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Ⅰ. 청말의 한중관계< 데니(O N Denny)의 '청한론'(China and Korea, Shanghai, 1888)과 묄렌도르프(Paul G von Moellendorff)의 '청한 종속론'(A Reply to Mr. Denny, Leipzig, n.d.)의 논쟁 을 중심으로) >1. 묄렌도르프의 논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2. 데니의 논지 (조선은 자주국이다.)3. 논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한중관계Ⅱ. 1950년대 이후의 한중관계1.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변천과정(1) 한중수교 이전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① 毛澤東시기(1949-1976) 중국의 對한반도 정책② 鄧小平시기(1978-1990) 중국의 對한반도 정책(2) 한중수교 이후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① 한중관계② 북중관계2. 80년대 이후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분석(1) 80년대 이후 중국의 대외정책 기조(2) 오늘날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Ⅲ. 실제 사례를 통한 현재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고찰(중국의 대북핵 정책을 통해)1.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변화(1) 1993년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2) 오늘날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내 시각(3) 오늘날 북한 핵문제의 전개와 중국의 반응2.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정책분석나오면서들어가며1992년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평등한 한중조약을 맺게 된다. 과거 역사에 있어서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약소국에 불과하였지만, 이 수교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무서운 경제발전을 힘입어 다시금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의 군주로 군림하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결과가 초래 된다면 아마도 한국은 또다시 현대판 조공국으로 전략할 지도 모른다.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초로 하여,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하여 중국이 한국에 대한 진정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 한 이 고찰을 바탕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도 모색해 보고자 하여 인사를 드리고 그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할 것이며, 둘째로는 미국 정부에서 주최하는 각종 외교 모임에서 조선 공사는 반드시 중국 공사보다 아랫자리에 앉아야 하며, 셋째로는 미국에서의 제반 외교 업무를 청국 공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참으로 무례하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외교관이 부임하면 먼저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다음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그 다음으로 외교사절단을 찾아가 상견례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외교 모임에서의 서열은 강대국의 순서가 아니라 그 외교관의 부임 일자 순서로 결정된다. 외교 업무는 그 국가의 독자적인 권한이며 기밀이기 때문에 중국과 상의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지난 세기의 구습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다고 데니는 생각했다. 원세개의 폭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외교관의 특권을 이용하여 인삼을 밀수함으로써 엄청난 치부를 했고, 인사에도 간여했다. 그는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의 미녀를 첩으로 들여 살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야반도주를 하면서도 그 현지처를 데리고 갔다.(그 여자는 그 후 유명한 시인인 아들 원극문을 낳았고 그 손자가 바로 원가류로서 노벨 화학상을 탄 그 사람이다.)3. 논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한중관계한중관계의 시발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조선(古朝鮮)과 연(燕), 진(秦), 한(漢)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 이후로 한중과 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다. 그러나 한중 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닌 조공관계라는 불평등한 관계였다. 물론 고구려는 중화질서의 구축에 저항하였고, 고려는 몽고의 침입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역사적 사실이 있으나 결국은 중국의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한중관계는 모두 조공의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러나 청말의 시기는 이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명(明)이 멸망하고 청(淸)이 들어섰을 때 주변의 많은 국가들은 자신들이 명의 대를 잇는 소중화(小강도가 다소 약해졌고 북한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다. 그러나 곧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북한과 유대를 강화했다.(2) 한중수교 이후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1990년대(한중수교이후)들어와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북한중심의 ‘하나의 한국정책’에서 ‘두개의 한국정책’으로 변화했고, 그 무게중심이 점차 한국 쪽으로 더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1999년 이후 다시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남. 북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① 한중관계1992년 한중수교이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괄목한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92년 수교당시 63억 8000만 달러였던 교역량이 2001년 314억 9000만 달러로 5배 급증하였고, 4만 3000명이었던 중국 방문자가 1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문화적인 교류의 증대도 중국에는 “한류(韓流)”,한국에서는 “화풍(華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속화 되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확대, 발전할 전망이다.