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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읍성] 대구 읍성
    대구 읍성1. 읍성의 흔적 찾기{대구의 옛이름은 달구벌이다. 넓고(달구) 평탄한 땅(벌)이라는 뜻이다. 금호강을 따라 동서로 가없이 펼쳐진 평야와 남북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앞산과 팔공산지로 둘러싸인 대구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에게 더 없이 넓고 평탄한 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달구벌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른다.대구의 중심에는 동성로(東城路)라는 거리가 있다.우리가 무심히 거닐며 쇼핑하고, 영화보고, 사람을 만나는 명실상부한 대구의 중심이다. 이름만 들어도 삶의 생동감이 펄펄 넘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풀어 보면 동녘 東 , 성 城 , 길 路 , 말 그대로 성의 동쪽에 있는 길 이라는 뜻이 된다. 지명의로 미루어 짐작컨대, 동성로 서쪽에 성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것이 유래가 되어 동성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그리고 성내 2동이란 지명이 있다. 성안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그리고 동성로 외에 남성로(南城路), 서성로(西城路), 북성로(北城路)도 있다. 웬만한 지명들이 성(城)과 관련되어 있다. 이유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듯이, 성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의 길을 따라 선을 그어보면, 마름모꼴의 도형이 된다. 성문만 있으면, 마치 성벽으로 둘러쌓인 지역 같다.성일 것 같은 지역의 모습과 방위를 나타내는 동서남북, 그 위치에 따른 길의 이름(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꼭 옛날 성벽 자리에 도로를 내고, 방위에 따라 이름을 붙인 듯하다.2. 읍성의 형태에 대하여지명으로 미루어 대구에도 성이 있었던 것 같다.만약 사실이라면, 어디에 있었으며, 언제, 왜 없어졌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구에도 성이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가 바로 옛 성터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성은 1906년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대구의 성은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떤 이유와 과정으로 우리 앞에서 사라졌는가?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구릉과 산에 산성을 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읍성의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그 중 북서쪽에 있던 망경루는 수도인 한양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었다.{이와 같은 사실은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70년 고종 7년에 성이 너무 낡아 성을 보수한 후 세운 수성비에도 성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이렇게 축성된 대구 읍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성이 파괴될 당시 성벽과 성루가 모두 없어져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을 1980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 내의 인터불고 호텔 뒤쪽에 복원해 놓아 작으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전술한 영영축성비와 수성비 이외에도 1900년대 초 우리나라를 여행하고 돌아간 프랑스인 바라 의 기행문에도 대구 읍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감사와 대담을 끝내고 나는 많은 수행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관이 타는 말에 올라 대구 시내를 관람했다. 그들은 나에게 높은 성벽을 구경시키려고 꼭대기에까지 올라갔다. 둥근 길을 따라 쌓여진 그 성벽은 북경의 성벽을 축소한 것과 똑같다. 북경에서처럼 그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병의 각 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그 성문에 있는 정자 안에 들어가면 과거 역사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들이 있다. 그 곳에 올라서 나는 가을 햇빛 아래 찬란한 색채를 발하며 전원 사이를 구비치는 금호강의 낙조를 감상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기념물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으나 양반들이 사는 도시의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서 있었다. 꼭대기와 가장 자리가 교묘하게 굽어진 지붕의 기와들은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울려 절묘한 선의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같은 양식으로 된 절 두 채와 한문을 가르치는 큰 학교와 관청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문이 꽉 닫힌 그 관청 속에는 여러 채의 건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1904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었고, 대구 읍성의 북쪽에 대구역이 건설되면서, 그 주변과 역에 가깝게 있던 북문과 동문 밖에 많은 수의 일본인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들 일본인들은 겨류민회를 조직하였고, 일제는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일본수비대 1개 분대와 부산경찰서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1906년에는 통감부의 지방기관인 이사청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이 때까지 대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로 성 내부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경제적으로 부면 성 내부의 상권은 대구 상인이, 성 밖은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 거류민회는 상권 확대와 그들의 거주 공간의 확보를 위하여 대구 읍성의 철거를 건의하였다. 