점 말고도 고려 말의 혼란한 사회와 경제적 불안으로 정민변정은 그 내부에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전민변정을 추진한 개혁세력들은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모순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려 하였고, 토지지배관계의 측면에서 전민변정을 소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농업생산력의 발달이라는 현상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원간섭이라는 가장 큰 방해 요인이 제거되어 권세가가 겸병한 토전을 검괄하여 군수에 충당하고 세를 거두면서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혁세력은 몰락하고 보수무장세력이 대두하면서 개혁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보수무장세력은 홍건적 평정에 대한 포상으로 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고, 왕권을 약화 시켰으며, 토지문제를 악화 시켰다. 권력을 장악한 무장 세력은 경제기반을 확대하면서 전민변정을 방해하였으며, 사전의 폐단은 더욱더 심해졌다.3.전제개혁 논의와 과전법의 성립원 간섭기와 공민왕대를 통하여 주진된 전민변정 사업은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토지문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고려정부는 수습능력을 상실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토지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로 인하여 전제개혁을 추진되었다.조준의 개혁안이 사전개혁논의의 기폭제가 되었는데, 조준은 토지국유의 원칙하에 전국의 토지를 국가수조지로 편성하고, 수조권만을 분급하고, 사전을 혁파하여 수조지의 사전화를 방지하는 데 역점을 둔 개혁안을 제줄 하였다. 이 개혁안으로 인하여 사전구폐 법에 의한 논쟁이 일어났다. 현재의 사전을 일거에 폐지해야 한다는 전면적 개혁론의 입장과, 현존하는 사전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발생하는 폐단만 제거하자는 부분적 개선론자들의 입장이 대립하였다.부분적 개선론자들은 사전 자체는 본조의 성법으로 일거에 혁거하거나 가볍게 고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폐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농민층의 피해만 제거하면 사전의 폐해가 처리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나의 소 경전에 여러 명의 점유주가 있는 것을 문제로 삼고, 사전점유의 귀속관계를 분명히 하여 일전일주의 원칙을 확립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들은 전민변정을 보다 강력히 시행하자고 주장하였다. 사전 개선론자 들은 개혁론자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사전 혁파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였다.개선론의 대표자이던 이색은 고려 왕조의 명분질서의 확립과 윤리도덕의 확립에 두고 실현하는 방법이 개개인의 윤리도덕 문제로 접근하고자 했다. 경세론은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고, 군신?부자의 명분을 중시한 춘추를 중요하게 여겼다.전면적 개혁론자들은 수조지가 사적으로 세전되고, 사사로이 받아 겸병한 사전을 혁파하고, 수조지를 재분배 할 것을 주장하였다. 직역담당자를 통하여 토지를 지급하고 국영담당자가 아닌 자가 토지를 받는 상태를 개혁하고, 토지의 점유는 본인 1대에 한하고 사사로이 수수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가산화한 사전의 영구적 폐기를 도모한 것 이었다. 개혁론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도전은 고려 지배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차원에서 현실 모순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하였고, 사회의 제 관계를 중시하여 제도개혁을 주장하였고, 주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개선론자들은 사전분급지역을 경기에 한정하는 안에 반대하다 관철시키지 못하다 경기에서 받지 못한 부족액만큼은 외방에서 받게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하였고, 사전을 외방에 설치하려 했다. 사전 경기의 원칙은 고수되었고, 급 정도감에서 과전수급대상자에게 과전 지급문서인 전적을 지급하였는데, 사실상 과전이 지금된 것이었다. 1391년 5월 과전의 지급과 관리에 관한 기본법규가 공포되어 과전법이 성립되었다.
    인문/어학| 2009.05.06| 5페이지| 1,500원|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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