수교이래 한중관계의 특징은 다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제와 정치 및 군사관계의 불균형 발전이다. 1992년 수교이래 한, 중 교류는 경제, 정치, 군사 부분을 거쳐 전면 협력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즉 경제적인 측면의 교류가 활성화 된 이후,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정치, 군사적 관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불균형적인 발전은 중국과 북한 지도부간의 인적인 유대 때문에 북한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중국의 입장과 국제 정치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둘째, 한중관계는 갈등보다는 협력 지향적으로 발전해왔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탈북자 문제, 핵문제 등 분쟁과 갈등의 여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한중관계는 갈등보다는 협력의 확대관계였다. 이는 주변 환경의 안정과 미, 일을 의식한 중국의 전략적 입장과 북한을 염두에 둔 한국의 입장이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수교이래 한, 중 관계는 국제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고자 한다. 이러한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중국에게는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의 대해 당사자 해결원칙을 지지하고 있으나 중, 단기적으로는 통일보다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며, 남, 북한을 동시에 상대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통일에 반대하지는 않으며 통일된 한국이 중국에 적대적인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적당한 시기에 중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일 진행된다면 중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막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 중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째, 중국의 개방개혁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둘째, 통일한국이 중국에 비우호적이 않을 것, 셋째, 외세의 개입이 없이 통일될 것이다.Ⅲ. 실제 사례를 통한 현재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고찰(중국의 대북핵 정책을 통해)위에서 1950년대 이후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시기의 한중관계는 분명 과거의 조공관계와는 다른 평등한 양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과거의 폐쇄적인 후진국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의 중국의 경제는 파죽지세로 성장하고 있고, 자연히 세계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 또한 커지고 있다. 중국은 이제 세계의 강대국이다. 아래에서는 중국이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한반도를 움직이는지 북핵사태를 통해 구체적으로 조명해보겠다.1.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변화(1) 1993년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서론부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북한과 미국과의 대결상황은 10년 전에도 일어났다. 당시는 노태우 정권 말기로 남, 북한 관계가 남북 기본합의서(1992)에 근거하여 급진전될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이때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발전소에서 플루토늄으로 재처리 될 수 있는 사용후 핵연료가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NPT‘외교적 모험주의’라는 평가가 있었고, 일부에서는 북한에 대한 식량과 에너지 공급의 중단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론 북핵문제에 대해 간명하게 요약된 입장을 발표하였다. 첫째,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 둘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유지, 셋째,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다.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요구에는 핵문제가 국제화 되는것에 대한 중국정부의 부정적 입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이러한 원칙론적 입장만 고수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북핵문제가 더욱 국제적 관심사가 되자, 2002년 12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에서 이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북미관계가 ‘건설적이고 동등한’ 대화를 통해 정상화되기를 요구하였다. 2003년 1월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IAEA(국제 원자력 기구) 이사회의 결의문을 지지하였고, 1월 10일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선언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1월 중순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베이징에서 중재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고, 미국에 북한 핵문제는 북미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 문제임을 표명한 것에 대해, 동의하였다. 지난 2월 12일 북핵문제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회부할 것인가의 여부를 묻는 IAEA(국제 원자력 기구) 이사회의 투표에서 중국은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찬성투표를 한 이후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측은 이 결의문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고, 외교적 수단을 통한 목표의 실현을 지지한다는 것을 주목한다. 국제 사회는 마땅히 더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하여 외교적 노력을 지지해야하며, 관련 방면들이 대화를 진행할 수 있도록 조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야한다. 북핵 문제를 복잡하게 해서는 안 된다. 중국 측은 현재 유엔안정보장이사회가 북핵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곧 유엔안정보장이사회에서의 북핵 문제에 대한 제재 처리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 결의문에서 외교적인 수단을 통한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있기 때
