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iting for Godot“(고도를 기다리며)뭔가 약간은 우리의 일상과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또 약간은 몽환적이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연극이 내 일상생활에서 문득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Estrogon과 Vladimir의 Godot를 기다리는 행동들을 내 모습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우리가 이 연극을 보고, 또는 희곡을 읽고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바로 “Godot”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것 일 것이다. 극중에서는 단 한번도 Godot의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언급을 해 주지 않는다. 극을 보는 내내 옆의 친구들과 Godot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극에서 힌트를 주지 않는 만큼 아이들의 의견도 다양했고 모두가 다 그럴 듯 한 말들이었다.수업시간에, Godot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어왔다고 배웠다. 그의 이름이 “Godot"라는 것에서 착안한 듯한 ”GOD"이라는 주장, 또는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주장, 희망 또는 자유라는 주장,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라는 주장 등 그 어느 하나 맞다, 또는 틀리다라는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평범한 두 늙은이, Estrogon과 Vladimir는 나무하나 놓여있는 곳에서 늘 Godot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들은 Godot가 오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희망하나로 지루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지루함을 덜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기억도 하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늘 지루한 일상이기 때문이다.작가는 그들도, 심지어는 작가 자신조차도 모르는 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린다”라는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에 숨어 들어있는 하루하루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글의 포인트는 바로 그들이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행위를 통해 유추할 뿐이다. 나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아무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대화와 Estrogon의 낮잠과, 그가 먹는 Vladimir의 주머니 속의 당근과, 그들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Lucky와 Pozzo의 등장만이 있을 뿐이다.이 극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웃음을 주고 극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지는 것을 희극적 요소로 막아버리는데, 나는 그러한 기법이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뭔가 모를 공포심을 안겨주는 듯 했다. 나 역시도 그 작품을 보면서 웃어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하를 호령할 듯한 목소리를 가진 Pozzo가 다음날 갑자기 소경이 되어버렸다거나, 개처럼 줄에 이끌려 다니는 동물보다 못한 처지의 Lucky나, 멍청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Estrogon이나, 계속해서 Estrogon에게 고도를 기다려야만 한다고 일깨워주는 Vladimir등 모두가 우스꽝스럽다고 웃어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존재들이다.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너무나 지루한 일상... 어제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여 의미 없이 반복되는 잡담을 나누고, 기억주차 하지 못하는 일들로 하루를 보내버리고 만났던 사람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러한 삶들에 과연 끝은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자면 누군가가 Godot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신뢰감을 부여해 주는 듯 싶다.
내가 가장 먼저 에쿠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된 것은 영화배우 조재현이 수년만에 다시 에쿠스를 공연하게 되었다는 연예 뉴스를 들었을 때였다. 그 때는 에쿠스라는 것이 어떤 연극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뉴스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이 극에서 다이사트라는 캐릭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느 순간에는 나레이터로써의 역할, 그리고 또 어느 순간에는 다른 배우랑 연기를 하는 주인공의 역할, 이러한 중심적인 역할을 해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그가 연극 초반부에 꾸는 사제가 되어있는 꿈은 어느 정도 앨런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다이사트도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앨런 역시 에쿠스의 하나의 사제 역할로써, 에쿠스라는 존재가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정신적 중압감에 못 이겨 눈을 찔러 버리고 만다.이 극에서 에쿠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화 속에 나오는 에쿠스라는 존재 라기 보다는 자폐 적인 자아를 가진 소년이 만들어 내어버린 초자아 적인, 또는 특정인간에게 절대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 무언가 라고 할 수 있겠다.그의 이러한 행동을 만들게 된 외부적인 요인은 아버지, 어머니, 말,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 등이다. 어머니는 기독교적인 신앙에 빠져서 자신의 아들에게 말에 관한 신화이야기를 읽어주게 된다. 아버지의 독선적이고 앨런이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게 하는 행동들이 더더욱 앨런을 그러한 길로 내 몰게 되었다.앨런이 자신이 만든 에쿠스라는 신을 마구간에서 사랑으로 만지다가 후에는 그 말을 타고 신과 한 몸이 됨을 느끼니 제사장보다는 사제나 교주 쪽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다이사트는 앨런의 입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들을 듣고 놀라워하는 한편 욕망이 없는 자신의 결혼생활의 지겨움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현실의 생활이 너무나 지루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면에서 작가는 이 글을 읽는 독자, 또는 이 극을 보는 관객도 다이사트의 지겨움을 같이 느껴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또한, 극장에서 만난 아버지를 보고, 그렇게 권위적이게 보였고 흐트러짐 없이 보였던 아버지가 3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감정으로 인해 이 때까지 아름답고 위대하게만 보였던 에쿠스신도 도대체 뭐였나 라고 하는 의구심이 들었음이 틀림없다.여자친구와 관계를 가지려는 순간에도 에쿠스신은 여전히 앨런의 마음속에서 그의 욕망을 금지하려는 소리를 울부짖는다. 앨런에게 있어서는 이미 아버지라는 권위가 무너져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운 마음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 상태의 앨런에게 에쿠스의 외침은 두려움과 회의감으로 뭉쳐져서 그를 강타해버린다.결국 그러한 두려움은 마침내 말들의 눈을 찔러버리는 것으로 표출되어 버리고 만다. (솔직히 영화에서의 이 장면은 도저히 못볼 정도로 끔찍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마음속에 또 다른 에쿠스라는 존재를 만들며 살고있지는 않는가?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지하고 기대며 또한 억압받고 구속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존재가 자신이 현재 믿고있는 종교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자기 자신의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자아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