1907년 당시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거하게 되었다.당시 박중양이 중앙에 보낸 문서에는 대구성의 철거 이유를ㄹ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성벽이 낡아 토석이 곳곳에서 붕괴되어 통행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니 성벽을 철거해 버리면 넓은 5간 길이 생기고 길 좌우에 보기 좋게 민가를 지을 수 있으니 대구부청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이 공사를 시행케 하고자 하오니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광무 10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중앙 정부에서는 이 공사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인 박중양은 임의로 공사를 시행하였다.그리하여 읍성의 철거는 1907년 3월 5일에 착수하여 4월에 완전히 이루어졌고, 그 성벽을 따라 도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도로도 성벽 자리의 일부만 도로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허물어진 성의 돌은 일부 민간건축에도 쓰였다. 최근 계명대 성서 캠퍼스 본관 주춧돌 공사에 쓰인 돌이 대표적이다. 이돌은 현재 계명대 동산의료원 홍보과로 쓰이는 북미 선교사 스윗즈의 사택 기초공사에 쓰였던 것이다. 열강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구한말 대구읍성 지역의 거주 분포에 대해 권영철 교수는 "중심가인 종로에는 중되었다. 1909년 읍성의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십자도로가 건설되었고, 이 도로 주위에 일본인 상점과 관공서가 입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대구의 관청이었던 여러 건물들이 헐리고 객사도 파괴되었다. 객사가 파괴되자 객사에서 개최되던 약령시도 현 위치인 남성로로 이전하게 되었다.읍성 내부에 살던 대구 부민들의 주거 지역이 일본인들에 의해 잠식되자 성 안에 살던 주민들은 남쪽과 서쪽의 구릉지대로 밀려나게 되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대구의 동북부 지대인 동성로와 태평로 일대가 대구의 중심이 되었다.대구를 통과하는 철도와 이를 연계하는 국도가 건설되면서, 대구는 주요 도시로의 이동이 쉬워졌고, 넓은 배후 지역에 대한 중심지 도시로서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러한 도시적 기반 위에 일본인의 유입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대구의 도시 구조는 그들의 거주와 생활에 맞추어 바뀌어 나갔다.대구 부민들이 많이 살던 대구 성 안과 성의 남쪽(남산동 일대)과 서쪽(대명동, 내당동 일대) 구릉 지대에는 전통적 도시의 평면 형태인 미로형의 구조가, 일본인이 거주하던 동쪽(삼덕동, 동인동 일대)과 북쪽 지역(대구역 일대)에는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른 직교형 가로 구조가 각각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에는 가로망 구조 등의 경관적 차이뿐만 아니라 기능상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이중적 도시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한편, 일제 시대는 대구의 도시화가 가속된 시기이다. 경부선 철도에 인접한 대신동, 원대동에는 정미소가 입지하였고, 동인동에는 제사 공장이, 태평로에는 연초 공장이, 칠성동에는 방직공장이 입지하는 등 북부지대는 대구의 공업지역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또한, 상업도 번창해서 북성로, 중앙로에는 중심 상가가 조성되었고, 서문시장, 남문시장, 동문시장 등의 재래 시장도 성장하였다. 이같이 대구는 거주, 상업, 공업 등으로 지역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자동차 교통의 발달은 대구의 도시화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1929년 대도시였고, 읍성의 4대문 중에서도 남문(영남제일관)이 가장 번성하였다. 또 남문 밖에는 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경부가도(京釜街道)가 있었다.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와 관련하여 대구에 대거 몰렸을 다시, 일본인들은 대구 읍성 남문 밖에 경부선 철도의 승강장이 생긴다고 낭설을 퍼뜨렸다. 이는 남문 쪽의 땅값을 급등시킨 후, 비밀리에 대구역 부근과 그 주변 도원동 일대의 수만 평의 땅을 염가로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주가 조작을 위해 작전을 쓴 것이다. 결국 대구 역사(驛舍)가 지금의 자리에 건설되면서 남문 방면은 일시에 쇠퇴하고, 북문 밖의 대구역 주변은 대구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지도에서 보면 경부선의 대구 구간은 고모역에서 바로 남문 쪽으로 건설되는 것이 최단거리로, 공사비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역 쪽으로 돌아간 것도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06년에 파괴된 대구 읍성도 암암리에는 일본인들이 매입해 둔 대구역 주변과 도원동 일대를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감언이설을 동원하여 철거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도원동은 동성로보다 2m 정도 낮은 저습지였기 때문에 대구의 하수도 물이 모두 이 곳으로 모여드는 못 쓰는 땅이었다. 이 땅을 일본인들이 공짜로 줍다시피 하여 구입하고, 파괴한 대구 읍성의 돌과 흙으로 매립한 것이다. 결국 왜적을 막기 위해 세웠던 대구 읍성이 왜적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이곳 범람원을 중심으로 대구의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대구 읍성도 이곳에 건설되었다. 대구의 도시화는 구읍성을 핵으로, 읍성 주변의 범람원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진행되었다.한편, 읍성이 파괴된 후 일본인들이 점차 성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성안에 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은 대구역 주변과 구읍성의 동문 주변(동성로 1,2가, 향촌동, 북성로 1가, 대안동, 동문동, 완전동, 화전동 등)이었다. 이들 지.
    인문/어학| 2003.07.12| 19페이지| 1,000원| 조회(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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