晩次樂鄕縣 (만차악향현-낙향현에서 밤을 지새며) ▸ 나의 감상 자꾸 노래와 비교하게 되서 그렇지만, 이 시를 보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도 김광석의 노래이다. 이 시는 김광석의 노래 <불행아>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잠시 김광석의 <불행아>를 살펴보자.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왜 이렇게 흡사한 것일까? 내가 잡은 답은 바로 이 시의 작가 진자앙과 이 노래의 가수 김광석에서 찾았다. 진자앙은 정열과 정의감이 있고, 자신의 주장을 과감히 내세울 수 있는 패기가 있는 관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치고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린다. 그리고 누명을 쓰게 되어 죽게 된다. 이 시는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작가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고 느껴진다. 자신의 신념과 사회의 정의를 위해 그 한 몸을 불태우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그가 뭘 느끼겠는가? 이런 부분에서 김광석의 삶도 일맥상통한다. 김광석의 자살을 두고 약물중독이나 여자문제다는 등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지만, 그를 아는 지인들이 말하는 그의 삶을 보면, 그는 노래 같은 삶을 산 가객이다. 언제나 노래를 위한 열정과 돈이 중시되는 현실에서 고뇌하고 슬퍼했다. 또한 그는 언제나 가난 속에서 힘겹게 노래하는 후배들에게 미안해하고, 그들과 함께 고뇌하였다. 그런 그가 이 <불행아>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진자앙이 말하고자 하는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짧다고 하기에는 길고, 길다고 하기에는 짧은 10개월의 중국 어학연수 기간동안에 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싶었다. 역마살이 낀 팔자는 아닌 것 같지만, 사람 좋아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직접 부딪쳐서 느껴보고 싶었고, 그렇게 생활하였다. 그 과정에서 난 나의 무지함과, 그 무지함이 얼마나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대련대학(대련 개발구의 외곽지역으로 농촌에 가까움)에서 연수를 시작한 처음 1개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단 하나이다. "왜 애들(특히 남학생)이 저렇게 더러울까? 얼마나 게으르면 머리도 안감아!" 하지만, 나의 이런 오해는 중국친구의 기숙사를 방문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중국인 기숙사에는 샤워시설은커녕 온수도 없었다. 60여명이 생활하는 3층에는 고작 화장실 하나가 전부였다. 씻고 싶어도 씻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난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우리가 중국을 바라보는 눈이 이와 같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속내는 보지도 않은 채, 그들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이러쿵 저러쿵 헛소리만 늘어놓지는 않았을까? 난 그 동안에 우리의 모습에 이런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그들을 올바로 바라보아야 할 시기이다. 그럼 무엇을 먼저 봐야하는가? 난 감히 [사람]을 먼저 봐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은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의 모든 산물의 창조자이다. 그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나왔지만, 또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아가는 동반의 관계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도 중국인에 의해 창조되었고, 동시에 중국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왔다.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여왔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현재의 중국을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중국인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중국인과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종종 과거의 명언이나 고사 성어를 끄집어내며 대화를 풀어간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내 중국 친구도 나에게 종종 시가나 고사 성어를 인용하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다. 이처럼 중국인은 역사와 경험을 중시한다. 중국인이 경험을 중시하는데는 유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오경(五經)에 인간생활에 필요한 도리가 담겨있어, 오경을 읽는 것이 필수교양이 되어왔다. 한의학, 바둑의 정석에도 선조로부터 전래된 지혜의 결과가 집대성되어 있다. 현대에는 모택동이 사기와 자치동감을 끼고 살며 현재 중국을 이끌어 가는데 아이디어를 얻었던 모습이나, 등소평이 강조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기초하여 법칙성을 찾는다)', 주은래의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 앞일을 잊지 않으면, 나중에 일을 하는데 스승이 된다.)'같은 언급에서도 공통된 점이 있다.이런 점에서 외국인의 눈으로 중국을 이해한다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약간의 회화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중국에서 생활해 나갈 수는 있지만, 절대로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그들을 이루고 있는 그들의 과거를 먼저 보아야 한다. 그 어느 민족보다도 중국인에 있어 과거의 유산은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들에게서 재현되기 때문이다.영화 '인생'을 보면 노름빚으로 집을 날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왕빠단(忘八蛋)이라고 욕을 하며 화를 내다. 왕빠단은 여덟 가지를 잊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여덟은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의미한다. 그것의 밑바닥의 있는 것은 공자의 도덕론으로, 인(仁:인간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49년 중국이 공산당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어 모든 인민은 평등하다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중국인에게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농촌 어린이의 교육 보장을 위한 희망공정(希望工程)에 동참하는 많은 인민들의 모습이라던지, 낯선 한국 친구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무료로 과외를 해주는 중국친구들에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유교적 도덕윤리가 역사적으로 중시된 결과 법치제도가 쉽게 정착되지 않은 것 등은 그 부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로, 어떤 한 가지 관념이나 신앙 혹은 철학의 학파를 마음속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세우면, 그것과 대립 혹은 모순 되는 형태를 합치시켜 검토한다고 린위탕(林語堂)은 "생활의 발견"에 말하였다. 이는 중국인의 이원론적 발상과 중용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예로부터 전해져온 음양이원론은 모든 사물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려는 것으로, 예를 들면,남녀, 천지, 고금, 동서, 좌우 등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유하고 소유되면서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 단순히 둘로 나뉘었다가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대립. 모순을 거쳐 어떻게 통일을 이루어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이러한 균형감각은 크게 본다면, 1949년 이후 중국이 혁명과 건설, 정치와 경제, 급진과 온건을 서로 엇섞어가며 발전해왔던 것이라던지, 최근의 경제성장에 있어 성장의 가속과 안정을 반복하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모색해 왔던 것이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중국 우공이산(愚公移山)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다. 이는 중국인의 특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성어로, 현 세대가 이루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서 이어가고, 다음세대가 이루지 못한다면, 그 다음 세대가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홍콩의 주권반환에 관한 중. 영 양국간의 교섭에서 1국가 2제도(중국 내에서 50년간은 사회주의의 본토와 자본주의의 홍콩이 공존을 꾀한다는 내용)를 제창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는 중진국 이상 수준에까지 도달한다는 장기적 구상이 이를 뒷받침하는 좋은 예일 것이다.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중국인의 관계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흔히, 중국은 관계(關係)의 나라라고 비꼬기도 하는데, 이는 공식적으론 좀처럼 진행되지 않은 어떠한 일도, 고위층과의 연줄을 이용한다거나, 뒷거래를 하면 부드럽게 해결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중국이 지연과 혈연 그리고 학연 등을 중시하는 연줄사회라는데에 공감을 한다.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한 일본 친구가 여름 방학 중 일시 귀국을 위해 리턴 비자가 급히 필요하였다. 나와 일본친구는 공안국의 외국인 담당자를 찾아가 비자신청을 접수하였는데, 그들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시간을 멍하니 기다리며 다급해진 우리는 왕원장(학교 행정처리자로 공안국의 간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들은 왜이제야 말하자는 식으로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단 1분 만에 비자문제를 처리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힘이다.그렇다면 이런 중국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을 주의하여야 할까? 우리는 그들의 기본적 소양을 반드시 유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중국인은 내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는 아마도 유가의 영향인 듯 하다. 희로애락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바로바로 표현하는 행위는 자기 수양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자연히 감정을 절제하는 되는 것이다. 말을 할 때에도 매우 겸허하고 신중하게 하거나, 우회적으로 돌려서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언제가 내 중국친구에게 "개미"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토론을 시도한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부조리한 사회의 속박에서 과감히 벋어나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개미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 주장의 논점이었다. 난 의도적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을 중국에, 그 주인공 개미를 중국친구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이는 중국친구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말을 아꼈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나에게 다음에 얘기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2일 후 그녀와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 난 그녀의 완곡한 반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토론에서 난 중화사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체면, 즉 자존심을 손상시켰지만, 그 친구는 2일이 지난 후에야 아주 완곡하고 정중하게 내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펼친 것이다. 난 토론의 승패를 떠나서 그녀 여유롭지만 은근한 반격에 한방을 맞은 것이다.
는 강변에 있는 CGV에서 여자친구와 본 기억이 난다. 지금 기억해 보건데, 아마도 왕가위라는 감독의 이름을 보고 무작정 이 영화를 본 듯하다. 영화가 끝나고 영문학도였던 여자친구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질문을 하였었다. "도대체 주제가 뭔데?" 난 중문학도로서 뭔가를 안다는 듯 아주 거만하게 "홍콩 반환을 앞두고 방황하는 홍콩의 젊은이를 통해 홍콩의 정체성을 나타낸 영화"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었다. 하지만 얼마 전의 특강 내용과 변해버린 나의 눈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다. 해피투게더에서 왕가위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두 가지의 강한 의문점이 생겼다. 가장 큰 의문점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장소의 선정이었다.홍콩의 반환을 앞두고 그의 전작 ,들은 모두 홍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왕가위 그 자신의 의도에 여부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영화에서 반환을 앞두고 혼돈에 빠진 홍콩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분명 도 홍콩의 반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영화들과 홍콩의 반환이라는 시대적 배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홍콩의 정반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하였다. 왜 그랬을까?왕가위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시간과 공간의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나 에서 그는 어지러울 정도의 빠른 스피드와 모호한 공간을 통해서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홍콩의 특징을 잘 나타내었다. 그의 그런 시간과 공간에 대한 변조 속에서 본질을 끄집어내는 그의 영화적 재능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에서는 그런 왕가위적 스타일이 전혀 나타나질 않는다. 늘 변하는 그의 변덕처럼 이전의 그의 스타일에 실증이 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스타일을 통해서도 주제를 잘 나타낼 수 있다는 의도적 시도일까?그 진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 사견으론 의도적인 시도인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의도적으로 남들에 의해 규정된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타파한 것 같다. 그런 그의 의도에 걸맞게 의 공간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선정한 것 같다. 세계의 이목이 홍콩에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는 시점에서 전혀 엉뚱한 공간을 선정하므로써 사람들에게 왕가위다움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것이다.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른 엉뚱함을 보였다고 하여서 왕가위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홍콩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장소 속에서도 홍콩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전혀 낮선 이국의 땅에서 소외되어 정처 없이 떠돌며 방황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홍콩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그는 이과수 폭포, 탱고, 음악,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축구, 정열 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홍콩과는 전혀 관계없는 기호들 같이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기호들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아르헨티나라는 공간을 표상화 시키고 나아가 그 속에서 홍콩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있다. 즉, "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이용했지만,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전부는 아니듯이,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추측에 의해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 되는 홍콩을 나타낸 것이다.또 다른 의문점은 그가 왜 동성애 코드를 사용했는가 이다. 그동안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동성애를 소재로 사용한 영화는 대부분 흥행 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왕가위 자신이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과 주연배우들의 명성을 믿고 동성애 코드를 과감히 사용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왕가위답게 새로운 관점에서 본질을 찾아내려고 한듯 싶다. 분명 그는 새로운 장소에서 정상적인 이성간의 사랑을 소재로 주제를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답지 않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낯선 공간에서 이국적인 색채와 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런 그의 의도에 따라 이국적인 사랑을 이용한 것 같다. 비정상적으로 치부되는 동성애를 통해서도 그는 그들의 사랑을 어떤 이성간의 사랑보다도 진실되고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를 보고...는 칸영화제에서 '선전영화'라는 평론가들의 비아냥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장이모가 출품을 철회하여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었다. 고진감래형의 인물 설정에다 고위직 공무원의 호의 같은 요소들이 작품 속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평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장이모 감독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려는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였다고 응수하였고, 결국 이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따낸 덕에 불명예 딱지를 떼어낼 수 있었다.권위있는 한 영화제에서 혹평을 받았지만, 또 다른 영화제에서 큰 상을 거머쥔 그! 정말이지 장이모는 상복이 많은 감독이다. 다시 말하자면, 장이모는 서구의 관객이 도취하게 되는 요소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서구에 중국의 무엇을 팔아야 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영리한 감독이다. 의 충격적인 화면으로부터 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원초적인 영상들을 가지고 이색 취미에 목말라하는 서구인들을 사로잡았다면, 은 리얼리즘과 표현주의를 넘나들면서 서구인들의 기호를 충족 시켜주었다.에서도 장이모의 초기작품과 같이 중국적인 이미지의 강렬한 마력은 포기되지 않았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초기 작품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그의 영화는 초기의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세계에서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세계로 변모해왔다.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자라는 악평과 중국 당국과의 마찰, 검열이라는 악조건, 그리고 과거 자신의 영화의 히어로인 공리의 부재...이런 악 조건속에서 아마추어 배우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있고 현실적인 중국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상당히 감동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에는 중국 공산혁명의 성과에 대해 진지하고도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래 당과 정부는 새로운 체제에 맞는 인간들을 길러내기 위해 종래의 교육제도와 교과서 등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제도는 도시 지역에서 효과를 보았으나, 정작 교육여건이 열악하였던 농촌이나 산간 벽지 지역에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농촌 교육의 현실을 깊숙이 분석한 사람이라면, 중국혁명이 오늘날의 농촌 교육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이모 감독이 종종 그랬던 바와 같이 이 영화에서도 권력 비판의 한 방식으로 시골 교육이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하지만 중국을 공부하는 중문학도인 나의 눈에는 이 영화가 그다지 감동적이지도 않았고,체제 비판적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잘 짜여진 '희망공정(希望工程)' 타큐멘터리를 보는 듯 했다. 물론 이 영화 속에서 장예모의 비판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비판의식은 웨이 선생의 노력이 장휘커의 귀향으로 마무리되는 순간, 활기를 잃고 만다. 사실,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나간 사람들 중, 일개인의 눈물겨운 노력 덕택에 귀향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웨이조차도 그 도시에 눌러 앉혀야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다, 교육 사정이 악화된 것은 국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그런 문제점을 제기한 부분은 거의 없다. 임시 교사의 월급은 잠시 학교를 비운 가오 선생이나 촌장이 책임져야 하고, 열악한 환경의 개선은 모금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언듯언듯 보이던 인민공화국에 대한 비판은 웨이선생과 장휘커의 감동적인 재회와 계몽적인 결말에 묻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이런 농촌을 위해 우리모두 힘을 모우자는 희망공정의 광고를 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